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롬 5:6-11)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있고, 친구의 사랑도 있고, 부부의 사랑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랑은 대부분 이유가 있습니다. 예쁘기 때문에, 잘하기 때문에, 나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사라지면, 사랑도 심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사랑할 이유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할 이유가 전혀 없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기 전, 오히려 정반대의 상태였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역설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인간의 절망과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10절을 보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세 번의 반복적인 표현을 통하여, 계단식으로 내려가면서, 은혜의 풍요로움을 점층적으로 제시해 줍니다. 연약함에서 죄인으로, 죄인에서 원수로, 인간의 비참함이 점점 더 깊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비참함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단계도 더욱 높이 올라갑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로마서 5:6-11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한 성경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된 후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상태에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 안에서 사랑받을 만한 것을 발견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넘쳐흘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를 보고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가슴 속에 타오르던 불꽃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제목으로,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여기서 ‘아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가치 있는 대상’을 발견하여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할 가치가 없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연약하다”는 말은 단순히 힘이 없거나 몸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무력하고, 스스로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으며, 영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선을 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상태, 뭔가 부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뭔가 많이 부족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힘도 없습니다. 마치 깊은 바다에 빠진 사람이 자기 머리채를 잡고 스스로 끌어올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영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숨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부르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목자처럼,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고 완전한 인간이었기에, 우리의 모습을 보고 만족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 곁을 찾아오셨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내가 조금 더 선해지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면, 그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사랑받기 어려운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우리가 아주 형편없을 때, 아무 보잘것없고,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할 때, 정말로 멸망의 자식으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느 겨울날 한 목자가 폭설 속에서 길 잃은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한 마리쯤 잃어버려도 되지 않습니까?”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 양은 나에게 한 마리가 아니라, 전부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몇 시간 후, 얼어붙은 양을 품에 안고 돌아온 목자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양을 감싸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품으셨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무력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우리에게 달려오셨습니다. 우리가 형편없고 비참할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된 지금, 그 사랑이 멈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둘째,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람의 사랑은 조건이 있습니다. 착하면 사랑하고, 잘하면 칭찬하고, 도움이 되면 가까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하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실수를 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준에서 벗어나 사는 것이 삶의 방식이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죄인이란 한두 번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죄가 그의 존재 방식이 된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은 단순히 “보여주다”가 아니라, “법적으로 증명하다”, “결정적으로 입증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법정에서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표현입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단순히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함으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영원히, 취소 불가능하게 증명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명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영원히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영원한 증거입니다.
루터는 “나는 십자가 이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십자가를 본 후에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하나님은 우리가 병들었을 때 찾아오셨고, 우리가 죽었을 때 생명을 주셨다. 내가 나의 과거를 돌아볼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존 번연은 자신의 자서전인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바로 그런 나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번연은 방탕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변화되었고, 감옥 안에서 불후의 명작인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감옥 창살이 그의 몸을 막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죄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면서도, 죄인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살다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그런 의심이 들거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원수 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단순한 소극적 반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방향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전혀 반대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어떤 중간 지점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 방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채 살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화목의 길을 여셨습니다.
여기서 “화목”은 적대 관계가 끝나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이 친구가 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화목을 주도한 쪽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상처받은 쪽이 먼저 손을 내민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편에 있지 않고, 언제나 인간 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화목을 제안하셨습니다. 죄인은 용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원수는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 대신 화목을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들었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두 팔을 벌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렸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넣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고, 성도들을 괴롭혔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예수님의 적이었습니다. 교회의 원수였습니다. 그의 손에는 체포 영장이 있었고, 그의 마음에는 증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그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벼락으로 그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사울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을 막아섰습니다. 사울의 열심은 ‘박해’였으나, 하나님의 열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그 사랑이 박해자 사울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교회의 원수가 교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 된 상태’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화목의 자리로 초청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바울은 더욱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크리소스톰은 “우리가 원수였을 때 아들을 보내신 분이, 이제 우리가 친구가 된 후에는 얼마나 더 우리를 위해 행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할 이유가 없다. 화목하게 된 자들에게는 구원이 보증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의 확신이 가졌지만, 현재의 삶을 살아가면서 불안해합니다. 오늘 실패했을 때, 오늘 넘어졌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원수 된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분이, 자녀 된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가 과거의 사랑이라면, 부활은 현재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왔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연약할 때도 붙드시고, 넘어질 때도 붙드시고, 눈물 흘릴 때도 붙드시고, 마지막 천국에 이를 때까지 붙들어 주십니다.
많은 분들이 “저는 너무 부족합니다. 저는 죄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저 같은 사람도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일 때’,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착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세 번이나 과거로 데려갑니다. 연약했던 우리, 죄인이었던 우리, 원수였던 우리, 왜 그 과거를 반복해서 보여줄까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복음의 심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신실함이나 우리의 눈물, 우리의 결심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시작된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시작된 사랑은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였을 때 시작된 사랑은 영원한 천국까지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넘어졌다고 물러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연약할 때에도, 죄인일 때도, 심지어 원수일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은 얼마나 더 많이 사랑하시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제도 사랑하셨고, 오늘도 사랑하시며, 내일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지금껏 중단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중단된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항상 기뻐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며,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화목의 길을 열어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