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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서님 일대기

박통과 니나노집 작부

작성자Ave(최창옥)|작성시간09.12.07|조회수110 목록 댓글 2

박통을  생활고 때문에 술집작부로 전락한 한 인테리 여인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
이 나라 최고 통치권자였으면서도 여성편력과  요즘 관심있는 친일인명사전 등재 등을 놓고..
현 정부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체성에 표류하는 이 시국을
회원의 한사람으로 안타까움을 표하며
박통의 여성관에 대하여 쓴 책을 보고 이 글을  올려 봅니다.

이 글은 필자가 고 박통에 관한 각종 기록을 뒤져 종합 구성한것으로 
특히 몇번 결혼한 박통의 사생활을 대충 추려봅니다....

그럼.


박정희 (이하 박통이라 칭함)에게는 호적상 처로 두사람의 여인이 있었고
호적엔 오르진 않았지만 실제혼 관계에 있었던 여자가 한명 더 있었다는걸
아는 사람도 더러 있으리라 믿는다.

호적상의 두여인은 말이 필요없이 첫 부인인 박통이 대구사범 학생시절인 19살때
세살아래인 얼굴도 안보고 부모들끼리 혼사를 치룬 김호남이란 여인이며
박통은 첫부인의 용모에 마음이 끌리는게 없어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 후 김부인은 재혼을 하지않고 불교에 귀의 해 항간의 떠 돈 소문인
속세를 떠난 비구니까지는 되지않고 보살로 보낸 사람이다.

박통의 여러 전기나 측근 사람들이 말한 비화를 종합해 보면
자신은 키 164에 5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마르고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자를 보는 심미안이 상당히 높았다 한다.

공식적 기록엔 그 다음 처가 충북 옥천에 대궐같은 집안에서
소실을 다섯이나 거느린 만석군 집안의 딸 육영수 여사이며
김여인과 이혼 도장이 찍힌건 그때이다.

그런데 첫부인과 이혼과 다름없는 결별상태에서 육여사를 만나기 전
또 한명의 여자와 박통이 한 2년간 동거한 일이있다.

말이 동거녀이지 박통은 군 선후배들에 자기 아내라며 소개시켰고
두사람이 살림을 꾸리던 곳에서 선후배들의 술상을 차리느라
이여인은 방문턱을 오르락 거렸다.

그 여인의 성이 이씨였는데 박통이 그 여인을 만난건
30살 육군 대위로 태릉 육사 중대장으로 있었을 때 였으며
동료의 결혼식에서 박통은 신랑측 들러리로
여덟살 아래인 이여인은 신부측 들러리로 두사람은 만났다 한다.

그때가 1947년 말이었으며
약혼식은 성대하게 거행했고 용산의 육군본부 관사에서 두사람은 둥지를 틀었다.

이여인은 원산이 고향으로 이화여전 아동교육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공상당이 싫어 함경도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단신으로 월남했다.
남하 해 공부를 계속하자니 돈이 모자랐는데
친구 결혼식에서 만난 박정희가 그녀의 학비를 보태 주었고
살림을 차리면서 그 길로 이여인은 학교를 그만두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훗날 박통이 10.26을 맞은 후 박통과 해어져 서울 마장동에서 정육점을 꾸려가던
이여인(그 당시 62세)은 박통의 죽음을 친구가 걸어온 전화를 받고 알았다 한다.
그녀는 1993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근데 이여인과 박통은 애초에 연이 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기 전 박통의 인물을 평한 말이 있는데 처음 본 박통의 모습을
"키도 조그마한 양반이 볼품도 없고 일본 육사를 나왔다는데 박력이나 기품은 있었어요."
라고 술회했다.

그 반대로 이여인은 갸름한 얼굴의 상당한 미인으로 성격이 아주 섬세하고
신경이 예민한 여자였다.
박통은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고 잘 해주었는데 그녀는 그러질 못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동거를 하자말자 그녀에게 날벼락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건 박통이 그 당시 군부내 북한 남로당 조직의 일원으로서 있을때 였으며
미군과 국군의 대대적인 합동 소탕작업이 벌어지던 시점이었다.

이 시절 이여인과 박통의 끌끄러운 사이를 이야기 하자면 상당히 긴데
짧게 얘기차면

이여인은 박정희란 사람이 자기의 이상형과는 아주 멀지만
박통의 친구들도 그렇고 군에서 장차 한 인물 할 사람으로
첫인상이 다가 와 살을 섞었는데
한 인물은 커녕 군사재판에 넘겨져 사형당할 빨갱이라.

안그래도 빨갱이 때문에 홀로 남으로 넘어 왔는데 살을섞은 남자가
동료를 배신하고 이름을 죄다 불어 자기만 살아남아 목숨을 건진 빨갱이라니.

박통을 전기고문까지 하다 동지들을 팔아넘긴 댓가의 보답으로
그 생사의 경계선에서 구해준 사람이
인본 관동군 헌병대 출신으로 자유당 시절 백범 김구선생 암살 배후 주범인
그 악명높은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이다.
그 당시 김창룡은 숙군수사의 실무장교로서 박통을 비롯한
군내 남로당에 개입 됀 사람들의 생사를 손에 거머쥐고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돼있다 목숨은 건졌지만 군에서 제명당해
생활고에 시달린 박통과 두사람 사이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박통의 동료들도 그가 동지를 팔아 목숨을 유지한 그의 행적에 등을 돌렸고
사람은 작아도 한 인물 할 사람으로 본 남편이 사나이답지 않은
행동을 안 그녀는 정내미가 떨어졌다.
매일 술에 젖어 들어오는 박통과 그녀의 싸움도 잦았다.
심지어 싸우다 화가 난 박통이 기르고 있던 세퍼터 개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일도 있었다.

이여인은 집을 나와 도망쳤고 박통은 찾으러 다니길 여러차례 했다고 한다.
박통이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집에 데리고 온 그녀는 끝내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박통은 자기 부하와 함께 짚차에 태워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또 집을 나가면 처남과 함께 찾으로 다니고.

그렇게 파탄과 다름없는 동거 중 6.25가 나기 바로 전
그녀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박통 몰래
이런 메모를 남기고 두 사람이 기거하던 육군 관사를 도망쳐 나왔다.

"그동안 고마웠다.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말라.
날 찾으면 투신자살할 것이다".

그 시절이 박정희의 생애에서 가장 비참했었다 한다.
잠도 못 이루고 고민하면서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아내는 집을 나가고
그의 어머니는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의 불행으로 충격을 받아 돌아 가시고
친구들은 피하며
생활은 어렵고.

술에 떡이 돼 동기생 하숙방으로 기어 들어와 하소연을 하다간
동기를 잡고 처연하게 흐느끼곤 했다.
주위에서는 박통에게 그녀를 그만 잊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잊지를 못했다.


그런데 인간의 연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6.25사변이 터진 뒤에 이여인은 재혼했고 월남한 가족들과도 재회했는데
그녀는 대구에서 우연히 정보국 전투 정보과장으로 복직됀 소령 박정희와 스치게 된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그때를 술회했다.

"피난시절 대구에서 그이가 지프를 타고 오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임신 2개월 되었을 때인데 내가 원피스 짝 빼입고 모양내고 가는데
지프차가 빵빵대는 소리가 들려요.
사변통에 월북했으리라 생각 했었는데 돌아다 보고 깜짝 놀랐어요.
박씨가 내리려고 해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뛰었지요"

이 두사람의 연은 여기서도 막을 내리지 못한다.

김재춘이란 사람을 다들 기억할것이다.
육영수여사가 서거하던 시절에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으로
그는 박통이 정보국 소령으로 있을때 보급실장으로 직계 부하였으며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이었다.

박통과 이여인. 두사람은 참 희한한 운명으로 다시 만나게 돼는데.

사변 중 육군본부가 부산으로 옮겨 가 있을 무렵 김재춘은 박정희와 함께
이 갈맥이 태어 난 부산 범일동의 어느 술집으로 놀러갔다.
박통이 막걸리라면 사족을 못쓰지 않나.

두 사람은 니나노집 색시를 불렀다.
그 색시는 박통을 보자말자 후닥닥 뛰쳐나가 술집밖으로 36계 줄행랑을 놓았다.
"엄마야 걸음아 날 살려라 ~~~~~"

그 여자가 바로 약 1년전 대구에서 마지막으로 본 박통이 그렇게 찾던 여인이었다.

김재춘은 그때 박소령에게 "이젠 모든 미련을 버리고 재혼하십시오"라고 했다한다.
그해 가을 박정희는 육영수란 사람을 그 이여인과 처음 그렇게 만났듯이
동료의 결혼식장에서 만나 비로서 제짝을 찾는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됀 뒤에도 이여인을 못잊어 했다한다.
뒤에 박통의 도움으로 신문사 기자가 됀 이여인의 남동생을 청와대로 불러
안부를 묻기도 했고 도움도 주었는데
박통의 의중을 읽은 이 남동생이 누님에게 박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한통 쓰주면
대신 전달해 주겠다고 했다한다.

오기가 대단한 이여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말 한마디에 산천초목이 다 떨던 그 박통을 묵살하고.
박통도 자기가 지독시리 사랑했던 그 여인앞에서는 한 남자로서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10·26때까지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박통이 서거한 후 이여인은 이렇게 자신을 돌아봤다.

"그가 대통령이 돼었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어쩌면 그런지.
옷 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했다는 생각이야.
표현을 안하더라도 명복을 빌어 주었어야 했는데.
곱게 돌아가시지 못한 게 마음 아파요. .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었던 그 사람이 극락세계에 갔어면 하는 생각뿐이지요."

하리기리(할복)로 주군에게 죽음으로 충성을 보여주던 사무라이를 존경한 
박정희는 사나이로서 무사다운 과감을 동반한 비정한 면도 많았지만
한편 속이깊고 다정한 면도 많은 사람이기에 한때 생활고로 니나노집 작부로 전락한
그 여인에게 연민의 정을 간직한 체 아마도 무덤까지 가져갔지 싶다.

이 글을 끝맺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이화여대를 다닌 예쁘고 인테리였던 그 아가씨는
인간 박정희에게 술로서 세월을 보낼만큼 젊은 날 큰 마음의 상처를 안겨다 주었으며
그 여인과 연이 돼었으면 아마 5.16도 10.26도 없었지 않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남자는 어떤 여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그의 인생이 좌지우지 될 수도 있으며
사랑이 결여 된 결혼은 위기가 다가오면 쉽게 파탄을 맞는다는
사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 그려지는 비사다.

 

난 오직 한여자만을 사랑 해야지 !!!!!!ㅋㅋㅋㅋ

머리를 함부로 돌리지도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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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공명(메아리) | 작성시간 09.12.07 잘읽었습니다. 박정희와 김호남과의 사이에 난 딸이 박재옥인가 그랬다고 티비에 나왔는데, 박통자녀들 중 근혜는 미혼, 근령은 이혼, 지만은 마약전과자, 그나마 박재옥씨가 온전한 가정꾸리고 원만하게 사는 것 같다고.....한병기 전 캐나다 대사가 남편이라고. 박통이 한병기 씨에게 가끔 김호남씨의 안부를 물었다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피붙이 딸이 있는데 그 어미가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당시에 이정도 혼인, 재혼은 흉될 것도 없었고, 그시절에 첩을 두는 것도 별 흉도 아니었으니 별문제로 하고요, 박통은 우리 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극과 극으로 지대해서 그자체로 연구대상이지요. 특히 통치와 민주주의에
  • 작성자나나 | 작성시간 10.06.06 에고...ㅎㅎ 재미있게 잘 읽은 부분은 마지막 두 문장입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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