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심리 [프리츠 리만]1902~1979 [표제의 글] 불안은 불가피하게 우리 삶의 일부를 이룬다. 불안은 늘 새롭게 변화하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와 동반한다. 불안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믿는다면 착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불안은 우리 존재의 일부며, 우리의 필연성에 대한 앎이자 우리의 종속성의 반영이다. 다만 우리는 불안에 맞서는 힘들을 개발하려고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용기, 신뢰, 인식, 힘, 희망, 겸손, 믿음, 그리고 사랑 말이다. 아마도 오늘날 새롭게 불안을 처리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 된 것은 다양한 심리요법일 것이다. 심리요법은 우선 개인 안에서 불안의 발전사의 뚜껑을 열고, 그것의 개인적, 가족적, 사회문화적 조건의 연관성을 연구하여. 과일을 따서 익히듯 뒤늦게나마 개인을 성숙하게 하여 불안을 생산적으로 처리해보려는 목적에서다. [프리츠 리만] 심리학을 전공하고 심리분석가 수련을 받은 후 뮌헨에서 심리 및 심리요법 연구소를 공동 설립했다. 프리츠 리만은 이 연구소의 강사이자 수련분석가로 활동하면서 독자적인 심리요법을 적용하는 개인병원을 운영했다. 심리분석 분야에 대한 공로로 인정받은 그는 뉴욕에 있는 ‘미국 심리분석 학술원’ 명예회원이 되기도 했다. <불안의 심리>는 그의 저술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목차] 서문 불안의 본질과 인생의 이율배반에 대하여 헌신에 대한 불안 -분열적 인성 31 분열적인 사람과 사랑 39 분열적인 사람과 공격성 50 인생사적 배경 56 분열적 체험 방식의 사례 66 보완적 성찰 77 자기 자신이 됨에 대한 불안 -디프레시브한 인성 97 디프레시브한 사람과 사랑 111 디르레시브한 사람과 공격성 118 인생사적 배경 124 디프레시브한 체험 방식의 사례 141 보완적 성찰 161 변화에 대한 불안 - 강박적 인성 175 강박적인 사람과 사랑 197 강박적인 사람과 공격성 206 인생사적 배경 218 강박적 체험 방식의 사례 230 보완적 성찰 244 필연성에 대한 불안 -히스테리성 인성 261 히스테리성 사람과 사랑 275 히스테리성 사람과 공격성 286 인생사적 배경 291 히스테리성 체험 방식의 사례 310 보완적 성찰 324 마무리 성찰 335 옮긴이 후기 358 [[서문]] [불안의 본질과 인생의 이율배반들에 관하여] ○불안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믿는다면 착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불안은 우리 존재의 일부며 우리의 필연성에 대한 앎이자 우리의 종속성의 반영이다. 다만 우리는 불안에 맞서는 힘들을 개발하려고 시도 할 수 있을 뿐이다. ○불안은 한 민족의 문화나 발전 정도와는 무관하게 존재 한다. 바뀌는 것은 다만 그때그때 불안을 야기하는 불안의 대상들이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불안을 퇴치하려고 쓰는 수단과 방법들이다. ○불안은 언제나 그것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거나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등장한다. ※불안의 근본 형태들은 우리가 세계 속에서 처한 상황과 관계가 있다. 즉 우리가 두 가지 커다란 이율배반Antinomie 의 풀리지 않는 대립과 모순 사이에서 살아야 하며, 우리는 그 두 가지 이율배반 사이에 팽팽히 당겨져 놓여 있는 상황과 관계가 있다. 나는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이 두 가지 이율배반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이 비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초인적 질서의 법칙들에 우리를 연결해 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세계는 네 가지 강한 힘의 지배를 받는다. 지구는 정해진 리듬에 따라 태양 주위를, 협소한 우주의 중심 성좌 주위를 돈다. 이 움직임을 ‘공전’이라고 표현한다. 동시에 지구는 자신의 축을 돌며 ‘자전’이라는 움직임을 수행한다. 또한 지구는 세계의 체계를 움직이게 하는 동시에 이 움직임이 특정궤도에 머물러 있게끔 강제하는 ‘중력과 원심력’이라는 두 가지 대립적, 보완적 힘에 내맡겨져 있다. 이를테면 중력은 세계를 지탱하고 , 그 구심적인 힘은 안쪽을 향한다. 즉 중심을 지향하면서 단단히 붙들고 끌어당기려는 소용돌이 같은 요소를 지닌다. 원심력은 중심을 파하여 바깥쪽으로 향하고, 넓은 곳으로 밀고 나아가며 풀어놓고 떨어져나가려는 당김의 요소를 지닌다. 이 네 가지 힘의 균형이,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고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법칙에 맞는 살아 있는 질서를 보장한다. 그러한 움직임 하나가 과하거나 빠지면 큰 질서에 장애가 발생하거나 질서 자체가 파괴되며 혼돈으로 이어진다. 지구가 이 기본적인 힘의 하나를 포기 한다고 한번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지구가 만약 공전, 즉 태양을 도는 일을 포기하고 자전, 즉 자신의 축만을 돈다면 지구는 한 위성의 위계질서를 넘어서서 태양처럼 굴 것이다. 자기 주위를 다른 행성들이 돌아야 하는 중심이 된 것처럼, 그러니까 태양을 도는, 지구가 가도록 된 궤도에 더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반대로 만약 지구가 자전하며 자신을 돌기를 포기하고 태양 주위만 돈다면, 지구는 달의 단계로 격하되어 늘 똑같은 면에서 태양을 향하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의존성에 빠질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지구는 행성의 법칙성, 즉 종속적으로 순응하면서도 독립적으로 스스로 도는 법칙성을 깨뜨리게 될 것이다. 나아가 지구에 중력이 없다면 , 지구는 원심력의 지배만을 받게 되어 카오스 상태로 파열하여 궤도를 벗어나고 어쩌면 다른 천체와 충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심력이라는 반대 힘없이 오로지 도망치는 힘, 원심력에만 복종한다면 분명 이 힘은 완전히 굳어져 변화 불능이 되거나 다른 힘들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궤도에서 끌어내려질 것이고, 지구는 그런 힘들에 맞설 어떤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제 비유를 해보자. 잘 아는 것이다. 사람이 지구의 거주자로서 또 태양계의 티끌만한 한 일부로서 그 합법칙성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럼으로써 묘사한 힘들을 무의식적인 충동으로서 또 동시에 잠재적 욕구로서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가정은 매우 놀라운 일치로 이끌어 간다. 즉 저 기본적인 힘들을 인간적 차원의 심리적인 것으로 옮겨 놓아보자. 다시 말해 정신적 체험 가운데서 그것과 상응하는 면모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자. 그러면 그 둘 사이에 삶이 팽팽히 당겨져 놓여 있는 앞서 언급한 이율배반과 마주치고, 그리하여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동시에 그것과 연관되며 더 깊은 의미를 얻게 되는 불안의 저 근본 형태들과 마주칠 것이다. 자전, 즉 자신을 맴도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의미를 맞추어보면 개인화 요구와 일치할 것이다. 이는 일회적인 하나의 존재, 개인이 되려는 요구다. 공전, 즉 우리의 중심 성좌인 태양 주위를 도는 움직임은 더 큰 전체 안에 자신을 귀속시키고, 자신의 법칙성, 즉 우리 자신의 뜻을 초인적인 관련을 위해 한정시키려는 요구와 일치한다. 이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면서 겪는, 또한 초개인적인 연관성 가운데 우리를 끼워 넣어야 한다는 상반되는 요구를 포함하는 최초의 이율배반이 우회적으로 묘사되었다고 생각된다. 구심력, 중력은 정신적 차원에서 지속과 불변을 지향하는 우리의 힘과 일치하는 것 같고, 원심력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앞으로, 변화와 변전을 향해 몰아가는 힘과 상응하는 것 같다. 이로써 또 다른 이율배반도 우회적으로 묘사되었다. 이 이율배반 안에는 다시금, 우리가 한편으로는 지속을, 다른 한편으로는 변전을 지향하라는 상반된 요구가 들어 있다. 이 우주적인 유추에 따르면 우리는 네 가지 기본족인 요구에 내맡겨져 있는데, 이는 서로 모순되면서 동시에 서로 보완하는 지향들로서 우리 마음속에서 다시금 발견된다. 이 지향들은 번갈아 모습을 바꾸어가면서 전 생애를 관류하며, 우리는 늘 새로운 방식으로 이에 대답한다. 자전의 비유에 상응하는 첫 번째 요구는 우리가 우리 자신임을 긍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으며, 우리가 일회적인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무더기 인간이 아니라, 혼동될 수 없는 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모든 불안이 주어진다. 우리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고 그럼으로써 소속과 공동체의 안정감에서 떨어져 나오게 될 때, 그건 고독과 고립을 의미하게 되는 만큼, 우리를 위협하는 불안이다. 인종, 가족 및 민족에 소소됨으로써, 연령과 성별을 통해, 믿음이나 직업 따위를 통해 규정되는 집단들에, 혈연에 의한 혹은 친근하게 느끼는 것에 의한 집단들에 제 아무리 폭넓게 소속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동시에 개인이며 그럼으로써 무언가 일회적인 존재 , 다른 모든 사람들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존재다. 그러한 점은 지문 하나로도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혼동되지 않게 구분하고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목할 만한 사실만으로도 이미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 존재는 피라미드와도 비슷하다. 피라미드 밑면의 넓은 폭은 유형적이고 공통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꼭대기를 향해갈수록 묶어주는 공통성은 점점 떨어져 나가고 , 결국은 일회적이고 개인적인 것에서 끝이 난다. 우리의 일회성을 수용하고 개발하는 과정 , 칼 구스타브 융은 이 발전과정을 개체화Individuation 과정이라고 지칭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남들과 같은 존재라는 소속의 안정감에서 떨어져나가 개체의 고독을 불안하게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남들에게서 자신을 구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고독해지고, 그럼으로써 불안정과 이해받지 못함, 거부됨 혹은 상황에 따라서 퇴치됨에 내맡겨지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자신을 독립적인 개체로 계발하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나도 집단적이고 유형적인 것 가운데 박혀 있게 되어 우리의 인간적 품위에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게 된다. 앞서 든 공전이라는 비유에 상응하는 두 번째 요구는 세계를, 삶을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을 신뢰하며 자신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 자아, 낮선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우리 바깥에 있는 것과 교류를 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헌신, 즉 삶에 대한 헌신의 측면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불안과 결부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상실하고 종속적이 되리라는, 우리를 내주며 본연의 고유함대로 적절히 살 수 없으리라는, 남을 위해 희생하고 요청된 대로 적응해나가라는 우리자신을 너무도 많이 포기해야만 하리라는 모든 불안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종속성이라는 측면이 문제가 되고, 우리 존재의 ‘던져져 있음‘이 문제가 된다. 즉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우리 자아의 이런 종속성과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우리의 삶을 향하여 스스로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 모험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어딘가에 묶어주는 애착Bindung을 잃어버린 존재, 우리 자신을 넘어나가는 그 무엇에 대한 소속감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안정감이 없는 고립된 개별적 존재로 머물 것이고, 우리 자신도 세계도 진정으로 만나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첫 번째 이율배반에 의해 인생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모순적인 무리한 요구 하나와 충돌한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실현하며 사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망각하며 살아야 하고, 자아 포기의 불안과 동시에 자아 되기의 불안 또한 극복해야 한다. 그럼 이제 앞에서 언급한, 모순과 보완의 양극적 관계에 있는 두 가지 다른 요구들에 대하여 다시금 살펴보자. 구심력적인 것, 중력의 비유에 상응하는 세 번째 요구는 우리가 지속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테면 집에 들어앉듯 주저앉아 이 세계 안에 살림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무한히 살게 되기라도 할 듯, 마치 세계가 안정되어 있기라도 한 듯, 미래를 예견할 수 있기라도 한 듯, 우리가 머무는 것을 계산할 수 있기라도 한 듯 그렇게 미래를 내다보며 설계하고 목적을 향해 힘써야 한다. 우리는 삶 가운데서 죽음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우리 삶이 어느 순간이든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지속하라,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며 나아가고 우리를 기획하라, 정말이지, 마치 우리가 무언가 확고하고 확실한 것을 눈앞에 가지기라도 한 듯, 도무지 미래를 가지라는 이 요구에는 그와 더불어 모든 불안이 함께 주어져 있다. 이는 무상함, 우리의 종속성, 우리의 현존이 어처구니없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앎과 결부되어 있는 불안들이다. 즉 새로운 것을 감행하는데 대한 불안, 불확실한 것을 계획하는데 대한 불안, 결코 멈추지 않으며 우리 자신도 변전시키며 붙드는 삶의 영원한 흐름에 몸을 맡기는데 대한 불안이다. 이는 아마도 그 누구도 같은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단언에 들어 있을 것이다. 강물도 사람도 매 순간 늘 다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지속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거나 실현할 수 없으리라. 모든 이루어진 것은 우리가 생각 속에 얼마만큼은 이 지속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목표를 실현하는 일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우리는 늘, 마치 우리가 무한정 시간을 지녔다고 믿기라도 하는 듯, 마치 마침내 한번 이루어진 것을 영원히 견고하기라도 한 듯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 눈앞을 어른거리는 이 안정성과 지속성. 이 영원에 대한 착각은 기실 우리를 행동하게끔 몰아가는 본질적인 힘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심력, 도망치는 힘의 비유에 상응하는 네 번째 요구를 살펴보자. 이 요구의 본질은 우리가 늘 우리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변화와 발전을 긍정하고, 친숙한 것을 포기하며, 전통과 습관을 떠나보내고, 늘 방금 이루어진 것으로부터 다시금 자신을 풀어내고 이별을 고하며 , 모든 것을 다만 통과의례로 경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요구다. 새로운 것에 열려 있고, 마지막 것을 감행하며, 우리가 늘 살아 있게끔 계속 발전시키며, 머물지 않고, 고착되지 않는 것이다. ○[자전] [공전] [구심력] [원심력]이 네 개의 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지만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율배반의 관계이다. ○[자전]은 심리학적으로 의미를 비유해보면 개인화 요구와 같다. 이는 일회적인 하나의 존재, 개인이 되려는 요구다. ○[공전] 우리의 중심 성좌인 태양 주위를 도는 움직임은 더 큰 전체 안에 자신을 귀속시키고, 자신의 법칙성, 즉 우리 자신의 뜻을 초인적인 관련을 위해 한정시키려는 요구와 일치한다. 이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면서 겪는, 또한 초개인적인 연관성 가운데 우리를 끼워 넣어야 한다는 상반되는 요구를 이율배반이다. ○[구심력] 중력으로 이것은 정신적 차원에서 지속과 불변을 저항하는 우리의 힘과 일치하는 것 같고, ○[원심력] 이것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앞으로, 변화와 변전을 향해 몰아가는 힘에 비유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한편으로는 지속을, 다른 한편으로는 변전을 지향하라는 상반된 요구가 들어 있다. ○ 자전의 비유에는 우리가 일회적인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무더기 인간이 아니라, 혼동될 수 없는 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모든 불안이 주어진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고 그럼으로써 소속과 공동체의 안정감에서 떨어져 나오게 될 때, 그건 고독과 고립을 의미하게 되는 만큼, 우리를 위협하는 불안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각기 체험한 불안의 종류의 밀도는 크게 우리가 지녀온 성향, 유전에 의존하여 또한 우리가 태어난 환경조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형성은 또한 우리의 개인적인 전기, 즉 우리가 이렇게 되어 있음의 역사에 의존한다. 그렇게 해서 불안은 성향과 환경의 영향으로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색조를 띠는데, 이 사실은 부분적으로는, 왜 우리가 남들에게 있는 어떤 불안들을 공감하기가 어려운지를 해명한다. 그러하나 그 불안들이 남들의 것이라 해도 우리 삶의 조건에서 그리 많이 떨어지지 않은 삶의 조건에서 생성된 것이다. 즉 성향과 가족, 주변 환경, 사회 등의 환경이 특정한 불안들을 키우고, 특정한 불안들을 억제한다. 자신의 발전에 장애를 받지 않은 건강한 사람은 대체로 불안과 더불어 지낼 줄 알고 어쩌면 불안을 극복할 수도 있다. 자신의 발전에서 장애를 받은 사람은 불안을 더 밀도 있게, 더 빈번하게 체험하며, 불안의 한 가지 근본 형태가 그에게서 압도적 무게를 갖는다. 어떤 불안은 심한 부담을 주거나, 어떤 척도를 넘어설 경우, 혹은 너무 오래 지속될 경우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있다. 가장 무겁게 부담을 주는 불안은, 너무 일찍 어린 시절에, 어린아이가 아직 그것에 맞설만한 방어력을 개발할 수 없을 때 체험한 것이다. 어떤 불안이 강도가 강하거나 혹은 지속되면서 지나치게 커지면, 혹은 그 불안이 아직 그것에 대항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을 때 닥치면, 불안은 처리되기 어렵다. 그럴 때는 불안의 활성화하는 능동적 면모가 떨어져 나간다. 그 결과 발달장애, 정체 혹은 이전의, 유녕의 행동방식으로의 퇴행이나 퇴행 증상 발현이 일어난다. 우리가 나이에 적합한 불안 체험만 하게 되는 건 아니고, 너무도 큰 불안이 특히 어린 나이에 닥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이제 발전중인 허약한 어린아이의 자아는 아직 어느 정도 이상의 불안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는 바깥으로부터의 도움에 의지하게 되고,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과도한 불안들과 홀로 있을 수밖에 없게 되면 손상을 입는다. 어른들은 전쟁, 감금 상태, 생명의 위협, 자연재해, 그 밖의 재해 등 드물게 맞이하는 예외적인 상황들에서 혹은 내적인 정신적 체험 과정에서도 역시 불안에 대해 감당 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에 대해 공황 상태, 발작적 행동 혹은 노이로제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어른은 어린아이에 비해 불안에 대한 대응 가능성이나 맞서는 힘을 선택하는 범위가 훨씬 더 넓다. 자신을 방어할 수 있고, 자신의 상황을 두루 생각해볼 수 있으며,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불안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불안을 전달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이해와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위해가능성이 있는지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어린아이는 아직 해낼 수 없다. 어리면 어릴수록, 그만큼 더 아니는 다만 자신이 느끼는 불안들의 객체일 뿐이고, 무력하게 불안에 내맡겨져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또 무슨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모른 채로다. [[헌신에 대한 불안]] [분열적 인성] ○자신을 버리는데 대한 불안이면서 동시에 근본 힘에서 보자면 자전을 지향하는 힘이다. 즉 심리학적으로는 자기 지키기와 자아 경계 긋기의 힘을 과도하게 발휘하며 사는 인성을 지닌 사람 ○ 우리 모두는 혼동될 수 없는 개인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그런지는, 누군가 우리 이름을 혼동하거나 틀리게 불렀을 때 우리가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누구하고든 바뀔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우리의 일회성을 의식하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려는 내적 지향은 사회적 본질로서 집단이나 단체에 소속하려는 반대 지향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는 한껏 개인적 관심에 따라 살 수 있기를 바라고, 파트너와 결합하는 가운데, 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관되는 책임을 가지는 가운데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헌신의 측면은 피하면서 자기를 지키는 데 주력하여 살아보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함께 사는 사람들의 주변 세계와 멀어지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알지 못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을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그들과의 틈은 점점 더 커진다. 그러다보니 함께 사는 사람들과 교류할 때 불확실함은 더욱 강해진다. 그렇게 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결코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역에 서 있는 기차 안에 있고 , 옆 선로에는 다른 기차가 서 있다. 갑자기 우리는 , 두 기차중 한 대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오늘날 기차는 매우 부드럽게 , 거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게 출발하므로 우리는 흔들림이나 충격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임의 시각적 인상만 포착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두 기차 중 어느 기차가 움직이는 지를 종잡을 수가 없다. 부동으로 서 있는 바깥의 대상을 판별 기준으로 삼아야 , 우리 기차는 아직 서 있는데 옆 기차가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옆 기차는 서 있고 우리 기차가 움직이는 건지 제대로 알게 된다. 이 이미지는 분열적인 사람의 내적 상황을 매우 적절하게 밝혀줄 수 있다. 즉 그는 자신이 느끼고 인지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오로지 자신 속에만 있는지 아니면 바깥에도 존재하는지를 결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는 건강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불확실함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크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와 접촉이 긴밀하지 않기에 그는 그 세계 안에서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체험과 인상을 판단할 때 의심하고 흔들린다. 자신의 체험과 인상 같은 것들이 현실이라고 바깥으로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들이 오로지 자신의 상상이며 오로지 내면세계에 속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슐츠 헹케 이미지>. 다른 사람들이 정말로 나를 비웃으며 바라보는지, 아니면 다만 내가 그렇게 상상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 이런 불확실함의 정도는 항구적인 불신과 병적인 자폐성으로부터 착란적인 망상과 인지 착각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인지착각에 이르면 내면과 외면이 정말로 혼동되며, 그 혼동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제는 자신의 투사를 현실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함이 지속적인 상태가 되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괴롭고 깊이 불안할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가까운 접촉의 결핍 때문에 그 불확실함을 교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불확실함은 지속적인 상태가 된다. 누군가에게 그것에 대해 자꾸자꾸 물어보고, 자신의 불확실함과 불안을 알리자면 친밀한 가까움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그렇게 가깝지 않기 때문에, 이해받거나, 아니면 웃음거리가 되고 심지어 돌았다는 취급을 받기보다는 남에게 겁을 주어야만 한다고 믿게 되기도 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분열적인 사람들은 불신에 가득 차 있고 안정감을 상실했기에 안전을 도모하기위한 기능과 능력을 특별히 강하게 발전시키곤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세계 속에서 방향을 잘 잡는데 도움이 될 기능과 능력, 즉 지각기관과 인식하는 지력을 통한 인지, 의식, 이성을 발전시킨다. 모든 감성적인 것, 느낌과 결부된 것은 그들을 불안하게 하므로, 그들은 감정에서 떨어져 나온 순수한 인식을 지향한다. 그것이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약속한다고 보는 것이다. 분열적인 사람이 흔히 정확한 학문을 지향한다는 점은 그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확한 학문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주관적 체험에서 떨어져 나와 있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분열적인 사람의 사랑] [분열적인 사람의 공격성] ○불안과 공격성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마도 근원적으로 불쾌와 불안이 비로소 공격성을 유발할 것이다. 여기서의 불쾌감은 아마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불안의 초기 형태, 원초적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나중에 하게 되는 것처럼 불쾌를 처리하고 불안을 극복할 가능성들을 아직 구사할 수 없고, 불쾌와 불안에 대책 없이 내맡겨져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배고픔, 추위, 고통 같은 것에 의한 좌절감이 불쾌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즉 자신의 리듬이나 삶의 공간의 불가침성에 일어난 장애, 감각기관의 과도한 부담이나 움직임의 자유 제한, 타인들의 지나치게 돌격적인 가까움이나 개입 등 외부의 과도한 영향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데 주어지는 위협, 외로움 같은 것들이다. 이 시기에 불안은 무엇보다도 강한 불쾌감으로 감각된다. 앞서와 같은 상황에서 영아에게는 불안과 공격이 시간적으로 아직 일치한다. 불쾌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동시에 공격성과 분노를 일으킨다. 그런데 영아에게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우선은 그저 까무러치게 화를 내는 것뿐이다. 이는 소리 지르기, 나중에는 발 구르기와 바동거리기 등 운동을 통해 부담을 덜고 불쾌감을 처리하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런 어린 시절에는 아직 나와 너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공격성의 표출은 아직 완전히 방향이 정해진 게 아니다. 그 누구와도 연관되어 있지 않다. 이는 단순하게, 존재하고 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 유기체의 부담을 덜기 위해, 불편과 불쾌를 처리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여기서 공격의 원초적 형태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우발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아직은 인간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채 나타난다. 그래서 서슴없고 죄책감도 없다. 죄책감이란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의 연관을 전제로 한다. 원초적 불안의 강도는 엄청나게 크다. 영아는 완벽하게 무력하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위협당하는 것으로 체험하고, 그의 전체 현존이 위협된다고 체험한다. 그와 상응하는 공격과 분노도 전면적으로 체험한다. 아이는 이런 온전한 분노 혹은 온전한 불안 상황에서, 오로지 그것들을 처리하고, 그것들을 떨치겠다는 충동에만 온통 사로 잡혀 있다. 반사적인 오그리기, 세계에서 물러서기, 혹은 묘사된 동작의 폭풍 같은 움직임은 다른 생명체에게서도 나타나는 불안과 불쾌에 대한 두 가지 원형적인 반응이다. 하나는 뒤로의 도피, 즉 죽은척하기 반사에 이르기까지의 물러서기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의 도피, 즉 동작의 폭풍과도 같은 움직임, 공격성이다. ○ 그들에게는 감정이입이 광범위 하게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브레이크가 될 힘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공격성은 긴장의 부담을 더는 유일한 방식이 되고, 통제되지 않은 채 죄책감 없이 한껏 발휘된다. 이에 더해 분열적인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연관에서 벗어나 있기에, 자신들의 흥분된 정서와 공격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지 못한다. ∵위르겐 바르취의 자화상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안정감이 없고 애착이 없는 상태, 나아가 여기서 비롯하는 불신은 분열적인 사람이 타인의 접근을 위협으로 체험하게 한다. 이 위협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불안을 느끼고 이 때문에 즉시 공격이 따라 나온다. 이와 같은 정신 분열증자의 삶의 근본 감정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저런 반응들을 이해하게 해준다. 다스려지지 못한 원초적이고 분열된 공격성은 폭력에 까지 이르는데, 그런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을 억압한다고 느낄 때 남을 귀찮은 벌레처럼 제거한다. 묶이지 않은, 총체적 체험에서 분열된 모든 충동처럼, 이 공격 또한 위험하게 독립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반사회적이거나 범죄적인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인생사적 배경] ○그런데 어떻게 분열적 인격의 발달이 헌신에의 저 과도한 불안과 상응하여 자전, 즉 과도하게 자신의 유지를 강조하게 되는 걸까? 체질적으로는 매우 부드럽고 민감한 성향을 가진 사람, 마음이 매우 섬세한 사람, 불안정한 사람, 쉽게 상처 입는 사람이 그렇게 되기 쉽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자신의 주변 세계 사이에 거리를 둔다. 레이더처럼 섬세하게 반응하는 민감함과 이를테면 투과성으로 인해 그런 사람에게 지나친 물리적, 심리적 가까움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열적인 사람이 세상과 삶에 대응하려면 반드시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거리를 두는 것은 그가 외부의 과도한 영향을 받거나 남에게 정복되지 않도록 안전과 방어를 마련해준다.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이를테면 너무 열려 있는 시스템이다. 너무나도 살갗이 없다. 그래서 자신이 받아들인 넘쳐나는 모든 자극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한계를 설정하고 부분적으로 닫아야 한다. ○ 어린아이가 초기에 세계를 무시무시하고 믿을 수 없는 것, 비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지나치게 자신을 앞지르고 압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아이는 세계로부터 뒤로 물러나고 겁을 먹는다. 신뢰를 가지고 세계로 향하는 대신, 매우 때 이른 깊은 불신을 얻게 된다. 어린아이가 너무 자주, 너무 오래 혼자 버려져 있게 되면서 겪는 세계의 공허감이나, 자극과 과잉되게 바뀌는 인상들, 혹은 너무나도 큰 강도의 자극은 어린아이에게 영향을 미쳐 분열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세계로 향하는 첫 단초에서 장애를 겪고, 자기 자신에게 되던져 진다. ○ 세계는 우리에게 점점 더 안정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온갖 물질적 안락을 누리면서도 우리는 점점 더 위협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삶의 감정들은, 우리가 내맡겨져 있으나 그에 맞서 우리 자신을 차단하기가 불안정해진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유령과도 같은 충격, 우리가 오늘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앎, 과학과 기술을 통한 발전이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은 우리 마음속에서 분열적인 구조 특성이 생성되는 원인으로, 우리가 인식했던 바와 같이 실존이 위협 당한다는 느낌이 생겨나게 했다. 그에 대항하는 움직임으로, 요가며 명상적 훈련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며, 심지어 마약 사용에서도 내면세계를 되돌아보며 생각하려는 욕구를 볼 수 있다. 히피나 부랑자들은 의식적으로, 그 통제할 수 없는 지배가 우리 모두에게 의문시되는 기술과 문명의 성취를 포기하려 한다. 자연지배,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는 기술, 그리고 그 아래서 생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삶의 조건들이 우리의 정서적인 면을 점점 더 위축시키려 위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구 사회가 분열화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던 음악가에게 친구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하는 날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인즉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제공된 것이 남에게 종속되거나 감사할 의무를 져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에는 “그가 나를 도와주려는 것이 진심이라면, 그가 그런 태도를 보고도 겁먹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그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이라는 지속 확인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진정한 애착을 믿도록 보장 할 수는 없다. 누가 그렇게 까지 호의를 베풀어주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친구가 자신의 태도에는 개의치 않고 계속 자신을 위해 노력해 주는 것과, 자신을 버리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강하게 소망했다. (편집자) [보완적 성찰] ○분열적 면모들은 매우 다양한 강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일련의 분열적 인성을 늘어놓아본다면, 즉 어디까지나 아직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부터, 약간 혹은 무겁게 장애가 있는 사람을 거쳐, 가장 심하게 장애가 있는 사람까지 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가벼운 접촉 장애 - 과도하게 예민한 사람 - 외톨이 - 독창적인 사람 - 괴짜 - 아웃사이더 - 반사회적 인물 - 범죄자 - 정신병자. ○종교에 대한 태도에서 그들은 대개 회의론자들이고, 냉소주의자일 때가 많으며, 믿음의 무의미를 가리켜 보이는데 예리하고 , 의식, 전통, 모든 형식적인 것이 비판적이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도취를 깨거나 냉정하게 있는 것을 좋아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경외심 없이 설명하는데 까지 이르며 계몽된 시대, 대체로 자연과학적으로 방향을 잡은 시대가 그런 것을 충분히 가능하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합리주의자들일 때가 많은데, 특정 체험 영역에 대해서는 그것을 감지할 해당 기관이 빠져 있고, 그렇게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그들과는 토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종교나 믿음에 대한 관점은 무의식적인 예방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환멸당하지 않기 위해서 감히 믿음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모르게, 그들을 납득시켜줄 수도 있는 증거를 기대한다. 이따금 그들은 니힐리즘 적이고 해학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깨뜨려줄 수 있을 경우 그것을 사악하게 즐긴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무신앙으로 전향시키려 노력한다는데 서 다시금 그들 자신의 태도가 의심스러움을 알아볼 수 있다. 어쩌면 그들 또한 그들의 무신앙을 가지고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들 중 중증인 이들은 안정감과 사랑을 체험해 본 적이 없어서 믿음이 없을 수 있고 무신론으로 기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들은 자주 자기 자신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데, 그것은 과대 망상적 우월감과 자기 신격화에 이르게 한다. 그럴 경우 그들은 세계에 대한 관심을 회수한다. 그리고 관심을 점점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만 돌리게 되고 , 자기 자신에게 힘과 의미를 주는데 자신에게 주는 그 의미가 차츰 의식 전체를 채워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에서 결코 체험하지 못한 안정감을 찾고 또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순박한 신앙이 되지는 않고, 사랑하는 신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 역시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언가 탐구해낼 수 없는 초인적인 것을 가정하는 일이 된다. 그런 존재에 그는 한계가 있지만 자유로운 개체의 품위를 맞세우며, 그로서는 의무인 인간적인 과제에 대한 의식을 인간으로서 맞세운다. ○분열적 부모나 선생은 아이에게 따뜻함을 주지 않고, 아이에게서 너무 멀리 머물며, 아이의 감정적 욕구를 적절히 받아들이고 응답할 수 없다. 아이에게서 드러나는 감정이 실린 모든 것에 대해 이죽거린다. 그들은 아이를 쉽게 불안하게 만든다. 아이를 꿰뚫어보고 그의 동기를 너무 일찍 심리적으로 드러내 보이며 그럼으로써 아이를 너무 빨리 자기 성찰로 몰아넣는다. 아이는 이런 환경에서 추워 떤다. 그리고 공감하기 어려운 돌연한 반응들 때문에 장애를 입는다. 아이로 하여금 계속 이를테면 경보 준비 태세에 있도록 만든다. 사랑하는 동일시를 발견하기가 너무 힘들다. 아이로서는 그들에게 닿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나 아주 어린아이와는 그들이 좋은 관계를 맺을 때가 많다. 그런 아이들에 대해서는 애정 어린 신체접촉도 허락할 수 있다. 그들은 비꼬는 반어 뒤에 호감을 숨기는데, 이는 아이에게, 자신의 사랑이 가치를 가지며, 남에게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는 감정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 자신이 감정 면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체험을 결코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드님이 왜 갑작스레 다정하게 안하던 짓을 하셔.” “우리 아가씨가 나한테서 뭘 얻어낼 게 있는 모양이지. 오늘따라 이렇게 사랑스럽게 구니 말야.”>> 이런 구조에 의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가까운 접촉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들을 선호한다. 따라서 이론적. 추상적 분야에 호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특히 정확한 자연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엔지니어가 빈번히 발견된다. 그들이 학문적으로 인간을 다루는 경우는 간접적이고. 우회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심리학적 테스트 방식을 거쳐, 현미경이나 엑스레이 기계를 거쳐, 혹은 병리학에서처럼 죽은 사람을 거치면서, 영혼은 그들에게 골상학적 반사들의 집적이 된다. ○분열적인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은 무엇보다 독보적인 자립성과 독립성에 있으며, 자기 자신을 향하고 개인의 자율을 향하는 용기에 있다. 예리한 관찰능력, 흥분 없는 서늘한 객관성, 비판적이며 매수 되지 않고 사실을 보는 눈길, 사물들을 부드럽게 하거나 미화하는 등의 수식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용기가 그들의 강점이다. 그들은 그 어떤 종류든 전통과 도그마에 얽매여 답답해하는 일이 드문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시험해보고 철저히 생각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감정적 처리를 싫어한다. 그들은 자신의 확신을 , 분명하고 타협 없이 대변하며 매사에 독립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겐 대대 반어적, 풍자적 측면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들을 속이기는 어렵고, 인간적 접촉에서 불편할 때가 많다. 진짜가 아닌 것이나 겉치레를 인정할 용의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으며, 대체로 착각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운명을 조절하고 싶어 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운명은 무언가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빚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이 그들이다. 매우 분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에 시달리지 않고, 그래서 스스로를 건강하게 느끼는 분열적인 사람들 또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율성과 애착의 부재를 가치 있게 긍정하고, 그들의 배려 없음에 다른 사람들을 시달리게 하는 것을 대가로 자신의 본연을 발휘하려 한다. 많은 권력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권력자들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부리고 아무런 주저함 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경멸에서 비롯된다. 이 장에서 그리고 다음 장에서 개별적 구조 유형의 긍정적 대표자들이 너무 적게 묘사되었다면, 그것은 네 가지 인성구조의 원칙적인 것이 가장자리에 처한 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를 통해 평가를 유도해내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하나의 구조는 나름대로 높은 수준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열적인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호와 자율을 향하는 자신의 지향의 반대 극점, 즉 헌신의 측면을 소홀히 하지 말고 그것을 보완하여 통합하는 것이다. 일면적이고도 과도한 ‘자전’이 절대화되지 않도록, 모든 애착에서 떨어져나가 병들게 하는 고립에 내몰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 홀로 있다는 건 좋지 않다. 애착이 없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비인간적이 된다. 앞 장에서 살펴본 대로, 네 가지 인성 구조 모두에는 그때그때의 대립 유형에 매혹되는 경향이 있다. 그 가운데서 나는 보완을 향한 충동을 보고 싶다.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병이 들게 하는 일면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는 충동이다. 네 가지 기본 힘의 어느 것도 버리거나 배제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불안에서,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물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뢰를 갖는 관심의 수레를 가동하는 가운데, 몰아의 수레를 가동하는 가운데 도움이 잇다. 위협하는 고립화에서 벗어나게 하고 애착을 부담, 속박, 위협으로만 체험하지 않고 “뒷받침”으로 체험할 기회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 함께 발전함으로써 또 파트너를 통하여 우리의 자아 한계 긋기를 넓힘으로써 말이다. [[자기 자신이 됨에 대한 불안]] [디프레시브한 인성] ○불안의 두 번째 근본 형태인 독자적인 자아가 되는 불안을 보자. 이 불안은 안정 감의 상실로 깊게 체험된다. 근본 힘들에서 보자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 지금껏 해온 비유에 따르자면 공전이다. 그러니까 더 큰 중심을 에워싼 움직임을 과도하게 살면서 자전을 회피하려는 사람이다. ○자전의 개발이 적으면 적을수록 파트너로부터의 간격, 거리, 떨어짐은 그만큼 더 많은 불안으로 체험되며, 거기에 이르지 않으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깊은 우울증에서 절망으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그를 괴롭히는 분리불안, 상실불안에 내 맡겨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유일한 도움은 아마도, 그렇게 남김없이 파트너에 의존하지 않을 만큼 독자성과 독립성을 개발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바로 그것이 디프레시브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자면 남과 자신을 묶어주는 밀접한 애착을 약화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즉시 다시금 상실불안을 야기한다. ○조화를 이루고 가까움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기 위하여 디프레시브한 사람은 이제 자기 쪽에서 선 해야만 한다. 그래서 모든 이타주의적인 미덕을 위해 매진한다. 가장 중요한 것만 들자면 겸손, 포기할 용의, 평화애호, 사심 없음, 공감하기, 연민 등이다. ~~~ 즉 자신의 소망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이 됨을 포기함으로써, 상실 불안과 고독에 대한 불안을 꼼짝 못하게 묶어두려는 것이고 또 두려워하는 개체화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무언가를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소유하려고 붙드는 것이 어려운 것은 디프레시브한 사람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 말대로 기억력 없음 가운데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 진정한 관심과 주의력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강한 자극에 내 맡겨질까 봐 불안해서다. ○자신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가져도 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며, 그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낮추어 평가함으로써 얻으려 애쓸 필요가 없는 것으로 자기 자신 앞에 세우는 것이다. ○삶에 대한 자신의 소망들이 없으면 삶은 점점 더 공허하고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디프레시브한 사람과 사랑] [디프레시브한 사람과 공격성] ○디르레시브한 사람의 지나치게 근심이 많은 사랑 뒤에는 또한 무의식적 공격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지나친 근심으로 파트너를 그야말로 질식시킨다. 그에게 부드럽게 폭행을 가하는 것이다. 즉 투덜거리기, 한탄하기, 탄식하기 가운데, 이런 것들이 파트너를 녹초가 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디프레시브한 사람 자신에게는 의식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모든 게 너무 심하다고, 인간은 저렇게 악하고 , 저렇게 배려가 없다고 투덜거린다. 말없이 고발하는 표정을 내보이면서 갖가지 방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속에 죄의식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상대방은 그런 사람들과 사귀면서 점점 더 큰 배려와 관심을 억지로 쏟을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았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암시된 방법 중 그 어느 것에서도 공격성이 표출되지 못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연민 가운데서 표현되고 결국은 자신의 인격을 향할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가 가장 강하게 그렇다. 그에게서 풀 수 없게 되어버린 공격성, 죄책감과 동시적인 사랑을 상실한 불안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그는 근원적으로는 타인을 향한 고발, 비난, 그리고 그의 증오를 모조리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마침내 자기 증오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자기 파괴에 이르기까지, 진정 비극적이지만 그런 자기 파괴는, 그때는 정당했으나 결코 드러내서는 안 됐던 어린 시절의 증오와 질투의 감정에서 비롯된다. 그런 감정들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은,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상황을 다만 악화시켰고 자기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걱정을 떨쳐버린 어떤 가능성도 , 어떤 환기구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또 그것들을 죄책감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또한 그것들을 자기 처벌로서 자기 자신에게 맞세울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비극은 어린 시절에 벌어진다. 여기서의 문제는 어린아이가 거부당했음을 내면을 향해 자기증오로 받아들이면서 상실불안과 안정감 부재 때문에 공격성을 위협받은 상황을 너무나도 큰 부담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그리하여 훗날의 디프레시브한 환자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공격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배우지 못한다. 그것은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 즉 그는 때늦게 알게 되거나 혹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 자기가 공격적일 수 있었는지, 혹은 공격적이어야 했는지를. 그는 무언가를 이루자면, 자신을 주장하거나 관철하자면 어느 정도의 공격을 투입해야만 하는지 그릇된 상상을 한다. 그러자면 자기로서는 쓸 수 없는 엄청난 공격의 양이 필요하다는 상상 앞에서 그는 체념하고 만다. 또 마침내 공격을 드러냈을 때 고 결과가 어떨지 아주 과장된 상상을 한다. 자신이 불안해지고 또 죄책감을 가질 태세여서 그 결과가 너무나도 크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에겐 언제나 부메랑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 부메랑이 그가 던진 무게의 두 배로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언제 공격적이어야 하는가를 알아차리기, 존경받기 위해서는 한 번의 확실한 눈 길, 하나의 특정한 태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그리고 공격성을 드러내면 올 수 있는 결과를 자신이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통찰이, 디프레시브한 환자가 새로운 체험에 대하여 자기도 공격을 해보는 연습을 해야 하는, 접합 점들이다. ○증오, 노여움 그리고 질투는 어린아이의 삶에서도 불가피하다. 그것이 내면에서 고이고 디프레이션의 배경을 가질 때면 비로소 위험해진다. 억눌러야만 했던 까무러칠 듯한 분노, 좌절당한 공격, 증오감, 질투심은 후년의 삶에서도 우리를 디프레시브하게,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어른인 우리도 얽매인 데가 많고 어찌할 바를 몰라 그러한 것들을 용인하지 못하는데 아이야 얼마나 심하겠는가. 어린아이가 자신의 흥분된 감정과 공격성을 드러내도 될 때 비로소 아이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즉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것들을 적절하게 투입하거나 그것을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어린아이가 눈에 띠게 조용하고 착할 경우, 아이가 지루해하며 세상의 아무 일도 시작해보지 못하는 경우, 어떤 활동력도 보이지 않고 어떤 활동으로도 자극 받지 않는 경우 , 어린아이답지 않게 충동이 없는 성향을 가진 경우, 혼자 무얼 하지 못하고 혼자 버려져 있는 것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우, 그것은 의기소침 상태가 시작되는 조짐이므로 유의해야 한다. 공격성을 처리하는 성숙한 형태는 오직 자신의 공격성을 체험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발휘될 수 있었던 건강한 공격성은 자기 가치 감, 품위 있는 인격과 건강한 자긍심이라는 감정의 구성 성분이다. 우울증 환자들의 미미한 자기 가치감은 감히 해보지 못한, 발휘 될 수 없었던 공격성 안에 두고 있다. <<친화력>>에 나오는 괴테의 말 “타인의 큰 장점에 맞서서는 , 사랑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질투의 승화를 표현한다. 그러나 아이에겐 아직 질투를 승화시킬 능력이 없다. 이제 다시 자문해 보자. 어떻게 디프레시브한 인성이 발달하게 될 수 있는가를, 어떻게 한 인간 안에서 상실 불안과 “내가 됨”에 대한 불안이 과도해질 수 있는가를. [인생사적 배경] ○이런 사람들을 체질적으로 접근하자면 두드러지게 정서적이고 감정이 따뜻한 성향일 것이다. 사랑할 태세가 되어 있는 것, 사랑의 능력을 갖춘 것 또한 커다란 감정이입 능력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던 것으로 체험했는지는 아이가 나중까지도 가장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기초를 준다. ~ 있었던 행복한 사람은 자신을 아주 깊게 사랑할 만 하다고 여긴다. 매정하고 거부하는 어머니를 자신 속에 모사해야 하는 불운한 사람은 , 자신을 아주 깊이 사랑할 만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기도 사랑할만한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있으려면, 오랜 시간과 많은 새로운 체험이 필요하다. ○아이가 한 인간을 그의 마음속에 담을 수 있으려면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어머니와 그녀의 본질적인 모습은 인간에 관한, 인간적인 것 전반에 관한 첫인상들이 되어 아이의 마음속에 넣어진다. 여기서 처음으로 호감을 체험하느냐, 거부를 체험하느냐, 자신을 사랑받는 것으로 체험하느냐, 사랑받지 못하는 것으로 체험하느냐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만지고, 다루며, 교류하느냐에 달려있다. 여기서 아이는 민감하고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어서 극도로 섬세한 인상들에도 반응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아이의 태도는 여기서 결정적으로 그 기초 궤도가 놓이며 그로써 그의 자기 가치감을 위한 가장 깊은 토대가 이루어진다. 숲에다가 대고 외치는 대로, 소리가 되돌려 나온다. 이제 이런 시기의 어디쯤에, 그로 인해서 자전의 힘이 기쁨 대신 불안과 죄책감으로 체험되는 장애 가능성이 있겠는지 물어보자. 거기에는 어머니의 잘못된 두 가지 특징적인 태도가 있다. 그건 아이 버릇 나쁘게 들이기와 거부다. 우선 아이의 버릇을 잘못 들이는 경우를 보자. 여기서 우리는 ‘알 품은 어미닭 어머니‘를 발견할 수 있다. 아이가 늘 갓난아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종속된 상태로,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자기에게 의지하며 머물렀으면 제일 좋겠다는 어머니들이다. 그러니까 디프레시브한 구조 권에 속하며 무의식적인 상실 불안에다 삶에 대한 불안 혹은 사랑의 상실에 대한 불안에서 아이를 응석받이로 만드는 어머니들이다. 이런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애무를 쏟아 붓고, 건강하고 필요한 포기라는 것은 언감생심 할 생각을 못한다. 이따금 숙명적인 요인들이 추가된다. 결혼에 환멸을 느꼈거나 파트너를 잃어 자기로서는 아이가 전체 삶의 내용이 되는 여성들이다. 그들에겐 아이가 너무나 필요하다. 아이의 사랑이 필요하고, 고맙게도 아이가 그들에게 의무로 주는 모든 것을 행한다. 아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 어머니들은 그만큼 더 아이에게 문제가 된다. 이들은 아이가 발전하고 나아가는 것을 , 아이가 커가고 독립적이 되는 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이들에게 아이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 뜻하는 것은, 아이가 발전해 나에게서 떠나는 것이다. 머지않아 내가 더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는 다른 사람들을 향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아이를 이렇게 단단히 붙들어주고 싶고, 작은 그대로 붙들어 두고 싶은 것에는 어머니의 본능이 작용할 것이다. 나아가, 어머니가 아이를 위해 했던 오랜 기간에 걸친 희생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랑하며 키워온 것을 누군들 재빨리 좋아라. 놓아버리겠는가. 이런 어머니들은 처음부터 아이를 버릇없게 만든다. 수유에서 이미, 우는 건 그저 활력적인 자기 활동인데 울기만 할라치면 안아 올려 그의 활력을 막아버리고, 아이의 언짢은 반응 하나하나에 다 애무로 답하며, 아이가 흥분을 드러내거나 스스로 불편함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낼 기회를 주지 못한다. 그런 이들은 아이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그곳에 있고, 그의 주의력과 감정이 자석처럼 자신에게 끌리게 한다. 권투용어로 표현하면, 지속적인 클린치 가운데, 그 누구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는, 서로를 얽어매는 가까움, 그 누구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는, 서로를 얽어매는 가까움 가운데서 살아간다. 이후로도 그들은 같은 동기에서 아이에게 모든 것을 미리 빼앗아버리고,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미리 씹어서 먹여주며, 자신을 완충장치로서 아이와 세계 사이에 밀어 넣고, 아이에게 온갖 방식으로 보호막을 씌우려 한다. 이들은 아이의 불가피하고 건강한 흥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마음이 상하고 눈물로 반응하며 이 때문에 아이는 죄책감을 갖게 된다. 완전히 정상적인, 나이에 걸맞은 태도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이는 체념하고 수동적인 무감각 상태에 빠져드는 동시에 이제 자신의 소망을 가지지 않는 정도로 멀리 갈 수 있다. 그런 아이는 체념하고 수동적인 무감각 상태에 빠져드는 동시에 이제 자신의 소망을 누군가가 알아맞혀 성취시켜 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스스로 소망하기를 익히지 못해 잊어버렸고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편안한 자세, 수동적 기대의 태도, 인생을 무위도식하는 낙원으로 보는 생각이 생겨난다. 이런 것들은 그 아래 깔린 우울증을 덮어 가려준다. 곤차로프는 장편 <<오브로모프>>에서 그런 발전 과정을 빛나게 그려 놓았다. ○아이의 버릇을 나쁘게 들인 첫 번째 동기가, 아이로부터 사랑받고, 아이로 하여금 고마워하며 의무를 지도록 하겠다는 소망이었다면 두 번째 동기는 복잡하면서도 대개 아이에게는 더욱 비극적이다. 바로 아이를 원하지 않았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아이를 거부하고 아이에 대한 적의를 가지는 동시에 아이에게 좋은 어머니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그게 잘 안되어 죄책감을 느끼는 상황이다. 어머니는 죄책감과 이를테면 만회의 노력 때문에 아이를 버릇없게 만든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충분히 어려우며 아이에게는 정말 어렵다. 이런 상황이 특히 의븟 아이에게 쉽게 생기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아이는 그 노력에 감사하지만, 그 뒤에서 거부나 적의, 진정한 사랑의 결핍도 감지한다. 그 결핍은 호강시키기가 상쇄할 수 없을뿐더러 게다가 아이를,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서 감사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는 아이가 이미 자신의 존재를 죄로 느끼며, 자신을 주제넘은 존재로 경험하게 된다. 자기가 어머니에게 부담이라는 것, 사실은 자기가 살 권리가 없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참아주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른 거부의 또 다른 결과는, 그것이 아이에게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감정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깊은 열등감의 기초가 되곤 한다. 자신을 사랑할 만하다고 여길 수 있으려면 한번은 사랑받아봤어야만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그런 생각이 자신에게 있을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은 사랑할 만하지 않다. 이 열등감은 그 연령에는 아직 비교 가능성이 없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가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자기가 아는 세계가 아이에게는 ‘바로’ 세계 자체이고 ‘부모라 함’ 은 곧 자기 부모다. 심한 열등감에 있을 때 사실 자기는 살 권리가 없다. 살 권리를 공로로 얻어내야만 하겠기에 존재의 정당성은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때 갖게 된다는 감정이 생겨난다.
○아이 버릇 나쁘게 들이기와 거부의 영향은 최종 효과가 비슷하다. 둘 다 대개는 디프레시브한 인성 구조를 개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버릇이 없는 아이는 대개 나중에야 불안과 위기에 빠진다. 즉 인생이 한때 어머니가 해주었듯이 그렇게 호강시켜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부양기관 같은 결혼, 국가 기관들, 사회보장 같은 대리 어머니들도 찾아낼 수 없게 되면 그런 사실들이 드러난다. 자신이 인생의 무정함과 요구들을 감당할 만큼 성숙치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울증의 발병에 이른다. 이 돌파구는 무언가에 대한 중독에서 찾는다. 결핍체험을 겪고 거부당하며 자란 아이는 매우 일찍, 너무나도 일찍 포기를 배운다. 조용하고 요구 없는 아이가 된다. 수줍고 적응 되어 있으며 , 이런 태도 뒤에서 우울증을 인식하지 못하는 부모에게는 매우 편안한 아이다. 그러니까 아이는 뒤로 물러서고, 요구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나중에 자기가 다른 사람을 향해 있을 때도 그들의 요구와 기대를 채워주려 애쓰기만 한다. 세상에 너무 적은 ‘자신’을 마주 세워야하며, 주체의 면모는 너무 적고 다른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객체가 된다. 아이는 모든 추정된 요구를 결국 자기가 이행해야만 하는 요구로 생각하고 이 때문에 이행하는 것이 점점 불가능해져 늘 새로운 죄의식에 빠져들며 뒤이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래서 많은 디프레시브한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한다. 어떻게 그 모든 다양한 요구를 채워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단 한 사람에게서는 시험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해결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결코 받지 못한 것을 줄 것을 결정한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랑의 결손을 돕는 활동, 희생적인 이웃 사랑, 자선적 직업 가운데서 승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그 대가로 사랑받으려 하거나 보상 받으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과잉요구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을 요구로 체험 하면,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가질 수 있는지를 다음 예들이 간략히 그려줄 것이다. “태양이 빛나면서 나는, 내가 그것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는 감정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러기로 하는 그 감정이 벌써 하루를 온통 망쳐놓지요” 어느 대학생은 처음에는 재미있었던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몇 장 읽고 나면 슬그머니, 책이 자신에 의해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감정이 드는 것이다. 그가 주체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그에게 요구가 된다. 이를테면 책이 그를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읽을 마음이 없어진다. 그런 체험 방식이 결국에는 완벽한 체념과 무감각에, 모든 요구의 거부에 이를 수밖에 없겠다는 것은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디프레시브하게 ‘세상에 있음’이 어떤 극단적인 형태들을 취할 수 있는지 본다. 그래도 그런 눈에 보이는 ‘스트라이크’는 좋은 표시다. 아직은 지속적인 당위와 강제에 그 무언가가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시간과 가능성은 주어지지 않은 채로 무언가를 이룰 것을 강요받거나 그들이 결코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을 한번 만회하라고 강요받으면, 그들은 삶에서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요구에서 몸을 빼려고 시도하면, 그들은 무거운 죄책감에 빠진다. 그렇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유년의 상황을 되풀이 한다. 아이가 어떻게 어머니의 상을 자기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지를 , 또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그의 어머니 체험에 달렸는지를 훨씬 앞에서 묘사한 바 있다. 아이가 내면으로 받아들여버린, 적대적으로 거부하거나 과잉 요구하는 어머니야 말로 마지막 가능한 체념으로서의 자살의 가장 깊은 원인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어머니는 아이 내면의 정신적 판단처가 되는데, 그것을 통해 아이는 자기 증오와 자기 파괴에 이를 정도로 자신을 거부하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그런 불가피한 증오는 , 차라리 그 미움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만큼 너무나도 무겁고, 너무나도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풀어놓는다. 증오, 죄책감, 내면 투사된 거부하는 어머니와 자기 증오의 연관성은 중증 우울증의 심리 역학적 배경들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자살 성향은 자기 자신에게로 밀쳐진 살인 경향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증오에 대해 행해지는 자기 처벌이다. 이제 디프레시브한 사람들의 중심문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자전’ ‘주체 됨’의 개발 결핍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을 것이다. 오로지 그렇게 허약한 자아로 세상에도 맞서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요구가 된다. 온 사방에서, 오로지 산더미 같은 요구들만 본다. 그 앞에서 그들은 결국 절망하고 체념한다. 똑같은 ‘자아 허약’에서 그들은, 강한 자신의 힘, 소망, 목표 두기를 갖는데 이르지도 못하고, 성숙한 형태로 과잉요구를 거부하지도 못한다. 실은 도무지 그 자체로서 인식해내지도 못한다. 디프레시브한 사람들은 ‘아니오’를 잘 못한다. 상실 불안과 그 후에 오게 될 죄책감 때문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우울증 아니면 인내의 한계치가 넘어서면, 무의식적 스트라이크다. 그러나 그것도 그들을 죄책감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 그들이 결코 감히 드러내지 못한, 심층에 고인 미움과 질투가 그들의 삶의 감정을 송두리째 독소로 오염시킬 수 있다. 아니면 끝없이 계속되는 자기 고발과 자기 처벌 가운데서 속죄하며 그 미움과 질투를 떨쳐내야만 한다. 그들이 ‘자기 되기’의 불안을, 자꾸자꾸 그들의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피해보려 하는 한, 상황은 풀릴 수 없다. 여기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행뿐이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서 자립적 개체가 되어보겠다는 것뿐이다. [디프레시브한 체험 방식의 사례] ○디프레시브한 사람은 도무지 “아니오” 란 말을 해 낼 용기를 갖지 못한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상황 속으로 옮겨놓고, 그로 인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심은 거의 잊어버릴 정도로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다른 사람들과 맛서야 할 자기 힘과 자기 소망이 너무나도 적기 때문에, 그들은 그만큼 더 쉽게 다른 사람들의 소망과 힘 아래 놓이게 된다. 그들은, 남들의 기대를 채우는데 익숙해서, 원하지 않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들과 함께 자리하는 처지에 이른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보다 쉽게 어려운 상황에 얽혀들고 바로 자신의 약점을 남김없이 이용하는 인정사정없는 사람들의 희생물이 된다.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죄책감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사람을 잘 믿는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은 느끼지만 자신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굴욕을 당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디프레시브한 인성의 일상은 ‘자기 주장하기’ ‘자기 관철’ 혹은 ‘아니오 하기’ ‘주체되기’가 감행되지 않는 행동 방식으로 감철 되어 있다. 굴복하고 포기하고 방어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제2의 천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겉보기에 이유 없는 그들의 우울증들이 이런 태도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우울증을 그것이 마치 타고난 기질인 양,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인 양 감수하고 받아들인다. [보완적 성찰] ○개체화를 피하면서 헌신의 측면을 과도하게 살아가면, 그것이 초래하는 가장 보편적 결과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때그때 상대방이 과도한 무게를 가지게 되고, 그에 상응하여 스스로는 가치를 잃는다는데 있다. 자신의 자아를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우선 긍정적으로는, 이해와 동감, 공감, 연민 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결과로 낳는다. 이런 사람들은 늘 남을, 남의 상태와 관심을 먼저 생각하고 동일시에 이를 정도로 그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이는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의 처지에 옮겨 놓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우선은 이는 매우 긍정적인 것이다. 본래 디프레시브한 사람은 이제 이를테면 동일시 가운데 박혀서 다시 자신에게 자기 자신을 데려오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관점을 많이 잃어버리고 남의 메아리가 된다. ‘그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요구를 ‘네 이웃을 너 자신 이상으로 사랑하라’라는 말로 오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세상과 인간이란 게 본래 그래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개, 남김없이 이용당한다. 다른 사람들의 기본 태도가 자신과 똑같고, 남들이 자신과 똑같이 사려 깊고 타인에 적응 태도가 되어 있으리라는 기대 상상이 채워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와 반대로, 남들은 너무나 스스럼없이 이기적이며 그럼으로써 더 많은 것을 이루는 것을 체험한다. 여기에 위험한 부분이 있다. 그럴 때 그런 사람은 어떻게 궁여지책으로 하나의 미덕을 만들어야 하는지, 자신의 태도를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켜야 하는지를 궁리한다. 질투를(심적으로) 처리하고 그에 대한 위로로 도덕적 우월감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자기 자신에게는 금지되어 있거나 자신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남들에게 시샘 없이 느긋이 줄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인물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요구들에서 그러하듯 그런 태도가 집단적 혹은 종교적 이상에 일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디프레시브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는 궁극적으로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교정이 어렵다. 그 이데올로기를 갖게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포기를 하고 질투를 처리해왔기 때문에 아마도 거기서 끌어낼 수 있는 도덕적 보상 감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거부하는 판결을 내려주었던 형태로 느닷없이 자기 자신이 살 수도 없는 만큼 그러하다. 게다가 세상 및 인간과 교류하는 수많은 방식들을 익히지 못했고 그래서 할 수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삶의 기술이 뭉텅 빠져 있어서 감히 그렇게 해보지도 못하는 것이 사람을 거듭거듭 옛 궤도로 되풀이해 떨어지게 한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진정한 해결책이 아닌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얽혀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의 약점, 하나의 불안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괴테의 말에서 나타난 것 같은, 진정하게 승화시키는 능력은 흔치 않다. 이데올로기부터가 겸손하고 겸허한 사람은 질투를 느낄 필요가 없으며, 삶의 부당함에 대한 씁쓸함 주위를 빙빙 맴돌 필요가 없다. 일상이란 그 자체로서 천박하고, 중요치 않는 상황을 가득 지닌다. 그런 상황들 가운데서 디프레시브한 태도는 현시되고 깊은 자국을 남긴다. 그들에게는 노이로제와도 같다. 그러나 한번 그것에 유의하면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디프레시브한 사람이 손님이라도 초대하거나 누구네 집에 손님으로 갔을 경우 늘 그 저녁의 성패를 혼자 다 책임지고 있어, 환담이 잘 돌아가게 해야만 한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열등감이나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지나치게 필사적 노력은 바로(그런 모임에서 사람들이 찾는) 편안함이 떠오르지 못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도 제 몫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또 그런 것이 ‘성공’하는 데는 통상 행운도 다소 따라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어느 환자는 자기 친구들에게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을 소개할 때면, 늘 스스로 고통을 체험하는 상황에 처했다. 친구들이 새로운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할지, 새로운 사람이 친구들을 마음에 들어 할지 어떨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콘서트에 가서도 느긋이 긴장을 풀고 즐기지를 못했다. 이중으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와 동일시 하는가하면 청중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예술가가 제대로 못해서 청중을 실망시킬지도 모르겠다는 걱정 때문에, 아니면 예술가가 청중의 박수가 너무 적어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그렇게 해서 그는 결코 제대로 자기 자신이지 못했고, 언제나 자신과 남 사이의 기이한 중간에 있었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초년 상황을 되풀이 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주는 한 조각 안정감이나 사랑을 도박에 걸어 잃을 위험에 놓지 않으려면, 늘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만족하기를 바라며, 자신은 뒤로 물러나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해야만 했다. 여기서 자아관련성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실은 겉보기만 그런 것이고, 기실 분열증 환자에게서 체험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내면에 층이 쌓인 것이다. 즉 분열증 환자는 접촉이 없다보니 관계망상에 이를 수 있었으나, 디프레시브한 사람에게서는 겉보기의 자아관련성은 사실은 극담적인 상대방 관련성이다. 그런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느끼면, 그것은 이를테면 과대망상이 아니고 완전히 반대로, 그를 자기 자신 안에서보다는 상대방 안에서 살게 하는 ‘강한 자아’ 결핍에서 비롯한다. ○어느 이데올로기든 그것이 단순화하면서 기본 힘의 하나를 절대화 하거나 다른 힘을 배려하려 할 때는 위험해 진다. 그런 방식으로 피하는 것은 그만큼 더 확실하게 자리 잡는다. 우리 영혼, 우리 의식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일면성을 주목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다. 그런 일면성은 이율배반적인 힘들 사이의 무서운 긴장의 위험을 의미한다. 이러한 긴장은 삶에서의 꿈과 실패에 의해, 파트너와의 만남을 통해, 또한 무엇보다 불안에 의해 생겨난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풀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지나치게 겸손하고 평화로운 사람은, 그 가운데서 억압된 것이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는 꿈을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 밀쳐놓았던 것인데, 그건 (마땅히) 자신 안에 동화되어야 할 것에 대한 시사다. ○디프레시브한 인성 구조도 어디까지나 아직 완전히 건강하다고 일컬을 수 있는 디프레시브한 발작이 있는 사람부터, 경증을 거쳐 중증 및 심각할 정도로 중증인 디프레시브한 인성에 이르기까지 선이 하나 있다. 우리는 대략 다음과 같이 그것들을 그려볼 수 있다. 즉 명상, 관조적임 - 고요한 내향성 - 편안함, 수용적 수동성 - 요구와 자기주장에 있어서 심리적인 압박을 받음 - 절망 - 디프레션 - 우울증, 이 선의 끝에 자살이나 완전한 무감각 상태가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아니면 중독증으로 물러나는데 중독증은 잠깐 자아를 강화하고 우울증을 없애준다. ○디프레시브한 사람의 가슴에는 슈퍼텔리[1845~1924. 서사시와 신화문학의 부활을 꾀한 스위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의<<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놓아줄 수도 있으리라. “자신의 가치”를 부끄러워하면서도 기억하고“ 있을 것. 그들은 자신의 등경을 말 아래 둔다. 자신의 빛을 숨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발견해 주어야만 한다. 그들은 깊고 잔잔한 물일 때가 많다. 풍부한 감수성, 감정의 깊이와 따뜻함이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특성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에 대해 깊은 곳에서 감사한다.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을, 그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선물이자 은총이라고 느낀다. 그렇게 진정한 의미에서 순종의 삶을 살면서. [[변화에 대한 불안]] [강박적 인성] ○지속 지향은 우리의 본질에 속한다. 지속 지향은 우리가 사랑하는, 또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동경과 더불어 확실히 종교적 감정의 뿌리이기도 하다. 신적인 것의 시간 초 월, 영원, 편제를 그려보며 인간은 이런 지속 욕구를 채운다. 이 욕구가 얼마나 깊게 우리 마음속에 있는지 우리가 늘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친숙한 것, 익숙한 것, 변함없이 있어온 것이 갑자기 바뀌거나 심지어 그친다면, 더는 존재하지 않겠다고 위협하면, 우리는 즉시 그것을 체험한다. 그럴 때면 무상의 전율이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는 화들짝 놀라 우리의 종속성을 의식한다. 시간에 매인 우리의 유한성을 의식한다. 이제 우리는 불안의 세 번째 근본 형태를 그리는 데로 넘어가려 한다. 무상에 대한 불안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불안이다. ○아는 것과 익숙한 것을 그렇게 굳세게 붙잡고 있으면, 모든 새로운 것에는 불가피하게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다. 선입견이란 놀라운, 익숙지 않은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전조치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소박한 진보에 대한 믿음에 사로잡혀 사물들을 시험도 해보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위험에야 안 빠지지만, 그런 그만큼 더 다른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는 새로운 것과 마주할 때 너무도 닫혀 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의 발전은 물론 여러 가지 발전에 제동을 걸고, 억제하고, 심지어 가로막기까지 하는 위험이다. 강박적인 사람들의 근본 문제는 과도한 안전 욕구에서 알아 볼 수 있다. 조심, 예견, 목적의식의 장기적 안목의 계획, 지속을 향한 관점 전반이 이와 연관되어 있다. 불안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의 문제는 위험 부담을 안는 데 대한 불안, 변전과 무상에 대한 불안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이들은 수영을 할 수 있게 되면 그제야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옛 사람과 비슷하다. 이를테면 맨땅 집고 헤엄치기로 살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 방식과 관점은 다시 다양한 강도의 무게를 갖게 되고 지극히 기이한 형태로 나타난다. ○구세대는 존속하는 것을 끈질기게 고수하고 새로운 것을 완강하게 거부함으로써 젊은 세대가 극단주의적인 행동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게 한다. 물론 전통과 인식된 가치의 고수에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는 존속하는 원칙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해야 마땅하고 또 그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침이다. ○강박적인 인간은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그들의 권력에서 벗어나 있거나 그들의 의지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심리적으로 처리해 내지 못한다. ○ 강박들은 참 다양할 수 있지만, 우리가 부딪치는 것은 결국은 감행해 보는 것에 대한 불안, 서슴없이 행하는 즉흥성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한 강박이 생성되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 무언가는 무언가 새로운 것, 무언가 알 수 없는 것, 무언가 확실하지 않은 것, 무언가 금지된 것, 혹은 시도나 익숙해진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 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계속 있다면, 즉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은 그 신성한 질서 가운데,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조금도 흔들릴 수 없는 유효성 가운데, 도덕적 판단은 법 조항 같은 견고함에, 이론은 공격할 수 없는 주장에,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절대성에 머문다면, 그렇다면 시간은 멈춘 듯 보일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예견할 수 있고, 세상은 더 변하지 않으며, 인생은 똑같은 것이 될 테고 이미 아는 것의 반복 이상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 궁극적으로 별것 아닌 활동을 하면서 비합리적으로 해야만 한다는 감정을 가지게 될 때면 언제나, 이를 통해 본질적 대결이나 결단을 회피하려는 게 아닌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피셔(1807~1887, 독일의 미학자)는 장편 <또 한 사람>에서 강박적 문제들을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 강박적인 사람들에게서는 프로이트가 실수 행위들 이라고 부른 것이 특별히 빈번히 발견된다. 그들은 살아 있는 충동을 무척 많이 심리적으로 밀쳐놓기 때문이다. 약속, 망각, 잘못해서, 누군가를 건드리기 등의 실수 행위들에서는 스스로의 책임이나 의식적인 의지 없이 억압된 것이 실수로 자신을 관철시킨다. 실수 행위들은 그들에게서 일어난다. 여느 때의 통제에서 미끄러져 나와 그들이 감추려던 것을 드러낸다. [강박적인 사람과 사랑] ○디프레시브한 사람이 상실 불안 때문에 파트너를 자신에게 종속 되게 만들려고 한다면, 강박적인 사람은 권력 욕구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는 파트너를 자기 뜻에 맞추려 한다. 그래서 파트너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다. 그는 파트너를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소유로, 자신의 뜻 아래 있는 소유물로 파악한다. 그처럼 강박적인 사람은 파트너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너무나 많은 적응과 순응을 요구하여, 상대방의 희생 위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거꾸로 자신에게는 하나의 애착이 무언가 운명적인 것이다. 그에게는 짐을 지고 견딜힘과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끈질김이 있고, 한 사람에게 충실하다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유리하게 받아들여진다. 결혼은 드물지 않게 합리적 계산에서 이루어지는데, 물질적 관점이나 기타 안전장치들이 큰 역할을 하곤 한다. 결속이 이루어지는 애착에 들어가기 전에는 긴 의심 기간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 긴 약혼 기간이 필요하고 결혼식 날짜는 자꾸 미뤄진다. 그러나 일단 결심을 하면, 그 애착은 풀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이유에서든 윤리적 동기에서든, 오로지 포기하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나 파트너가 괴롭든 말든, 혹은 파트너가 이 관계를 해소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다. (예) 한 여성이 남편에게 왜 자신이 벌써 오래전에 제안한 이혼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보기에도 그들의 결혼은 이미 파탄이 났다 그러나 남편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결혼 했으니까” -남편에게는 기존의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 새로운 위험부담이 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 나아 보인다. [강박적인 사람의 공격성] ○강박적 인간도 자신의 공격성과 흥분된 감정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너무 일찍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을 배워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의 인생사를 살펴보게 되면, 그가 하는 즉흥적인 반응들이 실은 불안과 엉켜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분노, 증오, 반항, 적의 등을 드러내는 것을 억눌러야만 했다. 드러냈을 때는 처벌을 받거나 사랑의 단절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서 여러 가지 흥분된 감정을 불가피 하다. -그럼 그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의 자아는 이미 우울증인 사람에게서보다는 다서 더 힘차게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어린이로서, 그 때문에 자신의 흥분된 감정을 포기하는, (우울증 환자의) 상실 불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처벌에 대한 불안에서 그의 공격성을 금지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흥분된 감정과 공격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룰 가능성이 크다. 그는 망설이고 의심할 것이다. 자기가 어떤 상황에서 공격적이어도 될지 의심하고 그 후에는, 입 밖에 낸 것을 다시 약화시키고 완화시키거나 거두어들이고 취소하는 경향이 있다. [인생사적 배경] ○어떤 체질적 요인들, 어떤 환경의 영향이 강박적 인성 구조가 발전하게 하는지를 다시 묻고 싶다. 체질적으로 볼 때 특별히 활발하고 공격적인 운동성이 있으며 성적 관심이 많고, 일반적으로 확장적인 성향이 큰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 또한 성향 적으로 강조된 고집스럽고 독자적인 성격이 큰 역할을 한다. 어떤 성향인가 하면, 아이가 평균적인 부모보다 쉽게, 자주 감정이 상하는 부모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고 그래서 그의 태도에 빈번히 브레이크가 걸리고 막힘으로써 갖게 된 조용하고 ‘착한’ 아이로서의 성향이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의 성향에 맞는 부드러움과 적응 능력 또한 굽힘과 순응의 경향과 더불어 작용한다. 아이는 스스로에게 자발적 반응을 허락하지 않으며 자기가 소화할 수 있는 이상으로 적응해나간다. 나아가 타고난 ‘숙고Nach-denken'경향, 철저하게 파고드는 정확성의 경향, 또한 과거에 강하게 감정적으로 고착하는 것이 관찰된다. 이를 통해서 모든 인상은 깊게 새겨지고 오래 지속된다. 그런 특성들이 타고난 성향인지 주변 세계의 영향과 교육에 대한 반응인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 그러한지는 결정할 수 없고,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 방식이 얼마만큼 원인인지 결과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물음은 결코 흡족하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면 똑같은 아이를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타고난 성향이라는 요인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 요인은 주변 세계를 연구하는데 주된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지나치게 소홀히 여겨진다. 예전에 주로 유전 요인을 주목했기에 주변 세계를 평가 절하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안전화와 지속에 대한 욕구가, 한편으로는 소멸과 변화에 대한 불안이 과도해지는 주변 세계의 영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앞서 기술한 두 가지를 뒤따르는 발전 단계를 더욱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주변 세계가 제공하는 것과 금지하는 것에 부딪치는 때는 두 살에서 네 살을 전후한 때이다. 이때 아이는 죄 없는 어린 유년기, 즉 아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청하지 않아도 되는, 아직 아무것도 금지되지 않은, 모든 욕구가 자신의 노력 없이 충족되는 짧은 낙원 같은 시간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제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주변 세계와 갈등에 빠진다. 즉 자기 자신의 소망과 충동, 자신의 의지와 자신을 키우는 교육자의 의지와 요구 사이의 갈등에 빠져든다. 아이는 이제 이미,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했다. 앞선 단계들에서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갖다 주어야만 했다. 여기에 비하면 아이는 이제 벌써 자기편에서 세계를 향해 가고 세계와 더불어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자아, 그만큼의 자기존재를 발전시켰고, 그만큼 움직임의 충동과 표현 능력을 개발했다. 아이는 자신의 소망과 흥분을 점점 더 많이 또는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이는 공간을 점령하고, 자기의 힘을 시험하고, 저항에 맞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한다. 어머니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던 시간을 지나, 아이는 이제 자립 성향이 점점 커지면서 교제 단계를 겪는다. 이는 아이가 처음으로 ‘나’를 말하는 때로, 이때의 ‘나’는 어머니, 나와 네가 체험에서 아직 구분되지 않던 어머니와의 공생으로부터의 구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의 표현이다. 동시에 점점 더 자신의 몸을 다루는 능력을 얻어가며, 그와 더불어 운동성, 공격성, 확장욕, 고집은 점점 더 자신의 주변 세계를 향한다. 그것을 통해 아이는 주변 세계와 거세게 충돌하는 가운데 ‘물질’의 저항을 알게 되고 또한 자기의 처신에 대한 주변 세계의 반응도 알게 된다. 거기서 아이는 자신의 능력, 자신의 힘, 또한 그 한계를 경험한다. 여기서 아이는 무엇보다 이 발전단계에서 매우 본질적인, 처음으로 허가된 것과 허가되지 않은 것에서 방향잡기를 하게 된다. 허가된 것과 허가되지 않은 것은 선악의 범주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공식이다. 어떤 아이나 자신의 뜻과 순종해야 함 사이에서, 자신의 관철과 자기가 적응하는 것 사이에서, 개인적 해결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해결 시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 언제나 그의 성향과 그 성향이 충돌하는 그의 주변 세계에 달려 있다. 자신의 고집과 복종 사이의 체험에서, 특정한 행동방식의 자국을 깊게 새기는 것은 청결 교육으로 가능하다. 즉 건강한 자기 결정의, 혹은 반항적 태도의, 혹은 굽히는 행동 방식은, 아이가 청결 교육에서 어떻게 취급되느냐에 따라서 이미 깊은 자국을 남긴다. 즉 이 과정을 서서히 완수할 시간을 아이에게 주는가, 아이의 저항에 너무나도 강화된 조련으로 맞서느냐, 혹은 강압과 벌을 통해 결국 아이의 고집을 아주 일찍 꺾어야만 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그러나 앞서 묘사되었듯이 아이의 능력이 점점 더 커져감에 따라, 또 세상과 무얼 좀 시작해보려는, 사물들과 무얼 해보려는 욕구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세상과 충돌할 수 있고, 세상일을 방해하고, 세상의 반응들을 통해 스스로를 ‘나쁘고’ ‘버릇없다’고 체험하게 되는 상황들이 생긴다. 대략 두 살에서 네 살 사이의 첫 단초에 있어서 그의 확장적·운동적, 공격적 충동의 운명과 그의 고집 형성이 결판난다. 여기서 배운 처리 방식들이 그의 인성 전개를 위한 행동 모델이 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 이 첫 사명Gebot과 금지Verbot를 언제 어떻게 아이에게 지우느냐 하는 것이다. ‘선함이냐 악함이냐’의 첫 단초들은 체험적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실낙원’이 가능해진다. 이제 그것은 처음으로 ‘너는 ……. 해야 한다’ 혹은 ‘넌 ……. 하면 안 된다’ 등등이 된다. 그러면 아이는 복종을 선한 것으로, 거역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아이가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시기에 이런 요구들과 직면하거나, 이런 요구를 너무 경직되게 원칙적으로 혹은 너무 해이하게 일관성 없이 따르거나, 거역과 복종이 첫 단초에서 꺾이거나, 혹은 사랑에 찬 인도로 자유의지의 성과로 이끌리거나 하는 모든 것이 저 초기의 각인을 낳는다. 그 각인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고집과 자발성을 다루는 것을 해당되는 본능적 충동이 침해받는 것으로 형성한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한 인간이 훗날 건강한 자부심, 건강한 고집과 시민적 용기를 가지느냐, 아니면 권위에 반항적으로 맞서거나 순종적으로 적응하느냐에 대한 가장 심층적인 토대가 생겨나고, 그럼으로써 이미 훗날의 강박적 인성 구조의 단초가 얻어진다. ‘자신의 하고 싶음’과 ‘마땅히 해야 함’과 ‘꼭 해야 함’의 첫 충돌, ‘해도 좋음’과 ‘해서는 안 됨’의 첫 충돌 체험들을 통하여 아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충동의 자유나 부자유를 위한, 자신의 도덕적 양심을 위한, 자신의 ‘초자아’ - 정신분석에서는 어린 시절에 얻어진 이 판결 처를 포섭하는 양심의 주변 세계로 규정지어진 몫을, 이렇게 부른다― 의 엄격함이나 온화함을 위한, 서슴없는 자발성이나 고도의 자기통제로 인한 심리적 압박을 위한 선로가 놓인다. 아이는 자신의 태도에 대한 주변 세계의 반응들을 다시금 안으로 받아들이지만, 이제는 마음속에서 그 반응들을, 근원적으로는 바깥에서 정립된 사명과 금지를 대변하고, 배운 것과 자국 찍힌 것을 지속시키는 심판자로서 받아들인다. 훗날 강박적 인성이 나타날 때 그런 사람들의 인생사에서 가장 큰 규칙성을 지니는 것은, 어린 시절에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경직되게 체험한 생생하고 공격적이고 정념적인 힘들, 형태를 만들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들, 자발성과 건강한 고집의 드러냄을 모조리 억눌린 채 저지되고 처벌되거나 억압되었던 것임을 발견한다. 그것도 나이에 맞게 또 새롭게 배우게 되는 능력과 행동 방식들이 필요한 발전 단계 가운데서 이러한 규칙성이 나타난다. 그런 능력과 행동 방식들은 더 큰 독자성과 독립성으로 이어졌어야 했다. 행동연구의 연구 결과들 같은 데서 볼 수 있듯이 살아있는 것의 영역 어디서나 첫인상과 첫 경험은 특히 새롭게 배우는 것, 시기에 맞는 발전 단계와 연결될 때, 각인 시키는 영향을 가진다. 그럴 때면 그러한 것들은 쉽게 운명적 의미를 가지게 되고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의 분야에서 첫 단초부터 범주적 행동 방식을 각인한다. 이를테면 아이 주변의 모든 것이 늘 완벽하게 정해진 방식으로만 일어나고 행해져야 하기에, 아이가 이런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을 위험하고 나쁜 것으로 체험하는데서 시작된다. 그의 ‘틀린 태도’에 대한 주변 세계의 반응들, 비난, 경고, 위협, 사랑의 단절, 벌은 아이의 마음속에서 이제부터 주변 세계가 명백히 소망하지 않는 힘과 결합되고 연상되고 다시금 결합된다. 아이는 대략, 자기가 시끄럽게 굴거나 무얼 넘어뜨리거나 망가뜨릴 경우 어머니가 비난에 차서 아이를 나무라며 바라보거나 벌하는 것을 체험한다. 그런 체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조심스러워지고, 망설이게 되며, 더 통제되고, 어쩌면 이미 불안해지고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된다. 불안이 심할 경우에는, 위험한 방향에서 충동이 떠오르면 차츰 그에 대한 반사작용이 나타나게 되어, 즉시 그 충동에 브레이크를 걸어버리거나 억압한다. 여기서, 강박성 인성구조의 발전과 초입에 언급한 주변 세계와 체질적으로 조응하는 것의 연관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생생하고, 충동적이고, 행동성이 있고, 생동적이고,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아이들은 본연에 맞게, 자주 질책당하고 제어당하고 조용한 아이들보다는 엄한 고삐를 당기게 된다. 이는 질책에서 나아가, 사랑을 금지하겠다고 위협하거나 벌하겠다는 데 이르고, 이렇게 되면 그 결과들 역시 더욱 무거울 것이다. 이런 것 가운데는 나이에 맞지 않는 요구들이 있을 수 있다. 즉 아이가 일찍부터 깨끗해야 하고, ‘얌전하게’ 식탁에 앉아 있어야 하며, 아무것도 망가뜨려선 안 되고, 정당한 흥분된 감정도 내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에 대한 더없이 기괴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밥 먹을 때 너무 벌리고 앉지 않고 ‘좋은 태도’를 배울 수 있도록 겨드랑이에 동전을 끼워 넣고 있어야 하는데 아이는 그 동전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물론 조련되어 잘 기능하는 아이는 부모한테는 편안하고 다른 주변 세계에 대해서도 내보일 만한 아이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부모의 교육 방식들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게 되고, 부모가 부끄러워 할 일도 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감옥 같은 대도시의 주거 상황에서 규칙적으로 살며 적절한 배출구를 찾지 못할 때 아이는 자신의 생명 욕구를 가지고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아이가 스스로 조심하고 ‘움츠리는’ 것을 너무 일찍 배우면, 아이는 그 대가로 본연의 서슴없는 본성과 자발성을 내주어야 할 뿐 아니라 아이에게는 처벌 불안과 죄책감의 준비 태세가 과도하게 정립된다. 이 시기의 아이가 동생을 보게 되면 그 심리적 처리는 어려워지곤 한다. 아이가 자신의 고집과 자신의 공격성을 이미 개발시켰기 때문에 동생을 의식적으로 라이벌로 느끼는 이 나이에는 카인 - 아벨 문제가 가장 날카로운 구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부모가 아이의 상황을 완화해주지 못하면, 아이에게 그 문제가 너무나도 부담이 되는 상황이 올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아이는 동생에 대한 적대감과 공격을 죄책감으로 반응하게 되고, 이런 죄책감은 이미 강박적 차단 조치를 취할 것을 강요한다. ○ 일찍부터 자신의 충동에 브레이크를 걸고, 자신의 충동을 죽이는 일을 배운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단단히 매듭지어져 그에게 제2의 천성이 되고, 반사작용이 되어 결국은 자동화 된다. 그러면 나중에는 모든 충동과 수행 사이에서 자기 자신에 매달림이 이를테면 일종의 정면충돌이 되고, 하나의 단락이 발생한다. 우선 본능적 충동에 굴복하는 모험을 할 수 있을 지, 아니면 차라리 그걸 포기할지부터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점점 더, 중단과 숙고로 본능적 충동이 너무 약화되어 더는 자신을 관철 할 수 없는 데 이르게 된다. 혹은 해도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회의감 속에 붙박이게 된다. 이런 의심하기는 자동화되어 강박적인 ‘의심해야만 함’이 되고, 이는 모든 위험해 보이는 본능적 충동을 정지하고 그것을 무화하는 정도로 넓혀질 수 있다. 이에 따라 강박적인 인성에서는 회의감이 별별 변화된 형식으로 나타나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 회의감은 위험한 자발성, 후회하게 될 게 틀림없는 그 무엇 엔가로 정신없이 휩쓸려감에 대한 방비인 것이다. 그리하여 회의하기는 점점 더 절대화 되고, 자체 목적이 되고 그럼으로써 생생한 행동에 대한 대용물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회의감은 전기를 살펴보게 되면 궁극적으로 원초적 회의감으로 귀납된다. 즉 내가 나 자신이어도 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해도 되는가, 아니면 순종하여 나 자신의 본능적 충동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그러니까 ‘착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악해‘도 되는가. 내지는 ,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이런 회의 하기는 강박적 인간의 특징인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우유부단하며 미루고 미루는 경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두 건초 더미를 두고 어느 쪽 더미부터 시작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지 못해 두 건초 더미 사이에서 굶어죽고 마는 부리단의 당나귀(스콜라 철학자 장 부리단이 설명한 망설임의 철학) 같은 상황에 빠져든다. 강박적인 사람은 행동하려는 용기와 처벌에 대한 불안, 이 둘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본래의 성향과 이 성향을 따르는 불안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에 의해 결단이 더욱 어려워진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강압의 강도는, 어린 시절에 본능적 충동과 처벌 불안의 관계가 어떠했느냐에 달려 있다. 회의하는 망설임과 머뭇거림, 고통을 주는 결단 내리지 못함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한번 한 결심과 결단이 뭔가 최종적인 것, 뭔가 취소할 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면 더욱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절대로’ 옳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각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는 이미 중요하지도 않아진 결단들마저 문제가 될 수 있다. 늘 바로 꼭 정답인 해결책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이 온다. 강박적이면 강박적일수록 그만큼 더 그런 강압 회의감이 분별력 있는 행동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 그것들은 회의감 중독으로 치달을 수 있으며, 생각 하나하나를 반대생각으로써 대답해야 할 정도로 반사적으로 침입한다. 본능적 충동과 반대 힘의 연속이 점점 더 급하게 이루어지며 , 마침내는 두 가지가 거의 동시에 등장하는데 이른다. 즉 처음에는 힘과 반대 힘 사이의 휴지가 길었다가 갈수록 점점 짧아져, 이를테면 아주 빠르게 연속되는 ‘네 - 아니오― 네- 아니요’같이 되는데, 그것은 신체적인 것으로 전이되어. 덜덜 떨기나 더듬거리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그때그때 이 무언가를 하려함과 해서는 안 됨, 아니면 무언가를 발현 하려는데 그래서는 안 됨이 문제가 되느냐에 달려 있다. 끝에 가면 두 가지 맞서는 힘들은 시간적으로 사실상 일치하게 되고 완전한 상호차단과 긴장병적 굳어짐 가운데서 완전히 병행하게 된다. 말을 하면서 동시에 말을 하지 않고, 치면서 동시에 물러서려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마비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런 라인의 끝에서는 자극과 본능적 충동들이 전혀 인지되지 않을 것이고, 더는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방어가 어찌나 반사적으로 일어나는지, 본능적 충동이 생겨나면서 이미 질식당하는 것이다. 강박적인 인간은 그러니까, 세상에는 많은 것이 오로지 규정된 방식으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그가 하고 싶었던 많은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그토록 어린 시절에 너무나 일찍 경험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 언제나 절대적으로 올바른 그 무엇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표상이 생겼다. 여기서 그의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이 발전되어 나온다. 그는 이런 완벽주의를 고양하여 원칙으로 만든다. 모든 살아 있는 것 앞에 조건들을 세우고 싶어 한다. 그의 의견에 따르자면, 그래야 하는 대로, ‘왜냐하면’ 작가 모르겐 슈테른(1871~1914, 재치 있는 언어 구사로 구체시의 초기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독일 시인)이 그의 주인공 팔름슈트류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바와 같이 “존재해도 좋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렇지만 혼돈스러운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도 강박적 면모를 개발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작용 적이고 보상적으로 나타난다. 즉 아이는 그의 주변 세계에서 지향할 것도, 지주도 찾아내지 못한다. 체험하는 자유는 자신을 불안케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온갖 자의의 가능성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신이 매달릴 수 있고 자신에게 안전을 줄 수 있는 질서와 굳은 원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개발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럴 때 이 안전은 강박적 형태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환경에 의해 점점 더 위협받기에, 그래서 그만큼 더 그것들에 매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강박적 체험 방식의 사례] ○이로써 우리는 강박적인 사람들의 특징적인 면모에 이른다. 즉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안전장치를 하기 위해 공공의 의견에 의존한다. 남들이 말하는 것에, 사람들이 말하고 행사하는 것에, 혹은 말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에, 그때그때의 연습에 의존한다. 이는 그들의 교육을 반영한다. 그 교육은 아이에게 왜 그런지 분별력 잇게 설명해 주지 않고, 늘 그런 건 다들 하지 않아 라고만 말하는 교육이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밝히지 않은 채 그런 계명이 주어지고 금지가 요구되면, 아이는 그것을 이행할 준비를 별로 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차츰 사라지고 있는 가부장제에서는 통상 부모는 늘 옳고 그들의 권위는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낙원 신화에서 이미 최초의 남녀 한 쌍에게는 한 그루 나무가 근거도 밝히지 않은 채 금지 되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그렇듯이 바로 인간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이는 실낙원으로, 타락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예들에서 아마도 인생 발전의 배경들이 얼마나 다면적이고 복잡하게 보일 수 있는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이를 매우 줄여, 이를테면 시간을 축약한 가운데 기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인생은 엄청나게 다면적인 배경 위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라는 인간이 이루어지게 하는 그 모든 것을 포착하여 묘사할 수 있으려면 시인이어야만 하리라.
[보완적 성찰] ○강박적인 사람에게는 늘 어딘가에서 이런 완벽주의가 나타나는데, 이로써 삶과 멀어지고 삶과 적대적인 자세에 이를 수 있다. 그는 삶이 마땅히 어떠해야 할 지 늘 규정을 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가 인생을 강제하려는 정도로 그에게는 그런 노력 자체가 강박이 된다. 근원적으로는 자신 속의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강제해야만 하니 말이다. 늘 깨어 있는 ‘혼돈’에 대한 통제와 그것을 규칙과 법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다. ~~~그들이 사소한 것들에도 크게 방해받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바로 하나의 사소한 것이 이미 종말의 시작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소한 비 규칙성, 주의력을 잠깐 끊는 것이 억압해 둔 것의 폭발에 이르게 한다. 심리적으로 억압된 것이 걷잡을 수 없는 눈사태가 일어나도록 더해지는 마지막 작은 눈송이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 강박적 사고는 쉽사리 불모한 궤도로 잘못 접어들어, 자유로운 창조력을 저지하는 차단목이 될 수 있다. 있을지도 모를 실수와 오류에서 자신을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런 사람들에게 과도한 형태로 나타나 끝내 아무것도 교정하고 개선하지 못하는 데 이를 수 있다. 완벽은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박적인 사람은 늘 그 자체로 옳은 인식과 통찰을 어처구니없는 곳까지 몰고 가는 위험에 처해 있다.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순화되고 상시 통용할 수 있는 것으로 끌어올리려 하기 때문이다. ○ 강박적 인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 가장 먼저 위기가 온다. 굳어진 채 고수되어 온 원칙, 의견, 이론 등등이 지금껏 해온 그들의 방향 잡기를 위협하고 그들의 체계를 포기하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발전, 새로운 인식, 진보와 충돌할 경우, 혹은 그들의 안전과 소유가 위협받는 것으로 나타날 경우다. ~~~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아무것도 안 달라져“ ”그것도 우리 어린 시절에는 하면 안 되던 일이야“ ”만약 그런 일이 다시 한 번 일어나면 구리 사이는 끝장이야“ 등등이 전형적인 예다. 그들은 아이의 나이와 고유한 구조에 도무지 유의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로든 아이에게 너무 적은(역할을 함) 공간을 준다. 그리고 아이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표상에는 너무도 탄력이 없다. 온 사방에서 그들에게는 , “한번 거짓말을 한 사람, 그 사람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원칙이 유효하다. 그들은 한번 “아니오”는 영원히 “아니오”인 “그만해” 타입이다. 한번 말했기 때문에, 항변이나 근거 대기는 필요 없다. 이는 자녀의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고 자녀를 미성년 화한다. 그들은 자녀에게 잘못이란 만회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주며, 오래 마음에 두게 하며, 사소한 ‘잘못한 일’이 과도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며, 죄와 벌에 대한 불안, 양심 불안이 불필요하게 강화되게 한다. 오랜 화해 불능과 도달되기 어려운 용서를 통하여 그렇게 된다. 그들은 대개 아이에게 너무 일찍 한계를 정해준다. 늘 느슨하게 해주던 아이가 위험하게 발견되도록 방치될까봐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적인 발전을 너무 신뢰하지 못한다. 그들 자신이 체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이에 걸맞게 시고해본 행동은 위험한 성격 면모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아이는, 너무 일찍,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완벽하게 할 수 있어야 하므로 과잉 요구를 받는다. 이를테면 그들 자신에게는 무의미한 정확한 시간 지키기, 현학적인 질서 잡혀 있음. “식탁에 나오는 건 다 먹어야” 하거나 자기 앞에 놓인, 아이 자신이 스스로 정해서는 안 되는 많은 양을 어떤 경우에든 다 먹어야 한다. 등이다. 아이가 나이에 걸맞은 반항 자세를 보이면 부모는 거기서 이미 훗날의 폭도를 본다. 즉 이는 제때 아이에게서 몰아내야만 할 모습이다. “모든 것을 너무 일찍부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과잉 요구를 통해서 아이는 불안해지고 열등감을 갖게 된다. 그런 아이가 사랑받게 되는 것은 오로지 성과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아이는 불안과 과잉 요구에서 비롯된 노력과 혹은 실패자로 키워질 수 있다. ○강박적 인간은 대개 모든 역사적인 것에 관심이 있다. 그에게는 예술사, 의학사, 철학사 등 영사 그 자체가 흥미 있다. 또한 이미 지나가버린 것은 더는 잘못될 수 없고, 그렇게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일도 무언가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고고학, 고대학, 그리고 그 비슷한 분야들이 특히 그들의 마음을 끈다. 인문학자들 가운데서는 고전 인문학자가 많고, 역사가들 중에서는 선사역사가 등이 많다. ○정치는 강박적인 사람을 특히 권력의 관점에서 자극한다. 여기서는 그의 권력 소망이 가장 정당하게 발휘될 수 있으며 그것과 어떻게 교류하느냐는 그의 인간적 스케일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는 보수주의 경향이 있으며 그때그때의 정당성이나 존재하는 체제에 충실하게 머무는데, 이는 오래된 것은 어쨌든 증명 받은 것이고 잘 아는 것이라는 관점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극단적이고 실험적인 것을 자신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거부한다. ○ 강박적인 면모는 노년에 오히려 강화된다. 이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노령은 깊은 생명 본성에서부터 인간이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고정시키고 시간의 물결을 멈추고 싶어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앞서 묘사된 강박적 자세가 상승된 형태를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권력과 비장함을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고수하려고 한다.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과하게 나이가 들어, 더는 지금까지 해온 모든 새롭고 젊은 것에 대한 증오를 유지할 처지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토록 완전히 성과와 의지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잡혀 있는 그에게는 특별이 어렵다. 그는 자신을 대치 불가능한 존재로 여긴다. 힘을 늦춘다는 것은 그에게서 쉽사리 심기증의 면모로 이어지고, 불안한 자기관철과 건강 관심주의에 이른다. 그는 힘을 늦추는 것, 익숙한 성과의 늦춤에만 유의하느라 나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호기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좀 더 많이 자신과 더불어 일어나게 할” 좋은 기회인데도 강박적인 면모들 때문에 고집이 강하게 굳어지면 죽는 일이 특별히 괴로워질 수 있다. 모든 포기를 약점으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가장 힘든 주금과의 투쟁에 이르게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따금씩 이런 사람들은 바로 노령에 가부장적인 위대함과 존경할 만한 상태에 도달하고 그들로 대표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거기에 맞서 몸부림치는 것은 아무 뜻이 없는 자연의 필연성이 된다. 죽음은 사람이 굽혀야만 하는 마지막 현실이고, 때가 그만큼 되었으면 초연한 자세와 품위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다. 그들은 제때 안건들을 정리하고, 유언을 쓴다. 어떤 사람들은, 유언의 규정들로 죽음 너머에서까지 힘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한다. ○다시, 강박적 인성 구조의 몫이 있는 건강한 사람부터 강하게 강박적인 사람들을 지나 고유한 강박증 환자에까지 이르는 하나의 선을 스케치해보면, 두 가지 가능성을 알아 볼 수 있다. 그 선은 성향상 활력이 강한 인성들에서 현실적이고 의무에 충실하며 믿을만한 사람으로부터, 즉 객관성이 있고 사실적이며 의무에 충실한 믿을 만한 인물로부터 객관성이 커지게 되면 공명심 있는 노력가에 이르고 - 도무지 가르쳐지지 않는 고집 센 사람과 잔소리꾼에서 - 독재적 권력 인간, 폭군, 독선적인 사람에 이르고, 다양한 정도의 강박증 환자에까지 이른다. 이 선의 끝에 아마 긴장형 정신분열병의 질병상들이 있을 것이다. 활력이 약한 사람들에게서는 이 선이 대략 이런 모습이다. 눈에 뜨이지 않는 적응 - 주로 자신을 자전화 하는 삶이 두려운 사람들 - 회의자와 망설이는 사람 - 현학자와 불평불만가 - 기어드는 사람과 ‘자전거 타듯 아랫사람들을 꽉꽉 눌러 밟으며’ 출세 속도를 높이는 상후 하박형 인간 - 절제적인 심기증 환자. 그 끝에는 여기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강박 환자들이 있다. 강박적 구조 몫이 있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견고성, 견딜 힘, 지속과 의무감이 두드러진다. 그는 지향적이고 부지런하며, 계획에 차 있고 목적을 향해 노력한다. 대개는 먼 목표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그가 도달하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재를 너무 조금만 즐길 줄 안다. 그의 수미일관함, 유능함, 끈질김, 책임 의식과 두드러진 현실감각 덕분에 그는 큰일을 이룰 수 있다. 연대, 정확함, 신뢰, 항존 성과 또한 전이 되는 도덕적 의미로도 청결이 그의 미덕에 속한다. 그는 감정에서는 소극적인 편이지만, 애정에서는 지속적이다. 또한 모든 것을 지속에 비중을 두고 한번 계획한 것에서 쉽사리 관심을 떼지 않는다. 그의 기본 정조는 오히려 진지하다. 그는 그의 의견 편에 서 있다. 그는 양심적이고 객관성을 이루려 애쓴다. 라인홀드 슈나이더(1903~1958, 나치에 저항하는 기독교적 작품을 썼던 독일 문인) 는 그의 책 ,필립 2세>에서 이런 구조로 된 형식을 갖춘 인물하나를 그려놓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위험성은 그러니까 언제나, 그들이 지속과 안전을 향한 그들의 욕구를 너무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데 있다. 그로써 주어진 가능성을 굳혀버리도록 인식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 있는 변화를 향한 준비 태세라는 힘을 좀 더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서 그들이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을 좀 더 과감하게 해볼 수 있어야 한다. 즉 무상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들이 좀 더 배워야 할 것을 오로지 의욕적으로 원하지만 않고 그냥 일이 되어가는 대로 두는 일이다. 민족 전체의 틀 안에서 그들은 전통을 지키고 쌓아가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는 “사회의 버팀목들”이다. 그들이 안전만 추구하고 권력을 탐하는 면을 만연시켜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들이 되지 않고 살아 있는 대립 힘들을 통하여 극복된다면 말이다. [[필연성에 대한 불안]] [히스테리성 인성] ○새로운 것의 마력,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는 자극, 무언가를 감행해 보는 기쁨, 이것 역시 지속과 안정에의 소망과 마찬가지로 우리 본질의 일부다. 모험은 우리의 마음을 끈다. 먼 나라들은 우리의 마음을 끈다. 우리는 향수뿐만 그리움을 잘 안다. 우리에게는 친숙한 안정감에의 그리움이 있는 동시에 우리에게서 익숙한 테두리를 깨뜨리고 우리를 풍요롭게 하며 우리 속의 새로운 면에 말을 걸어오면서 우리를 변화하게 하는 먼 곳에 대한 그리움 또한 있다. 우리는 우리 본질의 모든 가능성을 알게 하고 남김없이 길어내고자 새로운 사람들을 찾는다. 함께 사는 인간과의 만남으로 우리를 확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고, 더 완벽해지게 하는 것으로 향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불안의 근본형태, 최종적인 것, 벗어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 필연성과 자유 욕구를 제한하는 것에 대한 불안에 이르렀다. 이불안은 강박적 인간에게서 논의된 불안의 거울상이다. 강박적 인간이 변화와 모험을 두려워한다면 , 이제 그리려는 히스테리성 인성에서는 정확하게 그 반대가 문제가 된다. 그들은 명백하게 변화와 자유를 지향하고, 모든 새로운 것을 긍정하며 모험을 즐거워한다. 그들에게는 미래, 그들의 가능성과 더불어 그들 앞에 열려 있는 미래야말로 큰 호기다. 그에 상응하여 그들은 이제 모든 제한, 전통, 굳어지게 하는 법칙성을 두려워한다. 강박적인 사람에게는 바로 가치였던 것들이다. 다시 속담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들은 “한 번쯤은 병가지상사” 라는 신조에 따라 산다. 최종적인 구속력이 있거나 의무를 과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영원한 유효성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언제까지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살아 있고 다채롭다. 다만 현재가, 순간이 중요하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 하라는 뜻의 라틴어], ‘기회를 이용하라’, 기회는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더는 관심이 없다. 미래는 가능성의 광야다. 그러나 미래는 사실은 계획되지 않았고(그렇다면 그건 벌써 또다시 너무 많이 굳은 것이리라) 중요한 것은 다만, 언제든 미래에 열려 있는 것, 주어진 것에서 자신을 풀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해온 비유의 언어로 말해보자. 끌어들이고 집중시키는 중력은 소홀히 하고, 중심에서 과도하게 벗어나려는 원심력이라는 반대 힘에만 충실하게 살려고 한다면? 그 뜻은 어쩌면 순간에서 순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일 것이다. 굳어진 계획이나 명확한 목표 없이 늘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며, 새로운 자극, 인상, 모험을 찾으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그때그때 마침 지배적인, 외부나 내부에 제공되는 자극이나 소망에 관심이 끌려가버리고 유혹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유의 감정이다. 질서와 법칙성은 고정되는 것에 대한, 물러설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자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유효하고 구속력 있는 질서들을 이들은 주로 자유를 제한한다는 측면에서 체험하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거부하거나 회피한다. 그렇게 얻고자 지향하는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기보다는 무엇을 위한 자유다. 어떤 인간적 공동생활에 유효한 게임 규칙들을, 자연법칙성과 생명법칙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랬을 때 고무줄 같은 세상에서 살게 된다. 겉보기에는 그 질서들을 마음대로 굽히고 멋대로 늘일 수 있지만 그것들도 자꾸자꾸 변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의 행동에 뒤따르게 마련인 결과를 회피하자면 늘 빠져나갈 작은 뒷문 하나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인과성의 법칙, 원인과 효과의 연관성은 물리적 자연의 영역에서는 불가피하게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 그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누가 알랴, 어쩌면 그것이 바로 오늘 여기서는 유효하지 않을지. 물론 그럴 때는 대개 우리를 물러설 수 없게 고정시키고 한계를 긋는 그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 될 수 있으면 피해야만 한다. 즉 생물학적 사실이나 남녀의 성적 역할, 나이 먹음과 죽음, 인습들, 모든 게임 규칙같이 인간적 교류를 위해 한 집단이 마련해 놓은 것들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들은 우리에게 불가피한 한계를 지우는 삶과 세상의 측면들을 가장 두려워한다. 즉 우리가 현실, 리얼리티라고 표현하곤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가 적응해야 하고, 생명의 법칙성에 우리가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들의 세계다. 그런데 그들은 이 리얼리티를 적당히 대한다. 즉 그것을 의문시해 보고, 상대화 하고, 하찮게 여기거나 넘겨보고, 폭파시켜버리려 들고, 조그마한 가능성만 있으면 거기서 벗어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해본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가상 자유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시간과 더불어 점점 위험해지곤 한다. 이들이 환상, 가능성, 소망만 있을 뿐, 한계를 긋는 실재가 없는 비현실적인 착각의 세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점점 더 일종의 의사(疑似; 비슷하여 분간하기 어려움) 리얼리티, 비현실적인 현실 속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리얼리티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만큼 더 자신이 매달리는 가상 자유에 대하여 치러야 하는 대가도 커진다. 현실적인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것과 교류할 줄 모르는데 대한 값을 톡톡히 치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짜 현실에 관여하려는 시도를 너무도 적게 하고, 그래서 실망하며 길이 막히고, 그 다음에는 더욱 더 자신의 소망세계로 되돌아가게 되어, 소망 세계와 현실 사이에 벌어진 간극이 점점 더 커지는 상태에 이른다. 히스테리성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악마의 원이다. 의사 현실의 측면을 더 가까이 살펴보자. 우리들 현존의 실재들 가운데 하나는 이미 언급한 원인과 작용, 행위와 결과라는 인과법칙이다. 그것이 우리를 강제로 하나의 법칙성 속으로 밀어 넣는데, 그 법칙성은 우리가 처벌받지 않은 채 하찮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인과법칙이 다만 자신을 옥죄며, 수미일관하기를 포기하라고 강요한다는 느낌에서 히스테리 환자는, ‘타조 정책’을 통해서 거기서 벗어나 보려 한다. 이들은 마치 인과법칙이란 존재하지 않기라도 한 듯 행동한다. 그때그때 그의 안에 지배적인 소망에 사로잡혀 인과법칙으로 하여 있을 수 있는 결과들은 전혀 시험해보려 하지 않고, 이를테면 “나 다음은 세상이 망하든 어쩌든 나는 몰라라”하는 신조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 사람은 소박하게도, 어쩌면 바로 자신을 위해서는 사건 진행의 인과성과 수미일관성이 유효하지 않거나 적어도 바로 문제시되는 상황을 맞지는 않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소망으로 채워지고, 바로 그 순간 자신이 가지고 싶고, 도달하고 싶은 것으로 채워져, 가능한 인과적 결과들을 보려 하지 않고 넘겨버린다. 그는 이를테면 다만 마지막만 생각하고 인과를 건너뛰는데, 그것은 그에게 엄청난 암시적 영향을 줄 수 있다. ○ 히스테리성 인성들의 특징적 면모는 짧은 긴장 곡선, 욕구의 긴장을 견뎌내겠다는 마음이 대체로 없음 혹은 그럴 수 없음. 기다림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충동, 모든 소망이 될 수 있으면 즉시 충족되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 그들의 커다란 유혹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유혹에 쉽사리 저항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고유한 불안 (여기서는 필연성과 최종성에 대한 불안이다)이 의식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에서 발견되는 불안들은 광장 불안과 거리 불안, 엘리베이터, 좁은 기차간 같은 닫힌 공간 공포증(폐쇄공포증)이다. 동물 공포증도 빈번하다. 이런 불안들은 고유한 불안을 부차적이고 무해하며 무엇보다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밀쳐놓는데서 나온다. 엘리베이터 불안이나 다리 불안 같은 것을 갖게 되면 엘리베이터나 다리를 죄다 피함으로써 불안을 피할 수 있다. 자유의 제한이나 대처 능력이 없는 (이는 진정으로 포기할 수도 없고 소망한 것을 취할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유혹 받는 상황에 대한 본래의 고유한 불안 , 이런 내적 갈등은 외적인 불안 대상으로 밀쳐진다. 이 대상들은 자신의 불안 때문에 더는 유혹에 내놓일 상황에 오지 않게 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한다. 왜냐하면 내가 더는, 적어도 혼자서는 길거리로 나설 수 없다면 나는 어떤 유혹에도 노출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를 피하는 것은 진정한 해결이 아니고 믿을 만한 불안 방어도 아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거듭거듭 자신의 불안과 직면하게 되고 불안과 대결하게끔 내몰린다. 그럼에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어졌다고 느끼고 더는 출구를 볼 수 없을 경우, 그것은 공황반응, 즉 앞으로의 도피에 이르는데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상황의 분별 있는 돌파도 더는 가능하지 않다. 이제 히스테리성인 사람에게서 특징적인 잘못된 자세가 어떻게 점차 불어나고 그들을 점점 더 돌파구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지 살펴보자. 책무와 최종적인 것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무얼 할 수 있는가? 늘 그때그때 순간에서만 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보인다. 마치 그 순간은 전사(前史)고 결과도 없기라도 한 것처럼, 예를 들면 ‘내가 어제 잘못을 했다면, 바보짓을 저질렀다면, 사람들이 내 책략을 알아차리겠지. 그러니까 어제는 없었던 거야. 그리고 삶은 오늘 비로소 시작돼 하고 시간적 · 인과적 연관을 깨뜨림으로써 히스테리성 인성들은 엄청난 유연성을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그들은 역사가 없이, 과거가 없이 살고 잇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엄청난 짐 덩이 하나를 내던져버리지만 반면 그럼으로써 그들의 삶에는 점 모양의 무언가가, 파편적인 것과 어른거리는 것이, 지속성의 결핍이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카멜레온처럼 모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만, 우리가 성격이라고 부르곤 하는 자아의 일관성을 너무도 적게 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상을 할 수 없고 포착이 잘 안 된다. 늘, 그때그때 순간과 자신의 욕구, 그리고 그때그때 상대방에 맞추어진 어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궁극적으로 온통 역할놀이에 가려져,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지속성, 명확한 윤곽과 성격적 각인이 없는 일종의 유사인격이 개발된다. 좁은 곳으로 몰아넣어졌다고 느끼기 때문에 불안을 갖게 될 경우, 또 하나의 가능성은 “창끝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비난이 남에 대한 비난으로 변하는데. 이는 아이들에게서처럼 반사적으로 진행된다. 예컨대 어떤 아이가 “넌 멍청해”라고 말하면 , 다른 아이는 반사적으로 “자기가 멍청하면서”라고 대답한다. 비판을 받거나 비난을 받으면, 그것을 즉시 반대 비판과 반대 비난으로 변화시킨다. 그것들은 상황에 따라 끌어온 맡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끌어다 씀으로써 그 순간 부담을 덜고 자기 통찰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자신의 죄책감을 외부로 향한 비난으로 투사하는 것은 , 끝에 가사는 스스로 그건 남의 잘못이었다고 굳세게 믿는 지경으로 치닫을 수 있다. “도둑 잡아라” 라는 식으로. 물론 그것은 점점 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직함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인생이 송두리째 거짓 인생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는 ,밑바닥에 깔린 불안정한 느낌과, 자신과 함께 하는 불특정한 불안들을 가져온다. 극단적인 비상 경우에는 수미일관성과 리얼리티의 받아들임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하나의 역할을 찾아낼 수 있다. 즉 “질병으로의 도피”인데, 이는 적어도 다시금 시간을 벌게 해준다. [히스테리성 사람의 사랑] ○히스테리성 인간은 오히려 본능적으로 분열증적인 파트너에게서 물러선다. 분열증적인 파트너는 너무나도 쉽게 그를 간파하고, 확인 받고 감탄 받으려는 그의 욕구를 성취시켜줄 용의는 너무 적기 때문이다. 반면 그들은 즐겨 디프레시브한 파트너를 택한다. 디프레시브한 파트너는 이렇게 할 용의가 있고, 자신을 과잉 요구받도록 할 용의도 잇다. 그런 결합이 지속되면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디프레시브한 파트너가 희생당하곤 한다. 히스테리적 구조 권에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애착은 히스테리적 구조 몫이 지나치게 두드러지지 않을 경우에만 잘 되어나간다. 그렇지 않으면 라이벌 관계가 되고 서로 찔러 밀어내려 하는. 피할 길 없는 벼랑에 이른다. ○히스테리성 여성들이 탁월하게 묘사된 예가 있다. 예를 들면 서머싯 몸의 <루이제>라든지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같은 인물들이다. 푸슈킨과 폰타네의 편지들에서는 주로 히스테리적인 구조를 가진 파트너에게서 겪는 어려움들을 잘 볼 수 있다. <어부와 그 아내>에 관한 동화 [한 어부가 넙치를 잡았는데 알고 보니 이 물고기는 요술에 걸린 왕자였다. 왕자는 자신을 놓아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욕심 많은 어부 아내는 남편을 졸라 매일매일 넙치에게 더 큰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하다가 왕비 ·왕· 교황도 모자라 마침내는 하나님이 되게 해달라고 한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도 여기로 끌어올 수 있다.
[히스테리성 사람과 공격성] ○ 네 살에서 여섯 살 사이의 어린이가 추가로 얻게 되는 특별한 공격 형식은 라이벌하기와 경쟁이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발전의 걸음마가 그러하듯이 어린 시절의 공격 형식은 계속 유지 된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애와 정복이라는 기본 형식에서 특성적인 공격이다. 더욱 일반화 하자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한 싸움과 그것을 위협하는 듯 보이는 모든 것에 맞서는 싸움이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공격성은 무엇보다 남과 경쟁하는 데서 또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하는 데서 표현 된다. 그런 공격성은 인정받고자 하는 지향의 활동 안에 있다. 앞서 묘사한 강박적 인간과는 반대로 히스테리성 인간에게서 공격은 탄력적 ·즉흥적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또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자행될 때가 많다. 그 대신 그리 오래 끌지 않고 뒤끝도 적다. 이는 제멋대로 굴기에까지 이르는 모든 충동적 표현에 걸쳐져 있지만 일 자체나 사람과는 적게 연관시키는 편이다. 히스테리적 면모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더 많이 인정받기 충동을 위한 공격성이 투입된다. 고등 사기에까지 이르는 뒤섞인 자기 미화는 극단적 형식들이며, 나르시시즘적 모욕에 엄청나게 자극적인 예민함으로 반응한다. 그렇게 되면 떠벌리기, 만족을 모르는 인정받기 중독이 등장한다. 늘 자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제1바이올린‘만 연주하려 한다. 같은 성의 타인은 누구든 잠재적 라이벌이고, 그를 찔러 밀쳐내는 것을 자신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에게서는 빈번히 압도하려는 ‘거동’ 형식을 찾을 수 있다. 무조건 남에게 인상적이고 싶어 하고, 구심점이고자 하는데, 이 압도하려는 욕망은 그 뒤에 있는 불안정이 클수록, 즉 가상과 존재 사이의, 소망의 자아와 실제 자아 사이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도가 커진다. 여기서 공격은 자기비판과 자기통제의 결핍으로 지나치게 충동적인 면을 가진다. 이들은 쉽사리 공격에 휩쓸려 너무 멀리 나아간다. 밥 먹듯 과장하는 것이 이런 인성의 일부다. 또한 특징적인 것은 일반화 경향이다. 파트너를 공격할 때는 “남자들은 다 걸레야” “여자들은 다 멍청해” 등등의 말을 내뱉는다. 히스테리성 공격은 거의 질풍 같은 흥분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흥분이 분열증적인 사람에게서는 그의 현존 상황의, 실존적인 위협의 표현인 반면, 여기서 그것은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데 이용된다. 히스테리 환자는 그의 공격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놀래키기의 승자다. 그는 기습을 좋아한다. 그것이 계획된 전략보다 더 성공을 약속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나아가 히스테리적 공격은 ‘비논리적’인 것으로 표기된다. 그에 대한 사례를 들어보자. [예] 남편이 어떤 소홀한 점 한 가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정당하고 조용하게 비판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내는 거칠고 격렬한 감정에 빠져, 문제 자체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녀 편에서 남편에게 홍수 같은 비난을 퍼붓는데. 그 비난들은 문제의 안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고 완전히 동떨어진 일들에나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실재에서 벗어나 앞질러 도피해가며 그저 창끝을 거꾸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은 가벼운 비판이나 지극히 미미한 공격에도 커다란 모욕을 받은 것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동일시가 부족했기 때문에 자기가치감은 설 자리가 아주 좁고, 그렇기 때문에 즉각 뒤흔들릴 수 있다. 자기애에 단지 가벼운 모욕만 받아도 바로 최고 밀도의 증오감이 유발될 수 있다. 그런 감정과 사랑할 만하지 않을까봐 불안해하는 것의 연관성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히스테리성 공격의 특별한 형식은 술수다. 여기서도 가족적인 생성을 볼 수 있다. 즉 그 가운데서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에 부모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들 사이를 교묘히 곡예 하듯 뚫고 나가야 했던 상황을 되풀이 한다. 이는 한 쪽 부모에게서 다른 쪽 부모에 맞서, 혹은 어떤 형제자매를 반목시키며 역할을 다했던 해결되지 않은 가족 문제들의 객체가 되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 등에 모든 갈등을 짊어지는 객체가 되었던 상황이다. 그리하여 간계, 타인의 위신을 깎아내리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데 까지 이를 수 있는 평가절하, 두드러지는 복수의 태도가 생겨날 수 있다. 여기에 성별 간의 증오까지 더해지면, 복수욕은 극단적 형태를 보인다. 히스테리성 공격은 ‘요란한 장면’을 연출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장면에서는 점점 더 큰 강도로 치닫게 되고, 그 가운데는 분명하게 ‘고n 같은 표현의 재능이 얼마간 응용된다. 불같이 이는 격분, 격정적인 제스처와 열정적인 고발은 전형적인 히스테리적 공격성의 표현인데, 이는 관객이 없으면 스스로 풀썩 가라앉는 수가 많다. [인생사적 배경] ○어떻게 필연성과 최종성에 대한 불안이 그렇게 과도하게 체험되는데 이르는가? 충동 측면에서 보자면, 충동이 중심에서 벗어나 구심점을 피하며 일면적으로 발휘되게 되는 변화에 이르는가? 우선 다시 그러한 성향에 맞는 인자들을 찾아보면, 정서적인 면에서의 타고난 활기참과 붙임성을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전달하고, 내적 체험을 밖으로 그리려는 커다란 자발성과 생기 있는 충동을, 또한 접촉을 즐기고, 접촉을 욕구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두드러진 욕구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 성향들을 통해서 사람은 함께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주는 호감과 그들에 의한 확인에 의지한다. 그런 성향은 생생함, 개방성, 적응 가능성과 변화 가능성 가운데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또한 매혹당해 휩쓸려 갈 수 있을 만큼 삶이 강렬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필요하며, 스스로 고무시키기도 한다. 타고난 매력과 아름다움은, 그들이 일찍부터 호감을 일깨우는 것을 수반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쉽게 좋아할 수 있고, 그러기에 그들은 남의 마음에 드는 데 익숙하다. 그들은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또한 스스로 그 점을 재빨리 감지한다. 이런 장점들은 또한 다나에의 선물[트로이의 목마 같은 지극히 위험한 선물]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것을 위해 굳이 무얼 성취하지 않아도 사랑받고 찬탄 받는 체험을 하곤 한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외적인 장점을 매우 일찍부터 믿는 길로 들어설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언제 어디서나 자명하게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그럼으로써 그런 성향들은 문제적으로 발휘되며, 여기엔 주변의 자명한 영향이 필요한 데 이제 이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정신분석적 체험에 따르면 히스테리성 발전이 가능하게 되는 단초는 네 살에서 여섯 살 경에 있다. 이 나이에 아이는, 이제 영아의 나이를 벗어나 자라고 성숙해지며, 중요한 발전 단계들을 완수해야 한다. 아이는 그 사이에 풍부한 능력들과 행동 가능성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과제들 앞에 세워진다. 아이는 차츰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자라 들어가야 하고, 그 세계의 게임 규칙을 알게 되어야 한다. 그는 여자아이로서 혹은 남자아이로서 성 역할의 첫 단초를, 그리고 미리 예감하는 미래의 첫 단초를 벌써 가져보아야 한다.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남에게 빗대어 재어보는 하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또한, 아이가 무제한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었던 지금까지의 자신의 마술적인 소망 세계를,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지워지는 리얼리티라고 부르는 현실을 위하여 포기해야 함을 뜻한다. 그의 내적, 외적 체험 세계는 더 넓어지고 풍요로워지며 본질적인 것에서는 이미 어른의 삶에 속하는 모든 체험 영역을 포괄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점점 더 많은 통찰, 책임, 분별을 기대한다. 간단히 말해, 아이는 이 지점에서 어른이 되는데 필요한 것들, 즉 리얼리티를 받아들이는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 이런 성숙 단계가 성공하려면 아이에겐 확신을 주는 모범적인 상이 필요하다. 지향해서 얻을만하게 보이는 무언가를 앞서 살았던 모습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가 그에게 매력에 가득 찬 것으로, 어른들로 대변되는 질서와 삶의 형식이 모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여야만 한다. 어른들은 이 시기에 새로운 방식의 요구를 받는다. 그들 앞에는 이제 그들을 우월하게, 절반은 신같이 여겼던 그런 영아가 아니라, 아이가 있다.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커가는 지식욕을 지니며, 사명과 소명을 위해 질문하고 근거를 들으려 하고, 전체적 인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스스로를 사랑스럽게 체험하고자 하는 , 또한 무엇보다 자신의 사랑도 부모에게 무언가 의미 있기를, 자기도 무언가 줄 것이 있음을 체험하고 싶어 하는 그런 어린이가 있는 것이다. 아이는 첫 단초로서 그의 성별 특징적 행동 방식을 형성해나간다. 이는 자신을 뽐내며 구하는 방식 혹은 무언가를 정복해가는 행동방식을 뜻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행동 방식을 남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부모의 성숙과 이해가 특별히 중요하다. 아이가 자신에 대해 모색하고 설계하기 위한 건강한 인도자 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설계는 건강한 자기가치감에 이르러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체성의 발견에 이르러야 한다. 히스테리성 인성들은, 인도와 모범 욕구가 가장 강한 바로 이 시기에, 그것이 결여된 사람들이다. 영아기를 벗어나서 자라고 삶의 리얼리티를 받아들이며 어린이다운 태도를 포기하자면 , 책임과 필연성을 통찰하고 무책임한 아이로 머물기를 포기하자면, 이 모든 새로운 과제를 받아들이자면, 세상이 어린이에게 의미 있게 비치는 질서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부모가 아이의 마음속에서 나도 부모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일깨울 수 있으면, 아이는 자신을 보모와 동일시하려할 게 틀림없다. 오직 그럴 때만 아이는 , 이전의 어렸던 행동 방식과 자유를 포기할 용의를 갖게 될 것이다. 새로운 과제들을 감내하는 것이 기쁨을 주고, 아이를 자랑과 건강한 자기 가치감으로 채우려면 성별 특징적 확인을 체험해야 한다. 이제 혼란스러운 어떤 환경을 상상해보자. 같은 일로 오늘은 벌을 받는데, 내일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심지어 인정을 받기까지 한다. 아이는 계속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아기 취급을 받는다. 마치 아이에게 정직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아이가 너무 작고 너무 멍청하고 너무 중요치 않다는 듯 그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의 질문에는 진짜 대답을 하지 않는 환경을 생각해 보자. 혹은 아이 앞에서 격렬한 장면을 보이며 싸우는 부모를 생각해보자, 이런 부모는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아이 앞에서는 몸을 사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아이가 분별력 있게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아이는 자기 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대로 비슷하게 행동했는데 갑자기 질책을 당하고 심지어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받기까지 한다. 부모도 똑같은 행동을 했으면서도 “주피터에게 허락된 것은 황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모토에 따라 부모 마음대로 벌을 준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혼란되고, 모순에 차고 이해되지 않는 환경, 인도자와 건강한 지도자 상이 없는 환경은 아이에게 방향을 잡아주지 못하고 지주가 되어주지 못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책임감 없는 아이로 머무는 쪽을 택하곤 한다. ○부모들이 아이에게 진정한 모범이 되지 못하면 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만이 열린다. 부모와 그들의 가상의 가치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느냐, 아니면 부모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은 완전히 버림받은 것으로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 부모에게서 성 역할이 뒤바뀌어 있는 경우에도, 즉 어머니께서 “바지를 입으시고” 아버지는 “공처가”일 경우에도 아이는 어려워진다. ○ 아버지한테서 실망한 어머니의 위로자 혹은 동맹자가 된다. 그는 아직은 자기 나이에 할 일이 아니고 부담만 되는 일들에 내맡겨진다. 그는 지나치게 가깝고 지나치게 친한 어머니가 뭐든 터놓을 수 있는 인물로서 역할을 맡는다. 그럴 때 아버지를 어머니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아버지와 적대관계가 되거나 때로는 아버지와 관계가 아예 파괴되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부모를 한 쌍으로 사랑하고, 양쪽 모두에게 죄책감 없이 자신의 사랑을 기울일 수 있는 건강한 가능성을 그는 체험할 수 없다. 그러면 조숙함이 유아적인 면모와 나란히 있게 되며, 나중에 남자들의 세계에서 버티는 데 무척 중요한 것이 될 아버지와의 성숙한 대결을 건너뛰어 버린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으나 딸에게도 똑같은 것이 해당된다. 아들이나 딸이나 이성의 부모에 대한 건강한 관계를 수립할 가능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 부모가 아이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데 도달하도록 아이를 이용할 경우, 아이의 히스테리성 발전을 불러온다. 그럴 때 부모는 아이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며 아이를 적절하게 이끌어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의 성향과 전혀 맞지 않는 역할 속으로 아이를 몰아넣을 때가 많다. 이런 바탕 위에서 자주 히스테리와 우울증의 혼합구조가 생겨난다. ○아이가 아빠나 엄마의 태양이어야 하는 역할로 몰아넣어진 경우에도 비슷한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런 아이들은 늘 환하게 웃고, 명랑하고 기분 좋아야 하며,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한다. 그 대가로 그들은 사랑과 경탄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보기에만 좋은 겉치레 삶을 살게 된다. 그걸 뚫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것은 힘들고 늦어진다. ○ 어떤 근거에서든, 일반적으로 흔한 것에서 너무 멀리 동떨어져 있는 환경들 또한 문제가 된다. 이는 특정한 사회적 신분 의식이나 집단 속의 소수를 대변하는 환경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비록 집에서는 보람 있고 심지어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바깥에서는 거부되는 태도와 행동 방식들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대개 학령기에 들어설 때 위기에 이르게 되고, 자신이 전혀 준비하지 못했거나 틀리게 준비한 상황들을 겪는다. 세계에 대한 환멸, 불안정한 느낌과 망신당한 느낌, 자신이 집에서 배운 것이 바깥에서는 아무 쓸모없다는 혹독한 인식이 이제 아이를 퇴행적으로 다시 강하게 가족에게 고정 시킨다. 그런 바탕 위에서 히스테리와 분열성의 구조가 생겨난다. 그러니까 히스테리적 인성의 중심 문제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유년의 모범 인물이었던 사람들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그 모범 인물들에 대한 반란에 붙박이거나, 그들에게 부과된 혹은 제공된 다른 역할들을 떠맡을 수 있을 뿐이다. ○자신과 삶에 대해 전반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까닭에 그들은 지극에 굶주려 있고 늘 새로운 자극과 변화를 찾는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기대한 것을 자극과 변화로부터 얻어내려 한다. 그들은 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깥에 있지, 그들 자신 안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건강하게 되는 회복의 단추다. 자신을 통찰하려는 용의를 가지고, 또한 뒤늦었지만 성숙하려는 용의를 가지고, 리얼리티에서 벗어나지 말고 그 게임 규칙, 질서 법칙들을 수미일관함 가운데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진정성을 추구하겠다는 용기 그리고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불가결이다. 그럴 때만 그들도 리얼리티의 긍정적 측면을 보게 되고 리얼리티가 그들에게 어느 정도 충족과 성취를 줄 수 있는데, 이것은 남들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히스테리라는 개념이 그렇게도 자주 폄하되어 사용되는 것은 이상한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강박적, 우울증적, 분열적인 사람들은 많이 이해하는 편이다. 즉 우리는 그런 사람을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볼 용의가 있다. 반면 누군가 히스테리라고 표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무언가 그들 자신 우월감을 갖게끔 해주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히스테리 환자는 그저 아픈척하는 것이며, 자신이 그러하겠다는 의지만 가지면 어디까지나 분별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옛날의 편견을 전해 받아 지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면 앞서 기술한 환자들의 사연에서 보듯 히스테리는 제시할 수 있는 발전사를 가진 질병이며, 히스테리성으로 병든 사람은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다. [히스테리성 체험 방식의 사례] 생략 [보완적 성찰] ○그들은 자신의 노력 없이 손바닥 뒤집듯 어려움을 떨쳐버리기를 기대한다. ○부담을 주는 죄 있는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욕구다. 너무 많은 것에 책임을 느끼는 우울증 환자와는 반대로 히스테리성 환자는, 자신의 죄를 잊어버리거나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Vergehen 이라는 한 단어로 지나가버리다 혹은 잘못하다는 두 가지 뜻을 시간적인 의미로, 또 윤리적인 의미로 표현하는 독일어의 독특함은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 우리의 잘못은 시간과 더불어 지나가버리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 속의 히스테리적인 부분에 매우 잘 맞는 말일 것이다. 부모로서 또 교육자로서 히스테리적 인성 몫을 지닌 인간은 감격시키고 휩쓸어 끌어당긴다. 그들은 강한 유도 능력을 지니고 잇어 잘 설득시킬 수 있고, 아이에게 인생이란 멋지고 살 만하다는 감정을 줄 수 있다. 감정의 사용에 있어서 그들은 균일하다기 보다는 즉흥적이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사랑스럽다고 느끼고 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감탄한다. 그 가정은 분위기가 있고, 손님을 잘 대접한다. 그래서 다른 많은 아이들이 그런 부모를 부러워한다. 단, 그것은 허울을 알아보기 전까지의 일이다. 부모가 과도하게 히스테리적인 구조일 경우에는 무엇보다 교육에 수미일관함이 결핍되어 어려움이 생긴다. 너무 잘 해줘서 버릇없게 만드는 것과 어쩔 줄 몰라 아무것도 할수 없는 것, 그들은 수시로 이런 형태를 반복한다. 그리하여 아이는 방향을 잡기 어려우며, 어떤 예상을 해야 할지를 도무지 모른다. 어른들의 태도가 객관적 사실에 의해 정해지기보다는 너무나도 분위기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주 정신적으로 변덕스러운 4월 날씨를 연상시키는데, 그건 아이들을 불안하게 하고 혼돈스럽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들은 빈번히 아이의 마음속에 인생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일깨운다. 아이를 실망시켰거나 아이에게 필요한 포기를 요구해야 할 때면 그들은 아이에게 먼 미래를 두고 “언젠가 네가 다 크면 말이야” 하며 분명하지 않은 약속을 하고, 그러면서 관심을 딴 데로 돌려버려, 아이가 자신에게 필요한 포기를 통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 포기 하나 하나는 아이에게서 다음번에 돌아오게 될 보상의 기대와 결부된다. 그것은 아이의 마음속에 경이로움으로 저 위험한 기대를 일깨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이를 현실로 인도하는 대신 아이의 착오적인 소망 표상을 강화한다. 그렇게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방식으로 그들은 아이가 제대로 된 연장을 가지고 자기 길을 가지 못하게 한다. 분별 있는 체험은 너무 적어서 지주ㅏ 되지 못하니 이는 훗날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환멸의 단초를 놓는다. 한편 그들은 아이를 너무 내밀하게 자기 자신에게 묶어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갑작스레 다시 밀쳐낸다. 아이가 그들에게 요구가 되고, 부담이 되고 책임이 되면, 아이가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이해를 찾을 때면, 아이는 갑자기 혼자 저버려져 있다고 느끼고, 사랑한다던 온갖 다짐의 말이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말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히스테리성 부모는 아이의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잘 인정하지 못한다. 강박적 인간과는 반대로 권력이나 완벽주의 때문이 아니라, 상처 입은 허영과 자기애 때문이다. 그들이 아이에게 설명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이면, 절대 본론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아이를 진지하게 다루는 대신 아이가 자신의 배은망덕함에 죄책감을 느끼도록, 자기들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으며 그 많은 희생을 했다는 점만 강조한다.
○ 사회 공동체에서 그들은, 인격을 쏟아 넣어서 수행해야 하는 모든 직업에 적합하다. 그때그때 순간의 탄력적인 반응을 요구하며, 기민한, 대인 관계의 선호, 적응 능력을 요청하는 동시에 그들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개인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소망에 상응하는 직업들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는 자신이 대변할 수 있는, 그 가운데서 그들의 품위와 직위를 대변할 수 있는, 그들에게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주는 모든 활동이 적합하다. 그들은 자신을 역할로서 직책이나 서열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는 강박적인 사람들에게서처럼 직책이나 서열이 별로 의무를 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인물의 영광을 드높일 가능성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훈장이나 칭호가 특별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접촉 능력이 중요한 모든 활동, 함께하는 인간적 연관성에의 욕구, 관객에 대한 소망을 충족시키는 모든 활동이 그들에게 잘 맞다. 그들은 설득시키는 대변자 혹은 납득시키고 유도하는 판매인이다. 잘 안 팔리는 상품을 특별히 유리한 구매라고 충동해서 고객에게 판매하거나 넥타이 하나만 사러 온 고객에게 완전히 옷을 한 벌 입혀서 떠나게 하는 판매인이다. 그들은 즉흥, 놀래킴 및 기습적 언행의 승리를 지향하며 매력, 육체적 장점, 능숙함, 순발력 있는 목적 지향이 문제가 되는 곳이면 어디라도 온 사방에서 자리한다. 큰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불특정한 희망을 약속하고 그럼으로써 대인관계가 이루어지는 모든 직업이 그들의 마음을 끈다. 포토모델, 패션모델, 가게 운영자, 장신구 가게나 미용실 경영 또 호텔 직원 같은 것이 그들에게 잘 맞는 직업이다. 그들이 거두는 성과는 사안보다는 사람과 더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성취는 그 자체보다는 그들이 그것을 그를 위하여 이루어낸 사람에게 많이 달려 있다. 이러한 재능을 가지고 그들은 자신의 성향과 특성들, 강한 소망과 상상력, 표현 능력과 묘사의 기쁨을 무엇보다 배우나 무용수 같은 예술가적인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늙음과 죽음은 우리 삶의 마지막,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지속적으로 끝내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히스테리성 인물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필연성 앞에 몸을 굽히는 습관이 들지 않아서, 이런 현실들 앞에서도 이를 직시하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눈을 감는 성향이 있다. 늙음과 죽음은 물론 존재하기에 부정할 수야 없다. 그러나 그런 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들 앞에는 여전히 가능성들로 가득 찬 미래의 표상이 놓여 있기에, 그들은 영원한 젊음의 착각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유지하려고 한다. ○히스테리성 구조 몫을 지닌 건강한 사람은 모험을 즐기고, 일 벌이기를 좋아하며, 늘 새로운 것을 향할 준비가 되어 잇다. 탄력적이고 유연하며, 생생하고, 불꽃을 뿌리며 혼을 빼간다. 생기 있고 즉흥적으로 시험해보기를 즐긴다. 그들은 엔터테이너이고 결코 지루해지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늘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그는 모든 시작을 좋아하고 삶에 대한 낙관적 기대 표상들로 차 있다. 이 장에 대한 모토에서 표현했듯이 모든 시작이 그에게는 기회를 포함하는 것 같고, 마력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며 전통과 낡아버리고 굳어져버린 도그마들을 뒤흔들고, 무언가를 강요하며 연상적인 점을 지니고 있고, 매력이 많으며 그 매력을 의식적으로 투입할 줄 안다. 그는 아무것도 - 어쩌면 자기 자신만은 제외하고 -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대부분의 일들의 상대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속과 계획한 것의 참을성 있는 수행보다는, 충동과 뭔가를 가동시키는데 강하다. 그러나 바로 그의 참을성 없음, 그의 호기심 그리고 과거에서 부담 받지 않는 것이 그로 하여금, 다른 성격의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이런저런 기회를 보고 또 붙들게 한다. 그런 기회는 다른 성격의 사람들에게는 멈춤이자 한계를 뜻할 수도 있는데 그에게는 기회가 된다. 그렇게 해서 그는 제멋대로 또 대담하게, 인생을 여러 빛깔의 모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그에게, 인생을 될 수 있는 대로 풍요롭게, 밀도 있게, 또 충만하게 사는데 있다. [[마무리 성찰]] “ 만약 누구든 남에 관해 모든 것을 안다면 누구든 즐겨, 또 쉽게 용서하리. 자랑도. 오만도 더는 없으리.” -하피스 ○불안의 네 가지 근본 형태 뒤에는 그것과 우리 모두가 대결해야만 하는 보편적인 인간 문제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헌신에의 불안이 다양한 형식으로 닥친다. 그 다양한 형식들은 공통적으로 우리 존재의, 우리의 삶의 공간이나 우리 인성의 불가침성이 위협받는 느낌을 갖게 한다. 친숙하게 자신을 여는 것, 애착과 사랑,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고 상처입기 쉬우며, 얼마만큼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 하고 자신을 남에게 뭉텅 주어버려야만 한다. 그래서 모든 헌신에의 불안은 , 갖가지 자아 상실의 불안과 결부되어 있다. 또한 자기됨의, 개체화의 불안이 누구에게나 닥친다. 그 다양한 등장형식 가운데서 공통적인 것으로는 고독에의 불안이 있다. 모든 개체화는 숨겨주는 공통성에서 자신을 끌어내어 들어 올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좀 더 우리 자신이 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외로워진다. 점점 더 많이 개체의 고립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에게나 과거에의 불안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닥친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무언가가 끝장이 나고, 그치고, 갑자기 그곳에 없는 것을 거듭 체험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단단히 붙잡아두려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이 불안에 지고 만다. 그 다양한 형식들에 서 공통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변화에의 불안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결국은 필연성의 불안이, 최종적인 것의 냉혹함과 엄격함이 닥친다. 그 다양한 형태의 불안에서 공통적인 것은 피할 수 없게 고정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구속 없는 자유와 자의를 지향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이 우리는 앞뒤가 엄연한 결과와 실재의 한계를 두려워해야만 한다. 우리 존재의 큰 불안들은 피해 갈 수 없고, 우리를 성숙케 하는 발전을 위해서 무척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면 그것에 대한 수많은 작고 천박한 불안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런 노이로제적 불안은 실제로 모두에게 닥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다만, 그 뒤에 있는 고유한 불안을 인식하고 그것과 대결할 때만 해소될 수 있다. 현존의 불안들을 밀쳐놓거나 무해한 것으로 만들거나 이를테면 희화화하며 일그러뜨리는 까닭에 노이로제적 불안은 아무런 뜻이 없어 보인다. 계속 괴롭히고 부담을 줄 뿐이다. 한편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경고 신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 어떤 식으로든 ‘바른 자리에 누워 있지’ 않다는 시사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무언가 더 본질적인 것을, 그것과 대결하는 대신 회피하려 한다고 시사 하는 것이다. 그 본질적인 것을 잘못 밀어 넣어진 불안으로 가려보려는 것이다. 큰 불안들과의 대결은 성숙과 진전의 부분적인 면모다. 큰 불안의 대리일 뿐인 그런 노이로제적 불안들에다 본질적인 것을 밀쳐놓는 것은 마비시키고 제어하는 효과를 낸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인 한 마땅히 해내어야 할 인생의 본질적 과제에서 벗어나게끔 우리를 끌어낸다. 그렇게 해서 불안은 묘사된 근본 형태들 가운데서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그것은 그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화(禍)가 아니라 아주 일찍부터,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우리 발전의 한 인자다. 큰 불안 가운데 하나를 체험하는 곳에서 이미 우리는 삶의 큰 요구 하나 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불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우리에게는 새로운 능력 하나하나가 자란다. 불안의 극복 하나하나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승리가 된다. 불안으로부터의 회피 하나하나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패배가 된다. 인생사적 예들에서 잘 알아 볼 수 있었듯이 불안은 하나의 전사(前史)를, 하나의 발전사를 가진다. 어른으로서 우리가 갖는 불안들의 규모, 밀도, 대상은 늘 어린 시절의 불안을 통해 미리 형성된 것이고 함께 규정된 것이다. 대체로 행복한 유년을 가졌던 사람은 일반적으로, 비범한 운명의 타격이 닥치지 않는 한, 적어도 그런 불안들로 병들지 않을 정도로는 근본 불안들을 처리할 상황에 있다. 그들은 자기 인성의 견고한 기초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너무 일찍 나이에 걸맞지 않는 불안들과 운명의 부담에 노출된 채 주변에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은 나중에도 불안을 훨씬 더 위협적이고 압살하는 것으로 체험한다. 불안이 어린 시절에서 온 처리되지 않은 옛 불안들을 그에게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심리요법은 이불안들을 규명하는데 그 형식의 인식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불안, 현실로부터 보자면 불안의 규모가 가늠이 안 되는 그런 불안들이 엄습할 때면 확실히, 당시에 무력하게 내맡겨졌던 어린 시절의 불안들의 재활성화가 문제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분명하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릴케가 언젠가 인간에 관해서 “어린 시절을 다시 알기를, 무의식과 경이로움을, 그리고 그 예감에 찬 첫 시절의 무한히 어둡고 풍요로운 설화의 테두리를…….” 이라고 한 것은 분명 깊은 뜻이 담긴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적중하는 말은 아니다. 그들의 초년은 풍요롭기보다는 어둡고, 예감에 차기보다는 억눌리고, 경이롭기보다는 좌절에 차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도, 심리요법적인 사후 발전 과정 가운데서 그들의 과거를 심리적으로 처리하고 그 훼손으로부터 자신을 한껏 해방시키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성향과 우리가 그 안으로 태어나는 주변 세계, 즉 될 수 있는 한 한껏 넓은 의미로 이해된 주변 세계의 맞닥뜨림이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결정한다. 이런 우리의 운명은 그 시초부터가 우리의 어린 시절을 통해 미리 모양이 잡히고, 그것으로써 시작된다. 그것은 ‘살면서 발전되는 각인된 형식‘이다. 그러나 바로 심리요법이 그전에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이런저런 것을, 어린 시절의 주변 세계 훼손의 결과로, 즉 추후에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할 가능성을 준다. 어린 시절의 각인에서는 그때그때의 사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사회를 별로 다루지 않았는데, 사회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다. 이런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주된 돌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회 심리학적 영향은 이때는 다만 간접적으로 부모를 거쳐서, 부모의 사회에 대한, 권위에 대한, 성과에 대한, 종교와 성에 대한 관점을 통해 아이에게 닥친다. 그렇기 때문에 가리켜 보인 바와 같은 아이에 대한 부모들의 잘못된 태도에는 늘 얼마만큼 사회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부모가 한 공동체의, 한 문명의, 한 사회 계급의 혹은 한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일원으로서 그 요구들을 아이에게 전달하게 되는 만큼 그러하다. 사회, 국가 등도 역시 네 가지 근본 불안과 대결해야 한다. 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그때그때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를 수 있다. 불안의 네 가지 근본 형태 내지는 네 가지 근본 힘이나 근본 요구라는 것은 무언가 일반적으로 유효한 것, 원칙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제 어떻게 유도해 내버릴 수는 없는 우리 실존의 일부다. 그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늘, 하나의 삶의 상황에 대답하는 네 가지 가능성을 가진다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하나하나의 함께 하는 인간적 관계에 대하여, 하나하나의 과제나 요구에 대하여 우리의 방식을 택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우리는 인식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아니면 사랑하면서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법처럼 우리 위로 받아들일 수 있고 아니면 그것을 우리의 소망에 맞게 변화시키려 해볼 수 있다. 하나하나의 본질적인 과제, 하나하나의 결단, 하나하나의 본질적인 인간적 만남, 하나하나의 운명적 사건이 모두 잠재적으로 네 가지 대답 가능성을 그 안에 지닌다. 그것을 쓸 수 있게 가지고 있고 그것을 그때그때 상황의 사건들에 따라 또 우리 자신의 성향에 따라 응용하는 것, 적어도 그것을 우리가 결단을 내릴 때 다양한 가능성으로서 포함시키는 것은 살아 있음의 한 표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종종 인간관계는 우리가 실제로 네 가지 힘을 동시에 생생하게 서로 침투시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교육 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교육은 교육자에게 창조적 거리를 요구한다. 그가 아이를 그 고유함 가운데서 바로 알아보고 아이의 고유함을 그 아이가 지닐 수 있도록 해 주려면 필요한 것이다. 아이에게 신뢰를 가능하게 하고 아이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아이가 질서를 체험하게 하자면 건강한 무정함과 수미일관성도 요구된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아이의 자기법칙성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요청한다. 아이를 자신의 소망에 따라 형성하고 그럼으로써 과도하게 영향을 주려면. 그런 완벽을 기하는 일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개개인에게는 늘 한정되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해 보이는 것은, 그런 전체성의 어른거리는 표상에 맞추어 우리를 개인적으로 한계 지우는 우리 본질의 일면성들의 방향을 잡는 일이다. 우리들 하나하나는 자신이 체험한 신체적, 정신적 구성의 토대 위에,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얻게 된 행동 방식의 토대 위에, 그러니까 자신의 인성과 자신의 성격을 형성한 자신의 인생사의 토대 위에, 자신의 개인적 가능성과 한계를, 자신의 완벽치 못함과 일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한정성과 일면성을 긍정하고 될 수 있으면 생산적으로 살려고 한다. ‘완전함’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를테면 네 가지 기본 관점들 중 하나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네 가지 기본 힘들 중에서 그가 최대한 완벽한 가운데 사는 하나의 힘의 노출 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전체, 완벽성에 점점 더 가까워지려 해볼 것이다. ‘완정함’이란 도달할 수 없다는 것, 자기 자신의 본질로부터만은 지극히 풍요로운 자기실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직 가능한 것의 의식적인 포기 가운데, 또 자신의 한계 가운데 있는 자기 본질의 수미일관한 완전한 가운데 누군가의 위대함이 들어 있을 수 있다면, 또 다른 사람의 위대함은, 우선은 자신의 본질과 낯설고 멀리 있는 것을 되도록 많이 자신과 동화하고 그로써 자신을 늘 새롭게 확장하는 데 있을 수 있다. 완전과 완벽, 이는 두 가지 인간적 이상의 목표인데, 둘 다 도달할 수 없고, 자신의 한계 가운데 있는 우리는 다만 그 둘에 접근해 갈 수 있다. 네 가지 근본 지향을 응용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에 충실하게 머물고 우리의 개성을 간직하고 종속을 피하며, 인식을 통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두려움 없이 우리 자신이 되어 살아보고자 노력할 수 있다. 우리는 늘 우리를 옥죄는 자아를 벗어나 함께하는 인간들과 묶임 가운데로, 공감하는 사랑과 사심 없음으로, 한계를 넘어가고 초월화 하는 헌신과 자기 포기로 나아가 보려 시도할 수 있다. 늘 우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선으로 미로 보이는 것을 영원히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려 하고 그것의 지속을 위해, 단기적으로 바뀌는 영향들에 맞서 자신을 투입할 수 있다. 필요불가결하다고 인식하는 법칙과 질서를 굳건하게 대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제나 늘 지속되는 삶의 변화를 긍정하고 앞서 묘사했던 “아폴로적(이성적)“인 것과 반대로 ”디오니소스적(감정적, 즉흥적)“ 자세를 취하는 자유를 원할 수 있다. 그런 자세는 삶을 그 전체적인 위대함과 생산성 가운데서 등정하고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 두 가지 삶의 위대함과 생산성을 다시 찾아낸다. 또한 늘 우리는 - 이를테면 분열적으로 - 자아 상실의 불안에서 함께하는 인간과의 가까운 접촉을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테면 우울하게 - 분리와 고독에 대한 불안에서 의존 가운데 머물러버릴 수 있다. 늘 우리는 - 이를테면 강박적으로 - 변화와 가변성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익숙한 것에 굳게 매달릴 수 있다. 혹은 우리는 마지막으로 - 이를테면 히스테리적으로 - 필연성과 최종성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자의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은 빈번히 큰 요구들 중에서 하나, 혹은 몇몇을 회피하는데 이르게 되며, 또한 같은 정도로 우리의 인간성이 파편화된다. 또 서로 보완하는 두 가지 인성 구조들이 이율배반적으로 자주 본능적인 끌림을 서로에게 행사한다는 사실이 암시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우리 가운데서 가능성으로 예감하지만 억눌러두거나, 발휘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을 어떤 남이 확신 있게 삶으로써 모범적으로 보여줄 때 이상으로 우리를 강하게 매혹시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 같다. 우리는 그때그때 반대 타입을 통하여 “온전함”에, 우리의 개인적 제한성과 일면성에서 우리를 풀어줄 완벽함에 이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성적 매혹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분열적인 인성과 우울증 인성, 다른 한편으로는 강박적 인성과 히스테리성 인성이 서로를 끌어당기곤 한다. 그 가운데 우리의 무의식적인 “보-완Erganzung", 즉 온전하게 함 Er-ganzung에의 동경이, 파트너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찾으려는 소망이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운명적인 구조 고착성의 사슬로부터 구제될 가능성을 예감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반대 타입들의 이율배반적 끌림 가운데 그런 좋은 보완 기회가 들어 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해하려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에만, 마음속에서도 이 다름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기를 희망할 수 있다. 물론 삶의 현실에서 그것은 대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누구든, 남을 자신의 궤도 속으로 끌어들여보려 하고, 그를 될 수 있으면 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적인 긴장이 상실될 뿐만 아니라 격심한 싸움이 터지곤 한다. 혹은 나의 다툼을 절망적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더 배울 준비가 없기 때문이거나 남의 태도를 오로지, 상대방에는 맞지 않은 자신의 자로만 재기 때문이다. 분열적인 파트너와 우울증 파트너가 본능적으로 서로 끌린다면 거기엔 대대 다음과 같은 바탕이 있다. 분열적인 사람은 우울증인 사람의 사랑의 준비와 사랑의 능력을. 그의 희생 준비, 그의 공감하는 노력과 물러서기를 예감한다. 여기서 또, 전반적으로 그는 자신의 고립으로부터의 구원의 기회를, 자신은 경험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인가를 파트너에게서 만회할 가능성을 예감한다. 즉 신뢰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은 사라져 무언가 드높아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매혹의 본질은, 분열적인 사람이 우울증인 사람 가운데서, 자신의 본질 안에도 있으나 그의 발전에서 발언되지 않은 가능성을 감지하는 데 있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 우울증인 사람은 분열적인 사람에게서, 이 사람이 자기는 감히 살아보지 못했거나 살 수 없었던 그 무엇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동시에 그는 여기에 자신의 사랑의 용의가 절박하게 필요한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것이 얼마나 큰 실패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앞서 묘사한 예들에서 보았다. 분열적인 사람이 우울증인 사람의 굳세게 매달리려는 회오리를 감지하게 되면, 종속에 대한 그의 중심적인 불안이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우울증인 사람이 분열적인 사람의 의존 충동을 감지하면, 그의 중심적인 상실 불안이 자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둘은 곧바로 그들의 방어자세의 창끝을 날카롭게 세워 끝없는 비극적 오해에 빠지게 된다. 강박적으로 묘사된 사람은 자신의 반대 유형인 히스테리성 인물의 색색 다채로움, 생생함, 모험의 기쁨 그리고 모든 새로운 것에 대한 열림에 매혹 당한다. 스스로 그렇게 과도하게 익숙한 것을 고수하며 늘 안전을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그의 삶을, 자신도 감지하듯, 필요 이상으로 비좁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암시했듯이 이에 상응하여, 히스테리성 선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반대 타입에 매혹 되어 있다. 반대 타입은 안정성, 유대, 수미일관함, 신뢰성을, 자신에게는 없는 “정돈된 삶”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 자신의 특성적인 불안 때문에 자신의 방식을 상대방에게 주장하려고 하면 이는 다시 비극적 얽힘과 오해를 부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강박적인 사람은 점점 더 철저함, 현학, 불평불인 경직성과 권력 요구를 통하여, 강요하는 성향을 통하여 파트너를 그의 히스테리로 빠져들게 할 뿐이다. 파트너는 자신은 숨 쉴 공기마저 빼앗겼다는 인상을 받는다. 강박적인 파트너는 정확성, 냉정함, 객관성 같은 태도들 뒤에 변화에의 불안이라는 중심적 불안을 숨기고 있다. 이 히스테리적 파트너에게서 그의 삶은 순발력도, 작은 빛들로 잠시 일상의 긴장을 푸는 것도 없는 프로그램화되고, 고정되고, 광채도, 변화도 없는 것으로 체험된다. 그런 빛은 파트너에 의해 확인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필요로 하는 것인데, 확인은 파트너가, 지나치게 호강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에서 매우 인색하게 해준다. 히스테리성 파트너는 그러면 자신의 중심 불안인 너무 많이 고정된다는 불안에서 강박적인 사람을 점점 더 깊이 혼란시키고 불안하게 만들며 혹은 이제 의식적으로 방어를 위해 투입된 저 포착할 수 없는 논리, 모순성, 구속력 없음 앞에서, 무엇보다 이제 다시 점점 더 엄한 대책을 하도록 강박적 파트너를 오도하는 그의 요구들을 통하여 포기하게 만든다. 여기서도 두 사람은 함께 살아도 서로를 스쳐 지나버리며 살고, 보완적인 것을 동화할 좋은 기회를 놓친다. 두 경우 그때그때 상대방의 성향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불안 때문에 자신의 구조를 경화시키지 않는 것만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매우 극단적인 반대 타입 형성에서는 이를 거의 해낼 수가 없다. 그랬을 때 두 파트너가 자신들의 불안이 상대방의 다름으로 상승된 것을 체험하고 그에 맞서 분명 자신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타입에서 매혹을 느끼지 못하고 다만 불안해짐과 서먹함을 느낄 뿐이다. 이런 측면들 가운데서 네 가지 기본 상황과 근본 불안들에 대한 정통한 앎은 파트너 관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밖에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한 차례 실망만 겪을라치면 파트너가 쉽게 헤어져버리는 경향은 오늘날은 무척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상대방의 이해를 통해 자신을 한층 더 발전시킬 호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 있음의 네 가지 형식에서 원칙적으로 우리의 본질에 소속되는 가능성들이 문제가 된다. 때문에 그것들은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시대 문화, 사회적 구조와 집단적인 삶의 조건들, 시대에 묶인 이데올로기와 가치 정립,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관점들이 그때그때 강세를 달리하며 이 네 가지 근본 불안을 체험하게 하고, 구조 유형을 다양하게 평가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전체 시대가 네 구조 유형 중 하나의 우위 하에 있을 수도 있어서, 그 가운데 그들에게 적절한 생각 유형이 더욱 잘 발전 될 수 있다. 아이 때 이미 그런 유형을 향해 교육되기 때문이다. 반면 반대 유형은 발전이 잘 안 된다. 집단적으로 거부되거나 깎아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농경적, 정착적 문화는 전통에 변함없이 계속 주어지는 체험과, 안전, 소유 지속을 향해 맞추어진 수행을 보존하는 면모에 유리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강박적인 사람들에서 묘사했던 면모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 있고, 많은 자연적인 애착으로부터 우리를 낚아챌 뿐만 아이라 영혼 없는 수많은 활동들을 요구하고 물량화 과정들로 이어지도록 위협하는 도시화와 산업화는 모든 뿌리 떼어내기가 그렇듯 기술한 바 있는, 사람을 이어주는 애착의 커가는 상실 , 정서적 측면의 소홀 화라는 의미에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분열증 화를 초래했다. 이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게 되어버린 기술 관료주의의 지지를 받는다. 그만큼 더 우리로서는 한편으로는 분열증의 긍정적 면모, 즉 개인화 지향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립화시키는 자기실현이나 자아중심적 일회성으로서가 아니라 더 큰 초개인적 전체에 득이 되어야 할 과제로서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의 이율배반적 관점을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들을 유념하면서 더욱 의식적으로 돌보는 일이 중요하다. 절대적인 힘과 권위의 전형적 면모들을 지닌, 전통 및 그것이 수립해놓은 제도들을 고수하는 그러나 분명하게 끝나가는 가부장제는 강박 증적 인간의 패권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농경문화에서처럼 유기적으로 살아 있는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종속된 약한 사람들의 억압과 착취를 향해 훨씬 강하게 권력을 향한 방향을 잡았다. 그럼으로써 반대 극은 그만큼 더 험하게 자리하는데, 극단적인 경우에는 대략 반 권위적 교육에서, 섹스물결에서, 터부의 해체에서, 긍정적으로는 새로운 자유를 찾는 것에서 표현 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어는 집단에나 보완에의 성향, 즉 존재하고, 병들게 하는 일면성을 상쇄해 조화에 이르려는 성향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체 규제 과정이다. 어쨌든 이것은 대대는 뒤늦게야 의식되는데, 그렇게 되면 억압되었던 것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앞선 태도가 극단적으로 일면적이면 일면적일수록 그만큼 극단적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 안에 있음’의 네 가지 형식들과 연령 사이에, 그러니까 근본 충동과 생물학적 결과 사이에는 연관이 잇다. 언급된 어린아이의 발전 단계들 이후 흔히 청년기에는 우리 자신과 세계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고, 미래가 우리 앞에 있다. 희망과 모험의 기쁨으로 차서 삶 속으로 우리를 기획해 넣는다는 힘이 중심적이고, 낙관적 감정이 우세하다. 이른바 ‘전성기’에는 견고한 삶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려는 경향이 커진다. 특정하게 한계 지워진 목표 설정 경향과 더불어 구심적 경향이 우세하다. 또 권력 영역과 소유 영역을 만들어 낸다. 직업, 파트너 관계,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인생의 중반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변화를 경험한다. 이때는 일상이 자신의 의무 및 요구와 더불어 허락하지 않았던 본질의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소망이 강해진다.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잊는 가운데 우리는 자아 고착성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형이상학적, 초월적 욕구라는 의미의 물음들이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제 버리기를 배워야만 한다. 무상함도 자신을 위해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노령에, 성큼 다가온 죽음의 의식 가운데서 새로운 형식으로 고독과 직면하게 되고 마지막 고독을 받아들이는 가운데서 어쩌면 현명해진다. 또 다른 면에서 ‘인간적인 것 그 자체’에 우리가 소속되어 있음을 느끼는 가운데서, 우리가 커다란 전체의 일부이며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리라는 의식 가운데서 그러하다. -‘홀로allein' 라는 독일어가 또한 만유 속으로’all-ein' 라는 뜻이기도 해서 분리된 홀로 있음Alleinsein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우리를 숨기는 ‘만유와 하나임All-ein-sein'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물론 이렇게 나이와 조응시켜보는 것은 다만 얼마큼 비중을 두어보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삶의 법칙성 하나가 그 가운데서 드러난다고 짐작하게 된다. 어쩌면 이 법칙성은 더욱 멀리 미칠지도 모른다. 대략 인생의 한 가운데서부터 더 높은 차원을 향한 발전 초기 단계를 거꾸로 다시 한 번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 앞에 놓인 미래가 한정되어 있으며 이제 모든 충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최종성에 대한 불안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물질적인 자산이든 정신적 소유이든 우리가 이루어낸 것도 그걸 이루어낸 우리 두 손안에서 이미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생명력도 줄어든다는 것을, 어떤 절대성도 어떤 지속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럼으로써 새롭게 무상의 불안과 분리를 경험한다. 아이들은 우리를 떠나 자기네 가정을 꾸린다. 우리는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죽음을 통해 우리가 점차 놓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통해 고독에 대한 불안이 새롭게 자리한다. 그리고 우리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죽음이 우리 자신을 기다린다. 죽는다는 것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고, 그 누구건 그 안으로 함께 데려갈 수 없다. 그리하여 이제 죽음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자기 헌신의 불안과 맞닥뜨린다. 우리들 현존이 그리는 원은, 우리가 첫 걸음을 떼어놓았던 알 수 없는 커다란 것 속으로 들여놓는 이 마지막 걸음으로 마무리 된다. 물론 , 저 발걸음을 완수할 엄두를 못 내는 어떤 사람들은 거의 글자 그대로 거꾸로 가기를 되풀이 한다. 나이 먹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젊게 머물러 있으려 한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과 그들의 힘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그만큼 점점 더 소유에 집착한다. 노령에 다시 어린이가 되어, 다만 먹고 마시는 것과 소화, 건강에만 관심을 가지며 그러다 결국, 어쩔 줄 모르는 영아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어쩔 줄 모르는 파파노인으로 끝나고 만다. 지금까지 묘사된 네 가지 인성 구조 중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는지 알아보려 애썼는데, 결국 자기는 그 어느 하나에도 분명하게 소속되지는 않고, 아마도 네 가지 인성 구조 모두에서 뭔가를 조금씩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므로 어쩌면 독자 여러분은 실망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근본 불안들과 구조 유형들이 삶에 가깝고 현실에 가깝다는 점을 대변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뚜렷하다면 오히려 삶의 현실보다는 훨씬 더 많이, 명확하게 고정하고 한계 짓는 체계를 추구하는 우리의 합리적 욕구에 맞는 것일 테니까, 그런 욕구는 늘 삶의 현실에 폭력을 가한다. 그밖에도 기본 충동에서 그리고 거기에 속하는 불안들 때문에 인간 보편적 사실들이 문제된다면, 그리고 우리의 최종적 형성이, 우리 모두가 거쳐야 하는 이른 어린 시절의 발전 단계들을 두루 거치는 것과 연관된다면, 우리 모두는 가능성으로서 그리고 또 우리 속에 있는 그 단초에서 그것들을 잘 알아야만 한다. 그 후에 우리는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네 가지 모든 영역 안에서 집에 있듯이 편안하면 할수록, 내지는 기본 힘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서 완전히 빠져 있지 않을 때, 그만큼 우리는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가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것은 그 가운데 충동과 불안들이 첫 각인을 얻는 어린 시절의 단계들을 비교적 건강하게 거칠 수 있었다는 뜻이리라. 일면적으로 과도하게 강조된 인성 구조들은 그래서 오히려 위협받는 것이고, 특별히 분명하게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건강한 유년의 의미를 눈앞에 보여준다. 네 가지 기본 힘의 발전은 다음과 같은 인자들의 한데 만남에 따라 운명 지어진다. 즉 우리는 일종의 ‘첫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점성술 등을 통해 우리 운명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잇을 것이다. 이 타고난 본성에 우리의 유전 소양이 덧붙여지는데, 이를 우리는 우리가 발전해가면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초년의 또 후년의 주변 세계와의 만남 그리고 대결 가운데서 우리의 ‘제2의 천성’을 얻게 된다. 제2의 천성이란 말 자체가 이미 주변 세계의 영향으로 우리의 첫 본성은 흐려지거나 심하게 달라진다는 뜻이다. 이런 외부 영향이 지나치게 큰 것이면, 첫 본성 및 성향과, 교육받게 되고 얻어진 제2의 천성 사이에는 지나치게 큰 간극이 있게 되고 병이 난다. 앞서 전한 예들이 아마, 어린 시절의 주변 세계 또한 후년의 주변 세계가 얼마만 한 규모로 질병 생성적Pathogenerisch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를 매우 뚜렷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초년의 가족적 주변 세계가 그러한데, 부모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의하든 거부하든, 지배적인 집단적 척도를 교육 가운데서 대변하거나 퇴치하게 마련이므로, 가족적 세계는 이미 다른 사회문화적 주변 세계도 포함한다. 그것을 통해 아이는 부모를 거쳐 이미 집단적 가치 정립을 받아들이거나 부모와 똑같이 거부한다. 부모가 아이들을 거칠게 소홀이 하거나 손상을 주는 것은 부모의 질환의 한 표시인 만큼 그것을 제쳐놓고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부모만 아이들에게 운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부모에게 운명이 된다. 엄청난 미분화, 성향의 풍부함, 커다란 개인적 인성의 차이, 동시에 그토록 긴 어린 시절의 의존성, 그리고 그 발전에서 큰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른 생명체보다 더 위협받게 만든다. 부모로서 우리에게 어떤 아이가 ‘맞는 자식인가’, 아이가 쉽게 사랑할 수 있는 아이인가, 사랑의 능력이 그에게 수고 없이 흘러들게 할 수 있는가, 아이가 그 존재 자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특정한 소망들은 아직 제쳐두더라도, 아이가 있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얼마만큼 좋아하는가, 다른 경우에 아이가 그 특성에 있어서 우리에게 감정이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가, 아이가 우리에게 서먹하게 대하고 그 애를 우리가 할 수 있고 기대하는 것처럼 사랑하려면 수고를 해야만 하는가, 아이가 우리에게 그 애에 대하여 대책 없는 근심을 주는가, 아이가 우리로 하여금, 부모로서의 우리를 자기가 좋고 필요한 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가? 그 모든 것은 아이에게 또한 우리에게 운명이 되며, 모든 잘잘못의 피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의 심한 훼손은 피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아이의 어린 시절의 욕구들에 대하여 또 그 아이의 어린 시절에 우리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잘못된 태도에 대하여 좀 더 많은 앎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런 훼손을 일찍 인식하고 어쩌면 교정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에 대해서는 오늘날 ‘큰 심리요법’과 더불어 많은 기능성들이 있다. 행동요법과 소통요법, 결혼 상담, 부부 그룹요법 혹은 다른 구성원들에게 부담을 주는 가족 구성원의 개발요법, 혹은 그럼으로써 장애를 입은 아이의 개발요법 등이다. 정신적인 면이 신체질환으로 발병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이미 벌써 오래전에 당연히 비장 대기 근무체제, 의무적인 학교 검진을 실시했어야 하고 이미 신체질환으로 나타난 케이스에 있어서는 자명하게 의사를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심리적 상태, 부모와 자녀 관계, 교사와 학생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연관된 많은 질병 발병들에 정신적 배경이 있으며 초기의 정신적 손상은 무척 심한 후속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도 아직은 어린이들의 의무적인 검진을 위한 상응하는 예방 대책이 없다. 우리가 조금만 애를 쓰면 제가할 수 있었던 무지 때문에, 마음의 굼뜸 때문에 손상을 입어야 한다면 이 점에서 우리는 아직 야만인이다. 그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도 부모들, 교사들, 국가 기관들이 함께 노이로제 발전의 예방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불안이란 주제에 대하여 언급하자.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을, 우리가 잘못된 태도 가운데 있거나 인생의 큰 요구 앞에서 뒤로 물러서 있고 , 발전의 걸음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사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안이 가진 권유의 성격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는 그때그때의 발전단계를 넘어서서 자라나고 새로운 자유, 동시에 새로운 열림과 책임 속으로 들어가라는 권유인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긍정적, 창조적 면모들을 보여주고 변화를 위한 지극이 되어준다. 그리고 어쩌면 초입에 사용한 비유가 모든 모순성, 대립성에도 아랑곳없이 철석같은 질서 속에서 살아 있는 균형을 유지하는 역동적인 힘에 대한 우리의 몫을 의식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균형은 결코 정지나 정태적인 안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결코 카오스로 변질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지나친 강조 혹은 코스모스적인 움직임을 이루는 힘들 가운데 하나가 탈락하는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는 우리의 태양계를 해치고 어쩌면 파괴 할지 모른다. 모든 일면화 혹은 기본 힘 중 하나의 탈락은 우리의 내적 질서를 위협하고 우리를 병들게 할 수 있다. 이런 우주적인 힘들에 몫을 가지면서 또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와 함께하는 인간적 주변 세계에 의해 우리가 각인되는 가운데 우리 현존의 이중 면모가 표현된다. 즉 초시간적· 초개인적인 질서와 법칙 그리고 전체 인간적인 것에서 자기 몫을 지닌 인간 -이는 인간의 초시간적이고 영원한 면모다. 그리고 역사적 본질이며 일회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성향과 그가 그 안에서 자라나는 미리 있었던 주변 세계와 대결하고 있는 인간 - 이는 인간의 시간적 면모다. 시간적으로 한정된 본질로서 우리는 그 일면성, 제약과 더불어 개인적 전기와 고유한 각인을 얻었다. 도무지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것‘의 일부로서 우리는 완전함과 완벽함에 관한 예감을 우리 속에 지니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공통된 것을 생각해보는 가운데 무상함과 그 안에서 얻은 한계를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드높일 수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공통된 것이란 시간, 문화, 종속에 매인 것이 아니고 ’인간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만약 진정한 의미의 헌신에 대한 불안을 정서적으로 처리하고, 사랑하는 신뢰 가운데서 삶과 함께하는 인간에게 자신을 열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동시에 자신의 개인성을 자유롭고 당당한 방식으로 감히 다 살아내면서 보호해주는 아늑함에서 떨어져 나오는 불안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 가변성의 불안을 받아들였고 그럼에도 자신의 삶의 구간들을 생산적으로 의미 있게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끝으로 우리 세계의 질서와 법들을 자기에게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필연성과 불 회피성을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너무 심하게 절단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 만약 그런 한 사람이 있다면 - 우리는 그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의 성숙과 인간성을 인정해야만 하리라. 그러나 또한 조금이나마 그런 사람에 가까이 갈 수 있으려면, 충만한 인간성과 성숙의 이미지를 목표상으로 가지는 것이 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목표상은 인간에 의해 고안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서 세계 체계의 큰 질서에 인간적 차원에서 호응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철학적 , 사회과학적 방식으로 사랑의 원론을 편다면, 페터 라우스터의 <사랑에 대하여>가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겠는지, 어떻게 살아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사랑의 실행서 라면, 이 프리츠 리만의 <불안의 심리>는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하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경종을 울려주는 책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