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와 꿈
가스통 바슐라르 1884~1962
[서론] 상상력과 가동성
(1)
많은 심리학적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상상력에 관한 연구들 역시 어원의 조명을 잘못 받아 혼란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라고 늘 주장한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오히려 지각 작용에 의해 받아들이게 된 이미지들을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이미지들의 변화, 즉 이미지들의 예기치 않은 결합이 없다면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상하는 행위 또한 없다. 만일 현존하는 이미지가 어떤 부재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연한 한 이미지가 기발한 이미지들을 풍부하게 이끌어오지 않는다면, 이미지들의 넘치는 폭발을 야기하지 않는다면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지각과 어떤 지각에 대한 추억, 친숙한 기억, 혹은 색채와 형태에 대한 습관 등이 있을 뿐이다. 상상력에 부합되는 근본 단어는 이미지가 아니라 상상적인 것(상상계)이라는 단어다.
어떤 이미지의 가치는 그것이 가지는 상상계의 후광이 얼마나 넓은가에 따라 측정된다. 상상계 덕분에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열려 있으며 경계를 벗어난다. 상상계 덕분에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열려 있으며 경계를 벗어난다. ~~~
상상력은 어떤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책에서 체계적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문학적 상상력, 말로 표현된 상상력, 즉 언어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인간 정신성의 시간적 조직을 형성하고 그 결과 실재로부터는 벗어나는 바로 그러한 상상력을 연구한다면 이 금언 속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다 쉽게 납득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상상적 원리로부터 유리되어 어떤 결정적 형태 속에 고정 되어버리는 그런 이미지는 점차 현재적 지각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된다. 곧 그것은 우리를 꿈꾸게 하고 말하게 하는 대신에 행동하게 만든다. 정체되어 있고 완수된 이미지는 상상력의 날개를 잘라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이미지는 이미지를 갖지 않은 사유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어떤 상상력이 그 어떤 이미지에도 갇히지 않기에 급기야 그것을 이미지를 갖지 않은 상상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로 그런 몽상적 상상력으로부터 우리를 떨어지게 만들어버린다. ~~~
시란 본질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들에 대한 갈망이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 심리를 특징짓는, 새로움에 대한 원소(초)적 요구와 일치한다.
그리하여 이미지 구성에만 몰두하는 기존 상상력의 심리학에 희생 되어버린, 근본적이고 분명하며 누구나 다 인정하는 상상력의 한 가지 특성은 바로 이지의 가동성이다. 다른 많은 영역과 마찬가지로 상상력 영역에서도 구성과 가동성 사이에는 대립이 있다.
(2)
아름다운 시는 아편 혹은 술이다. 그것은 신경 자양제이다. 아름다운 시는 우리 내부에서 역동적 유도를 일으켜야 한다. 진정한 시인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라고 한 폴 발레리의 의미심장한 말에 대해 우리는 그 말이 지닌 정당한 다원성을 부여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불의 시인, 물의 시인, 그리고 대지의 시인은 공기의 시인과 동일한 영감을 전달하지 않는다.
상징적 여행의 의미가 시인들에 따라 그토록 상이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시인들은 풍경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독자를 이끄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주변에서 늘 볼 수 있는 것을 굳이 다른 곳에서 되찾고자 한다. 그들은 일상 삶에 아름다움을 무겁도록 덧입힌다. 싼값으로 사람의 기분을 전환시켜주는 현실적 고장으로의 이러한 여행을 경시하지는 말자. 한 시인에 의해 조명된 현실은 적어도 새로운 조망이라는 독창성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사라지기 쉬운 어떤 뉘앙스를 드러내주기에 우리는 모두 뉘앙스를 하나의 변화로 상상하기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상상력만이 그 뉘앙스들을 볼 수 있으며, 상상력만이 한 색체에서 다른 색체로 여행하는 길목에서 그 뉘앙스들을 포착한다. 과연 이 낡은 세계에서 잘못 보고 넘겨버린 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꽃들의 뉘앙스가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대로 못 본 채 넘겨버린 것이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뉘앙스를 옮겨가는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가진 운동인 것이다. 피어나고 물들어가는 온갖 꽃을 자기 정원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벌써 이미지의 동역학을 계시하는 모델을 수없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진정한 가동성, 즉 상상된 유동주의인 본질적 유동주의는 아무리 실재의 생성을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실재 묘사로는 잘 환기되지 않는다. 상상력의 참된 여행이란 상상계로의 여행, 다름 아닌 상상계 권역 내 여행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로 천국이나 지옥, 또는 아틀란티스나 테바이드의 형태로 문득 나타나는, 상상으로 그리는 고장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 관심사는 그곳으로의 여정일 터인데, 정작 사람들이 우리에게 묘사해주곤 하는 것은 그곳에서의 체류이다. ~~~
단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 많은 도시와 사람들, 또 사물들을 보아야 하며, 동물들을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 어떤 몸짓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라고 릴케는 말하지 않았던가. ~~
[제1장] 공중을 나는 꿈
(1)
공중을 나는 꿈은 유혹하는 유혹자의 꿈이다. 바로 이 테마 위에 사랑과 그에 관한 이미지들을 생산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공중을 나는 꿈이 얼마나 쉽게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꿈 자체가 지속되는 동안 비행의 꿈은 꿈꾸는 자의 지적 이해력에 의해 끊임없이 해설된다. 즉 꿈꾸는 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장황한 이야기에 의해 공중을 나는 꿈은 설명된다. 비행하는 존재는 꿈을 꾸는 중에도 자신이 그 비행을 창안한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이리하여 비행자로서의 명료한 의식이 꿈꾸는 자의 영혼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꿈에 관한 이미지들이 바로 꿈속에서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예증이 되어 줄 것이다. ~~~
꿈속의 비행이 관능적 성격을 갖는다고 정신분석학이 공언하더라도 이제 독자들은 그것(정신분석)이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못함을 우리가 나름대로 증거를 제시하기도 전에 벌써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심리적 상징이 그러하듯 꿈속의 비행 또한 다층적 해석 -정념적 해석, 심미화하는 해석,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2)
어떻게 이성이 꿈에 작용하는가를 보도록 하자.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기능은 꿈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므로, 그중에서도 이성이 어떻게 꿈을 꾸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세기 초엽에 (공중 날기에 대한) 설명 역할을 비행기가 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디에가 이 글을 쓸 당시인 19세기 초엽에는 풍선 기구가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풍성 기구 덕분에, (이어서) 비행기 덕분에 인간의 비행은 이제 더 이상 가당치 않은 일이 아니다. 이러한 비행 수단들은 비행기 꿈들을 결과적으로 확인해줌으로써 비행에 대한 실제적 꿈의 수를 꼭 늘려주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이야기되는 비행에 대한 꿈들의 수를 꼭 늘려주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이야기되는 비행에 대한 꿈들의 수는 늘려준다. ~~~
<인간의 재생과 부활>에 관한 노디에의 시론은 이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즉 밤에 진지하게 꿈을 꾸게 될 때 인간존재는 공중을 나는 체험을 갖기 때문에, 그리고 의식을 가진 인간존재는 오랜 객관적 탐구 끝에 풍선 기구의 실험에 성공했기 때문에, 철학자는 내밀한 꿈과 객관적 실험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발견해내야만 한다는 것이 그 추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연결을 맺어주기 위하여, 이러한 연결을 꿈꾸기 위하여 노디에는 인간을 지속시키고 완성할 부활적존재를 풍선 기구적 특질을 갖춘 형태로 상상한다. 그러한 예변이 지금 우리가 보기에 기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로서는 풍선 기구의 새로움을 체험한 바 없기 때문이다. 그리 우아하지 못한 구체(球體)인 풍선 기구는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서는 낡은 이미지, 무기력한 이미지이며, 너무나 합리화 되어버린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큰 몽상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오브제이다. 그러나 노디에의 글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기구의 시대를 돌이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노디에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참작해두어야만 하는 문학적 재치 부림에 지나지 않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지들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진지한 상상력, 이미지들의 역동성을 순진무구하게 따라가는 어떤 상상력을 즉각 느낄 수 있다. 인간-풍선 기구, 부활하는 인간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그는 부풀어 오른 넓고 강인한 흉곽과 비행선의 골격을 가질 것이며, 발달해가는 신체 기관의 본능이 꿈을 통해 인간에게 가르쳐주기라도 한 듯 자신의 넓은 호흡기 내부를 원하는 대로 진공으로 만들면서, 그리고 발로 대지를 박차면서 날아오를 것이다.
우리에겐 매우 조잡스러워 보이리만큼 인위적인 이런 합리화는 바로 그 점으로 말미암아 꿈속 체험과 현실 체험 사시의 분절을 드러내는 대는 아주 적합한 것이다. 각성 상태의 삶으로 되돌아간 사람은 일상 삶의 개념들로 자기가 꿈 꿈들을 합리화 한다. 그는 꿈속의 이미지들을 어렴풋이 기억해내고 그것들을 각성 상태의 삶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이미 그것들을 변형시키게 된다. 그는 순수 형태하의 꿈은 우리를 완전히 물질적 상상력과 역동적 상상력에 넘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 그 반대로 순수 형태하의 꿈은 우리를 형태적 상상력으로부터 떼어낸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깊은 꿈은 본질적으로 시각의 휴식과 언어적 휴식 현상이다. 불면증은 두 가지 종류로 대별되는 데, 시각적 불면증과 언어적 불면증이 그것이다. 밤과 침묵은 잠을 지키는 두 수호자로서, 잠자기 위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도 말고 더 이상 보지도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원소적인 삶에 의탁해야만, 즉 우리 자신에게 각별한(의미를 가지는)원소의 상상력에 자신을 맡겨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소적 삶은 공식(상투적) 언어라는 회화적 인산들의 물물교환에서 벗어나 있다. 필경 침묵과 밤은 가장 깊은 수면 속에서조차도 완전무결하게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두 존재이리라. 우리는 적어도 몽상적 삶이 형태들의 압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수록, 또한 그것이 우리를 질료와 우리 자신에게 각별한 원소의 삶으로 되돌아가게 할수록 그만큼 더 순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3)
공중을 나는 존재는 자신이 날아다니는 대기마저도 넘어서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공기를 초월하기 위한 에테르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닐까. (에테르는 하늘에 가득 찬 맑고 깨끗한 정기로서 고대인들은 이것을 일반적인 공기의 초월체로 상상했다) 그래서(어떤 궁극적)절대가 자유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완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4)
공기적 현상들은 각별히, 오르기와 (승천적) 상승과 승화에 관한 매우 일반적이면서도 중요한 교훈들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러한 교훈들은 우리가 기꺼이 상승의 심리학이라 명명할 심리학의 근본원리 대열에 놓이게 될 것이다. 상승 방향을 갖는 경우 - 그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공기적(대기로의) 여행에의 초대는 가벼운 상승(승천)의 느낌과 항상 밀접하게 연계된다. 그럴 때 우리는 역동적 상상력을 통해 공기적 현상에 공감함으로써 위무, 경쾌함, 가벼움을 느끼는 것과 정비례로 이미지들의 가동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상승의 삶은 곧 내밀한 실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실재적 수직성이 정신 심리 현상들의 한가운데에 제시될 것이다. 이런 수직성은 공허한 은유가 아니다. 수직성은 질서 원리이며, 연계 법칙이며, 그것을 따라 독특한 감수성의 여러 단계를 체험하게 되는 사다리이다. 궁극적으로 영혼의 삶, 섬세하고도 억제된 모든 감동, 모든 희망, 모든 의념, 미래를 시작하는 모든 정신 도덕적 힘은 (미분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전적으로 수학적인 의미에서 수직적 미분을 보인다. ~~~
물론 낮은 곳을 향한 여행도 있다. 추락은 그 어떤 정신 도덕적 은유가 개입하기 전에 언제라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정신 심리적 현실이다. 이러한 정신 심리적 추락을 시적이며 정신 도덕적인 물리학의 한 부분으로 연구할 수 있다. 정신 심리적 표고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모든 의식에 있어 너무나 직접적인 역동적 소여와 다름없는 전신적 활력은 즉각적으로 하나의 표고가 된다. 만약 활력이 증가한다면 그 즉시 인간은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생의 약동이(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약동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높은 곳을 향한 여행을 통해서이다. 달리 말하자면 고귀함을 향한 길들이 우리 내부에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논증적 승화라는 그 과업 속에서이다. 라몬 고메스 데 라 세르나(스페인 작가)가 말했듯이 사람 속에서는 모든 것이 길이다. 그에 덧붙여 ‘모든 길은 상승을 권유한다’고 말해야겠다. 수직성이 가지는 긍정적 역동성은 너무도 뚜렷해서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추락한다는 경구를 만들어 낼 수 있기까지 하다. 인간이 정녕 인간이라면 수평적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의 휴식과 잠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추락인 것이다. 올라가면서 잠자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한 사람들은 시에 도취된 가운데 공기적인 잠, 셸리적인 잠을 잔다.
(5)
우리는 공중을 나는 꿈에 대해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 연구가 어쩌면) 매우 특수하고 희귀한 체험에서 출발하는 것인 양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바로 이 체험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후러씬 보편적인 것임을, 그리고 적어도 어떤 (사람들의) 정신 심리에 있어서는 그것(공중을 나는 꿈)이 잠에서 깨어난 후의 사유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우리는 그러한 흔적들이 어떤 특정한 시 세계(시학)의 정향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밝힐 것이다. 예컨대 매우 길게 이어지는 이미지들도, 그것에 최후 추진력을 제공한 비행의 꿈을 밝혀내게 되면 그 이미지들이 정확하고 규칙적인 증식을 통해 이뤄진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셰리, 발자크, 릴케와 같은 이들의 매우 다양한 작품에서 취해진 이미지들은 공중을 나는 밤의 꿈에 대한 구체적 심리학이 종종 난해하고 모호하게 보이는 시들 속에 있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밝혀낼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
우리는 2장에서 ‘날개의 시학’을 연구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공기적 상상력이 선호하는 어떤 이미지가 작동함을 보게 될 것이다. 먼저 여러 가지 지적을 한 후 역동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인위적인 이미지와 진실로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구별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저 모방이나 하는 시인과 진실로 상상력의 창조적 힘을 고취하는 시인을 구별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
제 3장은 바로 그러한 은유에 할애될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상상적 추락 체험을 역동적 상상력의 최초 소여로 간주하도록 강요하려 드는 수많은 반론에 대답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할 것이다. 여기서 그 답을 미리 제시해두는데 왜냐하면 상상적 추락은 대지적 상상력을 통해서만 근본적인 은유에 이르게 된다는 우리의 일반 명제를 명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깊은 추락, 시커면 구렁텅이 속으로의 추락, 심연 속으로의 추락은 거의 운명적으로 물에 관한 상상력과, 특히 암흑에 감싸인 대지의 상상력과 관계되는 상상적 추락이다. ~~
고유한 상징성의 숙명에 의해 상승의 동역학에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니체의) 모든 상징을 통합하는 일을 우리는 제5장에서 해야 할 임무로 삼았다. 우리는 그 천재가 얼마나 쉽고 또 자연스럽게 사유를 상상력에 접합시키는지를, 이미지들의 가게로 싸구려 장식들을 찾으러 가는 그런 사유와는 전혀 다른 사유를 어떻게 산출하게 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생략법을 충분히 살린 밀로즈의 표현을 빌어 “위에 있게에 그는 이겨낸다”라고 우리는 니체에 관해 말할 수 잇으리라. ~~
[제1장] 공중을 나는 꿈
(1)
공중을 나는 꿈은 유난히 선명하고 인상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꿈 내용을 털어놓는 것은 외관상 너무나 순진무구한 것이라 그 어떤 검열에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꿈의 분석에 있어서 그것은 많은 경우 가장 빨리 해독되는 표현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행의 꿈은 꿈의 전체적 상황을 신속하게 밝혀준다는 것이다.
비행의 꿈은 아주 다른 두 개의 유형을 갖게 되는데, 가벼운 비행들이 있는가 하면 무거운 비행들도 있다. 기쁜과 고통, 비약과 피곤, 능동성과 수동성, 희망과 회한, 선과 악의 모든 변증법이 바로 이 두 특성을 중심으로 집결된다. 공중을 날며 여행하는 중에 발생하는 온갖 다양한 사건은 이 두 특성 중 의 하나이세 그 연결 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Ran속 체험이 깨어 있는 삶에도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두자.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몽상 속에서 매우 흔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 속에서도 매우 자주 있는 일이다. 각성된 상태에서 꾸는 꿈속에서는 비행의 꿈은 시각적 이미지들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잇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비행하는 존재들에 관한 모든 이미지는 정신분석학이 파악한 획일적인 상징성을 내포하게 된다. ~~~
허버트 스펜서는 열두 명으로 구성된 어느 모임에서 세 명은 살아오면서 계단을 날아 내려오는 꿈을 꾼 적이 있었으며, 그 경험이 주는 현실감이 너무도 선명하고 인상적이어서 깨어난 이후에도 그 꿈을 되풀이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
(2)
몽상적 비행에 대한 심리학적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우리는 샤를 노디에가 남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제 주위에 가득한 온갖 날짐승처럼 날개로 공중을 헤치며 날아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품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풍선 기구와 같은 유연한 힘에 의해 날아오르는 꿈을 그토록 자주 꾸는 연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이성이 꿈에 작용하는가를 보도록 하자.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기능은 꿈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므로, (그중에서도)이성이 어떻게 꿈을 꾸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세기 초엽에(공중 날기에 대한) 설명 역할을 비행기가 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디에가 이 글을 쓸 당시인 19세기 초엽에는 풍선 기구가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풍선 기구 덕분에, (이어서) 비행기 덕분에 인간의 비행은 이제 더 이상 가당치 않은 일이 아니다. ~~~~밤에 진지하게 꿈을 꾸게 될 때 인간존재는 공중을 나는 체험을 갖기 때문에, 그리고 의식을 가진 인간존재는 오랜 객관적 탐구 끝에 풍선 기구의 실험에 성공했기 때문에. 철학자는 내밀한 꿈과 객관적 실험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발견해내야만 한다는 것이 그 추론의 핵심이다.
(3)
가장 천재적이고 가장 심오한 우리 시대의 철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 젊은 시절에 공중에 떠서 몸을 지탱하면서 비행하는 놀라운 능력을 획득했던 꿈을 며칠 동안 계속 꾸고 난 후에 ‘작은 냇물이나 도랑을 지날 때마다 그 꿈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그 인상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라고 나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해블록 엘리스 또한 말하기를 프랑스의 저명한 화가 라파엘리는 꿈속에서 공중을 떠다니는 인상에 자주 사로잡히게 되곤 한다는데, 그 인상이 너무도 뚜렷한 나머지 잠에서 깨어나자 침대 아래로 뛰어내리며 그 체험을 실제 시도하려 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예들은 밤의 삶 속에서, 즉 꿈이라는 놀라운 질적 통일성을 가진 무의식의 삶 속에서 형성된 어떤 확신이 대낮의 삶 속에서 그 확증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을 매우 명백하게 예증해준다. 몽상에 도취한 어떤 영혼들에게 있어 낮은 밤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영혼들을 검토하는 것이 상상력의 역동적 심리를 간파할 수 있는 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상력에 관한 한 심리학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 반드시 꿈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출발할 것과 그럼으로써 이미지들의 형태들을 찾아내기에 앞서 그 이미지들의 진정한 원소와 진정한 운동을 찾아낼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속의 비행을 그 순수한 역동적 양상하에서, 밤의 체험들 속에서 다시 발견하도록 노력할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해야만 하겠다.~~~
꿈속의 비행에서 우리가 다시 땅으로 되돌아온다 할지라도 긎 mr시 또 다른 새로운 추진력이 우리의 공기적 지유를 되돌려준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어떤 힘이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며 또한 우리가 그 힘을 촉발시키는 비결을 알고 있다고 우리는 확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탄력성을 확신하는 만큼 대지로의 귀환은 추락이 아니다. 공중을 나는 꿈을 꾸는 모든 사람은 그러한 탄력성을 잘 알고 있다. ~~
(4)
릴케처럼 성실한 영혼에게 있어 꿈속의(몽상된)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희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실재적 삶과 관계된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오랜 역동적 과거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꿈속 비행은 우리에게 추락 공포 극복을 가르쳐주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가? 꿈속의 비행은 바로 그 행복함 속에 이 근원적 공포에 대한 우리의 극복, 그 첫 성공을 알리는 표지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릴케의 영혼을 위안해줄 수 있는 저 미약하고도 희귀한 위안거리들 중에서 그것은 어찌 각별한 역할을 맡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마루 위에 떨어지는 압정의 너무나 큰 소리, 만물의 추락이 빚는 숙명적 교향악 속으로 어우러지며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내는 끔찍한 소리에 고통 밭던 바로 이 사람은 꿈속에서 두 발에 조그만 날개를 단 존재들을 어찌 감미로운 놀라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겠는가? 꿈속에서는 추락과 비상이 빈번히 연결된다는 것을 제대로 체험한다면 공포가 어떻게 해서 환희로 바뀔 수 있는가를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릴케적 항로 전환인 것이다.
(5)
꿈속의 비행이라는 이러한 밤의 체험은 불면증 치료사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잠을 잘 자는 법만을 우리에게 가르칠까? ~~~우리의 개인적 체험에 의하면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기본 원소(공기 원소)를 되찾아야만 한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우리는 고유한 원소 속에서 잠자야 하는 것이다. 좋은 잠이란 흔들어 달랜 잠,(무언가에) 실려 가는 잠인데, 상상력은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달래지고 실려 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잠 속에서 우리는 특정 우주의 존재자이다. (잠 속에서) 우리는 물에 의해 달래지고,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공기에 의해, 호흡의 리듬을 따르며 공기 속에 실려 간다. 그런 잠은 바로 유년기의 잠이거나, 혹은 적어도 밤의 삶 속에서 여행에의, 무한한 여행에의 초대를 퍽 자주 받게 되는 청년기가 누리는 평온한 잠이다. ~~~
아라비아의 어느 자연과학자는 새를 가벼워진 동물로 생각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신은 이빨, 귀, 심실, 방광, 척추 등과 같은 여러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새가 된 동물의) 몸무게를 가볍게 했다.
(6)
셸리는 온 자연을 사랑해 마지않았으며, 누구보다도 더 훌륭하게 큰 강과 바다를 노래했다. 그의 비극적인 삶은 그를 물의 숙명에 영원히 묶어버렸다. (셸리의 첫 부인이 물에 빠져 죽었을 뿐 아니라 본인도 1822년 라스페치아만에서 익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적 영향이(그에게 있어) 가장 깊은 것으로 우리에게는 보이며, 만일 하나의 시 세계를 정의하기 위하여 하나의 형용사만을 취해야 한다면 셸리의 시는 공기적이라는 점에 사람들은 분명 퍽 수월하게 동의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형용사는 그것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충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셸리가 정녕 물질적으로도 또 역동적으로도 공기적 질료의 시인이라는 r서을 증명해보고자 한다.
그에게서 공기의 여러 존재, 즉 바람, 향기, 빛 같은, 그 형태 없는 존재들은 어떤 직접적 작용을 일으킨다. “ 셰리의 작품에 대해 사색하면 어떤 영혼들이 부드러움의 격렬함에 어떻게 반향하며, 무게를 잴 수 없는 (미세한) 것들의 무게에 그 얼마나 민감하며, 스스로 승화되면서 어떻게 역동화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바람, 빛, 공기, 꽃향기는 나에게 격렬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셸리의 작품에 대해 사색하면 어떤 영혼들이 부드러움의 격렬함에 어떻게 반향하며, 무게를 잴 수 없는 (미세한) 것들의 무게에 그 얼마나 민감하며, 스스로 승화되면서 어떻게 역동화 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상상적인 공중부양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모든 은유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공중 부양이 가지는 심리적 현실성은 고유한 내적 추진력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공기적 정신 심리의 역동적 현실성이다. ~~~
대지적 인간에게는 대지를 떠남과 동시에 모든 것이 흩어지고 소멸되는 반면, 공기적 인간에게는 위로 올라감과 동시에 모든 것이 모여들고 풍부해진다.
공기적이며 공중을 나는 이러한 낭만주의는 대지의 모든 사물에 날개를 달아준다. 신비는 질료로부터 그 질료를 둘러싼 대기로 이행한다. 고립된 존재에 어떤 우주적 삶을 부여하기 위해 모든 것은 협력한다. 서양 오얏이 익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즈음, 나는 태양이 모든 열매를 애무하고, 모든 둥근 것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모든 풍요한 것을 윤나게 하는 것을 보았다. 초록빛 푸른 시냇물은 가벼운 폭포를 이루어 흘러가며 매발톱꽃의 봉긋한 꽃무리들을 흔들어주었다. 푸른 음 하나가 날아올랐다. 송이송이 꽃들은 하늘 속으로 끊임없이 파상의 장식음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셸리를 이해했다. “꿀 같은 이슬이 가득한 한 포기 히야신스 꽃에서처럼 그녀의 입술에선 황홀경 속에서 들려오는 행성의 음악의 쉼표의 부분만큼이나 부드러운 속삭임이 물처럼 방울지며 떨어져 내려 감각들을 정열에 애태우게 한다.” 꽃이 이렇게 속삭일 때, 종 모양의 꽃부리들이 산형화의 꼭대기에서 메아리칠 때 온 대지는 침묵하고 온 하늘은 말을 한다. 대기적 우주는 색채들이 아루는 화음으로 가득 찬다. 그리도 다양한 색채를 띤 아네모네 R초들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채색한다.... 꽃들이 말을 할 때 색채가 음과 향기들에 뒤섞여 들었던 것이다....
(7)
우리가 “체험된 심리적 상승”이 심리학적으로 실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들을 발자크의 여러 작품 속에서 발견해내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컨대 <추방된 사람들>이란 제목을 가진 이야기는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매우 특징적으로 보인다.
“추락체험은 정녕 역동적 상상력의 복부에 존재한다. 중력은 바로 인간의 정신 심리의 법칙인 것이다. 중력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며, 정복해야 할 운명이고, 공기적 기질은 몽상 속에서 중력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예감한다.”(본문)
[제2장] 날개의 시학
(1)
개념화와 달리 몽상은 하나의 사진 건판 위에 온 가족의 모습을 포개어 찍어내는 골턴의(촬영기술)방법을 따라 비슷비슷한 많은 오브제의 이미지들을 써가면서 혼합 양식의 초상화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몽상이 날거나 혹은 헤엄치는 새에게 느닷없는 공감을 느끼는 것은 하늘과 물 위의 다양한 새를 실제로 보아서가 아니다. 비행 운동이 곧바로, 번개처럼 순간적인 추상화 속에서 완전하고 완수된, 전적으로 역동적인 이미지를 낳는 것이다. 이 신속성과 완벽성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미지는 역동적으로 아름답다는데 있다. 미의 추상화는 철학자들의 모든 논변과 무관하다. ~~~
새들이 우리의 상상력에 위대한 도약의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새들이 가진 화려한 색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논지로서 제시하려 한다. 새에서 아름다운 것은 원초적으로 새의 비행이다. 역동적 상상력에 있어서 비행은 으뜸가는 아름다움이다. 새의 깃털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경우는 새가 땅에 내려앉은 경우뿐인데 이 말은 몽상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새가 더 이상 새가 아닌 경우이다. 그러니 비행과 색채를, 운동과 장식물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는 상상적 변증법이 있다는 것을 이제 인정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가질 수 없는 법. 그렇기에 종달새이면서 동시에 공작일 수는 없는 것이다.
공작은 그야말로 지상적인 새이다. 공작은 광물 박물관이다. 우리가 제기한 역설을 끝까지 밀고 가자면 상상력의 영역 속에서 비행은 제 고유한 색채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밝혀야 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 꿈속에서, 또 진실한 시 속에서 날고 있는 상상의 새는 잡색을 띤 존재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빛나는 불길 같은 색조를 띤 물총새는 예외이다. 이 새는 강물 위에 비치는 온갖 반사광을 한 몸에 모아들인 존재일까?)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새는 푸르지 않으면 검다. 즉 새는 날아오르지 않으면 내려앉을 뿐이다.
다채로운 잡색은 파득거린다. 그것은 파득거리는 운동의 색조이다. 이러한 색조는 (인간의)근본적 꿈을 연장하는 강력한 몽상 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나비는 자연 속에서 회화적 효과나 찾으려 드는 그런 시 속에서, 안이한 몽상 속에서 나타날 뿐이다. 비행이 수미일관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그려가는 (영역인)진정한 꿈의 세계에서는 나비란 한갓 엉뚱한 사고일 뿐이다. 나비는 날지 않는다. 그저 팔락댈 뿐이다. 너무 아름답고 또 너무 큰 양 날개는 나비로 하여금 날지 못하게 방해할 뿐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앞 장에서 우리가 도출한 몽상적 가치 부여 작용에 의거하여 모든 날것 중에서 오로지 새만이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원초적 이미지라 일컬어질 수 있는, 우리의 행복한 청춘의 깊은 잠 속에서 체험하게 되는 이미지를 연장하고 현실화한다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시적 세계는 수면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2)
<새들의 세계>라는 제목의 투스넬의 책 첫 페이지부터 우리는 바로 이 새들에 대한 박물학이 사실은 인간의 몽상에 대한 박물학에 주된 흥미를 두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과연 투스넬은 곧장 다음과 같이 밤의 경험을 d야기 한다. 그대가 스무 살이었을 적에 때로는 자는 중에 가벼워진 그대의 육신이 땅을 떠나 허공 속을 떠돌면서 알 수 없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보호된 채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몽상적 비상의 무한한 감미로움을 예찬하며 투스넬은 다음과 같은 말로 밤의 추억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건 바로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현시하는 것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향기 가득한 삶을 향유할 수 잇도록 그가 우리에게 허락해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예감이었다.” 향기 가득한 삶이란 피안에 대한 푸리에주의적인 진정한 조화들을 따라 우리가 완전히 공기적 상태로 돌아갈 때 우리를 맞아줄 그러한 미래적 삶이다.“ 그런 점에서 비행은 우리가 꾸는 꿈들에 대한 추억인 동시에 신이 우리에게 줄 보상에 대한 욕구이다. 투스넬은 말한다. ”새의 운명을 부러워하는 우리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날개를 빌려준다. 왜냐하면 행복의 천계에서는 마치 새가 대기를 가로지르듯 우리 인간 육체도 공간을 가로지를 수 있는 기능을 향유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의 체험이 미리 현실화해주는 이상과 초월을 (투스넬은) 날개의 심리학을 빌려 말하고 있음을 여기서 보게 된다. 이 이상에 의거하면 인간은 일종의 초조(超鳥)가 되어서 “향기 가득한” 힘에 의하여 우리의 (친숙한) 대기 멀리 세계와 시계 사이의 무한한 공간을 가로질러 날아가 그의 진정한 조국인 대기적인 조국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가벼이 떠오를 수 있는 특성을 근본적으로 부여받은 날개는 거의 모든 존재에게 있어 완벽성을 보증하는 최상의 증표이다. 우리 영혼은 열등한 삶에 자신을 얽어매어놓은 육신이라는 포장에서 벗어나 새의 몸체보다 더 가볍고 더 빠른 환희에 찬 어떤 몸으로 육화한다.” 우리는 플라톤과 투스넬을 감히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파이드로스>속에도 날개의 이러한 초월성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날개의 힘은 본성적으로 솟구칠 수 있다는 것, 신이 거하는 저 높은 곳으로 무거운 것을 이끌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네. 육체에 속한 모든 것 중에서 신성한 것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바로 날개들이라네.“ ~~~그리하여 투스넬은 ”나는 날개를 달아주지 않고는 누구도 사랑한적이 없었다“라는 멋진 표현으로 외쳤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밤꾀꼬리 우는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새가 날아오르고자 하는 무한한 욕구를 지녔다는 것을, 자기 양 날개 너머를 사랑하고자 하는 무한한 욕구를 가졌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낮동안에 보겓 hl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에게 그처럼 많은 정신적 특질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젊다는 느낌을 주는 비행인 행복한 비행을 상상력에 의해서 우리가 체험하기 때문이며, 이 몽상적 비상은 흔히 고전적 심리학의 그 모든 가르침과는 달리 순수한 관능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상징,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상징력에 대한 매우 분명한 예를 여기서 음미해볼 수 있다. 벌써 무의식 속에서는 가벼움, 경쾌함, 젊음, 순수함, 부드러움에 관계되는 온갖 인상이 그들이 지닌 상징적 가치를 서로 교환한 것이다. 날개는 상징에 이름을 추후에 부여한 것일 뿐이며, 새는 상징에 존재성을 부여하기 위해 마지막에 온 것일 뿐이다. ~~~
상상력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가치들을 체험한다. 투스넬의 상상력은 공기의 순수함을 날개 달린 운동에 곧바로 연결하고 있다. “가장 섬세하고 가장 순수한 (공기)원소 속에서 살도록 창조된 새는 여태 이루어진 모든 창조의 모든 유형 중에서 당연히 가장 독립적이고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설 <비올레트>에서 마르슬린 데보르드발모르는 말하고 있다. “저기 저 높이 나는 새들이여! 우리 머리 위로 흩어지는 저 자유로운 노래들이 되기 전 그대들은 무엇이었는가? 혹 사로잡혀 있던 어떤 생각이 아니었을까. 신의 한 말씀이 어떤 영혼 속에 강제적으로 갇혀 있다가 마침내 그 영혼이 부서져 그대들에게 날개를 주고 그 영혼도 제 날개들을 되찾은 게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분명 이런 진술들이 허황한 몽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몽상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응수하겠다. 즉 이 몽상들은 꿈꾸는 영혼 속에서, 다시 말하면 밤의 체험을 대낮 동안에도 연장하는 영혼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작된다고 응수하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루스넬은 시인은 아니었다. 그는 밤에 꾸는 꿈을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몽상으로 지속하는 것은 잘 하였지만 몽상에서 시로 연결되는 지속성은 알지 못했다.
새의 영원한 청춘성은 (새에 대한) 정녕 놀라운 가치 부여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저 막연한 인상으로만 남아 있다. 투스넬은 이야기들 속에 나오는 저 아름다운 새, 시간을 잊어버리게 하는 새, 장 레스퀴르가 말하듯 우리를 지상의 선적(線的)인 여행에서 떼어내어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여행, 나이를 더 이상 먹지 않는 여행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그런 새를 연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수렵가이면서 동시에 박제가였던 투스넬이 꿈의 새들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꿈에 의하면 날아가는 도중의 새는 절대 죽음을 맞지 않는다.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새들,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 새들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잘 알고 있는 어떤 필연성에 의해 재빨리 숨을 거두게 된다. 역동적 꿈속에서는 느닷없이 죽음을 맞은 새가 수직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은 결코 없다. 왜냐하면 몽상적 비행이 수직적 하강으로 끝나는 경우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몽상적 비행은 잠 속에서 체험하는 행복의 현상이므로 비극은 없다. 행복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꿈속에서 날아오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에르 에마뉘엘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얼마나 진실한가.
....새 앞에서
비탄은 더 이상 없다. 우울한 비상은 더 이상 없다....
새는 자연을 온통 깨우는, 추켜올리는 힘이다. 노아유 백작 부인의 <정복>에서는 새에 의한 봄의 수직성이라 칭할 수 있을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봄이 다시 왔다. 봄은 온 누리 위로 작게, 가볍게, 초록빛으로, 그리고 꼿꼿하게 태어났다. 숲에서는 끊임없는 새의 외침 소리가, 알알하고도 맑은 봄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이 새는 마치 칼칼한 목청 속에 감미로운 테레빈 나무의 작은 새잎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아직도 땅속에 갇혀 있는 연약한 꽃들을 격려하려는 듯 끊임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이 외침은 히아신스와 황수선화와 튤립을 향해 말한다. ‘좀 더 흔들어 노력해봐. 굳은 흙을 좀 더 뚫어보렴, 솟구쳐보렴, 곧 대기와 하늘을 만날 수 있어. 자 보렴, 내가 그대들의 새란다...”
다음과 같은 대목은 더욱 감미롭다. “상승하는 영혼들이여, 그대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평온햊리지, 절정을 향해 이끌린 백성들이여, 날개들! 새들! 대기의 귀족들이여...”
빅토르 위고의 작품은 새가 곧 하나의 영혼임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얼마든지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노니, 오 바람이여. 겨울을 내쫓아주오.
들판은 향기를 띠고 있으니,
아제르 숲의 새는
우거진 나뭇가지 속의 영혼과 같다.
....
날 오라 부르는 대기 속으로 내가 떠다니는 듯
그리고 마치 내가 새의 깃털로 된 영혼을 지니기라도 한 양.(사탄의 최후:베트파제의 노래)
새의 이미지와 비행의 내적 힘이 갖는 몽상적 동질성은 장 타르디유의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행에서 더 완벽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놀라운 꿈이 나를 감싸네.
나는 새들을 놓아주며 걷는다.
내가 만지는 모든 것, 내 속에 있으니
나는 한계를 다 벗어버렸네.
(3)
영적 존재들에서 육신적 존재로 내려오는 이러한 연계성은 상상력의 심리학에서 무척 큰 진리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지를 마치 그저 막연하고 흐릿한 개념인 양 여기며 상상력의 추이와 개념화의 추이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의 개념을 동원하여 상승이라는 근본적인 이미지를 오염 시키고 있다. 꿈꾸는 자에 있어서는 상상력의 세계 속에서 비행이 새를 지우고 비행의 현실성이 새의 현실을 두 번째 순위로 내려버린다는 점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더구나 우리는 실프에서 새로 이행하는 방향으로 공기의 상상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예들을 제시할 수 있다. (그중에서) 비록 익살스럽긴 하지만 깊이 생각되어 이뤄졌다는 분위기를 가졌기에 깨우쳐주는 바가 많은 예를 하나 제시하려 한다. 비뇔드 마르빌이라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한 수도자는 물리학 교수인 로오라는 데카르트주의자가 베푼 저녁 모임에서, 우주를 배회하는 원소적 정령들, 근본적 질료 속에서 살고 있는 정신들이 그들 본질이 정해주는 바에 따라 각기 새나 물고기, 또 포유류의 육신 속에 들어와 거쳐하게 되었다는 기발한 생각을 토로한다. 동물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바로 이것들이며, 동물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바로 이것들이라는 것이다. 우울하고 몽환적인 실프는 뻐꾸기와 수리부엉이, 올빼미의 기계 속에 자리를 잡는다. 반대로 명랑한 기질을 가진, 짧은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실프는 꾀꼬리나 꾀꼬리과의 새들, 혹은 카나리아산 방울새 t고에 자리를 잡는다. 조작된 생각과 우스개 같은 발상, 꿈같은 생각이 여기에 온통 집결해 있지 않은가. 그 생각들이 표현된 방식으로서의 도치와 유희를 사람들은 너무 쉽게 간과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야말로 상상력이 이성에, 우스개가 지적 활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표지가 아니겠는가. ~~~
쥘 뒤엠에 의하면 가상디는 새의 비행에서 섬세한 유체의 뛰어난 효과를 인정했다지 않은가. 새가 나는 것은 가벼운 공기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수성에 이끌려 그 별을 예찬하러 대기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는 스텔리노라는 이름을 가진 새를 상상해보라. 이 단락을 잘 이해하려면 이 이끌림에 물질성과 정신성이라는 이가성을 부여해야 한다. 스텔리노는 새가 진정 이상화된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대기 중의 가장 순수한 영역을 경배할 자격이 충분한 순수한 새이며, 그가 가진 가벼운 질료에서 나오는 단순한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그런 순수한 새이다.
(4)
그렇지만 날개가 있다 해서 다 새가 아니다. 박쥐는 빅토르 위고의 날개를 중심으로 한 우주론 속에서 무신론의 화신인 저주받은 존재이다. 박쥐는 위계로 볼 때 최하단에 있는데 (차례로) 부엉이, 까마귀, 새매, 독수리보다 아래에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상징적인 날짐승의 문제와 마주치게 되는 일은 어쩌다 있는 드문 경우이고 그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동물화하는 상상력, 즉 동물의 운동 속에서 특수화되는 역동적 상상력의 문제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역동적 상상력이 생물들에게 가치 부여를 하는 기준으로 적용되는 축인 수직선을 강하게 강조해둘 필요만을 느낄 뿐이다. 투스넬의 직관은 이런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투스넬은 <동물들>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언젠가는 죽을 고지식한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 히포그리프(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괴물), 그리핀(반 사자, 반 독수리의 괴물), 용이나 혹은 키메라(사자의 머리와 양의 몸과 용의 꼬리를 한 괴물)에 관련된 전설적인 신화를 깊이 새겨놓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바로 박쥐이다. ” ~~~~잘 역동화된 상상력에서는 날아오르는 모든 것은 존재에 눈을 뜨며 존재에 참여한다. 거꾸로 낮아지는 모든 것은 헛된 그림자들 속으로 흩어지고 허무에 참여한다. 가치 부여가 존재를 결정한다. 바로 여기에 상상계의 한 큰 원칙이 있다.
(5)
이제까지 역동적 상상력이 형태적 상상력에 우선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증명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새의 날개를 인간적 형상에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을 해명해보려고 한다.
(7)
셸리(퍼시 비시 셸리)보다 종달새의 찬연한 비가시성을 환희의 물결로 더 잘 노래한 시인은 없다.(종달새에게). 셸리에게 있어 종달새는 우주적 환희요 “육신을 떠난” 환희이며 드러날 때마다 항상 새로워지는 환희이기에 어떤 새로운 종족의 특사 격으로 보인다.
불처럼 솟아오르는 구름과도 같이 종달새는 푸른 심연에 날개를 달아준다. 셰리적 종달새에 있어서 노래는 비약이고 비약은 노래이며, 그것은 은빛 창궁을 날아가는 빠른 화살이다. 형태와 색의 온갖 변모에 종달새는 도전한다. “사상의 빛 속에 숨은” 시인은 종달새가 “하늘의 모든 교차로에서” 내지르는 화음을 알지 못한다.
그대가 누구인지 우리는 모르네(셸리, 종달새에게)
또한 셸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에게 가르쳐주오. 정령이나 새여,
어떤 감미로운 상념이 그대 것인가를,
사랑의 예찬이나 술의 예찬도
그처럼 신성한 황홀을
숨차게 쏟아내는 것은 나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오.
종달새는 우주적 환희를 표현한다기보다는 그것을 현실화하고 그것을 분출한다.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때 상상력은 관통하듯이 역동화하고 그 어떤 나른함도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으며 그 어떤 권태의 그림자도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제3장] 상상적 추락
(1)
추락에 관한 은유들과 상승에 관한 은유들은 양적으로 비교해 살펴본다면 전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공포증이란 사실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한 변형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의지할 것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꿈에서도 깊은 심연으로 현기증 나게 떨어지는 이 같은 추락을 체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잭 런던(미국의 소설가/심연의 백성/본명:존 그리프트 런던)은 꿈에서 겪는 추락의 드라마를 인류가 지닌 하나의 추억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꿈은 나무 위에서 거주하던 우리의 오랜 선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나무 위에 살았던 만큼 떨어질 위험은 그들에게 상존하는 위협이었다. ~~
추락의 이미지는 수적으로는 허다하지만, 역동적 인상들이라는 측면에서는 처음 생각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전혀 풍요롭지 않다.
(2)
우리로 하여금 고지를 상상적 이미지의 적극적 방향으로 택하게 한 것은 (그 반대 방향인) 추락 이미지의 역동적 빈곤성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를 그렇게 인도한 보다 깊은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역동적 상상력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사실 역동적 상상력은 운동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킨다는 고유 역할을 수행할 때, 또 외부적 현상을 기계운동론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자신을 제한하지 않을 때 상승 방향으로 상상한다. 역동적 상상력은 오로지 진정한 의미의 추진력과 비약, 도약의 이미지들만을, 한 마디로 말해 이미지로부터 산출된 운동이 적극적으로 상상된 힘의 방향을 가지는 그런 이미지들만을 제시한다. 상상적 힘은 언제나 적극적인 작업을 수행한다. 역동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저항의 이미지를 주기에 부적당하다. 진정으로 상상하기 위해선 상상력은 행동해야 하고 또 공격해야 한다. 시선에 포착된 실재적 운동이 역동적 이미지를 오손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원칙적으로 운동을 원한다. 더 정확히, 아주 분명히 말해두지만 역동적 상상력은 의지의 꿈이며, 꿈꾸는 의지인 것이다. ~~~이처럼 역동적 상상력의 순진한 삶이란 중력을 이겨낸 정복의 전설이다. 그 어떤 역동적 은유도 아래를 향해 형성되지 않으며 그 어떤 상상의 꽃도 아래를 향해 피는 법이 없다. 여기에는 손쉬운 낙관주의란 없다. 그렇다 해서 대지의 꿈으로 사는 (또 다른) 상상의 꽃들이 아름답지 않다고 결론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영혼의 밤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 지하 인간의 따뜻하고도 대지적인 가슴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여전히 올라오는 꽃들이다. 높이 오르기는 이미지 산출의 실재적 방향이며 역동적 상상력의 적극적 행위이다.
따라서 수직축을 상승 방향으로 먼저 예민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상상력의 활동을 느끼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생생한 지옥은 파내려드는 지옥이 아니라 타오르고 솟구치는 지옥, (치솟는) 불길의 향성(向性)을 지닌 지옥, 외침의 향성을 지닌 지옥, 그 속에서의 고통이 커져가는 그런 지옥이다. (자책적) 슬픔에만 젖어 있는 고통은 지옥의 미분을 상실하리라. 그런데 커가는 것에 대한 역동적 상상력의 우너칙을 검토하게 되면- 따라서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성장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커가는 것은 언제나 들고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상상계의 삶 속에서 어떤 것들은 고통을 치르고서야 들고 일어나는데 그들은 대지적이다. 한편 자기들이 가진 힘으로 경이로우리만큼 손쉽게 들고 일어나는 것들이 있는데 그들은 공기적인 것이다. 대지와 공기에 관한 상상적 원소들로 커가는 의지에 대한 꿈을 거의 다 묘사할 수 있다. 이미지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커간다.
[제4장] 로베르 드주아유의 작업
(1)
벌써 20여 년 전부터 로베르 드주아유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꾸는 꿈에 고나한 심리학,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승의 심리학의 진정한 예비 단계를 이루는 유도된 몽상이라는 방법론을 다듬어왔다. 드주아유가 셍누 체계는 사실 어떤 dsurn 조사라기보다는 정신의학적 의료 기술에 가깝다. 상승의 몽상을 통해 그것은 억압된 정신 심리들에 돌파구를 제공하고자 하며, 혼란스럽고 무용한 감정들에 행복한 앞날을 마련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바로 그것이 심리 유도의 r장 효과적인 방법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
드주아유가 제시한 방법론의 정수는 꿈꾸는 주체에게 상승적 몽상 상태의 습관을 잡아주는 데 있다. 그와 같은 방법은 무의식적인 이미지들에 어떤 특정한 운동성을 부여하는 데 적합한 선명한 이미지들을 연계 짓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런 선명한 이미지들이 무리를 이름으로서 승화의 축은 강화되고, 차츰 환자는 그런 승화의 축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드주아유의 방법론에 따라 훈련을 받은 사람은 점진적으로 공기적 상상력의 수직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또한 그 수직선이 삶의 선임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상적 선들이야말로 참된 삶의 선, 가장 훼파되기 어려운 그런 선이라고 믿는다.
상상력과 의지는 동일한 심층적 힘의 양면이다.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은 제대로 입지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의지를 밝혀주는 상상력에 상상하려는 의지, 상상하는 것을 체험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합된다. 세부 사항에 있어서까지 이미지들을 질서 있게 제시함으로써 (상상할 줄 아는)사람은 내적 일관성이 있는 행위들을 결정짓게 된다.
드주아유에 의해 제안된 이미지가 그리는 선들을 따라감으로써 주체는 선명하고 행복하며 기민한 승화의 습관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유도된, 깨어 있는 상태에서 꾸는 꿈은 무질서하며 때로는 신경을 쇠약하게 만드는 동요 속에 놓인 몽상적 힘을 활용하여 우선 삶이 제 고유한 이미지들 속에서 꾸준하게 이어지도록 해주고, 마침내는 행위와 감정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뚜렷한 의식을 가진 삶이 자리 잡도록 돕기에 이른다.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열기가 운동으로 변형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드주아유의 방법론에는 몽상적 에너지로부터 정신 도덕적 에너지로의 변형이 있다고 말한다 해도 그의 생각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2)
어떤 무의식적 콤플렉스에 의해 억압된 존재에게 있어서 드주아유의 방법은 고전적 정신분석학에서 시행하는 것과 같은 장애 제거의 수단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종의 시동을 걸어 준다. ~~~드주아유의 정신분석학은 승화를 위한 상승의 길들을 준비함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감수성의 선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승화를 최대한으로 실현해준다. 고전적 정신분석학은 인격의 초기 형성 단계에서 생긴 장애들을 분석한다. 고전적 정신분석학은 과거에 충족되지 못한 욕망 주위에서 고착화된 것을 축소시켜야 한다. 반면 정신 종합 요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드주아유의 정신분석학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격 형성을 위한 종합적 조건들을 만들어주고자 노력한다. 그럼으로써 인격에 정서적 새로움이 추가되는데, 우리가 보기에 상상력의 고유한 기능이나 다름없는 이 새로움은 그 자체만으로 잘못 형성된 과거를 종종 교정하기도 한다.
(3)
‘당신이 가진 걱정거리들을 떨쳐버리십시오‘라는 말은 정신과 의사가 영혼이 동요된 사람에게 주기 마련인 첫 번째 조언일 것이다. 그러나 드주아유는 그런 추상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극도로 단순한 그런 추상화 대신 드주아유는 ’당신의 걱정거리들을 (빗자루로) 쓸어내십시오‘라는 극도로 단순한 상상력(상상 작용)을 제안할 것이다. 그러나 말(言)의 왕국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말이 전하는)동작을 체험하고, 이미지들을 눈으로 보고, 그 이미지들의 삶을 추적하라. 그러니까 “쓸어내는 비결”을 상상력에 제공해야 한다. 무척이나 단조로운 일을 앞에 둔 겸허한 청소부와 다름없는 호모파베르(연장을 가지고 일하는 인간)가 되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은 조금씩 그의 꿈에, 그의 몽상의 리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쓸어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근심거리인가 아니면 소심증인가? 그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완전히 똑같은 비질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 비질 사이에는 치밀성과 결단성의 변증 관계가 작용하고 있음을 당신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당신 영혼을 맥없이 만드는 것이 혹시 단지 빛바랜 사랑의 장미들일 뿐인가? 그렇다면 느린 동작으로 일을 하면서, 이미 종말을 고한 꿈에 대한 의식을 가져라. 종말을 고하는 당신의 수심은 얼마나 멋지게 끝을 맺는가! 당신의 과거는 (이제) 얼마나 잘 흘러가는가! 오래지 않아 임무는 끝나, 당신은 고요하고 약간 투명하며 허정하고 자유로운, 명상에 잠긴 영혼으로 숨 쉬게 될 것이다. ~~~
드주아유는 넝마주의 동작 역시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비질하는 사람의 동작보다 더 분석적이다. 그것은 빗자루로 쓸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형태를 알 수 없는 온갖 근심, 말로 표현 할 수도 없고 표현되지도 않는 온갖 불안보다는 조금 더 뚜렷하게 자각되어 있는 근심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추천되는 방법이다. 뚜렷한 이유가 있는 어떤 근심에 사로잡힌 주체를 향해 드주아유는 극서을 다른 모든 근심과 함께 넝마주이의 자루 속에, 등 뒤의 자루 속에 넣어버리라고. 요컨대 무시해버리기로 작정한 그것을 등 뒤로 던져 버리는 매우 표현적이고 효과적인 손짓으로 집어넣으라고 충고한다.
그런 동작은 헛되이 가장된 것일 뿐이며, 존재는 그보다 더 깊고 그보다 더 비밀스러운 어떤 영역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정하기로 결심하지 못하는 정신 심리들, 이해하기 쉬운 간곡한 권고에도 쇠귀에 경 읽기 식인 정신 심리들을 우리가 마주하고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우리는 오직 비유적 표현성을 담은(이미지화된) 행동에서 출발함으로써만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극히 간단한 이미지들과의 일치 속에서 형성된 어떤 행동 심리는 응집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신뢰하는 우리는 해방의 몸짓을 그들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된 동작과 상상된 동작이 번갈아 교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r서이다. 만일 정신분석 치료에 강하게 저항하는 주체가 드주아유 같은 의사에 의해 제안된 동작들을 가장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드유아유의 방법은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상상력은 정신심리적 존재로 하여금 최대의 통일성을 갖게 하는 기능이며, 이러한 상상력 속에서 그 주체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통일성의 우너리를 갖게 된다. 상상력은 특히 정서적인 삶을 지배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정서적인 삶은 진정으로 이미지를 갈망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감정은 일련의 정서적 이미지들이 있을 때 활력을 얻게 되는데, 이 이미지들은 규범적이어서 정신 도덕에 입각한 삶을 확립하고자 한다. 메말라버린 마음에 이미지들을 제공하는 것은 항상 유익한 일이다.
(5)
우리는 논지 전개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유도된 상승의 꿈이 갖는 한 가지 특성을 별도로 제쳐두었으나, 이제 그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사실 드주아유의 방법론은 색청(음을 어떠한 자극으로서 부여하였을 때 본래의 청각 이외에 색채 감각이 이에 준하여 일어나는 일. 공감각 중에서 가장 많은 형인데. 가령 음악에 관해서는 대개 저음에서는 어두운 색, 고음에서는 밝은 색이 나타난다)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이 쓴 표현을 써서 말하자면 일종의 색 상승을 존중하고 잇다. 꿈이 우리를 높이 데려다놓는 산꼭대기에는 푸른빛이, 때로는 황금빛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몽상가는 흔히 혼자서 어떠한 암시도 받지 않고서도 상상적 상승을 체험하면서 빛을 실체적 양상으로 인지하게 되는 밝은 어떤 곳에 이르게 된다. ~~~
어떤 꿈들에서는 푸른빛을 띤 공기 속으로의 상승과 황금빛 공기 속으로의 상승을 구분해낼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의 색채적 생성에 따라서 푸른 황금빛 상승과 황금빛 푸른 상승을 구별해야만 할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색채는 양감으로 느껴지고, 행복감은 존재 전체에 깊숙이 스며든다. ~~~
이러한 총체적 빛은 대상물들을 차츰차츰 감싸면서 그것들을 용해시킨다. 그리하여 그 빛은 윤곽을 이루는 정확한 선을 사라지게 하여 회화적인 것을 지워버리는 대신 광체를 복돋워 살려낸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사람의 꿈에서, (진부한) 시인이 읊어댄 심리학적인 온갖 잡동사니 장식물을 제거해 준다. 그리하여 그것은 명상에 잠긴 존재에게 고요한 통일성을 부여하게 된다. 공기적 존재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바로 그 빛 속에서, 그 높은 곳 위에서, 로베르 드주아유 작업의 특징일 고요함의 물리학이 성립된다. 영혼의 고영은 영혼의 고요함과 병행한다. 빛과 (영혼의) 고양 속에서 역동적 통일성이 이루어진다. 다음과 같은 반대 방향의 역동적 이미지를 명상함으로써 이러한 시적 통일성을 대조적으로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심연은 동요된 어둠이다.”
(6)
드주아유는 저서의 마지막 서너 장을 정신감응 현상들과 독심술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검토하는데 바치고 있다. 만일 하나의 상상적 상승을 두 정신 심리가 함께 체험할 수 있다면 그들은 이미지와 사념전달에 아마 한결 예민해질 것이다. 공기적 상상력의 생명 축 위에 자리 잡음으로써, 수직 상승 운동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의 선적 계열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감정 일치의 이중적 근거 - 독심술은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에 승화를 향한 생성 중에 있는 엑스터시 도중에 이루어진다 - 를 얻게 된다. 이 사념 전달은 “긴장하는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시각적 이미지 - 그것은 매우 잘 만들어져야 하며, 전달자는 가능하다면 어떤 정서적 상태를 전적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절대 방심 없이 자신의 주의를 그것(이미지)에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 의 형태로 나타내는 사념의 내면적 표상의 결과이다” 라고 드주아유는 말한다.
상상력이 진정 인간 사념을 형성하는 힘이라면 사념전달은 이미 일치된 두 상상력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상승적 상상력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규칙적이며, 가장 지속력 있는 일치들 중의 하나를 야기한다. 따라서 바로 그런 상승적 상상력이 “사념전달”을 용이하게 한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이러한 사념전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드주아유는 그러한 현상들 앞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불확실한 상태에 유일하게 걸맞은 접근 방법을 적용했다. 즉 그는 서로 다른 두 정신이 동일한 사념에 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했다. 그런데 만일 그 두 정신이 상상적 상승 훈련을 함으로써 사념전달에 대한 스스로 준비를 갖추고자 한다면 그 가능성은 괄목할 만큼 증가한다는 결과가 그의 수많은 실험으로부터 얻어졌다. ~~~
상승의 꿈은 우리를 공기적 시에 보다 더 민감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확장적인 시, 조금은 지나치게 꿈꾸는 듯하며 대지의 경치에서 떠나버리는 조금 흐릿하고 아련한 시에 대한 (사람들의) 경멸은 늘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시적 신비론에서 보다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시적 신비론을 정의할 수 있었다.
(7)
밀로즈의 <스토르주에께 보내는 서한>의 마지막 다섯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자. “1914년 12월 14일 밤 열한 시경, 꼬박 밤을 지세우며 기도문을 외우고 그날의 성서 구절을 묵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는 가장 뜻밖의 어떤 변화가 내 전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 그러나 조금도 놀라지 않고 - 느꼈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는 몰랐던 능력, 즉 공간을 가로질러 자유롭게 오를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주어졌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서 곧이어 푸르스름한 안개로 뒤덮여 형언할 수 없이 아스라하고 부드러운 어느 거대한 정상 가까이에 와 있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 스스로 움직여 위로 오른다는 수고는 그 순간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산이 대지에서 자신의 뿌리를 뽑아내면서 상상할 수 없이 높은 곳으로, 아득하고 고요하며 거대한 번개들이 고랑들을 파놓은 지대로 순식간에 나를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보시다시피 이 역동적 상상력은 워낙 강력한 나머지, 고양되는 우주로 표현된다. 세계는 위로 솟구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밀로즈는 상상력의 왕국 속에서 상대성의 물리학을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는 사람들이 일반 상대성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종의 일반 상상력을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로서는 상상 주체의 변모가 일어날 때 (비로소)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체험된 이미지의 차원에서 볼 때 객체와 주체의 상관성은 전적이다. 그것들(객체와 주체)을 구분한다는 것은 상상력의 통일성을 알지 못하는 소행이며, 체험된 시의 특권을 저버리는 일이다. “그때 완벽한 부동성이, 절대적인 부동성이 지고의 완성, 궁극적인 평화, 모든 정신 활동의 완전한 정지, 궁극적 리듬의 초인간적 실현에 관련된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내게 전해주면서 태양과 구름을 엄습하였다.”
[제5장] 니체와 상승적 정신 심리
[제6장] 푸른 하늘
(1)
하늘의 푸르름이라는 이미지가 갖는 다양한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할 때 하늘의 푸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물질적 상상력의 온갖 유형이 물, 불, 대지 그리고 공기라는 근본적 요소에 따라 도출됨을 보여줄 긴 연구를 요구할 것이다. ~~
우선 부동의 하늘에서 구름이 아주 조금 끼기만 해도 동요되어 흘러가는 유체를 보게 되는 시인들이 있다. 또한 푸른 하늘을 마치 거대한 불꽃인양 체험하는 자들이 있는데, 예컨대 노아유 백작 부인은 그것을 불타는 푸르름이라 말한다.(한편) 하늘을 견고해진 푸르름으로, 채색된 궁륭으로 우러르는 이들이 있으니, 역시 노아유 백작 부인은 “단단하고도 굳건한 창공”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끝으로 하늘의 푸르름이 지니는 공기적 본성에 진실로 참여하는 시인들이 있다. ~~~
푸르다라는 단어는 가리키기는 하지만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푸른 하늘이라는 이미지가 제기하는 문제는 시인과 화가에게 있어서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푸른 하늘이 작가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시적 오브제라면 그것은 은유 속에서만 활기를 띠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하늘의)색깔을 풀어 설명할 필요가 없고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그 색깔을 꿈꾸도록 해야 한다. 푸른 하늘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그것을 물질화시키지 않고는 몽상화 시킬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물질화 과정 속에서 그것은 너무 지나치게 물질화되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너무 단단하고, 너무 두드러지고, 너무 강렬하고, 너무 번쩍이는 그런 푸른 하늘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은 왕왕 우리를 너무 뚫어지게 응시하게 된다. 영혼으로 하여금 원초적 질료의 삶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과다한 질료와 지나친 단단함을 부여해버린다.정녕 공기적인 영혼에게 있어서 하늘의 푸르름은 그저 숨결 같은 조성 밖에는 갖고 있지 않은데도, 마치 낭랑한 소리를 내는 수정처럼 “진동해 울리도록” 하늘의ㅐ 푸르름을 조성해버린다. 바로 그런 식으로 노아유 백작 부인은 “오늘 푸른 천궁은 너무나 장렬하여 오래 바라보면 그 하늘은 눈을 멀게 하고, 탁탁 소리 내며 타는 듯도 하고, 또 소용돌이 친다.
[제7장] 별자리들
(2)
조르주 상드 작품들 중 많은 대목에서 별 가득한 밤하늘을 마주한 몽상은 일종의 천문학 강의로 전락해버리고 있는데 그 현학적인 취미가 웃음을 자아낼 정도이다. ~~~
이처럼 우리가 보기에 문학적 이미지가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우리 상상력의 역동성을 따라가며 그것을 잘 옮겨내는 일인 것 같다. 고립적인 별 하나보다는 별자리 하나를 역동적으로 이울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상상력은 길게 끌기와 속도 늦추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다른 상상력보다 특히 밤의 질료에 대한 상상력은 완만한 느림을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을 재촉하고 이미지조차 읽을 겨를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문학이란 얼마나 그릇된 것이랴. 그런 문학은 독서라면 마땅히 일깨워야 할 자연스러운 꿈의 여운 속에서 이미지들을 연장시켜볼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3)
별자리들이 우리에게 주는 상상적 역동성의 교훈을 잘 숙고해보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일종의 느릿함의 절대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별자리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이미 운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운행 중인 모습은 결코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베르그손주의 철학자라면 의당 그렇게 말할 것이다. 별 가득한 하늘은 자연계의 가동적인 것들 중에서 가장 느릿하다. 느릿함이라는 질서 속에서 그것은 제 1의 동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느릿함은 부드럽고도 고요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것은 기이한 느낌을, 곧 온전히 공기적인 가벼움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무의식적 일치의 대상이다. 느릿함의 이미지는 삶의 장중함에 관한 이미지들과 합류한다. 르네 베르텔로의 언급과도 같다. “의식에서의 제의적 움직임이 보여주는 장엄한 느릿함은 천체의 운행에 늘 비교되어왔다.”
모리스 드 게랭의 산문시 <여제관>이 지닌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매력의 대부분도 천상 별자리의 그 부동의 운행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처럼 우리에겐 느껴진다. 산 정상에 오른 인간은 공기적 생명력 속에서 생기를 띠게 된다는 감탄스러운 다음 대목을 기억하자. “나는 불멸의 존재들의 발만이 밟는 바 있는 산의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갔네. 그들 중 물결치는 산 정산 위로 흔들림 없는 걸음을 내딛으며 산 능선들을 섭렵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는 자들이 더러 있는 법. 그같이 높이 다다라 나는 고요와 수면이라는, 밤이 내리는 선물을 얻었네. 그러나 그 휴식은 바람의 흐름 속에 실려 날아가는, 바람의 친구인 새들의 휴식과도 같았네.....”이 꿈꾸는 여인은 “숲 꼭대기로 내려오는 하 가녀린 숨결에도 살며시 열리는” 영혼 덕분에, 잠 속에서도 “바람의 손길”을 받아 기꺼워하는 저 높이 매달린 나뭇잎들의 생명으로 (가득한 채) 자고 있는 듯이 보인다.
높은 곳에서 공기적인 진정한 잠을 자고 있는 이 여인은 주피터의 사랑을 받아 신의 호의를 입어 하늘에 올라간 칼리스토의 신화를 다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주피터는 그녀를 숲에서 떼어내 별들과 결합시킴으로써 다시 헤어 나올 수 없는 휴식 속으로 그녀의 숙명을 인도하였다. 그녀는 어두운 하늘 깊은 곳에 거처를 얻었다.... 하늘은 그녀 주위로 정녕 태고의 그늘을 둘러쳐주었고, 하늘이 여태 간직하고 있는 생의 원칙들을 그녀에게 들이마시도록 해주었다..... 영원한 도취로 속속들이 가득 찬 칼리스토는 극점 위로 기울어진 채 있었으며 성좌들은 전체 운행 질서에 따라 흐르며 대양을 향하여 기울어져갔다. 이런 밤 내내, 나는 산의 정산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게랭의 시 속에서 이미지가 가지는 모든 생명력은 역동적 상상력에 속해 있다. 그때 이 시에 나타난 별자리는 두 눈을 감고서 만나는 이미지이며, 느릿하고 고요한 천상의 운동, 생성도 중지도 없는 운동, 운명의 모든 충격과도 무관하며 온갖 목적의 유혹에도 무심한 그런 운동에 관한 순수한 이미지인 것이다. 관조에 잠긴 꿈꾸는 자는 자기 내면으로부터 생기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격정도 충돌도 없는 규칙적인 시간을 살기를 배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밤의 시간이다. 이 이미지 안에서 꿈과 운동자는 우리에게 그들 상호 간의 시간적 일치의 증거를 보여준다. 수많은 임무로 점철된 대낮의 시간, 숨 가쁜 행동들 속에 흩어져버리고 잃어버린 시간, 육신으로 습관적으로 산 시간은 그저 헛된 것임이 드러난다. (반면) 고요한 밤중에 꿈꾸는 자는 휴식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경이로운 피륙을 발견한다.
(5)
고즈넉하게 반짝이는 별빛은 더할 나위 없이 항존적이고 또 더할 나위 없이 규칙적으로 거듭되는 몽상들 중의 하나를 일깨우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시선에 관한 몽상이다. 그에 관한 모든 양상을 단 하나의 법칙으로 요약할 수 있으니, 상상력의 왕국에서는 반짝이는 모든 것은 시선이다. 친근하게 너나들이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는 너무나 크고, 관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비밀스러운 속내 이야기가 되기에, 슬픔과 욕망 속에서 열정적인 시선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친근한 시선, 자애심 가득한 시선, 혹은 사랑의 시선을 보내준다. 이때 별은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듯이 보인다. 별은 저 멀리 무한 속에 잠겨 있을 뿐이라고 아무리 이성이 되뇌어도 소용없으니, 내밀함의 꿈이 그 별을 우리의 가슴에 가까이 데려다준다. 밤은 우리를 대지에서는 떼어놓지만 밤은 우리에게 대기와 친화적인 꿈들은 되살려 준다.
[제8장] 구름들
(1)
구름은 가장 몽상적인 시적 대상물들 중의 하나이다. 구름은 대낮에도 몽상의 대상이 된다. 구름은 쉽고 덧없는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몽상에 잠긴 사람은 한 순간 구름 속에 있다가, 실증주의적인 다른 이들에게서 은근히 조롱을 당하고선 땅으로 내려오게 된다. ~~~
이 몽상이 가지는 직접적 특성은, 자주 언급되어 온 것처럼 형태 유희가 용이하다는 점에 있다. 구름은 게으르게 반죽하는 이를 위한 상상적 질료이다. 구름은 마치 제 스스로 모습을 잡아가는 가벼운 솜뭉치처럼 꿈꾸어진다. 몽상은 이미 집행되었거나 집행 중인 명령을 내리면서 그 현상을 지휘한다. - 아이라면 흔히 하는 일이다. 길어지는 구름을 향해 커다란 코끼리야! 코를 길게 해보렴 하고 아이가 말하면 구름은 복종하지 않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구름은 온갖 종류의 가벼운 솜털, 갖가지 하얀 깃털, 그 모든 순진한 날개를 불러온다. 실 잦는 여인의 꿈은 그녀가 자아올리는 실처럼 하늘까지 이르도록 풀려간다. <구름을 잦는 여인>이라는 조르주 상드의 콩트를 다시 읽어보면 꿈꾸며 물레질하는 여인이 간직한 비밀과 희망은 하늘의 햇빛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리며 비춰 들게 하는 구름만큼이나 섬세한 직물을 짜는 데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단누치오는 이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발전시켰다.
“황금 베틀 북인 양, 섬세한 초승달이 스쳐가는 섬세한 씨실들,
저 마지막 구름들.
하늘의 베틀 북은 고요한 작업을 수행하니 때로 몸을 감추다가
때로 그 진귀한 섬유 올 사이로 다시 반짝인다.
고요히, 사념에 잠긴 여인은 허공의 그 북을 따라간다. 그 북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그리도 맑은 눈을 하고서 - 그래 인생보다 더 먼 어딘가를 바라보며, 헛되게도!“
(2)
“새가 있기에 구름에서 사람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라고 엘뤼아르는 말한다. 그것은 새의 선적 비행에 둥굴게 구르듯 창공을 흘러가는 (구름의)흐름과, 기포를 지으며 오르는 비상, 또 가벼운 기포의 둥근 형태를 더한다는 조건하에서 그러하다. 역동성 속에서의 지속이 부동적 존재들의 비연속성을 대신한다. 사물들은 부동적일 때 서로 더 구별되며 (인식) 주체에게 더 낯설게 보인다.
(3)
상상적 삶 속에서 역동적 상상력이 가지는 역할을 부인하려는 자에게는 무거운 구름, 가벼운 구름, 우리를 내리누르는 구름과 하늘 높은 곳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구름에 대해 설명을 좀 해보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그에 대한 반박으로)충분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변증법 속에서 “모든 것이 내겐 구름이니 나는 그 때문에 죽어가네”라는 쉬페르비엘의 말을 우리는 거듭 새길 수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서두에 있는 첫 번째 산문시를 새길 수 있으리라.
- 저어, 기이한 이방인이여, 그대는 그럼 대관절 무엇을 사랑하시오?
- 나는 구름을 사랑한다오.... 흘러가는 구름.... 저기.... 저 놀라운 구름을!
어떤 묘사 없이도 곧바로 우리를 매혹해 끌어당기는 구름이 있는가 하면, 다른 구름은 우리를 낙담시킨다. <말렌느 공주>에 나오는, 범죄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폭풍 속 구름이 예시하듯이, 구름이 저주받은 성을 “지하실에서부터 고미다락까지” 뒤흔들어놓기 위해 천둥까지 내려 보내야 할 필요는 없다. 한 조각 검은 구름만으로도 온 세상 위로 불행을 내리누르기에 충분하다.
낮게 드리운 하늘이 낳는 숨 막히는 듯한 중압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낮다는 개념과 무겁다는 개념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상상력의 참여는 그보다 더 내밀한 것이어서 무거운 구름은 마치 하늘이 걸린 질병인 양 느껴진다. 몽상가를 쓰러뜨리는 질병, 그 때문에 몽상가가 죽기까지 하는 그런 병처럼.
무겁고도 낮게 깔린 구름의 질병, 그것의 상상적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름의 상상력이 갖는 진정 활ㄷ오적인 기능과 연관지어보아야 한다. 긍정적이며 (능동적)인 상상적 모습 속에서 보자면 구름의 상상력이 가지는 기능은 바로 상승에의 초대이다. 즉 정상적인 몽상은, 저 푸른 하늘 높은 곳에서 분해됨으로써 가장 높은 경지의 승화에까지 이르고야 마는 어떤 질료적 상승인 양 구름을 따라 오른다. 진정한 구름은, 작은 구름 조각들은 고공에서 와해된다. 그런 작은 구름이 아래로 떨어짐으로써 사라진다고 상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작은 구름 가벼운 구름은 가장 한결같고 또 가장 확실한 상승 테마이다. 그것은 승화에의 영원한 충고이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텔의 서>에서 작은 구름은 성모에게 아뢴다. “제가 사라진다면 그건 엄청나게 확대된 어떤 삶 속으로, 평화와 거룩한 열락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랍니다. ”
[제 9장] 성운
(1)
꿈은 저녁나절 품게 되는 우주발생론이다. 밤마다 몽상가는 우주를 다시 빚기 시작한다. 낮 동안의 온갖 염려 따위에서 벗어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독이 지닌 모든 힘을 몽상에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주를 빚을 줄 아는 고유한 기능을 몽상에 복원시키곤 한다. 그는 밀로즈의 말이 얼마나 w니실된가를 느낀다. “그야말로 온 우주가 우리 몸을 관류한다.” ~~~
“하늘의 강가에 자란 풀들이 가을바람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면서 “하늘의 강 위로 밤배가 노 젓는 소리를” 듣는 그런 “하늘의 강”을 노래한 많은 일본 시를 그는 해설한다. 그러면서 그는 상투적인 합리화와는 반대 방향으로, 그렇기에 비합리화라고 해야 할 어떤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은하수를 수억 항성의 빛들로도 심연을 다 밝힐 수 없는 저 우주의 무시무시한 고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은하수를... 그래, 하늘의 강으로 여긴다. 나는 그것이 반짝이며 흘러가는 떨림을 보며, 그 기슭 가까이 떠도는 구름 조각을 본다.... 그래, 이제 나는 안다. 내리는 이슬은 목동자리의 노에서 튀겨진 물이 방울져 내리는 것임을.” ~~
[제 10장] 공기 나무
(1)
식물과의 친교에서 체험된 상상적 생명력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려면 책을 따로 한 권 써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해 흥미로운 변증 관계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주제들이 있는데, 우선 초원과 숲, 풀과 나무, 덤불과 총림, 녹엽과 가시, 덩굴과 그루터기, 꽃잎과 과일이라는 각 쌍의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한 존재 내에서 뿌리, 줄기, 잎이라는 주제들이 제기될 수 있으며, 꽃이 피거나 지는 계절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생성이라는 주제가 있고, 끝으로 밀과 올리브, 장미와 떡갈나무, 각별히 포도나무와 결부된 힘의 주제들이 있다. 지금 열거한 근본적 이미지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시도되지 않는 한, 문학 상상력에 대한 심리학은 하나의 학문이 되기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갖추지 못하리라. ~~~
식물에 대한 몽상은 가장 느리면서도 가장 평온하고 또 가장 평온하게 하는 꿈이다. 우리에게 정원이며 초원, 강둑길과 숲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원초적 행복을 다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식물은 행복했던 몽상의 추억들을 성실하게 간직하고 있다. 봄이면 식물은 그것을 매번 되살려준다. 그리고 그대 대한 보답인 양 우리는 몽상으로 식물에게 더 큰 성장, 더 아름다운 꽃, 인간적인 꽃을 부여하는 것 같다. “숲의 나무들이여, 그대들은 식물로서의 고유한 신비 속에 잠긴 채 나를 피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대들을 키운것은 바로 나일지니....”
그러나 꿈의 식물학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시는 잘못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베껴지고 또 베껴져서 무기력해진 이미지들이 꽃의 상상력을 별로 만족시키지도 못한 채 문학작품들 곳곳에 출현하고 있다. 잘못된 이미지들은 묘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묘사를 무겁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박학한 시굴지를 수중에 갖고서라면 손쉽게 써내려갈 수 있는 멋진 대목인 파라두(졸라의 작품<무레 신부의 과오>에 나오는 숲) 속에서 이러한 과잉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한 송이 꽃을 그 이름으로 지칭하는 친밀한 태도는 오히려 몽상을 흩뜨려놓는 듯하다.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꽃도 그 이름을 부르기에 앞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꽃 이름을 혹 잘못 댄다 해도 별 상관 없다. 꿈을 꿀 때 꽃 이름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게 오히려 놀라운 일이리라.
(2)
니체적 에너지론에 바쳐진 장에서 우리는 상상력에 있어서 소나무는 정녕 역동적 꿈의 진정한 축을 이룬다는 사실을 이미 제시한 바 있다. 역동화된 위대한 몽상가라면 누구나 이 수직적(수직화된) 이미지, 수직화는 이미지의 덕을 입는다. 쭉 뻗은 나무는 대지적 생명력을 푸른 하늘로 싣고 오르는 분명한 힘이다. 데 구베르나티스는 이런 수직성의 가치를 잘 살린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하고 있다. “코부르크 근처 아호른에 마녀가 내뿜은 무서운 바람이 성당의 종탑을 꺾어놓았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사실을 두고 놀려댔다. 고향 마을이 겪은 이 수모를 씻기 위하여 한 목동이 나서서 커다란 줄을(종탑과 사람들이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소나무 사이에)매고서 간절히 주문을 외며 주술을 행한 끝에 종탑을 일으켜 세워놓기에 이르렀다.” (꺾어진 종탑처럼)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 있는 몽상가에게 “자, 어서 나처럼 곧바로 일어나 몸을 일으켜 세우라니까”라고 말하는 소나무의 역동적 교훈을 어떻게 이보다 더 잘 수용할 수 있겠는가?
나무는 무척 다양한 요소를 결집시키고 또 조직한다. 클로텔에 의하면 “뿌리들이 공동의 힘으로 땅에 밀착하고, 연약하고 예민한 잎맥에 이르기까지 가늘어지기도 하는 수많은 다양한 가지가 바로 그 잎맥을 통해 공기와 빛 속에서 도움을 얻으면서 몸짓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자신의 행위를, 즉 자신의 몸체를 이룰 조건을 성립시켜가고 있는 동안에“ 소나무는 ”힘껏 높이 솟아오른다.“ 나무의 몸짓, 본질적으로 수직적인 행위, ”공기적이며 공중 높이 걸린“ 특성을 이보다 더 압축적으로 잘 표현해낼 수 없으리라. 나무는 너무나 올곧아 그는 대기를 평정하기까지 한다. ~~
또 한편으로는 불의 상상력이든 물의 상상력이든 대지의 상상력이든 공기의 상상력이든 더없이 다양한 상상력이 그들이 즐겨 다루는 테마들을 (나무들의) 이 수직적 삶에서 거듭 누릴 수 잇을 것이다. 혹자는 쇼펜하우어처럼 소나무의 지하에서의 삶을 꿈꿀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소나무의 침엽과 바람이 짖어내는 노기 띤 마찰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식물 생명에서 물의 힘이 거두는 승리를 힘차게 느끼기도 할 것이니, 이들은 수액이 올라오는 것을 “듣는다“.
(3)
나무들은 너무나 많고 모습이 서로 다른 가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 은밀히, 서서히, 그러나 분명 거역할 수 없이 솟아오르는 것! 가벼움의 정복, 공중에 떠 있는 것의, 공기에 가벼이 떨리는 잎들의 산출! 역동적 상상력이 사랑하므로 항상 위로 곧바르며 결코 드러눕지 않는 존재여! 전형화의typifique 이유로 자연계에서는 나무만이 인간과 더불어 수직적이다. 나무는 영웅적인 올곧음의 항구한 모델이다. “이 소나무들은 정말이지 에픽테토스(고대 그리스 후기의 노예 출신 스토아학파 철학자) 같지 않은가... 깡마른 노예 같은 이 나무들이 얼마나 맹렬한 삶을 보여주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 슬픈 모습 속에서 자신의 운명에 만족한 듯이 보이지 않는가!”
풀과 나무 사이에서 식물적 상상력의 근본적 변증법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이 수직성의 역동성이다. 건초를 준비하는 계절에 피어나는 산형화가 아무리 똑바로 서 있다 하더라도 큰 들판에서 보면 그것은 수평으로 펼쳐진 선을 형성한다. 꽃이 활짝 폈을 때의 산형화는 어느 여름 아침 부드러이 물결치는 녹색 바다의 거품처럼 보인다. 역동적 상상력으로 볼 때 오로지 나무만이 확고히, 수직적 향수(언제나 수직적이라는 뜻)를 견지한다.
(4)
그러나 상상적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잘 느끼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너무나 엯러적으로 보이겠지만, 그 힘이 가장 덜 맹렬할 때, 한층 부드럽게 고양될 때 가장 순수하게 작동하는 단계에서 그것을 파악하는 일이다. ~~~다음과 같은 릴케의 글을 다시 음미해보자. “평소 습관대로 책을 낀 채 오가다가 그는 어느 순간 몸을 기댈 곳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것은 어깨 높이 정도에서 갈라져 있는 관목 갈래였으며, 너무나도 쾌적하게 자신의 몸이 떠받쳐지는 것을 느낀 나머지 그는 책도 읽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인 명상에 잠겨 자연에 완전히 박혀 있었다.” ~~~“그건 뭐랄까, 거의 느낄 수조차 없으리만큼 가녀린 진동이 나무속에서부터 그에게로 전해져온 것과 같았다..... 그는 이보다 더 부드러운 움직임ㄴ에 의해 고무되어본 적이 여태 한 번도 없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의 육신은 뭐랄까 하나의 영혼인양(조심스레) 다루어졌으며8, (그 육신은 이제) 신체적 조건이 가지는 통상적 분명함 속에서라면 전혀 느끼지 못하였을 정도로 미미한 그런 영향력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같았다. ~~~”
나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혼란스러운 복합적 힘이 내재하고 있지만 이제 곧바로 서 있으려 애쓰는 존재이다.
역동적 상상력이 공기적 꿈들을 꾸기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것은 곧이어 이 확실한 수직성 속에서 정렬된다. 이 같은 유도를 받지 못할 때 독자는 이미지들을 진정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는데, 그러면(그런 독자들에게는) 릴케의 이 대목은 빈약하고 무력한 것으로 남는다. 반대로 역동적 상상력의 교훈을 따를 때 릴케의 이 대목은 무엇보다도 운동 이미지라는 것, 식물처럼 상징하는 운동을 시사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5)
높이 올라앉은 이라는 말이 왜 꼭 야유조의 어휘여야 할까? (라퐁텐의 우화 중 유명한 까마귀와 여우 편 서두를 보면 까마귀 나리가 치즈 조각을 부리에 문 채 나무 위에 높이 올라앉은 채 라는 표현으로 곤경에 빠진 우스꽝스러운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까마귀처럼 검은 법복을 입은 특권계급을 풍자하려는 의도가 담긴 이 대목에 사용된 이래 이 단어에는 전통적으로 야유조의 효과가 따라붙고 있다) 그런데도 수탉은 종탑 꼭대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돌로 된 그 거대한 나무 위에서 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부동의 그 높은 탑 꼭대기에 그는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딱딱한 꼭대기는 완전히 공기적인 것은 아니다. 역동적 상상력은 높은 곳에선 모든 것이 건들거리길 요구한다. 높이 올라앉은 몽상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에서 상상계로 넘어가면서 나무 꼭대기에 관한 상상력에서 흔들거리는 운동의 상상력으로 전이를 허락해주는 역동적 몽상의 한 유형을 우리는 여기서 제시하고자 한다.
장파울의 <거인>에서 친숙하면서도 긍정적 체험으로 제시된, 높이 올라앉은 몽상에 관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오월이 되면 그는 종종 마치 푸른 잎의 진열장처럼 보이는 가지들을 자랑하는 거대한 사과나무의 꼭대기를 자기 보금자리로 삼고서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하게 요동치며 흔들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차지하고 있는 높은 나무 꼭대기는 가끔 회오리바람에 사로잡혀 목장의 신선한 풀 위로 어루만지듯 드러눕기도 하다가 힘차게 다시 들어 올려져 구름 속의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에게는 이 나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듯, 또 그 뿌리는 지옥의 변경에 가닿아 있는 듯 느껴졌다. ~~”
높이 올라앉은 몽상에 우리는 높은 꼭대기에 있는 새 둥지의 이미지, 땅에 놓여 있는 새 둥지라면 가지기 마련인 따뜻한 온기를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새 둥지의 이미지를 근접 비교해 볼 수 있다.
(6)
이처럼 나무는 수직적 삶에 대한 심리학을 성립시켜줄 다양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나무는 때로는 공기적 몽상가를 이끌며 환기를 촉구하는 단순한 한 선이다. <발레 지방의 사행시>에서 릴케는 수직 도면을 이룰 핵심 선을 이렇게 그어놓는다.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포플러는
기지개 켜며 펼쳐지는 풍성한 녹색 초원의
저 느릿함에 제 수직성을 대립한다.“
나무가 고립되어 있을수록 그 나무를 관조할 때 갖게 되는 (관조) 수직적 활동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고립되어 홀로 서 있는 나무는 들판이나 고원에서 마주치게 되는 유일한 수직적 운명처럼 보인다.
“정녕 저 홀로
...
그는 저 장대하고 지고한 제 생명력을 부여한다
들판에.“
(7)
나무가 흔들리고 다시 고요해지는 것을 그린 모든 이미지에서 단순한 시적 애니미즘의 발현만 본다면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문학평론가들은 각별한 이미지를 가질 때에만 의미를 갖게 되는 시적 애니미즘을 일반론으로 너무 자주 내세운다. 시인은 실제 꿈의 원천에, 또 이미지화하여 나타난 삶의 원칙 그 자체에 의거할 줄 알아야만 한다. 그런 시인을 뒤따르면 원초적 이미지는 수적으로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무가 그중의 하나이다. 밑동과 가지들로 이루어진 나무는 일련의 꿈의 전형이다. 예를 들어오슬오슬한 시월의 들판에서 감자 덩굴의 마른 잎을 태울 때 피어오르는 연기가 나무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꿈꾸어본 적이 없는 자 누구랴? 불길의 솟구침이나, 탁탁 소리 내며 화려한 불꽃을 일으키고 있는 마른 장작을 주목하는 대신, 보라, 덤불, 줄기, 처음 솟아나는 가지들, 이어 하늘을 향한 높은 잎새들, 그리고 조용돌이 연기를. 연기는 천천히 풀리며 저녁 하늘로 오른다. 그것은 온통 푸르고 또 회색을 띤 채 가벼이 솟구쳐 오르는 비물질적인 나무가 아니겠는가.
(8)
위대한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천천히 살아가도록 두는 데 익숙해지고 또 자연스러운 몽상을 따르는 데 익숙해지게 되면 우리는 특정 신화 간의 연계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제11장] 바람
(1)
격렬한 바람은 도처에 있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없는 분노요, 스스로 태어나고 또 태어나 뒤집힌다. 바람은 위협하고 외치지만 먼지를 만나야만 형태를 가지게 되니, 그렇게 가시화된 바람은 보잘것없는 비참으로 변해버린다. 바람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인 참여 속에서만 상상력에 제 모든 힘을 발휘하는 것이어서, 바람에 대한 형상화된 이미지는 오히려 하찮은 모습을 바람에 부여할 뿐이다.
야코프 뵈메의 작품 속에서는 분노가 불 속에, 혹은 담즙 에 있다는 표현들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고, 그 외에도, 하늘의 진노는 “별들이 진노하는 자방”에서 형성된다고 본 몽상가가 남긴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 ~~
데카르트 같은 차분한 지식인에 의해 상상된 소용돌이도 있지만, 블레이크 같은 이의 진노하며 창조적인 소용돌이에 역동적 상상력을 통해 참여함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미지는 미미하게 시작한다. “유리젠의 아들들은 거기에서도 일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우나너던 호수 경계선 위로 테오터먼의 풍차들이 보인다.” 테오터먼의 풍차들이라는 이미지 앞에 우리는 멈추지 말기로 하자. 풍차들이란 창조적 힘(진노의 바람)을 “부르릉거리게” 하기 위해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역동적 상상력이 준 교훈들을 따름으로써 형태 영역에서는 애매하게 남아 있을 뿐인 위의 이미지를 설명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이 테오터먼의 풍차들을 막 이야기하자마자 소용돌이 바람이 하늘을 장악하여 휘젓기 때문이다. 상상계 영역에서는 풍차가 바람을 돌리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역전을 거부하는 독자는 몽상의 원칙을 어기는 셈이다. 그런 독자는 현실이야 물론 이해하겠지만 창조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창조는 상상되어야 한다. 그런데 상상계의 근본 법칙을 모르고서야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풍차를 통해 가동되기 시작하는 상상력은 이제 온 우주 속으로 확대되는데, 블레이크의 말마따나 “별 빛나는 밤의 허공, 대지의 심연과 동굴"이 소용돌이 바람에 휩싸인다. ”이 풍차들은 대양이요, 구름이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는 파도이다. 여기서 별들이 탄생하며 모든 사물의 씨앗이 심어진다. 그리고 또 여기서 태양과 달은 그들의 결정적 목적지를 지정받는다.“ 우주를 발생시키는 소용돌이 바람, 창조적 폭풍, 진노와 창조의 바람은 기하학적 행동 속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의 증여자로 파악되고 있다. 이제는 그 무엇도 저 소용돌이치는 운동을 멈출 수 없다. 역동적 상상력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활기를 띠고 그 무엇도 멈추지 않는다. 운동이 존재를 창조하며 소용돌이치는 대기는 별들을 창조하고, 외침은 이미지를 주고, 말과 생각을 준다.
세계는 분노에 의해 하나의 도전인 양 창조된다. 분노는 역동적 존재를 낳는다. 분노는 시작하는 행위이다. 어떤 행동이 아무리ㅏ 조심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리 은밀하게 굴려고 들어도, 그 행동은 먼저 진노라는 작은 문지방을 넘어야 한다. 분노라는 일종의 매염제 없이는 그 어떤 인상도 우리 존재에 박혀 들지 못하니, 분노는 적극적 인상을 확정해준다.
(2)
바람은 흥분하기도 하고 소침해지기도 한다. 바람은 울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바람은 격정에서 낙담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좌충우돌하고 무용한 바람의 성격 자체가 기진한 우울과는 매우 다른, 안절부절못하는 우울에 대한 이미지를 줄 수 있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한 대목에서 이 뉘앙스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회한처럼, 아직 형태를 갖지 못한 피조물의 초조함처럼, 추억으로 가득하고 예감으로 부풀어 찢어진 영혼과 무용한 날개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4)
셸리와 더불어 파괴적이면서도 고무적인 바람의 이중적 열정을 거듭 체험하는 일보다 부드러움인 동시에 격렬함이요. 순수함인 동시에 착란인 바람의 이가성을 더 잘 드러낼 길이 어디 있겠는가?
“오, 세찬 서풍이여, 너 가을의 숨결이여.
---
온 사방으로 너를 몰아세우는 야생적 영혼이여
오, 파괴자이며 격려자인 너, 들으라, 오 들으라!
오, 저항할 수 없는 너!
내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공간을 가로지르는 네 방랑의 벗,
네 천상의 속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미친 짓만 같으니
나는 결코 발버둥 치지 않으리.
슬플 때 그러하듯, 너에게 결코 간청하지 않으리니,
오! 파도처럼, 한 잎 나뭇잎처럼, 구름 한 조각인 양 나를 들어 올려다오.
나는 삶의 가시 위에 내려앉으니, 나는 피를 흘린다!
너무나 무거운 저 시간의 무게가 마비시키고 꺾어놓았구나.
제동 걸 수 없고 빠르고 당당한 너를 너무나 닮은 한 존재를.
나를 너의 비파로 삼아다오, 나로 하여금 숲에서 노래하게 해다오!
그리하여 네 낙엽 떨어지듯 내 잎도 떨어지리니!
네 힘찬 조화의 외침은
숲에서 깊은 가을의 노래를 끌어내듯 나에게서도 그 노래를 터져 나오게 하리니.
너무나 슬프면서도 감미로워라. 타오르는 영혼이여.
나의 영혼이 되어다오! 나 자신이 되어다오. 오, 오연한 그대.“
[제12장] 소리 없는 낭독
[결론 1부] 문학 이미지
[결론 2부] 기계론적 운동론과 역동론적 철학
[Review]
파스칼은 인간이 갈대처럼 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할 수 있어서 존엄하다고 말했다. 생각은 이미지를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연결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상상은 생각과 조금 다르다. 상상(상상력)은 힘이다. 어떤 방향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새"를 생각할 때 "날개를 가진 척추동물"로 정의하지만, 상상은 새를 보며 "상승", "자유", "하늘에 대한 동경"을 느끼고 그 이미지를 확장한다.
바슐라르는 이 책에서 상승하는 상상력을 ‘역동적 상상력’이라고 정의 하며, 인간이 단순히 세계를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 더 높이 존재하고자 꿈꾸는 존재라고 보았다.
“추락체험은 정녕 역동적 상상력의 복부에 존재한다. 중력은 바로 인간의 정신 심리의 법칙인 것이다. 중력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며, 정복해야 할 운명이고, 공기적 기질은 몽상 속에서 중력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예감한다.”(본문)
이 책은 철학적이지만 시적인 감흥을 불러오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단순한 이미지를 관찰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바꾸는 역동적인 힘 곧 “절망보다 희망을 향하는 마음”, “무기력보다 도전을 향하는 마음”, “폐쇄보다 개방을 향하는 마음”, “무거움보다 가벼움을 향하는 마음”을 얻게 된다.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꿈에 대한 인간의 공통된 심리분석(공감, 정서적 전염, 집단 리듬 동조 등)도 흥미롭고, 새의 비행, 하늘, 바람, 날아오름, 밤의 고요 속 상승감과 같은 현상학적 이미지들이 어떻게 인간 정신을 위로 끌어올리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문학 비평가, 시인으로 프랑스 현대 사상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저자는 특히 시적 이미지와 상상력에 관한 연구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은 책으로 문학인 특히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인간은 단순히 세계를 지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상상력의 힘으로 가치화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가치화의 가장 원초적 형태 중 하나가 바로 "상승"이라는 점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사람들은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라고 늘 주장한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오히려 지각 작용에 의해 받아들이게 된 이미지들을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아름다운 시는 아편 혹은 술이다. 그것은 신경 자양제이다. 아름다운 시는 우리 내부에서 역동적 유도를 일으켜야 한다.”
“단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 많은 도시와 사람들, 또 사물들을 보아야 하며, 동물들을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 어떤 몸짓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라고 릴케는 말하지 않았던가.”
“대지적 인간에게는 대지를 떠남과 동시에 모든 것이 흩어지고 소멸되는 반면, 공기적 인간에게는 위로 올라감과 동시에 모든 것이 모여들고 풍부해진다. ”
“한 송이 꽃을 그 이름으로 지칭하는 친밀한 태도는 오히려 몽상을 흩뜨려놓는 듯하다.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꽃도 그 이름을 부르기에 앞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꽃 이름을 혹 잘못 댄다 해도 별 상관없다. 꿈을 꿀 때 꽃 이름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게 오히려 놀라운 일이리라.”
“은밀히, 서서히, 그러나 분명 거역할 수 없이 솟아오르는 것! 가벼움의 정복, 공중에 떠 있는 것의, 공기에 가벼이 떨리는 잎들의 산출! 역동적 상상력이 사랑하므로 항상 위로 곧바르며 결코 드러눕지 않는 존재여!”
“격렬한 바람은 도처에 있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없는 분노요, 스스로 태어나고 또 태어나 뒤집힌다. 바람은 위협하고 외치지만 먼지를 만나야만 형태를 가지게 되니, 그렇게 가시화된 바람은 보잘것없는 비참으로 변해버린다. 바람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인 참여 속에서만 상상력에 제 모든 힘을 발휘하는 것이어서, 바람에 대한 형상화된 이미지는 오히려 하찮은 모습을 바람에 부여할 뿐이다.”
“역동적 상상력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활기를 띠고 그 무엇도 멈추지 않는다. 운동이 존재를 창조하며 소용돌이치는 대기는 별들을 창조하고, 외침은 이미지를 주고, 말과 생각을 준다.”
Go My Book Revi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