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일낮 설교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창 22:7-19)-20100411

작성자김종민|작성시간10.04.20|조회수1,920 목록 댓글 0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창 22:7-19)

 

할렐루야!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은혜의 자리에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환영합니다.

올해 2월에 우리나라에 와서 간증집회를 했던 분이 계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이 발가락 두 개만 움직이는 몸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랑스런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로 “닉 부이치치”입니다. 여러 곳에서 간증을 하였는데, 그중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했던 간증을 들었는데,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간증이나 인터뷰하는 것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그는 말합니다.

“저는 팔다리가 없지만 행복합니다. 전 하나님의 자랑스런 피조물이니까요. 여러분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팔다리가 없이 작은 왼발에 발가락 두 개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자살 충동에 시달릴 때, 요한복음 9장에서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예수님 이야기를 읽고 내가 소중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놨습니다. 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늘 감사드린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1982년 호주 브리즈번에서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선천적으로 ‘테트라 어멜리아’ 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뒤에 태어난 동생들은 건강합니다. 왜 자기만 그렇게 태어났는지, 의사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래 아이들이 걷고 뛸 무렵,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 속에서 삶의 기쁨보다 좌절과 고통을 먼저 배웠습니다. 응석받이 어린아이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10살 즈음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듭나는 신앙을 체험하면서, 수영과 줄넘기 골프 농구 등 스포츠를 하였고, 호주 그리피스대에서 회계학과 재무학을 복수 전공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족 없는 삶(Life Without Limbs)’이라는 장애인 비영리단체를 만든 후부터는, 전세계를 다니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한국은 그가 방문한 스물아홉 번째 나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절망했을 때 자살했다면 오늘날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겠습니까? 그러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참고 깜박깜박 꺼져가는 불꽃을 부여잡고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분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는 강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뛰면서 “장애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며,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상황에도 웃음을 잃지 않느냐고 묻곤 하죠.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여전히 많지만,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답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많아, 더 외롭고, 더 어두운 세상 아닙니까?”

“사람들은 돈과 섹스 마약 같은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에 불과해요. 깨어진 가정을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사랑과 행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을 작은 발가락으로 찾아 넘겨 읽었습니다. 예레미야 29: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아멘.

닉 부이치치씨는 “희망은 전염성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나를 보고 단 한사람이라도 삶에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뜨겁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절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한 계획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는데,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보고 단 한사람이라도 삶에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일을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기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가능성이 존재한다”

닉 부이치치의 행복론입니다.

 

창세기 12: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주셨던 말씀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였습니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때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2절의 말씀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멘.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 등에 자신의 무게 정도의 짐을 질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불러 주신 말씀이,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얼마나 아들 이삭을 사랑을 하고 있는가를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단순히 대를 잇을 아들을 주셨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약속의 아들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씨앗으로서의 아들입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여 심히 번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자로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바치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깨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치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까? 2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시험의 시작은 1절을 보면 “그 일 후에”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란, 어떠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블레셋 지역 그랄에 거할 때입니다. 그 지역의 왕은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자, 아비멜렉은 “나는 알지 못하였다” 말하고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약속의 징표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일곱 암양 새끼를 주어 증거로 삼고, 서로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 부릅니다. “브엘세바”의 뜻은 ‘일곱의 샘’ 또는 ‘맹세의 샘’입니다.

두 사람이 언약을 맺은 후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그들의 땅인 블레셋 땅으로 돌아간 다음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러분! 몇 주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샬롬”, “여호와 삼마”, “여호와 로이” 등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시편 20:7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설교시리즈를 통하여, 하나님만을 더욱더 의지하며,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원문으로 말하면 “엘 올람”입니다. “엘 올람-영원하신 하나님”을 부른 후,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이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여러 번 불렀음이 창세기에 나타납니다. 소돔 왕을 물리친 후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욘)이라고 불렀으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할례의 예를 행한 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엘 솨다이)라고 불렀으며, 에셀나무를 심고는 ‘영원하신 하나님’(엘 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을 다양하게 경험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도 만나보았고, 전능하신 하나님도 만나보았고, 영원하신 하나님도 만나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에,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네가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으로 고백하였는데, 너의 그 고백이 침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하여,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셨다는 것, 즉 그 시험의 문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고백이, 참인가 아닌가에 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시험의 과제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으로 제출된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바치라 하십니다. 이 명령을 따르면, 영생의 대가 아브라함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바치라 하십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요?

 

여러분!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 이삭과 번제할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즉시 떠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이 한 마디로 설명 될 수 있을까요? 진정 아브라함은 아무런 갈등도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두 사환을 데리고, 번제에 쓸 장작을 가지고, 모리아로 떠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밤은 인생에서 가장 긴 어둠의 밤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원래 좋았으니까, 편안히 잠을 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셨으니, 앞으로도 잘 해주시겠지 라는, 기계적인 믿음이나, 순종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도 역시 나약한 인간인지라, 간밤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순종의 길을 나섰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이 즉각적인 순종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참된 순종은, 깊이 생각하고 생각한 후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한 다음, 생각하는 것입니다. 갈 길이 보이지 아니하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이 없고, 소망이 없어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온 인생,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를 준비하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갰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환과 아브라함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장작은 갈기갈기 찢기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보다 더 모질게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이 시험이, 아브라함의 신앙생활 초기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험은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에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전에 아브라함은 수많은 역경들을 헤쳐 나왔습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수 있는 믿음에까지 이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아들을 주신 하나님, 두 번씩이나 아내를 이방의 왕에게 빼앗길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축복을 주신 하나님, 대적의 손에서 롯의 가족을 건져주신 하나님, 등등 아브라함은 아들이삭을 바치기 전까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많이 체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전에 번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의 성장에는,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 주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은혜를 경험하면서, 아브라함은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백세에 얻은 아들이라도 말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란 후에,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33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이든지 현재이든지, 믿음의 사람이든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든지, 모든 시험은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시험을 만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지금 내가 이러한 시험을 네게 허락하는 것은 네가 이러한 시험을 통과할 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시험을 통과한 후에는 내가 너를 더욱 축복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우리에게 나쁜 것은 모두 악마의 짓으로 생각합니다. 건강은 하나님에게서, 질병은 악마에게서, 사업의 번성은 하나님에게서, 사업의 실패는 사탄에게서, 성공은 하나님에게서, 실패는 마귀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전체로서 보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부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를 위하여, 매를 드시고,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을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우리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말씀과 더불어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이든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 뒤에는, 그 시험을 허락하신 뜻과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닉 부이치치예레미야 29:11절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이요, 평안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은 순간적인 결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아들의 손을 붙들고, 사흘길을 걸어야 하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모리아산은 브엘세바에서 45km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걸어가면 아마 삼일쯤 걸릴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는 삼일간의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사흘길을 걸어가면서도 아브라함의 머리속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심을 하고 삼일을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적막한 헤브론의 광야길을 삼일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순종의 여정 길에서, 인내력이 부족하여, 도중하차가 할 때가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 우리의 부족함과 미련함으로, 정상에 선 기쁨과 환희를 맛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순종은 인내와 끈기로 완성이 됩니다. 순종은 변덕이 없어야 순종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마무리되어야, 참된 믿음입니다. 중간결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가?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마지막이 언제인지 모르기에, 우리는 늘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곧 순종의 생활입니다. 자기 논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자기 생각과 느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 아래 도착하자, 사환들을 떼어놓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문도 모른체 따라나섰던 종들이, 이삭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혹시 우리 영감님 치매나 노망이 걸린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의 나이 120쯤 되었으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결단은 실행 불가능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핑계 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셨죠. 저는 꼭 바치려고 했는데, 사환들이 무식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네요. 그러나 하나님, 제 마음만은 아셨죠?”

저 같으면 이런 핑계를 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방해가 될만한 모든 일들을 철저히 제거합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큰 그릇입니다.

아브라함은 걸림돌이 될만한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하고, 사흘길의 여정 끝에 모리아산의 정상에 오릅니다.

그런데 등에 짐을 지고 올라가는 이삭이 묻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다시 한번, 갈기갈기 찢어놓는 질문입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역사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그 명령에 순종하여 걸어갈 뿐입니다. 아들을 바치라하면 바칠 뿐입니다. 아들이 제물이면, 아들을 바쳐야 할 뿐입니다. 그의 모든 희망이, 번제물이 되어 사라질 아들과 함께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그는 자신의 희망과 자신의 미래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을 이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 질 때, 그것이 참다운 축복임을 믿는 믿음 속에서 갖는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모든 희망이 끊어져 버린 뒤에도, 하나님의 인도를 믿는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말씀으로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께 그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 이삭과 아브라함의 대답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은, 나의 희망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너를 내게 보냈듯이, 너를 거두어 가신다 해도, 나는 그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답변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그 믿음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의 자리에 선 다음에야, 비로소 이러한 믿음의 자리에 나아갑니다.

자신의 모든 삶의 역사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에게 희망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았을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에게 신실하셨고 은혜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명령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과 맺은 약속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잡으려는 순간에, 하나님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처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부르실 때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한번 부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반복하여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 그만큼 확실했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만큼 다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아멘.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시험이 통과되는 순간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바치라 하신 뜻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영생의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나 하나님에게 있음을 아브라함이 알았고, 믿었으며, 그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수양을 발견한 아브라함이, 그 양이 번제할 어린양으로 알기에, 잡아 번제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의 결론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실보다 말씀을 중요시했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눈이 있기 전에 빛을 준비하셨습니다.

코가 있기 전에 공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귀가 있기 전에 생명의 말씀을 준비하셨습니다.

입이 있기 전에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셨습니다.

발이 있기 전에 땅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교회를 준비하시고,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건강을 준비하시고, 마음이 공허한 사람에게 하늘 위로를 준비하시고,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평안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게 새 힘을 주시고, 근심 있는 사람에게 평강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사죄의 은총을 준비하시고, 가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부요를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하나님은 여호와의 산에 서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내가 서야 할 모리아의 정상은 어디입니까?

이삭이 바쳐진 자리요, 예루살렘 성전이 선 자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신 자리입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바로 효성선교교회입니다. 여기가 바로 여호와 이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이면 부지런히 달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달려온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사환들처럼 산 아래 있지 마십시오. 교회의 주변을 맴돌지 마십시오. 먼 산만 바라보며, 한숨짓지 마십시오. 믿음의 칼을 들어, 여러분의 우상을 찌르십시오. 믿음의 정상에 오르십시오. 여러분의 순종하는 믿음을 하나님께 보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노라. 내가 너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했노라”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날마다 소리 높여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수양을, 그리고 사망에 처한 온 인류를 위해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미래를 예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유한한 우리의 지식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불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분은 우리 인생의 가장 훌륭한 준비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이레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여호와 이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위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해 주시고, 우리가 장차 영원히 거할 천국을 준비해 주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날을 복되게 예비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늘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우리의 앞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의 발걸음을 옮김으로, 주님께서 준비하신 모든 복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 교회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사랑하며 섬기는 행복한 교회 삼아 주옵시고, 말씀과 기도로 건강한 가정 삼아 주옵시고, 믿음과 순종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