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년째 다니고 있는 복지관 프로그램에 참석하던 날이었다. 강사로 활동하는 한 분이 내게 아동인형극을 해 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목소리와 발성이 좋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대를 향한 지난날의 열망이 스쳐갔다.
2. 어릴 적,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관람한 적이 있다. '레이디 호크'라는 영화였다. 거대한 스크린과 웅장한 음향은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날 이후 텔레비전에서 하는 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챙겨 보았다.
3. 그 시절 텔레비전 속 세상은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꿈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던 내게, 화면 속 사람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실제 삶이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로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더 매력을 느꼈다. 평범한 나를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경험해 보고 싶어졌다.
4. 연기를 배우려면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했다. 당시에는 서울로 올라가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되고자 부산의 산업체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5. 부산에서의 생활은 외롭고 서글펐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주말마다 찾던 영화관은 고된 일상 속 유일한 위로였다. 그 무렵 연기학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적은 월급으로는 학원비를 마련하기가 턱없이 어려웠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야 했기에 결국 마음속 꿈을 접어야 했다.
6.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쳇바퀴 돌듯 바쁜 직장 생활을 했다. 문득 자신을 위해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운전면허증도 땄다. 몇 년 동안 차곡차곡 모았던 적금으로 작은 경차도 장만했다. 집과 직장을 오가며 살아가던 어느 날, 멀지 않은 곳에 연기학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꿈이 다시 꿈틀거렸다.
7. 조금씩 돈을 모아 오디션을 봤고, 다행히 합격했다.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연기와 이론 등 다양한 공부를 무사히 마쳤다. 서울 방송국 견학도 다녀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은 넓어진 것 같아 뿌듯했다.
8. 학원에서는 극단과 연결을 해 주었다. 공연 연습 중이던 극단을 찾아가 사람들과 얼굴도 익히고 무대에도 올랐다. 막상 무대에 서 보니 낯설고 두려웠다. 짧은 역할이지만 성실히 임했다. 선배들의 격려에도 연기는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고, 자신감은 쉽게 자라지 않았다. 결혼과 함께 연기에 대한 꿈도 접어야 했다.
9. 그렇게 연극은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고 현실이라는 무대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친구들과의 모임 장소에서, 옆 테이블에 앉은 누군가에게 시선이 꽂혔다. 낯익은 얼굴이 었다. 서로를 알아봤고 반가워했다. 과거 함께했던 극단 대표님이었다. 연극을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극단으로 찾아오라는 제의를 받고 고민했다.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다시 할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결국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10. 극단은 시청 옆 건물의 지하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표는 목소리가 아직 살아 있다며 3년만 같이 해 보자고 말했다.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말주변도 없고 거절도 잘 못하는 성격이지만, 다시 꿈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이었다.
11. 연기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무대는 잘하는 사람만 서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족한 연기력 때문에 좌절한 적도 많았지만,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그곳에서는 소심한 나도 마음껏 웃고 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무대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사람을 배워갈 수 있었다. 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연극을 하면서도 늘 새로운 도전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복지관에서 아동 인형극 제안을 받게 되었다.
12. 시민들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공연이었고, 외솔기념관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대본을 받고 역할을 맡아 연습을 시작했다. 특히 녹음을 하는 과정은 무척 즐거웠다. 마이크 너머로 들리는 내 목소리의 울림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작년에 복지관에서 했던 성우체험이 떠올랐다. 목소리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매력에 끌렸었다. 새로운 인생의 무대가 생겼다.
13. 어릴 적에는 텔레비전 속의 세상과 무대 위의 세상을 동경했다.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가장 소중한 이야기는 내 삶 속에 있었다. 기쁨과 좌절, 만남과 도전이 쌓여 나를 만들었다. 이제는 그 이야기를 글로 만들고 싶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울리고, 작은 용기도 심어주는 대본으로 말이다.
14.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아직 막이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인생의 무대 위에서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