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아무 글이 없길래 제 홈피에 있던 글 옮겨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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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은 16세기에 발명한 악기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물론 완전한 발명이 아니고 아득히 태고 (太古) 로부터 시작되는 하나의 발전의 귀결인 것이다. 이 발전은 중세 (中世) 를 통해서 점점 더 뚜렷한 형태를 취하게 되고 촉진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궁주 악기 (弓奏樂器) 가 공존하게 되었는데 그 가끔의 특징이 1500 ~ 1520년경에 이르러 융합되어 대충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이올린이란 것을 낳게 되었다.
그 아득한 기원에 대하여 살펴볼 것 같으면 어원학 (語源學) 을 발판으로 해서 탐구가 행해졌으나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이올린(violin[영], violine[이], violon[프])에서 비올(viol)로, 비올에서 비엘(viel) - 이들 명칭은 나중에 정의된다. - 에로, 그리하여 비엘에서 피델리(fidely) - 중세의 비엘을 독일어로 말한 것 - 로 쉽게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이 마지막 두 개의 이름은 설명될 수가 없었다.
라틴어의 동사 vitulari 는 그 액센트를 두는 방법에 따라 [송아지처럼 깡충거리다]라는 뜻의 낱말이 파생된다고 하는데, 쿠르트 작스가 교묘한 논증 (그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음) 을 사용해서 제시하고 있는 어원, 즉 예니세이 지방의 방언으로 트럼펫을 나타내고, 다시금 확대해서 다른 모든 악기도 또한 나타나는 fedilo라고 하는 말과 같이, 이것도 달리 분명하게 사태를 해명해 주는 것은 되지 못한다.
기원전 2천년에서 3천년에 걸쳐 랑카 (실론) 왕 라바나라고 하는 인물이 발명한 궁주 악기가 존재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역시 증명할 길은 없다. 인도의 라바나스트론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활을 갖고 연주되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전혀 없다. 활이라고 한 것이 서양에 나타난 것은 대충 10세기 경인데, 이 시기 이전에 동양에 활이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유명한 <우트레히트 시편집>(9세기 초엽) 의 삽화를 바탕으로 해서 매력적인 이론이 여러가지로 가상된 것이지만, 이 삽화 (제 107편) 가운데는 작은 하프와 키타라와 매우 긴 막대기를 가진 성시 작가가 등장하는데, 이 막대기가 거대한 활이라고 해석되고 있었다. 음악 도상학의 뛰어난 전문가인 E. 빈타니쯔는 시편의 원문에 부딪쳐 보려고 생각했었다. 거기에는 [나는 시켐을 분할하여, 스코테 골짜기를 재보련다] 라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문제의 거대한 활은 측량용의 막대기였던 것이다. 가장 확실한 계통 관계는 바이올린을 갖고서 키타라의 후예라고 하는 것으로서, 이 키타라 그 자체도 그리스인이 가장 오래된 동양 문명에서 도입한 것이었다.
리라 (lila) 도 또한 다소 직접적으로 몇 가지 형태의 궁주 악기를 낳게 했지만 이 리라와 같이 키타라는 하나의 공명통으로 되어 있으며, 거기에다 상자 아랫 부분과 두 개의 완목으로 지탱된 걸이에 고정된 복수의 현이 쳐져 있다. 그러나 리라의 몸통은 반구형의 상자이며, 그 팔은 걸이를 지탱하기 위한 단순한 가는 막대인데 비해, 키타라는 평행 하는 두 장의 널판지 (울림판과 뒷판) 로 이루어진 공명통을 갖고 있으며, 이 두장의 널판지는 가로댄 널판지로 연결되어 두 개의 완목이 뻗어 있다. 가장 완성된 형태의 것으로는 울림판에는 울림 구멍이 뚫려 있고, 현의 쳐진 상태는 줄감개로 조절되며, 그것만이 지판을 붙인 대가 중간에 부어 있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악기와 바이올린의 가장 오래된 조상 사이의 연고 관계는 매우 쉽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과를 거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러 여러 가지 설로 나누어지게 된다.
어떤 유파의 고고학자들이 보는 견지에서는, 이 연쇄의 중간 고리는 저 웨일즈의 좀 이색적인 악기 크라드 (crath) 로서, 가로댄 나무를 떼고 목부분을 노출시키면 그 모양은 기타와 비슷해진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크라드는 16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웨일즈는 좀 더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전기의 로트 (rote) 였음은 증명되고 있는 것 같다. 로트는 일종의 키나라로서 줄감개와 이어져 있는 완목은 어떤 종류의 앗시리아의 키타라 그 자체와 닮은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로트는 퉁길 수도, 활로 켤 수도 있는 고대의 키타라에서 비엘로 이행하는 중간 형식으로서는 가장 확실한 것 같다.
사실 궁주 악기의 출현 당시에 있었던 것은 일정한 형태의 모델이 아니고, 문헌에서 매우 빈번히 거론되고 있는 비엘, 로트, 지그, 리베카 등의 참으로 여러가지 형태가 존재했다는 것에 의해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더욱이 악기 그 자체의 형태는 위에서 들은 4가지 분류명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가끔 가장 뚜렷한 성격만을 주목해서 간편하게 두 가지 주요한 형태, 즉 비엘 형과 리베카 형으로 나눌 수가 있다. 전자는 - 가로판이 없고, 앞판은 현재의 만돌린과 같이 불룩하지만 줄감개 부분까지 끝이 뾰족한 울림몰통으로 덮여 있는 - 차라리 리라의 자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좁은 부분이 목 부분을 대신하고 있으며, 전체는 세로로 자른 서양배의 반쪽 부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리베카 쪽이 먼저 출현되었던 것이라 가끔 주장되고 있지만, 그 근거는 대체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동양의 악기인 루바브와의 언어상의 친근성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란에서 이미 8세기 경에 루바브 형의 악기가 출현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활로 연주되는 이런 종류의 악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950년 경의 알 파라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서양에 있어서의 궁주악기의 최초의 그림도 그 시기의 것임을 밝혀 둔다.
리베카라는 말은 늦게 나타났다 (13세기 라틴어의 루베바라고 하는 형태로서). 그러나 이 악기는 흔히 한 가닥의 현을 친 것으로서, lira 또는 lyra라고 하는 이름 ( 이 이름은 고대에 있어서는 전혀 별개의 형태인 악기를 가리켜 말했으며 15세기 말엽에는 다시금 또 다른 악기를 가리키게 되었다) 아래 중세 전기의 사본에 이미 나타나 있었다. 이 악기는 길지만,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경력을 더듬게 된다. 과연 몇몇 르네상스 전파의 그림에는 천사들이 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실은 이 악기는 가장 신분이 낮은 메네트리에 (Menetriers) [마을을 돌아다니는 악사]가가 사용하던 악기였으며, 더욱이 그들에게 가장 합당한 것이었다. 그 소란스러운 음빛깔로 말미암아 이것은 야외나 저급한 술집에서 연주되는 것으로 치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1742년에 [리베카라고 하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는 세가닥밖에 현이 없는 일종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떠돌이 악사들에게 허가한 [바이올린왕, 원래 바이올리니스트의 동업 조합의 우두머리를 지칭했으나 프랑스에서는왕실 전속의 바이올린 단의 수석 주자를 가리켜 이렇게 불렀다] 의 칙령도 바이올린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그들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엘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올바를 것 같다. 사실, 비엘은 가로판으로 이어진 앞판과 뒷판으로 이루어진 공명통과 머리에 줄감개통이 달려 있는 목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화면 자료는 바이올린과 같이 어깨에 올려놓고 연주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교양이 있는 음악가들의 악기인 것이다. 13세기 말엽 장 드 그루시 (요하네스 데그로케오) 는 여러가지 악기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지위를 비엘에게 부여하고 있다. 보다 소리가 큰 악기도 청중의 영혼에 보다 강렬하게 작용시킬 악기도 축제 때나 기마 시합에보다 적합한 악기도 있을지 모른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엘로 연주하는 것에 의해서 만이 [여러가지 음악 형식은 가장 정치 (精緻)하게 들리는 것이고, 또한 뛰어난 예능인이 온갖 종류의 가곡, 일반적으로 온갖 음악 형식을 연주할 수 있는 것도 비엘에 의해서만이다] 라고 역설하고 있다. 15세기 이후 비엘은 이 무렵부터 비올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다른 궁주악기에 대한 다시금 뚜렷한 우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윽고 이것도 여러 가지 크기의 것이 등장하게 되는데 성악의 4부 혹은 5부를 모방해서 조직된 동계의 일족을 구성하게 된다.
비올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바이올린과 다르다. 즉, 그것은 일반적으로 보는 가는 현을 여섯 가닥 쳐놓고 있으며, 치는 방법을 약하다. 앞과 뒷판은 그다지 두껍지 않고, 가로판은 좀더 높게 되어 있으며, 울림 구멍은 f자 모양이 아닌 c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음빛깔을 그 다지 화려하지 않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당시 바이올린은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지만, 비올은 그 가장 소형의 것, 즉 파르두슈 드 비올은 1760년 경 파리의 현악기 제작자였던 게르생이 만든 캥통과도 상이되는 것이다. (캥통은 연주의 편의상 높은 음의 제5현을 덧붙인 바이올린으로서, 그 낮은 음부의 제3현은 바이올린의 보통의 음과 같으나, 제1현은 한 음 맞추어서-[미]가 아니고, [레]가 된다. - 보조현은 4도 위의 [솔]을 낸다)
바이올린은 표준형의 비올에서 태어난 것 같으나, 직접적인 것이 아니고, 16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에서 출현하게 된 리타 다 브라치오라고 하는 악기를 통해서 변이 되었다. 이 명칭은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스트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이것을 고대에 결부시키려고 해서 붙인 것으로 악기 그 자체는 그리스 로마의 리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것이 그려져 있는 많은 그림이나 판화 가운데는 그 사이즈가 적어도 오늘날의 비올라와 같은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바이올린과 같은 연주 자세로 취급되고 있다. 바이올린과 마찬가지로 이 악기도 볼록한 앞판과 뒷판을 가지며, 가로판은 좁고, 울림 구멍은 거의 늘 f자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줄감개 부분은 납작하고, 일곱 가닥 혹은 여덟 가닥의 현이 쳐져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가닥 혹은 세 가닥은 줄버팀위에 지나지 않고, 개방 현으로 퉁겨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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