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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겔 48:30-35)-20100516

작성자김종민|작성시간10.05.15|조회수1,974 목록 댓글 0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겔 48:30-35)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거만, 우리는 하나님을 늘 잊고 살아갑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이 필요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내 힘대로 살아가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 지치고 고단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찾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왜 나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왜 나를 떠나셨습니까? 왜 나를 도와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나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나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릴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내 힘으로 한 것 같고,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지 않아도 넉넉히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여 주십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에나, 힘들고 어려울 때에나, 언제나 함께 하여 주십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어기신 법이 없습니다.

민수기 23: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20절을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여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처음 생각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아십니까?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 삶 한 가운데에서 늘 함께 하여 주시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마다, 가장 정확한 때에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22:2절을 보면,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묵히 삼일길을 걸어 모리아산에 당도하였습니다. 산 위로 올라가기 전, 아들 이삭에게 나무를 지우고, 아들과 함께 담담하게 모리아산을 올라갔습니다. 그때 그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이삭을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언제고, 이제는 죽이라고 하는가? 지금 가고 있는 이 순간 하나님이 마음이 바뀌어 집으로 돌아가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묵묵히 삼일길을 걸었습니다. 마침내 모리아산에 올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에 바쳤습니다. 이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이 긴 침묵을 깨고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제단에 바쳐질 이삭 대신 하나님은 숫양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날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삼일길을 묵묵히 걷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여호와 삼마이신 하나님”입니다. “바로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삼마”는 곧 “임마누엘”과 같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여호와 삼마로 함께 하셨습니다. 바로 그 모리아산에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아브라함의 순종의 자리에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어떤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계셨던 바로 거기에 함께 계셨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 함께 하여 주십니다. 교회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모세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나일강에 버려졌을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고, 모세가 궁궐에서 성장할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고,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일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고,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 갔을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고,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칠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고, 모세가 늙고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모세와 늘 함께 하셨고,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의 노예 생활을 마치고,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여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기에 늘 편안하고, 평안하고, 기쁘고 좋은 일들만 있어야 하는데, 가는 길이 늘 평탄해야 하는데, 어느 날 아말렉이 이스라엘 앞을 막아섰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전쟁준비를 하고서, 아무런 전쟁 준비도 없이 터벅터벅 광야 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 앞을 막아섰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도자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고,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대장 삼아,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대이지만,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칼과 창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싸워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전쟁에 능한 아말렉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과 싸우기 위하여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신다 말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여러분! 모세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 손을 들고 기도할 때도 함께 하셨고,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울 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 계셨습니다. 산 꼭대기에도 계셨고, 전쟁 한 가운데에도 계셨습니다. 모세와 함께 산꼭대기에 계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전쟁 한 가운데에 함께 계셨던 하나님은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는 하나님, 전쟁에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지쳐 앉아 있는 그곳에 계시고, 내가 슬퍼 울고 있는 그곳에 계시며, 외로워하고 있는 그곳에 계시고, 너무 좋아 기뻐할 그곳에도 계시고, 푸른 하늘 내가 바라보는 그곳, 거기에 계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내가 기도할 때 보시고 미소하는 하나님, 이젠 잘 걸을 수 있다고 아슬아슬 걸어가다 또 넘어져도, 다만 빙그레 웃으시며 일으켜 세우시고, 아픈 다리를 쓸어주시고, 상처난 곳엔 두 손으로 만져 낫게 하시는 주님, 상처 가운데 들어가, 울며, 아프다고 투정하는 그때, 늘 거기 그곳에 계시다가, 함께 울어주시는 내 하나님, 열심히 달려가다가 지쳐서 나 더 이상 못간다고 우길 때면, 때로는 내 옆에서 함께 쉬어주기도 하시는, 늘 나와 보조를 맞춰 주시는 나의 하나님, 이젠 그만하고 싶다고 투정하며 울 때, 야단치시기보다 내가 널 사랑한다 말씀하셔서, 그 길을 다시 가게끔 만드시는 하나님, 이건 불가능하다고, 계산하고,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날 향해, 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란다 말씀하셔서, 황당한 일을 행하기도 하시는, 나보다 고집 세신 나의 하나님, 실수투성이인 날 향해 그래도 날 향하는 것이 기쁘다 라고 말씀하시는, 밑지는 장사만 하시면서도 늘 웃으시는 속 없으신 내 아버지, 두리번거리고 둘러 찾을 때, 거기 그곳에 항상 계신, 그래서 늘 나를 안심하게 만드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 삼마이신 나의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삼마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여러분!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바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삶의 자리라 할지라도, 기쁘고 즐거운 일이 넘쳐난다 할지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 할지라도, 늘 건강하다 할지라도, 자자손손 번영된 삶을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행복이 아닙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시편 51:11-12절을 보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범죄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숨기고 싶었지만,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감추고 싶었던 죄를 지적했습니다.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다윗은 무릎 꿇어 회개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세요. 나를 떠나지 마세요. 나를 버리지 마세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세요. 나를 붙들어 주세요.”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떠나가 버린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우리 가정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다 할지라도, 아무리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찬양이 뜨겁다 할지라도, 아무리 기도 소리가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이 많이 모이든 많이 모이지 못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좋은 건물이든, 형편 없는 건물이든,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찬양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든, 작게 울려 퍼지든, 기도 소리가 크든 작든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장 가문출신으로, B.C 597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여호야긴 왕과 왕족 및 귀족들, 그리고 유다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사로잡아 갈 때 그 포로들 가운데 섞여 있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그발 강가 근처에 살았습니다. 그는 포로 후 5년 되던 해에,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0여세로 포로 중 선지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나 다니엘처럼, 팔레스타인 역사의 격동기에 활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주변 정세는 대단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복잡하고 긴 역사를 다 말할 수 없어도,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B.C 722년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신흥 바벨론 제국의 세력에 압도되어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다 왕 요시아는 반 앗수르 정책을 쓰게 되었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여호야김 임금은 바벨론을 배반하였습니다.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친 바벨론 정책을 하라고 했지만, 여호야김이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여호야김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으나, 겨우 100일만에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느브갓네살이 다시 공격해 왔을 때, 여호야긴 왕과 왕족들과 귀족, 유명인사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이때 에스겔도 사로잡혀 갔고, 그후 예루살렘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은 크게 세 가지를 외쳤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게된 건 범죄 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외쳤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주변국가들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외쳤습니다. 셋째는 징계 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에스겔 48장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이 외쳤던 세 가지 메시지 가운데,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에스겔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때에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을 때에나, 변함없이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열왕기상 8:10-11절에 보면,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고 난 후,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겼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성전에 옮겨 놓은 다음, 성전에서 나올 때,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하여 무너졌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성전에 계신 하나님은, 성전이 무너졌는데, 어디 계십니까?

에스겔 8:6절을 보면,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기에,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전에서 떠나셨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것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괴한 것은 바벨론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못하도록 한 그들의 우상숭배와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상숭배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건강하기를 원하십니까?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건강한 삶을 원한다면, 풍성한 삶을 원한다면, 축복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겔이 포로된 지 25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4년 정월 10일에,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내려놓았는데, 놋같이 빛난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성전 바깥뜰과 성소 내부, 안뜰과 성전의 방들을 측량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측량을 마치니, 놋같이 빛난 옷을 입은 그분이,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의 동향 문으로 데리고 갔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같이 들려오고 있었고, 성령에 이끌려 안뜰로 들어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겔 43:1-5)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버렸던 성전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전, 여호와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처럼 들려오는 성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효성선교교회가 척량하는 줄로 측량되기를 원합니다. 척량 줄이 뭡니까? 이 줄로 길이, 깊이, 높이, 넓이를 측량합니다. 성전의 규격과 믿음의 규격을 측량합니다. 이 줄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가 말씀으로 측량되어, 말씀에 합당에게 쓰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 강단에서, 말씀이 물소리처럼 우렁차게 들려오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하바국 2:20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효성선교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신 줄 믿습니다.

에스겔 43:7절을 보면,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 여기는 엄숙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가 울려 퍼져서는 안됩니다. 많은 물소리 같은 여호와의 음성만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에 압도되기를 원합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성전에서 엎드리는 은총이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놋같이 빛난 옷을 입은 그분이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에 갔습니다. 성전 문이 동으로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남편으로, 북으로 흘렀습니다. 에스겔을 데리고 온 놋같이 빛난 옷을 입은 그분이 척량 줄을 잡고 1,000척을 척량하니 물이 발목까지 차 올랐습니다. 다시 1,000척을 척량하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1,000척을 척량하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1,000척을 척량하니 물이 창일하여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이 강물이 흐르는 강 좌우 편에 나무가 심히 많았는데, 각종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그 잎이 시들지 않고 청청했습니다. 이 강물이 흐르는 곳에는 소성함을 얻고, 물고기가 심히 많았고, 각종 생물이 번성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 문지방 밑에서 나오는 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벨론에는 유브라데 강, 애굽에는 나일 강, 중국에는 양자강, 우리나라에는 한강이 있어, 그들의 문화를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강이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조건이나 세상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는 줄 믿습니다. 이 신령한 물, 말씀과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 물이 흐르는 곳에 열매가 풍성하였고, 물고기가 번성하였고, 모두가 싱싱했습니다.

여러분! 효성선교교회 문지방에서 말씀과 성령의 생수가 흘러내리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생명이 소성케 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큰 은혜의 강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이 제단에서 흐르는 은혜의 강수가 이 도시를 살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놋같이 빛난 옷을 입은 그분이 척량줄로 1,000척을 척량 한 후에 에스겔에게 그 물을 건너게 하고 마침내 4,000척까지 척량하고 그 강을 건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분명한 것은, 성도의 은혜의 체험을 의미한 줄 믿습니다. 성도들의 은혜의 체험은 하나님의 척량줄을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겁니다. 좀 전에 척량줄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이탈한 은혜 체험은 허망한 겁니다. 위험합니다. 말씀 중심의 은혜 체험을 하여야 합니다. 기도 할 때도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찬양할 때도 말씀을 붙들고 찬양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 속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 에스겔이 체험한 은혜는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처음엔 발목, 다음엔 무릎, 그 다음엔 허리, 맨 나중에는 건너지 못할 깊은 물에 잠겼습니다.

에스겔이 체험한 은혜의 체험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평생 발목에 찰랑 찰랑 하는데 만족하지 말고, 무릎, 허리, 푹 잠기는데 까지, 전진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발목까지의 물에는 우리 행동이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무릎이나 허리까지의 물은 어느 정도 저항이 있으나 맘대로 할 수 있습니다. 잠기게 되는 물은 우리가 맘대로 못합니다. 물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럴 때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주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전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 주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12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앙에 거룩히 구별한 성읍을 두시고, 그 성읍으로 출입하는 출입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출입문들은 성의 사면에 각각 3개씩 모두 12개가 있는데, 그 각각의 출입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왜 성읍의 출입문들이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되었을까요? 그 성읍이 온 이스라엘의 공동의 소유인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은 어느 한 지파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는 어느 특정인, 실력 있는 이의 소유가 아닙니다. 전체 성도들의 교회입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성읍 출입문의 크기입니다. 동서남북의 출입문의 광이 4,500척이라고 했는데, 1,500척의 문 세 개가 합쳐진 겁니다. 4,500척은 약2km입니다. 한편에 약 700m의 문이 세 개입니다. 이렇게 큰문을 보셨습니까? 이렇게 큰문이 사방으로 열려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8절을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우리 효성선교교회에도 동서남북에 4,500척의 열린 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방으로 이런 문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드리는 날,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교회 문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불이 환하게 밝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환하게 불을 밝히고,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겔 선지자가 본 성읍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 삼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말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새 이스라엘 공동체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삼마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드리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주의 교회 구석구석 가득 넘쳐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위험한 곳에 있을 때에도, 안전한 곳에 있을 때에도, 건강한 몸으로 있을 때에도, 아픈 몸으로 힘들어 할 때에도,

바로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삼마이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심으로, 회복의 역사, 치유의 역사,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여호와 삼마이신 하나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 가운데 함께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 가운데 함께 하여 주옵소서.

주님만을 모시고 사는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 믿음의 공동체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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