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미국 대통령 윌슨이 1918년 1월 의회에 제출한 14개조 세계 평화안은 “비밀 외교의 폐지, 경제 장벽 철폐, 항해의 자유, 군비 축소, 민족자결주의, 국제연맹 창설” 등이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은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자 1918년 10월 윌슨은 이 원칙을 평화회의로 유보하면서 “완전하지 않은 국가들(식민지)이 평화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좋지 않다”며 자신의 입장을 변경했다.
이어 윌슨은 제5조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1918년 12월에는 ‘민족 자결주의의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는 방침을 정했다.주1) 또 최종적으로 강화회의에 제출할 국제연맹 규약에서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를 삭제했다.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윟슨의 민족자결주의 천명은 레닌이 주창한 ‘민족 자결의 원칙’에 대응한다는 측면도 있었다. 즉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이 성공한 직후 레닌이 발표한 일련의 선언, 즉 ‘평화에 관한 법령’이라든가 ‘러시아 인민의 권리 선언’ 및 ‘러시아와 동방의 전 이슬람 노동자에게’ 라는 격문에서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방어적인 측면이 강했다. 제정 러시아 치하에 있던 여러 피압박 민족에 대한 레닌의 ‘민족 자결 원칙’은, 인근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윌슨은 열강 간의 국제협약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형식을 빌려 식민지 약소민족의 문제를 점진적이며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주2) 반면에 레닌은 궁극적으로 혁명에 의한 제국주의 국가 타도만이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즉 레닌은 식민지 국가들이 반제국주의 투쟁에 나서야 할 이유를 제시하면서 이들 국가의 독립운동 진영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약소국의 민족자결론
이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후 새로운 사조로 등장한 윌슨이나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시켰고, 민족의 자각과 민족해방운동을 고양시켰다. 한인 민족 지도자들도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에 고무되어 세계열강의 힘을 빌려 독립하려 했다.주3)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일처럼 패전국이 지배하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전승국의 식민지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예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온 힘을 다해 영국을 도와주었지만 전후에 약속받은 자치권을 얻지 못했고, 필리핀도 미국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도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본질을 이해하고 열강들의 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가 포함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미국에 대한 기대, 즉 개항 이후 꾸준히 이어온 선미(善美) 의식 속에서 미국의 도움을 절실히 기대했다. 따라서 임정을 비롯한 독립운동계에서는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입각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주1)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제정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이 여러 나라로 독립했다.
*주2)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미국의 경제적 팽창을 위해서도 제기되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식민지 경쟁에서 뒤쳐있었다. 따라서 유럽 패전국의 식민지를 해체시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유럽의 승전국에 대해서는 패전국 식민지의 분할요구를 억제시킴으로써 전후에 미국이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주3) 1919년에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작성되었다. 한편 당시 도쿄의 유학생들은 “伢國(아국, 러시아)은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라고 하면서 러시아혁명의 결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즉 이들은 민족자결주의와 함께 세계사의 새로운 분위기에 고무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