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새의 줄기에서(사 11:1-9)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남측 관할 구역에 위치한 “평화의 집”에서, 4월 말경에, 남북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5월 안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김정은이 대북 특별사절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우리가 미사일을 발사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새벽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개최하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오늘 결심했으니, 이제 더는 문 대통령이 새벽잠을 설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남북이 합의한 6개항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 의지 분명, 군사위협 해소되고 체제안전 보장되면 핵보유 이유 없음, 대화 지속되는 동안 핵실험, 탄도미사일 발사 등 전략도발 하지 않고 핵무기, 재래식 무기 등 남측 향해 사용 안함”이라는 항목을 보면서, 정말 합의된 내용들을 북한이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으로 기대해 보기로 했습니다.
전쟁이 아닌 평화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영국 공영 방송인 BBC는, 속을 알기 어려운 공산 국가와 대화를 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도박이라고 전제한 뒤, “만약 문 대통령이 핵 전쟁의 위협을 감소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노벨 평화상을 탈 수도 있지만, 실패하면 다시 벼랑 끝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올해 1월 셋째주일에 설교하면서, 어떤 분이 “김정은이 왜 무자비한 숙청을 하는 것일까?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유학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물을 먹었다. 김정은이 지금 숙청하는 사람들은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이다. 김정은은 그들을 다 숙청하고, 통일의 깃발을 높이 들 것이다. 남북의 통일은 김정은이 이룰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면서, 실제로 그분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정말 그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잘 되면, 올해 노밸 평화상은 문제인, 김정은, 트럼프, 세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주일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사야 2:4절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여 주셔서, “모든 무기들을 농기구로 만들고. 다시는 핵미사일을 개발하거나, 발사하거나 하는 전쟁 연습을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인데,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 새 일을 행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마 15:22)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도, 빌라도는 명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 19:19)이라고 쓰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이를 일으켜 세울 때에도,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누구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까요?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아무 힘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메시야, 그리스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도, 큰 의미를 지닌 말이 되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아멘.
이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메시야”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구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부르든, 똑같은 말입니다.
여러분!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새”는 누구입니까?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왕족이 아니었습니다. 이새는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 사는 평범한 목자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무 미천한 존재였습니다. 낮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미천한 목자의 아들이 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이새의 줄기에서, 어떻게 메시야가 태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이미 다윗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지금까지 유다의 왕위를 이어오고 있는데, 왜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지 않고, 즉 왕족의 후손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을까요?
여러분! 마태복음 1: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마 1:2)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족보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6)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족보의 끝부분에 가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이새와 다윗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 누구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다윗 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는 모든 원수들을 무찔려 주셨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왕에게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말씀하셨고, 더 나아가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윗이 아니라, 그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성전을 짓고 싶어하는 다윗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그 마음을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예루살렘 성은 주전 588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멸망을 하게 되었고,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다윗의 왕위는 20대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윗과 그의 자손들이 다스리는 왕국은 이 땅에서 무너졌습니다.
정말 끝난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다윗의 줄기에서 메시야, 만왕의 왕이 오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나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새는 위인도, 영웅도 아니었습니다. 미천한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이새의 후손인 목수 요셉의 계보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목수 요셉! 그 역시 당시 사회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제사장이나 율법학자, 서기관, 랍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뛰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평범한 목수였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태어나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으며, 사셨습니다.
이사야 53:2절을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는 이 예언의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나셨고, 나사렛 사람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람들에게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천한 몸을 입고 오셨지마는, 새로운 나라를 다스릴 왕으로 오셨습니다.
로마서 14:17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궁궐에서 태어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그를 기다리는 백성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조롱하고, 멸시했지만,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셨고, 우리의 구원자요, 메시야요,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 늘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아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늘 들어가셨던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성경을 펴서 읽으셨는데, 이사야 61장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문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 40일 금식기도하실 때에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훗날, 베드로 사도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고 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과 늘 함께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3-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아멘.
이사야 선지자가 살던 당시, 사회는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사 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은 악한 법령을 만들어,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였습니다.(사 1:23)
그들은 동방 풍속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습니다.(사 2:6)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집안에 가득했습니다.(사 3:14)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사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하스 왕에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사 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사 7:12)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하스 왕은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하여, 남유다를 침공하려는 아주 위급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 왕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 그 연합군을 물리쳐 줄려고 하셨는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이미 앗수르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고, 도와달라고 요청을 한 상태였습니다. 앗수르가 남유다를 도와줄 것이므로,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남유다는 안전하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아하스 왕의 대답을 들은 하나님은 마음이 너무 아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하스 왕과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사회는 죄악으로 가득찼습니다.
우상 앞에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비롯하여, 패역과 학대, 뇌물, 비래, 폭행, 강도 등 온갖 죄악이 난무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9:6-7절을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버지께서 심판하는 권한을 내게 주셨다”(요 5:22, 2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5)
그들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물러갔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기로 말한다면, 주님 앞에 설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예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말씀은 단지 심판만 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보존하신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의 심판의 결과는 어떠할까요? 예수님께서 다스리고 보존하시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6-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멘.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남과 북 사이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처를 주는 자도, 상처를 받는 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짐승, 짐승과 짐승 사이의 모든 적개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더불어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함께”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노벨이란 사람이 쓴 ‘조금’이라는 동시가 있습니다.
“설탕을 조금만 넣어도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비누를 조금만 써도 몸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햇볕이 조금만 비춰도 새싹이 힘차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연필이 조금만 남아도 아름다운 글 한편을 쓸 수 있습니다. 양초가 조금만 남아도 주위에 환하게 비출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맛과 그 힘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도 잘 쓰여지면 얼마든지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조금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결국은 행복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조그만한 것이 하나님께 연결됐을 때, 맛을 냅니다. 불을 밝힙니다.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을 환하게 비출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배려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평화를 전하셨듯이,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서로 상처와 아픔을 주지 않고,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조금 더 서로 용서하고, 서로 배려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주님의 평화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하여 주셨사오니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을 본받아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다스림 속에 살아가므로, 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