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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존 스토트)

작성자miramonte|작성시간16.12.23|조회수464 목록 댓글 0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The Contemporary chritian


-존 스토트 John Stott-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 주의자이자 신학자요, 저술가.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 192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 케임브리지 리틀리 홀에서 목회 수련. 자신의 모 교회였던 런던의 올 소올즈 교회 담임목사로 30여 년간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 지도자로서 로잔 언약을 입안하였고, 로잔운동에 몸을 담았다.

빌리그레이엄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성직자’라고 칭했고, 존 폴락은 ‘사실상 전 세계 복음주의의 신학적 리더’라고 했다. 2005년 타임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했다.


구십 평생 제자의 삶을 살아온 그는 2011년 7월 27일, 런던 바나바 칼리지 은퇴자 숙소에서 지인들이 읽어 주는 성경 말씀과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주님 품에 안겼다.


[한국어판 서문]


첫째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과거의 결정적인 사건, 곧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을 돌아보고, 우리 신앙의 근거를 거기에 둔다. 또한 우리는 항상 그 사건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선포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분은 역사적 예수님과 현대적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제자 도는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주신 것들에 대해 우리가 깊이 감사하는 것과 관계없이, 우리에게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더 많은 것이 있다.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구원은 둘 다 불완전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의 시작과 완성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것이 된 모든 것을 소유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시기까지는 우리 것이 될 수 없고 우리 것이 아닌 것들을 겸손히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계속 경험하는 긴장이 있다, 첫째, 과거와 현재, 즉, 그때와 지금 사이의 긴장이다. 둘째, 현실과 미래 즉 지금과 아직 사이의 긴장이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긴장 가운데 사는 사람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서문]


기독교 신앙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신뢰하고 경배하는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1:8)이시며, 우리가 헌신할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히13:8) 때문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을 다루는 법에 대해, 다시 말해서 어떻게 우리의 사고와 삶 가운데 과거와 현제와 미래를 한데 결합시켜야 하는가를 다룬다. 우리는 두 가지 주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 번째는 그때(과거)와 지금(현재) 사이의 긴장이다. 두 번째는 지금(현재)과 아직(미래) 사이의 긴장이다.


이 책의 서론에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과거를 존중하면서 현재를 사는 게 가능한가? 우리는 동시대 사람들과 동떨어지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역사적 정체성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가? 또 복음을 왜곡하거나 파괴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흥미진진한 현대적 용어로 전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옛것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될 수 있는가, 아니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결론에서는 지금과 아직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 나는 아직 계시되거나 주어지지 않은 영역을 부당하게 침범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지금 우리가 어느 정도나 탐구하고 경험 할 수 있는지 질문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득의양양하지 않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 앞에서 타당한 겸손을 보일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수다스럽다는 평을 듣고 있다.


포스터가 쓴 “인도로 가는 길”에 나오는 무어 부인이 마라바 동굴에서 겪은 경험, 특히 그 단조로우면서도 무시무시한 ‘보움’(boum)하고 울리는 메아리에 대한 묘사를 기억할 것이다. 동굴 안에 있을 때 거의 기절 할 뻔한 그녀는 밖으로 나와서 편지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종교-가련하고 하찮은 수다스러운 기독교-가 나타나고, ‘빛이 있으라’는 말로부터 ‘다 이루었다’는 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모든 신적인 말씀들이 ‘보움’ 하고 울리는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 이상한 절망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동굴에서 울리는 ‘보움’이라는 메아리보다 훨씬 분명한 실체가 있다. 그것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무어 부인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손하게 집중하여 그 말씀을 듣고, 우리의 미성숙한 수다스러움으로 그 말씀을 사장시키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성실하고도 민감하게 고대의 말씀과 현대 세계를 관련짓기 위해 그 둘 다에(물론 존중하는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서론 * 그때와 지금


많은 사람들이 ‘현대적 그리스도인’과 현대적 기독교‘라는 표현을 용어상의 모순처럼 여긴다. 어떻게 기독교를 현대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은 고대의 신앙이 아닌가? 그 종교의 창시자는 2천 년 전에 살 다 죽지 않았는가? 기독교는 현대인과 상관없는 한 시대의 파편이자, 박물관의 진열품, 먼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고대의 유물이 아닌가? 이 책은 이런 질문들에 답하면서 ’현대적인 기독교‘가 실제 함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고안해 낸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가 아니라 현대 세계와 민감하게 관련된 역사적이고 정통적이며 성경적인 기독교다.


[역사적이며 현대적인 기독교]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임을 재천명해야 한다. 물론 모든 종교는 어느 정도 역사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종교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났으며, 그 창시자가 누구인지 또한 그 종교를 발전시켜온 후계자들이 누구인지를 추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임을 다른 종교보다 훨씬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인물에 기초할 뿐 아니라 그분과 관련한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정신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사건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회고해 보라고 계속해서 권고한다. 실제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분의 백성들이 때마다 구속적 사건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으셨다. 출애굽을 상징하는 유월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연례 절기이며,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상징하는 성만찬은 우리가 정기적으로 그 죽음을 기억하고 그것이 주는 크나큰 유익을 마음껏 누리도록 한다. 따라서 말씀과 성례를 통해 과거는 다시금 현재화 된다.


기독교에 역사적 기원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복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견고한 신앙의 토대를 제공해 준다. 우리의 믿음은 전설이나 꾸며낸 이야기 혹은 신화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근거한다. 그러나 너무 오래전에 일어난 사건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때와 지금. 과거와 현재, 역사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의 거대한 간격은 우리를 난처하게 한다. 젊은 세대는 우리에게 역사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때가 아니라 지금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은 몇몇 명제(대부분 신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명제)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 또는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이다. 이 관점은 철학적 의심이 바탕이 되어 성립되었다. 절대적 진실은 부정확하다는 관점을 취한다. 불가지론의 원래의 의미는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교조주의(敎條主義)의 반대 개념이다.

불가지론자들 중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입장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거짓 모습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 경우 본질적 실재는 완전히 불가지(不可知)라는 흄의 설과, 그것은 신앙의 영역에 관한 문제라 하여 남겨 놓는 칸트의 설도 있다. 감각이나 표상은 본질적 실재가 자기를 인간에게 제시하기 위한 상형문자(象形文字), 혹은 기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프레하노프 등의 상형문자설도 불가지론의 일종이다.―편집자」


기독교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진부하며, 적실성이 없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 이래로 세상은 극적으로 변했으며 전례 없이 놀랄만한 속도로 계속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복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그것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교회는 현대성의 도전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되어 버린 공룡처럼 치욕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우리는 하나님이 과거에 말씀하신 것을 통해 지금도 계속 말씀하신다는 근본적인 기독교의 확신을 다시 선언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딜레마에 빠져 있다. 복음은 진정 현대화 될 수 있는가? 교회가 역사적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현대의 삶의 현장을 소외시키지도 않으면서 전자를 후자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적용할 수 있을까? 기독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적실성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아니면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과거로 후퇴하는 것과 현재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 사이에서, 또 케케묵은 진리들을 읊어대는 것과 그럴듯한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가? 아마도 이런 양자 간의 위험 중 더 큰 것은 교회가 원래 모습을 훼손시킬 정도로 믿음을 개조해 버려서 원래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문제에 집중하려 한다. 이 책 나머지 부분에서는 여러 방법을 통해 적실성의 문제를 말하려 한다.


1937년에 하버드 대학의 헨리 캐드베리가 쓴 “현대화된 예수의 위기” 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현대화하려는 자들의 목적이 그를 현대 지성인들에게 생생한 표현, 즉 현대적이고 적절한 용어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는 칭찬할 만한 시도라고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종종 예수님을 조롱하며 그의 옷을 벗긴 후 그에게 자주색의 군복 외투를 입히고 조롱을 한 후에는 그 외투를 벗기고 그에게 자기 옷을 입힌 군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와 같은 종류의 의상을 입히고 그분에게 우리 스스로의 사상들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흥미를 갖게끔 예수님을 제시하려는 욕구는 분명 정당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회퍼가 감옥에 있을 때 몰두한 일이었다. 그는 1944년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이렇게 썼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이라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고민스러운 질문이다.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되풀이해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해 오셨다. 그분은 채찍질당하고 상처 입으셨으며 수많은 제도들과 철학들이라는 감옥에 갇히셨다. 그분은 사상의 시체로 취급당해, 더 이상 다시 살아나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끔 문자 그대로 개념의 무덤에 넣어지고 돌 판으로 덮였다. 하지만 일련의 개념의 무덤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되풀이해서 살아나셨고,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예수님을 현대화하려는 시도들]


금욕주의자 예수, 여러 세대의 수도승들과 은자들을 배출한 예수의 모습이다. 그분은 세례 요한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분 역시 낙타털로 된 옷을 입었고, 샌들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으며, 아주 맛있게 메뚜기를 드셨다.


창백한 갈릴리인 예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이방신들 대신 그리스도를 숭배한 후에, 다시 그 이방신들을 숭배하려고 애쓴 사람은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였다. 그는 주후 363년에 임종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오, 갈릴리인 이여 그대는 이겼도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말은 19세기의 시인 스윈번이 쓴 다음과 같은 시구로 널리 알려졌다.

“그대는 이겼도다. 오, 창백한 갈릴리인 이여

세상은 그대의 숨결로부터 잿빛으로 변했도다. “


우주적 그리스도 예수, 광대 예수, 현대 기업의 창립자 예수, 경제학자 예수, 자본주의자 예수, 사회주의자 예수, 자유의 투사 예수.


뉴욕 타임스는 그가(예수) 볼세비키식 무정부주의자이며, 기독교계시라는 옷 안에 레닌과 토로츠키의 교리를 숨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놀라울 만큼 기발하게 전재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시대착오적이다. 각 세대들은 그분을 자기 나름의 이상과 열망을 가지고 재해석 헸고, 나름의 형상으로 그분을 창조해 냈다. 현대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내겠다는 그들의 동기는 옳았으나, 그 결과는 어느 정도 잘못된 것이었다. 그 모습은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중 귀 기울임 이라는 소명]


예수님의 참모습을 저버리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현대 유행을 지나치게 신경 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세상을 이해할 뿐 아니라 세상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세상과 관련시킬 수 있을까? 먼저 이중 거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열중해서 세상을 직면하지 못할 정도로 말씀으로 도피 하는 것과, 세상에 너무 몰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판단하지 못할 만큼 순응하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도피와 순응은 정반대의 실수이지만 둘 다 기독교적 선택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이중 거부 대신에 이중 귀 기울임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 귀 기울이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는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한 것은 무엇이든 믿고 순종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 귀 기울일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비판적인 자세로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거나 순종하지는 않지만, 세상의 처지에 공감하며 복음이 어떻게 세상과 관련되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중 사고double-think라는 개념을 잘 알고 있다. 조지 오웰이 「1984」(Nineteen Eight-Four)에서 만들어 낸 표현으로, 마음속에 두 가지 상충되는 견해나 신념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중 사고는 파렴치한 선전 가들의 전공이다. 이중 언사(double-speak)는 더욱 불명예스럽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 또한 같은 사람에게 서로 상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중 언사는 위선자들과 노련한 거짓말쟁이의 상투적 술책이다. 그러나 이중 귀 기울임(double listening)에는 자기모순의 요소가 전혀 없다. 그것은 두 음성, 곧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주위 사람들의 음성을 동시에 듣는 능력이다. 이 둘은 종종 서로 모순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발견하기 위해 들어야 한다. 이중 귀 기울임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와 기독교 선교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중 귀 기울임을 훈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역사적이라는 형용사와 현대적이라는 형용사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는 법을 배우고, 참되며 새로운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다. 요약하면, 우리는 그때의 빛에 비추어 지금을 살고 있다.


제 1부 복음


1. 인간의 역설적 상황


인간은 존엄성과 부패성이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는 가장 고결하고 숭고한 일과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일을 모두 행할 수 있다.


2. 진정한 자유

[소극적 측면]


내가 당신네 그리스도인을 가장 부러워하는 점은 당신들이 용서받았다는 거예요. 내게는 나를 용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자유는 용서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우리가 그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분이 만물을 발아래 두고 다스리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적극적 측면]


진정한 자유란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시고 의도하신 참된 자아를 찾는 것이다.


3. 그리스도와 십자가


우리는 인간적으로 사색한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 하나님의 복음의 보관자,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을 지키는 청지기다.


바울이 버린 것은 교리나 합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와 웅변술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성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책임은 복음을 가능한 한 분명하며, 조리 있고, 수긍할 만하게 제시하는 것이며 사도들이 그랬듯이 가능한 한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자들은 부활을 하나의 분리된, 혹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선포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 후 이어진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에게 내려진 인간의 판결을 뒤엎는 것이었으며,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4. 부활의 적실성


기독교의 모든 주장중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사실 쉽게 믿기지 않는다. 인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음에 도전하고 죽음을 부인하려 해 왔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사망을 정복하셨다고, 즉, 몸소 사망을 이기시고 다른 사람을 덮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뺏으셨다고 주장하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너희는 그를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고,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다(행2:23).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주장에 제기되는 주된 질문은 세 가지다. 첫째,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정말 일어났는가? 셋째, 그게 중요한가?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부활하신 주님은 단지 살아남아 있는 영향력이 아니다. 일단 우리는 그분을 마치 유령처럼 그저 죽음을 면하고 살아남은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는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둘째, 부활하신 주님은 소생한 시체가 아니다. 부활resurrection과 소생resuscitation은 동의어가 아니다. 소생이라는 말의 두 가지 용례 모두 그러하다. 소생하다는 말은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가 회복되거나, 임상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의 의미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세 번의 소생 사건을 일으키셨다. 그분은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셨다(즉 야생의 삶으로 회복시키셨다). 이 세 사람은 각각 죽었으나 예수님이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그분은 졸도나 혼수상태에서 회복된 게 아니었다. 그분은 약 서른여섯시간 동안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살아났다가 다시 죽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관해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시체가 현재 구성된 똑같은 분자들로부터 기적적으로 재구성되어, 다시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실존으로 부활하셨으며 더 이상 죽지 않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계1:18).


부활은 뼈를 가지고 행한 요술적 계교가 아니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은 시체도 유령도 아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그가 이처럼 다소 튀는 언어를 사용해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믿는 듯 한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상적인 개념이 무엇이든, 교회의 신앙은 결코 부활하신 주님을 영묘한 유령의 영향력이나 소생한 시체로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셋째, 부활하신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의 체험 속에 되살아난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루돌프 볼트만이 비신 화화한 재구성이었다고 단언했다. 왜 이렇게 분명히 말했을까?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포함하는 역사적 사실이란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시대의 교회는 볼트만이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을 생각하고 이해하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껴온 것 같지는 않으니, 그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체의 소생과 같은 신화적인 사건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소생과 혼돈한 볼트만의 오해다. 그렇다면 볼트만은 예수님의 부활의 신화를 어떻게 해석할 까? 바로 이런 식이다. 만일 부활절의 사건이 어떤 의미에서든 십자가 사건에 추가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부활한 것과 다름없다. 역사 비평이 확립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최초의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다시 말해, 부활절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체험이라는 예기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객관적. 역사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주관적 개인적인 믿음이 회복된 것이다.


넷째, 부활하신 주님은 단순히 확대된 인격이 아니다.


다섯째, 부활하신 주님은 단순히 성령에 대한 현재의 체험이 아니다.


여섯째, 부활하신 주님은 변화된 인물이시다. 복음서에 제시된 증거에 따르면,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에 예수님은 똑같은 정체성을 지니신 동일한 인물이셨으나(나인줄 알라-눅24:39), 그 부활로 그분은 변화된 영화로운 몸을 갖게 되셨다.


[부활은 정말로 일어났는가?]


첫째, 시체가 사라졌다. 둘째,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셋째, 교회가 출연했다.


시체가 사라졌고,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으며, 교회가 등장했다는 것은 한데 결합되어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견고한 토대를 형성한다.


[부활이 왜 중요한가?]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게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죄 사함과 화평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으며, 다락방에서는 성찬의 잔을 두고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언약의 피”(마26:28)라고 언급하셨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의 죄 사함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키셨다. 성경 전체에서 볼 때 죽음은 항상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서 죄와 결합되어 있음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이 말씀은 우리가 목숨을 구하고 죄 사함을 받도록,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 대신 그분이 죽으실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죽음을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위한 결함이 없고 완전하며, 충분한 희생, 봉헌, 속죄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이렇게. 만일 그분이 계속 죽은 상태로 있었다면, 만일 그분이 눈에 보이게 공개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논리를 분명하게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14).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확인하게 한다.


그분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으며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


바울은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능력의 분량을 깨닫는 것을 돕기 위해, 하나님은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의 내면을 조명해 주실 뿐 아니라 부활을 통해 그 능력을 의적, 공개적, 객관적으로 보여 주셨다. 우리가 오늘날 누릴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바로 그 능력이기 때문이다(엡1:18~20).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게 한다. 종교가 세상의 이데올로기들과 다른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관련 있다. 어떤 것들은 아무런 희망도 제시 하지 못하고 실존적 절망에 빠져 버리고 만다.


그리스도를 떠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개인적 죽음과 소멸에 대해 두려워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를 영원히 완성시키기 위해 장엄하고 웅대한 모습으로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뿐 아니라 우주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마19:28). 그분은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계21:5). 우리는 온 우주가 현제 처한 썩어짐과 사망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리라는 것과, 자연의 신음이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약속하는 해산의 고통이라는 것을 믿는다(롬8:20~23). 또한 우리는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벧후 3:13, 계21:1).


그렇다면 놀랍게도 신약의 산 소망은 개인과 우주에 대한 물질적인 기대다. 각 신자들은 단지 살아남는 것이나 불멸하는 것 뿐 아니라 부활하고 변화된 몸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는다. 그리고 우주의 운명은 천상에 있는 하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된 우주가 되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은 모든 기독교 신조 중 가장 초기부터 이어져 온 가장 짧고, 간단한 주장이다.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갔다.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고 했으며.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12:3). 라고 했다.


[신학적 확신]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9!11).


첫째, 바울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주전 2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 되었을 때, 경건한 유대인 학자들은 애훼 또는 여호와라는 신성 할지 몰랐다. 그들은 너무나 조심한 나머지 그것을 발음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번역하거나 음역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단어를 쓰는 대신 ‘호 퀴리오스’라고 바꾸어 넣었다. 그 때문에 애훼라는 말은 아직도 대부분의 영어판에서 주님(the LORD)라고 되어 있다.


둘째,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본문(구약)을 예수님께로 옮겼다.


셋째, 바울은 하나님께 그릴 합당한 예배를 예수님께 드리라고 요구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라는 칭호(주님)를 부여했고, 하나님에 대한 본문들을 그분에게 적용했으며,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예배를 그분에게 드렸다.


[철저한 헌신]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는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지칭했다. 그들은 그분이 자신의 핏 값으로 그들을 사셨다는 것과, 그 결과 그분에게 속했으며 전적으로 그분의 분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그리스도의 인격적 소유권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첫째, 지적인 측면이 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그분의 학생, 제자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그분으로부터 배워야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헌신에는 도덕적 측면이 있다.

우리는 성화되기 위해서 여전히 도덕적 율법 아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율법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임재는 둘 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게 하셨는가?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려고(롬8:3~4). 왜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두셨는가? 우리 마음에 그분의 법을 기록하시려고(고후3:3,6). 따라서 구약에 나온 새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엡31:33)라고 , 그리고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 36:27)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순종하도록 부르신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살아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셋째, 그리스도의 헌신에는 소명적 측면이 있다. 즉, 그것은 우리의 생업을 포함한다.


넷째, 그리스도의 주권에는 사회적 측면이 있다.


다섯째,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는 정치적 측면이 있다.


제 2부 제자


6. 듣는 귀


[하나님께 귀 기울임]


독특한 진리중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


죽어 있으며 말하지 못하는 이방 우상들과 달리 살아 계신 하나님은 말씀하셨으며, 계속 말씀하고 계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시95:7).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신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죽으셨거나 침묵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듣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귀 기울임]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12:15).


[세상에 귀 기울임]


7. 지성과 감정

[지성]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첫째, 우리의 지성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창조주를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자기 형상에 따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고, 자연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이성적인 계시를 이중으로 주셨으며, 자신이 제시하신 것을 우리가 탐구하면서 지성을 사용하시기를 기대하신다.

둘째, 지성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영적으로 자주 어려움에 처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증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떼어 놓을 수 없다. 참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실제적인 삶과 경험의 영역에서 실패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이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것들은 결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믿음과 보는 것은 대조가 되고 있지만(고후5:7), 믿음과 이성은 그렇지 않다. 성경에 따르면 믿음은 그저 가볍게 믿는 것도, 미신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비논리적으로 믿는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분이라고 알려진 하나님을 사려 깊게 신뢰 하는 것이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셋째, 우리 지성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복음 증거를 강화한다.

현대의 복음 전도는 대부분 지성은 거의 무시한 태 감정과 의지만 공략한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지성을 차단하거나 정지하도록 요구해서는 절대 안 된다. 복음은 우리의 지성을 낮출 것을 요구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진리에 우리의 지성을 열 것도 요구한다.

오늘날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변호할 필요, 즉 변증 학을 우리의 복음 전도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급하다. 복음을 전하는 모든 상황에 우리는 바울이 베스도에게 했던 것처럼 “내가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행26:25)라고 단언할 수 있어야 한다.

수년전 나는 리버풀에서 목사들에게 강연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내가 기독교를 지성인들에게만 국한하고 자기가 사역하는 노동자 계층은 배제한다고 반박했다. 나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도시의 저소득층 지역에서 일하는 몇몇 사역자가 즉시 발끈하며 일어서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노동자 계층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처럼 정규교육은 받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당신만큼 지성적이며, 생각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


개인적으로 나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악에 분노하고,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악의 희생자들에게 동정을 느끼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성과 감정]


지금까지 우리는 지성과 감정을 따로 살펴보면서, 둘 다 그리스도인의 제자 도에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생각이라곤 전혀 하지 않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되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지나치게 지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셨으며, 인간은 이성적이며 감정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첫째, 소극적인 면에서 지성은 감정을 통제한다.

우리의 전 존재는 우리가 물려받은 죄로 인해 더렵혀지고 왜곡 되었으며 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선하며 어떤 것들은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분노를 예로 들어 보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엡4:26).는 명령은 분노에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악에 대해 느끼신 것과 같은 의로운 분노가 있으며, ‘육체의 일(죄 성으로 인한 행위)’중 하나인 불의한 분노(교만과 악의와 심술과 원한으로 오염된)가 있다(갈5:19~21). 따라서 우리 안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그 대신 스스로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잠깐, 내 안에서 불타기 시작하는 이 분노는 무엇이지? 의로운 분노인가? 악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면 단순히 상처받은 허영심인가?”

둘째, 적극적인 면에서 지성은 감정을 자극한다.

우리 마음에 불이 붙는 때는 우리가 진리를 묵상할 때다.

우리의 지성이 감정을 통제하고 자극하도록 하면서 그 둘을 결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19세기 말 핸들리 모울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헌신적이지 않은 신학과 신학적이지 않은 헌신을 똑같이 경계하라.”


8. 인도, 소명, 사역


인도는 하나님이 기꺼이 우리를 지도하신다는 의미이고, 소명은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의미이며, 사역은 그분이 우리의 삶이 섬김으로 드려지기 원하신다는 의미다.


[인도]


그분의 일반적인 뜻과 특별한 뜻을 분별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은 그의 백성 일반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그것은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반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속한 특정한 사람에 대한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그분의 일반적인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성경은 복잡한 20세기의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번지르르한 대답이 아니라 그 문제들에 적응할 수 있는 원리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뜻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 나는 때때로 하나님의 문맥에 상관없이 특정한 구절로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맞추어 그분이 자신을 낮추신 행위일 뿐이다. 성경은 서로 관계없는 본문이 모인 명언집이 아니라 축적된 역사적 계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게 하기 위해 마음대로 그것의 원래 의미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특별한 뜻을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해야 할까?

첫째, 양보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항복하거나 양보해야 한다. 의지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진리를 계시하지 않으신다면, 또한 행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계시하지 않으신다.

둘째, 기도하라.

막연한 굴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대하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분은 우리가 정말로 그것을 알기 원한다는 사실과 우리의 바람을 기도로 표현하지 않으면 자기 뜻을 보여 주지 않으신다.

셋째, 이야기하라.

개인적 판단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의 장점 가운데 하나지만, 이를 모든 결정을 혼자서 내려야 한다는 의미로 여기면 안 된다.

넷째, 생각하라.

양보하고 기도하며 조언을 구해야 하지만, 결국 우리 자신이 결심해야 한다.

다섯째, 기다려라.

하나님 앞에서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분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 되는 데 2천년이 걸렸고, 모세를 평생의 사역을 위해 준비 시키는데 는 80년이 걸렸다. 그분이 한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데는 약 25년이 걸린다.


[소명]


라틴어 소명에 해당하는 영어는 부르심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은 어떤 것을 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것이 되라는 것이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름 받는다. 이것이 기본이다. 그분의 부르심은 여전히 “내게로 오라는 것”,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름 받는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갈 3:13).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수용하셨기에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게 된 자유다. 그것은 죄책과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된 자유, 하나님의 양자로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자유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지을 자유나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난 자유는 아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우리는 평강을 위해 부름 받는다.

-우리는 거룩함을 위해 부름 받는다(고전1:2).

거룩함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현실 세계에서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우리는 증인으로 부름 받는다.

-우리는 고난을 위해 부름 받는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나니”(벧전 2:20!21).

-우리는 영광을 위해 부름 받는다.

신약에서 고난과 영광은 계속 일괄적으로 다루어진다. 예수님이 그분의 영광에 들어가신 것은 고난을 통해서였으며,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분과 함께 영광도 받을 것이다(롬8:17).


[사역]


사역에 대한 세 가지 주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사역으로 부름 받는다.

사역이라는 단어는 포괄적인 용어다. 형용사를 덧붙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다양한 사역이 있다.

사역은 섬김을 의미하며,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젊은 시절 나는 서로 다른 소명이나 사역이 계급제도나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도록 배웠다. 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불안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타문화권 선교사였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었다.


우리가 분쇄해야 하는 것은 피라미드다.


자기 일상의 일을 일차적인 기독교 사역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처한 세속의 환경에 침투하기로 결심하는 그리스도인 남녀도 절실히 필요하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특정한 사역은 아마도 우리의 은사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9. 성령의 첫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사랑, 희락, 화평]


-사랑은 가장 탁월한 기독교적 은혜다.

지식이 매우 중요하고 믿음이 불가결하며 종교의 체험이 필요하고 섬김이 필수적이지만, 바울은 사랑에 우월성을 부여한다.

“하나님은 사랑”(요일4:8)

-사랑은 희락과 화평을 가져온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이순서는 분명 중요하다.

인간은 언제나 희락과 화평을 추구했다. ~~~희락과 화평은 대단히 붙잡기 어려운 복이다. ~~~그것들은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행동하는 사랑]


-사랑은 행동을 낳는다.

-사랑은 절제에 의해 균형이 잡힌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다]


교회사 전체를 통해 완전론자들은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는 타락한 본성이 활발하지 않고 비활동적이며, 심지어 죽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갈 5:17).


육체와 성령의 소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령이 육체를 제압하여 그것을 정복하고, 사랑이 이기심에게 승리하며,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썼다.


타락한 본성을 우리가 냉정하게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갈5:24). 우리는 육체라고 불리는 이 악하고 끈적거리며 미끄러운 것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것이 우리가 한 최초의 회개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모든 악을 타협 없이 거부하는 것을 나타내는 극적인 비유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 즉시 혹은 쉽게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고통이 오랫동안 이어지는 처형 방법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방법이며, 거기서 도망할 가능성이 없다.


다른 한편, 우리는 성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성령에 굴복하는 일은 최초의 단절과 굴복이 아무리 단호했다 해도 매일 반복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눅9:23).

우리의 단절과 복종은 둘 다 훈련된 생활 습관으로 나타나야 한다.

어떤 사람이 늙은 산악인을 만났는데, 그가 데리고 온 개 두 마리가 계속 싸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산악인에게 보통 어떤 개가 이기느냐고 물었다. 산악인은 잠시 말없이 씹는담배를 씹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가장 많이 먹이는 개요.”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새로운 성품을 잘 먹이고 옛 성품을 굶길 때 새 성품이 옛 성품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제 3부 성경

[말씀에 굳게 섬]


먼저 바울이 말하는 말세가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직전의 미래 시대를 암시하는 게 아님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왜냐하면 딤전3:5절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묘사한 사람들로부터 돌아서라 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말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말씀에 계속 거함]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인성을 부인할 정도로 그분의 신성을 주장해서는 안 되며, 그분의 신성을 부인할 정도로 그분의 인성을 주장해서도 안 된다.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그 둘을 똑같이 주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교리에서도 인간의 말이라는 것을 부인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할 정도로 인간의 말이라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둘 다 동등하게 주장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


11.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함


현대 교회는 세상의 당혹감에 대해 어떤 말을 하기보다는 세상과 함께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교회는 자신의 정체와 사명과 메시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할 때에 더듬거리고 있다. 서구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이유는 바로 교회의 믿음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12. 말씀을 조옮김하기


[해석학의 문제]


13. 말씀을 해설함


본문을 연구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각각 올바른 순서대로 던져야 한다. 첫째는 그 본문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이고 , 둘째는 그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본문이 처음에 발화되거나 기록되었을 때 가지고 있던 원래 의미로부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는 현대적 메시지로 이동한다. 이 두 가지 질문을 혼동하면 안 되고 잘못된 순서로 제기해도 안 된다. 또한 어느 한쪽을 질문하지 않은 채 다른 것만 질문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를 말 자체, 즉 저자의 말에서 찾아내야지 독자의 생각과 감정에서 찾으면 안 된다.


의미는 본문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의미를 발견하도록 의도하셨는지 결정하는 것은 본문의 언어다.


본문에 대해 던져야 할 두 번째 질문은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다. 즉 원래 의미를 분별하고 난 후에는 그것의 현대적 메시지(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 되는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이때 영적 민감성이 요구된다. 우리는 현대 세계 그것의 전체 조건과 관심사, 의식구조와 분위기, 변덕스러운 문화와 추락하는 기준들, 가치관, 목표, 의심, 두려움, 고통, 희망, 그리고 특히 자아와 사랑과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에 점점 더 정통해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는 세상에 어떻게 말하는지 분별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본문의 현대적 메시지를 파악하지 않고 원래 의미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현대 세계의 실상과 관련 없는 골동품 수집 취미에 빠지는 것과 같다. 반대로, 먼저 본문의 원래 의미를 발견하는 훈련을 하지 않은 채 그것의 현대적 메시지로부터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계시의 과거성과 관계없는 실존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다 던져야 한다. 우선 본문의 의미를 신실하게 밝혀내고, 그 다음으로 현대를 향해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민감하게 분별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름길이 없다. 성경을 충분히 알고 세상의 모든 다양함을 알려고 애쓰면서 연구에 열중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의무는 우리가 이중 귀 기울임 훈련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즉 성경과 현대성을 서로 과년시키기 위해 성경에 겸손히 귀 기울이고, 현대성에 비판적으로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한 귀 기울임은 설교에 반드시 필요한 예비 단계다.


[두 가지 기대]


제 4부, 교회


14. 교회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을 민감하게 아는 것이다.

세속 사회의 목소리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며,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 당황함과 절망에 동감하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나사렛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


[초월성 추구]


초월성을 추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우주 너머에 있는 궁극적 실재를 추구하는 것이다.

 

15. 교회를 통한 복음전도


[교회는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그릇된 자아상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교회가 종교 클럽(혹은 내향적 기독교)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지역 교회는 지역의 골프 클럽과 다소 비슷하다. 그 회원들의 공동 관심사가 골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종교적인 일을 함께 즐기는 종교적인 사람들로 본다. 그들은 회비를 내면 어떤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자신에게 생긴다고 간주한다. 클럽 회원이 되어 갖는 지위와 유익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교회가 종교 클럽이라는 생각과 반대되는 또 다른 극단에는 세속적 선교가 있다. 1960년대에 일부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교회가 교회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격앙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우선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해결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이라고 말씀하셨다.


지역 교회를 통한 복음 전도의 네 가지 요건. 첫째, 교회는 자신의 이중 정체성(교회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상에서 부름 받았으며, 또한 증거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다시 보냄 받은 백성들이라는 의미)을 파악하면서 자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교회는 자신의 이중 정체성을 반영하는 선교전략을 개발하면서 자신을 조직해야 한다. 셋째, 교회는 성경에 충실하면서도 현대 세계에 적절한 방식으로 목음을 전하면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는 자신이 되어서, 곧 사랑의 공동체로 완전히 변화되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다시 세상에 보이도록 해야 한다.


16. 교회 갱신의 차원


17. 교회의 목사


[제사장적 모델]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는 성직자를 제사장 -특히 성찬식에서 그들이 행하는 역할과 관련하여- 으로 본다. 루터 교회와 영국 성공회 역시 전통적으로 성직자를 사제Priest로 부르지만, 다른 이유에서 그렇게 부른다. 트렌트 공의회는 미사를 드릴 때 정말로 하나님께 화목제가 드려지며 미사를 드리는 인간 제사장은 스스로 속죄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제사를 드릴 신성한 성직의 능력을 부여 받은 것으로 인정된다.


모든 교회 전통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결코 제사장들 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성찬식을 결코 그들이 드리는 희생제사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사역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이긴 하지만 둘 다 대표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이었다. 제사장은 특히 희생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대표였다. 선지자는 특히 신탁을 행할 때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대변인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이중 중재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수행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맺은 새 언약 관계의 본질 아닌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간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제사장이시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선지자이시다. 인간 중재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신약시대에 성직자에게 맡겨진 임무는 구약 시대 제사장의 목회적 사역, 즉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행복을 위해 돌보는 책임인데, 특히 가르치는 역할이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목회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약 시대에도 목회자를 제사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회적 책임에는 독특한 제사장적 특징이 그 어떤 것도 없으며(아마 중보기도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 과 사도들도 목회하는 지도자들을 제사장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


[목회자적 모델]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요10:11)라고 부르신다.


영국 성공회의 안수 식에서 요한복음 10장 1~16절을 본문으로 정해 놓은 것은 바람직하다. 그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어떤 것이며, 우리의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지 묘사하시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의 본을 따라 사역하는 선한 목회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선한 목자는 그의 양을 안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10:3).

진정한 목회자라면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 이름보다 얼굴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첫째요, 그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두 번째 할 일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살전1:2).

둘째, 선한 목자는 그의 양을 섬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양은 청결한 동물이 아니고 어리석다. 때문에 양을 치는 일은 상당히 더럽고 단조롭고 지루하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그분은 돈을 벌고자 일을 하는 고용된 일꾼, 즉 삯꾼이 아니었다.

셋째, 선한 목자는 그의 양을 인도한다.

서양에서는 목자들이 직접 양을 인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훈련된 개를 이용해 뒤에서 양을 본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목자들은 자기 양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들 앞에 서서 걷고 호각이나 피리를 불며 그들을 부를 수 있다. 그러면 양들은 그들을 따라간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주장하는 자게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2:3).

넷째, 선한 목자는 그의 양을 먹인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다섯째, 선한 목자는 자신이 그들에 대한 특정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양을 다스린다.

여섯째, 선한 목자는 그의 양을 지킨다.

일곱째, 선한 목자는 그의 양을 찾는다.


제 5부. 세상


18.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배타주의는 구원이 다른 종교에서는 발견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역사적인 기독교의 견해.

포괄주의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밀하고 흔히 인식되지 않은 사역을 통해서 된다고 주장.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그리스도인에게만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도를 가진 모든 사람들-그의 마음 안에서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은혜가 역사하는-에게도 효력이 있는 것“이라는 진술로써 이런 견해를 채택했다.

다원주의는 그 이상까지 나아간다. 이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배타주의를 주제넘다거나 교만하다고 거부하며, 포괄주의를 생색을 낸다거나 짐짓 겸손한 척한다고 거부한다. 다원성이라는 말이 단순히 많은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데 반해 다원주의라는 말은 제각기 독자적인 정당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기독교가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결정적이고 최종적이고 규범적이고 궁극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 무한정 자라는 것은 암이다. 온 세계에서 계속 자라가는 기독교라는 단 하나의 종교 역시 암적 존재가 될 것이다. 그 대신 기독교는 많은 종교가운데 단지 하나의 종교로,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모든 구원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는 이른바 “전 이류를 포함하는 더 깊고 넓은 연합운동”이며 무지개는 그것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다원주의를 찬성하는 논증들]


왜 많은 사람이 다원주의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까?


첫째, 새로운 세계의식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적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선봉에 서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둘째, 다른 종교에 대한 새로운 긍정적인 인식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의 종교들을 더 알아감에 따라 존 힉 교수가 말한 그들의 막대한 영적 부요함은 옛 기독교의 배타주의가 지니고 있던 그럴듯한 타당성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서구에서 쇠퇴하고 있는 기독교가 위대한 역사적 종교들의 세력을 깨뜨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감지되고 있는 바로 이때에 일부 고대의 종교들은 소생하는 기미가 보인다.

셋째, 식민지 시대 이후의 새로운 겸손 때문이다. 서구가 분명히 우월한 위치에서 거의 동등한 위치로 내려가는 심원한 문화적 변화를 겪음에 따라 신학적 의식면에서도 이와 유사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극적인 상황은 …….모두에게 종교 간 상호관계의 새로운 이해, 말하자면 영적 세력들의 새로운 균형을 강요했다고 랭던 길키 교수는 썼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및 최종 성을 주장하는 것이지 기독교의 많은 제도적 혹은 문화적 형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유일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유일한 분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님’이라고 불린 반면, 붓다가 신적인 존재로서 예배를 받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500년이나 지난 후였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황제였을 때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주장에 근거한 역사적 종교다. 그 역사성이 거짓으로 증명된다면 기독교는 파기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자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호칭은 ‘주요 구원자’가 아니라 ‘우리 주요 구원자’이다. 우리는 이인칭 소유 형용사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19. 우리 하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선교에 대한 세 가지 주요 반대가 반쯤 감추어져 있다. 즉 선교는 비관용과 교만, 횡포의 잘못을 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판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관용은 아마도 오늘날 서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의 의미를 항상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법적 관용권리들이 적절한 법적 보호를 받도록 보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요구하는 자들의 선봉에 서야 한다.


사회적 관용은 어떤 견해를 보유하고 있든지 모든 사람을 존중하도록 격려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식하려고 애쓰는 선한 우호 관계를 증진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개발하기 바라는 미덕이다.


지적관용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다. 어떤 견해에 대해서 거부할지 여부를 탐색하지도 않고 d 모든 의견을 다 수용하도록 넓은 마음을 배양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약하고 도덕에 상관하지 않는 악이다. 그것은 결국 진리와 오류, 선과 악을 원칙 없이 혼합하는 것이 되고 만다.


복음주의자들은 결코 자신의 개인적 왕국을 확장시키려 하거나, 자신의 교회 혹은 조직의 명성을 얻으려고 열망하는 제국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열망해야만 한다.


기독교 선교에 대한 또 한 가지 반대는 그것이 사람들에 대한 결렬한 공격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 전도를 달갑지 않게 사적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공격적이고 침략적인 것으로 본다.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선교하는 그리스도다]


[사도행전의 성령은 선교하는 영이시다]


[서신 서들의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다]


[요한 계시록의 절정은 선교의 절정이다]


20. 총체적 선교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며 그 둘을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


교회의 규모가 어떻든 교인들은 자신의 은사와 부르심, 관심사에 따라 연구 및 활동 그룹을 만들어서 각각 이웃의 복음 전도적, 목회적, 사회적 필요를 위해 일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수많은 다양한 도전에 반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주된 지점은 그것이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써 이루신 구원과 동일시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승인하고 폭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 말했지만 인간을 억압하고 비천하게 하며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분명 그들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나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진정으로 성경적인 해방신학에 친숙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물질적인 해방을 구원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전하는 것이다.


21. 선교의 기독론


선교의 기독론이란 그리스도를 모든 선교의 근원이자 방법으로, 핵심이자 정수로, 근거이자 목표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선교적 모델]


성육신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문화적 동일화의 실례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화되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시거나 어떤 식으로 바꾸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중 하나와 같이 되셨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은 그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이 되셨으나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이제 그분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요 17:18). 다시 말해 그분의 선교는 우리의 선교의 모델이다. 모든 선교는 성육신적 선교다. 그것은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동일화를 요구한다. 진정한 선교는 우리의 기독교적 확신, 가치관, 기준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분이 우리의 시계에 들어오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19~22).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다. 그것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과 동일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선교의 대가)]


오늘날 성경적 선교에서 가장 소홀히 다루어지는 측면은 고난, 더 나아가 죽음이 차지하는 필수적인 위치다. 

 

복음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교리, 윤리, 규율의 영역에 속했다.


교리에 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전히 지적으로 교만한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며, 자기 의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거침돌이 된다.


윤리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자기 부인과 자기 절제로서 부르심이다. 방종한 사람들은 그 도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규율에 관해서는, 세례와 성만찬 모두 그것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의 회개와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들이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인정 하고서도 - 성례를 받지 못하도록 하면 격분한다.


이처럼 교리와 윤리와 규율에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명 세상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핍박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선교의 위임장)]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시는 분도 똑같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심(선교의 동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문화권에 살든 현대를 사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욕을 당하실 때면 언제나 이와 똑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 또한 그분이 합당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이런 똑같은 질투의 감정을 느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심(선교의 능력)]


[그리스도의 재림(선교의 긴급성)]


하나님의 프로그램의 네 가지 단계는 매우 명백했다. 첫째,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승천). 둘째, 성령님이 오셨다(오순절). 셋째, 교회가 제자를 만들러 나간다(선교). 넷째,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재림). 첫 번째 사건과 네 번째 사건, 승천과 재림, 예수님의 사라지심과 다시 나타나심 사이에는 기간이 명시 되지 않은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에는 더 이상 구원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간격을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교회의 증거가 채워야 한다.


결론 * 지금 그러나 아직


마귀는 광신자이고 모든 상식과 중용과 균형의 원수라는 것은 분명히 안다. 그가 좋아하는 소일거리중 하나는 우리 마음의 평정을 잃게 하고 그리스도인(특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의 균형을 깨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우리를 꾈 수 없다면 그 대신 마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왜곡하도록 할 것이다. 그 결과 한쪽으로 치우친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의 한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측면은 잘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귀를 주셔서 이중 귀 기울임을 할 수 있게 하시며 모든 문제의 양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셨다. 또한 두 개의 눈을 주셔서 곁눈질 하지 않고 똑바로 보게 하시며, 두 개의 손을 주셔서 모든 성경적 이율배반의 양극단을 붙들게 하시고, 두 개의 발을 주셔서 일생을 견고하게 걸으며 절뚝거리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학자들 사이에는 도래의 시기에 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셨으니 그것은 이미 온 것일까? 아니면 그 도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며 그래서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진리는 이미 입장들 사이 어딘가에 있기에 그 입장들을 결합해야 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중간입장, 곧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의 실재이자 미래에 기대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입장을 취한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그것을 시작하셨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재림하실 때 그것을 완성시키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왔다. 그러나 그것은 남김없이 온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완성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현재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묘사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분은 때가 찼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귀신을 쫓아낸 것에서 명백히 알 수 있듯이 r아한 자는 이제 쉽게 그의 재산을 약탈당하도록 묶이고 무장 해제되었다고(마12:28~29), 하나님 나라는 이미 사람들 안에 혹은 그들 가운데 있다고(눅17:20~21),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거나 그것을 받을 수 있다고(막10:15)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다고 알린 그보다 앞서 온 세례 요한 이래로 침노하는 자가 사실상 그것을 침노했다고(마 11:12, 눅16:16)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기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전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종말을 고대했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라고 기도해야 했으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을 먼저 구해야 했다(마6:33). 때때로 그분은 제자들이 최종적으로 처하게 될 상태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막9:47, 마8:11). 또는 그것을 상속 받는다(마25:34)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성경에서 지금과 아직 사이의,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은 두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구약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는 이 세상과 저 세상(눅20:34~35), 현재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 혹은 말일(마12:32), 즉 메시아가 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도입하시는 그날로 나뉜다. 때때로 이 세상은 새날의 새벽으로 이어지는 길고 어두운 밤으로 비유된다. 그러나 연속되는 두 시대라는 간단한 구조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분은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셨으며 우리를 이악한 세대(갈1:4)에서 건지시려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13), 벧전 2:9).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고 하늘에서 그분과 함께 앉은 것이다(엡2:6, 골3:1).


동시에 옛 시대도 계속 존속되고 있다. 그래서 그 두 시대는 서로 중복된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2:8). “나란히……. 이 옛 구조(즉, 옛 시대의 뒤를 있는 새 시대)가 지속되는 것과 함께, 두 세상 혹은 두 가지 상태의 공존을 포함하는 새 구조가 등장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언젠가 이 세대는 끝날 것이며(마13:30)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새 시대는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 사이에 두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그리고 우리가 그 두 시대 사이의 긴장에 끼어 있다고 느끼는 동안,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제로 빛의 자녀로서 일관성 있게 살기 위해 변화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는다(롬12:2).


그렇지만 긴장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신약에서 그리스도께 속하는 복에 대해 사용하는 거의 모든 비유에서 표현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또한 우리는 언젠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8:24). 이미 죄 사함을 얻었지만 구원의 날은 여전히 미래다(골1:14,엡4:30).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양자들이지만 또한 우리는 양자 될 것을 기다린다(롬6:15,23).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지만 영생은 여전히 미래에 주어질 선물이다(요5:24,롬8:10). 아직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계21:5). 우리는 이미 충만하여졌으나 아직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지는 못했다(골2:10,엡5:18).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고 계신다. 비록 그분의 원수들이 아직 그분의 발등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시110:1, 엡1:23,히2:8).


현제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입장은 소망(롬8:24), 기다림(빌3:20), 고대함(롬8:19), 탄식함(롬8:22,고후 5:2)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우리는 여전히 심각한 시련과 환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막10:30,롬8:17). 실로 우리는 이런 고난의 실체를 아직의 측면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롬8:23, 고전1:7) 그리고 또한 참음으로(롬8:25) 기다려야 한다.


지금과 아직, 이미 온 하나님 나라와 이제 올 하나님 나라의 중간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계시는 성령의 임재다. 한편으로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보이며 새 시대가 밝았다는 두드러진 표시다(막1:8, 히6:4~5). 다른 한편으로, 그분의 내주하심은 우리가 받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머지도 언젠가 우리의 것이 되리라는 보증이기도 하다. 신약에서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사용한다. 성령은 완전한 추수가 이루어질 것을 약속해 주는 처음 익은 열매이자(롬8:23), 완전한 지불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약속하는 보증 또는 첫 회 납부금이며(고후 5:5,엡1:14), 언젠가 완전한 축제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약속해 주는 맛보기다(롬8:23). 성령은 약속의 성취이며, 또한 성취의 약속이다. 즉 그분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와야 한다는 표시일 뿐 아니라, 또한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는 보증이다.


[계시, 거룩함, 치유]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그분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지식은 부분적이다. 그분의 계시가 부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계시하고자 하신 모든 것,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신 모든 것을 계시하셨지만 모든 것을 계시 하시지는 않았다. 아직도 많은 신비가 남아 있지만 우리는 그 신비들을 뚫고 들어가 보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비밀로 해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 5:7).


루터는 1576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한 연설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고난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등”이지 그분의 얼굴이 아니 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계시된 것들을 선포하는 데 좀 더 담대하고, 비밀로 남아 있는 것들 앞에서는 좀 더 삼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우리 안에 성령을 두셨다(살 전4:7~8). 성령은 이미 우리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정복하고 아홉 가지 열매가 우리의 성품 가운데 익어 가도록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역사하고 계신다(갈5:16~26). 단언컨대 그분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차 변화시키시고 있다(고후 3:18).


이런 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려면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약속되었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다. “세상 나라”는 아직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계11:15).


분명 우리는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히6:5). 하지만 지금까지는 단지 멋 본 것일 뿐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는”것(고후 4:11), 우리의 죽음 가운데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그분의 강함이, 우리가 달리 알 수 없었을 어떤 육체적인 활력과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분이 나타나는 것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것의 일부다. 동시에 우리의 육체는 계속해서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


교회는 진리에 헌신해 있으면서도 과오를 저지르기 쉽고 연합 되어 있으면서도 분열되어 있으며 순수하면서도 불순하다. 우리가 교회의 실패들을 묵인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부인할 수 없는 ‘아직‘이 결코 우리의 실패들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 우리는 교회의 순수함과 연합, 즉 교리적, 윤리적 순수함과 가시적인 연합이라는 비전을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목표 삼아야 한다.


[해설]


“균형 잡힌 교사 존 스토트가 퍼 올린 정통 기독교 신앙의 샘물”

-김희권 교수- (숭실대 기독교 학과)


[들어가는 말]


이 책은 존 스토트 의 복음주의 신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장(特長)은 균형 잡힌 기독교, 여러 교단과 신학 전통과 대화 가능한 기독교, 심지어 세상과도 소통 가능한 기독교를 제시했다는 데 있다.


스토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는 점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지만, 이성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큰 호소력을 지닌 내용을 담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밝혀낸다.


[이 책의 문제의식과 현실 적합성]


이 책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현대인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이유를 분석하는데서 시작된다. 현대인들은 왜 기독교를 거부하는가? 기독교를 가짓된 가르침이라고 보지 않는 중립적이고 우호적인 사람들에게마저 오늘날의 기독교가 지적 호소력을 발휘하는데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보기에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은 현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별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의 구성과 각 장의 중심 주제]





[Review]


성서는 일점일획도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다.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해석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자유는 인정되지만 결코 본질을 왜곡하는 일은 엄격하게 제한적이다. 이러한 전통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강단에서 주일마다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조금은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다양한 문화계층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고, 새로운 시대사조(철학과 사상)에 깊이 관여된 현대인에게 과연 2000년 전에 기록된 성서가 그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어떻게 전달하여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 이 책은 그런 고민에 길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과 부활 승천의 의미를 역사적인 사실만으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설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성도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품안으로 불림을 받은 자들이지만 또 세상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이중 정체성”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 전파자는 세상을 알아야 하며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명 설교자는 대중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간다. 성도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공감할 수 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시대에 민감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며 저술가인 존 스토트는 기독교 교계에서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이나 아직 결단하지 못한 사람들 보다는 교회의 오랜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 중에서 교회생활에 갈등을 겪는 사람들과 복음 전도의 열정은 있으나 벽에 부딪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다. 분량이 많고 교과서처럼 읽어야 하는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소개된 복음주의 신학의 모든 내용을 총 망라했다고 할 만큼 방대하다.

 

저자는 1921년 런던에서 출생하였고, 이 책은 1992년 출간 되었으니 그분의 모든 신학적 사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생 제자의 삶을 살아온 그는 89세 되던 해인 2011년 런던 바나바 칼리지 은퇴자 숙소에서 주님의 품에 안겼다. 


  -본문-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인성을 부인할 정도로 그분의 신성을 주장해서는 안 되며, 그분의 신성을 부인할 정도로 그분의 인성을 주장해서도 안 된다.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그 둘을 똑같이 주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교리에서도 인간의 말이라는 것을 부인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할 정도로 인간의 말이라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둘 다 동등하게 주장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그것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교회는 현대성의 도전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되어 버린 공룡처럼 치욕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세상을 이해할 뿐 아니라 세상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세상과 관련시킬 수 있을까? 먼저 이중 거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열중해서 세상을 직면하지 못할 정도로 말씀으로 도피 하는 것과, 세상에 너무 몰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판단하지 못할 만큼 순응하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도피와 순응은 정반대의 실수이지만 둘 다 기독교적 선택은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복음을 가능한 한 분명하며, 조리 있고, 수긍할 만하게 제시하는 것이며 사도들이 그랬듯이 가능한 한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자주 어려움에 처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증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떼어 놓을 수 없다. 참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실제적인 삶과 경험의 영역에서 실패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이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것들은 결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믿음과 보는 것은 대조가 되고 있지만(고후5:7), 믿음과 이성은 그렇지 않다. 성경에 따르면 믿음은 그저 가볍게 믿는 것도, 미신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비논리적으로 믿는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분이라고 알려진 하나님을 사려 깊게 신뢰 하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이 늙은 산악인을 만났는데, 그가 데리고 온 개 두 마리가 계속 싸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산악인에게 보통 어떤 개가 이기느냐고 물었다. 산악인은 잠시 말없이 씹는담배를 씹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가장 많이 먹이는 개요.”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새로운 성품을 잘 먹이고 옛 성품을 굶길 때 새 성품이 옛 성품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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