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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로버트. 쇼)

작성자miramonte|작성시간18.11.23|조회수259 목록 댓글 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ROBERT SHAW, 1795~1863]

 



이 책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에 관 해설이다. 이 책의 목적은 각 조항에 명시된 진리를 진술하고, 적재적소에 사용된 것처럼 보이는 용어들을 설명해 교리를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확증하는데 있다. -저자의 말

 

[서론 - 윌리엄 맥스웰 헤더링턴 -스코틀랜드 목회자이자 교회 역사가]

(왜 신앙 고백이 필요한가)

 

신앙고백은 사람들, 곧 신자와 교회가 계시된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신앙고백의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한 것을 명확하고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진술해 특히 신앙의 논쟁이 불거졌을 때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확인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데 있다.

 

인간의 생각은 오류에 치우치기 쉽고, 모든 점에서 서로 큰 차이를 드러낸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진리를 제시해도 생각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차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 말이나 글로 된 문장 하나를 제시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사람마다 자기 방식대로, 곧 자기가 가장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그 문장을 이해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각자 자신의 말로 스스로 이해한 의미를 진술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듣거나 읽은 문장을 똑같이 되풀이하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란 어렵다. 필시 그들은 제각기 나는 이 문장이 이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그 진리를 이해한 신조, 즉 신앙고백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이해한 내용을 말하고, 그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들에게 제시되어 이해된 그 특정한 진리에 관한 공통된 신앙고백이 이루어지게 되는 셈이다.

 

신앙의 진리란 말이나 글의 형태로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 똑같은 의미로 이해하는가? 라는 한 가지 물음이 즉각 떠오른다. 누군가가 성경이 자신의 유일한 신앙의 규칙이라고 말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그 말에 동의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성경이 무엇을 가르친다고 믿는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단지 여러 성경 본문들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본문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시된 진리의 본질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는 인간의 생각과 관련된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진리, 즉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그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관한 문제이다.

 

성경은 연원한 진리(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여 굳게 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를 제시할 뿐 아니라 인간의 공동체, 곧 교회를 진리의 수탁자이자 교사로 임명했다. 교회는 충분한 의견 일치를 연합의 근거로 삼는 지원자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 곧 그분께 직접 귀속된 기관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의 양심을 지배할 권한이 없다.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은 성령을 허락하시어 진리를 아는 지식 가운데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집합적인 차원에서의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에게 동일하게 주어졌다. 이는 신자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안전하게 이끌게 하기 위해서자. 이 위대한 약속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는 것(곧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의문에 대한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무오 한 기준)을 제공한다. 따라서 교회나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진지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태도로 성령의 조명과 인도를 구한다면 논쟁 중에 있는 문제의 결론을 얻어 내 서로의 갈등을 극복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킬 수 있다. 잘 알다시피 기독교는 수 세기를 거쳐 내려오면서 온갖 분쟁과 갈등을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상당한 화합과 일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무오 한 교사요, 중재자 외에는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교회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말로 그 진리의 의미를 이해한 대로 진술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처럼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그 능력을 경험한 영혼들에게서 울려 나는 메아리, 진리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에 해당한다.

 

교회는 오류가 가득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전해야 할 진리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조금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교회는 교사가 될 수 없고, 세상은 교회로부터 진리를 배울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 될 때 듣는 사람은 모두 제각기 자신의 생각에 따라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만일 스스로가 이해한 의미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설명하지 않으면 개념이 모호하고 불명료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매우 그릇된 오류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청중이나 교사가 각자 전달했다고 믿는 의미를 뚜렷한 말로 설명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서로가 똑같이 이해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의 생각을 알아야 하고, 서로 일치단결해 동일한 진리를 전하는 증인으로서 그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꾸준하고 일관되게 제시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취지와 역사적 배경)

 

야심 있는 한 젊은이가 고대의 궤변론자에게 유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궤변론자는 이 유명해진 사람을 죽이게, 그러면 자네의 이름이 그의 이름과 항상 함께 언급될 걸세라고 대답했다.

 

[1. 성경]

 

(7)

성경에 있는 모든 진리가 그 자체로 다 명백하거나 모두에게 다 똑같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벧후 3:16). 그러나 구원을 위해 꼭 알고, 믿고, 지켜야 할 진리는 성경 곳곳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유식한 자들만이 아니라 무지한 자들까지도 일상적인 수단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119:105, 130)

 

(10)

구약성경은 갈대아어로 기록된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히브리어, 곧 하나님의 계시를 위탁 받은 유대인의 언어로 기록 되었다. 갈대아어로 기록된 성경 구절은 예레미야 1011, 다니엘 42~7, 에스라 4~6장뿐이다.

신약성경은 본래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헬라어는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언어였다.

 

[2. 하나님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하심은 보는 관점과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일컬어진다. 비참한 자들을 돌아보시는 경우에는 긍휼이라고 불리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나 재앙 외에는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실 때는 은혜라고 불린다. 또한 궁핍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때는 관대하심이라고 불리고, 진노를 부추기는 반역자들에 대한 형벌을 연기하실 때는 인내, 또는 오래 참으심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피조물인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여러 형태의 신적 호의를 모두 아우른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절대적인 측면과 상대적인 측면을 지닌다. 하나님 자신과 관련해서는 절대적이고, 피조물에게 그 선하심을 드러낼 때는 상대적이다(119:68). 또한 그분의 선하심은 공통적인 측면과 특별한 측면을 지닌다. 선하심의 공통적인 측면에는 모든 피조물이 다 참여하고(33:5, 145:9), 특별한 측면에는 선택받은 백성만 참여한다.

 

(3)

하나님의 단일한 신성 안에 영원하시고 본질과 능력이 동일하신 삼위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하신다(요일 5:7, 3:16!17, 28:19, 고후 13:14). 성부는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으시고, 또 아무에게서 나시거나 나오지 않으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셨고(1:14, 18),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15:26, 4:6).”

 

이 조항은 세 가지를 진술한다. 첫째, 단일한 신성 안에 삼위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하신다, 둘째, 삼위 하나님은 인격적 속성에 의해 구별되신다. 셋째, 삼위 하나님은 모두 참된 하나님이시다.

단일한 신성 안에 삼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명제는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이 본질은 물론 인격에 있어서도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이 심오한 신비를 표현 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이 용어는 하나 안에 셋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나뉘지 않으신 신성 안에 서로 구별되는 세 인격이 존재하신다. 이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일신론자라고 일컫는다.

이 말은 하나님은 오직 하나라는 그들의 신념을 반영한다.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 이상의 신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만큼이나 강하게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의 신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믿음이 유일신 개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셋이 동시에 하나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다. 우리는 인격은 셋이지만 본질은 하나라고 말할 뿐이다. 이 말은 아무런 모순이 없다. 이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 우리가 사실이고 실제라고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 교리가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기꺼이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성은 거룩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 용어다(1:20, 2:9). 이 용어는 신앙고백에서도 성경에서처럼 무한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가리킨다. 이 본성은 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어느 한 분만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 모두에게 공통된다. 신성 안에서의 구별은 로 표현되는데, 이 말은 인격을 뜻하는 ‘person'을 번역한 것으로, 보통은 동떨어져서 독립해 있는 존재, 곧 그 존재나 행위가 다른 존재의 존재나 행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생각하는 실존으로 정의 된다. 다시 말해,’다른 존재에 속하거나 다른 존재를 통해 유지되지 않으면서 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지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삼위 하나님께 이 용어가 적용될 때는 피조물에게 적용 될 때와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두 경우는 전적으로 다르다.

 

세 사람의 인간은 각각 구체적인 본성을 공유하지만, 세 분 하나님은 서열상으로만 구분되는 본성을 공유하신다.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세분의 신성한 인격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을 셋으로 만들뿐이라고 논박한다. 그들은 우리의 엄숙한 항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가 인격이라는 말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의미로 하나님께 똑같이 적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따로 구별되는 세 개의 본질이 신비롭게 서로 연합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에게서 분리된 상태로 거룩한 본성과 완전한 속성만을 소유하고 계신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피조물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별이 신성 안에 존재하며, 신성의 본성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믿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인격이라는 용어는 그런 구별을 의미한다. 이 용어를 다른 존재들에게 적용하면 성삼위 하나님의 연합과는 모순되는 개념을 전달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할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한 데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결과다. 따라서 이 용어를 하나님께 적용할 때는 독립된 실존이라는 의미를 배제하고 사용해야만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이처럼 신성 안에 삼위가 존재하신다는 말은(비록 설명하기 어렵지만)본질의 연합을 깨뜨리지 않는 구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자연의 빛이나 이성의 추론으로는 발견할 수 없다. 이 교리는 오직 거룩한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성경은 이 교리를 도처에서 증언한다. 구약성경에는 신성 안에 복수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구절이 많다. 그런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에게, 또 서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1:26, 3:22.11:7, 45:6~7,110:1, 6:8). 그런 본문들은 신성 안에 복수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더욱이 성경은 단순히 복수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언하는데 그치지 않고, 신성 안에 삼위, 곧 세분의 인격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61:1)”이 말씀은 성삼위 하나님 가운데 언급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편33:6). 여호와는 성부, 말씀은 성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입 기운은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8:19)라고 명령하셨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축복했다.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분명하게 증언하고 잇는 성경 구절은 요한일서 57절이다. 요한은 그곳에서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부와 말씀과 성령이라 이 셋은 하나이니라”(KJV)고 말했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7~8.개혁개정)

 

기독교적 의무 체계는 이 교리에 근거한다. 이 교리를 믿지 않고는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삼위일체 교리는 무익하기는커녕 실천적 신앙의 근간이 된다.

 

[3.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은 앞날의 일을 미리 아시고 모든 것을 작정하셨고, 작정된 일들의 실행 여부는 어떤 조건에도 구애 받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교리를 분명하게 진술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관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구분한다. 후자는 하나님의 작정이 절대적이 아니라 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의 작정은 작정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일정한 상황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때로 조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먼저 일정한 상황이 조성되지 않으면 작정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바울 일행이 이달랴로 항해하는 도중에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지만, 그 일은 선원들이 배에 타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필요로 했다(27).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지만, 그 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건들이 성취되는 순서를 명확하게 결정한다.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정해지고, 수단이 확실하게 정해진다. 하나님은 바울 일행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을 때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또한 작정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바울에게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안전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셨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을 때도 그들에게 믿음을 허락하는 일을 아울러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일들을 또한 부르시어 성자와 관계를 맺게 하신다(8:30).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의지에 의존한다.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뜻대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작정이든 조건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은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46:10)고 말씀하신다. 만일 그분의 뜻이 조건에 따라 실행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렇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실 뿐 아니라 피조물로부터 온전히 독립해 계신다. 그분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행위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조건적인 작정은 그분의 지혜와 독립성을 훼손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이 어떻게 성취될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33:11)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확고하게 결정되었다.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사람이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19:21)라는 말씀대로, 인간은 자신의 계획을 모두 이룰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작정 교리에 관해 종종 제기되는 비판은 이 조항이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하나님이 미래의 모든 일을 작정하셨다고 선언하지만 그분이 죄의 원인자이시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도 제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작정은 효과적이거나 허용적이다. 하나님의 효과적인 작정은 미래에 일어날 선한 일과 관련되고, 허용적인 작정은 인간의 부패한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죄악과 관련된다. 순수한 행위와 부패한 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작정은 순수한 행위와 관련해서는 효과적이고, 도덕적인 악을 저지르는 부패한 행위와 관련해서는 허용적이다.

하나님이 미래의 일을 모두 작정하셨다면 인간의 자유가 사라진다는 비판도 종종 제기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런 강압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충분히 누린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분의 작정은 미래의 일을 확고하게 결정할 것일 뿐 이성을 지닌 피조물들이 마치 작정된 일이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정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행위의 자유를 누린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건들을 미리 정하신 일이 인간의 자유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딕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한다고 해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를 조화시켜야 할 의무가 없다. 하나님이 미래의 일을 모두 작정하셨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두 가지 진리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후자는 양심의 증언을 통해 확증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 있지만 온전히 자유롭다 따라서 의무를 잘 이행했을 때는 양심의 자유를 느끼고, 의무를 등한시 했을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인간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양심의 자유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139:6)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문제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이 미래의 일을 모두 확고하게 작정하셨다고 하더라도 2차원인의 우연성이나 자유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제비를 뽑는 일만큼 우연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5)고 말한다.

 

(3)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작정을 통해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딤전 5:21, 25:41)영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고, 그 나머지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정하셨다(9:22~23, 1:5~6, 16:4).

 

(4)

이렇게 예정되고 미리 정해진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확고하게 결정되었고, 그 숫자는 확실하고 확정적이기 때문에 더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딤후 2:19, 13:18).

 

(5)

하나님은 생명을 얻도록 예정된 사람들을 그 변하지 않는 영원하신 뜻과 그 마음의 은밀하신 계획과 선하신 기쁨에 따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시고(1:4,9,11, 8:30, 딤후 1:9, 살전 5:9), 그 영광스런 은혜를 친미하게 하셨다(1:6,12). 하나님의 선택은 값없는 은혜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졌을 뿐 그들의 믿음이나 선한 행위나 인내, 또는 피조물 안에 있는 다른 무엇을 미리 아신 것이 원인이나 조건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또 그분을 움직여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원인도 없다(9:11,13,16, 1:4,9).

 

천사들과 사람들의 영원한 상태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예정이라는 용어로 알려져 있고, 그 예정은 다시 선택유기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천사들 가운에 일부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선택된 천사들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추론 할 수 있다(딤전 5:21, 딤후 2:4, 1:6). ~~이는 역으로 말하면 선택 받지 못한 천사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민족이나 교회와 같은 집단적인 선택만을 인정한다. 물론 성경은 그런 일반적인 선택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성경을 보면 개인적인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24:22, 11:5, 13:48,살후 2:13).

 

예정과 하나님의 뜻은 소명과는 전혀 다르다. 소명은 예정에서 비롯되는 결과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 다르다.

 

소시니우스주의자들은 자유로운 피조물의 결정과 같은 미래의 우연적 상황을 하나님이 미리 확실하게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들은 영원 전에 인간의 구원이 확고하게 작정되었다는 말을 일반적이면서도 조건적인 작정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인간이 믿고 복음에 순종해야만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개인에 관한 특별한 작정은 역사 속에서, 곧 사람들이 일반적인 작정에 포함된 조건을 충족시킬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항론파)은 소시니우스주의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인간의 결정과 행위와 같은 우연적 사건을 미리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부인하고 , 인간과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무엇이든 그들의 행위를 미리 아신 지식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아담과 그의 후손이 죄를 지어 타락할 것을 미리 아셨기에 독생자를 보내 인간을 위해 죽게 하시고, 구원의 수단을 활용하는 데 필요한 은혜를 충분히 허락하기로 작정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믿고 끝까지 인내할 자와 그렇지 못할 자를 미리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전자는 영생을 얻도록 허락하시고, 후자는 영원한 정죄를 받는 상태로 방치하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펴는 그들 가운데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소시니우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 전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믿은 후에 영생의 상속자로 선택되며, 불신앙과 강퍅함에 사로잡힐 경우에는 구원의 결정이나 작정이 취소된다고 생각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이나 선한 행위나 인내를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주권적인 뜻에 따라 창세전에 영생을 얻도록 사람들을 선택하셨고, 또 그들의 숫자를 미리 확실하게 확정하셨다는 진술로 이런 주장들을 논박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 받은 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는다. 이런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은 쉽게 입증될 수 있다.

 

1.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의 숫자는 확정되었다. 소시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영생을 얻도록 예정 하셨다라는 말이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구원 받을 사람의 보편적인 특성(즉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확실한 숫자의 사람들을 인류의 나머지와 구별하시어 영생을 얻도록 작정하셨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딤후 2:19).

 

3. 하나님의 선택은 개인의 믿음이나 다른 조건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결정되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이 미리 예견된 믿음과 선행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작정은 시간상으로는 앞섰다고 하더라도 그 실제적인 효력은 인간의 행위가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발효된다. 다시 말해, 선택은 인간의 의지적인 결정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최상의 통치권을 폄하하는 이런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선택은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선택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 은혜와 행위는 서로 양립할 수 없고, 상호 배타적이다.(11:5~6).

바울은 로마서 910~13절에서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사람들을 축복이나 저주를 받도록 예정하는 일은 그들의 행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바울 사도는 이삭의 두 아들의 운명이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결정되었듯이 개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백성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고 계신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일일이 기록되어 있다.

 

4.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성도가 은혜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은 선택받은 신자로 살아가지만, 내일은 유기된 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다, 신자가 불신자로 바뀌는 순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도 바뀐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33:11)라고 말한다. ~~~따라서 선택하신 자의 숫자도 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6)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 마음의 지극히 영원하고 자유로운 목적에 따라 영광에 이르는 모든 수단을 미리 정하셨다(벧전 1:2, 1:4~5, 2:10, 살후 2:13), 따라서 선택 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함을 받고(살전 5:9~10, 2:14), 때가 되었을 때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양자가 되고, 거룩해지고(8:30, 1:5, 살후 2:13),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기까지 보존된다(벧전 1:5).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함과 유효 소명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양자가 되고, 거룩해져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선택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없다(17:9, 8:28, 6:64~65, 10:26, 8:47, 요일 2: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될 당시, ‘구속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속죄라는 용어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반구속특별구속이라는 말도 일반 속죄제한 속죄라는 말과 의미가 똑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조항에 사용된 구속이라는 용어가 속전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속전을 지불해 얻은 구원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구속함을 받고라는 말이 구원을 받고라는 뜻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이 조항은 선택받은 자들이 구속함을 받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 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고, 오직 그들만을 위해 속전을 지불하셨다.

 

예정 교리는 신비롭기 그지없다. 예정 교리는 인간의 연약한 지성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은밀한 일 가운데 하나다. 이 교리를 탐구할 때는 불필요한 사변을 자제하고, 기록된 말씀을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교리를 말씀 안에 분명히 계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교리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하고, 강단에서 힘써 외쳐야 하며, 글을 써서 널리 전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이 은밀하게 숨겨 놓으신 것들은 탐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널리 공포 하신 것들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고 말했다.

 

[4. 창조]

 

[5. 섭리]

 

(1)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무오하신 예지(15:18, 94:8~11)와 그 뜻하신바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1:11, 33:10~11)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섭리를 베푸시어(15:3, 104:24) 가장 큰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10:29~31) 모든 피조물과 행위와 상황을 지탱하시고(1:3), 인도하시고, 독려하시고, 통치하심으로써(4:34~35, 135:6, 17:25,28, 38:41) 그 지혜와 권능과 정의와 선하심과 긍휼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신다(63:14, 3:10,9:17,145:7).

 

섭리의 개념은 두 가지, 곧 만물의 보존과 통치로 구성된다. 하나님은 만물이 그 존재를 유지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계속 보존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본래 계획하신 목적에 맞게 인도하시고 독려하심으로써 그들을 통치하신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나뉜다. 하나님은 일반 섭리를 베푸실 때 수단들을 사용하시고, 그 크신 지혜로 확립해 놓으신 일반 법칙을 따르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들을 무시하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는 이미 확립해 놓으신 일반 법칙에 따라 사역하시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그런 법칙을 잠시 중단하거나 수정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일반법칙을 초월하거나 역행하는 걸과가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일컫는다. 무신론자들 외에는 아무도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이 절대적이라는 주장, 곧 어떤 경우에도 그 법칙이 어긋나는 경우가 없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같다. 그런 주장은 위대한 건축가이신 하나님조차도 통제하실 수 없는 특정한 법칙에 따라 우주라는 광대한 기계가 저절로 작동한다는 사상에 기초한다.

 

(4)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나 승인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와 관련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위 자체와 행위의 속성을 구별한다. 행위 자체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어떤 행위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위의 죄악성은 전적으로 피조물에게서 비롯한다.

피조물의 죄와 하나님의 섭리를 연관시켜 말할 때는 대개 하나님이 죄를 허용하시거나 제한하시어 자신의 거룩한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다스리신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을 제거하고 이 난제를 명료하게 밝히는 일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우리는 하나님이 피조물의 모든 행위를 주관하시지만 죄의 원인자가 되실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5)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때로 잠시 동안 자기 자녀들이 여러 가지 유혹에 치우쳐 그 마음의 부패한 대로 행하도록 버려두심으로 그들이 전에 지은 죄를 징계하시거나 그들의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깨우쳐 겸손하게 하시고(대하 32:25~26, 31, 삼하24:1), 늘 자신을 더욱 가까이 의지하게 하시며, 더욱 깨어 앞으로 있을 모든 죄에 대비하게 하심으로써 의롭고 거룩한 목적을 이루도록 이끄신다(고후 12:7~9, 73, 77:3,10,12,14:66~72, 21:15~17).

 

(6)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시고, 그들을 강퍅하게 하시어 그들이 지은 죄를 심판하신다(1:34,26,28, 11:7~8).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을 밝히고 마음에 영향을 미칠 은혜를 허락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29:4)때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은사들을 거두기도 하시고(13:12, 25:29), 그들을 버려두사 스스로의 부패함으로 인해 죄를 짓게 만들기도 하시며(2:30, 왕하 8:12~13), 그들 자신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권세에 넘겨주기도 하신다(81:11~12, 살후 2:10~12).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들 아래서조차 스스로를 강퍅하게 만들고 만다(7:3, 8:15,32, 고후2:15!16, 8:14, 벧전 2:7~8, 6:9~10, 28:26~27).

 

[6. 인간의 타락과 죄와 형벌]

 

(1)

우리의 첫 조상은 사탄의 간교한 유혹에 미혹되어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죄를 지었다(3:13, 고후11:30). 하나님은 그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따라 그들의 죄를 허용하시기를 기뻐하셨는데, 이는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으셨기 때문이다(11:32).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31~32).

 

보편적인 관찰과 경험이 입증 하는 대로, 인간은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면 인간은 본래 그렇게 타락한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악은 세상에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이성은 이 중요한 질문에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다. 이방 철학자들도 인간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온갖 슬픈 경험을 통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의 근원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갖기가 불가능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시도했지만 모두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이 문제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해결한다. 이 조항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토대로 인류의 첫 조상이 유혹의 덫에 걸려 하나님께 불순종한 탓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진술한다. 인간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죄를 지었다. 이 말은 특정한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 고덕법이 그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 법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도덕법 외에 또 하나의 법을 인간에게 부여하였다. 그것은 에덴동산에 있는 특정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2:16~17).

하나님은 도덕법에 온전히 복종하라는 명령 외에 이 한 가지 명령을 더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를 특정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으로 간단히 요약하시어 그의 복종을 시험하셨다. 금지된 열매는 그 자체로는 선악 간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그런 금지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시험하는 목적을 지녔다.

 

성경을 보면 사탄이 온갖 교활하고 거짓된 방법을 사용해 자신의 간계를 이룬 사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직하게 창조된 인간이 그런 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인간은 온전히 거룩하게 지으심을 받았지만 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였다. 인간은 설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넘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의 뜻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허용하셨고, 인간은 그 자유를 남용했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성령의 영향력을 통해 인간의 타락을 얼마든지 막으실 수 있었다. 성령의 영향력은 타락을 막는데 가장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할 의무가 없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의 의무를 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부여하셨고, 그 능력을 임의로 거두지 않으셨다. 또한 그분은 인간의 마음에 악한 성향을 부추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단지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 인간의 타락을 막아 주는 일을 자제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아나도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대답은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11:36)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정하셨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이 죄로 인해 그들은 본래의 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했다(3:6~8, 7:29, 3:23). 그들은 죄 가운데 죽었고(2:17, 2:1),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과 부분들이 온전히 오염되었다(1:15, 6:5, 17:9, 3:10~18).

 

그들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풍요롭고 쾌적한 거주지에서 쫓겨났고, 땅도 저주를 받아 황폐해졌다. 그들은 수고롭고 슬픈 삶을 살아야 했고, 마침내는 그들이 생겨났던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가장 큰 행복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했다.

 

(4)

이런 원초적 부패로 인해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선을 택한 능력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선을 거부하며(5:6, 8:7, 7:18, 1:21), 오로지 악을 행하려는 성향에 사로잡혀(6:5, 8:21, 3:10!12) 실질적인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5:14)하기 때문이다.

 

(5)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이러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요일1:8,10, 7:14, 17~18,23, 3:2, 20:9, 7:20).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 받고, 극복되었다고 해도 그러한 본성 자체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위는 엄연한 죄에 해당한다(7:5, 7~8,25, 5:17).

 

이 조항은 거듭난 자들의 경우에도 부패한 본성 자체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위가 엄연한 죄에 해당한다고 기술한다. 죄책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제거되고, 죄의 권세가 성령과 은혜로 깨어졌지만 그 본성 자체는 죄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다.

 

이 조항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논박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술가들은 우리가 본성의 부패라고 일컫는 보편적인 죄의 성향욕망’(cocupiscence)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욕망은 원죄의 일부가 아니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원죄가 세례를 통해 제거된다고 믿지만, 거듭난 자들에게도 이 부패한 성향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은 원죄의 일부가 아니고 아담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자연스런 본성이라고 결론 짖는다. 그들은 본래는 아담에게 그런 본성을 억제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도움이 주어졌지만 죄를 지은 탓에 그런 도움이 그와 그의 후손으로부터 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욕망, 또는 정욕을 죄라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77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말하고 나서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느니라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그는 탐심을 죄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6)

원죄든 본죄든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율법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것으로(요일3:4), 본질상 죄인에게 죄책을 부여한다(2:15, 3:9, 19), 그로 인해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2:3)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3:10) 죽음을 당하게 되고(6:23), 열적 불행과(4:18) 한시적 불행과(8:20, 3:39) 영원한 불행(25:41, 살후 1:9)등 온갖 불행을 짊어진다.

 

[7.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은 순수한 본성을 유지하며 모든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겠다거나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더 큰 행복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시고도 얼마든지 복종을 요구하실 수 있다. 또한 인간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오랫동안 복종을 실천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런 보상을 받을 권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자원하여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고, 행복을 누릴 권리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그것은 약속, 즉 계약에 근거한 권리였다.

 

언약을 받아들여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순간, 하나님께 약속 이행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통해 자신을 인간의 채무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님께 좀 더 합당한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약속 이행을 마치 빛처럼 스스로에게 부과하시어 그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창세기 216~17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분명한 표현으로 언약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언약의 필요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5)

이 언약은 율법의 시대와 복음의 시대에 서로 다르게 집행되었다(고후3:6~9). 율법의 시대에는 약속, 예언, 제사, 할례, 유월절 어린 양을 비롯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다른 여러 가지 의식과 예표를 통해 집행되었다.

그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 했다(8~10, 4:11, 2:11~12, 고전 5:7). 이것들은 당시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약속된 메시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선택 받은 백성을 가르치고 든든히 세우는 데 충분히 효과적이었다(고전10:1~4, 11:13, 8:56). 그들은 약속된 메시야를 통해 온전한 죄 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는데, 이를 구약으로 일컫는다(3:7~9,14).

 

구약시대에 살았던 신자들도 복음 아래 사는 신자들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복된 영생을 바라며 살다가 죽었다. 신약 시대는 많은 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기 이전의 시대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 현재는 모든 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더 우월하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언약의 실질적인 내용이 확고하게 비준되었고, 성령이 더욱 풍성하게 역사하시어, 예배가 더욱 신령해졌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되었다.

 

[8.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1)

하나님은 그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독생자이신 주 예수님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택정하셨고(42:1, 벧전 1:19~20, 3:16, 딤전 2:5) 그분을 선지자요(3:22), 제사장이요(5:5~6), 왕이요(2:6, 1:35), 교회의 머리이자 구원자요(5:23), 만유의 상속자요(1:2), 세상의 재판관으로(17:31) 세우기를 기뻐하셨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상 무한한 괴리가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두 당사자 사이에 불화는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그분의 분노가 불처럼 일어났다.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소외되어 그분의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인간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범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죄책을 대신 감당하고 화해의 근거를 마련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직임과 사역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할당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이전에 존재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성부와 동등하시고 본질이 같으시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먼저 계셨다고 말했다(1:15, 8:58, 벧전 3:19~20).

 

[9. 자유의지]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첫째, 자유의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 즉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주권적으로 결정하는 능력을 지닌다. 한마디로 자유의지는 스스로의 의지적 행위를 결정한다. 둘째, 무심한 상태, 곧 평정 상태란 의지에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셋째, 의지적 행위는 외부의 억압이나 모든 필연성이나 그 존재의 이유나 근거를 미리 결정하는 원칙과는 전혀 무관하게 우연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스스로의 뜻을 결정하는 의지의 능력이 아무 원인 없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한 주장이자 철학의 제1원리에도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의지가 무심한 상태나 평정 상태에 있으면서 선택을 하거나 무엇을 선호하는 의지를 드러낸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자가당착이라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의지적 행위도 필연성과 무관하게 우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에서 필연성이란 결과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도덕적 존재의 자유는 선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런 행동은 외부의 강요나 억압과 상관없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결정한 것에서 비롯하는 결과다.

 

(2)

인간은 무죄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며 기뻐하실 일을 원하거나 행할 자유와 능력을 지녔지만(7:29, 1:26), 변하여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다(2:16~17, 3:6).

 

(3)

인간은 죄를 지어 타락한 탓에 구원을 가져다 줄 영적 선을 이룰 능력을 온전히 상실했다(5:6, 8:7, 15:5). 따라서 자연인은 그런 선을 혐오 하며(3:10,12), 죄 가운데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2:1,5, 2:13)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 회개하거나 그렇게 할 준비를 갖출 수 없다(6:44,65, 2:2~5, 고전 2:14, 3:3~5).

 

인간의 의지는 독자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의 기능 가운데 하나다. 선이든 악이든, 또 그 둘의 혼합이든 도덕적인 성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지니는 고유한 특성이다. 영혼 안에서 어떤 도덕적인 성향이 우세한가에 따라 도덕적인 행위가 결정된다. 따라서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의지의 자유도 달라진다.

 

무죄한 상태에서, 인간의 의지는 자연적으로 선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유혹의 힘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지고 있었다. 즉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부패한 상태에서, 인간의 의지는 아무런 강요나 강압 없이 자유롭게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죄의 속박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은헤의 상태에서, 인간은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이 경우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도덕적인 성향이 혼합되어 나타나는데, 어떤 성향이 더 우세한가에 따라 때로는 선을 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악을 행하기도 한다.

영화의 상태에서, 인간은 온전히 자유롭게 선만을 선택한다. 온전히 거룩해진 상태에서는 오직 선한 것만을 바라게 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은 죄를 뉘우치고 행동을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인간은 타고난 기능과 능력을 활용해 직그히 경건하고 덕스러운 단계에 올라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신앙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 은혜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처음에 회개하고 행위를 고칠 때는 영혼 안에 죄를 억제하는 내적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인간은 타고난 기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으며, 거룩하고 진지한 복종을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말로는 죄인의 회개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의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성경에는 죄인의 자연적 상태를 묘사하는 구절이 많다. 자연인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다. 단지 영혼의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어둠 자체다. 자연인은 죄의 종이요,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분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수도 없다(2:1, 5:8, 6:17, 8:7, 1:2).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믿거나 영적으로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6:44, 15:5).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자신의 사역으로 일컬으시고, 그 사역을 친히 이루겠다고 약속하셨다(11:19~20, 36:26~27, 31:33).

 

성경은 죄인의 회개를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로 간주한다(16:14, 살전 1:5).

 

죄인이 스스로 회개할 수 있다면 자신을 자랑할 근거를 갖게 될 것이고, 또 은혜를 받고서도 마치 받지 않은 양 자랑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고전 1:29~30, 4:7).

 

물론 인간은 도덕적으로 무능력한 탓에 영적으로 선한 것을 바라거나 행할 수 없다고 해서 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10. 유효 소명]

 

(1)

하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 오직 그들만을 자신이 정한 적당한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살후 2:13~14, 고후 3:3~6)그들이 본래 처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효과적으로 부르시어(8:30,11:7,1:10~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구원을 허락하기를 기뻐하셨다(8:2, 2:1~5, 딤후 1:9~10), 또한 그들의 생각을 영적, 구원적으로 밝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게 하시고(26:18, 고전 2:10,12, 1:17~18), 돌 같은 마음을 없애고 살 같은 마음을 주시며(36:26),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어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선한 것을 추구하게 하시고(11:19, 2:13, 30:6, 36:27),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효과적으로 이끄신다(1:19, 6:44~45),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운 마음이 되어 가장 자유롭게 나온다(1:4, 110:3, 6:37, 6:16~18).

 

(2)

이 소명은 하나님이 거저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에서 비롯하는 것 일뿐 인간에게서 미리 예견된 것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딤후 1:9, 3:4~5, 2:4~5, 8~9, 9:11). 그 점에서 인간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소생되어 그 소명에 응답하고(고전 2:14, 8:7, 2:5), 그것을 통해 제시되고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6:37, 36:27, 5:25).

 

복음의 영원한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그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55:1). 이 부르심은 선택 받은 자들이나 자신의 죄를 의식하며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선한 자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부르심은 아무런 구별이나 예외 없이 죄인인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다. 신분이나 상태와는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복음의 부르심을 받는다(8:4, 45:22).

 

땅의 모든 끝은 신분이나 상태와 관계없이 모든 민족의 죄인들을 가리킨다.

 

복음의 한계 없는 부르심과 특별한 선택 및 제한 속죄의 교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둘을 조화시키는 원리를 발견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이 두 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자신 있게 이 두 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의 부르심이 무한정이며 보편적이라는 것,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엄숙한 뜻이라는 것, 복음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 받는다는 것 등은 의심할 수 없는 성경의 진리다.

 

그러나 복음의 외적 부르심은 그 자체로는 효과가 없다. 복음의 부르심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그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고 말씀하신 이유다.

 

외적 소명과 더불어 성령의 내적 소명이 이루어져 인간의 영혼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이 소명을 유효 소명이라고 부른다.

 

-오직 선택 받은 자들만 유효 소명을 받는다. ~~성경은 이 사역의 대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일컫고,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다고 말한다(8:28, 30, 딤후 1:9).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누가 은혜의 선택을 받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의 부르심과 초청을 모든 사람에게 제시해야 한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말씀의 화살을 날리지만, 누가 자기 백성인지 아시는 하나님이 그 화살을 인도하시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자들의 마음에 정통으로 꽂히게 하신다.

- 유효 소명은 하나님의 주구너적인 의지와 기쁘신 뜻에 따라 가장 적당한 때에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제3시에 포도원에 부르심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제6시와 제 9시에 부르심을 받는다. 선한 오바댜처럼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있고, 다소의 사울처럼 때가 되었을 때 거듭나는 사람도 있다.

소명을 받는 방식도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 루디아처럼 은밀한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복된 변화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으며, 빌립보 간수처럼 한동안 하나님을 몹시 두려워하다가 무서워 떨면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16:30)하고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다.

 

- 유효 소명은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말씀은 외적 수단이고, 사람들을 은혜의 나라로 이끌어 들이는 일은 항상 성령의 몫이다.

 

성령은 율법을 통해 인간의 부패함을 일깨워 그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 알려 주시고, 그가 스스로 행하는 의로운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희망과 신뢰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그와 동시에 성령은 복음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밝히사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dslrur과 그 완전한 의와 그 직임의 적합성과 은혜의 온전함을 이해하게 하신다. 그 결과 죄인은 그리스도께 서 자신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고, 그분이 자신의 상태에 가장 적합한 사역을 행하시며, 그 앞에 나오는 자들은 모두 기꺼이 환영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다. 아룰러 성령은 돌 같은 마음을 없애고 부드러운 살 같은 마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효과적으로 이끄신다.

 

- 유효 소명은 인간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성령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효과적으로 이끄시는 동안 그들의 이성적 본능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운 마음이 되어 가장 자유롭게 나올 수 있도록인도하신다. 의지와 자유는 결코 침해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의지의 본성 자체가 파괴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성령은 단지 의지의 강퍅하고 왜곡된 속성만을 제거하시어 영혼이 구세주께 강력한 매력을 느끼게 이끄신다.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동안 영혼의 복종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주의 권능읠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나”(110:3).

 

- 유효 소명을 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은 불가항력적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충분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실수만 저지르지 않고 그 은혜를 적절히 활용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회심할 때 성령의 역사가 있더라도 죄인이 거기에 순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복음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더 많은 빚을 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더 잘 활용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9:16)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물론 성령의 일반사역은 죄인을 회개로 이끌지 않지만, 성령의 특별사역은 모든 장애 요인을 제거하고, 죄인을 복음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효과적으로 인도한다. 성령의 특별사역이 불가항력적이지 않고 인간의 의지로 거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이 믿음을 갖게 될지의 여부가 불확실해질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11. 칭의]

 

이신칭의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리 가운데 하나다. 루터는 이 교리를 교회의 성패를 결정하는 시금석이라고 옳게 표현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교리를 가장 심하게 왜곡시켰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칭의를 성화와 혼동해, 칭의를 인간의 영혼 안에 의를 주입시켜 그들을 실제로 의롭게 만드는 물리적인 행위로 이해한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지만, 서로 온전히 구별된다. 이 둘을 혼합하는 것은 율법과 복음을 혼합하는 것이다.

 

칭의는 ~~ 죄인을 실제로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률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복종이 설혹 율법의 높은 요구를 충족시킨다고 해도 과거의 죄를 해결할 수는 없다. 율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을 부과한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9:22)고 말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 자체나 믿는 행위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이 조항은 하나님은 믿음 자체나 믿는 행위나 그 외의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여기지 않으시고 라는 말로 그런 주장을 논박한다. 믿음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의 일종으로, 율법에 복종하는 행위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믿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곧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의 명백한 증언에 위배된다. 성경은 칭의와 관련해 모든 종류의 행위를 배제한다(2:16).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한 의와 분명하게 구별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3:22),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3:9)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의와 믿음이 서로 별개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밝힌 표현은 없다. 홀테인은 믿음을 의로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죄인을 구원하는 의로 인정하는 것보다 진리를 더 크게 왜곡시키는 것은 없다. 믿음은 의가 아니다. 의는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 율법주의자들은 행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를 이룰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율법을 허락하시어 진지한 복종과 믿음의 회개를 가능하게 하셨고, 그것을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의로 삼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래 행위 율법을 대신해 좀 더 수월한 율법을 주셨다고 암시하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셨다(5:17).

 

믿음을 칭의의 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인간의 공로를 내세워 복음을 철저히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6)

구약 시대에 이루어진 신자의 칭의는 신약 시대에 이루어진 신자의 칭의와 모든 면에서 아무 차이가 없었다(3:9, 13~14, 4:22~24, 13:8).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4:3). 하나님의 영원한 의는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비로소 이루어졌지만, 그분의 죽음은 신약 시대는 물론 구약 시대의 신자들에게까지 효력을 미쳤다.

 

[12. 양자 됨]

 

[13. 성화]

 

- 칭의와 성화는 본질이 다르다. 칭의는 관계상의 변화를 가리키고, 성화는 전인, 곧 영혼과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 칭의와 성화는 순서가 다르다. 시간상의 순서는 아니더라도 본질상 칭의가 성화에 앞선다. 왜냐하면 실제로 거룩함이 이루어지려면 의가 전가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칭의와 성화는 내용이 다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성화는 내재적인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각각 의미한다.

- 칭의와 성화는 성격이 다르다. 칭의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법정적인 행위에 해당하고, 성화는 영혼의 성품 안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행위에 해당한다.

- 칭의와 성화는 속성이 다르다. 칭의는 즉각 완성되고, 모든 신자에게 정도의 차이 없이 적용되지만 성화는 처음에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신자 개인에 따라 성취되는 정도가 다르다. 이것이 종종 전자를 행위, 후자를 사역으로 일컫는 이유다.

 

 

칭의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성화는 천국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어 그곳의 삶을 누릴 능력을 부여한다.

 

성화는 특권이자 의무다.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이면서 또한 인간의 사역이다. 인간은 초자연적인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한다.

 

성화는 이 세상에서는 불완전하다. 이 세상에서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거룩함이 신자들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하는 율법폐기론자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교황주의자들과 소시니우스주의자들도 신자들이 완전한 내재적 거룩함을 지니고 있거나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감리교의 설립자도 죄 없는 완전한 상태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여전히 그런 견해를 지지 한다.

 

성경에는 죄 없는 완전한 상태를 부인하는 성경 구절들이 많다(7:20, 3:2, 20:9, 요일1:8).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6:9)는 말씀이나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와 같은 말씀에서 발견되는 완전하다라는 말은 진실하고 정직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훌륭한 신앙 위인들도 죄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다.(9:20, 19:12, 3:12).

 

모든 신자 안에는 부패함의 잔재와 은혜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우너리 사이에서 결코 화해될 수 없는 싸움이 계속된다.

 

성화는 천국에 가는 권리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결코 없어서는 안 된다. 성화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정대 불변의 원칙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

 

하나님은 더러운 것은 무엇이든 하늘의 도성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불변의 원칙으로 정하셨다 (21:27). 성화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14. 구원 신앙]

 

(1)

선택 받은 자들이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려면 믿음의 은사가 필요하다(10:39). 이 은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사역에서 비롯하는 데(고후 4:13, 1:17~19, 3:8) 대개 말씀의 사역을 통해 일어나며(10:14,17), 성례의 집행과 기도와 말씀의 사역을 통해 더욱 강화되고 증가된다(벧전 2:2, 20:32, 4:11, 17:5, 1:16~17).

 

[15. 생명에 이르는 회개]

 

가인과 가롯 유다는 회개했지만, 그들이 회개한 이유는 나지 죄가 자신들에게 미치는 결과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참된 회개는 경건한 슬픔, 곧 하나님을 생각하며 죄를 슬퍼하는 것을 가리킨다(고후 7:9~10).

 

- 참 회개는 죄를 깨닫고 의식하는데서 비롯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죄를 확실하게 깨닫고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일은 성령의 깨우치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16:8). 성령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신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믿음과 회개의 순서는 시간상의 차이로는 따질 수 없다. 영혼 안에서 이 둘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때는 없다. 믿음과 회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본질상의 순서를 따지면 믿음이 회개에 선행해야 한다. 복음적인 회개는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분께 나아올 수 없다(14:6, 6:35).

 

목음적인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짓 없이 사랑하려면 침 된 믿음이 있어야 한다(딤전 1:5).

 

- 참 회개는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과 깊은 후회를 동반한다. 거짓 슬픔을 침된 슬픔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단지 죄의 형벌이 무서워 죄를 슬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가라앉으면 더 자유롭고 격렬하게 죄를 저지르곤 한다. 그러나 참 회개하는 자는 죄를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권위를 거스르며,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어기고, 그분의 선하신 은혜를 저버리는 가장 추악한 행위로 여겨 슬피 뉘우친다(51:4).

 

- 참 회개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동반한다.

 

로마 교황주의자들은 회개를 죄를 보상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죄를 지은 사람이 고행이나 고해성사를 통해 죗값을 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회개가 죄 사함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한편 소시니우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인하고, 오직 회개만이 속죄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 교황주의자들은 죄를 대죄와 소죄(죄과가 가벼워 잠깐의 형벌로 속죄가 기능한 죄)로 나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죄는 아무리 작아도 정죄를 받기 마련이다라는 말로 그런 주장을 논박하고, 아무리 큰 죄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정죄를 면할 수 잇다는 말로 세례와 은혜를 받은 후에 중대한 죄를 범하면 죄를 뉘우치더라도 다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재세레파의 주장을 논박한다.

 

[16. 선한 행위]

 

인간의 명령은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 명령에 부합하지 않으면 선한 행위를 이끌어 낼 수 없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니간이 맹목적인 열정으로 제멋대로 규정한 행위들은 선한 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근거로 바리새인들의 선행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1:12).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15:9).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으신 행위는 행위자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선행으로 간주될 수 없다.

 

-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이 행하는 행위라야 한다.

- 올바른 원리,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행하는 행위라야 한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행한다는 신념이나 확신이 있어야 하며, 그분의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14:25).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요일 5:3).

-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는 행위라야 한다. 약속된 은혜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온갖 축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자신은 한없이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행해야 한다.

- 올바른 목적을 지향하는 행위라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 행하지 않는 행위는 선행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전 10:31).

 

(2)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행은 살아 있는 참 신앙의 열매요, 증거다(2:18, 22). 신자는 선행으로 감사를 나타내고(116:12~15, 벧전 2:9), 확신을 공고하게 하며(요일 2:3, 5, 벧후 1:5~10), 형제들의 덕을 세우고(고후 9:2, 5:16), 복음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빛내며(2:5, 9~12, 딤전 6:1), 대적들의 입을 막고(벧전 2:15),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벧전 2:13, 1:11, 15:8). 신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 마지막에 영생을 얻기 위해(6:2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2:10).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시고, 스스로 온전히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본질적 영광이나 복되심을 더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22:2, 35:7).

 

또한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3:20) 없기 때문이다. 선행은 천국에 갈 자격을 얻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이다(6:23). 그러나 모든 신자에게 선행을 실천하라고 진지하게 권고하고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 선행은 여라 가지 귀한 목적을 이룬다.

 

- 선한 행위는 살아 있는 참 신앙의 열매요, 증거다. 야고보 사도는 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무익한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다(2:2, 6). 살아 있는 믿음은 자연스레 선한 행위를 열매로 맺는다. 그것은 그 믿음이 거짖이 아니라는 증거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2:18)라고 말했다.

-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그 무엇으로도 다 보답할 수 없지만, 신자는 그분의 계명에 즐거이 복종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선한 행위는 온갖 축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다.

- 선한 행위는 확신을 공고하게 한다. 선한 행위는 믿음의 확신을 굳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위대하신 구원을 이해하는 지식을 증대시킨다.

- 선한 행위는 형제들의 덕을 세운다(고후 9:3).

- 선한 행위는 복음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빛낸다. 실천적인 경건은 기독교 신앙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한다(2:10).

- 선한 행위는 대적들의 입을 막는다.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딤후 3:17)갖추고, “복음에 합당한 말을 하면 사람들 엎에서 기독교의 진실성을 드러내고, 진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할 수 있다(벧전 2:15).

- 선한 행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신실한 신자들이 선을 많이 행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영광을 얻으신다. 예수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15:8)라고 말씀하셨다. 신자는 선한 행위로 하나님을 직접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분을 영화롭게 하도록 독려한다(5:16).

- 선한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선한 행위는 영생을 얻는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생명의 은혜를 상속하게 될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요건이다. 바울은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6:22)고 말했다.

 

(3)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신자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비롯한다(15:4~6, 36:26~27). 또한 그들이 그런 능력을 갖추려면 이미 맏은 은혜 외에 동일하신 성령에 의해 그들 안에서 실질적인 역사가 일어나 그 선하신 뜻을 바라고 행하려는 마음이 생겨나야 한다(2:13, 4:13, 고후 3:5). 그러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무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태만해져서는 안 된다. 부지런히 자기 고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2:12, 6:11~12, 벧후 1:3, 5, 10~11, 64:7, 딤후 1:6, 26:6, 1:20~21).

 

(5)

우리의 아무리 훌륭한 행위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죄 사함이나 영생을 받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선행으로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도 없고, 과거에 진 죄의 빛을 갚을 수도 없다(3:20, 4:2,4,6, 2:8~9, 3:5~7, 8:18).

 

왜냐하면 선한 행위가 선한 이유는 그것이 그분의 성령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5:22~23).

 

(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의 인격을 받아 주셨듯이 그들의 선한 행위를 그분 안에서 받아 주신다(1:6, 벧전 2:5, 28:38, 4:4, 11:4). 그 이유는 그들의 선한 행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고 책망할 것 없이 온전하기 때문이 아니라(9:20) 많은 약점과 불완전함을 수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 언에서 그것을 보시고 진실한 행위로 받아들여 보상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13:20~21, 고후 8:12, 6:10, 25:21, 23).

 

이 조항은 신자의 선한 행위가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고 진술한다. 이 점을 입증하는 데는 두 가지면 족하다. 첫째, 하나님이 복종의 행위를 받으시기 이전에 우리의 인격을 먼저 받아주셨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4:4),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면서 그의 인격을 받아주셨다. 즉 하나님은 아벨을 의롭게 여기셨다(11:4). 둘째,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위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가 인정받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사역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1:6) 우리의 인격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쁘게 받으신다(벧전 2:5).

 

(7)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행하는 행위는 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행한 것이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일지라도(왕하10:30~31, 1:15~16,18) 믿음으로 깨끗해진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고(4:5, 11:4,6), 말씀에 따라 올바로 행한 것도 아니며(고전 13:3, 1:12), 올바른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6:2, 5,16) 죄에 해당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그분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없다(2:14, 1:15, 5:21~22, 1:4, 9:16, 3:5). 그렇다고 해서 선한 행위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더 큰 죄가 되고, 그분을 더욱 불쾌하시게 만든다(14:4, 36:3, 21:14~15, 25:41~43,45, 23:23).

 

로마 가톨릭의 저술가들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행위도 모든 죄에서 자유로운 순결함을 유지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공로를 덕행의 공로라고 부른다.

 

선행은 형식상의 선행과 실질상의 선행으로 구별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선행은 실질상의 선행일 뿐 형식상의 선행과는 무관하다. 기도, 말씀을 읽거나 듣는일, 가난한자를 구제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선한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하시는 자 안에서”(1:6) 받아 주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사람이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즉 올바른 목적을 지향하지도 않고, 올바른 방법으로 행한 행위도 아니라면 형식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8:8).

 

[17. 성도의 견인]

 

(1)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받아들여 성령으로 유효하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온전하게나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끝까지 확실하게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 받는다(1:6, 벧후 1:10, 10:28~29, 요일 3:9, 벧전 1:5,9).

 

(2)

성도의 견인은 신자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선택의 작정에 근거하고, 성부 하나님의 값없는 영원한 사랑에서 비롯하며(미후 2:18!19, 31:3),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기도의 효험(10:10, 14, 13:20!21, 9:12~15, 8:33~39, 17:11, 24, 22:32, 7:25),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들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씨앗과(14:16~17, 요일 2:27, 3:9) 은혜 언약의 본질에 의존한다(32:40, 8:10~12).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절대적인 확실성이 생겨난다(10:28, 살후 3:3, 요일 2:19).

 

(3)

그러나 선지자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위력, 견인의 수단들을 소홀히 여기는 태도에 의해 심각한 죄를 저지를 수 있고(26:70, 72, 74), 한동안 그런 상태에 머물 수 있다(51:14).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64:5,7,9, 삼하11:27), 어령을 근심하시게 하며(4:30),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와 위로를 잃고(51:10, 12, 2:4, 5:2~4, 6),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며(63:17, 6:52), 사람들에게 비방할 거리를 주고(삼하 12:14), 양심에 상처를 입히며(32:3~4, 51:8), 일시적인 심판을 자초한다(89:31~32, 고전 11:32).

 

성도의 견인은 칼빈의 지지자들과 아르미니우스의 지지자들을 구분하는 신조 가운데 하나다. 후자는 참 신자도 죄를 지어 은혜의 상태에서 벗어나 일생 동안 배교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는 멸망을 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그와 동일한 교리를 지지한다. 트랜트 공의회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은혜를 잃지 않는다. 따라서 은혜를 잃고 죄를 짓는 사람은 진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선언했다.

 

[18. 은혜와 구원의 확신]

 

(1)

위선자들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릇된 소망과 육적인 생각에 치우쳐 스스로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상태에 있다고 착각한다(8:13~14, 3:11, 29:19, 8:41), 그런 그들의 소망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7:22~23). 그러나 주 예수님은 진실하게 믿고,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분 앞에서 선한 양심에 따라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현세에서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요일2:3, 3:14, 18~19, 21,24,5:13),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기뻐할 수 있다. 그들의 소망은 그들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5:2,5).

 

(2)

이런 확실성은 그릇된 소망(6:11,19)에 근거한 억측이나 있음직한 신념이 아니라 구원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6:17~18), 약속된 은혜들을 드러내는 내적 증거(벧후 1:4~5, 10~11, 요일 2:3, 3:14, 고후1:12),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 하시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의 증언에서 비롯한다(8:15~16), 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1:13~14, 4:30, 고후1:21~22).

 

로마 가톨릭 교회는 현세에서는 특별한 계시가 따로 주어지지 않는 한 구원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나 신념을 뛰어넘는 확신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의심과 불확실성을 부추김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얻는다. 그들은 교회의 기도와, 성인과 순교자들의 공로와, 사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사면을 통해 어느 정도 의심과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다면서 신자들을 현혹시킨다. 한편 신자의 궁극적인 견인을 일관되게 부인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 외에 더 큰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조항은 신자는 특별하거나 직접적인 계시가 없더라도 일반적인 수단을 옳게 사용하기만 하면 억측이나 있음직한 신념을 뛰어넘어 궁극적인 구원과 은혜의 상태를 확신할 수 있다면서 이런 오류들을 논박한다.

 

- 성경은 신자에게 스스로를 성찰해 구원의 확신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고후13:5)라고 권고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책망 받을 일이라고 암시했다. ~~~~모든 신자들에게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권고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아울러 제시했다. 그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신자들에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11)고 권고했다. 신자는 그런 방식으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신할 수 있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 확실하게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6:11) 이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권고의 말들은 신자가 특별한 계시가 없어도 얼마든지 현재의 경건과 장래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잇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성경은 참 신자들의 표정과 속성을 보여 준다. 신자들은 그런 표정과 속성을 통해 연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자신에게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3,5). “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4,19). 요한은 요한 일서를 통해 신자의 확실한 특징을 보여 주며"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고 말했다.

 

-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 위인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그런 확신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17:15, 23:6, 73:24, 19:25).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 위인들의 경험은 드보다 훨씬 더 분명하다(8:37~39, 고후 5:1, 딤후 1:12, 고후 5:8, 딤후4:6~8)).

 

- 구원의 확신은 구원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 약속된 은혜들을 드러내는 내적 증거,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시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의 증언에서 비롯된다.’

 

구원의 확신은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근거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은 그 모두에 근거한다.

 

우리는 삼단논법을 통해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은혜의 상태에 있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16:31, 9:33). 다시 말해,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은혜의 상태에 있고, 또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추론할 수 있다.

 

모든 어려움은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6:3). 때로는 영혼의 눈이 감길 때도 있다(24:16). 그런 경우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조차도 실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기 마련이다(50:10). 겉으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과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룩한 확신에 도달하려면 그런 행위들이 거짓이나 위선이 아닌지 그 본질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 확신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즉시 자신의 믿음을 의식할 수 있으며, 그런 의식이 바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첫 번째 증거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조항은 그런 증거를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조항은 그런 의식이 참 신앙에서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결과물과는 무관하다고 암시한다. 이 의식은 많은 신학자들이 믿음의 나사 행위라고 일컫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에 대한 의식이나 스스로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사적으로 깨닫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조항은 은혜와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본질적 요소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도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가졌는지 즉각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믿음의 정도는 다양하고, 그 증거는 믿음의 강도에 비례한다.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면 믿음도 덩달아 강해지고, 그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도 확실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브라함, 백부장, 가나안 여인과 같이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신자들의 믿음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만큼 확실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자가 자신이 거짓 없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 의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믿음이 단지 신앙의 명제와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를 머리로 이해해 동의하는 것이라면 믿는 순간, 그 믿음을 곧바로 확신하거나 의식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 신앙이 마음속에서 싹트는 것이라면 의식에서 비롯되는 증거는 더욱 불확실 할 수밖에 없다. 은혜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과 하나님을 거부하려는 본성이 영혼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매우 쉽게 풀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거듭난 신자의 마음도 죄의 유혹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영혼이 속고 그릇 치우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은혜로운 생각들은 자연적인 본성에서 비롯하는 생각으로도 어느 정도는 얼마든지 모방이 가능하다. 마음에 남아 있는 부패함이 역사하는 탓에 신자는 전자와 후자를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도덕적으로 진지한 사람도 그런 식으로 속아 넘어가 스스로가 때때로 느끼는 감정과 다양한 원인으로부터 비롯되는 생각들을 은혜의 역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성령의 구원 사역이 다른 요인들과는 매우 다른 영향을 영혼에 미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분의 사역은 다른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확실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곳에서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신자의 육신 안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세력이 존재하고, 육신의 소욕이 성령을 거슬러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게 만든다.

아울러 신약성경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확신하고 스스로에게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 모두에게는 그때 이후로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은혜보다 훨씬 더 많은 은혜가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성령의 증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 사도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8:16)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성령이 증언하시는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내적 계시나 직접적인 암시를 통해 신앙의 양자됨을 증언하신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친히 물과 피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방법으로, 곧 마음속에 영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부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양자 됨을 증언하신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것은 신자들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입증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표정이나 특징, 또는 자격 조건을 반추하지 않고, 즉 세례나 성화를 통한 성령의 증언과는 무관하게 즉시 믿음의 확신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성령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으키시는 효과나 사역을 통해 우리의 양자됨을 증언하신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목회자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그들은 즉각적인 증언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성령의 증언을 통해 신자는 자신의 양자됨과 거기에서 비롯하는 안전감을 확신하기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드 학장은 성령이 즉각적인 계시나 암시를 통해 증언하신다는 견해를 강하고 단호하게 논박했다. 그는 그런 그릇되고 기만적인 개념으로부터 많은 해악이 초래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성령의 증언을 성령이 마음에 영향을 미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입증해 줄 증거를 보여주시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내면의 즉각적인 암시로 이해해 하나님이 은밀한 음성이나 인상을 통해 마음속에서 너는 나의 자녀다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각 한다. 그들은 증언이나 증거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

~~~ 예를 들어, 히브리서 24절은 하나님이 표적들과 기사들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 증언하셨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적들이 하나님의 증언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것들이 주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이자 증언의 효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43, 요한복음 536, 1025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과 피도 증언의 효력을 지닌다(요일 5:8). 그 이유는 그것들이 무엇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가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말은 앞의 두 구절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모든 독자가 익히 짐작하다시피, 그의 말은 앞의 두 구절의 결론에 해당한다. 이 세 구절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8:14~16)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모두 고려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나 증언을 허락하신다는 바울 사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의 말은 곧 성령이 양자의 영이자 자녀의 영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행동할 수 있는 성향을 불러일으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학자들은 이 주제에 관해 동일한 견해를 피력한다. ~~~ 딕 박사는 성령은 신자들의 양자됨을 증언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영혼에 역사하시어 그들의 양자됨의 증거를 보여 주시며, 귀 로 들을 수 잇는 음성만큼이나 분명하게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확실하게 일깨워 주신다고 말했다. 또한 찰머스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방법은 매우 분명하다. 많은 사람의 해석에 따르면, 성령은 우리의 영을 향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언하시고, 또한 증명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은혜의 사역을 행하시고, 그 사역이 우리의 양심에 분명하게 느껴지게 만드신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인격이 변화된 특징을 감지할 수 있고, 그런 변화를 우리 자신의 영에 의한 활동으로 간주해 우리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특징이나 속성에 익숙해지게 된다.

더욱이 우리는 성경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과 우리의 영이 공동으로 그런 변화를 증언하거나 둘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져 한 목소리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는 결과가 나타나기에 이른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의 살아 있는 서신을 우리에게 새겨 주시는 것과 동시에 기록된 계시의 서신을 통해 그런 특징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시는 역할을 수행하신다. 아울러 우리의 영이 하는 역할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깊이 성찰하고, 또한 이해의 눈으로 하나님의 증언이 기록된 성경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는 데 있다.

우리의 내면에서 발견된 은혜의 표징이 성령이 기록하신 말씀 안에서 발견되는 은혜의 표징과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는 결론을 토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 곧 우리의 눈을 열어 성경 안에 기록된 것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는 일과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은밀하고도 깊게 숨겨져 있는 일들, 곧 가장 발견하기 어려운 일들을 보게 하시는 일 모두는 성령의 사역에서 비롯된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고, 마음의 상태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시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해 직접적인 암시를 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적인 경험보다 인간의 교리를 앞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전자를 통해 무엇이 약속되었는지 알 수 있고, 후자를 통해 우리의 인격적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전자를 후자에 적용하면 우리가 구원 받은 자녀들 가운데 속한다는 가장 합법적인 논증, 즉 어설프거나 공교한 논증이 아니라 직관의 빛처럼 신고하면서도 강력한 증거를 지닌 논증을 이끌어 낼 수 있다.

 

(3)

참 신자는 오랫동안 기다리며 많은 어려움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요일 5:13, 50:10, 9:24, 88, 77:1~12). 특별한 계시가 없어도 일반적인 수단을 올바로 사용하면 상령이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신느 것들을 알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에 능히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전 2:12, 요일4:13, 6:11!12, 3:17~19). 따라서 더욱 힘써 지신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을 곧게 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의무다(벧후1:10). 그렇게 하면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화와 기쁨,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 복종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즐거움이 더욱 커지고(5:1~2, 5, 14:17, 15:13, 1:3~4, 4:6~7, 119:32), 확신의 열매를 맺게 되어 방탕함에 치우치지 않게 된다(요일2:1~2, 6:1~2, 2:11~12, 14, 고후 7:1, 8:1, 12, 요일 3:2~3, 130:4, 요일1:6~7).

 

(4)

참 신자라도 구원의 확신이 다양한 방식으로 흔들리거나 감소하거나 중단될 수 있다. 그런 결과는 확신을 유지하는 일을 소홀이 하거나, 특별한 죄를 저질러 양심에 해를 입혀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갑작스럽고 격렬한 유혹에 직면하거나, 하나님이 그 얼굴빛을 거두시어 자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조차 빛이 없는 상태에서 어둠 속을 거닐게 하시는 경우에 발생한다(5:2~3,6, 51:8,12,14, 4:30~31, 77:1~10, 26:60~72, 31:22, 88, 50:10). 그러나 하나님의 씨앗과 믿음의 생명, 그리스도와 형제에 대한 사랑과 마음의 진실함과 의무를 행하려는 양심은 결코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요일 3:9, 22:32, 13:15, 73:15, 51:8,12, 50:10). 적당한 때가 되면 성령의 역사로 인해 확신이 되살아나고, 그렇게 되기까지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 받는다(7:7~9, 32:40, 54:7~10, 22:1, 88).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확신은 믿음의 열매와 증거를 의식하는데서 비롯한다. 믿음은 그런 열매와 증거를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믿음은 증언에 근거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누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증언이 없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이런 확신은 주로 반성이나 이성적 추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은 구원 신앙의 핵심적인 활동에 해당한다. 구원 받기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려면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거나 확신하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를 의지해 무엇을 얻으려면 그가 자신에게 구하는 것을 내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나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나 영적인 차원에서나 확신이 없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어떤 보고서를 믿으려면 먼저 그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필요하고, 어떤 약속을 믿으려면 약속을 한 사람이 그 약속을 실천할 것이라는 확신이나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구원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확신은 일반적으로 믿음의 확신이라고 불리고,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감각의 확신이라고 불린다. 전자는 객관적인 확신이고, 후자는 주관적인 확신에 해당한다. 이 둘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된다. 전자의 대상은 복음의 증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고, 후자의 대상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역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된 진리에만 근거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사역 둘 다에 근거한다. 전자는 복음의 값없는 제공과 약속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내주셨다는 확신을 말하고, 후자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소유하고, 누리고 잇다는 확신을 말한다. 전자의 확신은 복음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지만, 후자의 확신은 참 믿음의 행위와 분리될 수 있고, 또 실제로 종종 분리되어 나타난다.

 

이 주제와 관련해 우리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하나는 확신이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와는 무관하고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증거와 표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확신은 구원 신앙의 본질에 고하기 때문에 자신의 구언을 의심하는 사람은 참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표징과 증거를 통해 얻어지는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지만,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 곧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된 확신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신자는 믿음의 본질에 고하는 확신을 가졌더라도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구언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 신앙을 가졌더라도 여전히 많은 불신앙과 부패의 요소가 남아 있어 신자를 자주 괴롭히기 때문이다.

 

[19. 하나님의 율법]

 

(1)

하나님은 아담에게 행위 언약인 율법을 허락하시어 그와 그의 모든 후손에게 그 율법을 인격적으로 온전하고, 정확하고, 영구히 지켜야 할 의무를 부과하셨다. 그분은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주고, 어기면 죽음의 형벌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셨고, 그에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허락하셨다(1:26~27, 2:17, 2:14~15, 10:5, 5:12,19, 3:10,12, 7:29, 28:28).

 

하나님은 인간을 지성적인 피조물이자 도덕적인 자율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시고 그에게 율법을 허락하시어 행위의 규칙으로 살게 하셨다.

 

이 율법은 본래는 인간의 마음에 기록되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의무를 다하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자기에게 요구된 복종을 실천할 수 있는 힘과 능력까지 부여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그 형상 안에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1:27).

 

아담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은 종종 창조의 율법으로 일컬어진다.

 

하나님은 이성을 지닌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생각과 마음속에 율법을 새겨 주었다. 또한 이 율법이 도덕법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인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담은 도덕적 행위의 기준이자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율법이 자연적인 형태로 아담에게 주어졌고, 그에게 완전한 복종의 의무를 요구했다.

 

더욱이 이 율법은 언약의 형태로 주어졌다. 즉 복종하면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과 어기면 사망의 형벌을 내리겠다는 경고가 덧붙여졌다. 아담이 모든 율법에 복종할 것인지를 시험하기 위한 잣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졌다(2:16~17).

 

바울은 언약의 형태를 지닌 이 율법을 행위 율법으로 일컬었다(3:27). 아담에게 주어진 율법은 행위 언약이었다. 이런 형태의 율법은 의무를 규정할 뿐 아니라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을 약속하고, 불순종에 대한 징벌로 사망을 선고하는 형식을 취한다.

 

생명을 주기로 작정된 율법이 육신(타락한 본성의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제 율법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의무들을 요구한다. 행위 언약인 율법을 지켜 생명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런 방법으로는 더 이상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인간의 타락이 있은 후 행위 언약으로 알려진 율법은 폐지되었지만, 도덕법으로 알려진 율법은 계속해서 완전한 의의 규칙으로 남았다. 창조 당시에 인간의 마음에 기록된 이 율법은 타락한 후에는 완전히 지워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이성을 지닌 피조물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런 흔적이 남아 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리들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 새겨져 있다(2:14~15).

 

그러나 율법이 지닌 본래의 기능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온전하고 새로운 형태로 다시 허락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지극히 엄숙한 절차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수여하셨다. 하나님은 그 율법을 열 가지 계명으로 간단히 요약해 반포하셨다.

 

복음은 도덕적 율법의 의무를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그 권위를 아화하고 공고히 하며,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그 계명에 복종하게 한다.

 

(6)

참 신자는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거나 정죄 당하지 않는다(6:14, 2:16, 3:13, 4:4~5, 13:39, 8:1). 그러나 율법은 삶의 규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주고, 거기에 합당히 행하도록 명령하고 인도하며(7:12,22,25, 119:4~6, 고전7:19, 5:14,16, 18~23),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이 죄로 인해 부패했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7:7, 3:20, 7:24)스스로를 살펴 죄를 더욱 깨닫게 하고, 죄를 미워하게 하며, 겸손한 태도를 취하도록 이끌고(1:23~25, 7:9,14,24),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전하신 복종의 필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의식하게 만든다(3:24, 7:24~25, 8:3~4).

 

이와 이 율법은 거듭난 자들에게 그들의 부패함을 억제할 수 있는 유익을 끼친다. 율법은 죄를 금지할 뿐 아니라(2:11, 119:101,104,128) 경고를 통해 그들이 비록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더라도 죄를 지으면 어떤 징벌을 받고, 또 현세에서 어떤 고난을 받게 될 것인지 알려 준다(9:13~14, 89:30~34). 또한 율법은 약속을 통해 복종하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또 비록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통해 마땅히 주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2:16, 17:10) 그런 행위로 인해 어떤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알려 준다(26:1~14, 고후 6:16, 6:2~3, 37:11, 5:5, 19:11).

 

[20. 기독교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시민적 자유가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신 자유에 비견할 수는 없다. 영혼은 육체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후자와 관련된 자유가 전자와 관련된 자유를 능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신 자들은 진정으로 자유롭다(8:36).

 

- 신자들은 죄책과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다(6:14,22).

- 신자들은 하나님의 정죄하는 진노로부터 자유롭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2:2~3). 그러나 신자들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덕분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8:1). 하나님이 그들에게 잠시 얼굴을 숨기실 수는 있지만, 그분의 법적 진노는 그들에게서 영원히 사라졌다(54:9~10, 5:10).

- 신자들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3:10, 13, 6:14, 7:6).

- 신자들은 현세의 악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다(1:4, 6:14).

- 신자들은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요일 3:8, 2:14. 1:13, 벧전 5:8, 16:20).

- 신자들은 고통의 해악으로부터 자유롭다(8:28, 12:6~11, 고후 4:17).

- 신자들은 사망의 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죽음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만을 의미한다면 신자도 죽음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9:28, 89:4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로 인한 사망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11:25~26). 그분은 사망의 쏘는 것을 무력화시켰고(고전 15:56), 사망이 자기 백성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하게 만드셨다(고전 15:56).

- 신자들은 무덤의 승리로부터 자유롭다. ~~~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불멸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19:26~27).

- 신자들은 영원한 정죄로부터 자유롭다. 이 세상에서 죄의 형벌을 온전히 다 당하는 사람은 없지만, 악인들은 결국 모두 지옥에 갈 것이다(9:17). 마지막 심판의 말에 그들에게 정죄가 선고되고, 그들은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25:41).

-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

- 신자들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악인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노예가 독재자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독재자를 미워하면서도 그들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단지 형벌이 두렵기 때문이다(고후 3:17, 1:74~75, 고후 5:14, 요일 4:18).

 

(4)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과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자유는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지지하고 보존하도록 의도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나 교회의 합법거인 권력이나 합법적인 권위 행사에 대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하는 것이다(12:25, 벧전 2:13~14, 16, 13:1, 13:17).

 

[21. 예배와 안식일]

 

[22. 정당한 맹세와 서원]

 

[23. 국가 공직자]

 

(1)

온 세상의 지고하신 왕이요, 주님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위해 자기 아래 국가 공직자들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그들에게 칼의 권세를 허락하시어 선한 자들을 보호하고 격려하며, 악인들은 징벌하게 하셨다(13:1~4, 벧전 2:13~14).

 

(2)

기독교인들이 공직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직임을 받아들여 수행 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다(8:15~16, 13:1~2, 4). 그들은 직임을 수행할 때 각 나라의 건전한 법에 따라 특별히 경건과 정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1:10~12, 딤전 2:2, 82:3~4, 삼하 23:3, 벧전 2:13) 신약시대인 지금,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 목적을 위해 전쟁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3:14, 13:4, 8:9~10, 10:1~2, 17:14, 16).

 

[24. 결혼과 이혼]

 

[25. 교회]

 

(2)

유형교회도 복음 아래서는(과거와 달리 율법 아래서 한 민족에게 국한되지 않고)보편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 교회는 침 믿음을 고백하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고전1:2,12:12~13, 2:8, 7:9, 15:9~12)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고전7:14, 2:29, 16:20~21, 11:16, 3:15,17:7),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요(13:47, 9:7), 하나님의 가족이다(2:19, 3:15), 교회를 떠나서는 일상적으로는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2:47).

 

소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말씀을 통한 외적 소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통한 내적 소명이다. 후자는 오직 선택 밭은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따라서 교회도 이중적인 형태(측면)를 지닌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외적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형태다.

 

유형교회는 무형교회를 포함하지만, 그 둘이 서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무형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또한 유형교회에 속하지만, 유형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는 무형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사역과 규례를 유형 교회에 허락하신 목적은 죄인들을 무형 교회로 불러 모으시어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26. 성도의 교제]

 

교제는 연합에 근거한다. 이 조항들은 세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는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과 그분과 나누는 교제이고, 둘째는 성도들끼리의 연합과 교제이며, 셋째는 고백하는 성도들의 영합과 그들이 유지해야하는 교제다.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의 특징은 절대 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이 일단 내주하시면 절대 떠나지 않으신다(14:16~17). 사탄과 그의 모든 수하들이 온갖 힘과 술책을 동원해도 신자와 그리스도를 갈라놓을 수 없다(8:38~39). 죽음은 다른 모든 다른 관계를 단절시키고,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지만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절대 깨뜨릴 수 없다. 이것이 신자들이 주 안에서 죽는 자”(14:13), “예수 안에서 자는자”(딤전4:14)로 일컬어지는 이유다.

 

참 신자들은 서로 연합하고, 서로 교제를 나눈다. 그들은 한 몸을 이루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모두 연합하며, 한 성령에 참여한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보배로운 믿음을 지니고 있다. 복음의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그들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들은 온전하게 매는 띠”(3:14)로 불리는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6:24)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동료 신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서로 연합했기 때문에 은사들과 은혜를 통해 서로 교제를 나눈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은 다양한 은사와 은혜를 부여 받은 많은 지체로 구성되어 있다. 지체들은 서로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 전체를 이롭게 해야 한다. 그들은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의무들을 실천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형제를 사랑하여 어로 우애하고 준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12:10), 짐을 서로 짊어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6:2),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자들과 함께 울고(12:15),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6:18),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야 한다(6:10).

 

첫째 그들은 함께 모여 공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10:25).

둘째, 성도들은 서로의 덕을 세우는 영적 의무들을 행해야 한다. (14:15, 3:16, 3:16, 살전5:11,14, 10:24).

셋째, 각자의 능력과 기회에 따라 물질을 베풀어 서로를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요일3:17).

 

성경은 성도를 섬기는 일이 곧 성도의 교제에 해당한다(고후 8:4)고 가르친다.

 

 

 

[27. 성례]

 

[28. 세례]

 

[29. 성찬]

 

[30. 교회의 권징]

 

[31. 대회와 총회]

 

[32. 사후 상태와 죽은 자의 부활]

 

(1)

사람의 육체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되지만(3:19, 13:36), 영혼은(죽거나 잠들지 않는) 불멸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23:43, 12:7). 그 순간, 의인의 영혼은 온전히 거룩하게 되고, 지극히 높은 하늘로 영접되어 그곳에서 빛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몸의 온전한 구속을 기다린다(12:23, 고후 5:1,6,8, 1:23, 3:21, 4:10).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큰 날의 심판이 있을 때까지 갇혀 지낸다(16:23~24, 1:25, 1:6~7, 벧전 3:19).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갈 장소는 이 둘 뿐이다. 성경은 그 외의 장소를 인정하지 않는다.

 

(2)

마지막 날에 살아 있는 자들은 죽지 않고 변화될 것이고(살전 4:17, 고전 15:51~52), 죽은 자들은 모두 이전과 동일한 육체로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그 육체의 특성은 전과는 다르지만, 그들의 영혼과 영원히 다시 결합할 것이다(19:26~27, 고전 15:42~44).

 

[33. 마지막 심판]

 

모든 개인이 사후에 즉시 받는 심판이 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말한다. 이 심판 외에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은 후에 이루어질 심판이 있다. 이 조항들은 미래에 있을 심판의 확실성을 진술하고, 그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집행될 것이라고 확언하며,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대상들이 누구인지 밝히고, 심판의 내용과 선고될 형벌을 차례로 언급한다.    


 

[Review]

 

 

얼마 전 아파트 단지에 금붕어 장수가 찾아왔기에 한 마리를 사다가 페트병에 담아 두었더니 신기하게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살아남았다. 그 후 마트에 가서 조그만 어항을 사고 먹이까지 넣어주자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잘 지낸다. 작은 어항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보면 그 생활에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도 없어 보인다. 이 금붕어는 어항 속에서 부화되었을 것이고, 또 그 어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유전자적으로 이미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만약 그 물고기가 더 크고 우아한 수족관 속으로 옮겨져 다른 물고기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물고기를 보며 우리의 삶이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 속에서 산다. 다양한 삶의 모습, 생각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만의 세계일뿐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은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게 있느냐 그냥 믿으면 되지!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믿는가? 라는 한 가지 질문이 곧 떠오른다. 이러한 의문은 성경의 진리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인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생각은 오류에 치우치기 쉽고, 모든 점에서 서로 큰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 혼자 만으로의 신앙생활은 위험하다.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교제를 통해 서로의 다른 모습을 보며 또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 성도는 이런 교제를 통해 자신 속에서 진리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오류가 가득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선포할 수 없다.

 

만일 스스로가 이해한 의미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설명하지 않으면 개념이 모호하고 불명료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매우 그릇된 오류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청중이나 교사가 각자 전달했다고 믿는 의미를 뚜렷한 말로 설명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서로가 똑같이 이해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본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교리는 1643년부터 1647년까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렸던 종교회의를 거쳐 이루어졌다. 복음주의적 신앙을 견지하고 그들 사이에 교리적인 통일성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교리는 오늘날 기독교 정통 교리, 특히 켈빈주의 신학에 최고로 인정받는 지침이 되었다. 그러나 교리의 내용이 조항으로 함축되어 있어서 이해에 따른 차이가 생겨났고 이로 인해 해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책 교리해설서는 1845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학자였던 로버트 쇼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성도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적 초석이 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금붕어처럼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혀 있으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주일날 듣는 한 목사의 설교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은 왜곡된 진리로 더욱 복잡해지고 다양한 인격, 삶의 모습들이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복음을 전파하려면 단지 여러 성경 본문들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의문에 답할 수 없으며, 스스로가 이해한 의미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설명할 때 참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 일치단결해 동일한 진리를 전하는 증인으로서 그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꾸준하고 일관되게 제시해야 한다. 이 책에는 신앙생활에서 부딪치는 모호하고 불명료한 진리들이 보다 간결하고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는 데 유익하다. 신앙인 뿐만아니라 기독교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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