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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오직 예수(요 14:6) - 20221120

작성자김종민|작성시간22.11.21|조회수556 목록 댓글 0

오직 예수(요 14:6)

할렐루야!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시점에 오면, 지나온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았던 어거스틴, 하나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진리를 찾는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던 어거스틴이, 훗날, 하나님께로 돌아온 다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다시 기억하고 회상하는데도, 이제는 내 영혼이 두려워 떨지 않게 되었으니, 내가 주님께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요(116:12)? 주님이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이름을 시인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전에 저질렀던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짓들을 사해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질렀던 죄들이 마치 얼음이 녹듯이 다 녹아 없어져 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와 자비 덕분입니다. 또한, 내가 어떤 악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것도 모두 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셨다면,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좋아서, 죄를 지었던 내가 무슨 죄인들 짓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의도적으로 지은 죄들만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짓지 않은 죄들까지, 나의 모든 죄들이 사함 받았음을 시인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참된 평안을 찾게 된 어거스틴은 지나온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으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이 멸망하기를 바랬던 요나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4:2)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태복음 17:1-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에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천상의 소리를 듣게 되다니...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되다니...

얼마나 황홀했을까요?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요?

신앙생활하면서, 말씀을 듣다가, 기도하다가, 찬양하다가, 이런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 하는데 있어서, 모세를 만나는 것, 엘리야를 만나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모세와 엘리야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보이고, 그들을 위하여, 초막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 보이고, 모세와 엘리야만 보인다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외에는 다른 말이 내 귀에 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의 말씀도 중요합니다. 엘리야의 불같은 호령소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세의 말도 아닙니다. 엘리야의 말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들려야, 다른 데로 빠지지 않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참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누가는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9:36)고 말했습니다.

오직 예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2천 년 역사 이래, 목숨 바쳐 강조하고, 지켜나온 중심 신앙과 핵심 사상은 오직 예수입니다.

 

왜 오직 예수님입니까?

예수님만이 길이고, 생명이고, 구원이고, 삶이고, 성공이고, 행복이고,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늘 대구에서 어느 단체가 수료식이라는 이름으로 10만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매스컴을 통하여, 그 단체는 이단이라고 사이비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 가서, 교리 공부를 하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 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일까요? 왜 그곳에서 빠쟈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나에게 잘 해 준다고,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정에 끌려서는 안됩니다. 참 선하게 산다고, 그를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달콤한 유혹과 미혹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그 모든 유혹과 미혹을 물리치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참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12절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습니다.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주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이곳은 어떤가, 저곳은 어떤가?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앞에 계신 주님,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내 옆에 계신 주님,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내 뒤에 계신 주님, 나를 밀어 주시고, 내 위에 계신 주님, 나를 돌보아 주시고,

내 아래에 계신 주님, 나를 받들어 주시고, 내 안에 계신 주님, 나를 강하게 하여 주시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거리를 두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73:28)고 말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4:8)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을 주님은 내 안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 곁에서 이리저리 맴도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주변을 맴도는 사람, 교회를 맴도는 사람, 신앙을 맴도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따로 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변을 맴돌고, 곁을 서성거리고, 앞뒤를 재고, 들고 나고, 뜸 들이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으로 들어오라, 내 사람이 되라, 나와 하나가 되자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가 쓴 편지들 안에서 예수 안에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상한 단체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어야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3:3절 말씀입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이사야 43:11절 말씀입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를 만나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고, 내 마음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오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7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예수님은 보배이십니다.

우리는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셔야 합니까?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보배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싼 그릇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더러운 것을 가득 담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이,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질그릇인 우리는 보배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것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애매한 대답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내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대답할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하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오래 살아도, 엄청난 많은 일을 했다고 하여도, 놀라운 업적을 성취했다고해도, 마지막 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라고 고백하게 된다면, 그의 살아온 모든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입니까?

전도서를 보면, 전도자인 솔로몬은 그의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하면서, 시작했지만, 마지막 글에서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1-2)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은 복된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헛된 인생,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은 복된 인생입니다.

 

여러분!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4-6)

비록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순간, 사울은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기 전에, 이미 사울은 신분적으로, 학문적으로, 종교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의 외적인 조건들을 갖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갖추었지만, 그것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변화된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높은 신분일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단과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한때 마니교에 빠졌던 어거스틴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될 수 있었고, 교회사에 큰 흔적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18:38)라고 물었던 빌라도는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어떤 역사가 이루어졌을까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라고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 곁을 맴도는 삶, 교회 주변을 맴도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오직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달콤한 유혹과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시고, 끝까지 주님만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한마음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만을 모시고 살아감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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