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에서 찬양으로(시 13:1-6)
오늘 읽은 시편은 여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편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첫 부분의 두 절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픈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절에는 비길 데 없는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쓴 많은 시들을 보면 통곡으로 시작해서 기쁨과 찬양으로 끝맺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깊은 내적인 모습을 봅니다. 한편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한 사람, 그리고 기뻐하며 찬송하는 다른 한 사람이 있는 것을 찾게 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러한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우리 안에는 옛사람과 새사람, 옛성품과 새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변덕 심한 날씨와 같아서 한쪽에서는 햇빛이 쪼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나기가 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소나기가 많이 와서 햇빛이 가려지지만 그렇다고 햇빛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인간의 참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다윗을 보면 마치 우리가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도 고통 속에서 헤매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몸부림칠 때가 있습니다. 철학자 러셀은 “사람이 외부 공간은 점령하지만 자기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해 고민하는 약한 존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첫 부분에는 인간의 불만, 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부분에는 이 불만이 찬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기 보면 “어느 때까지”란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다윗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기한이 있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도와 주시기는 도와주시는데, 오시기는 오시는데 언제입니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잠깐이라도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잊으셨습니까?”라는 부르짖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사랑이 불변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지극히 진실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라는 울부짖음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다윗은 하나님이 꼭 자기를 잊으신 것처럼만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비단 다윗 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잊으면 참을 수 있으나 하나님이 나를 잊으면 나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자부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즐거워했지만 지금은 불행한 사람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하나로 처해 있는 자신을 볼 수도 있습니다. 태양이 가리워지면 대지가 어두운 것같이,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 심령에서 숨어버리면 문자 그대로 우리 심령은 암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닥친 번민으로 인해서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잊어버리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뿐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여인이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절대로 잊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이 자신의 고통을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숨기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나 뜻을 숨기신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을 숨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는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웃으시는 그 얼굴을 숨기는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오늘 우리도 이런 절규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로부터 숨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나 그 은총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루만 보지 못해도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싫은 사람은 보게 될까 겁이 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대하시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 숨겨졌던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뵐 때 우리는 수심 대신에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화창한 날씨만 있었다면 가을에 추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계속적으로 성공하고 그로 인해 기뻐하면 우리의 뇌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랍 속담에 “햇빛만 빛나면 사막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비가 없으면 어떻게 초목이 자라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얼굴을 숨기실 때 우리는 절망을 느끼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의 슬픔을 말해 줍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독백입니다. 자기 스스로 얻은 결론입니다. 사람은 이런 독백에서 위로를 얻지 못하고 절망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사역에 전보다 더 큰 축복을 예비하실 때 나에게 먼저 우울이 온다”고 했습니다. 어떤 성공이 있기 전에 먼저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소망의 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고 말했습니다.
시편 42:4절에서도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절규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샘물과도 같습니다. 그곳에 가서 물을 길으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길으실 수가 있습니다. 영혼의 샘이신 하나님에게서 샘물을 마실 때 참 위로가 되실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것은 외적인 인간의 슬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2b-4a)
외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죽는 것과 의가 불의에게 패했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외부에서 당하는 고난이란 사탄과 사탄의 협력자들이 우리를 치켜올리고 그 다음에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 내린 때에 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4절)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의 신앙입니다.
사무엘하 1:20절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믿음 떠나면 마귀들이 기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윗의 모습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의 찬양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전에는 슬픈 탄식을 하였지만 여기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뭐랬어요?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 기쁨은 외부적인 기쁨이 아니라 본질상의 기쁨입니다. 그 마음의 기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입술로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우리의 감정을 자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때 우리는 감정을 자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실 때에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참된 평강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의 믿음을 버티어 나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맛볼 때 이것이 참 평강이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아니하는 참 평안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고 그래서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통하여 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 사람의 판단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을 비교해 보세요. 다윗은 “왜, 무엇 때문에, 어느 때까지 이렇게 하시겠습니까?”하면서 불만과 의심을 토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하였습니다. 지나 놓고 보니 하나님이 나에게 은덕을 베푸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같아서는 하나님이 왜 나를 잊으셨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알고서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여호와가 나를 푸대접하셨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그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셨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나의 오해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셉이 한 말은 너무 유명합니다. 그는 소년 때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고 거기서 충성스럽게 종의 일을 보았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누명을 쓰게 되었고 감옥에 갇혀 얼마나 억울하게 고생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세워 애굽의 바로 왕의 버금가는 총리 대신이 되어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팔아 버린 형들이 굶주린 가운데 찾아왔을 때 원수를 갚으려면 갚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오히려 온 가족을 다 모셔다가 잘 대접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형들은 동생 요셉을 두려워하여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마는 세상 떠나기 전에 요셉에게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였다고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가슴이 아파서 울면서 형들을 불러,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각으로는 억울할 수도 괘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천대하고 박대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후대하였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자신이 망각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이 가련한 사람이 자기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와 같이 대하시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크게 변했습니다. “전에는 슬픔과 불만투성이었지만 지금은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이런 결심은 현재 뿐만 아니라 일생 전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입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교우 모두가 이렇게 “일어날 때, 일할 때, 잠잘 때 이 입술을 그대로 간수치 말고 찬송을 부르리라”하는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외로움이 사라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두려움이 가십니다. 찬송을 부르면 힘이 생깁니다. 감사가 솟아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인처럼 “내가 사는 동안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는 결심을 가지기 바랍니다.
어떻게 통곡에서 찬양으로 바뀌어졌습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다윗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보장을 받아 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3절) 하였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기 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많은 번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게 부딪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집니다. 마침내 저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놓고 기도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용기와 신념, 그리고 감사와 찬송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짐을 주께 맡기고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다시 생각해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또 생각이 날 때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여러분의 고민과 문제를 모두 이야기하세요. 여러분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신 다음에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당에 나와서는 맡기지만, 예배가 끝나면 다시 찾아 가지고 갑니다. 그러지 마세요.
오늘 본문 5절 다윗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고통을 여호와 앞에 맡겼을 때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만한 감동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주님을 의뢰하세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에 대한 의뢰 뿐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의뢰 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사하여 주십니다. 능력이 필요하십니까? 그리스도를 의지하세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거짓말했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마세요. 그러나 그리스도가 진실하다면 그를 의뢰하세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를 의뢰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가 전능하신 구세주라면 그를 의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할 때 다윗과 같은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라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의뢰케 하십니다. 나는 대접받을 사람이 못되는데 후대해 주시니 감격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 날의 생활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들로 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평스러운 일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시고 도와 주셔서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덕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하나 하나가 이 하나님의 은덕 베푸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무겁게 왔으나 돌아갈 때는 가볍게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낙심 가운데 왔으나 돌아갈 때는 소망 중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맥없이 왔으나 돌아갈 때는 용감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울면서 왔으나 돌아갈 때는 찬양하며 돌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