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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픈 이야기-예화

흔들리지 않는 중심-예화 모음

작성자김종민|작성시간01.05.01|조회수1,646 목록 댓글 0
**흔들리지 않는 중심 전염병, 재난, 사기, 박해, 분쟁과 성도에게 계속되는 핍박을 보면 사단과 그의 동류들이 이 세상에서 판을 치는 것 같이 보인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확실한 대답은 하나님은 한 번도 보좌를 떠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변하지 않고 있다. 시련이 몰려올 때 그 부르심은 전 세계에 미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으로 돌아가고 기도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전도자 루이스 팔라오는 기자 회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기도와 말씀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훈련을 지속할 때만 하나님의 보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 보좌와의 연락선이 끊어지면, 우리는 세상을 황폐하게 만드는 심령술과 사술들에 좌지우지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좌의 중심을 바라봄으로써 실재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시각을 가질 때에 모든 인간사의 형성과 방향을 하나님 나라의 목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고 우리 자신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1815년 역사적인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양동 작전을 써서 웰링턴의 중심에 있는 군대를 유인하려 했다. 하지만 철인 남작(웰링턴의 별칭)은 속지 않았다. 그는 유리한 위치에서 모든 전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적의 전술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 있는 장군들이 부대의 일부를 파견하자고 주장했지만 그는 냉정하게 "나는 물에 흠뻑 젖은 닭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싶지 않다네"라고 대답하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군대의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가끔씩 우리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아주 치열한 전쟁을 할 때가 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 즉 우리 중심의 비전은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유리한 고지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세계관의 비밀을 가질 때, 우리는 요동하지 않는다. 하나님, 지금도 통치하십니까? / 리처드 뷰스 **그리스도인의 권위 그리스도인들은 D-day와 V-day 즉 '이미(already)'와 '아직(not-yet)' 사이라는 영적 현실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현실을 다음과 같이 예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점점 세력이 팽창하던 악한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가 그 왕국 본부에 거대한 폭탄이 떨어졌습니다(d-day). 그 본부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 왕국의 잔당들은 산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잔당들은 게릴라를 조직하여 산속에 살면서 배가 고프거나 물자가 떨어지면 평화롭게 사는 도시에 내려와 선량한 시민들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파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한 왕국의 왕자가 다시 나타나 이 잔당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깊은 옥에 감금시켜 버렸습니다(v-day)." 사탄은 산 속에 숨어 사는 게릴라와 같이 기회만 있으면 도시와 같은 복잡한 인간의 마음에 침략하여 쑥밭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엡 6:10,11)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신분을 올바로 정비함으로써 사탄의 권세를 대적할 수 있는 권위를 소유하게 됩니다. 예배와 삶 / 김진호 **거룩함과 천국 우리는 장차 하나님을 직접 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고 말씀하신 이래, 거룩함은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잠자고 있습니다. 사탄은 활동적으로 능력있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교회와 세상의 희망입니다. 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자들은 오직 그들뿐입니다. 우리가 "내가 거룩한 것같이 거룩할지어다" 하신 아버지의 명령에 합당한 자들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행실과 경배와 섬김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거룩함이 되신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된 영께 늘 새롭고 온전하게 우리 자신을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변의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일들을 능력있게 전달할 수 있도록, 주 예수님의 사랑과 장래의 영광을 기억하고, 앞으로 다가올 마지막 때를 바라보며, 또한 교회와 세상의 필요를 생각하면서, 그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되는 데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다른 모든 신자들과 함께 멸망해 가는 세상의 빛과 복이 될 것입니다. 거룩, 이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 앤드류 머레이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 사나운 산돼지로 인해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숙련된 사냥꾼을 동원해 산돼지를 잡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끝났습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산돼지를 잡으러 간다고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달 후 노인은 산돼지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어떻게 잡았느냐고 묻자 노인은 "산돼지가 음식을 구하는 곳을 찾아서 곡식을 계속 뿌렸더니 산돼지들은 별 노력없이 공짜로 곡식을 먹게 된 것을 알고 날마다 그곳으로 모이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 옆에 함정을 파 놓아 잡았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짜 심리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있듯이 땀과 노력없이 세상을 살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됩니다. 자기의 육체의 쾌락과 즐거움만을 심으면 종국에 가서는 영혼과 육체가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일을 위하여 심는 자는 비록 이 일이 힘들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후에는 참 기쁨과 평안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멧돼지처럼 우리도 인생의 쾌락과 안락으로 인하여 육체의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심는다면 종국에는 영원한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불행을 초래할 것임을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징검다리 / 정장복. 주승중 엮음 **소망은 생명이다. 샤르니라는 한 프랑스인이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친구들에게서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면회를 오던 가족들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그는 돌 조각으로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깔려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고개를 들고 나왔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푸른 잎사귀에 부어주곤 했습니다. 그 싹은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소망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옆방에 면회왔던 죄수의 딸이 이 감옥 안을 들여다보다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여왕은 말했습니다.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황제에게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샤르니는 감옥에서 핀 꽃을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기까지 가꾸었습니다. 소망은 생명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말고 전진하여야 합니다. 소망은 좋은 동역자입니다. 위에서 정상을 본다 / 강문호 **오른쪽 왼쪽 빅터 프랭클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신과 의사로서 2차 대전 때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몇 날 며칠을 타고 간 열차에서 내리자 독일군 장교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씩 내릴 때마다 손가락으로 오른쪽 왼쪽을 가리켰습니다. 그 손가락의 방향에 따라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른쪽으로 간 사람들은 당일 가스실에서 다 죽었고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살아 남은 것입니다. 얼나나 숨막히는 순간입니까? 마지막 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때에 비슷한 상황이 우리 눈앞에 벌어집니다. 물론 심판석에 앉으신 그분은 낯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오른쪽 왼쪽을 가리키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한 운명대로 오른쪽 왼쪽을 가리키실 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으면 오른쪽으로, 믿지 않았으면 왼쪽으로 가라고 지시할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놓고 불공평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믿어도 내가 믿은 것이고 안 믿어도 내가 안 믿은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것도 내가 믿어 얻은 것이요, 영생을 거부한 것도 내가 안 믿어 거부한 것입니다. 요한이 전한 복음(상) / 옥한흠 **정욕의 문제를 막아라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런 관계가 불륜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면, 애초부터 몇 가지 조치를 취하라. 첫째, 그 사람을 상상하면서 멍한 시간을 보내는 일을 멈추어라. 상상 연애는 실제 성 접촉만큼이나 위험하다. 둘째, 둘이서만 있지 않게 하라. 사무실 문을 얼어 두라. 둘이서만 점심을 먹는 일을 하지 말라. 셋째, 책임있게 보고할 사람을 만들기 위해 믿을 만한 친구에게 사정을 털어놓아라. 넷째, 그 사람에게 당신이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절대 말하지 말아라.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유혹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성추행으로 고소할 수도 있다. 다섯째, 최악의 사태를 마음으로 그려보아라. 불륜으로 말미암아 생긴 상처는 평생을 갈 수도 있다. 여섯째,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낌을 실행에 옮기느냐는 아주 다른 문제이다. 정욕 때문에 문제에 빠지는 사람들은 보통 자아에 관해 굵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자아 문제를 이끌고 간다. 자기 증오나 불안감은 연애심 혹은 성적 접촉이라는 감상에 의해 경감된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염려하는 것만큼 그렇게 호감가지 않는 사람은 아니라거나 사랑하기 힘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 받으려는 과정에서 정욕의 덫에 걸린다. 이런 사람들은 창창한 미래를 순간적인 만족 위로 내팽개치는 바보들이다. 이런 종류의 강한 정욕은 정직하고 열린 친밀함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여기서 친밀함은 성숙한 결혼, 성장하는 부부를 지향하게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있는 것이다. 사명 돈 의미 / 스테반 아터번 ** 저는 우리 교회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우리 교회 늙은이들이 꿈을 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이 선교에 대한 환상. 비전을 가지게 되고, 우리 늙은이들이 많은 선교사들을 내어 보내는 꿈을 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비전을 복음을 전하는 꿈입니다. 증인의 사명을 다하는 꿈입니다.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라는 책(강헌구 지음)은 자녀의 미래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억만금의 재산보다 한 줄의 비전을 물려줘라!"고 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소개된 두 사람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15세 노예소녀의 '흑인여성을 위한 대학 건립의 비전을 가졌던 메리 베툰 여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75년 미국 남캐롤라이나 주에서 흑인 노예 부부의 딸로 태어난 메리 베툰(Marry Bethune)이 꿈을 간직하게 된 것은 15세 때였습니다. 베툰이 주인집 거실에서 어떤 책을 한 권 집어든 순간 누군가가 "내려놔! 읽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딜 감히 책에다 손을 대는 거야!"라는 힐난의 소리를 퍼부었습니다. 순간 베툰은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녀는 이것이 바로 흑인 아이들과 백인 아이들을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구분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글을 배워야 한다. 글을!' 하고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두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집에서 8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흑인도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곧이어 덴버 시에도 흑인이 공부할 수 있는 교육 기관이 개설되자 거기서 공부를 마친 후 급기야 시카고에 있는 무디 성경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한 그녀의 고생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그녀는 흑인 소녀들을 가르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가슴속에 그 꿈을 키워가며 모든 어려움을 참아냈습니다. 졸업 후 그녀는 흑인학교를 직접 설립하기 위해 플로리다 주의 데이토나 비취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2층 짜리 낡은 건물 하나를 임대해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헌 가구를 모아 정돈하고 열심히 쓸고 닦았습니다. 개교 첫날엔 다섯 명의 흑인 소녀들이 출석했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발을 용감하게 내어 딛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의 재정이 문제였습니다. 건물 계약금을 치르고 난 후 수중에 남은 돈은 1달러 50 센트가 전부였습니다. 그녀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 겨울 휴가 차 데이토나 비취에 와 있는 제임스 캠블이라는 부자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그는 쾌히 이사장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 학교가 개교 50년을 맞이했을 때 , 낡고 초라한 2층 짜리 건물은 대지 36 에이커에 19개 빌딩을 갖춘 베툰 쿡먼 대학으로 변해 있었고 다섯 명에 불과하던 학생은 1천 3백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학교 여학생이 순교하면서 남기고 간 자유학교의 꿈을 가졌던 김정렬 교장의 이야기입니다. 1940년 대 후반 북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학교의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에 전교생은 운동장에 집합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운동장에 집합한 모든 학생들의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에서 일체의 종교활동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시검열을 통해 종교인을 탄압하곤 했습니다. 소지품 검사에서 두 개의 성경책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남학생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학생의 것이었습니다. 성경책을 소지하고 있던 두 학생은 즉시 교장실로 불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겁에 질린 남학생은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학생은 완강하게 "선생님, 전 기독교인입니다. 성경은 악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무슨 잘못인가요?" 라고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학생은 퇴학당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여학생은 내무서로 끌려갔습니다. 그후 수 주일이 지나도록 여학생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 **보혜사 성령 충만 - 보혜사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변화 1. 나쁜 버릇이 고쳐집니다. 2. 자기를 조정할 줄 압니다. 3. 창조적 생각을 갖습니다. 4.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5. 화평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6. 문제를 해답으로 바꾸는 사람이 됩니다. 7. 영적 설득력이 생깁니다. 8. 반대 의견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9. 믿음의 삶에 동반자들이 생깁니다. 10. 하나님이 섭리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합니다. 11. 주위 사람들에게 평안을 줍니다. 12. 이웃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13. 자기의 모든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14. 강력한 끈기가 생깁니다. 15.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16. 모든 면에 믿음을 근거로 한 낙관주의자가 됩니다. 17.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비전을 품은 그리스도인 비전과 집중력 비전은 핵심을 간파하는 능력이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핵심을 간파하고, 핵심을 붙잡고, 핵심에 집중한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핵심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리더십을 공부하면서 나는 ‘파레토의 원리’를 배웠다. 흔히 20/80의 원리라 부른다. 파레토의 원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과 인력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20%의 일에 투자한다면, 그 20%의 일이 우리에게 80%의 성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중요한 일에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비전을 성취한 사람들의 특징은 집중력에 있다. 학습도 집중력이 없으면 잘할 수 없다. 집중력이 없이는 지각을 개발할 수 없다. 기억력과 창의력도 집중력이라는 터전에서 자란다. 집중력이 없이는 문제를 잘 해결할 수도 없다.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는 것도 집중력에서 생긴다. 두 마음을 품게 되면 평화는 상실되고 불안이 찾아온다. 집중력이 없으면 결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유부단하다. 위기란 결단하지 못할 때 찾아온다.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우유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집중력은 꿈꾸는 자가 소유해야 하고 개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비전을 가진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전을 성취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고, 사람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신다(마 7:16). 열매를 맺는 비결은 집중력이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누구나 잘 할 수 있다. 잘하고, 하고 싶고, 소유하고 있는 재능과 은사에 초점을 맞추어 최선을 다하라. 지금까지 해보아도 잘 되지 않는 것,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내려놓으라. “죽은 말을 계속해서 타지 말고 그 죽은 말에서 내려오라.” 아직도 남아 있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게 되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게 된다. 한 분야에 집중하게 되면 한 분야를 통달하게 된다. 한 분야에 통달하게 되면 어떤 분야도 통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탁월함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집중력을 개발할 수 있느냐에 있다. 집중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인생의 변화는 관심과 의도가 만날 때 일어난다. 관심은 에너지를 공급하고, 의도는 구체적인 변화를 창출한다. 관심을 갖고, 의도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면 구체적인 성취의 열매를 맺게 된다.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어 서야 한다. 깊이 생각해야 한다. 세심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관심과 함께 흥미를 가져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무한한 열정을 가진다. 그러나 싫어하는 일에는 의욕을 상실하게 되며, 집중력도 떨어진다. 집중력은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할 때 높아진다. 바울은 자신이 성취하기 원했던 목적과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목적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가 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제공해주었다. 목표는 그가 어떻게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위기에 강하다. 위기 때에도 환경이나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목표에 집중하게 된다. 집중력은 긴박감을 통해 높아진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3년이란 기간을 정하셨다. 주님은 집중해서 사역하신 후에 십자가를 지셨다. 어떤 사람은 “목표란 마감기한을 정한 꿈이다”고 정의했다. 나의 경우 마감이 임박하지 않으면 좀처럼 전력을 다해 원고를 쓰지 않는다. 나는 설교를 쓸 때도, 한 주일 동안 본문을 묵상한 후에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아침에 설교에 몰입한다. 주일을 앞에 두었을 때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박한 상황에서만 집중력을 발휘한다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때로는 초조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긴박한 상황이 아닐 때에도 우리는 아낌없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 고도의 집중력을 얻기 위해서는, 평소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집중과 긴장 완화는 함께 가는 동반자이다. 집중을 잘하기 위해서는 삶의 여백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에는 말씀묵상을 통해 집중력이 높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묵상시간에 나는 초연해진다. 그리고 긴장을 완화하게 된다. 초연한 중에 한 말씀에 집중하게 되면 묵상 중에 신비로운 집중력을 갖게 된다. 몰입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초연과 집중이 함께 만나는 곳이 말씀묵상이다. 그때 영감은 춤을 추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오르게 된다.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아주 좁은 분야를 전문화해서 핵심능력을 개발하라. 스스로 좋아하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라. 모든 에너지를 한 우물에 쏟아부어라. 그것이 비전을 성취하는 비결이다. 강준민 / 로스엔젤레스 로고스 교회 담임 목사 ** 복의 근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우리 민족은 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새해 인사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한다. 성경도 역시 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 되시며, 그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풍성히 받고 누리고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엡 3:19). 우리 삶의 문제는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이미 받은 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자의 복을 주신다. 인격자의 복이란 깨달음, 감당함, 만족함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먼저 깨달음의 복을 주신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아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복이 아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식, 재물, 건강, 젊음은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상태도 아니며, 당연한 결과도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과 잠과 같이 정말 소중한 것들은 그 가치를 알기 위해서 한번쯤 중단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또한 감당함의 복을 주신다.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누리고 감당할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의 복을 받았으나 그 지식으로 인하여 오히려 교만해진다. 작은 지식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그 교만한 지식이 복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의 선봉이 될 것이다. 가난했던 사람이 재물의 복을 받을 수 있으나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타락의 도구가 될 뿐이다. 가난할 때는 열심히 일했고 아내를 사랑했으나, 부유하게 되면서 노동의 기쁨을 잃고, 휴식의 즐거움도 잃으며, 가정의 파탄을 경험하게 되는 예가 흔히 있다. 이때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재물은 오히려 재앙의 올무가 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또한 만족함의 복을 주신다. 아무리 귀한 것을 받아서 누려도 만족함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될 수 없다. 지난 섣달 그믐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동해안으로 몰리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첫째 아이가 일출을 보러 가자고 보챘다. 나는 송구영신 예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저녁을 맛있게 사준 것에 대해서 만족하라고 말하면서 잔소리를 했다. “야, 너는 한 가지를 해주면 또 다른 것을 해달라고 하지? 이제 만족해라. 만일 아빠가 일출을 보러 데려가주면, 너는 또 다른 것을 달라고 할꺼야. 안 그래?” 그랬더니 아이는 이렇게 대꾸했다. “아빠, 실험해보세요.” 아흔 아홉 가지의 좋은 것을 가졌어도 한 가지 못마땅한 것을 생각하면서 만족하지 못할 때 그 곳에는 복이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는 언제나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사 51:3)가 뒤따른다. 좋은 것을 받아누리는 것이 큰 복이지만, 더욱 큰 복은 만족함을 느끼고 표현하는 복이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복 있는 사람은 복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다. 때로 돈은 빼앗길 수 있어도 복은 빼앗기지 않으며, 한동안 건강은 빼앗길 수 있어도 복은 놓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근원이 되거나 지식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것을 빼앗길지언정 결코 복은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복을 받고 누리고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만나서 복을 빌었듯이,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창 14:19). 우리가 서로에게 멜기세덱의 역할을 할 때,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모든 열방에도 풍성한 복을 내리실 것이며,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따라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사 51:2). 장경철 / 목사, 서울여대 교수 **가까운 사람들을 대하는 나를 위한 기도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실망시키는 일이 결코 없게 하시고 그들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게 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옵소서. 하나님, 나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로 하여금 친구들에 대해 이기적이거나 그들에게서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조금도 그들을 이용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게 하시며 그들에게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해줄 것을 원하는 것처럼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항상 노력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직장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들이 편한 마음으로 나와 함께 일할 수 있게 하시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회피하거나 게을리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지 않게 하옵소서. 배우는 것에 열심을 품게 하시고 남에게 일하는 법을 가르치거나 도움을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부족한 자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당신의 사랑과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항상 확신케 하옵소서.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사무엘 채드윅의 기도의 길「The Path of Prayer」, Samual Chadwick 기도하는 법 배우기 우리는 기도를 배울 수 있는가?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형식을 가르쳤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를 요구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언가 해주시기를 요구한 경우는 많지 않았고, 또 요구한 경우는 보통 그릇된 것이었다. 만약 제자들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도의 형식을 주셨을까? 주님의 기도생활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기도하고자 했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어떤 정해진 형식의 필요를 느꼈다. 일정한 형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창조적인 영혼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쉽다. 모든 기도는 기도의 형식들과 함께 시작된다. 기도함에 의해 배운 기도 기도하는 것 외에 기도를 배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기도에 관한 훌륭한 철학도 기도하는 영혼을 가르친 적이 없다. 이 주제가 어려운 문제들로 둘러 쌓여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문제들은 모두 응답 받은 기도와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쁨 안에서 해결된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만일 기도가 합리적인 이해를 기대한다면, 그 기도는 결코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한다. 에디슨은 1921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어떤 사물에 관하여 1%의 백만 분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빛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중력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어설 때 무엇이 우리의 발을 땅에 지탱시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전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열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자기(磁氣)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들에 관해 많은 가설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무지하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용하면서 발견한다. 연습하면서 배운다. 한 사람이 기도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또 그가 기도에 관한 모든 신비를 이해한다 할지라도 만일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기도를 배우지 못할 것이다. 능력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 있어왔고, 그들은 기도하기를 배웠다. 기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생애에 다른 이들과 똑같은 시기가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강하게 되었고, 형통하였다. 모든 순간에 은총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들은 은총의 훈련 가운데서 능력의 비밀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몇은 야곱이나 시몬이나 사울처럼 다시 이름 지어졌다. 그들은 “기도하는 존”, “기도하는 메리”, “기도하는 브람웰” 그리고 “기도하는 하이드”로 불렸다. 그들은 기도로 영국을 구했다. 그들은 기도로 지옥의 문을 흔들었다. 그들은 기도로 천국의 창을 열었다. 어떻게 그들은 기도하기를 배웠는가? 그들은 많이 기도함으로써 기도를 배웠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기도했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 논쟁하지 않고, 다만 기도했다. 기도의 훈련 기도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동시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없이는 아무도 기도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몽고메리의 찬송은 기도의 심오한 단순성에 영원성을 부여하였다. “기도는 입을 열어 말했든지 표현하지 못했든지 영혼의 진지한 갈망, 가슴 속에서 떨리는 숨겨진 불의 몸짓. 기도는 어린아이의 입술로도 할 수 있는 말의 가장 단순한 형태, 기도는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미치는 가장 고상한 선율.” 그것은 빛나는 진실이다. 기도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이곳으로 모신다. 부르짖음은 다듬어진 말씨보다 더 강하다. 바리새인은 그들 자신을 향해서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그의 머리와 가슴에서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외식일 뿐이었다. 세리는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그 기도는 말하자면 영혼의 비상구가 아니라, 기도의 사람의 몸에 밴 습관과 경험이다. 그러한 기도는 훈련에 의해서 나오고, 그렇게 힘든 학과는 없다. 콜레리지(Coleridge)는 말하기를, 그러한 기도는 인간의 마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에너지이며, 모든 기능이 전체적으로 집중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대다수의 세속적인 사람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이 기도에 있어서 무능하다고 단언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실 때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이러한 기도의 삶을 위해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급히 하는 기도와 중언부언의 기도는 결코 기도에 강한 영혼을 만들어낼 수 없다. 예술과 기술에 숙달되기 위하여, 학습자들은 능숙해지기까지 매일 정기적으로 시간을 투자한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기 위하여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고, 때로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셨다. 모든 기도의 성인들은 매일 몇 시간씩 기도했다. 우리는 그러한 예들을 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오늘날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시간 없이는, 그리고 많은 시간이 없이 우리는 결코 기도를 배울 수 없다. 우리는 24시간 중의 한 시간을 하나님 자신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기도 훈련을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을 떼어놓음으로써 기도훈련의 학과를 시작해나가자.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진지하게 준비해야 한다. 당신의 마음과 힘을 다해, 그리고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신실하게 행하는 것- 이것은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전투의 최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오 주님, 우리가 구하오니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기도하는 성령님께서 숨을 쉬나니, 감찰하시는 능력을 보내시어 모든 뒤얽힌 문제들로부터 나의 근심하는 마음을 물러나게 하시네. 억눌린 세속적인 생각에 나의 연약한 마음은 계속되네. 영원한 휴식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나타나시어 명하소서.” 기도의 훈련이 고되게 느껴질 때, 다음의 말들을 기억하라. “주님, 약하고 마음 산란한 기도 중에 종종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시네. 홀로 마음이 지친 죄인이 거기서 아주 종종 주님을 찾습니다. 겸손한 기도는 그 영혼을 모든 미혹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온전히 가르치네. 사랑하는 주님, 기도는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The Path of Prayer, Samual Chadwick, 번역/ 송광택 **하나님의 마무리 손질 미국의 오랜 시에 “거장의 손이 닿을 때(The Touch of the Master’s Hand)”라는 시가 있다.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이 있었다. 3달러까지 부르는 사람이 있고 더 이상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고 마치 보물을 다루듯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 구석구석 닦았다. 그리고 현들을 조여 음정을 잡고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 아름다움은 천사의 음악같이 청중을 황홀하게 했다. 한 곡을 끝내고 노인은 감회 깊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있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40년 만에 너를 만져보는구나.” 그리고나서 다시 연주를 시작하였다. 경매는 갑자기 활기를 띠어 결국 이 바이올린은 3천 달러에 낙찰된다는 내용의 시다. 이 시는 누더기가 된 인간, 죄와 허물로 값없는 인간, 나 같은 죄인에게 거장(Master는 주님의 뜻으로 사용)의 마무리 손질이 끝났을 때 아주 새로운 가치가 부여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광선 속에 먼지처럼 드러나는 인간의 전부를 볼 때 걸작품은 하나도 없다.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무리 손질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끔히 씻음을 받는 일, 만신창이인 나를 하나님의 마무리 손질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맡겨 용서를 받고 새사람이 되는 길만이 나의 인생을 걸작품으로 남기는 길이다. <인간과 인생 / 최효섭> **자기 중심 자기 중심이란 교만의 충동적 표현 중 하나이다. 그것은 자기의 재간과 중요함을 나타내고자 자신을 과대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이다. 자기의 추종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찬사를 받아왔던 지도자는 이런 유혹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사모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말루아 학원의 원장으로부터 원주민 목사들의 훈련을 위해서 학생들에게 강연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의 강연은 베일을 쓴 야비한 예언자 이슬람 교도의 이야기에 기초를 두었다. 그 예언자는 백성의 교사들 가운데서 화려한 빛이 나는 베일을 얼굴에 썼는데, 그 이유는 그의 용모의 영광이 너무 찬란함으로 아무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베일은 오래되어 썩어버렸다. 그때 백성들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의 추함을 숨기기 위해서 애쓰는 한 추한 노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스티븐슨은 아무리 고귀한 진리를 가르치며, 아무리 교묘하게 인격의 흠을 변명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그 베일은 벗겨지게 될 것이며 사람은 성실한 만큼 백성들의 눈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당신에게서 베일 아래 억제하지 못하는 자기 중심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를 닮은 변용된 인격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영적 지도력 / 오스왈드 샌더스 더 깊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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