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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철학(에드거 앨런 포)

작성자miramonte|작성시간26.06.23|조회수33 목록 댓글 0

글쓰기의 철학

에드거 앨런 포. 1809~1849

갈까마귀

에드거 앨런 포. 1845년 발표

 

어느 쓸쓸한 밤 피로와 슬픔에 젖어

잊혀진 전설의, 기묘하고 신비로운 책을 읽다가

선잠이 들어 머릴 꾸벅일 때 갑자기

누군가 살며시 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지.

"어떤 손님이 방문을 두드리는 거야. 그뿐이야."

나는 혼자 중얼거렸지.

 

아, 분명히 기억나는군. 음산한 겨울이었지.

타다 남은 검불 하나하나가 마루 위에 유령처럼 그림자를 새겨놓았지.

난 아침이 빨리 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지.

책으로 슬픔을 -죽은 레노어에 대한 슬픔을- 잊으려 했으나 헛된 일이었지.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 지은 둘도 없이, 찬란하던 그 소녀는

지금은 여기 영원히 이름 없이 누워 있네.

 

자줏빛 커튼의 비단이 쓸쓸하고, 희미하게 스치는 소리는

나를 떨게 했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환상의 공포가 마음을 채웠지.

그리하여 이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나는 일어서서 되풀이 말했지.

"어떤 손님이 문 밖에서 들어오기를 청하고 있는 거야.

어떤 늦은 손님이 문 밖에서 들어오기를 청하고 있는 거야.

그뿐이야"

 

이제 좀 더 강해진 내 영혼은 더 이상 주저치 않았지.

"누구신지 죄송합니다.

실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아주 조용히

희미하게 제 침실 문을 두드리셨군요.

그래서 소리가 들렸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활짝 열었지

그러나 거기에는 어둠 뿐

 

어둠 속을 응시하며 나는 오랫동안 의문과 두려움에 싸여

서 있었지.

전에 어떤 이도 감히 꿈꾸어 본 적 없는 꿈을 꾸며 의심하면서.

그러나 침묵은 깨어지지 않고, 정적은 아무 계시도 보여주지 않고

들리는 단 한 마디는 속삭이는 말 - "레노어?"

내가 이렇게 속삭이자, 메아리가 대답했네.

"레노어!" 단지 그뿐이었네.

 

영혼이 불타며 침실로 돌아왔지만,

곧 전보다 더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지.

"분명 창살에 무엇이 있는 거야." 나는 말했지.

"거기 뭐가 있는지 보자. 신비를 파헤쳐 보자.

마음을 진정시키고, 신비를 파헤쳐 보자.

바람일 뿐이겠지"

 

내가 덧창문을 활짝 열자 야단스럽게 펄럭이며

들어서는 것은 성스러운 태고의 당당한 갈까마귀였네.

새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잠시도 주저치 않고,

오연한 태도로 침실 문 위에 올라 앉았지.

문 위에 놓인 팔라스의 흉상 위에 날아올라 걸터앉았지.

그뿐이었네.

 

이 흑단의 새가 엄숙하고도 준엄한 표정을 지었기에

슬픈 마음에도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네.

그래서 나는 말했지. "너의 깃털이 심히 깎였는데도, 두려워 않는구나.

밤의 기슭에서 날아온 음울하고 해묵은 갈까마귀로다.

밤의 명부의 기슭에서 어떤 당당한 이름을 지녔는지 내게 말해다오!"

그러자 갈까마귀는 말했네. "다시는 안 돼요."

 

나는 이 볼품없는 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아주 놀랐지.

그 대답은 의미 없고, 엉뚱했지만,

살아 있는 어떤 이가 운 좋게도 자기 침실 문 위에서

자기 침실 문 위의 흉상 위에서

"다시는 안 돼요"라는 이름을 지닌 새를 보았겠는가.

 

그러나 고요한 흉상 위에 외로이 앉은 갈까마귀는

오직 그 한 마디만 했네.

그 한 마디 속에 영혼을 쏟아놓은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깃털 하나 펄럭이지 않았네.

내가 혼잣말 하는 순간까지도 "다른 새들은 모두 날아갔지.

아침이 되면 저 새도 떠나가리. 내 희망들이 날아갔듯이"

그러자 그 새는 말했네. "다시는 안 돼요."

 

이렇게 때맞춘 대답으로 정적이 깨어지자 나는 깜짝 놀라 말했지.

"분명히 저 새가 말하는 것은

어떤 불행한 주인에게서 익힌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리라.

무자비한 재앙에 쫓기고 쫓겨 마침내 한 가지 노래만 부르게 되고,

죽어버린 이에 대한 애도에서 '다시는 안 돼요'라고 우울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아직도 갈까마귀는 슬픈 마음에도 나를 미소 짓게 했기에

나는 방석을 새와 흉상이 있는 방문 앞으로 끌고 가

푹신한 벨벳 속에 파묻혀 끝없는 공상에 빠졌지.

구시대의 음울하고, 흉하고, 무시무시하고, 음산하고, 불길한 새가

"다시는 안 돼요"라고 울어대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런 생각에 빠져 앉아 있었으나, 그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내 심장까지 파고드는 새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이것저것 상상하며 앉아 있었지.

 

등잔 불빛이 흘러내리는 방석의 벨벳 장식 위로 편안하게 머리를 기댄 채

그러나 등잔불이 흘러내리는 보랏빛 벨벳 장식 위에

그녀는 이제 기대지 못하네. 다시는 안 되네!

 

그 때 공기가 더욱 짙어지는 듯 여겨지며, 향기가 흘러나왔지.

술 장식 달린 방바닥에 희미한 발자국들을 반짝이며 천사들이 흔들고 다닌 향로로부터

"비참한 자여" 나는 외쳤네.

"하느님께서 네게 빌려주셨어. 천사 편에 네게 보내주셨지. 레노어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진통제와 근심을 잊게 하는 약을.

들이켜라. 오. 이 고마운 약을 들이켜고 죽은 레노어를 잊어버려라!"

그러자 갈까마귀는 말했네. "다시는 안 돼요."

"예언자여!" - 나는 말했지. "악마여, 새든 악마든 예언자여! 신의 뜻으로 보내졌든 폭풍에 날려 왔든 황량한 마술에 걸린 이 황무지

공포의 귀신이 붙은 이 집에 두려움 없이 날아든 새여!

청하노니 내게 진심으로 말해주렴

길르앗에도 슬픔을 고치는 향이 있느냐?

제발 말해주렴."

그러자 갈까마귀는 말했네. "다시는 안 돼요."

 

"예언자여!" - 나는 말했지.

"예언자! 사악한 것! 새든 악마든 예언자여!

우리 위에 드리워진 천상으로 하여금, 우리 둘 다 찬미하는 신으로 하여금,

비애로 쌓인 이 영혼에게 멀리 에덴에서

천사들이 레노어라고 이름 붙인 성스러운 처녀를 붙잡을 수 있는지

천사들이 레노어라고 이름 붙인 찬란한 처녀를 붙잡을 수 있는지

말해주렴."

그러자 갈까마귀는 말했네. "다시는 안 돼요."

 

"그 말을 우리의 작별 인사로 삼자. 새든 악마든!"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

"폭풍 속으로, 밤의 피안으로 돌아가 버려라!

너의 혼이 말하는 그 거짓의 상징인 검은 깃털 하나도 남기지 말고!

내 고독을 깨뜨리지도 말고 내 문설주 위의 흉상에서 떠나라!

내 가슴에서 너의 부리를 치워라.

내 문에서 너의 모습을 없애라."

그러자 갈까마귀는 말했네. "다시는 안 돼요."

 

그리하여 까마귀는 날지 않고

내 침실 문 바로 위 창백한 팔라스 흉상 위에 여전히 앉아 있네.

그의 눈은 꿈꾸는 악마의 눈과 같고

등불이 그의 몸을 흘러내려 그림자를 마루에 비추네.

그리고 내 영혼은 마루에 떠도는 그 그림자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네! - 다시는 안 되네.

 

[작법의 철학]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짧은 편지에서 찰스 디킨스는 내가 전에 <바너비 럿지>의 짜임새에 대해 검토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말야. 자네는 고드윈이 <케일럽 윌리엄스>를 뒤쪽에서 썼다는 걸 알고 있나? 고드윈은 먼저 자기 주인공이 고생의 그물망에 걸리는 내용으로 2권을 쓴 뒤 그에 대한 모종의 설명을 하려고 1권을 써서 그 주인공의 성격을 요모조모 살펴본 거라네.

 

<케일럽 윌리엄스>를 쓴 매우 훌륭한 예술가인 그가 적어도 디킨스가 말한 것과 같은 창작 과정이 주는 이점들을 인식하지 않았을 리 없다. 플롯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플롯은 모름지기 작가가 펜을 들어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대단원까지 정교하게 기획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만큼 분명한 것도 없다. 지속적으로 대단원을 염두에 두고 쓸 때에만, 사건들은 물론이고 특히 사건의 모든 지점들에서의 어조가 창작 의도에 맞게 전개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하나의 플롯은 필수불가결한 결말이나 인과관계의 분위기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구축하는 보통의 방식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들은 역사에서 주제를 얻거나 그날의 한 사건에서 주제를 착안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니면 기껏해야 흥미로운 사건들을 결합하여 서사 구조의 기초를 만들어놓고는 드문드문 나타나게 될 사실이나 행위의 간극들을 묘사와 대화 그리고 저자 논평으로 메울 생각을 하는 식이다.

 

나의 경우는 하나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독창성에 항상 유념하면서 말이다. 독장성이야 너무도 명백히 독자의 흥미를 쉬 유발할 수 있는 요소인데 간과한다면 작가가 불성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먼저 이런 질문을 한다. 마음과 지성 혹은 (더 일반적으로는) 영혼이 받아들이는 수많은 효과나 인상 중 지금 무엇을 택할 것인가? 나는 맨 처음에 효과의 새로움을 고려하고, 그 다음에 효과의 생생함을 정한다. 그리고 그 효과가 과연 사건들에 의해서 잘 생겨날지 아니면 어조에 의해서 잘 구축될지를 나중에 고려한다. 즉 평범한 사건들에 특이한 어조가 가해지면 될지 혹은 그 반대로 특이한 사건들을 평범한 어조로 전개할지, 혹은 사건과 어조 둘 다 특이함이 필요할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효과의 구축에서 나를 가장 잘 도와줄 그런 사건과 어조를 결합해내기 위해 내 주변 혹은 내 안을 살펴보면서 말이다.~~

 

대부분의 작가들, 특히 시인들은 자기들이 일종의 섬세한 격정 즉 모종의 황홀한 직관에 의해 창작을 한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창작 과정을 대중이 엿보도록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몸서리를 친다. 그 정교하고도 오락가락하는 생각의 조야한 생각들,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포착되는 글의 진정한 목적들, 충분히 무르익어 전체가 보이는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언뜻언뜻 보이기만 하는 헤아릴 수 없는 생각들, 충분히 무르익었다가도 감당할 수 없어 내버려지는 공상들, 그 요의주도한 선택과 포기들, 그 고통스러운 삭제와 삽입들을 독자가 엿보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이 최종 상태에 이르게 되기까지 거친 여러 단계들을 작가가 스스로 역추적해나갈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일이 결코 흔하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뒤죽박죽의 혼란된 상태로 생겨난 어렴풋한 생각들을 작가는 꼭 마찬가지의 혼란된 방식으로 추구하다가는 잊어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내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게 <까마귀>이니 이 작품을 선택하겠다. 나의 계획은 이 시의 창작 과정의 어느 지점도 우연이나 직관에 기인한 것이 아니고, 수학 문제를 푸는 것 같은 정확성과 그것의 엄밀한 결과에 의해 단계별로 하나씩 완성을 향해 나아갔음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그럼, 대중과 비평가의 취향에 동시에 맞는 시를 쓰려는 의도는 전제하기로 하고 시작해보자.

 

처음에 고려한 것은 작품의 분량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문학작품이건 한 번 앉은자리에서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길면 인상의 통일성이 주는 지극히 중요한 효과를 포기하는 셈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 두 번 앉아 읽어야 다 마칠 수 있는 분량이라면, 그 사이에 세상사들이 끼어들어 총체성 따위는 일시에 다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시라고 부르는 것도 실은 단지 짧은 시들의 연속에 불과하다. 즉 짧은 시적 효과의 연속인 것이다. 시란 영혼을 고양시키는 종류의 깊은 흥분을 불러일으킬 때에만 시가 된다는 것은 검증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심리적인 필요로 인해 모든 깊이 있는 흥분은 짧다. 그렇기 때문에 <실낙원>의 경우 적어도 그 절반은 본질적으로 산문이다. <실낙원>은 시적 흥분이 연속되긴 하지만 불가피하게 그 흥분에 맞먹을 정도의 침체가 작품 곳곳에 산재해 있고, 전체적으로 보아 이 긴 작품은 효과의 총체성 혹은 통일성이라고 하는 지대하게 중요한 예술적인 요소를 작품 길이의 극단성에 빼앗겨버린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다.

 

모든 문학작품의 길이에는 하나의 뚜렷한 제한이 있다는 것, 즉 한 번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길이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즉시 내가 쓰려고 하는 시에 맞는 길이를 상정하는 데 이르렀다. 그것은 100행 가량의 길이이다. 실제로 <까마귀>는 108행이다.

 

그다음에 내가 생각한 것은, 시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인상 혹은 효과를 선택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쯤에서 내가 시 창작 과정 내내 이 시가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작품이 되게 하려는 기획을 품었다는 사실을 언급해도 좋을 것 같다.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논점과 함께 내가 반복적으로 주장해온, 조금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한 가지 논점은 시의 유일하게 합당한 영역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

 

내가 믿는 바로는, 가장 깊이 있고 동시에 가장 영혼을 고양시키고 그러면서도 가장 순수한 즐거움은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숙고하는 데서 얻을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때 그들은 정확히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성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효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내가 설명한 것처럼, “아름다운 것”에 대한 숙고의 결과로 얻어지는 심도 있고 순수한 영혼의 고양 - 지성의 고양이나 심장의 흥분이 아니라 -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아름다움을 시의 영역으로 지정하는 이유란 그저, 작품에서 예술적 효과는 직접적인 원인으로부터 샘솟아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는 예술의 명백한 규칙, 다시 말하면 목적은 그것을 성취하는 데 가장 잘 맞는 수단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그 이유 때문이다. ~~~

 

진리는 사실상 하나의 정확성을 요구하고, 열정은 내가 말한 영혼의 흥분 혹은 숭고한 기쁨으로서의 아름다움과는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소박함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열정이나 심지어 진리가 한 편의 시에 들어갈 수 없다거나, 그것도 득이 되는 방식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암시를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마치 불협화음이 대조의 효과로 음악에 기여하듯이 진리나 열정도 시에서 상세한 의미 전달에 기여하거나 혹은 전반적인 효과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진정한 예술가라면 첫째, 진리나 열정을 조율하여 자신의 지배적인 목적에 적절히 종속시키려고 각고의 노력을 할 것이고, 둘째, 진리나 열정을 자기 시의 분위기이자 정수인 아름다움의 베일 안으로 넣어 그들을 가능한 한 가릴 것이다.

 

그러면 이제 아름다움을 내 시 창작의 영역으로 삼았으니, 나의 다음 질문은 아름다움을 최고로 구현하기 위한 어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경험들이 말해주는 바로는, 그러한 어조는 슬픔의 한 종류이다.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이건 그것이 최상으로 구현되었을 때에는 어김없이 그것을 보는 감수성이 예민한 영혼을 자극하여 눈물을 흘리게 한다. 따라서 구슬픈 우울함이야말로 모든 시적인 어조들 중 가장 합당한 어조일 것이다. ~~~

 

이제 나는 나의 시가 약 100행 정도 길이에 우울한 어조를 담을 것이며, 각 연의 종결부에서는 불운을 상징하는 새인 까마귀가 “결코 더는”이라는 한 단어를 단조롭게 반복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시가 모든 면에서 지극히 훌륭해야 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목적을 결코 내려놓지 않으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에 근거한다면 모든 우울한 주제 중에서 가장 우울한 주제는 무엇인가?” ‘죽음’이야말로 그것에 대한 명백한 대답이었다. 나는 또 “그러면 모든 주제들 중 가장 우울한 이 주제가 언제 가장 시적이 될 수 있는가?” 물었다. 이미 일정 정도 설명한 것을 근거로, 여기에서도 나의 대답은 명백했다. 그건 죽임이라는 주제가 미의 여신과 가장 밀접하게 동맹을 맺을 때지. 그러면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주제는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이야. 그리고 마찬가지로 의심할 여지 없는 건 그 주제를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입은 사랑하는이와 사별한 연인의 입이라는 거지.

 

이제 나는 죽은 여성, 즉 죽은 애인에 대해 슬퍼하는 한 연인 그리고 지속적으로 결코 더는 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까마귀라고 하는 두 개의 관념을 결합해야만 했다. 나는 그 반복어에 매번 지속적으로 변화를 주려고 하는 내 기획을 염두에 두면서 이 둘을 결합해야만 했다. 그러한 결합으로서 유일하게 이해 가능한 형태는 그 연인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까마귀가 그 말을 반복한다고 상상하는 설정이었다. 바로 이쯤에서 나는 내가 매달려온 그런 종류의 효과- 즉 일정한 변화를 적용하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를 보았다. 연인이 내어놓은 첫 질문. 그에 대해 까마귀가 결코 더는 이라는 대답을 해야 하는 질문을 내가 만들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첫 질문은 평범한 것으로 만들고, 두 번째 질문은 덜 평범한 것으로, 그리고 세 번째는 한결 덜 평범한 것으로 만드는 식으로 이어가다가 마침내 그 연인이 까마귀가 대답하는 그 단어의 우울한 특징, 잦은 반복, 그리고 그 단어를 말하는 날짐승의 불길한 징조를 떠올리게 되면서 그가 애초의 무심한 태도에서 벗어나 화들짝 놀라도록 ask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연인은 결국 흥분하여 미신적인 마음의 상태로 빠지고, 이제 매우 성격이 다른 특징을 지닌 질문들, 즉 그가 열정적으로 그 답을 마음에 두고 있는 질문들을 마구 내어놓게 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질문을 하는 것은 그 새의 예언적이거나 악마적인 성격을 wsj적으로 믿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이 새가 단지 되풀이된 일상에서 학습한 것을 반복하고 있음을 이성적으로 확신한다. 그가 그렇게 질문을 하는 이유는 오히려, 가장 견딜 수 없기에 가장 달콤하게 느껴지는 슬픔을 그 예상된 “결코 더는”이라는 대답으로부터 얻을 수 있도록 그에 맞는 질문들을 만드는 일에 광적으로 탐닉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기회 -혹은 더 엄격히 말하자면 창작이 진전되면서 나에게 그렇게 강제된 기회-를 인식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 절정 혹은 결말의 질문-“결코 더는” 이 맨 마지막 대답이 되게 하는 질문-을 마음속으로 확정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결코 더는 이라는 말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슬픔과 절망을 의미하게 되는 그런 질문을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의 시가 작품의 맨 마지막 지점에서 그 시작을 얻었다고 해도, 모든 예술작품이 그래야 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이 지점 즉 내가 미리 품은 생각들이 나온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종이 위에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은 연을 지었기 때문이다.

 

“예언자여!” 나는 말했네 “악의 존재여! 새든 악마든 예언자여!

우리를 굽어보는 저 천국의 이름으로, 우리 둘 다 경배하는 저

신의 이름으로 청하니.

슬픔 가득한 이 영혼에게 말해다오. 그 머나먼 에덴에서

천사들이 르노어라고 부르는 성스러운 여인을 내 영혼이 부둥켜안을 수 있을는지.

천사들이 르노어라고 부르는 둘도 없이 귀하고 빛나는 그녀를 부둥켜안을 수 있을는지.“

까마귀는 말했네 “결코 더는.”

 

나는 이 연을 다음과 같은 의도로 지었다. 첫째, 이러한 마지막 절정을 미리 확립함으로써 더 이전에 나올 연인의 질문들을 그 심각함이나 중요성의 정도에 따라 더 잘 점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둘째, 내가 이 연의 리듬, 운율, 길이, 배열을 명확히 잡아놓음으로써 이 연보다 더 앞에 배치할 연들 중 그 어떤 연도 리드미컬한 효과 면에서 이 연을 능가하지 못하도록 점진적 변화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설사 나중에 이 연보다 더 강한 활력을 지닌 연을 이 시에서 창조했다 해도, 나는 이 클라이맥스의 효과를 방해하지 않도록 주저 없이 그 연들을 의도적으로 약화시켰을 것이다.~~~

 

다음으로 고려할 점은 어떤 형태로 연인과 까마귀를 한자리에 놓을 것인가였다. 이러한 고려의 첫 갈래는 장소였다. 장소로 가장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숲이나 들판일지 모르지만, 나는 고립된 사건이 주는 효과를 위해서는 늘 어떤 좁고 한정된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런 한정된 윤곽은 그림의 액자 같은 힘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은 관심을 집중시키는 분명한 힘을 지니는데, 물론 이러한 공간 설정을 장소의 통일성에 불과한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연인을 그의 방에 두기로 결정했다. 그 방에 종종 들어왔던 그녀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에게는 성스러운 장소가 되어버린 어느 방에 두기로 한 것이다. 그 방은 가구가 호화롭게 배치된 것으로 재현될 터인데, 이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유일하게 참된 시적 주제에 대해 내가 이미 설명한 생각을 그저 좇아가기 위함이다.

 

장소가 그렇데 결정이 되었으니, 이제 나는 새를 들여와야 했는데, 당연히 새가 창문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설정이어야 했다. 우선 새의 날개가 덧문에 닿아 퍼덕대면 연인이 그것을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로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었다. 이러한 설정은 독자의 호기심을 끌고 가면서 증폭시키려는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연인이 문을 열어젖힘으로써 생겨나는 부수적인 효과, 즉 밖이 모두 깜깜한 것을 알고는 그때부터 자기 애인의 영혼이 문을 두드렸을 거라는, 절반은 공상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걸로 이어지는 효과를 기대한 설정이기도 했다.

 

나는 그 밤을 폭풍우 치는 밤으로 만들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까마귀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 폭풍우가 방 안의 (물리적인) 고요함과 대조되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새가 팔라스 흉상 위에 내려앉도록 정하였는데 이 또한 대리석과 깃털 사이의 대조 효과를 위해서였다. 물론 이 흉상이 떠오른 것은 전적으로 그 새로 인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굳이 팔라스의 흉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로 연인이 학자라는 설정과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팔라스라는 말 자체가 울림이 크기 때문이었다.

 

시의 중간 정도에서 나는 궁극적인 인상을 심화하려는 의도로 대조의 힘을 활용했다. 예를 들면 까마귀가 등장할 때, 최대한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그 장면에 부여했다. 까마귀는 “푸드덕 퍼드덕 날갯짓하며” 들어온다.

최소한의 예의 차린 인사도, 잠깐 멈추어 서는 기색도 없이,

그러나 귀족의 기품으로 그는 내 방문 위에 자리를 잡았고(이러한 의도는 이어지는 두 연에서 더 분명하게 수행된다)

이 흑단빛 새의 진지하고 단호한 품위에 홀려

나는 내 슬픈 공상을 잊고 미소 짓고 말았지.

“그대 볏은 다 깎였지만, 분명 볼품없는 자는 아니로다.

밤의 왕국 바닷가에서 날아와 떠도는 섬뜩하게 음울하고 연로한 까마귀여.

말해다오. 플루톤의 밤의 왕국 바닷가에서 그대의 고귀한 이름은 무엇인가!“

까마귀가 말했네 “결코 더는.”

나는 너무 감탄했네. 이 투박한 날짐승이 그토록 또박 대답을 하다니.

비록 대답은 말이 되지 않고 내 질문과 상관이 없었어도

그 어떤 살아 있는 인간이 자기 방문 위에 앉은,

자기 방문 위 조각 흉상 위에 앉은, 제 이름을 말하는

새인지 짐승인지를 보는 행운을 누렸으랴.

그 이름은 “결코 더는. ”

이미 대단원의 효과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제 나는 즉시 환상적인 분위기를 멈추고 가장 의미심장한 진지한 어조를 만들어낸다. 그 어조는 위에 인용된 부분 바로 뒤의 연에서 다음과 같은 행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까마귀는 조용한 훙상 위에 외로이 앉아 단지 그 말만,

이때부터 연인은 더 이상 장난삼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까마귀의 행동에서 더 이상 그 어떤 환상적인 것도 보지 못한다. 그는 까마귀를 민담에 나오는 우울하고 투박하고 섬뜩하고 수척하고 불길한 새라고 말하고 새의 이글거리는 눈이 자신의 가슴 한복판에서 타오르고 있다고 느낀다. 연인의 생각 혹은 공상의 이러한 전면적인 전환은 독자에게서 유사한 전환이 일어나도록 유도하여 독자의 마음이 대단원- 이제 가능한 한 빠르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뒤따를-을 맞이할 적절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 대단원은 자기 애인을 저 세상에서 만나게 될 것인가를 묻는 연인의 마지막 질문에 까마귀가 결코 더는 이라고 내뱉는 바로 그 대답이며, 이 대답과 함께 이 시는 하나의 내러티브로서 명백한 국면을 맞아 완성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

 

[상상력에 대하여]

 

순수한 상상력은 아름다움으로부터이건 추함으로부터건, 가장 결합이 용이하면서도 지금까지 결합된 적이 없는 것들을 선택한다. 그 결합체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결합된 요소들 각각이 결합 이전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지녔던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체로 비례한다. 그러나 물질의 화학 작용에서 흔히 그런 것처럼, 이 지성의 화학 작용에서도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일은 두 요소의 혼합이 어느 한 요소의 성질을 전혀 갖고 있지 않거나 심지어 두 요소 중 그 어느 것의 성질도 갖고 있지 않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시의 원리]

나는 긴 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긴 시는 그저 용어 자체부터 결정적인 모순이라는 게 내가 고수하는 입장입니다.~~~

 

브라이언트의 마이너 시들 중 <유월>이라는 시만큼 내게 큰 감동을 준 시도 없습니다. 그 시의 일부분만 여기 인용해보겠습니다.

 

그곳에는 긴긴 여름 동안

황금색 빛이 있어야만 한다.

굵은 어린 약초와 여러 무리의 꽃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옆에 서 있어야 한다.

꾀꼬리는 내 작은 방 가까이에서

제 사랑 이야기를 지어내고

한가한 나비는

그곳에서 쉬어야 하며

일벌과 벌새 울음이 들려야 한다.

 

만약 마을로부터 온 어떤 흥겨운 외침들이

정오에 도달한다면 혹은

처녀들의 노래가 달 아래 요정들의 웃음과 뒤섞여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약혼한 연인들이

저녁 빛 받으며 내 나지막한 묘비가

보이는 곳에서 거닌다면 어떻게 될까?

무덤 주변의 그 사랑스러운 장면이여.

그보다 더 슬픈 장면이나 소리를 알지 못하길.

 

나는 안다-나는 안다- 그 계절의 찬란한 징후를

내가 보지 못하리라는 걸.

그 계절의 가장 밝은 빛도 그 분방한 음악도

내게로 흐르지 않으리라는 걸.

그러나 만약 내가 잠든 곳 주위로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와서 울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서둘러 가지는 않으리.

부드러운 공기와 노래 그리고 빛과 꽃이

그들을 내 무덤 곁에 서성거리게 할 터이니.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부드러워진 마음에

과거에 대한 회상을 불러일으키고

그 광경의 기쁨을 함께할 수 없는

한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해줄 터이니.

그 여름 언덕의 둥근 능선을 채우고 있는

그 모든 화려함 속에서 그 사람의 역할은

그의 무덤이 초록으로 푸르다는 그것.

그래서 그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다시 듣고

그들의 마음은 마음 깊이 기뻐하리라.

 

현대 시인들 중 가장 고상한 시인 중 한 명이자 - 그리고 공상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가장 두드러지게 공상적인 시인 중 한 명이 토머스 후드입니다. 나는 그가 쓴 <아름다운 이네스>에 언제나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낍니다.

오 당신은 아름다운 이네스를 보지 못했나?

 

그녀가 서쪽으로 가버렸네.

태양이 질 때 그녀는 모든 것을 눈부시게 하고는

세상으로부터 휴식을 앗아 가네.

그녀는 우리의 대낮을 함께 데려가버렸네.

우리가 가장 사랑한 미소를

그녀 뺨의 아침 홍조와 함께

그녀 가슴의 진주와 함께 데려가버렸네.

 

오 돌아오라 아름다운 이네스여

밤의 장막이 내려오기 전에 오라

그대 없이 달이 홀로 빛나지 않도록

별들이 경쟁자 없이 빛나지 않도록.

그대의 빛 아래 걷고 그대 뺨 가까이에서

내가 감히 글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그 사람을 들이마시는 연인은

축복받으리라!

 

아름다운 이네스여

-이하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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