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대인 청년이 액클레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 왜 날 보고 자꾸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내가 무슨 이유로 예수를 믿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된 젊은이를 내가 왜 믿습니까?"
그러자 액클레이라는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맞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 되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요. 내 마음속에 계셔요. 나는 날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 있어요. 지금 내 안에 계신데 안 보여요?"
유대인 청년이 그분을 볼 리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액클레이(A.H.Ackley)라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런 찬송을 썼습니다.
151장 찬송입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내 평생 주님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시네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 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이 고백이 어떻게 액클레이라는 사람 한 분만의 고백이요 찬양이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찬양인 줄 믿습니다.
**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에 위치한 몬트레이 마을은 오랫동안 게으름뱅이 펠리컨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부들이 그물로 잡은 물고기를 씻을 때 잔챙이는 모두 개펄에 내던졌는데 이것이 게으름뱅이 펠리컨들에게는 앉아서 받아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간식 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몬트레이의 펠리컨들은 매우 만족스러웠으며 그저 놀기만 하는데도 살이 뒤룩뒤룩 쪄 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어부들이 던져 버리던 잔챙이 고기들이 상업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자 펠리컨들이 주워 먹을 만한 것은 더 이상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펠리컨들은 스스로 먹이를 구할 생각은 않고 여전히 버려진 것만 찾아다녔던 것이다. 결국 몬트레이의 펠리컨들은 한두 마리씩 굶어 죽기 시작했고 이것을 본 어부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좀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으로부터 먹이를 스스로 잡을 줄 아는 펠리컨을 몇 마리 수입하여 풀어놓았다. 그러자 한동안 굶주림으로 죽어 가던 몬트레이 펠리컨들도 열심히 뛰어다니며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미국의 남북 전쟁이 나기 바로 전 어느 봄날이었다. 한 소년이 일터를 구하다가 오하이오주에 있는 어느 농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농장 주인은 튼튼하게 생긴 소년의 모습에 만족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소년을 채용했다. 단지 그 이름이 짐이라는 것밖에는 몰랐다. 짐은 난로에 땔나무를 장만하고 젖소를 돌보고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하면서 밥은 부엌에서 먹고 잠은 건초 창고에서 잤다. 그 여름이 지나기 전에 짐과 주인의 딸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돈도 없고 장래도 없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거칠게 거절당하자 짐은 조용히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35년이 지난 후 어느 날이었다. 농장 주인은 창고를 새로 지으려고 헌 건초 창고를 헐다가 그 옛날 자기 집의 하인이었던 짐이 주머니칼로 서까래에 새겨놓은 이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James A. Garfield라는 이름 밑에 날짜와 함께 그의 예명 짐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그는 제 20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목장 주인의 이야기는 한낱 웃음거리로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 교훈적이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할 수는 없으며 사람을 지금의 모습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물론 이러한 극적인 사건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 관계는 너무도 흔하지 않는가.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아주지 않고 숫자나 노동력이나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우리가 대하는 그 누구에게라도 동일하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생자필멸
옛날 아름드리 우거진 숲속을 한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한가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한 과부가 애통해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과부는 단 한뿐인 외아들이 죽어서 너무나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선생은 그 여인에 울지 말라며 위로했으나 여인은 더욱 서럽게 울며, "제발 내 아들을 좀 살려 주십시오"라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여인을 측은히 여겨 "지금 곧 일어나서 마을로 가, 아직까지 한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 줌 얻어다가 죽을 끓여 먹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아들은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일러주었다. 과부는 기뻐하며 마을을 향해 힘있게 걸어갔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그 젊은 과부는 힘없는 모습으로 다시 찾아와 한탄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찾아다녀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은 없습니다."
이때 선생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자필멸이라는 말이 있듯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 미켈란젤로가 눈이 멀었을 때 로마 시의 사람들은 퇴적더미에 묻혀있던 조각을 발견하고는 "이것은 그리이스 시대의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미켈란젤로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눈은 멀었지만 그의 예민한 손으로 그 조각을 만졌습니다. 눈썹과 이마, 코, 얼굴의 윤곽, 어깨를 만지고 나서 눈먼 미켈란젤로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장인의 작품입니다. 틀림없이 피디아가 만들었을 것입니다."
** 주의 뜻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나에게 빛과 같은 존재로 다가오셨다. 그분은 어두움과 무지와 혼돈, 불신앙과 답답함으로 가득한 내 영혼에 밝은 빛으로 오셨다. 마치 아침햇살에 안개가 사라지듯이 의로운 해가 발하는 치료의 광선이 나의 영혼을 시원케 해 주셨다. 나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영적인 것에 대해 눈이 열리게 되었다. 내 영혼은 말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멋지고 값진 일인 줄은 정말 몰랐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멋진 것을 무엇 때문에 외면하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값진 것을 무엇 때문에 원하지 않는가. 주 예수 모셔요. 당신의 구주로. 주 예수 모시면 구원받는 이 기쁨. 주 예수 모시면 거듭나는 새 생명..."
1981년 7월의 일이었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그 해 5월에 주위의 몇몇 친구들, 형들과 함께 '주찬양선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별다른 비젼이나 욕심 없이 막연하게 찬양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되었으니까, 우리 팀도 수련회 같은 것을 해야 될 게 아니냐"고 해서 수련회를 가지기로 했다. 수련회를 자체적으로 진행할 만한 여건이 못되었기 때문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갖는 제자훈련에 참여함으로 수련회에 대신하기로 했다. 교회에서 갖는 수련회보다 좀더 체계화되고 준비된 프로그램이겠거니 생각하고, 습관대로 시작시간보다 조금 늦게 국수리 틴라이프 수양관에 도착했다. 제일 큰 강당에서 찬양소리가 들려왔다. 시대에 뒤떨어진 복음성가들인 데다가 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졸린 오후시간 탓인지 별로 맘에 와 닿지 않았다.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친한 친구가 맨 뒤에서 손짓을 했다. 그때 먼저 도착했던 친구들이 달려들며 고자질하듯이 소근거렸다.
"야! 우리 여기 탈출하자."
그 친구의 첫마디였다. 왜냐고 묻자 서로 다투듯이 얘기를 했다.
"점심을 먹었는데 완전 풀밭이야. 이런 것을 10끼를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오더라."
"야! 여기 프로그램이 어떤지 알아? 성경공부가 하루에 10시간이래. 10시간!"
"이게 무슨 수련회야!"
이상하게도 그 얘기들이 흥미롭게 들려 왔다. 물론 기대했던 바는 아니지만 뭔가 색다른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친구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형제가 치는 기타는 줄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것 같았고, 코드도 한 곡에 3가지 이상을 잡지 않는 것 같았다. 노래도 신통치 않았다.
"아니, 저 사람이 뭘 잘한다고 저기 앞에서 인도를 하고 있지? 저 사람하고 나하고 자리가 바뀐 것 아냐?"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뭐가 그리 좋은 지 싱글벙글 웃으며 눈은 반쯤 내리감고 찬양하는 모습이 그렇게 바보 같아 보일 수가 없었다. 아무튼 찬양시간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다 못마땅했다. 역시 내일 아침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시간은 말씀을 듣는 시간. 좀 못생기신 전도사님이 간증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처음엔 다 아는 말씀을 또 들어야 하나하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다 알고 있는 그 얘기가 꼭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들려 왔다. 아주 감동적이었다. 나는 초청에 응해 일어나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 일은 나에게 획기적인 일은 되지 못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일어나서 영접기도를 한 것은 그전에도 5번쯤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는 했지만 줄곧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중 1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그때까지 가시지 못했었다. 그것으로 해서 내 맘 속에는 나도 모르게 신앙생활 자체에 대한 회의조차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로 그 존재를 깨닫기 원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영혼의 꺼풀을 벗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수련회의 시간 시간을 보냈다. 그때마다 내 영혼을 답답하게 했던 무언가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영혼이 가난해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흘째 밤, 나에게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난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어느 할머니의 자백기도 속에서 나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자아가 깨어지는 순간, 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난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다. 난 모태 신앙인으로 한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었고, 술과 담배도 나와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예수님을 못박을 만한 죄가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나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느낀 감격과 나의 타락한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는 사실이, 모두 눈물로 표현되게 되었다. 다음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모든 만물이 새롭게 느껴졌다. 시들어가는 들풀조차도, 아니 생명이 없는 돌멩이조차도 아름답고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두가 그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지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다.
내 나이 20살, 교회생활 약 20년 동안 주워 들은 성경얘기가 상당히 많았을 텐데도, 내가 제대로 암송할 수 있는 말씀은 창세기 1:1과 요한복음 3:16 정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억하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말씀들이 하나하나 그 의미와 함께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눈을 뜰 때나 잠자리에 들 때, 또 길을 걸을 때나 버스를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곳 무슨 일을 하든지 말씀들이 수시로 떠오르면서 그 뜻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성령님의 이러한 구체적인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을 경험하면 할수록 내 속에는 또 다른 갈등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건 내가 주님과 깊이 교제할수록 또 주님을 많이 알수록 나를 알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 사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주님의 거룩하심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나의 성품들 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나의 모습, 아니 오히려 선을 원치 아니하고 악을 사랑하는 나의 뿌리깊은 죄성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못된 존재로 만드셔서 이런 어찌할 수 없는 갈등을 겪게 하시는 걸까.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미웠다. 그러는 동안 내게는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사람도 못되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반복되는 실수와 반복되는 영적 패배감으로 인해, 난 아무런 기대나 용기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때 주님 주신 위로의 말씀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 (빌 1:6)는 것이었다.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한 분은 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시작하였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지만, 바로 주님이 시작하셨다는 그 사실에 소망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시간까지 지으신 그분이 이뤄주신다는 약속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제한된 옛 성품을 지닌 몸을 벗어나, 새로운 몸으로 지음 받아 영원히 주와 함께 살 것이라는 것이 참된 소망이 되었다. 주님은 나에게 생명과 소망뿐 아니라 주님 나라를 위한 소명과 비젼까지도 주셨다. 대학졸업반 때였다. 내가 앞으로의 직업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주님께선 청소년들의 아픔을 보게 하셨다. 볼 만한 공간, 들을 만한 소리, 누릴 만한 문화가 없는 우리 청소년들. 그들 거의 대부분이 즐겨 듣는 가요나 팝송은 거의가 퇴폐적이거나 감상주의 또는 인본주의적이었다. 심지어 일부 팝송은 직접 사탄을 찬양하는 것인 데도 이런 것을 금하기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것에 대치할 만한 영적인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함께 통탄하는 자리에 있었으나, 누군가는 시도를 해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나라도 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여졌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하던 순간, 난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에 비할 만한 감격에 사로잡혔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 것이지만 내 쪽에서도 삶의 대책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자격증과 학위 따위가 필요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또 그런 것이 많은 편이 나와 하나님에게 유리하리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새 비젼과 함께 난 갑자기 멍청해졌고, 아무런 계산도 하지 못하게 됐다. 비젼을 생각할 때는 말할 수 없는 감격이었으나, 현실을 돌아볼 때는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 주님께서 주신 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2~3개월의 기다림 가운데 나는 '기다림은 곧 믿음'이라는 진리를 발견했다. 내가 단 1분이라도 평강 가운데 기다릴 수 있는 건 믿음 때문이었다.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 하루하루 살 동안 주님 인도하시니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하나님은 신실하셨다. 그 가운데 송명희 자매와도 만날 수 있게 하셨다. 1985년 1월, 극동방송 어느 프로그램에서 찬양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우연히 구할 수 있었던 송명희 자매의 '너의 쓴 잔을'이란 시에 바로 며칠 전 곡을 붙였던 복음성가를 불렀다. 마침 송 자매가 방송을 듣고서 작사자 허락도 없이 곡을 붙여 부른 작곡자를 찾아 방송국으로 전화를 하게 되었고, 그 연결로 우린 만나게 되었다.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뜻이 통하여 다른 시들에도 곡을 붙일 것을 승낙 받아 모두 11곡을 묶어 '주찬양 선교단'을 통해 발표하게 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곡들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많이 알려지게 됐고, 내 사역은 구체적으로 청소년을 위한 찬양사역으로 열리게 됐다.
87년부턴 찬양사역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됐고, 난 전국을 순회하며 주로 청소년들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이 모든 건 결코 내 뜻이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그분의 인도하심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나에게는 소망이 있다. 하나는 내가 더욱 더 주님을 닮아 거룩하여질 소망이고 또 하나는 주님을 위해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소망이다.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주님, 오직 그분만을 찬양합니다.
*** 최덕신 - '주찬양선교단' 단장 ***
** 삶의 걸음걸이
옛날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해질 무렵이 되어서, 앞으로 가야할 목적지에 해가 아주 떨어진 다음에 당도하게 되면 불편하다고 생각하여 길가에서 마을 사람에게 앞으로 몇 시간이나 더 가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물음을 받은 사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길을 가던 나그네는 다소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하는 수 없이 얼마를 더 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여보시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다보니 아까 자기가 목적지까지 가려면 몇 시간이나 걸리겠느냐고 물었을 때 아부 대꾸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길손은 발을 멈추고 왜 그러느냐고 되물었더니, 그제서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지금의 걸음걸이로 간다면 앞으로 두 시간만 더 가면 되겠소이다."
이 말을 들은 길손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진작 말할 것이지 갈 길이 바쁜 사람을 빨리 가지도 못하게 갈 길을 멈추게 하느냐고 했다. 이 말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여보시오. 당신의 걸음걸이를 보아야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를 알 것이 아니겠소. 아무리 먼 곳이라도 빨리 걸으면 시간이 단축될 것이고, 그와 반대로 가까운 곳이라도 늑장을 부리면 오래 걸리지 않겠소?"
무척 과학적인 대답에 길손은 그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나는 어떤 걸음걸이로 목적지를 가고 있는가?
제대로 방향은 잡고 걷는 것인가?
괴테는 "너 자신을 알고 나서 나에게 말하면 네가 누구인지 알려주리라. 네가 선택한 직업을 말해주면 나는 너의 장래를 점쳐주리라."고 했다.
** 희한한 탈옥수
어느 사내가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튿날 사내는 이가 아프다고 해서 이를 뺐다. 며칠 후 그는 다시 맹장이 아프다고 해서 맹장을 제거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그는 다시 맹장이 아프다고 해서 맹장을 제거했다. 그리고 다시 그는 편도선이 아프다고 편도선을 제거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감옥 안의 죄수가 물었다
"왜 견딜 만한데 그렇게 제거 수술을 받습니까?"
"아, 예. 저는 하나씩 감옥을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부분이 모인다고 항상 온전한 하나가 되는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 독수리가 날지 못한 이유는...
어떤 개구장이가 산에 갔다가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개구장이는 마침 알을 품고있는 암닭의 둥지 속에 독수리 알을 집어넣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여러 병아리들과 함께 새끼 독수리도 부화가 되어 나왔습니다. 다른 병아리들과는 달리 몸집이 크고 부리와 발톱이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깃털이 별났기 때문에 새끼 독수리는 자랄 수록 고민을 더하였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험하게 생겼을까?"하고.
새끼 독수리는 닭장을 뛰쳐나갈 것을 궁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입 부리와 발톱이 어디에 소용되는 지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겨드랑 밑이 근질거리는 것이 날개가 돋으려고 그러는 것인 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그저 자신이 '병아리'려지 하고 다른 병아리들이 하는 짓을 따라 하며 지냈습니다. 낟알을 쪼아먹는 데에 부리를 사용했고 벌레를 찾느라고 발톱으로 땅을 헤집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병아리들한테서 따돌림을 받지 않으려고 돋아 나오는 날개를 자신의 부리로 짓찧었습니다. 어느 날 방, 들쥐 떼가 닭장을 습격해 왔습니다. 닭장은 금방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닭들은 모두 독수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쥐 떼가 무섭게 느껴지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발톱과 부리는 닳아지고 눈망울에도 힘이 하나도 없어, 닭이나 진배 없었으니까요. 다른 닭들과 함께 독수리도 우왕좌왕 도망 다니다가 날이 밝았습니다. 닭들은 일제히 독수리를 손가락질하면서 미워하였습니다.
"저건 몸이 큰 먹충이일 뿐이지, 아무 것도 아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닭장 속의 독수리도 닭들과 함께 많이 늙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독수리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높이 나는 위용 있는 새를 보았습니다. 매섭게 생긴 부리, 갈퀴처럼 보이는 발톱, 우아하고 멋진 날개.......... 부라리고 있는 그 새의 눈 아래서는 들쥐 뿐만 아니라 피하지 않는 짐승이 없었습니다.
"아, 저렇게 멋진 새도 있구나."
초라하게 늙은 독수리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 닭이 독수리를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응, 저건 독수리라는 새다. 날개 있는 새들 중에서는 왕이지. 그러나 넌 꿈도 꾸지 말아야한다. 넌 들쥐한테도 쫓겨다니는 닭이니까 말이야."
당신의 자아상은 당신의 미래의 모습니다.
** 두 천사 이야기
인간들의 기도를 모으려고 지구로 보내진 두 천사에 대한 전설이 있다. 한 천사는 그의 바구니에 사람들의 소원 기도를 가득 채우려 했다. 다른 천사는 그 바구니에 인간들의 감사 기도를 모으려고 했다. 얼마가 지난 후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되돌아 왔다. 한 천사는 바구니가 넘칠 정도로 인간들의 수많은 소원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인간의 감사를 담아 오겠다는 천사의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고, 그 천사는 슬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단지 불평을 하느냐 아니면 감사를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랍니다. 거친 식사, 험한 잠자리....... 환경은 비슷합니다만 감옥에서는 대개 불평만이 가득하고, 수도원은 감사로 하루가 지나간답니다.
사랑과 함께 감사하는 생활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최대 덕목입니다.
** 썩은 사과
어느 날 아버지는 로버트가 거칠고 무례한 소년들과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정원에서 빨간 사과 여섯 개를 따다가 쟁반 위에 얹어 놓고 로버트 앞에 내밀었다. 아들은 몹시 기뻐하면서 그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게 그 사과는 아직 익은 게 아니니까 다 익을 때까지 며칠 그대로 간직해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사과를 보관해 두면서 완전히 썩어버린 또 하나의 다른 사과를 그 여섯 개의 사과들과 함께 두었다. 이것을 본 아들은 썩은 사과가 다른 사과를 모두 썩게 만들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싱싱한 사과가 썩은 사과를 싱싱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니?"라고 하면서 아들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로부터 8일이 지난 뒤 사과를 꺼내왔는데 과연 아들의 말대로 사과는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 있었다. 이것을 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아들을 타일렀다.
"애야, 나쁜 친구들과 사귀면 너도 나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하지 않더냐? 이 사과를 보고서 나쁜 친구들과 사귀면 네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깨달으렴"
**사냥개에게서 배우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어느 날, 길 모퉁이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사냥개 한 마리가 거짓말같이 놀라운 묘기를 연출해 내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구경꾼 중 아무도 그 개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고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개 바로 옆에 있는 한 흑인 소년의 입술이 거의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부드럽고 낮은 음성으로 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가 다 끝나자 그 사냥개는 곧장 자기 주인에게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면서 주인의 눈을 응시했다. 만약 그 개가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분명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렸나요? 주인님께 대한 나의 순종이 충분했나요?"
소년은 그 사냥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녀석, 잘했다. 잘했어!"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도 개를 무척 좋아한단다. 너의 그 자랑스러운 사냥개를 가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구나. 어떠니? 15달러를 줄테니..."(내가 15달러를 부른 것은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꽤 큰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년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지금 말한 액수의 100배를 준다 해도 소용없어요. 이 개는 누구에게도 팔지 않아요!"
그 소년과 헤어진 후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앞을 잘 볼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로 하여금 주인의 뜻에 복종하는 저 사냥개처럼 당신의 뜻에 복종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당신 앞에 서게 되는 날, '잘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게 하소서." -Dr. Lee Roberson
** 하나님은 급하시지 않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는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하고 평정을 잃지 않았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절친했던 친구들은 그가 때때로 자신의 성마른 성격 때문에 괴로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느 날 한 친구는 그가 울 안에 갇힌 사자처럼 마루 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브룩스 박사, 뭐가 문제지?" 하고 물으니, 그의 대답인즉슨 "나는 급해 죽겠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게 문제야!"했다는 것이다.
**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한가하고 평화로운 주일 오후였다. T.V.로 카우보이 영화를 보고 있던 소년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어떻게 해서 전쟁이 시작되었지요?"
"음,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서란다."
소년의 아버지는 신문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독일이 벨기에를 공격함으로써 그 전쟁이 시작되었지."
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남편의 말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 주세요. 그것은 누군가가 살해를 당했기 때문에 시작된 거라고요."
그러자 남편은 몸을 세우고는 거칠게 대꾸했다.
"당신이 대답하는 사람이요, 아니면 나요?"
소년의 어머니는 발끈하여 남편에게서 등을 돌리고 방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소리가 크게 나도록 문을 쾅하고 닫아 버렸다. 한동안 찬장에 접시 집어넣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덜거덕거리더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침묵을 깬 것은 소년이었다.
"아빠, 전쟁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내게 말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도 이제 알았거든요."
** 약속이라는 열쇠
장망성(將亡城)을 빠져 나온 기독도는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꾸준히 왕의 길(King's Way)을 걸어간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도 고달프고 험한 길이어서 기독도는 좀 쉬워 보이는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길은 '의심의 성'에 살고 있는 '절망'이라는 거인의 영토로 그를 인도한다. 결국 기독도는 '절망'에게 사로잡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온갖 방법으로 기독도를 괴롭히던 '절망'은 그에게 자살할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여행을 계속하려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얼마 동안은 정말로 그 거인이 기독도를 정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때 기독도와 함께 잡혀 있던 '희망'이라는 동료가 그에게 값진 승리의 순간들을 상기시켜 준다.
"그동안 당신은 참으로 용감했어요. 그 무시무시한 아폴리온과도 싸워 이겼고, 죽음의 그늘 계곡에서도, 허영의 시장에서도 당신은 참 용감했어요"
그래서 용기를 얻은 기독도와 '희망'은 그 밤에 기도를 시작한다. 거의 아침이 될 무렵까지 기도를 계속하던 기독도는 불현듯 이렇게 외친다.
"맙소사! 난 참 바보야!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지하 감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니... 여보시오 희망, 내 가슴속에 약속이라는 열쇠가 있다오! 그 열쇠는 어떤 문이라도 열 수 있는 열쇠인데 이 의심의 성에 있는 자물쇠도 열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희망'이 말한다.
"그것 참 굉장한 뉴스군요! 어서 당신의 가슴속에서 그 열쇠를 꺼내어 자물쇠에 꽂아 보세요!"
잠시 후 그들은 활짝 열려진 감옥 문을 통해 밝은 세상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
우리는 모두 크건 작건 의심과 절망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먼저 각자의 가슴속에 하나님이 넣어 주신 각종 약속의 열쇠를 꺼내어 의심과 절망의 자물쇠 통에 꽂아 볼 일이다.
**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나이
어느 공장의 한 노동자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비상한 기술 때문에 승진도 빨랐다. 마침내 그는 다니던 그 공장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전보다 더욱 의기양양하고 거만하여 직원들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의 밑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 어느 날 나이가 지긋한 종업원 한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충고의 말을 했다.
"당신은 참 영리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뛰어난 재주를 당신에게 주신 것 같군요.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당신이 잊고 있는 사실들이 있어요."
이 말을 들은 그는 "그게 뭡니까?"라고 하면서 그 연장자를 비웃으려 했다.
그 연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뛰어난 능력이 당신을 정상에 오르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 정상을 유지하는데 합당한 인격이 당신에게는 부족합니다. 당신의 능력이 하나님께 주신 선물임을 인정할 만큼 당신은 더 성숙해야 합니다." -Walter B. Knight
** 가장 진귀한 보석
송나라 재상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보석을 들고 재상을 찾아갔습니다. 어렵게 구한 값비싼 보석을 뇌물로 바치려는 것입니다.
"이 보석은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보석입니다. 재상님께 드리려고 가져왔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재상은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도 그에 못지 않은 보석이 있습니다. 이런 값비싼 보석을 보고도 탐낼 줄 모르는 내 마음입니다. 만약 내가 그대의 보석을 받게 되면 그대도 값비싼 보석을 잃게 되고, 나도 내 마음의 보석을 잃게 되니, 어서 도로 가져가십시오. 나는 내가 가진 보석으로도 충분합니다." 라고 말하며 보석을 가지고 온 사람을 돌려보냈습니다.
내 마음의 보석을 잃는 것이 가장 진귀한 보석을 잃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보석은 무엇입니까?
** 선한 길잡이를 만나는 행운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다른 장비나 기구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길잡이가 없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되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산맥을 등정하는 데도 길잡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암벽에 부딪쳤을 때에, 험한 길을 만났거나 길을 잃었을 때, 위기상황이 발생한 그 곳의 지리를 잘 알아서 올바르게 대처할 줄 아는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운입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인생의 진로를 정하지 못해 방황할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좀더 좋은 길잡이를 만났더라면 훨씬 고생을 덜 했을 텐데, 좀더 일찍 바르게 사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스승을 만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 말입니다. 좋은 길잡이를 제대로 만난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인생의 길잡이가 있는지요?
** 지나친 욕심은 해가 됩니다
어느 나이 많은 성자(聖者)가 길을 가다가 두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헤어지게 되자 성자가 동행한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잘 왔소. 보답으로 두 분의 소원을 들어드리리다. 다만 먼저 말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되 다음 사람에게는 그 두 배로 소원을 들어드리겠소."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먼저 말하면 저 친구가 두 배나 되는 소원을 이루겠지. 그러나 절대 먼저 말할 수 없어."
서로 상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며 눈치만 보다가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 중에 욕심이 더 많은 친구가 "야, 어서 말해! 먼저 말하지 않으면 죽일 거야."라며 윽박질렀습니다. 분위기는 금세 험악해졌고, 그러다 힘에 부쳐 상대에게 먼저 얻어맞은 사람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한 쪽 눈을 뽑아주세요."
결국 그 사람은 한 쪽 눈을, 다른 사람은 두 눈을 다 뽑히고 말았습니다. 만일 두 친구가 서로 협력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소원을 이루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이 두 사람을 다 망쳐버렸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곧 나를 위하는 길이라는 점, 잊지 맙시다.
** 비스마르크와 늪 이야기
독일의 재상을 지낸 비스마르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친구와 사냥을 나갔는데 그만 친구가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늪에 빠진 친구는 움직일 때마다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고, 비스마르크가 총대를 내밀어도 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친구는 더 이상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총알을 장전한 총구를 친구에게 들이대더니 방아쇠를 잡아당기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친구는 자신을 조준한 비스마르크의 총대를 피해 허우적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친구는 늪 가장자리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오해하지 마. 난 자네에게 총을 겨눈 게 아니었어. 바로 좌절하고 체념하는 자네의 나약함에 총을 겨눈 거라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건 그것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비스마르크의 친구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 고난이 지난 후
'알프스의 명화'로 불리는 고산 식물 에델바이스는 눈 속에서 추위를 견디며 어렵게 생명을 이어갑니다. 차디찬 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며 겨울을 지내죠. 에델바이스는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맺습니다. 그리고 눈이 녹을 무렵에는 신비로운 꽃을 피웁니다. 에델바이스의 잎과 줄기는 뽀얀 솜털로 덮여 있습니다. 꽃잎도 부드러운 솜털로 짠 것같이 눈부십니다. 에델바이스는 추위에 심하게 시달릴수록, 밤낮의 기온 차가 클수록 더욱 신비한 빛깔을 띠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더욱 신비한 빛깔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사명의 사랑
요한과 베티는 깊은 산골에서 큰 농장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젊고 용감한 부부였습니다. 요한은 1주일에 한번씩 읍내에 나가 장을 보아 왔는데 너무 멀어서 하룻밤을 묵고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아내 베티는 한살도 못된 아들과 네살된 딸을 데리고 꼬박 이틀을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개척정신이 강한 베티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을 보러 떠나는 요한은 밀린 일 때문에 하루 이틀 더 걸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집에 남은 베티는 빵을 굽기 위해 장작을 가지러 뒷 뜰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베티가 장작 더미를 향하여 손을 내미는 순간 장작더미 속에 있던 독사가 순간적으로 베티의 다리를 물어버린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베티는 곁에 있던 도끼를 들어 정신 없이 독사를 내리찍었습니다. 뱀은 여러 갈래로 잘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자기가 독사에 물린 사실을 알았고 혈관에 독이 스며 오래가지 않아 죽게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베티의 머리에는 "나는 이제 죽는 것이 사실이지만 남편이 돌아오려면 2,3일이나 걸??
"아니, 왜 날 보고 자꾸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내가 무슨 이유로 예수를 믿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된 젊은이를 내가 왜 믿습니까?"
그러자 액클레이라는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맞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 되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요. 내 마음속에 계셔요. 나는 날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 있어요. 지금 내 안에 계신데 안 보여요?"
유대인 청년이 그분을 볼 리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액클레이(A.H.Ackley)라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런 찬송을 썼습니다.
151장 찬송입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내 평생 주님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시네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 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이 고백이 어떻게 액클레이라는 사람 한 분만의 고백이요 찬양이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찬양인 줄 믿습니다.
**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에 위치한 몬트레이 마을은 오랫동안 게으름뱅이 펠리컨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부들이 그물로 잡은 물고기를 씻을 때 잔챙이는 모두 개펄에 내던졌는데 이것이 게으름뱅이 펠리컨들에게는 앉아서 받아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간식 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몬트레이의 펠리컨들은 매우 만족스러웠으며 그저 놀기만 하는데도 살이 뒤룩뒤룩 쪄 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어부들이 던져 버리던 잔챙이 고기들이 상업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자 펠리컨들이 주워 먹을 만한 것은 더 이상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펠리컨들은 스스로 먹이를 구할 생각은 않고 여전히 버려진 것만 찾아다녔던 것이다. 결국 몬트레이의 펠리컨들은 한두 마리씩 굶어 죽기 시작했고 이것을 본 어부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좀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으로부터 먹이를 스스로 잡을 줄 아는 펠리컨을 몇 마리 수입하여 풀어놓았다. 그러자 한동안 굶주림으로 죽어 가던 몬트레이 펠리컨들도 열심히 뛰어다니며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미국의 남북 전쟁이 나기 바로 전 어느 봄날이었다. 한 소년이 일터를 구하다가 오하이오주에 있는 어느 농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농장 주인은 튼튼하게 생긴 소년의 모습에 만족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소년을 채용했다. 단지 그 이름이 짐이라는 것밖에는 몰랐다. 짐은 난로에 땔나무를 장만하고 젖소를 돌보고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하면서 밥은 부엌에서 먹고 잠은 건초 창고에서 잤다. 그 여름이 지나기 전에 짐과 주인의 딸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돈도 없고 장래도 없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거칠게 거절당하자 짐은 조용히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35년이 지난 후 어느 날이었다. 농장 주인은 창고를 새로 지으려고 헌 건초 창고를 헐다가 그 옛날 자기 집의 하인이었던 짐이 주머니칼로 서까래에 새겨놓은 이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James A. Garfield라는 이름 밑에 날짜와 함께 그의 예명 짐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그는 제 20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목장 주인의 이야기는 한낱 웃음거리로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 교훈적이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할 수는 없으며 사람을 지금의 모습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물론 이러한 극적인 사건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 관계는 너무도 흔하지 않는가.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아주지 않고 숫자나 노동력이나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우리가 대하는 그 누구에게라도 동일하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생자필멸
옛날 아름드리 우거진 숲속을 한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한가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한 과부가 애통해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과부는 단 한뿐인 외아들이 죽어서 너무나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선생은 그 여인에 울지 말라며 위로했으나 여인은 더욱 서럽게 울며, "제발 내 아들을 좀 살려 주십시오"라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여인을 측은히 여겨 "지금 곧 일어나서 마을로 가, 아직까지 한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 줌 얻어다가 죽을 끓여 먹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아들은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일러주었다. 과부는 기뻐하며 마을을 향해 힘있게 걸어갔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그 젊은 과부는 힘없는 모습으로 다시 찾아와 한탄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찾아다녀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은 없습니다."
이때 선생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자필멸이라는 말이 있듯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 미켈란젤로가 눈이 멀었을 때 로마 시의 사람들은 퇴적더미에 묻혀있던 조각을 발견하고는 "이것은 그리이스 시대의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미켈란젤로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눈은 멀었지만 그의 예민한 손으로 그 조각을 만졌습니다. 눈썹과 이마, 코, 얼굴의 윤곽, 어깨를 만지고 나서 눈먼 미켈란젤로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장인의 작품입니다. 틀림없이 피디아가 만들었을 것입니다."
** 주의 뜻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나에게 빛과 같은 존재로 다가오셨다. 그분은 어두움과 무지와 혼돈, 불신앙과 답답함으로 가득한 내 영혼에 밝은 빛으로 오셨다. 마치 아침햇살에 안개가 사라지듯이 의로운 해가 발하는 치료의 광선이 나의 영혼을 시원케 해 주셨다. 나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영적인 것에 대해 눈이 열리게 되었다. 내 영혼은 말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멋지고 값진 일인 줄은 정말 몰랐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멋진 것을 무엇 때문에 외면하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값진 것을 무엇 때문에 원하지 않는가. 주 예수 모셔요. 당신의 구주로. 주 예수 모시면 구원받는 이 기쁨. 주 예수 모시면 거듭나는 새 생명..."
1981년 7월의 일이었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그 해 5월에 주위의 몇몇 친구들, 형들과 함께 '주찬양선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별다른 비젼이나 욕심 없이 막연하게 찬양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되었으니까, 우리 팀도 수련회 같은 것을 해야 될 게 아니냐"고 해서 수련회를 가지기로 했다. 수련회를 자체적으로 진행할 만한 여건이 못되었기 때문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갖는 제자훈련에 참여함으로 수련회에 대신하기로 했다. 교회에서 갖는 수련회보다 좀더 체계화되고 준비된 프로그램이겠거니 생각하고, 습관대로 시작시간보다 조금 늦게 국수리 틴라이프 수양관에 도착했다. 제일 큰 강당에서 찬양소리가 들려왔다. 시대에 뒤떨어진 복음성가들인 데다가 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졸린 오후시간 탓인지 별로 맘에 와 닿지 않았다.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친한 친구가 맨 뒤에서 손짓을 했다. 그때 먼저 도착했던 친구들이 달려들며 고자질하듯이 소근거렸다.
"야! 우리 여기 탈출하자."
그 친구의 첫마디였다. 왜냐고 묻자 서로 다투듯이 얘기를 했다.
"점심을 먹었는데 완전 풀밭이야. 이런 것을 10끼를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오더라."
"야! 여기 프로그램이 어떤지 알아? 성경공부가 하루에 10시간이래. 10시간!"
"이게 무슨 수련회야!"
이상하게도 그 얘기들이 흥미롭게 들려 왔다. 물론 기대했던 바는 아니지만 뭔가 색다른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친구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형제가 치는 기타는 줄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것 같았고, 코드도 한 곡에 3가지 이상을 잡지 않는 것 같았다. 노래도 신통치 않았다.
"아니, 저 사람이 뭘 잘한다고 저기 앞에서 인도를 하고 있지? 저 사람하고 나하고 자리가 바뀐 것 아냐?"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뭐가 그리 좋은 지 싱글벙글 웃으며 눈은 반쯤 내리감고 찬양하는 모습이 그렇게 바보 같아 보일 수가 없었다. 아무튼 찬양시간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다 못마땅했다. 역시 내일 아침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시간은 말씀을 듣는 시간. 좀 못생기신 전도사님이 간증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처음엔 다 아는 말씀을 또 들어야 하나하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다 알고 있는 그 얘기가 꼭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들려 왔다. 아주 감동적이었다. 나는 초청에 응해 일어나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 일은 나에게 획기적인 일은 되지 못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일어나서 영접기도를 한 것은 그전에도 5번쯤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는 했지만 줄곧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중 1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그때까지 가시지 못했었다. 그것으로 해서 내 맘 속에는 나도 모르게 신앙생활 자체에 대한 회의조차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로 그 존재를 깨닫기 원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영혼의 꺼풀을 벗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수련회의 시간 시간을 보냈다. 그때마다 내 영혼을 답답하게 했던 무언가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영혼이 가난해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흘째 밤, 나에게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난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어느 할머니의 자백기도 속에서 나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자아가 깨어지는 순간, 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난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다. 난 모태 신앙인으로 한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었고, 술과 담배도 나와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예수님을 못박을 만한 죄가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나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느낀 감격과 나의 타락한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는 사실이, 모두 눈물로 표현되게 되었다. 다음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모든 만물이 새롭게 느껴졌다. 시들어가는 들풀조차도, 아니 생명이 없는 돌멩이조차도 아름답고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두가 그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지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다.
내 나이 20살, 교회생활 약 20년 동안 주워 들은 성경얘기가 상당히 많았을 텐데도, 내가 제대로 암송할 수 있는 말씀은 창세기 1:1과 요한복음 3:16 정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억하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말씀들이 하나하나 그 의미와 함께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눈을 뜰 때나 잠자리에 들 때, 또 길을 걸을 때나 버스를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곳 무슨 일을 하든지 말씀들이 수시로 떠오르면서 그 뜻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성령님의 이러한 구체적인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을 경험하면 할수록 내 속에는 또 다른 갈등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건 내가 주님과 깊이 교제할수록 또 주님을 많이 알수록 나를 알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 사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주님의 거룩하심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나의 성품들 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나의 모습, 아니 오히려 선을 원치 아니하고 악을 사랑하는 나의 뿌리깊은 죄성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못된 존재로 만드셔서 이런 어찌할 수 없는 갈등을 겪게 하시는 걸까.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미웠다. 그러는 동안 내게는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사람도 못되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반복되는 실수와 반복되는 영적 패배감으로 인해, 난 아무런 기대나 용기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때 주님 주신 위로의 말씀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 (빌 1:6)는 것이었다.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한 분은 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시작하였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지만, 바로 주님이 시작하셨다는 그 사실에 소망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시간까지 지으신 그분이 이뤄주신다는 약속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제한된 옛 성품을 지닌 몸을 벗어나, 새로운 몸으로 지음 받아 영원히 주와 함께 살 것이라는 것이 참된 소망이 되었다. 주님은 나에게 생명과 소망뿐 아니라 주님 나라를 위한 소명과 비젼까지도 주셨다. 대학졸업반 때였다. 내가 앞으로의 직업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주님께선 청소년들의 아픔을 보게 하셨다. 볼 만한 공간, 들을 만한 소리, 누릴 만한 문화가 없는 우리 청소년들. 그들 거의 대부분이 즐겨 듣는 가요나 팝송은 거의가 퇴폐적이거나 감상주의 또는 인본주의적이었다. 심지어 일부 팝송은 직접 사탄을 찬양하는 것인 데도 이런 것을 금하기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것에 대치할 만한 영적인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함께 통탄하는 자리에 있었으나, 누군가는 시도를 해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나라도 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여졌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하던 순간, 난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에 비할 만한 감격에 사로잡혔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 것이지만 내 쪽에서도 삶의 대책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자격증과 학위 따위가 필요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또 그런 것이 많은 편이 나와 하나님에게 유리하리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새 비젼과 함께 난 갑자기 멍청해졌고, 아무런 계산도 하지 못하게 됐다. 비젼을 생각할 때는 말할 수 없는 감격이었으나, 현실을 돌아볼 때는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 주님께서 주신 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2~3개월의 기다림 가운데 나는 '기다림은 곧 믿음'이라는 진리를 발견했다. 내가 단 1분이라도 평강 가운데 기다릴 수 있는 건 믿음 때문이었다.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 하루하루 살 동안 주님 인도하시니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하나님은 신실하셨다. 그 가운데 송명희 자매와도 만날 수 있게 하셨다. 1985년 1월, 극동방송 어느 프로그램에서 찬양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우연히 구할 수 있었던 송명희 자매의 '너의 쓴 잔을'이란 시에 바로 며칠 전 곡을 붙였던 복음성가를 불렀다. 마침 송 자매가 방송을 듣고서 작사자 허락도 없이 곡을 붙여 부른 작곡자를 찾아 방송국으로 전화를 하게 되었고, 그 연결로 우린 만나게 되었다.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뜻이 통하여 다른 시들에도 곡을 붙일 것을 승낙 받아 모두 11곡을 묶어 '주찬양 선교단'을 통해 발표하게 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곡들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많이 알려지게 됐고, 내 사역은 구체적으로 청소년을 위한 찬양사역으로 열리게 됐다.
87년부턴 찬양사역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됐고, 난 전국을 순회하며 주로 청소년들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이 모든 건 결코 내 뜻이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그분의 인도하심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나에게는 소망이 있다. 하나는 내가 더욱 더 주님을 닮아 거룩하여질 소망이고 또 하나는 주님을 위해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소망이다.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주님, 오직 그분만을 찬양합니다.
*** 최덕신 - '주찬양선교단' 단장 ***
** 삶의 걸음걸이
옛날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해질 무렵이 되어서, 앞으로 가야할 목적지에 해가 아주 떨어진 다음에 당도하게 되면 불편하다고 생각하여 길가에서 마을 사람에게 앞으로 몇 시간이나 더 가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물음을 받은 사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길을 가던 나그네는 다소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하는 수 없이 얼마를 더 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여보시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다보니 아까 자기가 목적지까지 가려면 몇 시간이나 걸리겠느냐고 물었을 때 아부 대꾸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길손은 발을 멈추고 왜 그러느냐고 되물었더니, 그제서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지금의 걸음걸이로 간다면 앞으로 두 시간만 더 가면 되겠소이다."
이 말을 들은 길손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진작 말할 것이지 갈 길이 바쁜 사람을 빨리 가지도 못하게 갈 길을 멈추게 하느냐고 했다. 이 말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여보시오. 당신의 걸음걸이를 보아야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를 알 것이 아니겠소. 아무리 먼 곳이라도 빨리 걸으면 시간이 단축될 것이고, 그와 반대로 가까운 곳이라도 늑장을 부리면 오래 걸리지 않겠소?"
무척 과학적인 대답에 길손은 그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나는 어떤 걸음걸이로 목적지를 가고 있는가?
제대로 방향은 잡고 걷는 것인가?
괴테는 "너 자신을 알고 나서 나에게 말하면 네가 누구인지 알려주리라. 네가 선택한 직업을 말해주면 나는 너의 장래를 점쳐주리라."고 했다.
** 희한한 탈옥수
어느 사내가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튿날 사내는 이가 아프다고 해서 이를 뺐다. 며칠 후 그는 다시 맹장이 아프다고 해서 맹장을 제거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그는 다시 맹장이 아프다고 해서 맹장을 제거했다. 그리고 다시 그는 편도선이 아프다고 편도선을 제거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감옥 안의 죄수가 물었다
"왜 견딜 만한데 그렇게 제거 수술을 받습니까?"
"아, 예. 저는 하나씩 감옥을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부분이 모인다고 항상 온전한 하나가 되는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 독수리가 날지 못한 이유는...
어떤 개구장이가 산에 갔다가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개구장이는 마침 알을 품고있는 암닭의 둥지 속에 독수리 알을 집어넣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여러 병아리들과 함께 새끼 독수리도 부화가 되어 나왔습니다. 다른 병아리들과는 달리 몸집이 크고 부리와 발톱이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깃털이 별났기 때문에 새끼 독수리는 자랄 수록 고민을 더하였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험하게 생겼을까?"하고.
새끼 독수리는 닭장을 뛰쳐나갈 것을 궁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입 부리와 발톱이 어디에 소용되는 지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겨드랑 밑이 근질거리는 것이 날개가 돋으려고 그러는 것인 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그저 자신이 '병아리'려지 하고 다른 병아리들이 하는 짓을 따라 하며 지냈습니다. 낟알을 쪼아먹는 데에 부리를 사용했고 벌레를 찾느라고 발톱으로 땅을 헤집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병아리들한테서 따돌림을 받지 않으려고 돋아 나오는 날개를 자신의 부리로 짓찧었습니다. 어느 날 방, 들쥐 떼가 닭장을 습격해 왔습니다. 닭장은 금방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닭들은 모두 독수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쥐 떼가 무섭게 느껴지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발톱과 부리는 닳아지고 눈망울에도 힘이 하나도 없어, 닭이나 진배 없었으니까요. 다른 닭들과 함께 독수리도 우왕좌왕 도망 다니다가 날이 밝았습니다. 닭들은 일제히 독수리를 손가락질하면서 미워하였습니다.
"저건 몸이 큰 먹충이일 뿐이지, 아무 것도 아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닭장 속의 독수리도 닭들과 함께 많이 늙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독수리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높이 나는 위용 있는 새를 보았습니다. 매섭게 생긴 부리, 갈퀴처럼 보이는 발톱, 우아하고 멋진 날개.......... 부라리고 있는 그 새의 눈 아래서는 들쥐 뿐만 아니라 피하지 않는 짐승이 없었습니다.
"아, 저렇게 멋진 새도 있구나."
초라하게 늙은 독수리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 닭이 독수리를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응, 저건 독수리라는 새다. 날개 있는 새들 중에서는 왕이지. 그러나 넌 꿈도 꾸지 말아야한다. 넌 들쥐한테도 쫓겨다니는 닭이니까 말이야."
당신의 자아상은 당신의 미래의 모습니다.
** 두 천사 이야기
인간들의 기도를 모으려고 지구로 보내진 두 천사에 대한 전설이 있다. 한 천사는 그의 바구니에 사람들의 소원 기도를 가득 채우려 했다. 다른 천사는 그 바구니에 인간들의 감사 기도를 모으려고 했다. 얼마가 지난 후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되돌아 왔다. 한 천사는 바구니가 넘칠 정도로 인간들의 수많은 소원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인간의 감사를 담아 오겠다는 천사의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고, 그 천사는 슬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단지 불평을 하느냐 아니면 감사를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랍니다. 거친 식사, 험한 잠자리....... 환경은 비슷합니다만 감옥에서는 대개 불평만이 가득하고, 수도원은 감사로 하루가 지나간답니다.
사랑과 함께 감사하는 생활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최대 덕목입니다.
** 썩은 사과
어느 날 아버지는 로버트가 거칠고 무례한 소년들과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정원에서 빨간 사과 여섯 개를 따다가 쟁반 위에 얹어 놓고 로버트 앞에 내밀었다. 아들은 몹시 기뻐하면서 그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게 그 사과는 아직 익은 게 아니니까 다 익을 때까지 며칠 그대로 간직해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사과를 보관해 두면서 완전히 썩어버린 또 하나의 다른 사과를 그 여섯 개의 사과들과 함께 두었다. 이것을 본 아들은 썩은 사과가 다른 사과를 모두 썩게 만들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싱싱한 사과가 썩은 사과를 싱싱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니?"라고 하면서 아들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로부터 8일이 지난 뒤 사과를 꺼내왔는데 과연 아들의 말대로 사과는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 있었다. 이것을 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아들을 타일렀다.
"애야, 나쁜 친구들과 사귀면 너도 나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하지 않더냐? 이 사과를 보고서 나쁜 친구들과 사귀면 네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깨달으렴"
**사냥개에게서 배우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어느 날, 길 모퉁이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사냥개 한 마리가 거짓말같이 놀라운 묘기를 연출해 내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구경꾼 중 아무도 그 개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고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개 바로 옆에 있는 한 흑인 소년의 입술이 거의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부드럽고 낮은 음성으로 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가 다 끝나자 그 사냥개는 곧장 자기 주인에게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면서 주인의 눈을 응시했다. 만약 그 개가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분명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렸나요? 주인님께 대한 나의 순종이 충분했나요?"
소년은 그 사냥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녀석, 잘했다. 잘했어!"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도 개를 무척 좋아한단다. 너의 그 자랑스러운 사냥개를 가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구나. 어떠니? 15달러를 줄테니..."(내가 15달러를 부른 것은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꽤 큰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년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지금 말한 액수의 100배를 준다 해도 소용없어요. 이 개는 누구에게도 팔지 않아요!"
그 소년과 헤어진 후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앞을 잘 볼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로 하여금 주인의 뜻에 복종하는 저 사냥개처럼 당신의 뜻에 복종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당신 앞에 서게 되는 날, '잘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게 하소서." -Dr. Lee Roberson
** 하나님은 급하시지 않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는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하고 평정을 잃지 않았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절친했던 친구들은 그가 때때로 자신의 성마른 성격 때문에 괴로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느 날 한 친구는 그가 울 안에 갇힌 사자처럼 마루 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브룩스 박사, 뭐가 문제지?" 하고 물으니, 그의 대답인즉슨 "나는 급해 죽겠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게 문제야!"했다는 것이다.
**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한가하고 평화로운 주일 오후였다. T.V.로 카우보이 영화를 보고 있던 소년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어떻게 해서 전쟁이 시작되었지요?"
"음,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서란다."
소년의 아버지는 신문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독일이 벨기에를 공격함으로써 그 전쟁이 시작되었지."
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남편의 말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 주세요. 그것은 누군가가 살해를 당했기 때문에 시작된 거라고요."
그러자 남편은 몸을 세우고는 거칠게 대꾸했다.
"당신이 대답하는 사람이요, 아니면 나요?"
소년의 어머니는 발끈하여 남편에게서 등을 돌리고 방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소리가 크게 나도록 문을 쾅하고 닫아 버렸다. 한동안 찬장에 접시 집어넣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덜거덕거리더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침묵을 깬 것은 소년이었다.
"아빠, 전쟁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내게 말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도 이제 알았거든요."
** 약속이라는 열쇠
장망성(將亡城)을 빠져 나온 기독도는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꾸준히 왕의 길(King's Way)을 걸어간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도 고달프고 험한 길이어서 기독도는 좀 쉬워 보이는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길은 '의심의 성'에 살고 있는 '절망'이라는 거인의 영토로 그를 인도한다. 결국 기독도는 '절망'에게 사로잡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온갖 방법으로 기독도를 괴롭히던 '절망'은 그에게 자살할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여행을 계속하려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얼마 동안은 정말로 그 거인이 기독도를 정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때 기독도와 함께 잡혀 있던 '희망'이라는 동료가 그에게 값진 승리의 순간들을 상기시켜 준다.
"그동안 당신은 참으로 용감했어요. 그 무시무시한 아폴리온과도 싸워 이겼고, 죽음의 그늘 계곡에서도, 허영의 시장에서도 당신은 참 용감했어요"
그래서 용기를 얻은 기독도와 '희망'은 그 밤에 기도를 시작한다. 거의 아침이 될 무렵까지 기도를 계속하던 기독도는 불현듯 이렇게 외친다.
"맙소사! 난 참 바보야!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지하 감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니... 여보시오 희망, 내 가슴속에 약속이라는 열쇠가 있다오! 그 열쇠는 어떤 문이라도 열 수 있는 열쇠인데 이 의심의 성에 있는 자물쇠도 열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희망'이 말한다.
"그것 참 굉장한 뉴스군요! 어서 당신의 가슴속에서 그 열쇠를 꺼내어 자물쇠에 꽂아 보세요!"
잠시 후 그들은 활짝 열려진 감옥 문을 통해 밝은 세상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
우리는 모두 크건 작건 의심과 절망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먼저 각자의 가슴속에 하나님이 넣어 주신 각종 약속의 열쇠를 꺼내어 의심과 절망의 자물쇠 통에 꽂아 볼 일이다.
**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나이
어느 공장의 한 노동자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비상한 기술 때문에 승진도 빨랐다. 마침내 그는 다니던 그 공장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전보다 더욱 의기양양하고 거만하여 직원들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의 밑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 어느 날 나이가 지긋한 종업원 한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충고의 말을 했다.
"당신은 참 영리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뛰어난 재주를 당신에게 주신 것 같군요.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당신이 잊고 있는 사실들이 있어요."
이 말을 들은 그는 "그게 뭡니까?"라고 하면서 그 연장자를 비웃으려 했다.
그 연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뛰어난 능력이 당신을 정상에 오르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 정상을 유지하는데 합당한 인격이 당신에게는 부족합니다. 당신의 능력이 하나님께 주신 선물임을 인정할 만큼 당신은 더 성숙해야 합니다." -Walter B. Knight
** 가장 진귀한 보석
송나라 재상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보석을 들고 재상을 찾아갔습니다. 어렵게 구한 값비싼 보석을 뇌물로 바치려는 것입니다.
"이 보석은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보석입니다. 재상님께 드리려고 가져왔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재상은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도 그에 못지 않은 보석이 있습니다. 이런 값비싼 보석을 보고도 탐낼 줄 모르는 내 마음입니다. 만약 내가 그대의 보석을 받게 되면 그대도 값비싼 보석을 잃게 되고, 나도 내 마음의 보석을 잃게 되니, 어서 도로 가져가십시오. 나는 내가 가진 보석으로도 충분합니다." 라고 말하며 보석을 가지고 온 사람을 돌려보냈습니다.
내 마음의 보석을 잃는 것이 가장 진귀한 보석을 잃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보석은 무엇입니까?
** 선한 길잡이를 만나는 행운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다른 장비나 기구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길잡이가 없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되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산맥을 등정하는 데도 길잡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암벽에 부딪쳤을 때에, 험한 길을 만났거나 길을 잃었을 때, 위기상황이 발생한 그 곳의 지리를 잘 알아서 올바르게 대처할 줄 아는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운입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인생의 진로를 정하지 못해 방황할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좀더 좋은 길잡이를 만났더라면 훨씬 고생을 덜 했을 텐데, 좀더 일찍 바르게 사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스승을 만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 말입니다. 좋은 길잡이를 제대로 만난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인생의 길잡이가 있는지요?
** 지나친 욕심은 해가 됩니다
어느 나이 많은 성자(聖者)가 길을 가다가 두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헤어지게 되자 성자가 동행한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잘 왔소. 보답으로 두 분의 소원을 들어드리리다. 다만 먼저 말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되 다음 사람에게는 그 두 배로 소원을 들어드리겠소."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먼저 말하면 저 친구가 두 배나 되는 소원을 이루겠지. 그러나 절대 먼저 말할 수 없어."
서로 상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며 눈치만 보다가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 중에 욕심이 더 많은 친구가 "야, 어서 말해! 먼저 말하지 않으면 죽일 거야."라며 윽박질렀습니다. 분위기는 금세 험악해졌고, 그러다 힘에 부쳐 상대에게 먼저 얻어맞은 사람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한 쪽 눈을 뽑아주세요."
결국 그 사람은 한 쪽 눈을, 다른 사람은 두 눈을 다 뽑히고 말았습니다. 만일 두 친구가 서로 협력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소원을 이루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이 두 사람을 다 망쳐버렸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곧 나를 위하는 길이라는 점, 잊지 맙시다.
** 비스마르크와 늪 이야기
독일의 재상을 지낸 비스마르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친구와 사냥을 나갔는데 그만 친구가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늪에 빠진 친구는 움직일 때마다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고, 비스마르크가 총대를 내밀어도 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친구는 더 이상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총알을 장전한 총구를 친구에게 들이대더니 방아쇠를 잡아당기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친구는 자신을 조준한 비스마르크의 총대를 피해 허우적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친구는 늪 가장자리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오해하지 마. 난 자네에게 총을 겨눈 게 아니었어. 바로 좌절하고 체념하는 자네의 나약함에 총을 겨눈 거라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건 그것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비스마르크의 친구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 고난이 지난 후
'알프스의 명화'로 불리는 고산 식물 에델바이스는 눈 속에서 추위를 견디며 어렵게 생명을 이어갑니다. 차디찬 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며 겨울을 지내죠. 에델바이스는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맺습니다. 그리고 눈이 녹을 무렵에는 신비로운 꽃을 피웁니다. 에델바이스의 잎과 줄기는 뽀얀 솜털로 덮여 있습니다. 꽃잎도 부드러운 솜털로 짠 것같이 눈부십니다. 에델바이스는 추위에 심하게 시달릴수록, 밤낮의 기온 차가 클수록 더욱 신비한 빛깔을 띠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더욱 신비한 빛깔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사명의 사랑
요한과 베티는 깊은 산골에서 큰 농장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젊고 용감한 부부였습니다. 요한은 1주일에 한번씩 읍내에 나가 장을 보아 왔는데 너무 멀어서 하룻밤을 묵고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아내 베티는 한살도 못된 아들과 네살된 딸을 데리고 꼬박 이틀을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개척정신이 강한 베티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을 보러 떠나는 요한은 밀린 일 때문에 하루 이틀 더 걸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집에 남은 베티는 빵을 굽기 위해 장작을 가지러 뒷 뜰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베티가 장작 더미를 향하여 손을 내미는 순간 장작더미 속에 있던 독사가 순간적으로 베티의 다리를 물어버린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베티는 곁에 있던 도끼를 들어 정신 없이 독사를 내리찍었습니다. 뱀은 여러 갈래로 잘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자기가 독사에 물린 사실을 알았고 혈관에 독이 스며 오래가지 않아 죽게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베티의 머리에는 "나는 이제 죽는 것이 사실이지만 남편이 돌아오려면 2,3일이나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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