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은 쉬운 낱말. 바로 이해되는 말들
* 참고작품
< 오랜 지기/김경선 > 대구에서 적은 글. 작년에 등단함
부부 계중을 남편이 일찍 죽고 지금도 혼자서 참석한다는 내용
가슴 설레는 아침이다. 창문을 열어보니 풀 냄새가 코를 확 틔운다. 오늘따라 더 신선하고 정겹다. 오랜 지기들과 모임이 있는 날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아득한 옛 추억이 떠오른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갔다.대구공항에서 제주행 비행시간이 맞지 않아 부산에서 하룻밤 자고 출발해야 했다. 남편 친구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가고 있었다. 봉고차가 뒤따라왔다. 의아했지만 방향이 같은 차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차는 호텔까지 따라왔다. 우르르 내린 사람들은 남편의 친구들과 부인이었다. 신혼여행에 친구들이 따라온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 할 일이 아니던가. 서른이란 늦은 나이에 맞선을 보고 두 달만에 결혼한 터라 친구들과는 생면부지였다. 체크인하고 바로 지하 1층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갔다. 새색시는 조신해야 했지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흥겹게 결혼식 뒤풀이를 했다. 새벽에 우리는 공항으로, 친구들은 대구로 올라갔다. 그렇게 그들과 인연은 시작되었다.
남편은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 임원들과 봉사서클을 만들었다. 이것을 계기로 졸업 후에도 모임이 이어져 친구 간의 우정을 다져나갔다. 나이가 들어 하나, 둘 결혼하면서 부인도 입회하였다. 마지막 팀이
우리 부부였다. 당시 남자가 이십 대 후반 정도면 결혼 적령기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서른 중반에 결혼하였으니, 친구들이 축하한다며 부산까지 따라와서 피날레를 장식한 것이었다.
친구 좋아하는 남편과 사는 동안 힘들 때가 많았다. 어느 일요일, 김장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부엌 바닥에 절인 배추, 무, 양념, 각종 그릇을 온통 펼쳐 놓고 남편이 거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 남편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나왔다.
"사무실에 바쁜 일 생겼나요?"
"아니, K 모친 회갑이라서 거둘어 주려고"
그리고 나가 버렸다. 그는 아내가 어떤 상황인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임신한 아내가 김장하는 일보다 친구가 벌리는 잔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말 한마디 못 했다. 놀아주지 않는다고 칭얼대는 네 살배기 아들을 달래며, 서러움을 양념에 버무리어 김장했다.
그랬던 그가 친구들과 나를 배신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회원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그중 한 친구가 "앞으로 경선 씨를 우리 모임에 총재로 모시겠습니다." 라고 하자 주위에 있던 부부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친구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남편을 그들은 총재라 불렀다. 남편이 운명하자 나를 총재로 부르겠단다. 흔히 어떤 모임이든 남편이 사망하면 부인은 자동으로 그 모임에서 빠지게 된다. 아예 내가 모임에 나오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쐐기를 박은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들의 보호에 들어갔다.
결혼할 당시에 회원은 부부 열두 쌍이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해외로 이민 떠나고, 교통사고로 우리들과 이별하기도 했다. 가정사로 인해 나오지 않은 부부, 또 한쪽을 잃어 혼자가 된 사람도 있다. 지금은 다섯 부부와 싱글 네 명이 합쳐서 열넷이 정을 나누고 있다. 하하 호호 깔깔대며 여행을 다니고 어려운 일 있으면 쫓아가서 힘을 모아 해결하는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남편이 세상과 이별한 지 강산이 두 번 변했다. 그들은 아직도 남편의 기제사에 참석한다. 먼저 간 친구에게 술 한 잔 올리겠다고 바쁜 일을 제치고 찾아와 아들에게 제사 법도를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고맙게 생각하면서 "아빠는 참 잘 사셨나 보다."라며 존경의 뜻을 표하기도 한다.
회원 중에 한 분이 대구 근교에 야산을 가지고 있다. 새싹이 돋고 산수유꽃이 노랗게 물들면 우리는 소풍을 간다. 야산에서 내려다본 송림지는 거울이 되어 맞은편 도로와 산을 비추고 있다. 두릅은 싹을 틔운 자리가 솟아올라 볼록하고, 청명한 하늘 곳곳에 펼쳐진 구름 조각이 그림을 그려 놓은 듯하다. 각각 준비해 온 한두 가지 음식을 펼치니, 떡, 수육, 과일, 음료수 등 만포장이다. 드시게, 마시게 권하며 한참을 먹고 나니 배가 그득하다. 여자들은 음식물을 소화할 겸 쑥을 캐러 나선다. 솜털같이 하얀 쑥이 제법 크다.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씩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가득 캔다. 다음에 만날 땐 쑥을 어떻게 요리 해 먹었는지가 정 나눔의 대상이 될 것이다.
지기들은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섭섭하다.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지만, 누구든지 보고 싶다는 요청만 하면 바로 번개팅이 이루어진다. 사촌보다 가깝게 정을 나누는 친구들. 궂은일 있으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와서 해결해 주는 그들이 있기에 세상 살 만하다. 지난 세월을 고이 간직하면서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