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 11:17-27)
할렐루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어도 살고, 아니 영원히 죽지 않는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사로는 누이 동생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나사로는 그 자매들의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도 받았습니다. 또 마리아는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여인으로 사랑과 헌신으로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가정을 사랑하셨습니다. 남달리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병에 걸리자 마리아와 마르다는 걱정과 근심에 싸였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치료의 방법은 다 써보았지만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그러나 갑작스럽게 나사로가 죽어버리니 그들의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인간의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불행을 당한 나사로의 가정을 도와주고 행복을 되찾아 준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자명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요,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진정한 삶의 소망을 주시는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은 오라버니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께서 오셔서 오빠의 병을 낫게 해 주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메시야이신 그 분이 행하시는 일들은 팔레스틴 지방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라버니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주님께 급히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도 주님은 늑장을 부리며 속히 오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빨리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치료해 주심으로 모든 염려, 걱정, 슬픔 없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리라 생각했는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 11:6)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맨발로 뛰어오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회피하며 무려 이틀이나 지체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배신감마저 느낍니다. 행복에 대한 소망이 사라집니다. 치료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이 사그러집니다. 그러나 아직은 꾹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요 11:17)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3번에 거쳐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의 경우에는 야이로가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간구할 때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하러 가시는 도중에 12년간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을 붙잡았고, 그 사이에 아이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다음으로, 살리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장지에 가는 도중에, 관속에 있는 자를 살리신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후상의 문제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장례를 치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속에 있는 시신은 죽은 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보면, 이 두 가지의 기적들과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시체가 되어 썩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주께서 이 절망의 현장에 등장하십니다. 3일장 혹은 5일장을 치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유대인들도 사람이 죽어, 이틀이 지나 시체가 썩으면 완전한 사망으로 처리합니다. 주님은 그 날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장례가 끝난 후, 문상객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이 극한 절망의 순간에 예수께서 실로 엄청난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부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죽음의 극복은 불로초를 먹이는 식으로 단순히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으로 인한 부활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시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우리는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 소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소망은 죽음 저 건너편에 존재하는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 사람을 실제로 살려 내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으로써 어린 소녀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청년도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장년 세대에 속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확증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확신한다면, 죽음은 안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부활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루 해가 질 때, 우리가 침상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은,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해가 떠오른다. 그리고 빛나고 새로운 내일이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전제될 때에만, 우리는 ‘죽음은 안식이다’라는 명제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진정 사실이라면, 먼 훗날 우리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생명의 기적이었듯이,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능력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부활의 사건 역시, 엄청난 생명의 기적입니다.
이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의 삶에서 느끼는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안식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부활의 메시지!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소망은 죽음 그 건너편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소망은 죽음 이 편에도 존재하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 외에 또 하나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르다의 죽음입니다. 물론 마르다가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마르다의 죽음은 정신적인 혹은 영적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다도 죽어 있는 듯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녀의 삶은 이제 슬픔입니다. 절망에 삼키운 바 되었습니다. 기쁨도 평안도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를 상실했습니다.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사람과 같은 마르다의 모습입니다. 사실 마르다는 건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믿고 있었던 진리가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마르다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원망스런 푸념이며, 절망적인 독백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아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계속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마르다의 고백을 보면, 22절에서 마르다가 한 말이 진정한 신뢰에서 우러나온 고백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역사가 끝나는 그날,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성경에 약속한 그대로 부활된다는 그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다고 말해 놓고서,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마르다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든지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의 ‘구체적인’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도, 이와 동일한 고민에 싸여있었던 한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도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예배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부분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찿으시느니라”(요 4:23)
“지금 이 순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있다”
예수님의 이 메시지에는 참으로 신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앞으로 언젠가 오실 메시야는 믿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삶 속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주님은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나 마르다와 같이, “저는 마지막 날의 부활, 그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통해서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하고 고백하지만, 그 신앙은 현재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현재의 절망은 치료하지 못하는 마르다의 신앙입니다. 이들은 천국에 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삶에는 희망과 승리와 능력과 치유가 없습니다. 현재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활의 신앙은 미래의 신앙이자, 현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은 살겠지요. 그러나 지금 현실은 절망이잖아요. 지금은 어둡고 슬프고 죽음이잖아요”
이것은 현실 직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르다의 부활 신앙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봅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절)
주님은 먼 훗날 다시 오실 그때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장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일입니다. 나중에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절)
여기에서 ‘살겠고’하는 말은 원래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죽어도 그는 여전히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끊어질 수 없는 교제 속에서 날마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좀더 구체적입니다. 즉,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영원한 생명이, 지금 나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써, 오늘의 슬픔과 좌절과 불신앙을 극복하고, 승리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의 슬픔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이 부활의 신앙은, 현재적인 승리의 체험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까?
살아 계신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오늘의 삶이 여러분을 좌절과 어둠과 절망에 몰아 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을 치유하시며,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주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역경이 우리의 삶을 사납게 뒤흔들고,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살아계신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실 교리적으로 알고 주장하기는 쉽습니다. 마지막 날의 부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천국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으로서, 지금 나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으십니까? 삶에서 경험하는 온갖 부조리와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허무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을 믿으십니까?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질병이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 죽음을 보았습니다.
나사로와 같이 몸이 죽은 사람의 죽음과, 마르다와 같이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소아시아에 있던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지적과 같습니다.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문제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생명이 있습니다. 믿어야 부활이 있습니다. 믿어야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도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더디 이루어져도 주님이 아시고 계시는 것을 믿습니까? 지금은 모르지만 주님 앞에 가면 분명히 알 것을 믿습니까?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것을 믿습니까?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믿습니까?
누가 예수님의 부활을 내 것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다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부활, 나의 생명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의 불신앙이 죽음과 같은 이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이제 부활이 주님을 다시 바라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신뢰합니다.
제 모든 것을 기꺼이 내 맡길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 주님을 의뢰하여 생명을 얻은 산 성도답게 기쁨과 환희와 능력 속에서 제게 주어진 삶을 걸으렵니다. 주님, 제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