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근무를 하는 탓에 나는 늘 남들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휴식시간, 한 동료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주말에 30년 지기 친구들을 만난다고 했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친구들이라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문득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선뜻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2. 어릴 적에는 동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다니며 온 동네를 누볐다. 숨바꼭질을 하고, 고무줄 놀이를 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놀던 시절이었다. 분명 서로의 이름도 알고 누구네 집 아이인지도 알았을 텐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생각 나는 건 같이 몰려다니며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기억들이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나를 웃음짓게 만드는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3.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졸업도 하지 못한 채 전학을 갔다. 그나마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당시 나에게 친구란 같은 반에 있는 동급생 정도의 의미였다. 방과 후 함께 어울려 놀거나 속마음을 나누는 친구는 없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 우리 네 남매는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 지냈다.
4.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무더운 여름밤, 같이 배드민턴을 치고 직접 만든 시원한 음료를 나누어 마시던 모습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우리 집을 보며 동네 어른들은 말했다.
"저 집에는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 매일 웃음이 넘치노?"
그때는 또래 친구들이 없어도 우리는 늘 즐거웠다.
5. 그런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동생들이 친구를 만나러 나가고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빈자리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들뜬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 동생들을 보며 부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모두 제 갈 길을 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6. 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의 산업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설레과 두려움이 공존했던 시간이었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친구들과 선후배들 덕분에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사감 선생님 방에 다 같이 모여 '전설의 고향'을 보던 밤이.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붙잡고 웃었던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가 나의 친구였다.
7. 세월이 흘러 친구들은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갔고 결혼 소식도 들려왔다. 부산에서 같이 생활하던 친구들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오랫만에 봐서 그런지 서먹했다. 대화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그들 중 반 이상이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었다. 오랜 친구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8. 자취 생활을 할 무렵, 인터넷을 할 수 있는 PC방이 생겨났다. 외로움과 호기심에 이끌려 찾았다. 채팅을 시작하며 또래 모임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연도에 태어난 친구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참석한 친구들과 인연도 쌓았고 그렇게 만난 동갑내기 친구와 결혼도 하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9.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친구 같은 가족을 갖고 싶었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했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높고 단단했다. 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모난 부분을 하나씩 다듬고 맞춰가야 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10. 이후에도 수많은 모임에 가입을 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정보와 인맥도 만들어갔다. 만남 자체는 즐거웠지만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반복적인 모습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많은 모임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다반사였다. 사람은 많았지만 마음을 나눌 칱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11. 그러던 중 2년 전 모임에서 지금의 친구를 알게 됐다. 처음에는 강한 인상과 거침없는 입담에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임이 있던 날,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연락처를 주고 받았고 한참이 지나서 연락이 왔다.
"중고거래 앱인 당근에서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너도 꼭 가입해라 친구야!"
그 한마디가 가슴 어느 언저리에 깊이 새겨져버렸다. 어쩌면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12. 그 친구는 나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다. 솔직하고 당당하며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13. 친할수록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자로 안부를 묻고 통화를 한다. 상대의 시간을 존중하고 배려하기 위함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때마다 깨닫는다. 친구란 늘 생각나는 존재라는 것을.
14.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지난 2년은 마치 20년을 함께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직장 동료의 30년 지기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 나에게도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걸어갈 소중한 벗이 생겼기 때문이다.
15. 인생을 살아가면서 친구란 얼마나 오래 알았느냐보다 얼마나 깊이 마음을 나누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늦게 만났지만 오래 함께하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친구가 아닐까.
늘 생각나는 친구야. 우리 건강하게 오래 오래 함께 하자. 내가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 어린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