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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2-서머나 교회(계 2:8-11)-20100110

작성자김종민|작성시간10.04.20|조회수484 목록 댓글 0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2-서머나 교회(계 2:8-11)

 

할렐루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두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아시아 주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그들이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대처해야 할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그 일곱 교회 중 두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입니다.

 

먼저 서머나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56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지금은 ‘이즈미르’(Izmir)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에베소와 마찬가지로 서머나는 에게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로서 에베소, 버가모와 함께 소아시아 지역에서 당대 최고의 도시라고 불리우기를 다투던 중심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당대 일곱 도시라는 호칭은 세상적 관점에서는 좋은 것이었으나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 그 지경에 있어서 일곱 도시란, 그 만큼 우상 숭배가 성행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또 서머나는 기원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서 정착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서머나는 로마를 강력하게 지원했고, 그래서 로마 황제 숭배 사상이 강력하게 지배되었던 도시로써 주전 195년경부터 황제 숭배가 강요되었으며 또 우상숭배가 만연되었던 도시였습니다.

이런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자그마한 그리스도인 단체가 바로 서머나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의 세력과 유대주의적 율법주의 기치 아래 기독교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이라는 커다란 두 세력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말할 수 없는 불이익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견고하게 지켰습니다. 서머나는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감히 주님도 책망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있었던 이 교인들을 향해서 주님이 무슨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다가 결국은 피를 흘려 순교하는 자들이 있었던, 주님의 사랑의 숨소리가 들리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의 승리는 그 당시 도처에 흩어져 있던 많은 도시 교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머나 교회를 보라. 저토록 극심하고 극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믿음의 승리를 이루어 낸 서머나 교회를 바라보라.”

교회들이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서머나 교회는 승리하는 교회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교회가 누리고 있었던 엄청난 승리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고난의 시대를 또 한번 살아가는 우리들이 주님께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이 고난 앞에서 이 교회가 그토록 위대하고 찬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 속에서 우리는 승리의 비밀을 세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이 고난의 증인이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아멘.

 

서머나 교회는 “주님이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는 이 믿음으로 자신들의 고난에 맞섰습니다.

9절을 다시 읽어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당이라”고 하여 ‘아노니’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환난을 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환난은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시련입니다. 그들이 신앙 때문에 지불하고 있었던 값비싼 대가, 그 고통을 주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우리의 궁핍을 안다고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것은 물질적인 궁핍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예수를 믿게 되면 돈 벌 수 있는 길이 다 막힙니다. 재정적으로 무척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금도 회교권에서는 그렇습니다. 또 회교권과 비교해서, 조금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이집트에서조차 예수를 믿으면, 절대로 진급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장사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집도 팔아야 하고, 장사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할 때, 여러분은 그러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고난의 의미를 우리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의 궁핍을 아신다고 하신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 모르지만, 네가 사실은 부자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서 부요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에서 부요하고, 그 주님과 누릴 수 있었던 교제의 찬란한 기쁨에서 부요했던 사람들, 그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가하는 박해를 안다고 했습니다. 서머나는 로마 황제를 숭배했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돈이 많았기 때문에, 관리들을 매수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사실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다. 그들은 사단의 도구이다. 그들에 의해서 너희들이 받고 있는 고통과 눈물과 고발과 중상과 모략도 내가 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통받을 때도 서럽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얼마나 더 마음이 아픕니까?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수모는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받는 고통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서 너희들이 당했던 그 모략과 중상과 고통을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아시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다른 교회에 있을 때, 교인들과 상담할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목사님도 몰라요”라고 말할 때입니다. 물론 모르지요. 제가 알 까닭이 있습니까? 그 고통, 그 마음을 제가 어떻게 다 알겠어요. 그러나 그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래요. 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자매님의 고통과 눈물도, 형제님의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아픔도 주님은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자세하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눈물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아픔을 아십니다. 고민거리를 아십니다. 기도제목을 모두 아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의 모든 형편을 알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서머나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는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아멘.

 

서머나 교회에 주께서 처음이며 마지막이신 분으로 선포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통이 언제 끝나나 하고 지루해 하던 교인들에게 이 메시지는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그분은 고난의 처음도 알고 마지막도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의 절정인 죽음도 경험해 보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시고, 공포도 아십니다.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야 우리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지 않습니까?

 

헨리 뉴웬이라는 수도사 심리학자가 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이 상처를 받으신 분입니다. 오해도 받으시고, 배척도 받으시고, 고통도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도 경험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자로서, 내 상처를 이해하시면서, 나를 치료하실 수 있는 그분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그러나 남이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 사정을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을 공감하실 뿐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인생의 최악의 절망인 죽음을 정복하신 분입니다. 부활의 대답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무엇이라고 선포하십니까?

“내가 네 고통을 안다”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서머나 교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이 고난의 증인임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신다고 한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앞에서 “아무도 나를 몰라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 곁에서 늘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고난은 결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아멘.

 

서머나 교인들은 고난이 반드시 끝난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10절 말씀은 일종의 예언적 경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미 신앙적인 환난과 물질적인 궁핍과 유대인에 의한 배척이라는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 무서운 고난이 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투옥뿐만 아니라, 죽음의 가능성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 일 동안 몇 사람이 고난받는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지도자급의 몇 사람이 열흘간 환난을 당하게 되리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앞으로 받아야 할 고난을 왜 십일이라는 단어로 표시했을까요? “십”이라는 숫자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항상 ‘만수’입니다. 물건을 셀 때도 열까지 세면 다 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고난을 그들이 다 받는다는 의미도 되고, 그 고난은 열까지밖에 안 간다는 것도 됩니다. 그 다음에는 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고통을 상당한 기간 동안 받지만 결국 그 고통은 끝난다. 그것은 무한한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끝나야 할 고통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여러 유형의 고통 때문에 괴롭고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반드시 끝납니다. 고난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전서를 보면 고난에 대한 많은 교훈이 나오는데, 특별히 이러한 면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6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했고, 5:10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베드로는 ‘잠깐’이라는 단어를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밤이 너무 길어 새벽이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너희들이 당하는 고난이 혹 그렇게 느껴진다 해도 그것은 ‘잠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은 ‘잠깐’ 후에 끝난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부딪치지 못할 고통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고난과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그 고난과 고통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을 끝까지 이겨냄으로,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고난 후에 예비된 상급을 기억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아멘.

 

본문에서 고난 후의 상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언급됩니다.

먼저 소극적인 면에서의 상급을 살펴보면, 지옥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죽음은 첫 번째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 즉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사망은 지옥 형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누르고 박해하던 자들이 지금 당장은 승리자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 지옥의 형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이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영광이나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소극적인 면에서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지옥의 형벌과는 상관없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이 끝날 때,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약속입니다.

 

적극적인 면에서의 상급을 살펴보면, 생명의 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0절 후반부를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관”이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는 두 가지의 다른 단어로 쓰여집니다. ‘디아데마’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왕이 쓰는 면류관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디아데마’가 아니라 ‘스테파노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경기에서 최후의 승리자에게 주는 관입니다. 특별히 이 서머나 도시에는 많은 경기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각 경기장에서는 많은 경기들이 진행되었고, 뛰어난 운동 선수들은 대중의 인기를 끌어 모았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운동 경기가 끝났을 때 승리자들에게 스테파노스가 씌워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생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경기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싸움에서 신앙을 가지고 마지막 승리를 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 설 때 주께서 씌워 주시는 이 생명의 면류관을 그들은 바라보았습니다. 그 영광에 대한 비전이 서머나 교인들에게 이 땅에서 받는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 때문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을 “죽을 정도로” 충성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도록”이라는 말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혹은 “죽는 그 순간에도”라는 뜻입니다. 지금 주님을 향해서 갖는 태도를 일관성 있게 견지함으로써 마지막 죽음에 이를 때에도 주님에 대한 성실과 충성을 갖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이 신앙 고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게 그 죽음은 승리자의 개선문에 불과한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지만, 승리자로서 죽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인들은 승리자로서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뛰어나와 감격하시며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인정하시는 그런 승리자의 죽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불행하게도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존재했던 그 지역은 지금 완전히 회교권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모두 사라지고 빈 터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도, 버가모에도, 두아디라에도, 빌라델비아에도 교회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회교의 나라 한복판에서 아직도 신앙을 지키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 유일한 교회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교회가 어디일까요? 바로 서머나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마지막 때에 어떤 고난이든 이겨 낼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습니까? 어떤 고난, 어떤 눈물, 어떤 고통도 주님이 아십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오래 계속되지 않습니다. 또 고난 후에 주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상급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한순간 한 순간 날마다의 삶 속에 믿음을 걸고 최선을 다하고 성실과 용기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과 교회들에게 서머나 교회의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을 이기며,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죽도록 충성함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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