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예일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디트로이트에서 13년간 목사로 활동했다. 그 후 1928년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초빙된 그는 기독교 윤리학과 실천신학 강의로 영성을 얻었으며 옥스퍼드, 글래스고, 콜롬비아,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국내의 유수한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1939년에는 에든버러 대학의 기포드 강연에 미국인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초청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주요 저서에(인간의 본성과 운명)등이 있다. [서론] 여기서 다루게 될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의 도덕적-사회적 행위는 사회 집단 (민족 집단이건 인종 집단이건 경제 집단이건 경제 집단이던 간에)의 도덕적-사회적 행위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둘째, 이 구별은 순전히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정치 영역들을 정당화 시켜준다. 개개의 인간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하며, 또한 때에 따라서는 행위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더욱 존중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도덕적(Moral)이다. 그들은 본성상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심을 갖고 있다. 이 경우 동류의식을 느끼는 범위는 사회 교육에 의해 얼마든지 확장된다. 그들은 이성적 능력을 통해 정의감을 키워간다. 이 정의감은 교육적 훈련에 의해 연마되고, 그 결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회적 상황을 공정한 객관성의 척도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이기주의적 요소들을 정화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들은 인간 사회와 사회 집단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들에 비해 훨씬 획득되기 어렵다. 모든 인간의 집단은 개인과 비교할 때 충동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때에 따라 억제할 수 있는 이성과 자기 극복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에 비해 훨씬 심한 이기주의가 모든 집단에서 나타난다. 집단의 도덕이 이처럼 개인의 도덕에 비해 열등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자연적 충동들 - 사회는 이 자연적 충동들에 의해 응집력을 갖는다―에 버금갈 만한 합리적인 사회 세력을 형성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개인들의 이기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기주의의 표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은 개별적으로 나타날 때보다는 하나의 공통된 충동으로 결합되어 나타날 때 더욱 생생하게, 그리고 더욱 누적되어 표출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육가들은 모든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처럼 삶에 있어서 이성의 기능을 지나치게 신뢰한다. 그러나 인간의 집단적 행동에 의해 형성되는 역사 세계는 이성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성에 의해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이며, 사실 역사 세계 자체는 이성적이지 않는 세력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학자들은 현대의 문제를 교육가들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흔히 사회적 갈등을 서로 상이한 ‘행동 유형들’ 간의 충돌 결과로 해석한다. 그래서 경쟁하는 당파들이 사회과학자들에게 이 당파들에 공평하게 작용하는 또 하나의 새롭고 완전한 행동 유형을 제공하기만 한다면, 이 갈등은 제거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도 교육가들처럼 갈등의 원인은 이기심이 아니라 무지라고 본다. 개인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집단 간의 갈등이 성공적이고 건전하게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름 아닌 우리의 행동을 좀 더 적절한 환경의 목표에 맞춰 재정립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이 좋아하는 방법은 조정이다. 구 당파가 갈등하고 있을 경우, 그들로 하여금 협상을 통해 서로의 요구를 완화하고 잠정 협정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호넬 하트 교수의 조언이다. 물론 수많은 갈등은 이런 식으로 해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흑인들과 같은 천대받는 집단이 이런 조정을 통해 사회 안에서 과연 충분한 정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최소한의 요구조차 지배 계급인 백인들에게는 어림없는 요구로 보일 것이 아닌가? 사회의 권력 불균형에 의해 생겨난 사회적 갈등의 해소는 그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학자는 별로 없다. 플로이드 올포트는 산업노동자들의 불안 심리는 경제적 불평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열등감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열등감은 자애로운 사회심리학자가 노동자들에게 「당신들 이외에 어느 누구도 당신들이 열등하다고 비난하지 않는다고 가르쳐주기만 하면 곧바로 치유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의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은 사회과학자들에게 고무되어 타협과 조정을 사회 정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양 떠들어댄다.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노동자나 자본가 중 어느 한쪽을 편들기보다는 양편에 다 공정과 조정의 정신을 권고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교회 내에서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모든 사회 관계가 점차 '그리스도의 법' 아래 들어오고 있다는 환상에 젖었다. 오늘날의 문화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집단이기주의가 갖는 힘과 범위, 그리고 지속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 집단에 속하는 개인들 간의 관계를 순전히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조정과 설득에 의해 확립하는 일은, 비록 쉽지는 않을지라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집단들 간의 관계는 각 집단의 요구와 필요성을 비교, 검토하여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집단이 갖고 있는 힘의 비율에 따라 수립된다. 인간 역사에서 사회적 각성과 도덕적 선의지의 증가가 사회적 갈등의 야만성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들로는 갈등 자체를 제거할 수 없다. 이러한 갈등의 제거는 인종이건 국가건 경제 집단이건 인간 집ㄷ나들이 어느 정도의 이성과 동정심 - 이 두가지 덕목은 이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이해하는 만큼 다른 집단들의 이익을 생생하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을 발휘할 수 있고, 또한 도덕적 선의지 --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집단의 권리를 확고하게 긍정하도록 할 것이다 -를 가질 수 있게 될 때에만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인간 본성 안에 그들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드는 한계들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1. 인간과 사회 : 함께 살아가는 법 인간 사회는 인간 생활의 보존과 실현을 보장해 주는 자연적 혹은 문화적 산물들을 공정하게 분배해야 하는 문제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각각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곧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완성을 위한 토대이자 결과이다. 인간의 재주가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이 제공해주는 재화들을 아무리 증가시켜준다고 하더라도, 그런 재화는 결코 모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생존의 필요성을 넘어 욕구를 확대시키는 상상력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는 인간 생활의 보존과 실현을 보장해주는 자연적 혹은 문화적 사물들을 공정하게 분배해야 하는 문제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역사가 종말되는 순간까지 정치는 양심과 권력이 만나는 영역이며, 또한 인간 생활의 윤리적인 요인과 강제적인 요인이 상호 침투하여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타협을 이루는 영역이다. 가장 친밀한 사회 집단보다 규모가 큰 사회적 협력은 모두 일정한 강제성을 요구한다. 어떠한 국가도 순전히 강제성에 의해서만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강제성 없이 국가를 보존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한 사회 내에서 지역적 혹은 기능적 차이에서 생겨나는 이해관계의 대립은 서로 다사회철학과 정치적 태도들을 산출하게 되는데, 이 사회철학과 정치적 태도들의 차이는 선의지와 지성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조화될 수 있겠지만 완전한 조화에는 결코 이룰 수 없다. 다수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소수가 다수를 옳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소수파가 다수파에게 그 같은 것을 인정해주고 도덕적 위신을 세워주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수의 득표는 다수가 갖는 사회적 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소수파가 자신들은 수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전략적 장점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경우, 그리고 소수파가 자신들의 목적에 깊이 몰두해 있거나 사회내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절망할 경우 소수파는 항상 다수파의 지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군부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 그리고 열성적 혁명가들은 전통적으로 다수파의 의지를 경멸해왔다. 정치적 견해는 불가피하게 ㄱ여제적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사회 정책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로 갈등하는 이해 관계들은 결코 완전하게 해결될 수 없다. 역사가 종말 되는 순간까지 정치는 양심과 권력이 만나는 영역이며, 또한 인간 생활의 윤리적인 요인과 강제적인 요인이 상호 침투하여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타협을 이루는 영역이다. 다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소수가 다수를 옳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소수파가 다수파에게 그 같은 것을 인정해 주고 도덕적 위신을 세워주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수의 득표는 다수가 갖는 사회적 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소수파가 자신들은 수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전략적 장점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경우, 그리고 소수파가 자신들의 목적에 깊이 몰두해 있거나 사회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절망할 경우 소수파는 항상 다수파의 지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군부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 그리고 열성적 혁명가들은 전통적으로 다수파의 의지를 경멸해왔다. 정치적 견해는 불가피하게 경제적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사회 정책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로 갈등하는 이해관계들은 결코 완전하게 해결될 수 없다. 소수파가 복종하는 이유는 오직 다수파가 국가의 경찰력을 통제할 수 있고, 또 필요에 따라 군사력으로 경찰력을 보완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파가 자신의 힘이(그 힘이 경제력이건 군사력이건) 다수파의 힘에 맞설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소수파는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의 경우처럼 국가 권력을 탈취하려 할 것이다. 정치에는 항상 강제력이 존재한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어 있지 않다든가, 조정의 정신이 부분적으로라도 이를 해소시키든가, 민주적 과정이 도덕적 위신과 역사적 존엄성을 획득했을 경우에는, 정치에서의 강제적 요인은 은폐되어 평범한 관찰자들에게는 쉽게 파악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순진한 낭만주의자들만은, 한 국가 집단이 무력의 사용이나 위협이 없이도 ‘공동정신’에 도달하거나 일반의지를 깨닫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국가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타의 다른 사회 집단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종교단체들조차 규모가 충분히 커지거나 혹은 일반 신도들이 중요시하는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경우, 자신들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강제력에 의존한다. 종교적 조직들은 일반적으로 은밀한 형태의 강제력(파문과 자격 정지)을 사용하지만, 가끔은 국가의 경찰력에 호소하기도 한다. 인간의 정신과 상상력은 많은 한계와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동료 인간들의 이익을 충분히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들로 인하여, 우리는 사회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강제력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평화를 보장해 주는 바로 그 힘은 동시에 불의를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어떠한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그것이 내면적 의도나 외양이 아무리 사회적이라 하더라도, 사실상 엄청난 양의 사회적 특권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개인으로서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봉사해야 할 것과 서로 간의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그런데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서의 개인들은 스스로 그들의 힘이 명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한다. 권력은 공동체 내부의 평화를 위해서 정의를 희생시키고, 또한 공동체들 간의 평화를 파괴하기도 한다. 탁월한 능력과 사회에 대한 봉사가 특별한 보상을 받을 만한 것이라면, 보상이 봉사보다 더 크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일 것이다(?). 공평한 사회는 결코 보상을 결정하지 않는다.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층은 여기에서 생기는 부수입을 차지해 버린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귀족과 노예만으로 이루어진 국가는 그것을 내부적인 붕괴로부터 막아줄 사회적 유대와 외부의 경격으로부터 보호해줄 군사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 역사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파괴하는 권력의 경향을 관찰할 수 있다. 권력은 내적 통일성을 획득하고 국가를 위해 외적 방어를 해내느라 힘쓴다. 그러나 그것은 가혹한 세금 징수로 인하여 생겨나는 강한 증오심에 의해 국가의 사회적 안녕을 파괴하고, 또 평민들에게서 그들의 마음을 국가에 붙들어매는 기본적인 특권조차 빼앗음으로써 그들의 애국심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민족 공동체의 평범한 구성원들도 감정적으로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공동체들 간의 갈등을 유발시키는 근본적 요인인 질투와 시기 그리고 교만과 탐욕의 충동에 흠뻑 빠져 있다. 모든 집단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생존에 뿌리를 두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팽창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삶에 대한 의지는 권력의지로 전환된다. 평화는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조정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달성되기는 하지만, 그것도 서로의 권리에 대한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조정에 의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대한 인간 집단의 근본 관심은 강제가 없이 완전한 평화와 정의로 충만 된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는 있되 그의 공동 작업이 전적으로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충분히 비폭력적인 그런 사회의 건설에 있다. 그러한 목표에 대해 낭만주의자들은 불만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오늘날의 사회가 직면해 있는 위험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2.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의 합리적 원천들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은 보통 사회 불의의 뿌리로서 무지보다는 이기심을 강조했기 때문에, 보다 순수한 종교는 자애심을 증대시키고 인간의 이기주의를 억제해야 한다고 희망해왔다. 이에 비해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지성을 확대함으로써 불의는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 충동과 이타적 충동을 함께 갖고 태어난다. 개인은 에너지의 핵이다. 이 에너지는 출발부터 다른 에너지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존재를 유지한다. 자연에 있는 모든 유형의 에너지는 자기 보존과 유지를 위해 노력하며 , 자연의 유類 내에서 실현된다. 이런 점에서는 인간의 에너지와 전체 자연 세계가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에 의해 자기 초월self transcendence 능력을 갖게 된다. 인간은 타인과 자신의 환경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본다. 인간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이긴 하지만, 이성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를 지배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인간의 에너지는 다른 사람과 갈등 없이 조화롭게 실현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 도덕의 유일한 기초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회적 충동은 이성에 비해 훨씬 깊은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이기심 이외에 이타심도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확대시키고 안정시킬 수는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새롭게 창조해낼 수는 없다. 인간은 자연적 충동들에 의하여 자기를 넘어선 종족 보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조화로운 삶을 꾀하게 된다. 인간이 하층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군집 충동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민이라는 충동에 기초하여 공동체의 낙오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생생하게 이해하는 정도, 우리가 자신의 동기와 충동의 성격을 의식하는 범위, 우리 자신의 생활과 사회 속에서 서로 갈등하는 충동을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선택하는 방법, 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합리성의 정도이다. 이들 각 경우에서 이성의 발전은 도덕적 능력을 증대시킬 것이다. 동료들의 욕구와 바탕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하는 지성적인 사람은 자기에 비해 덜 지성적인 사람들보다는 그들의 욕구에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사람은 비참한 상황이 직접 자기 눈에 비칠 때뿐만 아니라 그 상황이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에도 그것에 대해 동정을 느낄 것이다. 중국에서의 기근, 유럽의 재앙, 지구 끝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요청 등은 그의 동정심을 자극하여 대책을 강구하게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자신의 욕구만큼이나 생생하게 받아들이고, 또한 먼 곳에 있는 사람의 필요성도 직접 눈앞에 드러난 필요성처럼 신속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성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사회 교육이 인간의 동정심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의 요구가 대중 속에서 쉽게 흐려지는 거대한 도시 사회의 사회 활동가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조건들 중에서 중요하고 생생한 표본들만을 골라냄으로써 욕구를 개인화시켜버리는 상투적인 방법만을 개발해왔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거대 도시의 간접적인 관계들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사회적 동정심을 그나마 유지시켜왔다.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잘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이해관계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능력은 결코 동정심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관계들의 조화는 자애심에 의존하는 만큼, 혹은 더욱 많이 정의감에 의존한다. 이러한 정의감은 지성의 산물이지 감성의 산물은 아니다. 즉 정의감은 일관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이성이 낳은 결과이다. 비이성은 자기 내에서의 충동의 만족을 인정하면서도 동일한 충동이 다른 사람에게서 만족을 얻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 사회적 상황의 전체적인 필요성에 의해 판단한다. 따라서 이성은 이기적 충동들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정당한 충동들을 만족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성의 최우선 과제는 자아의 다양한 충동들을 조화시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충동들의 혼란에 질서를 잡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하등 동물에게는 질서를 주었지만 인간에게는 그 정도의 질서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물이 가진 충동들은 예정된 조화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성의 힘이 정의에 기여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의 사실 때문이다. 첫째는 이성이 사회적 조화를 위해 개인의 욕망에 내적 제한을 가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성이 전체 공동체의 지성적 전망에서 개인의 요구와 주장을 심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수단이 자신의 목적에 편하다고 생각하면 그 수단을 사용할 것이고, 또한 그러한 수단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이론들을 동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과 이성의 개발을 통해 사회 정의가 증진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은 여전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결코 완전히 이성적일 수는 없다. 우리가 개인 생활에서 집단생활로 진행해갈 경우, 충동에 대한 이성의 비중은 점점 더 부정적이 된다. 왜냐하면 집단 간의 공동의 지성과 목적은 항상 불완전하고 일시적이고, 또한 집단은 그것을 맹목적이게 만드는 공동의 충동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인간 생활의 도덕적 자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무감의 개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려는 도덕가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다. 양심은 그 자체를 개인 욕망의 전체적인 힘과 대립할 때보다는 한 충동이 다른 충동에 맞설 때에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레슬리 스티븐슨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회개에서 순수하게 도덕적이지 않은 모든 요소를 제거해보라. 그러면 우리는 양심이 법률만큼 강하지 않은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성의 발달은 양심이 작용할 수 있는 기회를 증가시킨다. 그러나 양심 자체의 힘을 강화시켜주는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는 종교가 이성보다 더 유력하다. 양심과 종교의 관계는 뒤에 가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이기적 충동이 사회적 충동에 의해 꺾이게 되면, 그것은 사회적 충동 속으로 흡수되어 한 인간이 자신의 공동체에 바치는 헌신성은 이타주의의 표현임과 동시에 변형된 이기주의의 표현이 된다. 이성은 이기심을 사회적 충동 전체와 조화시키기 위하여 그것을 억제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같은 이성의 힘은 동시에 개인의 이기주의를 생동적인 능력들의 전체 속에 있는 한 정당한 요소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의 자기의식은 이성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 및 환경과 관련시켜 바라봄으로써 자기를 의식하게 된다. 이 자기 의식은 생명을 보존하고 연장하려는 충동을 강화시킨다. 동물의 경우에 자기 보존 본능은 자연에 의해 제공되는 필요성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동물은 배고프면 죽이고, 위험을 느끼면 싸우거나 달아난다. 반면에 사람의 경우, 자기 보존의 충동은 세력 강화에 대한 욕구로 쉽게 전환된다. 인간의 자기의식에는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켜주는 병적인 특질이 들어있다. 자기의식이란 무한성 내에서 유한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 자아ego를 광대한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점으로 인식한다. 모든 살아 있는 자기의식에는 이러한 유한성에 대항하려는 표지가 있다. 자기의식은 종교적 차원에서는 무한성에 흡수되려는 욕구로 나타나고, 세속적 차원에서는 인간 자신을 보편화하여 자신의 삶에 자기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표현된다. 개인이나 집단이건 일단 권력을 획득하게 되면 위험한 명예를 갖게 되기 때문에, 계속 권력을 강화함으로써만 자신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도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면 더 이상 이성적이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특정한 목적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경우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목적을 성취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기심을 은폐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정직한 노력이나 부정직한 보편성의 가장과 섞이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분히 표출할 수 없듯이, 고상한 목적에서 이기심을 제거할 수도 없다. 가족 내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독제는 매우 느리게 상호성의 원리에 종속되었다. 여성이 현대 사회 생활에서 남성의 독재에 맞서 순수하게 이성적인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남성 지배의 잔재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여성들은 경제권과 자립권이라는 무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완전한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의 정치권력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경제적 무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그 집단은 전체적인 인간 집단에서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집단은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해지며, 어떠한 사회적 제재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공동의 지성과 목적에 도달하기 어려워지며 , 불가피하게 순간적인 충동 및 직접적이고 무반성적인 목적과 연계를 맺게 된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갈등상태에 있거나 전쟁의 위험 및 열정으로 인하여 하나로 통일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집단이 커질수록 집단적 자기의식의 달성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갈등이 집단의 유대를 위한 불가피한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은 인간 사회의 병적인 측면이다. 게다가 공동체의 힘이 클수록 , 그리고 지배 범위가 넓을수록, 개인적 전망에서 볼 때 그것이 보편적 가치를 대표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3.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의 종교적 원천들 각 개인적 도덕적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희망과 기대는 합리적 이상주의자와 종교적 이상주의자에 의해 주장되고 고무되어왔다.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면 사람들은 사회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갖게 될 것이라는 믿음은 언제나 있어왔다. 만일 이기심에 대한 인식이 그 힘을 완화시키거나 사회에서 이기심의 반사회적 영향을 감소시키는 전제 조건이라면, 종교는 인간의 사회화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회개하는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전파하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은 스스로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눈길 아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자신의 작은 의지를 거룩하고 전능한 의지와 병립시키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생활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이성적 윤리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데 반해, 종교적 윤리는 사랑을 그 이상으로 한다. 이성적 윤리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자신의 요구와 동등하게 보려한다. 이에 반해 종교적 윤리, 특히 기독교 윤리는 상대적인 요구에 대한 적절한 검토 없이 이웃의 요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감정의 결실이다. 종교는 한편으로는 자애심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도덕 생활의 규범과 이상으로 삼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의 생명에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 이웃에 대한 동정심(혹은 공감sympathy)을 고무한다. 사랑은 이웃의 요구와 자신의 요구를 재거나 비교하지 않고 이웃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이성이목표로 하는 정의에 비해서 윤리적으로 더욱 순수하다(복잡한 사회에 적응하는 일은 매우 힘들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이 이성적인 정의의 원칙보다 사회적으로 더 가치가 있어야할 필요는 없다). 부분적으로 사랑의 종교적 이상은 사람들의 영혼을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입장에서 파악함으로써 더욱 강화되고 지지를 받는다. 여러분의 이웃은 신의 자녀이므로, 그를 섬기는 것이 곧 신을 섬기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내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행한 것이 바로 내게 행한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통찰은 직접적이고 불완전한 것을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성 프렌체스코 로 하여금 나병 환자에게 입을 맞추게 하고 도둑을 믿게 한 것,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얽매인 자도 자유로운 자도 없다“ 고 말하게 한 것이 바로 종교적 통찰이다. 종교란 항상 절망의 끝에 세워진 희망의 성이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 우주를 자신의 삶과 정신에 맞도록 해석한다. 종교란 절대자 앞에서의 겸허함이자 동시에 절대자를 빙자한 자아의 자기주장이다. 종교를 너무 교만하다거나 자아를 경시한다하여 비판하는 자연주의자들은 종교 생활의 이 역설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랑과 존경, 그리고 복종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그 대상의 사랑스러움과 존경스러움 그리고 권위에 비례한다. 그런데 신은 전능함과 무한함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한히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따라서 신에 거역하는 죄는 무한의 의무를 부정한 것이므로 무한히 나쁜 범죄이며 무한한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루터적인 정통파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는 바르트 신학에서의 종교적 경험이 사실상 회개의 의미로만 이해되고 있다. 신의 성스러움과 인간의 죄악 간의 차이점은 거의 절대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에 인간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은 공동체 생활에서의 특별한 위법 행위 때문이 아니라 단지 신적이지 않고 인간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와 타락은 의도와 목적이 그러하듯이 동일시되며, 인간 역사의 모든 것은 악과 동일시되기 때문에 사회적 도덕성을 좀 더 많이 쌓고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서도 발견된다. ~~~~ 개인, 특히 사회는 사실상 죄에 너무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도덕적 의미에서도 구원될 수 없다. 통상 개인은 신의 은총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사회는 악마에게 내던져져 있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는 어떠한 윤리적 기초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나라는 불의로 가득 차 있고 그 지배자는 악마이며 카인에 의해 세워졌고, 평화는 투쟁에 의해서 지탱될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밖에 또 하나의 대안은 절대자나 완전성을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 신의 견지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는 덕의 달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경우 종교인은 은총의 경험, 즉 신의 자비와 용서를 포기에 대한 위안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에 의해, 그리고 달성될 수 없다고 간주된 것을 종교적 사상 속에서 얻는 기쁨을 누림으로써 패배를 승리로 바꾸는 경험에 의해 위로를 받는다. 이 모든 상이한 형태들의 종교는 삶의 긴장을 높여주기도 하고 완화하기도 한다. 삶의 도덕적 긴장은 항상 이러한 종교적 이완 과정에 의해 위협받는다. 종교는 삶의 활을 너무 세게 당겨 활줄을 끊어놓거나(패배주의), 아니면 표적을 지나쳐 쏘거나(열광주의와 금욕주의) 한다. 종교의 도덕적 약점들은 종교적 생명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쉽게 제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소박한 태도이다. 종교의 생명력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도덕을 옹호하거나 위태롭게 한다. 즉 종교의 생동성은 도덕적 감성을 만들기도 하고 도덕적 활력을 파괴하기도 하는 것이다. 종교는 절대적 무관심의 순수성에 도달할 때까지 도덕적 생활 원리를 절대화함으로써, 그리고 초월적 가치를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나누어 줌으로써 사랑과 자애를 고취시킨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도덕 생활에 지속적인 기여를 한다. 종교의 초월적 전망은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보도록 하고, 자연, 기후, 지리, 역사의 기복이 인간의 가족을 갈라놓는 구별들을 무시한다. 종교적인 사랑의 정신은 불가피하게 그것을 공언하는 공동체의 규모에 따라, 그리고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관계의 비인격성과 간접성에 따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직면하는 상황의 복잡성에 비례하여 그 힘의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 퀘이커 교도 및 기타의 소규모 종파들은 규모가 큰 교파들에 비해서 더욱 순수하게 사랑의 정신을 보존해왔다. 가장 높은 수준의 선의지를 지닌 개인들로 이루어진 국가도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 설사 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한 국가에 속한 개인들은 순수한 자애심을 자아낼 수 있을 정도로 다른 국가의 개인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선의지는 조국에 대한 충성이라는 여과를 거쳐 국가의 이기주의를 확대하는 경향까지 생겨난다. 패배주의는 순수한 종교적 선악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들은 종교적, 도덕적 이상을 넘어서 있다는 순수한 도덕적 용어(즉 절대적 사랑)로 이상을 정의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는 신과 인간이 명백하게 대조될 때뿐만 아니라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에 머물면서도 그 도덕적 이상을 진술할 경우에는, 엄격한 완벽주의를 채택할 때에도 정치적, 도덕적 문제에 무관심 하거나 절망한다. 초대교회는 세상을 멸망할 것으로 보고 또 자신의 낙관주의를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지상의 세계를 패배주의적 시각으로 보았다. 이러한 소망이 약해지기 시작하고, 교회가 정치적, 경제적 생활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오자 기독교의 이상이란 이름 아래 기존의 사회 관습과 관계들에 대해 도전하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노예 제도, 불의, 부의 불평등, 전쟁 등은 인간이 죄를 범한 상태를 위해서 하나님이 고안한 자연법에 따라 제정된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노예 제도와 같은 사회 제도를 인간의 죄악의 결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죄를 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으로 볼 것인지에 관해 종종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하여튼 교회는 기존의 제도와 그 자신의 이상 사이에 간격과 충돌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제도를 수용한다. 오늘날 종교적 공동체들과 교회는 그 조직체 내에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초월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 자신들의 종교적, 도덕적 이상과 대립되는 보다 큰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격렬하게 맞서지 않는다. 종교의 이 같은 신과 세속,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에서는 정치적 생활에 있어서의 자연적 충동이 개인의 사적인 행위에서 보다 이성과 양심의 제약을 덜 받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종교인들은 자연적 충동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신과 세속, 이상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집요한 일원론에서 생겨난 감상주의와 비교해볼 때, 이러한 패배주의에는 일정한 현실주의가 놓여 있으며,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종교는 지금 사회 정의의 수단이 되고, 영감이 되기에는 너무 많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사회 정의를 향한 모든 순수한 열정에는 항상 종교적 요소가 들어 있다. 종교는 사랑의 이상으로 정의의 이념을 부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정의의 이념은 종교로 인하여 윤리적 요소가 사라진, 순전히 정치적인 이념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의 이상은 정치적, 윤리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정치적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는 윤리적 이상을 구해 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순수한 종교적인 윤리적 이상이다. 게다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에는 항상 종교적 요소가 들어 있게 마련이다. 종교에 대한, 이성을 초월한 희망과 열정을 갖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회도 절망을 극복하고 불가능에 도전할 용기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은 그것을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진정한 종교관은 결정적으로 신앙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될 수 있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종교가 참되다고 믿는 이유는 전적으로 참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참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진리가 의심스럽지 않아야만 참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적 신앙의 모든 힘이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에 이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최고의 비전들은 개인적 양심의 통찰에서 나오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종교적 신앙의 전망이 어떤 형태로든 실현된다면, 그것은 친밀한 종교적 공동체 내에 국한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공동체에서 개인적 이상들은 사회적 실현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사회를 정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감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회란 항상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자연의 힘을 사용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방법을 아는 한,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데 그 힘을 사용하는 법을 아는 한 , 그들은 신의 왕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내재되어 있는 타락의 위험을 알게 되면, 종교적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움츠러들 것이다. 만일 이 두려움이 극복될 수 있다면 종교적 이상들은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하여튼 어떤 사회도 그렇게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잔인성과 불의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순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는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십자가에 대한 기독교의 봉양은 개인의 도덕적 이상을 무의식적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 그 자체는 승리한 사랑의 상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와 지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는 십자가를 기만하였다. 국가와 교회는 모두 거기에 참여하였고 앞으로도 끝까지 그러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패배를 승리로 바꾸었고, 사랑이 세상 안에서 승리할 날이 오리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만 이룩될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자질은 그 승리를 보장하기에 충분치 못하다. 감상적인 세대는 그리스도의 환상 속에 있는 이 묵시록적인 색채를 없애버렸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데 반해, 그 하나님의 나라가 한구석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재건이라는 급박한 문제에 직면한 시대는 종교적 삶의 이러한 측면, 즉 영혼이 역사의 가능성을 초월하는 측면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이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가 건설되어야만 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공동체 생활에서 개인적인 이상들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란 인간의 위대한 업적인 동시에 인간에게 있어 거대한 좌절의 표징임을 알게 될 것이다. 4. 여러 민족의 도덕성 모든 나라에는 일반 시민들보다 뛰어난 소수의 지식 계층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다른 나라와의 사이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맹목적인 애국자들에 비해 훨씬 명확하게 통찰하고, 또한 국제 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특수 이익을 추구하는 지배 계급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이를 바라본다. 이 집단은 종종 국가적 이기심의 극단적 추구 양태들에 대해 견제 역할을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태도에 영향을 줄 만큼의 힘은 갖고 있지 않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충성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쉽게 달성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모든 사회가 비판을 곧 불충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가톨릭교회의 근대화론자인 타이렐(Tyrell) 은 이러한 비판 정신이 결여되면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의지가 훨씬 더 쉽게 이기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사회가 자아를 갖고 있다면, 그 자아는 독선적이고 교만하며 자기만족적이고 이기주의적일 것이다.” 국가의 이기심 이외에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는 국가 공동체의 통일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사용이 필연적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강제적 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은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그 목적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애국심은 개인의 희생적인 이타심을 국가의 이기심으로 전환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개인의 비이기성은 국가의 이기 성으로 전환된다. 바로 이 때문에 개인들의 사회적 동정심의 확산만으로 인류의 사회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희망은 결국 헛된 망상이 되는 것이다. 이타적 열정을 이처럼 민족주의, 좀 심하게는 국수주의로 바꾸기는 쉬워도, 인류 전체를 향한 열정으로 바꾸기는 정말 어렵다. 왜냐하면 인류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것은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이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국제적 정의를 확립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 과거의 잘못을 응징하는 폭력과 새로운 잘못을 만들어내는 폭력이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승리자인 독일은 복수심에 가득 찬 프랑스를 만들고, 승리한 프랑스는 독일로 하여금 정의가 유린되었다는 편견을 갖게 하는 등의 악순환을 말한다. 국가의 도덕성이란 원래 이런 것이므로 설사 이런 악순환의 탈출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도덕가들이 생각했듯이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폭력을 도덕적 차원에서 구원하는 한 가지 방법은 개별 국가들 간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평한 입장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 폭력을 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국가 간의 수많은 이견과 충돌을 해소시켜 준다. 국제연맹은 표면적으로나마 이 원칙을 국제 관계에 확대,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5. 특권 계급의 윤리적 태도 종교적 혹은 합리적 이상주의의 능력을 과신하는 윤리적 이상주의자들은 계급 분열의 물질적 기초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무시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힘, 즉 이성과 양심의 힘이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맹목적인 확신을 갖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확신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합리적, 도덕적 자원의 개발이 사회적, 윤리적 전망에 영향을 주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급적 이기심마저 제거할 수는 없다. 도덕적 이상주의는 일정한 상상력의 한계 내에서만 스스로를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바로 이 상상력을 통해서만 자신의 동기의 진정한 성격 및 자신과 경합하는 상대방의 이해관계의 타당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소수 사람의 상상력은 아주 뛰어나고 예리하기 때문에 이기적 동기는 적절히 억제되고, 타인의 이익은 상대적으로 충분히 고려된다. 하여튼 이 같은 이상주의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선명히 부각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동시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온건한 도덕 감이 지상의 윤리적 원리에 위배되는 사회 조직의 한계 내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게 될 경우, 사람들의 도덕적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권적인 지배 계급의 도덕적 태도는 전반적인 자기기만과 위선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특권계급이 비 특권 계급에 비해 더 위선적인 이유는, 자신의 특권을 평등한 정의라는 합리적 이상에 의해 옹호하기 위해 특권이 전체의 선에 뭔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특권의 불평등 상태는 합리적 변호에 의해서는 정당화 될 수 없을 만큼 심화되어 있기 때문에, 특권 계급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일반적으로 보편적 가치는 자신들의 특권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이론, 그리고 자신들의 특권이 보편적 이익에 봉사한다는 이론을 옹호할 수 있는 교묘한 증거와 논증을 창안해내려고 노력한다. 특권 계급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위선의 형태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은 자신들의 특수한 역할에 대한 사회의 정당한 보답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예일 대학교 총장 티모시 드와이트같은 이는 노동자들에 대하여 “그들은 너무 게으르고 수다스럽고 열정적이며, 낭비도 심하고 무능력하기 때문에 재산도 명예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들은 이상한 속설들을 맹신하기 때문에 의학, 정치, 종교 등에 대해 평생 동안 연구한 사람들보다도 잘 아는 척을 한다. 게다가 자신들의 사소한 관심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으면서도 국가적 관심사를 공직자들보다 얼마든지 잘 처리할 수 있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다.” 6.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윤리적 태도 마르크스의 결정론이 갖는 근본 특징은 그 내부로부터 나오는 완벽한 도덕적 냉소주의이다. 한 사회 내에서 계급들 간의 관계는 철저하게 권력과 권력의 대립으로 파악된다. 모든 문화적, 도덕적, 종교적 표현물들은 각기 다양한 계급들의 경제활동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합리화시켜주는 ‘이데올로기들’이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장악하고 사회적 불의를 자행하고 있는 세력, 즉 자본가 계급은 이미 대항할 수 있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타도하거나 소멸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원을 받기 위한 첫 번째 필수 조건은 부르주아의 손에서 지배의 무기를 탈취하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이 모든 권력 장치(죽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무망한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자그마치 세 배나 헛된 망상은 의회민주주의에 의해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권력 탈취가 불가능한 일로 생겨나면, 마르크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 필연적인 권력의 중앙집권화의 심화는 지배 계급의 수요를 격감시킴으로써 자기방어가 점점 취약해져가는 데 반하여, 그 반대급부로 노동 계급의 극단적인 궁핍화는 혁명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창출해낼 것이라는 희망으로 위안을 삼거나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자기 파멸의 가능성과 수단을 동시에 생산해내지만,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과정이 자동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즉 , 그들은 생산 수단이나 국가 기구(apparatus of stat)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혁명적 투쟁을 거쳐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사회철학과 예언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신념과 희망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 레닌, 그리고 트로츠키의 신조라 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사회적 불의가 가장 극심하게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그리고 노동자가 아무런 혜택도 받고 있지 못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그리고 정치적 압력을 통해 소유 계급으로부터 억지로 얻어낸 털끝만큼의 이익조차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든지, 노동자는 마르크스의 신조를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체현體現(주: 사상이나 관념 따위의 정신적인 것을 구체적인 형태나 행동으로 표현하거나 실현함)해낸다. 마르크스와 그의 신조들 보다 낙관적인 방향으로 수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은 단순한 학술상의 차이가 아니다. 이 차이는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거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노동자와 상당한 혜택을 보는 노동자 사이의 차이점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전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계층과 상당한 희망을 갖고 있는 계층 간의 차이점이다. 자본주의의 위기와 이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불안정으로 인해 대다수 산업노동자가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위치로 전락할 것인지 아니면 다소나마 호전될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는 역사만이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결정론(determinism)자들이 의회사회주의자들, 즉 개량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상당히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매우 흥미 있다. 왜냐하면 이 개량적 사회주의자들의 신념도 분명히 그들 자신의 경제적 경험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들도 혁명적 정서가 경제적 궁핍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판단을 결정론적 신념에 일방적으로 끼워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경험이 아닌 노동 계급의 경험과 요구에 대한 관념상의 이해를 통해 자신의 사회철학을 성립한 프롤레타리아 지도자가, 혜택 받지 못한 노동자들보다 다소 많은 혜택을 누리는 노동자들의 경험에 나온 이론들 (수정주의, 개량주의, 의회사회주의)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지도자는 관념적으로 혜택 받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용기가 없다거나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이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노동 계급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연적 산물이라고 주장할 만큼 그의 결정론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는 노동자는 지식인(당)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고유한 사회철학을 가질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 계급의 힘만으로는 노동조합 주의적 의식, 다시 말해서 고용주와의 투쟁을 위해서나 노동자를 위한 입법을 위해서는 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신념만을 발전시킬 뿐이라는 사실은 각국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사회주의 이론은 유산 계급의 지식 계층, 즉 인텔리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철학적, 역사적 이론들로부터 성립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오늘날의 과학적 사회주의 창시자들도 모두 그들 자신은 부르주아적 인텔리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란 그리스 공화국에서의 노예소유주들이 누렸던 자유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레닌의 언명은 이를 변형시킴으로써만 대답될 수 있다. 이 명제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변형은 기존 자본주의 사회의 평화적인 변혁을 위하여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수단을 사용하려 했던 일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러한 희망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고찰에 있어서 흥미를 끄는 문제는 그 같은 희망들 역시 상당한 혜택을 입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 정치적 경험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다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국가란 억압의 수단일 뿐이므로 노동자의 해방과 구현을 위해서는 국가를 소멸시켜야 한다. 이 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국가관은 “사회는 필요의 산물이고 정부는 인간의 사악함의 결과이다”라고 했던 페인의 신념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냉소적인 평가는 곧바로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대한 냉소적인 견해로 이어진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에게서는 국가에 대한 애국적인 충성심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국가의 응집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애국심과 충성심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공산주의 이론 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단순히 학문상의 빈민족주의적, 반구가주의적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국가가 혜택을 누리는 시민들에게 베푸는 물질적, 문화적 이익을 전혀 받지 못하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즉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노동자의 경험에 부합附合된다. 애국심이란 정서는 워낙 강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노동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문화적 혜택이라도 누릴 수 있다면, 노동 계급은 중산층에 비해서는 그렇게 썩 내켜하지는 않을지라도 국가의 호소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것이다. 특별히 뛰어난 일부 지식인들만이 통찰할 수 있는 국가의 기만성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국가의 탐욕과 야만성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 경험이 있는 일부 노동자들에 의해 명확히 파악되는 것이 보통이다. 현대의 노동자는 자신이 당하는 사회적 불의에 비례하여 그만큼 자신의 애국심을 죽여 나간다. 현대의 노동자가 공공연하게 국가를 부정하는 경우란 국가가 문화적 유산과 경제적 혜택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때에 국한된다. 계급적 충성을 이타주의의 최고 형태로 찬양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좌절을 겪게 되면 생겨나는 자연적인 산물이다. 무산 노동자는 사회주의이건, 공산주의이건 관계없이 일단은 갖가지 충성의 의무들 중에서 계급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의무로 생각한다. 계급에 대한 충성이 유일무이한 충성이 될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중에서 다만 지배적인 충성이 될 것인지, 사회생활에서 생기는 온갖 복잡한 것들을 지나치게 단순화된 계급 이론에 의해 해결할 만큼 자신의 계급을 절대적으로 생각할지 안할지 등의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노동자를 어느 정도까지 소외시키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모든 역사는 인간성과 비인격적인 숙명과의 투쟁이고, 어느 누구도 둘 중의 어느 것이 주어진 순간에 더 강력한지를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미래를 어느 한쪽의 완벽한 승리로 파악하는 역사철학에는 다소의 과장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문명의 한계들로 인하여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이외에 그 문명의 진정한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신들의 삶 자체에서 낡은 사회의 파산을 경험한 사람들 외에 과연 누가 가장 진솔한 언어로 사회적 이상을 서술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삶에서 기아와 복수 그리고 신성한 희망이 한데 어우러져 질풍노도와 같은 열정을 갖게 된 사람 그 누가 이들보다 더 창조적인 활력으로 일체의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건설할 수 있겠는가? 7. 혁명을 통한 정의 생명을 죽이거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들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직접적인 파괴에 의해 달성코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최고선)이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좀 더 많은 생각을 요하는 문제이다. 보다 더 궁극적이고 보다 포괄적인 가치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 직접적이고 덜 포괄적인 가치는 과연 무시해도 되는가? 궁극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폭력을 통해 평등을 수립하는 것, 혹은 더 나아가 이렇게 얻어진 평등이 확실히 유지되는 것이 가능한가? 이와 같은 문제들은 분명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제기된 것들이다.
폭력이나 혁명을 본성상 비도덕적이라고 가정하는 태도는 두 가지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다. 그중 첫 번째는 폭력을 악의지의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표현으로, 비폭력을 선의지의 당연한 표현으로 간주함으로써 폭력은 본질적으로 악의 범주에 속하고 비폭력은 본질적으로 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가 상당 부분 타당성이나 설득력을 지닌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폭력의 결과가 비폭력의 결과와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폭력과 비폭력간의 차이는 비록 의미 있는 구별이긴 해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므로, 이런 구별을 할 때는 항상 세심한 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폭력을 주장했던 간디의 영국 면화 배격 운동은 결과적으로 맨체스터 지방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게끔 했으며, 전시 중 연합국의 독일 봉쇄로 인하여 독일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기아에 시달렸다. 생명과 재산에 결정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고서, 그리고 잘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잘못이 없는 사람도 함께 위협하지 않고서 한 집단을 강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것들이 바로 복잡한 집단 간의 관계에 담겨 있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서 개인 관계의 윤리를 무비판적으로 집단 관계에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폭력을 본질적으로 비윤리적이라고 보게 하는 두 번째 잘못된 견해는 전통에 의해 답습된 도구적 가치들을 본질적인 도덕적 가치와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는 데서 기인한다. 오직 선의지만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다. 하지만 선의지가 각 개인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행위들로 나타나게 될 때, 우리는 곧바로 올바른 동기와 올바른 수단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목적이 옹호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수단이나 목적을 선택하게끔 올바른 의지를 인도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승인된 목적을 달성 하는 데 적합한지의 여부로 판정하기 불가능한 특수한 행동이나 태도도 있다. 이러한 행동이나 태도는 경험을 통해 확립된다. 그 결과 전통에 의해 답습된 도구적 가치가 본질적인 가치로 인정받게 된다. 타인의 생명과 의견과 이익을 존중하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선한 범주에 속하게 되고, 같은 공동체 성원의 생명과 의견과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는 악한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금지된다. 생명에 대한 외경이 모든 도덕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생명들 사이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산모를 살리기 위해 태아를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회는 이 포괄적인 목적들과 직면하고 잇기 때문에 언제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모든 도덕은 이 원칙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쉽게 정당화되긴 하지만 보편성이 결여된 가정, 즉 직접적인 결과들의 성격이 궁극적인 목적의 성격을 보장해준다는 가정에 의해 애매모호해진다. 프롤레타리아와 중간층 간의 차이점은 스스로를 일차적으로 독립된 개인으로 간주하느냐 스스로를 일차적으로 사회 집단의 한 구성원이라고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중간층은 자유와 개인 생명의 존중, 소유권, 상호 신뢰와 이타심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 프롤레타리아는 집단에 대한 충성과 그 결속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전체 사회의 복지를 위해 소유권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가장 고귀한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폐기할 것이며, 집단 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는 대화와 타협보다는 투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반해 중간층은 개인적 도덕의 규범들을 모든 사회적 관계의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삼는다. 그래서 이들은 프롤레타리아의 폭력, 도덕적 냉소주의, 개인적 자유에 대한 무관심 등에 큰 충격을 받는다. 중간층의 이런 태도가 개인적 도덕의 이상을 인간 집단의 행동 규범으로 삼고자 하는 정직한 노력인 한, 이런 태도는 완전히 폐기되어서는 안 되는 정당한 도덕적 태도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자신들의 집단행동을 개인적 이상에 합치시키지 않는 중간층의 환상과 자기기만이라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냉소적인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환상적인 요소가 특히 크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중간층은 자유를 신뢰하기는 하지만, 만일 이 때문에 자신들이 사회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와 지위가 위협받게 되면, 단호히 자유를 부정한다. 그들은 사랑과 이타심의 도덕을 공공연히 주장하지만, 지금까지 특권 없는 계층을 사랑하고 이타적인 집단적 태도를 보인 적은 거의 없다. 그들은 폭력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이 위협을 받는 국제 분쟁과 사회적 위기가 닥치게 되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폭력을 사용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문화적, 사회적 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 개인적 도덕의 규범을 강하게 따를 만큼 충분한 개인적 자각을 갖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는 현실을 파악할 때 집단적 행동을 단위로 한다. 이들은 특권 계급에 비해 자기 집단에 대한 귀속감을 크게 느끼며 다른 집단의 행동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의 도덕적 태도는 개인의 도덕적 행위보다는 집단의 도덕적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프롤레타리아는 중간 계급의 태도에 대해서는 감상주의라는 딱지를, 권력층의 태도에 대해서는 위선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인간이란 항상 최소한의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욕구를 확대시킬 수 있는 상상력이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더 절실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다. 8. 정치적 힘에 의한 정의 9.정치에서 도덕적 가치의 보존 탐욕, 권력에 대한 의지, 그 밖의 갖가지 이기적 욕구 등과 같은 자연적인 충동은 이성에 의해 결코 완벽하게 제어되거나 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충동에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자연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인간의 역사에 의해 자연을 제어하려고 시도하는 정치적 전략들을 보완해야 한다. 만일 강제력, 이기적 욕구, 갈등 등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수단으로서 허용되어야 한다면, 영구적인 분쟁과 영원한 독재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구원의 수단인 것이 내일은 예속의 쇠사슬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지나치게 일관성 있는 정치적 현실주의는 사회를 영속적인 전쟁 상태에 내맡기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결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의 사용이 불가피하고, 사회적 불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 불의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더 강한 강제력의 사용이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끝없는 사회적 갈등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이기심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에 상충하는 다른 이기심을 내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때 이 다른 이기심이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기존의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새로운 권력이 필요할 때, 이 새로운 권력은 어떻게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군국주의의 원칙에 반대해서 싸웠노라고 떠들어대던 나라들이 지금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증대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그들의 힘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는 평화도 곧 이 힘이 만들어내는 적대감에 의해 파국에 이르고 말 것임이 명약관화하다. 지나치게 일관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현실주의가 초래한 이 같은 불행한 결과들은 도덕가들의 충고를 정당화해주는 듯싶다. 그들은 이성과 양심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에 따르면 진정한 평화는 오로지 이익과 이익, 권리와 권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타협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와 같은 조정과 타협은 이기심에 대한 이성적인 견제 및 다른 사람의 이익에 대한 이성적인 양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들은 분쟁이 이익의 상호 조정을 방해하는 증오감을 유발한다는 사실과 강제력은 불의를 제거하는데 사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불의를 지속시키는데도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문제를 영원히 해결하는 방법은 사회적 지성과 도덕적 선의지를 확충하는 길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도덕가들은 종종 현대의 모든 사회적 평화에 내재되어 있는 불의와 강제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강제력이란 요소는 언제나 은밀하다. 왜냐하면 지배 계급은 경제력, 선전기구, 전통적인 통치수단, 비폭력적 수단들을 망라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이성적인 도덕가조차도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사회적 불의를 과소평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협력과 상호성을 무비판적으로 지나치게 찬양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온 불의를 인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형태는 아니더라도 은밀한 형태의 강제력에 대해서는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올바른 정치적 도덕성이라면 도덕가들과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의 통찰들을 모두 정당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 사회가 사회적 협력의 범위를 아무리 확대하더라도, 사회적 분쟁은 불가피하다는 너무나도 엄연한 사실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올바른 정치적 도덕성은 인간 사회에서 강제력을 완전히 없애기보다는 최소화함으로써, 인간 사회에 있는 합리적, 도덕적 요소들에 가장 잘 부합될 수 있는 유형의 강제력을 사용하도록 권고함으로써, 그리고 강제력이 사용되는 목적과 목표의 차이를 밝혀줌으로써 쓸데없는 갈등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사회를 구원하고자 할 것이다. 아마도 합리적인 사회라면 강제력과 갈등의 제거보다는 강제력이 사용되는 목적의 정당성 여부에 더 큰 강조점을 둘 것이다. 강제력의 사용이 누가 보아도 합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사회적 목적에 기여한다면, 그 사회는 강제력을 정당화 할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하고 일시적인 열정에만 기여한다면, 폭력의 사용은 지탄을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는 결론은 평등이란, 아니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평등한 정의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장 합리적인 궁극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이 같은 결론이 올바르다고 인정되면, 보다 더 큰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사회적 분쟁은 특권의 영구화를 목적으로 하는 제반 노력을 거부해도 되는 도덕적 정당성을 갖는다. 따라서 국가나 민족 혹은 계급의 해방을 위한 전쟁은 제국주의적 지배나 계급적 지배의 영구화를 위해 사용되는 권력과는 다른 도덕적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다. 대영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인도인, 미국 사회의 흑인, 아니면 모든 산업국가의 공업노동자들과 같은 일체의 피 억압자들은 압제자들이 폭력으로 지배권을 유지하게 위해 갖는 정당성보다는 더 고차원적인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폭력적인 분쟁이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일단 유보해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이 평화보다 더 높은 사회적 목표라는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평화의 이상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이러한 이상에 비추어 볼 때, 현대의 모든 평화는 기존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임시로 이루어진 휴전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이상은 곧 현대의 평화적인 상황 속에 얼어붙은 권력과 특권의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요구를 나타내는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이 볼 때 프롤레타리아가 한편으로는 국제분쟁을 비난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계급투쟁을 찬양하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지겠지만, 프롤레타리아가 강제력의 제거는 허황된 이상이지만 강제력의 합리적인 사용은 사회를 구현하는 방도라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을 수용하는 것은 물론 위험하다. 이 같은 위험은 사회적 투쟁에 관여하고 있는 사회 집단이 자신들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스스로를 안일하게 정당화 하는데서 생겨난다. 한 사회 집단이 기만에 의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곳에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주장에 특별한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는 사실상 일정한 평등을 이룩한 인간 사회의 한 부분에 의해 불변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억압받는 민족들, 예를 들면 터키에 항거하는 아르메니아인, 영국에 저항하는 인도인, 미국에 항거하는 필리핀인, 에스파냐에 저항하는 쿠바인, 그리고 일본에 저항하는 한국인 등은 언제나 중립적인 사회들로부터 특별한 공감과 도덕적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나라에 있는 노동 계급은 이에 버금갈 만한 공감이나 도덕적 인정을 끌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억압받는 민족의 경우에는 중립적인 제 3의 국가들이 존재할 수 있지만, 노동계급의 경우에는 공정성을 가진 제3의 계급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억압된 민족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집단이 언제나 억압하는 국가들 안에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집단들은 공정성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 사회 문제를 흐리게 하는 편파성과 편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성은 일반적으로 점차 증대해가면서 사회적 특권 세력의 요구를 억제하고 비 특권 계층을 지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 자체는 보다 더 평등한 권력의 균형을 이룩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회적 힘은 부분적으로 경제력이나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인 강제 수단을 현실적으로 소유하는 데서 생겨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힘은 대게 논리적으로 설명되지도, 설명할 수도 없는 복종과 존경, 충성심을 확보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이성이 사회적 힘의 이 같은 원천들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는 한, 이성은 강자의 힘을 약화시키고 약자의 힘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피착취 자들은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착취를 당한다. 이성은 그들로부터 도덕적 자긍심, 동료들에게서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도덕적 칭찬을 앗아가 버린다. 그들은 양심이나 공평한 사회도 인정하지 않는다. 양심이나 미래의 공평한 사회에 대한 희망을 상실해버린 이들은 머리 깎인 삼손의 처지나 다를 바 없다. 대단히 중요한 힘들이 그들에게서 빠져나간 것이다. 사회 내에서 이성의 힘은 완전한 힘의 평등을 가져올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 다만 목적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만일 사회적 정책의 목적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승인된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문제는 윤리적 문제보다는 정치적 차원에서의 실용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밝힌바 있다. 갈등과 강제력은 분명히 위험한 도구이다. 이러한 갈등과 강제력은 사회적 악을 양산해내므로, 현명한 지성이 있는 사회라면 그것들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해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성이 강제력을 도덕적 이상의 실현 도구로 삼는다면, 이성은 이를 최고의 목적을 위한 봉사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합리적, 도덕적 세력에 가장 잘 어울리고 위험성이 가장 적은 형태의 강제력을 선택할 것이다. 도덕적 이성은 어떻게 강제력의 희생이 되지 않고서 강제력과 동맹을 맺을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강제력의 사용에 견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목적에 사용하려는 유혹을 견딜 만큼 공정한 재판소의 관할 아래 강제력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강제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지만, 개인이 이런 권리를 사용하는 데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한다. 각 국가의 경찰력은 보편적으로 승인된 통치 기능이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시민들 간의 분쟁에 대해 어느 쪽이나 공평하게 다루고, 따라서 도덕적 목적을 위해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경제 재벌이건 정치 고위 관리건 간에 정부의 각급 기관들은 자기들의 특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계급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개인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사회 환경만큼 비도덕적이지 않다. 악한 사회 제도와 이를 유지하고 있는 개인의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정한 도덕 교사라면 사회적 범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의 원리를 주장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현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가 반대자에게 가질 수 있는 회의의 장점은 증오심을 약화시키고, 현재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평가함에 있어 합리적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데 있다. 분노란 불의에 대한 감정의 이기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분노가 전혀 없는 상태란 곧 사회적 지성이나 도덕적 활력의 부재를 의미 한다. 자신의 인종에 대해 가해진 불의에 분노하는 흑인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불의의 고통을 감수하는 흑인에 비해 흑인의 해방에 훨씬 더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에서 이기적 요소가 사라질수록 그 분노는 정의를 달성하는 더욱 순수한 매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분쟁에 있어 반대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분노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또 다른 자신의 이기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종교적 상상력이 정치 생활에 대해 기여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비폭력적인 저항을 발전시키는 것만큼 우리와 같은 인간적 취약점이 있다는 사실의 자각과 모든 인간 생활은 초월적 가치를 갖는다는 통찰은 사회적 투쟁을 넘어서 그 잔인성을 완화하는 경향을 낳는다. 종교는 인간의 공통된 근원을 일깨우고, 또 인간의 악이나 덕은 같은 성격의 것임을 설파함으로써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으려 한다. 적에게 내재하는 악이 자기 자신에게도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이 회의적 태도, 그리고 사회적 갈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이 사랑의 충동은 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세속적 상상력은 결코 이런 회개 적 태도와 사랑의 충동을 일으킬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겉모양은 무시해버리고 궁극적이며 심원한 통일성을 강조하는 숭고한 광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폭력의 정신이 동양의 한 종교 지도자에(간디) 의해 정치에 도입 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역사적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서양인은 동양 사람들에 비해 야수성이 강하고 더욱 잔인하며, 설상가상으로 서양의 종교적 유산은 서구 문명의 기계적 성격으로 인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통찰은 거의 대부분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특권 계급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특권 계급은 기독교의 통찰을 감상적으로 만들어서, 스스로의 자원을 이용해야 하는 소외 계층 사람들이 그 통찰에 나타나는 도덕적 혼란을 명확하게 인식해버린 결과, 그들은 사회적 갈등을 풀어가는 데 있어 더 이상 기독교적 통찰들을 이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기독교적 통찰을 이용할 수 없게 되는 순간부터 서구 문명은, 그것이 파국을 향해 달리건 아니면 점진적으로 경제생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여 파국을 피하던 간에, 본래적인 잔인성으로 인해 병들고 있으며 인간 생활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증오심에 시달리게 된다. 설사 사회 정의가 비폭력적 요소가 없는 사회적 투쟁에 의해 달성되었을지라도, 이렇게 해서 달성된 사회의 성격에는 뭔가 결핍된 것이 있다.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된 비극은, 정신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이 흔히 야수적인 요소들을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내는 집단적 인간의 문제들로부터 유리되거나 그 문제들을 오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문제들은 미결인 채 남아 있게 되고, 잔인성을 약화시키거나 사회적 투쟁이라는 불필요한 일을 제거할 수 있는 아무런 방도도 갖지 못한 채 힘과 힘이 직접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역사는 언제나 자연 세계의 반영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간파했다시피, 역사의 종말에 가서 세계의 평화는 투쟁에 의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평화는 결코 완전한 평화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현재보다는 더 완전할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정신이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자연을 정복하거나 제거하려 하지 않고 자연의 힘을 인간 정신의 수단으로 그리고 도덕적 이상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면, 우리는 점차 보다 높은 정의와 안정된 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10.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 사이의 갈등 인간 사회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제반 문제를 현실주의적 관심에서 분석해보면, 사회의 요구와 양심의 요청 사이에는 여간해서 화합하기 힘든 지속적인 모순과 갈등이 발견된다. 간단히 정치와 윤리의 갈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모순과 갈등은 도덕 생활의 이중적 성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인데, 그 하나는 개인의 내면적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생활의 요구이다. 사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이다. 그리고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이기심, 반향, 강제력, 원한 등과 같이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로부터 전혀 도덕적 승인을 얻어 낼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게 될지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은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보고서 자신을 잃기도 찾기도 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실현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인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 이 두 입장을 서로 조화시키려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분석해보았다. 개인의 도덕적 상상력이 동료 인간의 요구와 이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정의는 달성될 수 없다. 또한 정의 달성을 위한 바람직한 수단이 도덕적 선의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사회에 엄청난 위험을 가할 수 있다. 정치인의 현실 감각은 도덕적 선의지의 어리석음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리석게 되고 말 것이다. 역으로 도덕적 선지자의 이상주의는 인간의 현실적인 집단생활과 교류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을 뿐더러 도덕적 혼란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 통찰과 정신적 통찰을 융합해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두 가지 형태의 도덕, 즉 개인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 내적인 도덕과 외적인 도덕 내에 있는 상호 융합이 불가능한 독특한 요소들까지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 된다. 이 요소들로 인해 끊임없이 도덕적 혼란이 생겨나는 것은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회는 이타심보다는 정의를 최고의 도덕적 이상으로 삼는다. 사회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기회 균등을 부여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평등과 저의가 이기심의 상호 투쟁에 의해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웃의 권익을 침해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억제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회는 이기심에 대한 제재를 승인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내면적 입장은 주로 종교에 의해 개발되어왔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심오한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선한 동기를 행위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는 선한 동기를 사랑이나 의무로 규정하지만, 공통된 강조점은 행위의 내적인 원천에 주어진다. 합리화된 형태의 종교는 일반적으로 사랑보다는 의무를 최고의 덕으로 간주한다. 이는 칸트나 스토아의 도덕과 유사하다. 사회적 관점은 개인보다는 집단적 인간의 행동을 중요시하고 정치 생활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됨으로써 종교적 도덕과 첨예하게 대립된다. 다시 말해 정치적 도덕은 종교적 도덕과 가장 비타협적인 대립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성에 기초를 둔 합리적인 도덕성은 일반적으로 이 둘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러한 도덕성은 때때로 사회적 요구보다는 인간정신의 내면적인 도덕적 필요성에 더 근접한다. 이처럼 내면성에 더욱 치중할 경우, 그것은 종교적인 이타주의의 윤리보다 의무의 윤리를 더욱 심화시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도덕에서의 합리주의는 일종의 공리주의의 형태를 띠게 된다. 종교의 가치는 항상 이타 주의적 충동보다 강한 이기주의적 충동을 견제하는데 있다. 도덕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집단들의 관계로 옮겨가면 갈수록 이기적 충동은 사회적 충동을 누르고 득세하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내면적 억제도 이기적 충동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억제는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종교적 도덕은 타인들의 정의롭지 못한 주장에 맞서 자기주장을 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불의를 영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는 낡은 형태의 불의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형태의 불의를 등극시키는 꼴이다. 순수하게 종교적인 이상주의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이상주의가 물질적, 세속적 이익에 대한 우리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그 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란 환상에 빠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준 바와 같이, 종교적 이상주의는 자기실현이란 곧 자기 부정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믿고 있다. 다만 이런 자기실현이 물질적 생활이나 세속적인 이익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자기실현은 준교자의 영생, 제자들의 가슴속에 계속 살아 있는 구세주의 승천 등과 같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원수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한 것은 원수를 회개시키거나 아니면 원수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의도는 진정한 도덕적 완전성, 즉 하나님의 완전성에 가까워지기 위한 하나의 노력으로서 그렇게 권고한 것이다. 순수한 종교적 이상주의가 사회적으로 유효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 무저항주의를 그 방침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이 자명하다. 종교적 이상주의는 타인의 주장이 아무리 그릇된 것일지라도 끝까지 들어주고, 타인이 자기 이익을 부당하게 요구할지라도 이에 맞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양보하라고 가르친다. 만일 정의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모든 측면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이 충돌하고 주장과 반 주장이 맞서야 한다면, 인간 생활은 사실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사랑, 자애, 무욕 등과 같은 종교적 가치들은 사회적, 공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물론 종교는 이것들을 내면적이거나 초월적인 입장에서 보려 하겠지만, 이것들이 덕의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진정으로 그것들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에 관하여 흄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인 덕에 자애로운 성향이 없다면 결코 존중되지 않을 것이며,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인류의 행복, 사회의 질서, 가족들 간의 화합, 친구들 간의 우정 등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지배한 결과로 간주된다.」 도덕적 삶의 패러독스는, 진정한 상호 이해는 의식적인 사랑의 결실로서 상호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을 때 가장 순수할 수 있고, 가장 순수할 때 가장 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양쪽에 모두 이익을 주는 완전한 상호 이해는 의도적이지 않을 때, 즉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에서는 상호 이해를 현명하고 지혜롭게 계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생활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곳에서는 서로 공유하지 않을 경우 행복은 파괴되고 만다. 따라서 주장과 반 주장에 의해 정의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마찰은 양자의 행복을 모두 파괴해 버린다.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면밀히 계산하여 얻어내는 정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달성하기 어렵다. 이해관계는 매우 상호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를 파악하고 규정하기란 글 쉽지 않다. 개인은 대가를 바라건 바라지 않건 간에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의 이해관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버리고 다른 집단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세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에게 저기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중요시하라고 강요하는 모든 도덕, 그리고 무욕을 요구하는 모든 도덕은 국가의 행위에 적합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 어느 국가도 다른 국가의 이익에 관해 비이기적이 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한 사회 집단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출발하지만, 그 집단 내에서 또는 보다 특권적인 집단으로 전환함으로써 얻게 될 엄청난 개인적 보상으로 인해 끊임없는 유혹을 받게 될 가능성이 생겨난다. [옮긴이의 글] 이 책은 자본주의가 가장 극심한 위기 상황에 봉착했던 1930년대 초반에 저술되었다. 따라서 여기저기에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감정과 비판적인 논조가 깊이 스며있다. 이는 곧 새로운 대안 제시를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아주 평범한 상식이지만, 대안을 염두에 두지 않은 비판은 크게 가치가 없다. 니버의 논조대로 하자면 도덕성과 합리성을 회복함으로써 사회를 구현하자는 말인데, 이는 원래 도덕이나 이성이 철저하게 역사적 개념임을 파악하지 못한데서 나온 안일한 논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에는 정말로 놀라운 통찰력과 탁월한 상상력이 가득 차 있다. 이런 점에서 분명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해주고 가르침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응되기 어렵다. ~~~~~어떤 시각에서 읽든 그것은 독자의 고유 권한이다. [Review]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안락한 에덴동산이 아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는 땅에서 종일토록 수고하여 땀 흘리며 살아가는 곳이다. 「이타적 유전자」를 쓴 매트 리들리는 자기 보존과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이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 서로 협동하는 이타적 본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보는 시각은 이 책에서도 같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인간의 감추어진 이기성이 집단(경제, 정치권력 나아가 민족, 인종)속에서는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인의 이기성은 협동하는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다시 고개를 들게 되는 여지는 남아 있다.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그 여지는 더 큰 조직 속에서 확장되며 결국 더 이기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 갈등이 지금처럼 심화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냉전시대는 끝났지만 경제적 우위를 선점하려는 국가 간의 경쟁은 일부 강대국 간의 군사적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소득 분배, 지역이기주의로 인한 갈등 뿐 아니라 베일에 싸여 있던 권력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정치에 무관심한 냉소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홍수처럼 쏟아 내는 매스컴의 정보 때문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속에서 국민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큰 파도에 휩쓸리듯 변덕을 부린다. 여론조사는 불과 며칠사이에 뒤바뀌며 불안한 현실정치 참여자들은 기회만을 엿본다. 니버는 모든 사회적 혼란은 인간의 불평등에서 오는 것이며, 정치적 제도에 대한 비판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이기적 본성을 지닌 인간의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해답은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선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니버는 궁극적 대안으로 인간의 도덕적 도구들과 심성을 확장하는 이성의 힘으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지만, 타락한 본성에서 완전한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끝없는 갈등은 이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기독교 목사로서 그는 모든 문제는 절대 선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기독교 교리의 성화과정을 이와 연계시키며, 종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종교란 항상 절망의 끝에 세워진 희망의 성이다.” 이 책은 1932년도에 쓰여 진 오래된 책이지만 인간심리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라는 점에서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내용중에 일부 시대에 맞지않는 예들이 있지만, 그가 바라본 시대를 초월하는 놀라운 통찰력과 상상력이, 혼란한 사회를 우리의 이성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인간은 이성에 의해 자기 초월self transcendence 능력을 갖게 된다. 인간은 타인과 자신의 환경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본다. 인간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이긴 하지만, 이성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를 지배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인간의 에너지는 다른 사람과 갈등 없이 조화롭게 실현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의 집단은 개인과 비교할 때 충동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때에 따라 억제할 수 있는 이성과 자기 극복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에 비해 훨씬 심한 이기주의가 모든 집단에서 나타난다.」 「도덕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집단들의 관계로 옮겨가면 갈수록 이기적 충동은 사회적 충동을 누르고 득세하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내면적 억제도 이기적 충동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억제는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개인은 대가를 바라건 바라지 않건 간에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의 이해관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버리고 다른 집단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