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잠 24:1-2)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살다보면, 부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살다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몹시 부럽습니까? 얼굴이 잘 생긴 사람, 얼짱, 몸짱을 비롯해서, 인기가 있는 사람들, 잘 사는 사람들, 남부러울 것 없이 잘 나가는 사람들,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마이클 잭슨의 죽음, 그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저의 또래들의 우상이었지요. 그의 노래를 듣고, 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서 자랐던 세대가 저의 또래인 듯 합니다. 그의 죽음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찌할 바 몰라,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삶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구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친 그의 삶을 보면서 무척 부러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부러워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의 성공, 출세, 명예, 소유, 건물 등을 보면서, ‘잘 살겠구나, 참 행복하겠구나, 저 정도면 걱정거리가 없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가까이 다가가서 속을 들여다보면, 때로는 부러워하는 마음이 다 사라지고, 오히려 염려하고, 걱정하고, ‘왜 그렇게 살까’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부러운 마음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변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이클 잭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엄청난 인기와 명예와 재물, 그러나 그러한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한 사인은 말할 수 없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약물을 과다사용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가 원했던, 그가 원하지 않았던 간에, 그의 죽음은 결코 그의 생애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우리를 부러워하면서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우리들에게 들려지고 있는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을 보면서, 그의 생애가 결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번 따라해 볼까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라”
우리들이 부러워해야 할 것이 있고, 부러워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머물러야 할 장소가 있고, 결코 머물러서는 안될 장소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부러워하며,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1-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아멘.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이와 비슷한 성경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잠언 23:17-1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아멘.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삶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육체적으로는 아픔이 떠나지 않고, 정신적으로 매일 걱정거리, 고민거리에 파묻혀 살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붙잡고,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에게는 장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은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 없는 삶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복된 살아야 합니다.
잠언 24:19-2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아멘.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라”,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촌이 땅을 싸도 배가 아픈데, 이해타산에 밝고 약삭빠르게 처신하는 자들이, 땀도 안 흘리고, 쉽게 돈을 버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한 마디로 하나님도 안 믿고,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인데, 금방 대리가 되더니, 과장이 되고, 남들보다 더 빨리 승진도 잘 하고, 집도 금방 금방 큰 집 장만하고, 17평 전세에서 32평 아파트로 이사가더니, 50평 아파트로 이사 가서, 집들이 한다고 부르고, 변두리에 땅을 사 놓았더니 가격이 몇 배로 뛰었다고 하고, 아이들은 왜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뭔가 나쁜 짓을 했을거야’라는 그런 맘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듭거듭 우리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고,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요한 이유를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는데, 행악자에게는 장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등불은 꺼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장래가 없고, 등불은 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21:4절을 보면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고 했습니다. 눈이 높은 것은 죄가 됩니다. 마음이 교만한 것도 죄가 됩니다. 그리고 악인이 형통한 것도 다 죄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악인이 형통한 것은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악인이 형통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악인의 형통함입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갈등합니다. 이러한 고민과 갈등은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고민이거나 갈등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고민이요, 갈등이었습니다.
시편 73: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73편은 고라의 자손 아삽이 지은 시입니다. 아삽을 비롯한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찬양대의 일을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담당하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줄 알았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정결하게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물질의 풍성함 가운데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 남을 속이는 사람들, 또 성전에도 잘 안 나오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잘 나가는 것을 보고,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보고, 그의 마음이 질투심으로 부글부글 끊어올라,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생각하다보니,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도저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왜 악인이 형통해야 합니까? 왜 그들이 잘 나가는 것입니까?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삽의 고백이 진실한 고백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잘 나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삽처럼 고민도 하고, 갈등도 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점을 보면서 교훈도 얻지만, 나쁜 것을 보면서도 교훈과 유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아삽은 “왜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형통한가”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그의 걸움이 거의 미끄러질 뻔 하였지만, 그는 여러 가지 모순과 갈등 속에서 고민하다가 마침내 그는 선포합니다. “이 세상은 내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잘 살지 못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 악인의 형통함이 있습니다. 왜 저들은 잘 나가는 것입니까?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악한 사람들이 세상 일에 형통하여 잘 되는 것 같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아 보려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이 병이 들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즉, 택한 백성에게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를 풀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의 한정된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라는 의심이 들 정도의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만이라도 우리가 확신한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문제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형통해 보이고,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받고 있지 않는 특별한 은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형통함을 보면서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아삽의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확고 부동한 신앙의 자리에 서 있지 아니하면 우리가 실족하고, 우리의 걸음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는 시험이 닥칠 때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믿음을 놓치지 않고 꼭 붙잡고 있습니다.
옛날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가령, 욥을 보십시오..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그 원칙을 세웠습니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을 하나님은 아신다”라고 생각할 때, 그것 자체가 욥에게 위로가 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73:4-5절 말씀을 보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아삽은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슬프게 보았습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심지어 선한 사람이 겪는 고난도 없고, 타인과 같은 재난도 없단 말입니다. 마치 어떤 특권에 의해, 모든 사람이 당해야 하는 고통에서 면제 당한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는 말입니다. 그 악한 사람들은, 오히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모두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편하게 살며, 즐거움으로 목욕을 합니다. 모든 소득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많이 생깁니다. 그러니 이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교만해집니까?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나님은 있지도 아니 하려니와, 있다고 해도 알지도 못하는 무용지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말하자면 이들은 다 악인인데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날로 더해 가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악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오히려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으로,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만만합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머리를 믿습니다. 자기의 힘을 믿습니다. 자기의 뒷배경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더욱더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궁색하게 살아. 하나님이 잠 자나 보군.’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진짜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왜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신다고 해 놓고, 왜 궁색하게 살도록 하시지. 왜 안도와주시지. 어디 가서 주무시고 계시나’라고 생각이 들 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사람은 너무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바른 마음을 가지는 일은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섬기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은 때때로 “모든 것이 헛되다” 그리고 “신앙은 아무 유익이 없다. 교회 다닌다고 무슨 유익이 되나”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받아 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오히려 형통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고민하다가 “내가 어찌 하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 즉,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의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인은 악인의 형통과 번영을 보며, 마음속에 심한 갈등을 가졌으나, 그의 신앙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위치를 지키며 승리를 얻었습니다.
사실 그는 내가 마음을 정히 하고 산다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런 생각이 나오려는 입을 막았습니다. 꾹 참았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으로 넘어질 뻔 하였고, 미끄러질 뻔 하였지만,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부러워하지 않고, 묵묵히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가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시 73:16-18)
시인은 중간과정을 본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을 보게 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형과 동생이 있었습니다. 형은 캐나다로 건너가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 모든 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동생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33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고 의술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빗 리빙스턴이라는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크게 쓰임받다가, 거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모든 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그의 형의 이름을 아십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형이 있다는 사실도 잘 모릅니다. 그의 형의 무덤 비문에는 뭐라고 쓰여 있을까요?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 형의 무덤”이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시인은 마침내 승리의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그렇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고, 그의 곁에 있으려고 한다면, 당장은 뭔가 유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유익은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 때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장래가 보입니다. 소망이 보입니다.
여러분!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시편 37:1-2절 말씀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아멘.
악인의 형통함, 악인의 번영은 풀의 무성함 같고 푸른 채소와 같아서 쇠잔할 때가 옵니다. 소나무가 뻗어 나가고 호박 넝쿨이 번성한다고 부러워합니까? 아닙니다. 악인의 번영이 이와 같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베어지고 말 것입니다. 저희가 기세를 부리는 것은 잠깐이요, 애곡과 비탄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너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어주실 것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시인은 말하기를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시 37:34)라고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같은 배를 타고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 은퇴한 선교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환호하는 환영인파들, 군악대, 빨간 양탄자, 그리고 언론이 대통령을 뜨겁게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교사님이 배에서 내릴 때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 때문에 그는 자기 연민과 분노를 느끼며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집에 온 것이 아니지 않니?”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길을 다 달려온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달려가야 할 길이 많이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의 믿음의 길 위에,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부러움의 대상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고, 그들이 머물러 있는 자리에 함께 있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자리에 머물며, 경건하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과 사는 것을 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줄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누군가 우리 교회를 볼 때,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 교회가 아니라, 부러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 모임에 참석하고난 다음, 바로 그곳에 큰 집, 작은 집, 이모집, 고모집이 다 있지만, 보고픈 아쉬운 마음을 남겨놓고, 내려간 길에 그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보성에서 목회하고 있는 후배 목사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정을 늘 생각해 주고, 기도해 주고 해서, 별 부담이 없는 그런 후배 목사님입니다. 교회에 도착하여, 사택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젊은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인데, 매주 시골교회에 내려온다고 합니다. 교사로서, 찬양대원으로서 봉사한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그들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젊은 청년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러웠습니다. 시골교회이지만, 일 년에 한 두 차례, 소를 잡아 잔치를 한다고 했습니다. 이웃에 있는 목사님들을 초청하여 대접하고, 좋은 부위는 별도로 놔두었다가, 가실 때 포장을 잘해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에는 쌀이 많이 들어오는데, 그 쌀은 쌓아 놓지 않고, 농촌이지만, 농사를 짓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다 나누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떠날 때, 쌀도 주시고, 토마토도 주시고, 감자도 주시고, 김치도 주시고, 이것저것 챙겨서 주셨습니다. 그렇게 챙겨주시는 후배 목사님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 부러움을 가지고, 부랴부랴 우리 교회를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비도 오고, 졸음도 밀려오고 해서, 휴게소에 들려 조금 자다가 달리고, 자다가 달리고 해서, 새벽 2시 30분이 넘어 교회에 마침내 도착을 했고, 시골서 주신 것을 옮기고, 씻고 나니, 3시가 훌쩍 넘어 버렸습니다. 한 시간 정도 설 잠을 자고난 뒤,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애들 학교 보내고, 옥외광고하시는 분하고, 아침 9시에 약속이 있어, 그분을 만나고 난 다음, 비로소 시간이 나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러워하면서 살 것인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인가”
“받으면서 사는데 만족할 것인가, 주는 기쁨을 누림으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성경을 보니, “주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11:1-2절 말씀을 보니,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내 것으로만 움켜쥐는 교회가 아니라 나누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키우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른 교회를 부러워하면서 사는 교회가 아니라, 다른 교회들에게 부러움을 주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주님만 바라보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주님만 의지하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밖에 모릅니다. 제가 경제에 대해서 알겠습니까? 교육에 대해서 알겠습니까? 그런 것은 알고 있다고 해도, 일반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1-6)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장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삶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평탄한 길, 형통한 길을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장래가 있고, 소망이 있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우리를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