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 3:14-17)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입니다.
한번 따라해 볼까요?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여러분! 최근에 엘리베이터를 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4층엔 뭐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아라비아 숫자 4? 물론 아닙니다. 죽을 4자는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4를 의미하는 영어표현인 four(포)를 줄여서 F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엘리베이터 숫자 속에서라도 죽을 사자를 쓰지 않음으로써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떠하십니까? 기쁨과 즐거움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어서 어찌할 바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좌절과 낙담, 근심과 걱정의 긴 터널 속으로 자꾸만 빠져 들어가고 계십니까? 소망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자꾸 자꾸 절망의 깊은 우물에 빠져들고 있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 49:16-17)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바닥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자 할 때 적는 곳이 바로 손바닥입니다. 여러분! 왕년에 컨닝할 때 기억나십니까? 주로 어디나 적습니까? 볼펜으로 깨알같이 손바닥에다 적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확실하게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손바닥에 적으셔서 항상 지켜 보호 인도해 주시겠노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
그런데 여러분! 왜 그렇게 기가 죽었습니까? 기운을 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험하게 요동친다 할지라도 근심, 걱정, 염려일랑은 다 붙들어 매시기 바랍니다.
1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아멘.
“그 날에” 당시 시대적 상황은 사람들의 기를 죽이는 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이 말씀을 다른 번역을 보면, “기운을 내라” “기죽지 마라” “힘을 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아멘.
여러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에 노래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시대적인 배경은 요시아 왕의 통치시대를 말합니다. 요시아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폭정을 한 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태양신과 바알신이 득실거렸고 우상숭배와 매춘행위가 나라 안팎에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국민들은 한결같이 가난과 사회적 혼란으로 저마다 낙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도탄 속에 겨우 여덟 살 요시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 뜻있는 사람들은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풀이 죽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어리고 철없는 임금에게 나라와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 것인가 조마해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밝아오는 구원을 바라보고 기뻐하라는 겁니다. 오히려 노래하라는 겁니다. 기죽지 말고, 기를 펴고 살라는 말입니다. 위축되지 말고 힘과 용기를 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시온이란 유다를 의미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했으며 메시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믿음의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기운을 내라.’ 이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희망의 메시지는 13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부패 상황 속에서 정절을 지키고 살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을 버리고 절망에 빠져 살던 그때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신앙을 움켜쥐고 희망의 밧줄을 놓지 않았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불러 멋지게 이방선지자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꺾일 줄 몰랐고, 백성들은 회색지대에서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무서운 탈진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넋두리를 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이 들려주신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남은 자 칠천을 예비했다. 결코 너는 혼자가 아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은 내 인생에 맞장구쳐 주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창을 하는 내 삶에 고수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내가 울 때 함께 우시며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노래할 때 함께 기뻐하며 춤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맞장구쳐 주는 곳이 아니라, 내 기를 완전히 꺾어 버릴 따름입니다.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를 신혼부부가 열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색시가 애교를 부리면서 “자기야, 13번처럼 섹시해서 나랑 결혼했어? 아니면 25번처럼 늘씬하고 이뻐서 결혼했어?” 이렇게 물었더니 남편 왈 “자기의 바로 그 유머 감각 때문이야” 그러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맞장구쳐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아픈 백성을 치유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고 아름답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신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면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리고 적을 쫓아내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아멘.
왕 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을 무찌르시고 연약하여 범죄한 백성들에게 사면장을 내리십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투사처럼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전선에서 힘이 없어 쓰러지고 있는 동지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살지 말아라. 하나님의 백성은 위축되어 살아서는 아니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서 하나님은 연인처럼 찾아와 주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를 구원하리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1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멘. 이 얼마나 달콤한 사랑의 고백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반드시 힘을 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절망의 골이 너무나도 깊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 기운을 내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아주 자세히 본문말씀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므낫세와 아몬의 끔직한 죄를 어린 왕 요시아에게 형벌로 내리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은 형벌 탕감선언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왜 위축되고 움츠려 듭니까?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식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으며, 내가 당연히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갖지 못했으며 양심을 위반했다는 이 죄의식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내게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질병이 찾아 올 때에,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내게 형벌로 내린 무서운 아픔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좌절하게 되고 우리는 삶의 의욕과 용기를 상실합니다. 이 환란이 행여 하나님의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이 아닌가? 움츠려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자녀들에게 스바냐 선지자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네 형벌을 제하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아 기운을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의 단편집 가운데 “세속의 신전”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입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그는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야, 아무개날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약속한 날 약속한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800여명의 젊은 남자가 저마다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헤밍웨이 자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죄사함 받은 사람에겐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우리를 정죄하는 어떤 소리에도 자유롭습니다.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위축되어 풀이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내십시오. 기죽어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형벌을 제거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수영하면 박태환 선수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 나이 이상 되는 분들은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병을 가진 조오련이란 수영 선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은퇴한 후에도 대한해협(부산 앞바다)에서 쓰시마섬까지 48km를 13시간 16분 동안 수영을 해서 횡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몇 해 뒤에 도버해협, 영국과 불란서 사이도 역시 수영으로 횡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수영을 할 때 배를 이용해서 그 주변에 큰 그물을 쳐놓았습니다. 그물 속에서 계속해서 수영을 하는 겁니다.
먼 바다를 수영하는 선수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상어 떼입니다. 그래서 선수로 하여금 상어 떼에서 보호하고, 자유롭게 안심하고 오로지 수영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큰 그물을 주변에 둘러쳐 놓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바냐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그물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어 떼와 같은 원수나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그물이 되시고, 우리의 산성, 우리의 방패, 우리의 요새가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죄를 용서하사 참 자유함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고서 기뻐 찬양하며 세상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운을 내야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품인 “닥터 지바고”를 보면,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장군과 타냐와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타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냐?” 하니까 타냐가 말하기 싫은 태도를 지으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혁명 중에 길거리는 불바다가 되고, 군중들의 요란한 소리로 복잡한 상황에서 아버지와 헤어졌어요.”
장군이 다시 묻습니다. “정말 아버지와 어떻게 헤어졌어? 솔직히 한번 말해봐라.”
그러자 타냐가 대답하기를 “사실 아버지가 내 손을 놓고 빨리 달려 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놓치고 말았어요”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딸의 손을 붙잡고 도망치다가 딸의 손을 놓고 혼자 달려가는 바람에 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군이 타냐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사실을 말해주마. 도망친 로마노프는 사실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란다. 너의 아버지는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라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복잡해도 결코 네 손을 놓치지 아니 했을 것이란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때서야 타냐는 로마노프가 자기 아버지가 아니고 닥터 지바고가 아버지인 것을 느낍니다. 진짜 아버지라면 어린아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혼자 내동댕이치고 도망칠 것이 아니라, 안고라도 뛰었을 것입니다. 그는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내 동댕이치고 혼자 도망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을 놓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이 있고 힘이 있어서 우리를 붙들고 있는 한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능히 없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보다 더 진한 사랑을 가진 진짜 아버지이십니다. 육의 아버지보다도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손을 하나님 그 분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나 혼자 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등에 업고서라도 완벽하게 책임져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한 부흥사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마다, 그 표어는 언제나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만을 가르치십니다. 대단한 부흥사도 대단한 설교가도 아닌데,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라는 이 메시지만 한 주일동안 가르치고 나면 사람들의 삶이 바뀌어 집니다.
작은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무거운 짐을 가슴에 끌어안고 몸부림칠 때, 외로이 고독에 지쳐 쓰러지고 있을 때,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싶은 깊은 유혹을 느낄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금 기운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능히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과 늘 함께 계실진대 우리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우리는 다시금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늘 언제나 하나님의 기쁨이요 자랑거리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죽지 말고 오히려 기운을 내야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아직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이 아직도 사랑하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볼 때, 가슴 부풀어 하시고, 따뜻한 연민과 애정을 느끼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OOO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OOO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OOO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말씀입니까? 여기 OOO 대신 여러분의 소중한 이름을 넣어도 확실한 진리의 말씀임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은 이 땅의 권세자나 부자나 유명인이 아닙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또 잠잠히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강력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전되어 벌써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정면으로 마주치거나 강한 성령에 직접적으로 부딪혔다면 우리는 숨도 못 쉬고 죽었을 것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내게 꼭 필요한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십니다. 즐거이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 때문에 기가 죽어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얼굴을 볼 때마다 기쁨에 겨워 춤을 추고 계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함 받은 저와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이제 우리도 서로 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옆 사람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고 다같이 찬양하십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이제 서로에게 이렇게 화답합시다. “하나님은 형제님을 사랑하십니다.” “저도 형제님을 사랑합니다.” 특별히 동성끼리는 주님의 사랑가지고 한 번 서로를 꼬옥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의 빛나는 눈동자와 윤기 있고 광채 나는 얼굴들을 보십시오. 우리의 밝은 표정을 보십시오. 인간문제의 해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이 사랑이 모자라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만큼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기 가치를 상실해 버립니다.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느냐 하는 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야 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으면 자기 가치를 발견합니다. 사랑받고 있는 그것 때문에 “나는 살아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은 이슬만 먹어도 당당하게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사랑하고 계신데 왜 기가 죽어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씀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은 초막을 궁궐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고 이 사랑은 지옥을 천국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니 기운을 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주위 사람들에게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보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나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다.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맞바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소중한 가치있는 존재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받고 사는 그 얼굴을 온 세상에 내어 보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망해가는 마지막 불꽃을 부둥켜안고 기가 죽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서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결과를 우리는 요시아의 개혁운동이라 부릅니다.
“기죽어 살지 말아라. 네 어깨를 늘어뜨리고 살지 말아라. 용기를 내라. 힘을 내라”
스바냐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펄펄 뛰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도끼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우상의 신당들을 부수어 버리고 성경을 열어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속에 물든 습관을 저주하고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움과 원망 대신에 사랑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구원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금 기운을 내시기 바랍니다. 힘차게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기죽어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살아가십니까? 역사의 운행자는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로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능하시고 사랑스런 손길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라! 효성선교교회 성도들아, 다시금 기운을 내어라! 한국교회여, 이제 깨어 일어나라!”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서 사탄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늘 승리하며 주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