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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1-12)-20090809

작성자김종민|작성시간09.08.16|조회수428 목록 댓글 0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1-12)

 

한 주간, 어느 곳에 계셨습니까? 평안하셨습니까? 불안하셨습니까?

예를 들어, 어느 집을 방문하면 마음이 왠지 모르게 편안해지는 집이 있습니다. 반면에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집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집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멋지고 좋은 집이라 할지라도 주인이 불편하면 그 집에 잠깐이라도 머무는 것이 몹시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집이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라 할지라도, 그 주인이 맘에 들면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를 못합니다.

가까운 이웃, 친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픈 이웃이 있고, 가 보고 싶은 친척집이 있습니다. 가기는 가는데 왠지 모르게 불편해하는 친척집이 있고, 반가운 친척이 있습니다. 돌아서는 것이 아쉬운 곳이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만났을 때, 불편함을 느끼면 안되겠지요. 최대한 편안한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입니다. 뭔가를 잘 대접해 준다고 해서,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분위기가 좋다고 편안한 것도 아닙니다. 좋은 환경을 마련해준다고 해도 불편합니다. 불편함을 느낄 수 없도록 그런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여러분! 주님 안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교회 왔을 때 편안하십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29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주님 안에 오라고 부르십니다.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놀라운 결단입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 주님의 말씀처럼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아멘.

 

아프리카의 성자 프랜시스가 어느 날 제자 한사람이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메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통이 흔들릴 때마다 물이 출렁거리며 넘쳐흘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통에 나무토막 하나를 넣고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물통이 무거울 텐데 거기다 나무토막까지 넣었는가”

그의 대답은 “흔들리는 물통에 나무토막을 넣으면 물이 쏟아지거나 넘치치 않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깨달은 바가 컸다고 합니다.

내 맘이 낙심될 때, 내 영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심령 속에 예수님의 나무 십자가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평안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참포도나무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참 쉼을 얻을 수 없고, 평안을 맛볼 수 없고,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만남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참포도나무이시다.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다. 나는 주님 안에 있어야 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주님 안에 있을 때 만족할 수 있다. 나는 주님 안에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주님 안에 있을 때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주님 안에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주님 안에 있으면, 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살아야 하는데,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데, 행복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할 때가 있습니다. 힘든 일이 찾아옵니다. 뜻하지 않는 아픔이 다가옵니다. 생각지 못했던 어려운 일이 발생합니다. 예측할 수 없었던 큰 시련이 닥쳐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습니다.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종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재물이 다 약탈당하고, 자식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욥 자신도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욥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고통이요, 아픔이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하나님을 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도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흔들림이 없는 믿음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만 주님을 섬기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설령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화가 르누아르는 본래 도자기 공장의 공원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탓으로 제대로 미술을 공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틈틈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그림이 불란서 화단의 인정을 받아 화가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한 신경통으로 손을 거의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붓을 팔목에 붙들어 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 날 르누아르가 그런 모습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바라본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런 손으로 어떻게 명작을 그릴 수 있습니까?”

르누아르는 대답했습니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은 눈과 마음으로 그립니다. 교만한 붓으로 그린 그림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 고통이야 말로 내게는 소중한 스승이 됩니다”

그림뿐이겠습니까? 모든 예술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고, 삶이 그렇고, 신앙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고통과 연단과 시련을 통해, 철이 들고,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신앙이 조금씩 자라게 됩니다.

욥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과 고통과 실패를 겪고난 후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그의 신앙이 한 단계 더 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채석장에 나뒹구는 돌멩이를 그냥 놔두면 돌맹이에 불과합니다만 그러나 그 돌멩이를 때리고, 깨고, 다듬으면, 하나의 아름다운 조각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좋은 나무를 만드시기 위해 때리고 다듬고 그리고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나무되라고 가지치고 가꾸고 키웠는데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는 찍어 불에 던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좋은 나무 만들기를 포기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예수 안에 있습니까? 예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내가 예수 안에 있으면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이유는 주님이 다 처리하시고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걱정거리, 고민거리가 다가와도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금방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엘리자 히윗이 시를 쓰고 커크 패트릭이 곡을 만든 찬송입니다. 찬송가 370장입니다.

1.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2.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3.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4.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후렴)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주님 곁에 있느냐, 멀리 있느냐? 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어도 행복한데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그 행복을 무엇과 비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 늘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평안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3-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멘.

 

가지의 생명은 나무에 붙어있어야 유지됩니다. 꽃꽂이를 위해 꽃가지를 꺾어 병이나 수반에 꽂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는 얼마 지나면 시들어 버립니다. 말라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무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산등성이나 산자락에서 크는 특이한 작은 나무들을 화분에 옮겨 가꾸는 것을 분재라고 합니다. 산이나 들에서는 비바람 맞고 크면 죽지 않지만 분재는 좀처럼 키우기가 어렵습니다. 걸핏하면 시들고 맙니다. 이유는 땅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떠나면 죽습니다. 예수 떠나면 되는 게 없습니다. 떠났는데도 사업도 잘되고 몸도 건강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꽃꽂이에 불과하고 분재에 불과합니다. 오래 못갑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어요

동남풍이 불어라 서북풍이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린다.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아멘.”

옛날 옛적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입니다만 그 뜻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교훈으로 다가섭니다.

 

슈바이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학자이며 음악가입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오지에서 생명 바쳐 일하고 계십니까?”

슈바이쳐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사랑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더군요. 그래서 행동으로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를 누가 멋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예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6-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멘.

 

주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고 했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사랑을 맛 볼 수 없습니다.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30:10절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늘 기도했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도 버리고, 형들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장인도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붙들어 주셨고, 은혜 주셨고, 그를 도와 주셨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시 27:9)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자연스럽게 주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내려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주로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요즘 새벽에 계속하여 잠언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 며칠 전 아굴의 기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아굴은 두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첫째 기도제목은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 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기도제목은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굴은 두 가지를 주님께 구하였는데, 다윗은 몇 가지를 주님께 구하였을까요? 시편 27:4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오직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주님 앞에 몇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을 읽을 때,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잘못 구하면 어떡하지? 이기적으로 구하면 어떡하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구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개인의 욕심이나 이기심으로 구할 수 없게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이뤄주십니다. 그래서 기적은 날마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 것나 구하십시오.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여 주십니다. 기도할 것은 기도하게 하시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게 하시고, 해결해야 할 것은 해결하게 해 주시고, 모든 것의 교통정리를 다 해 주십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오기만 하면 주님이 다 해 주시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려고 왔는데, 막상 뭐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도 상관없습니다.

 

로마서 8:26-27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아멘.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9)고 하셨습니다.

 

9-1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아멘.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고 허무하지만,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늘 사랑을 행하여 보여 주셨고,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병을 치료해 주셨고, 말씀을 가르쳐 주셨으며,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 주셨고, 죽기까지 사랑해 주셨던 예수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도 병을 고침 받고, 영혼이 풍성해지며 육신의 필요가 넘치도록 채워질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과 함께 하면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십시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1950년대 미국 헐리우드 영화계를 주름잡은 배우 가운데 조지 센더스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자살 뉴스가 신문과 방송뉴스로 전해졌습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내가 자살하는 이유는 따분하고 살 만큼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권력, 돈, 명성을 얻어도 따분한 사람이 있고, 그런 것들이 없어도 삶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가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고통과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픔과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절망과 좌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험과 환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면, 주님의 십자가 안에 머물러 있다면 두렵거나 겁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따분하지 않습니다. 지루하지 않습니다.

시편 16:11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아멘.

스바냐 3:16-17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주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주님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사랑을 믿고,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면, 주의 앞에 있는 충만한 기쁨과 주의 오른쪽에 있는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함으로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이 땅에서 맘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 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를 많이 듣지만, 오직 주님의 사랑만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 큰 은혜와 사랑 안에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늘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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