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1877~1962
[머리말] 全文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의 이야기를 하려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내 유년 시절은 물론 가능하다면 그보다 훨씬 더 먼 옛날, 나의 근원까지 이야기해야 한다.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마치 그들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일생을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이해하듯이 행동한다. 그리고 마치 신이 이야기하듯이 모든 것이 진실인 것처럼 거리낌 없이 써 내려가곤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작가들처럼 그렇게 할 수 없다. 내 이야기가 다른 어떤 작가의 이야기 이상으로 중요한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상적으로 꾸며 냈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의 이야기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존재의 단 한 번뿐인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미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모호하다.
대자연에 단 하나뿐인 귀중한 생명들이 총탄에 죽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독특한 인간 이상의 귀중한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들이 단 한 발의 총알에 의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존재라면 이런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란 인간 이상의 존재이다. 단 한 번뿐이며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유일하고도 경이로운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며, 모든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서 자연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한 누구나 경이로운 존재이고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정신의 형체를 이루게 되며, 신의 피조물로 고뇌하고 각자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밖고 있다.
오늘날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나면 더욱 편안히 죽을 수 잇을 것이다. 나도 인간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탐구해 왔으며, 지금 역시 그러하다. 다만 나는 이제 더 이상 별이나 책에서 해답을 찾기보다는 나의 내면에서 나의 피가 주는 가르침을 들으려 한다. 내 이야기는 즐겁지 않으며 꾸며낸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도 않다. 자신을 더 이상 기만하지 않으려는 모든 인간의 생활과도 같이 불합리하고 혼란스러우며, 일종의 광기와 꿈의 맛이 있다.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어떤 길에 대한 암시이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그 자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으로는 그 자신이 되어 보기 위해 어떤 이는 다소 서투르게, 어떤 이는 좀 더 명석하게, 자기의 힘이 닿는 만큼 노력한다.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한 누구라도 출생의 잔재를, 태곳적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있다. 끝끝내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 개미에 머무르는 일도 허다하다. 머리는 사람ㄴ이지만 몸은 물고기인 사람도 있다. 그 하나하나는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자연의 도박이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난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심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 심연의 실험체인 개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자신에 대한 해명은 자기 자신에게밖에 할 수 없다.
[두 개의 세계]
하나의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매우 비좁아 오직 부모님 두 분만을 포함하고 잇을 뿐이었다. 이 영역의 대부분은 내게 매우 친숙하다. 그것은 어머니의 엄격함, 모범, 교육의 세계였다. 이 세계에는 부드러운 빛, 명확함과 정결함, 그리고 따뜻하고 다정스런 대화, 깨끗한 손, 말쑥한 옷차림, 훌륭한 예의범절이 깃들여 있었다. 이곳에서는 아침마다 찬송가를 불렀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이 세계에서 미래로 연결된 곧은 길 위에는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참회, 관용과 선의, 사랑과 존경,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가 함께하고 있었다. 인생을 밝고 맑게 그리고 아름답고 안정되게 살기 위해서는 이 세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
또 하나의 다른 세계 또한 우리 집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이질적인 세계였다. 냄새와 말씨부터 달랐다. 기대와 요구도 완전히 달랐다. 두 번째의 세계에는 하녀라든가 행상들, 귀신 이야기와 추한 소문이 있었다. 그곳에는 마치 도살장이나 형무소, 술주정뱅이들과 욕지거리를 퍼붓는 여자들, 새끼 밴 암소와 쓰러진 말, 강도와 살인, 자살에 대한 이야기 같은 몸서리쳐지면서도 유혹적이고 끔찍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넘쳤다. 흥미롭지만 무섭고, 거칠고 어둠침침한 일들이 바로 내 주위에서, 옆 골목이나 이웃집에 존재하고 있었다. 경찰들과 불량배들이 쫓고 쫓기며 거리를 휩쓸고, 주정뱅이들은 아내를 두둘겨 팼으며, 밤이 되면 젊은 여인들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고, 노파들이 사람을 홀려 아프게 만들기ㅐ도 했다. 강도들이 숲 속에 자리를 잡았고, 방화범이 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이처럼 또 하나의 격정적인 세계가 도처에서 넘쳐흐르고 악취를 풍겼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집만은 제외되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 두 개의 세계가 가까이 맞닿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집 하녀인 리나는 저녁 기도를 올릴 때면 거실 문 옆에 앉아 깨끗이 씻은 손을 빳빳하게 다림질한 앞치마에 단정히 모으고 맑은 목소리로 우리와 함께 찬송가를 부른다. 그때는 분명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이며 우리들의 세계인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그러나 부엌이나 장작을 쌓아 둔 헛간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줏간에서 이웃집 여자들과 다툴 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고, 비밀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든 일들이 그러했으며 내 자신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해 있었으며 내 부모님의 아들이었다. 그렇지만 눈과 귀를 돌리면 그곳에는 언제나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세계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내겐 낯설고 불안하고 양심의 가책이 되었지만 때론 금지된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밝은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 무의미하고 황량한 세계로 돌아오는 것처럼 지루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탕아들의 이야기에서는 아버지와 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구원이었으며 현명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올바르고 선하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악한이나 방탕아들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탕아가 참회하고 다시금 선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결과가 불만스러울 지경이었다.
수업이 없던 어느 날 오후 -내가 열 살쯤 되던 해였다.- 나는 이웃의 두 아이와 어울려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키 큰 아이가 다가왔다. 열세 살쯤 되는 힘이 세고 거친 아이로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양복점을 운영했지만 술주정뱅이였고 그의 가족들 모두 평판이 좋지 않았다. 나는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속으로 그를 두려워했으므로 그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다리 옆의 강기슭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다리 기둥 뒤로 돌아갔다. 아치형의 다리 기둥과 천천히 흘러가는 냇물 사이의 기슭은 온통 쓰레기와 유리 조각, 고철 덩어리, 그 밖의 잡다한 것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이따금 쓸 만한 물건들이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프란츠 크로머가 시키는 대로 그곳 주변을 샅샅이 뒤졌고, 찾아 낸 잡동사니들을 그에게 보여야 했다. 크로머는 그중 괜찮은 것을 골라 호주머니에 챙겼고, 나머지는 물속으로 던져 버렸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들은 우리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말도 되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나쁜 짓을 자랑스럽게 으스댔다. 나는 잠자코 있었는데 그런 나의 침묵이 크로머의 노여움을 살 것 같아 몹시 두려웠다. ~~~나는 불안한 나머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꾸며 대기 시작했다. 나는 대담하게도 도둑질한 이야기를 꾸며 댔는데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물방앗간 옆 과수원에서 친구와 같이 사과를 한 자루나 훔쳤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순간적인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이런 거짓말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박수를 기대했다. 그만큼 내가 꾸며낸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야. ~~~하나님의 이름으로! 결국 나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내가 문을 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크로머가 나를 쫓아와 문을 밀치며 들어왔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다고 했잖아. ~~~넌 알고 있겠지, 방앗간 옆 과수원이 누구네 땅인지. 크로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를 도둑맞고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던 사실이야. 과수원 주인이 사과를 훔친 놈을 신고하면 2마르크를 주겠다고 한 것도 알고 있어. 뭐라고? 아, 맙소사! ~~~일러바치지 말라고? 크로머는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크로머 제발 이르지 말아줘. 그래서 네게 좋을 게 뭐가 있겠어? 내가 이 시계를 줄게. 자, 받아. 난 정말로 가진 게 하나도 없어. ~~~이 따위 낡아빠진 시계가, 은이면 무슨 소용이야. 그렇게 좋은 거면 너나 고쳐 써. ~~~내일까지 여유를 줄게. 내일 2마르크를 가져와. 수업이 끝난 뒤에 저 아래 시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리나가 장작을 가지러 가려고 광주리를 들고 내려오다가 계단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버지의 모자를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믿음과 희망이 내 마음을 스쳤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아버지의 처분에 따라 벌을 받게 되면, 그렇게 해서 아버지가 내 편이 될 수만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고백하는 순간, 지금껏 그래왔듯이 참회와 괴롭고 가슴 아픈 시간을 버텨야 한다.
방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께서 내 젖은 신발을 지적하며 혼내신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버지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짐으로써 더 나쁜 사태를 깨닫지 못하셨고, 나는 그저 아버지의 꾸중을 묵묵히 감수하면서 남몰래 다른 일에 그것을 연관시켜 버렸다. 그러다 보니 새롭고 묘한 감정이 마음속에 일어났다. 바로 날카로운 반항심이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우월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눈치 못한 아버지가 내 젖은 신발을 나무라는 잔소리는 아주 경멸스럽게 생각되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아신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흡사 사람을 죽인 죄를 지은 판국에 빵 한 조각 훔친 것만 심문받는 사람의 심정이었다. 그것은 추악하고 적대적인 감정이었지만 강하고 깊은 매력이 있었다.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내 비밀과 죄를 결박시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크로머가 경찰에게 나를 밀고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내 머리 위에는 폭풍이 휘몰아치고 잇는데, 가족들은 나를 한낱 철부지 어린아이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최초의 균열이었고, 나의 소년 시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둥에 가해진 최초의 톱질이었다.
그 기둥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운명은 누구도 느끼지 못한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선이 그어진다. 톱질이나 균열의 흔적은 다시 아물고 치유되기도 하지만 암실 같은 마음 속 기장 깊은 곳에 피 흘리며 살아가게 된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맛보았고 그 맛은 쓰디썼다. ~~~~마침내 잠자리에 들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올렸던 저녁 기도는 최후의 죄를 사하는 지옥 불처럼 내 위로 쏟아졌다. 가족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불렀다. 나는 차마 함께 부를 수가 없었다. 곡조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쓰디쓴 담즙이며 덕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따스함과 안도감이 나를 부드럽게 감쌌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나는 용서를 빌리라. 그러면 만사가 해결되고 나는 구원될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다시 낮의 사건을 떠올렸고, 적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크로머의 얼굴이 뚜렷이 보였다. 그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에는 야비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날 밤 내가 꾼 꿈은 크로머나 오늘의 사건이 아니라 부모님과 누나들과 함께 배를 타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휴일의 평화와 환희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밤중에 언뜻 잠이 깨었을 때조차도 그 행복의 뒷맛이 느껴졌다. 유난히도 하얗던 누나들의 여름옷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어느 한 순간 나는 천상의 낙원에서 현실로 굴러 떨어져 다시 사악한 적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어디가 아프냐고 묻자마자 나는 그만 구토를 해버렸다. 나는 원래 몸이 조금 아픈 날이 좋았다.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카모마일차를 마시면서 어머니가 청소하는 소리와 리나가 고기 장수와 흥정하는 소리 듣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 만약 내가 지금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학교에 가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11시에 시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크로머로부터 나를 보호하지는 못한다. ~~~나는 11시에 시장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10시 쯤 일어나 이제는 좀 나아졌다고 말했다. ~~~나는 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다. 한 가지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나는 크로머와 그가 속해 있는 세계로 한걸음 다가섰고 타락의 길로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저항하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악마가 나를 잡아간다 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돈을 세어보았다. 저금통에 들어 잇을 때는 제법 많은 줄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형편없이 적은 돈이었다. 65페니였다.
멀리서 프란츠 크로머가 나를 알아보고는 나의 존재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천천히 걸어왔다. ~~~~가져왔겠지? 그는 차갑게 물었다.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야. ~~~난 네가 영리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비교적 온화한 어조로 나를 힐책했다. 명예를 존중하는 남자들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는 법이야. 난 결코 네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게 아냐. 이런 니켈 돈 따위는 도로 넣어둬 너도 누군지 잘 알고 있겠지만 그 사람은 값을 깍지 않아. 약속한 값은 정확하게 셈해 줄 거야.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냐. 널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넌 내게 1마르크 35페니히 빚졌어. 언제 갚을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오늘 오전 중에 그 돈을 가질 수 있었어. 난 가난해. 넌 나보다 좋은 옷을 입고 훨씬 맛있는 점심을 먹었겠지. 그렇지만 난 아무 말 않겠어. 좋아. 좀 더 기다려 줄게. 모래 오후에 휘파람을 불 테니까 그땐 모든 계산을 다 하는 거야. ~~~그 휘파람 소리 때문에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산산이 파괴되어 깨져 버렸다.
나는 밖으로 나갔고, 협박하는 그를 좇아 추악하고 증오심을 일으키는 곳으로 끌려가서 끊임없이 변명하고 돈 재촉을 받아야 했다. 그런 일이 수주일 쯤 계속되었지만 내게는 수년, 아니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가끔은 5페니이나 10페니히를 가져갔는데, 그것은 리나가 요리대 위에 올려 둔 시장바구니에서 훔친 돈이었다. ~~~~ 내 일생에 이때처럼 수난을 받는 적도, 이보다 더 큰 절망감과 굴욕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그는 나에게 그를 대신해서 그의 아버지 심부름을 하거나, 10분 동안 외발뛰기, 지나가는 사람의 겉옷에 종잇조각 붙이기 등을 명령했다. 나는 꿈에서도 이런 고통을 당하거나 악마에게 쫓겨 가위에 눌린 채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결국 나는 병이 났다.
그 시절 내 상태는 광기의 연속이었다. 우리 집의 평화로운 생활 속에서 나는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겁먹고 괴로워했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할 수도 없었다. 한순간이나마 불안한 내 처지를 잊은 일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종종 역정을 내며 이유를 물으셨지만 나는 그저 마음을 닫고 말았다.
[카인]
구원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방향에서 왔다. 구원과 더불어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완전 새로운 일이 내 생활 속에 스며들었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 전학 온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부유한 미망인의 아들로 이 도시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린 소년들 사이에서 마치 어른처럼 점ㅈ낳게 행동하는 그는 호감 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들과 함께 어울려 놀지 않았고 싸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내 뒤에서 걷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제각기 제 갈 길로 흩어지자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함께 가도 괜찮겠니?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마에 표적을 달고 다닌 카인의 이야기를 배우는 것 같던데?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니?
난 이렇게 생각해. 카인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이야. 우리들이 배우는 것의 대개가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진실이고 정당하지만 이 모든 것을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는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어. 대개는 다른 면에서 볼 때 더 나은 의미를 갖게 되지. ~~~싸우다가 형제를 죽이는 일은 사실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그러고 나서 불안해하고 소심하게 변해 버린다는 것도 가능해.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을 겁주기 위해 특별한 훈장까지 일부러 달았다면 그건 좀 우습지 않아? 맞아, 그건 그래.
아주 간단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것은 바로 표적이야. 생각해 봐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는 그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치자.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사람이 없고 그의 자식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남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단 말이야. 추측이 아니라, 그들의 이마에 무슨 우편물의 소인 같은 표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게 확실해. 세상에는 그런 일이 흔하지 않으니까.
~~~카인은 강한 사람이고 아벨이 겁쟁이였다니! 카인의 표적이 훈장이라니 그건 불합리한 이야기였으며 하나님을 비방하고 모독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신은 대체 어디에 계셨단 말인가? 신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지 않았고, 아벨을 사랑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나는 데미안이 나를 놀리고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굉장히 영리한 아이였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하지만 날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한 가지 기억이 떠올라 숨이 막히는 듯했다. 지금의 불행이 시작되었던 그 불쾌한 밤에 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한순간이나마 아버지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밝은 세계와 지혜의 이면을 단숨에 꿰뚫어본 것처럼 멸시했었다. 그때의 나는 분명 카인이었고 이마에 달린 표적을 수치스럽게 여기기보다는 훈장을 단 것처럼 으스대며, 나의 죄악과 불행을 통해서 나는 아버지와 같은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도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데미안은 강자와 약자에 대해 왜 그런 이상한 방향에서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카인의 표적에 관한 해석만도 그랬다. ~~~~데미안 자신이야말로 일종의 카인이 아닐까? 만일 그가 자신을 카인의 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그는 카인을 옹호하는 것일까?
다른 학생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에게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데미안의 어머니가 상당히 부자라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라는 소문이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회교도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와 크로머의 관계는 계속되고 있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크로머로부터 성의 광장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물에 젖은 축축한 밤나무 아래에서 떨어지는 잎들을 발로 휘적거리고 있었다. 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로머에게 주려고 과자 두 조각을 가져갔다. 나는 어느 틈엔가 이렇게 구석진 곳에서 오랜 시간 크로머를 기다리는 데 익숙해졌다. ~~~그는 내 갈비뼈를 두어 번 쥐어박고는 기분이 좋은지 낄낄거리며 과자를 빼앗고 나서 내게 축축한 담배를 권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 두겠는데, 다음번엔 누나를 데리고 나와. 큰누나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미처 대답도 못하고 서서 놀란 모습으로,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 난 너의 누나랑 사귀고 싶어. ~~~내겐 새로운 고문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누군가 쾌활하고 힘찬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따라와서는 한쪽 손으로 나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조금 전에 너와 헤어진 애는 누구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비밀을 들키고 말았다는 사실이 무척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비밀은 밝은 곳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 법이다.
아주 나쁜 애야. 악마 같은 녀석이야. 하지만 그 녀석이 이런 걸 알게 되면 안 돼.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넌 그 녀석을 알고 있니? 크로머도 너를 알고? ~~~날 믿어 싱클레어. 넌 언젠가 그 비밀을 내게 이야기하게 될 거야. 절대, 절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너는 그 녀석으로부터 벗어나야 해.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 녀석을 죽여 버려!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난 무척 놀라면서도 통쾌할 거야. 나도 도와줄게. 갑자기 새로운 불안에 휩싸였다. 카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고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자. 우린 틀림없이 그 녀석을 해치우게 될 거야. 때려죽이는 것이 가장 간단하긴 해.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가장 최선인 법이지. 네가 그 녀석의 손아귀에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나는 집으로 왔다.~~~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이제야 나는 이 비밀로 인해 지난 몇 주 동안 얼마나 무섭도록 외로웠던가를 확실히 느꼈다. ~~~~나는 이제야 크로머와의 길고도 괴로운 투쟁을 벌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앞에서 언제나 날카롭게 들려오곤 하던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도록 들리지 않았다. ~~~자유에 대한 불안감은 어느 날 프란츠 크로머를 우연히 만났던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피해 그대로 되돌아서 가버렸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데미안이 내게 나타났다. 그는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싱클레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었어. 크로머도 이젠 널 괴롭히지 않을 걸. 그렇지?
[예수 옆에 매달린 강도]
크로머와의 사건 이후 몇 년 뒤의 일이었다. ~~~프란츠 크로머는 오래전부터 내 삶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와 마주치게 되더라도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내 비극의 또 다른 주인공인 막스 데미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그곳에서 노트를 들고 서서 우리 집 대문 위에 새겨져 잇는 새 모양의 낡은 문장을 그리고 있는 그를 보았다. 나는 창문 커튼 뒤에 숨어 그를 바라보았다. 문장을 향해 있는 그의 예민하고도 차갑고 밝은 얼굴이 놀라웠다. 그것은 어른의 얼굴이었고, 연구자나 예술가의 그것처럼 보였다. 탁월하고 의지에 가득 차 있으며 놀랄 만큼 밝고 차갑고 총명한 눈이었다.
며칠 후 거리에서의 일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우리는 쓰러진 말 주위에 몰려 있었다. 말은 수레에 묶인 채 농부용 마차 앞에 쓰러져 있었다. 무엇인가 애원하는 듯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허공을 향해 헐떡거렸고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 내려 말의 옆구리와 길에 덮인 먼지가 서서히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 나는 데미안을 발견했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맨 뒤쪽에서 지극히 우아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말머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남녀노소의 구분을 넘어서 어쩌면 천 년쯤 되었거나 아니면 식간을 초월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몇 년이 지난 후 비로소 그와 나는 좀 더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데미안은 그의 동급생들과 함께 당시 관습에 따라 교회의 견진성사를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자 다시 소문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그의 동급생들보다 2년이나 늦게 견진성사를 받도록 했다. 그래서 몇 개월간의 견진성사 수업을 받는 동안 그는 나와 동급생이 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 그와는 되도록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너무 많은 소문과 비밀에 싸여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크로머의 사건 이후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채무감이 나로 하여금 그와 어울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교실에 불이 켜져 있던 이른 아침 시간의 일이었다. 신부님은 카인과 아벨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셨다. 나는 그 이야기에 별 주의를 두지 않은 채 졸음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신부님이 소리를 높이면서 카인의 표적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일종의 영감과 경고 같은 메시지를 느꼈다. 시선을 들자 앞쪽 줄에 앉아 반쯤 몸을 돌려 나를 보는 데미안의 얼굴이 보였다. 데미안의 눈이 밝게 빛나며 마치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진지하면서도 냉소적인 눈빛이었다. 데미안은 아주 잠깐 동안 나를 쳐다보았을 뿐이었지만 나는 긴장되어 신부님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는 그가 카인의 표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신부님의 가르침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고, 비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 데미안과 나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상한 것은 우리의 영혼이 다시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고 느끼자 마술처럼 공간적으로도 가까워지는 듯 보였다. 그것이 그의 힘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일 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여러 번 그와 같은 시도를 하고 나의 의지를 집중시키는 노력을 해 보았다. 아주 간절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이루어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신앙심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은 데미안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지만 불신자인 다른 동급생들의 그것과는 종류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 불신자가 몇몇 있긴 했다.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다는 건 가소롭고 인간답지 않은 일이며 삼위일체나 동정녀에게서의 예수 탄생 따위는 웃음거리에 불과한데 아직도 이런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데미안은 성서 이야기와 교의에 대해 더욱 자유롭고 개인적이며 유희적이고 공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나에게 제시한 해석에 나는 언제나 기꺼이 즐겁게 따랐다. 물론 많은 생각들이 나에겐 지나치게 과격했는데 카인에 대한 문제 역시 그랬다. 언젠가는 견진성사 수업 중에 더욱 대담한 견해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선생님은 골고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옛날부터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가 어렸을 적 예수 수난일이 되면 아버지께서 수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때마다 나는 이 고난에 찬 아름답고 창백하고 무시무시하면서도 생명력이 있는 세계, 즉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언덕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신비에 가득찬 세계의 음산하고 거대한 고난의 광채가 경이로운 선율로 내 마음에 가득 차 넘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악투스 트라기쿠스에서 모든 시와 예술적인 표현의 정수를 느끼곤 한다.
수업이 끌날 즈음 데미안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게 말했다. ~~~~~두 명의 강도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언덕 위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다는 건 실로 위풍당당한 일이야. 그런데 그 잔악한 강도에 관한 이야기는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종교적이지 않아? 그는 죄인이고 누가 봐도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던 자인데 이제 와서 그렇게 쉽게 회개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다니 말이야. 무덤을 코앞에 두고서 그 따위 회개가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건 한낱 감상적이고 교화적인 배경을 가진 달콤한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야. 만약 나에게 두 강도 가운데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상대를 한 명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이 눈물을 찔끔거리는 개심자를 택하진 않을거야. 단연코 다른 강도를 택하겠지. 그는 사내답고 개성 있는 자이기 때문이야.
나는 몹시 당황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야기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을 듣자 상상력이나 개성 없이 그저 듣고 읽기만 했다는 걸 깨달았다. 데미안의 이 새로운 견해는 숙명적으로 들려왔고, 그것은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모든 관념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구약이나 신약 속의 신의 모습은 아주 완벽하고 훌륭하지만 그것이 본래 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니란 것이 문제라고 봐. 신이란 고귀하며 마치 아버지와 같이 아름답고도 다감하다는 것은 옳은 소리야! 그러나 세상에는 또 다른 세계도 존재하고 있어. 다른 세계는 전부 악마적인 것으로 취급돼. 즉 세상의 절반은 은폐당하고 묵살되고 있는 거야. 신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찬양하면서도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성생활은 전적으로 묵살되고 악마적인 것, 죄 많은 것으로 단정해버리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나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진 않아. 그렇지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신성시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구분한 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반만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를 말이야.. 우리는 신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를 드려야만 돼. 그래야만 정당해. 그렇지 않다면 내면의 악마까지도 내재하는 신,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 앞에서도 솔직해지는 그런 신을 창조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베아트리체]
나는 친구와 다시 만나지 못한 채 방학이 끝나자마자 oo시로 출발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나와 동행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세세히 돌봐 주었고, 김나지움의 선생이 경영하는 소년 기숙사에 내 거처를 정해 주셨다. ~~~지난 반 년 동안 나는 급격히 자라났다. 후리후리하고 야읜 모습으로 변한 채, 불완전한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가끔 막스 데미안을 몹시 그리워했다.
학생 기숙사에서 나는 귀여움을 받거나 존중 받지 못했다. 처음엔 놀림감이 되었고 다음엔 모두가 나를 멀리했으며 음울한 녀석, 불쾌하고도 별난 녀석으로 취급했다. ~~~~겉으로는 남자답게 세상을 멸시한다는 듯이 고독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속으로 남모를 비애와 절망감에 몸부림쳤다.
11월 초순의 일이었다. 나는 날씨가 어떻든지 사색에 잠겨 정처 없이 산책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걷는 동안 나는 일종의 즐거움과 우울과 염세, 자기 혐오감에 가득 찬 뒤틀린 기쁨을 맛보곤 하였다. 어느 날 안개가 축축이 끼어 있는 해질녘 교외에 있는 공원을 거닐었다. 공원의 넓은 가로수 길은 텅 빈 채 나를 맞았다. 길은 낙엽으로 깊이 파묻혀 있었고 나는 어두운 쾌감을 느끼면서 발로 낙엽을 휘적거렸다. 축축하면서도 씁쓸한 냄새가 공기 속을 떠돌았고 멀리 서 있는 나무들은 안개 속의 유령처럼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서 있었다. ~~~아, 인생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누군가 옆길에서 깃이 달린 외투를 바람에 날리며 내게 다가왔다. 내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가 나를 불렀다. 이봐, 싱클레어. 기숙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알폰스 베크였다. 다른 아이들을 대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언제나 조롱하듯 이야기하며 어른인 척하는 태도를 제외하면 나는 그에게 이렇다 할 나쁜 감정을 품지 않았다.
우리는 곧 교외의 조그만 술집에 마주앉아 다소 어정쩡한 맛의 포도주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까지 멋지게 해치웠다! ~~~나를 천재적인 녀석이라고 한 그의 말은 내 마음속에 감미롭고도 독한 포도주처럼 스며들었다. 세계는 새로운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고 사상은 수백 개의 샘에서 솟구쳤으며 영혼과 불이 나의 내면에서 불타올랐다.
나는 넋을 놓고 베크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멍청히 앉아 있었다. ~~~우리가 가스등을 지나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귀가를 재촉했을 때 나는 생전 처음 취해 있었다. 몹시 괴롭고 기분도 좋지 않았지만 고통 외의 매력과 감미로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반란과 방종이었고 생명력과 정신이었다. ~~~그는 나를 반쯤 떠메다시피 하여 기숙사까지 데리고 왔고, 열려 있는 창문으로 들키지 않고 기숙사 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내면은 이런 상태였다. 사방을 헤매며 세상을 얕잡아 본 자여! 마음속에 가득 찬 자만심으로 테미안의 사상을 공유한 자여! 쓸모없는 인간이며 추잡하고 술에 취하고 더럽고 구역질나며 비열하고 가친 짐승 같고, 추악한 충동의 노예가 되어 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겉으로 보기에 나는 거칠게 타락해 가고 있었다.
최초의 주정은 얼마 되지 않아 뚜 다른 주정으로 이어졌다. 학교에서도 폭주가 성행했고 난행이 속출했는데 나는 그들 가운데 어린 편에 속했다. 그나마 오래 가지 않아 한몫 거드는 정도의 풋내기가 아닌 우두머리이며 샛별 같은 존재, 술집을 거침없이 드나드는 술꾼으로 변모해갔다. 나는 다시 한 번 완전히 어두운 세계, 악마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세계에서 나는 아주 근사한 녀석으로 통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결핍되어 있었다. 그것은 진실한 친구였다.
사감 선생님의 경고 편지를 받고 oo시에 오신 아버지를 예기치 않게 만났을 때 나는 너무 깜짝 놀라 몸에 경련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 겨울이 다 갈 무렵 두 번째로 오셨을 때 이미 나는 냉담하고 무관심해져 있었다. 꾸중을 하고 당부를 하고, 어머니를 상기시켜도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며 만일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불명예스럽고도 모욕적인 퇴학을 당하게 해서 감화원에 집어넣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아버지를 대했다. 아버지가 떠난 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고 내게로 통하는 길도 찾지 못했다. 아주 w마시 동안이었지만 그렇게 된 게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술집에 앉아 지껄여대는 이상하고 아름답지 못한 생각이 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었고, 저항이었다. 나는 내 자신을 망쳐 갔고 때때로 사태를 이런 식으로 파악했다. 만약 세상이 나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더 좋은 자리, 더 가치 있는 일을 맏겨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분명 파멸할 것이다. 그 책임은 마땅히 그들이 져야 한다고 말이다.
지난 늦가을 알폰스 베크와 만났던 그 교외의 공원에 있는 가시나무 울타리가 푸릇푸릇해지며 봄이 시작될 무렵, 나는 우연히 한 소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불쾌한 생각과 걱정으로 혼자 터덜거리며 걷고 있었다. 건강은 나빠지고 돈은 계속 모자랐으며 친구들에게 빌린 액수는 점점 불어났다. ~~~키가 크고 날씬 하며 우아한 차림을 한 그녀는 총명한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첫눈에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한 번도 베아트리체와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내게 성전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고, 나로 하여금 사원의 기도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술집 순례와 밤에 방황하는 버릇ㅇ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다시 홀로 잇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독서를 즐기고 산책을 하게 되었다.
나는 무너져 버린 생활의 폐허 속에서 밝은 세계를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어둠과 악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고 밝은 세계 속에 머물고자 하는 열망으로 신들 앞에 무릎 꿇었다. 내가 영위하고자 하는 밝은 세계는 나의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이미 어머니나 아무런 책임 없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의해 세워진 책임감과 자제력이 요구되는 새로운 헌신의 세계였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는 내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어제까지는 조숙한 풍자꾼이었던 나는 성자가 되려는 희망을 품은 사원의 하인이 되었다. 나는 내 몸에 배어 있던 나쁜 생활 습관을 청산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고, 먹고 마시는 일부터 이야기나 옷차림까지도 여기에 부합하도록 신경 썼다.
새로운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 중 하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국판 베아트리체의 초상이 소녀와 닮지 않았던 게 그림의 시작이었다.
완성된 그림 앞에 앉아 있자니 이상한 감동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신의 초상이거나 신성한 가면과도 같았다. 절반은 남성적이고 절반은 여성적이었으며,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꿈을 꾸는 듯 하면서도 강한 의지가 보였다. ~~~그 얼굴은 확실히 어느 누구와 닮은 듯했지만 누구와 닮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역시 비슷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치 내 이름이라도 부르는 듯 한 그 얼굴은 말할 수 없이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츰 나는 마음속에 눈에 익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한 내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크게 뜬 초록빛이 감도는 눈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을 왼쪽보다 약간 치켜뜨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오른쪽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이 그림이 누구의 얼굴인지를 알게 되었다.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그 무렵 나는 그동안 읽었던 어떤 책보다 더욱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을 한 권 읽었다. 그 이후에도 니체의 책을 제외한다면 그러한 감동을 받았던 책은 거의 없었다. 편지와 금언이 수록되어 잇는 노발리스의 책이었다. 내용의 대부분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구정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을 이끌어 주고 고무시켰다.
막스 데미안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강렬해졌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단 한 번 방학 때 만난 적이 있다. 지금에서야 나는 이 잠깐 동안의 만남을 이 기록에서 숨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수치와 허영심에서 기인했다.
내가 술집에 드나들던 시절의 어느 방학이었다. 나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산책용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옛 모습 그대로, 무시 받을 만한 얼굴을 한 거리의 건달들을 구경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옛 친구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잇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번갯불처럼 프란츠 크로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제발 데미안이 그때의 일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는데! 그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아이 때 일이긴 해도 은혜는 은혜였다.
그는 나의 인사를 기다리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도 되도록 태연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옛날과 똑같은 악수였다. 확 움켜쥐는,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남성적인 악수! 그는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싱클레어, 너 많이 컸구나.
그때는 내게 베아트리체의 초상도 없었으며, 황량한 시기의 한복판에 있었던 시절이었다. 교외로 나가자 나는 그에게 술집에 가자고 제의를 했다. 그가 수락했다. ~~~술을 자주 마시니?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응, 물론. 그 밖에 무슨 할 일이 있었니? ~~~나는 나른한 어조로 대답했다. ~~~~하룻밤 정도 타오르는 횃불 옆에서 도취와 흥분을 맛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나 언제나 그런 식으로 자꾸 술잔을 비워대는 것이 정말 잘하는 것일까? 매일 밤 단골 술집의 술상을 보고 있는 파우스트를 상상할 수 있겠니? 나는 술을 마시며 적의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누구나가 모두 파우스트는 아니니까.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짤막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몹시 마음이 언짢아져서 그대로 혼자 앉아 남은 술을 다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데미안이 이미 술값을 치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것이 나를 더욱 불쾌하게 했다.
나는 데미안을 얼마나 동경했던가! 그러나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나의 손이 미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아마 어디에선가 공부를 계속하고 잇을 터였고, 그가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의 어머니도 우리 도시를 떠났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내가 그린 꿈의 새는 여행을 떠나 나의 친구를 찾아갔다. 그 회답은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내게 왔다. 어느 날 학교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책갈피 사이에 ~~~ 꼿혀 있는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펼쳐 그곳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었다. ~~~온몸과 마음이 쪽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놀란 심정으로 재차 읽어 보는 동안 내 심장은 혹독한 추위를 만난 듯 운명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데미안으로부터 온 회답이었다. ~~~나를 괴롭힌 것은 아브락사스의 정체였다.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읽어 본 적도 없었다.
우리는 폴렌스 박사의 지도로 헤로도토스를 읽었다. 이 강독 수업은 내가 흥미 잇어 하는 극소수의 과목 중 하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의식을 번갯불처럼 내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는 내 곁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분명 아브락사스라고 말하고 있었다. 앞부분은 듣지 못했지만 폴렌스 박사는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는 고대의 교파와 신비적인 교단의 견해를 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듯이 단순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앞서 예로 든 아브락사스의 교의 역시 그렇습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의 주문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대개 야만족들이 믿고 있는 악마의 이름이라고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개괄적으로 이 이름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가진 일종의 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이것을 예전의 일과 연관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 우정의 마지막 시절, 데미안과의 대화로 내겐 친근한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분명히 존경하는 공통의 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신은 단지 인위적으로 구분된 세계의 절반만을 포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공적이고 허용된 밝은 세계였다. 그러나 사람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경해야 하고 그러자면 악마까지도 겸한 새로운 신을 갖거나 아니면 신을 숭배함과 동시에 악마도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데미안은 그때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브락사스야 말로 신인 동시에 악마인, 바로 그 신인 것이다. ~~~나는 아브락사스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고 온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지만 성과는 없었다.
다음해 봄, 나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야 했지만 아직도 어디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내 입술 위에는 콧수염이 자라기 시작했고, 나는 성인이 되었다. ~~~그해 겨울 내내 나는 형언하기 힘든 내적 폭풍우 t고에서 지냈다. ~~~저녁 무렵 거리를 산책하다가 끝내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한밤중까지 헤매고 다닐 때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나의 애인과 마주치리라, 다음 골목 모퉁이에서 그와 만날 수 있으리라, 저 다음 창문에서 그가 나를 부르리라, 하고 생각했다. 때로는 이 모든 것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생각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하기도 했다.
나는 시내를 산책하다가 교외의 조그만 교회에서 울려나오는 오르간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다가 나는 또다시 오르간 소리를 들었다. 바흐의 곡이었다. 나는 교회 앞으로 가 보았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골목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외투 깃을 세우고 교회 옆 길가의 돌아 앉아 귀를 기울였다. ~~~~나는 연주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오르간을 치던 사람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교회 앞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연주자는 젊었으나 적어도 나보다는 좀 더 나이가 많은 듯했고 억세고 체구가 오동통했다. 그는 마치 기분 나쁜 사람처럼 성급한 발걸음으로 힘차게 그곳을 떠났다.
언젠가는 교회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교회에 들어간 적도 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모두 종교적이었고 헌신적이었으며 경건했지만 교회의 신자나 신부들과 달리 중세의 순례자나 탁발승처럼 경건했다.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세계 감정을 향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 그런 경건함이었다.
한번은 교회에서 떠나는 오르간 연주자를 몰래 뒤따라갔다. 그는 시내 변두리에서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곳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정 펠트 모자를 쓴 채 포도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조그만 홀의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집에는 우리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당신은 뭘 스리 기분 나쁘게 사람을 노려보고 있소? 내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 거요? 당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난 당신에 관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당신도 음악광이오? 음악에 미친다는 건 내가 보기엔 구역질나는 짓이오. ~~~나는 벌써 여러 번 교회 밖에서 당신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저는 언제나 도덕적인 것에 짓눌려 괴로웠어요. 잘 표현할 순 없지만, 당신도 신인 동시에 악마인 그런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전 그러한 신이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는 나직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유감스럽지만 저는 그 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요. 단지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랍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당신은 누구요? 저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어디서 아브락사스를 알게 되었소? 우연이지요. 그는 식탁을 쳤다. 포도주 잔이 넘쳐흘렀다. 우연이라니! 이것 보시오. 쓸데없는 소리 작작해요! 아브락사스에 관해서 우연히 알게 되는 법은 없소. 그것을 명심하시오. 내가 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주리다. 난 그에 관해 아는것이 좀 있으니까.
나는 주저 없이 이야기했다. 전 고독했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있었지요. 그때 어린 시절의 친구가 생각났는데 전 그가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세계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새를 그렸어요. 그것을 그에게 보냈지요. 시간이 지나 그것에 대해 까맣게 잊게 되었을 무렵 뜻밖에도 종이쪽지 한 장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어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장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산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그 후 어느 날, 오르간 연주를 듣고 연주자와 함께 걷게 되었을 때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나를 골목에 있는 낡고 관리 되지 않은 오래된 큰 저택으로 데려갔다. ~~~책이 참 많군요. 나는 감탄하여 말했다. ~~~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당신을 그분들에게 소개할 순 없소. 이 집안에서는 내 친구라는 존재가 그리 탐탁지 않은 존재니까 말이오. 나는 소위 탈선한 자식이지요. 아버지는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신부이자 설교가라오. 나는 ~~~신학생이었지만 국가시험 직전에 신성한 신학부를 팽개쳐 버렸소.
나는 집중해서 불을 들여다보았고 꿈과 정적 속에 잠겼으며 연기 속에서 어떤 자태를, 잿더미 속에서 무엇인가의 형상을 보았다. 갑자기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관솔을 불 속에 던져 넣자 작고 가느다란 불꽃이 솟구쳐 올라왔는데 그 속에서 나는 황금빛 머리를 가진 매를 보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의 기이한 현상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모양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진 독특한 매력과 까다롭고도 의미 깊은 언어에 몰두하곤 했다. ~~~~피스토리우스를 방문한 이후 며칠 동안 그때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날 저녁부터 느껴왔던 흥분과 감정의 고양은 훨훨 타오르는 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인해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새로운 경험은 내가 인생의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발견 했던 다른 경험들에 보태어졌다. 어떤 형상을 면밀히 관찰하면, 불합리해 보이며 난잡하고 괴상한 자연 현상에 몰입하는 일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우리들이 이 형상을 만들어 낸 의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그것들이 곧 우리의 기분이며, 우리들 자신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와 자연 사이의 경계가 흔들리고 녹아서 우리들의 망막에 맺히는 형상이 외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내면에서 생겨난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우리가 창조자이며, 어떻게 우리들의 영혼이 세상의 창조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있는가를 이 연습에서만큼 간단하고 쉽게 발견해 낼 수는 없다. 나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가분의 동일 신이다. 만일 외부 세계가 붕괴되면 우리 중 누군가는 그것을 재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산과 강, 나무나 잎, 뿌리와 꽃 등 자연의 모든 형성물의 원형은 우리 속에 이미 형성 되어 있으며, 그 본질은 영원하고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영혼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질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개 사랑의 힘과 창조의 힘으로 느낄 수 있다.
몇 년 후 나는 나의 관찰이 어떤 책에 증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는 벽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크게, 그리고 얼마나 깊은 흥미를 끄는 일인가에 대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일찍이 이야기한 바 있었다. 그는 축축한 벽의 얼룩 앞에서 마치 피스토리우스와 내가 불을 보고 느낀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음번에 우리가 만났을 때 오르간 연주자는 내게 설명했다. ~~~~우리들의 육체가 어류나 그보다 더욱 이전의 생물체까지 소급될 수 있는 발달의 계보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영혼 속에도 이제까지 인간의 영혼 속에 살아왔던 온갖 것들을 지니고 있소.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신들과 악마들은, 그것들이 설령 그리스인이든 중국인들이든 혹은 아프리카 줄루족이든 간에 모든 가능성으로서, 소망으로서, 방편으로서 우리들 내면에 존재하며 또 다른 곳에도 존재하고 있소.
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는 반대 의견을 말했다. 그렇다면 개인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내면에 모든 것이 이미 다 완성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우리는 계속해서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잠깐 피스토리우스는 성급히 소리쳤다. 당신이 단순히 자신의 내면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느냐, 혹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느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일이오! 미친 사람일지라도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사상을 창조할 수도 있고, 헤른후트파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경건한 어린 학생이 그노시스파나 조로아스터파에 나타난 깊은 신화적인 연관을 독창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소. 그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한 그는 한 그루의 나무나 돌, 기껏해야 짐승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이오. 그러나 이 인식의 최초의 불꽃이 한 번 번쩍 빛나기만 해도 그는 인간이 되는 거요.
우리들이 나눈 대화는 대충 이러했다. ~~~나의 내면의 어느 한 지점을 끊임없이 가볍게 망치질했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형성을 도왔고, 내가 허물을 벗고, 껍질을 깨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나는 내 머리를 조금씩 더 높이, 조금씩 더 자유롭게 치켜들었고, 마침내 나의 황금빛 새는 그 아름다운 머리를 산산이 부서진 세계의 껍질 밖으로 내밀었다.
[야곱의 싸움]
내가 이상한 음악가 피스트리우스로부터 들은 아브락사스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에게서 나 자신으로의 길로 한 발자국 내딛는 법을 배운 게 더 중요한 일이다. 당시 나는 열여덟 살의 유난스러운 젊은이였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한 기인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와 존경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내가 하는 말, 나의 꿈, 나의 환상과 생각 속에서 그는 항상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서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해석해 주고, 진지하게 의논했으며, 내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나는 잠들기 전이나 정신을 집중시키려고 할 때 그런 연습을 해. 나는 무엇인가를, 예를 들면 어떤 낱말이나 어떤 사람의 이름 또는 기하의 도형을 상상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 될 수 있는 한 그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어질 때까지 머릿속에서 그려 보려고 애쓰는 거야. 그것이 나의 내면에 가득 차올라 내가 그것에 의해 완전히 채워질 때까지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면 나는 아주 확고해지고 아무것도 나의 이 안정된 상태를 방해하지 못하게 돼.
나의 학창 시절은 끝났다. 나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이 끝나면 대학에 가야 했지만 어떤 학부로 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 학기 동안 철학 수업을 듣기로 했다. 나는 어떤 학과라도 만족했을 것이다.
[에바 부인]
방학 중 나는 몇 해 전에 데미안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에 가 보았다. 어떤 부인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가죽 표지의 앨범 한 권을 찾아와 데미안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나는 데미안의 어머니를 거의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마치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것은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이었다. 내 꿈속의 얼굴이 바로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 후 나는 곧 여행을 떠났다. 이상한 여행이었다. 나는 그녀를 찾아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이삼 주일 후 나는 H 대학에 입학했다. 만사가 나를 실망시켰다. ~~~어느 날 늦은 저녁 나는 가을바람이 부는 시내를 건들거리며 걷고 있었다. ~~~내 뒤에서 두 남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 중 한 명은 체구가 작고 세련된 일본인이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다소 검은 그의 얼굴이 미소를 띠고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다른 s마자가 다시 말을 했다. ~~~나는 이야기하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바로 데미안이었다.
바람이 부는 밤에 나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와 일본인을 뒤 따라가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고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즐겁게 들었다. ~~~교외의 거리 모퉁이에서 일본인은 데미안에게 작별을 고하고 어느 집의 현관문을 열었다. 데미안은 그 길을 되돌아 나왔다. 나는 거리의 한가운데 멈춰 서서 그를 기다렸다.~~~팔에는 가느다란 지팡이를 걸치고 있었다. 발걸음을 전혀 흩트리지 않은 채 그는 내 앞까지 다가와서 모자를 벗고 예전 그대로의 환한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날을 바로 알아보았구나? 물론이지. 확실히 변하기는 했지만 너는 여전히 표적을 달고 있으니까. 표적이라니, 무슨 표적?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옛날에 그것을 카인의 표적이라고 불렀어. 그것이 우리들의 표적이야. 너는 언제나 그것을 지니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너의 친구가 된 거야. 지금은 더욱 뚜렷하게 되었네.
자네 어머니? 어머니도 여기 계셔? 하지만 나를 전혀 모르시지 않니? 아니, 어머니는 너에 대해 잘 알고 계셔. 너를 누구라고 소개 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아마 너를 알아보실 거야. 왜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거야?
인간들은 서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품으로 도망쳐 오는 거야. 즉 신사는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까리, 학자들은 학자들끼리 말아야! 그런데 그들은 왜 두려워할까? 사람은 흔히 자기 자신과 상대가 일치하지 않을 때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내면을 d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자들만의 공동체라니! 그들은 모두 자기 인생의 법칙이 더 이상 오늘날을 살아가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과 자기들이 좇아서 살아가는 것이 로마 시대의 동판법과 같은 낡은 것이라는 것, 그들의 종교도 도덕도 어느 것 하낟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어.
그날 밤 나는 막스 데미안과 작별을 고했던 교외의 정원을 다시 찾았다. ~~~~늙은 가정부가 나를 안내래 주었고 내 외투를 받아 걸었다. ~~~촉촉이 젖어드는 눈으로 나는 나의 그림을 바라보며 내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눈길을 내려뜨렸다. 새의 그림 아래 열린 문 앞에 검은 옷을 입은 키 큰 부인이 서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들을 닮은, 시간과 나이를 초월한, 활기와 의지에 넘친, 그녀의 눈길은 기품 있는 부인이 나를 보며 정답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충족이었고, 그녀의 인사는 귀향을 의미했다. ~~~~싱클레어이군요. 한눈에 알아보았어요. 잘 왔어요!
그녀는 내가 그린 매의 그림을 가리켰다. 당신이 이 그림을 보내왔을 때처럼 데미안이 기뻐한 적이 없었어요.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싱클레어 하루는 데미안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말하더군요. 이마에 표적이 있는 애가 있어요. 그는 틀림없이 내 친구가 될 거예요라고 말이에요. 그애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녀는 문가로 나를 데리고 가서 문을 열고 정원을 가리켰다. 마깥으로 나가면 데미안이 있을 거예요.
이날부터 나는 아들이나 형제처럼 어떤 때는 연인처럼 그 집을 드나들었다. ~~~~나는 흡족하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고 그 현실 속에는 거리와 집, 사람과 시설, 도서관과 강의실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고 전설과 꿈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을 뿐이다. 다수의 사람들과 경계선을 긋듯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에 때라 분리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계에 한 개의 섬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삶의 방식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고립되었던 나는 단지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나는 결단코 행복한 사람들의 잔치나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축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더라도 부러워하거나 향수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차츰 표적을 달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한 냉정에 동조하게 되었다.
표적을 지니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상스럽다든지, 미쳤다든지, 위험하다고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깨달은 자, 혹은 깨닫고 있는 자들이었고 우리의 노력은 점차 완전해지는 깨달음을 위해 집중되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에의 탐구는 그들의 의견이나 이상과 의무, 생활과 행복의 기준을 집단의 그것에 더욱 밀착시키려고 애쓰는 데 있었다. 물론 그곳에도 노력이 있었고, 힘과 위대함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우리들 표적을 지닌 자들은 새롭고 독자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자연의 의지를 제시하는 데 반하여 그들은 현재에 안주하려는 의지를 고집했다.
에바 부인과 데미안과 나를 제외하고도 그 밖의 여러 부류의 탐구자들이 가깝거나 멀거나 간에 우리들의 범주에 속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특이한 길을 걸어가며 각자의 목적을 지향하는 특정한 의견과 의무에 집착했다. 점성술가와 카발라 교도나 톨스토이의 신봉자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섬세하고 수줍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 새로운 교파의 신봉자들, 요가 수련자와 채식주의자들까지 다양했다. 이 모든 사람들과 우리는 각자의 비밀스런 삶의 굼을 존중한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 중에서도 과거 속의 신과 새로운 이상에 대한 인류의 탐구 흔적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치 피스트리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우리와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 언어의 원서를 가져와 번역했고, 고대의 상징물이나 의식의 도해를 보여 주면서 이제까지 인간이 소유했던 이상이란 결국 모두가 무의식적인 영혼의 꿈에서 미래 가능성의 예감을 따랐던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대 세계의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신부터 기독교적인 개종의 여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리의 신들을 섭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교가 고독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고해에서 민족과 민족으로 옮겨 간 종교의 변천을 잘 알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 대한 비평적인 인식 ~~~엄청난 노력으로 강력하고도 우수한 무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극도로 황폐해져 가고 있는 현대 유럽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유럽은 온 세계를 얻었으나 결국 그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잃었다.
표적을 가진 우리들은 미래의 모습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우리들에게 모든 교파와 구원론이란 이미 오래전에 죽어 버려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우리가 유일하게 의무나 운명으로 느꼈던 것은 각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완전히 자기 내면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가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온갖 일에 대해서 스스로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느끼도록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것뿐이다.
무엇이 오게 될지는 짐작할 수 없어. 유럽의 영혼은 오랫동안 쇠사슬에 매어 있던 짐승과 같아. 그것이 해방되었을 때 최초로 행할 행동은 분명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만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만당하고 얽매어 왔던 영혼의 진정한 고난이 온 천하에 드러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지나온 길이나 돌아온 길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날이 오는 거지. 새로운 지도자나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지자로서, 운명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동행하고 그곳에서 있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으로서 필요하게 될 거야. ~~~~그곳에 나타나 함께 동행 할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거야. 그것을 위해 우리는 표적을 달고 있지.
[종말의 시작]
데미안에게는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는 매일 말을 탔다. 나는 종종 그의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다. ~~~에바 부인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타올랐다. ~~~소식 들었어?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데미안은 나의 팔을 꽉 쥔 채 연민에 가득 찬 이상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시작되었어. 물론 너도 러시아와의 긴장 상태를 알고 있었겠지만. 뭐라고? 전쟁이 일어났단 말이야? 나는 그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동원령이 내리면 나는 곧 입대할 거야.
내가 전쟁터로 갔을 때는 거의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많은 상처를 입고 흙에 뒤덮여 백양나무 곁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나는 지하실에 누워 있었고 포탄이 나의 머리 위에서 우르릉거리고 있었다.
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피가 조금씩 흐르는 내 입술 위에 그가 가볍게 입 맞추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다. 붕대를 감아야 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자마자 나는 재빨리 옆의 매트리스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는 일은 몹시 고통스러웠다. 이후에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 역시 내게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열쇠를 발견 했고, 때때로 어두운 거울 속, 운명의 형상이 졸고 있는 그곳, 내 자신의 내면에 완전히 들어서서 어두운 거울 위에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이젠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내 친구이자 지도자인 데미안과 같은 내 자신의 모습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Review]
연말 분위기가 어수선한 시간에 데미안 책을 다시 읽었다. 계엄령 선포와 시민들의 저항이 눈 깜짝할 사이에 평화롭게 지나갔다. 외신들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의심한다. 광화문 모임에는 우리가 지난날 생각했던 최루탄 가스와 경찰 방호벽, 몽둥이가 아닌 촛불 시위로, 문화 공연까지 이루어지는 참 괴기한 저항이 이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모든 일이 생각의 겨를도 없이 진행되는 바람에 아직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두 가지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 단편적인 사고는 생각의 부재이며. 내면의 통찰이 없는 피상적인 겉모습으로 행동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소설 ‘데미안’은 헤세가 젊은 시절 자신의 내면적인 사상을 어떻게 확장했는지에 대한 자전적 성장소설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헤세는 열네 살 때 프란츠 크로머라는 불량소년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며 비열한 악의 정체를 경험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데미안이라는 조숙한 학생의 도움으로 악의 굴레에서 벗어난 헤세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두 개의 세계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에도 ‘데미안’은 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등장하며 헤세가 정신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그를 돕는다.
헤세는 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살인을 저지를 카인에게도 베푼 자비에 대해 선과 악 사이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는 데미안의 말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헤세에게 사물에 대한 더 깊은 사색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동기에서 헤세는 청년기를 지나며 인간의 고독 가운데서 타인을 이해하는 공동체 정신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세상의 유혹과 도덕적 타락에 빠지지 않도록 그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다.
“유럽의 영혼은 오랫동안 쇠사슬에 매어 있던 짐승과 같아. 그것이 해방되었을 때 최초로 행할 행동은 분명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만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만당하고 얽매어 왔던 영혼의 진정한 고난이 온 천하에 드러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지나온 길이나 돌아온 길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본문)
헤세의 이 소설은, 1919년, 세계 1차 세계대전 중 익명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헤세 자신을 가리킨다. 당시 헤세는 이미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전쟁으로 심한 정신적 위기와 가정적으로도 아버지의 죽음, 아내와의 심리적 갈등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이 작품 발표 이후 헤세는 스위스 남부로 이주하여 집필에 전념하였다.
헤세가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철학, 심리학, 시인, 화가, 유명 작가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은 젊은 날 그가 경험한 사물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헤세는 많은 저서를 통해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 끊임없는 관찰과 사색의 깊은 경지를 추구했다. 그 후 헤세는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책에는 헤세가 신학교를 어떻게 포기했는지 그리고 자살을 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헤세는 인생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대하며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뿐 아니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많은 글을 남겼다. 이 소설은 허세가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로, 당시 유럽 사회에서 도덕적 관습에 얽매인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고전이지만 오늘날까지 인생의 혼란한 시기를 지나는 젊은이들에게 내면의 생각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줄거리. 본문)
1. 불량소년 ‘프란츠 크로머’와의 만남.
“내가 열 살쯤 되던 해였다. 나는 이웃의 두 아이와 어울려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키 큰 아이가 다가왔다. 열세 살쯤 되는 힘이 세고 거친 아이로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양복점을 운영했지만 술주정뱅이였고 그의 가족들 모두 평판이 좋지 않았다. 나는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속으로 그를 두려워했으므로 그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2. ‘막스 데미안’으로부터 다가온 구원의 손길 (가인의 표적)
“데미안은 성서 이야기와 교의에 대해 더욱 자유롭고 개인적이며 유희적이고 공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나에게 제시한 해석에 나는 언제나 기꺼이 즐겁게 따랐다. 물론 많은 생각들이 나에겐 지나치게 과격했는데 카인에 대한 문제 역시 그랬다. 언젠가는 견진성사 수업 중에 더욱 대담한 견해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3. ‘알폰스 베크’와의 만남으로 다시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나의 내면은 이런 상태였다. 사방을 헤매며 세상을 얕잡아 본 자여! 마음속에 가득 찬 자만심으로 테미안의 사상을 공유한 자여! 쓸모없는 인간이며 추잡하고 술에 취하고 더럽고 구역질나며 비열하고 가친 짐승 같고, 추악한 충동의 노예가 되어 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4.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남으로 기도자로 돌아섬
“나는 한 번도 베아트리체와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내게 성전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고, 나로 하여금 사원의 기도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술집 순례와 밤에 방황하는 버릇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다시 홀로 잇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독서를 즐기고 산책을 하게 되었다.”
5. 다시 ‘데미안’을 그리워하다
“막스 데미안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강렬해졌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단 한 번 방학 때 만난 적이 있다. 지금에서야 나는 이 잠깐 동안의 만남을 이 기록에서 숨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수치와 허영심에서 기인했다.”
6.. ‘데미안’과 재회 하면서 새 신비주의에 눈 뜨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7. 오르간을 연주하는 ‘피스토리우스’ 성직자의 만남으로 새로운 깨우침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와 존경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내가 하는 말, 나의 꿈, 나의 환상과 생각 속에서 그는 항상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서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해석해 주고, 진지하게 의논했으며, 내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8. ‘데미안’과의 재회(공동체 사랑을 경험)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삶의 방식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고립되었던 나는 단지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나는 결단코 행복한 사람들의 잔치나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축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더라도 부러워하거나 향수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차츰 표적을 달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한 냉정에 동조하게 되었다. ”
9. 마침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삶의 방식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고립되었던 나는 단지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나는 결단코 행복한 사람들의 잔치나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축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더라도 부러워하거나 향수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차츰 표적을 달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한 냉정에 동조하게 되었다.”
Go My Book Revi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