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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 이언오 칼럼

나의 살아온 이야기 - 명산 이언오

작성자동장 김만수|작성시간20.02.11|조회수1,276 목록 댓글 0

 나의 살아온 이야기 - 명산 이언오

 

1. 성장과 학업

 

어린 시절

 

어릴 때 살았던 곳은 부산시 동구 초량 4동 824번지. 부산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의 산복도로 부근. 부모님이 한국전쟁 직후 밀양에서 내려와 정착한 곳이다. 아버지는 벽진 이씨, 밀양군 무안면 삼태리 굴밑 동네. 어머니는 밀양 손씨, 밀양역 근처 예림에서 사셨다. 수십 리 길을 걸어서 시집을 갔다.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 돌아온 다음 해 내가 태어났다. 위로 형이 있었는데 얼마 살지 못했다고 한다. 어렵게 살던 시절 어머니는 이웃에게 쌀을 꾸어주었다. 아버지는 마른 쌀 꾸어주고 젖은 쌀 돌려받는다고 나무랐다. 두 분의 성격 차이를 보여준다.

새로 짓기 전 초량 집에는 감나무와 우물이 있었다. 길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마당이었다. 한번은 거지 부녀가 구걸을 왔다. 딸은 내 또래로 보였다. 그때는 상이군인과 거지가 구걸하러 돌아다녔다. 거지 부녀가 대문 옆 계단에 앉아있는데 내가 장난삼아 못으로 여자애 머리를 때렸다. 약하게 친 것 같았는데 아이 얼굴에 피가 흘러내렸다. 누군가 된장을 발라주고 돈을 주어 보냈다. 철없이 한 장난에 많이 놀랐다. 그 아이 어딘가 살고 있다면 용서를 빈다.

부모님은 초량시장에서 처음에는 옷감, 나중에는 의류 가게를 운영하셨다. 아버지는 옷감을 보자기에 싸서 시골 오일장을 돌아다니셨다. 백화점과 인터넷이 없던 시대여서 장사가 잘 되었다. 명절 대목이 되면 내가 친척 아저씨를 모시고 가게로 갔다. 그분이 물건을 처음 사주면 그날 장사가 잘 되었다. 세상이 바뀌어 옷 장사가 안될 때까지 부모님은 오랫동안 가게를 유지했다. 시장 건물을 새로 건축한 적이 있었다. 추석 대목이라서 산부인과 앞에 좌판을 벌렸다. 여의사가 나오더니 좌판을 치우라며 신경질을 냈다. 서울대 학생의 자만심이 상처받고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울컥 올라왔다. 집안 사정이 학생운동을 한 배경으로 작용한 듯하다.

조금 반골 기질이 있었다. 이웃집 아이들과 친하지 않고 다른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다. 다른 동네에 사는 소아마비 아이와 특히 친했다. 다른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이웃집 아이들이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다. 바로 밑 동생이 더 어린 동생들을 괴롭히면 엄청 화를 내곤 했다. 패거리에 대한 거부감, 약자에 대한 동정, 강자에 대한 반발이 느껴진다. 지금도 조직과 연고 집단을 싫어하고 약자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대여섯 살 때 일이다. 부모님 꾸중을 듣고 가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네 친구가 일본에 가자고 해서 둘이서 자갈치 시장까지 걸어갔다. 배를 타고 건너편 섬(영도)을 여러 차례 왕복했다. 어떻게 요금을 내지 않고 배를 탔는지 모르겠다. 저녁에 늦게 돌아왔더니 부모님이 한참 찾으셨다고 했다. 꾸중을 듣지는 않았다. 시장 상인들이 ‘일본에 갔다 왔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초량 집은 두 번 새로 지었다. 옷 가게로 번 돈으로 땅을 메꾸어 방 넷, 부엌 둘의 집을 지었다. 집 일부는 세를 주었다. 난방이 안 되는 복도를 내 방으로 고쳐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사용했다. 이불을 덮어쓰고서 공부를 하고 오디오를 조립했다. 추운 곳에서 지낸 탓인지 무릎이 자주 아팠다. 나중에 밀양에 사두었던 땅을 처분해서 3층 집을 지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집을 팔았다.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은 집은 그 자리에 아직 있다.

 

초등학교

 

머리가 좋았던지 초등학교 내내 1등을 했다. 입학 전에 딱지를 보고 한글을 깨우쳤다. ‘대장’ 딱지에 ‘대’와 ‘장’ 글자가 있었다. 저학년 체육시간에 장대에 빨리 올라가는 시합을 했다. 꼭대기에 닿았는데 다른 애들이 내려 가는 것이 보였다. 급한 마음에 서둘다가 손을 놓아 바닥에 떨어졌다. 다리에 기브스를 해서 한 달을 지냈다. 가사를 돕던 친척 분 등에 업혀 학교에 다녔다. 부자 어머니들은 학교에 자주 들렀다. 어머니는 장사하느라 학교에 오지 않았다. 공부를 잘한 탓에 4∼6학년 반장을 맡았다. 잇몸 염증이 심했는데 억지로 학교에 갔다.

수업을 듣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아픈데 어떻게 학교에 왔느냐?’면서 놀렸다. 눈물을 펑펑 흘렀다. 전교 회장 선거에 억지로 나갔다. 소견 발표에서 ‘회장할 뜻이 없다’고 했고 2표를 얻었다. 나와 나를 추천한 친구 한 명이 찍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갔는데 동네 고등학생 형이 원고를 써주었다. 주제는 반공. 무조건 외워야 하는 줄 알고 며칠을 공을 들였다. 마지막에 두 손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라는 조언을 받았다. 제대로 외치지 못했다. 순위는 중간 정도였다.

 

중고등학교

 

중학교 방학 때 한 달 동안 동네 친구의 신문배달에 따라다녔다. 돈벌이보다 어렵게 사는 현장을 보고 싶었다. 새벽에 부산역에서 신문을 받아 각 가정에 배달했다. 초량과 영주동에 배달을 마치면 몇 십 부가 남았다. 국제시장에서 ‘신문 사세요’라고 외치며 팔았다. 신문을 판 돈으로 오는 길에 군것질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처음 서울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장 선생님이 서울대에 많이 합격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서였다. 중학교 때 반에서 1∼2등을 했는데 고등학교 첫 시험 결과는 10위권 밖이었다. 사춘기 고민이 공부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다시 공부에 매달렸지만 상위권으로 회복하는데 1년 이상 걸렸다. 3학년 마칠 때는 전교 몇 등 안에 들었다. 점심 먹고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해서 시계가 7번 신호하는 소리(저녁 7시)를 듣고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목이 굳어 한동안 고생을 했다. 서울의 한 재수학원과 공동으로 치른 모의고사에서 문·이과 통틀어 국어에서 1등을 했다. 이과생이 특이하다는 말을 들었다.

부산고는 매년 백 명 이상 서울대에 진학했다. 아버님은 법대·상대를 원했으나 오디오 조립이 취미였던 나는 이과를 고집했다. 얼마 후 전자는 취미로 하고 해양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일본 해양오염 사고(미나마타 병)를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담임 선생님은 성적이 좋으니 의대나 전자공학과에 가라고 끝까지 설득하셨다. 원서 도장을 찍는 순간까지 ‘후회하지 않을 거지?’라고 물으셨다. 다들 성적에 맞게 대학과 과를 선택했는데 나만 유별나게 행동했다.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바라보았고 남의 말을 안 들었다.

 

고등학교 일화 : 부산고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라이벌 경남고와의 시합이 있었다. 평소 막상막하였는데 그날따라 초반부터 큰 점수 차로 지기 시작했다. 심판이 우리에게 불리한 파울볼 판정을 내렸다.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뛰어들자 심판들은 도망을 갔다. 징을 치고 구호를 외치면서 농성을 했다. 급하게 연락받고 선생님들이 달려온 후에 수습이 되었다. 3학년 현충일에 당시 최강 경북고와의 준결승이 서울에서 열렸다. 학생회 간부 몇 명과 함께 전날 밤차를 타고 상경했다. 운동장에 공짜로 들어가려고 야구선수의 교복을 빌려 입었다. 경북고에게 홈런을 얻어맞으면서 패했다. 선배들과 동숭동 문리대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취한 상태로 지하철 공사 중인 종로를 걸어서 서울역으로 갔다. 야간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다음 날 멀쩡하게 등교했다.

 

대학 시절

 

서울대 해양학과는 분위기가 많이 처져 있었다. 극소수만 교수·연구원을 꿈꾸고 대다수는 취업에 매달렸다. 해양학과는 상관없는 해운회사도 그중 하나였다. 해군에서 퇴역 함정을 기증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선박 운영비가 자연대 1년 예산보다 컸기 때문에 인수를 포기했다. 미국 학생들은 몇 달간 태평양을 누비며 실습하는데 한국은 갯벌에서 호미로 샘플을 채취했다. 학과장이 운동권 학생인 내게 장래 진로를 물은 적이 있었다.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집에 돈 있느냐?’고 말했다. 그때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지내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타과 과목들을 두루 수강했고 학점은 중상위권 정도였다.

입학식 다음 날부터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시간제도 몇 개씩 병행했다. 집안이 크게 어렵지 않았는데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배가 고파 물을 마신 적도 있었다. 과외 하는 집에서 온갖 음식을 다 먹어보았다. 이후 식성이 까다롭지 않게 되었다. 대학교 과외 알선하는 곳에 자주 들렀다. 과외를 원한다고 손을 들면 직원이 결정했다. 경쟁이 치열해서 한 번 선정이 되면 한동안 추천해주지 않았다.

후암동 대기업 회장 집에 입주했을 때였다. 기사와 가정부와 같이 주방에서 밥을 먹었다. 회장 가족은 따로 먹었다. 어느 날 집에 갔더니 고3 학생이 친구들과 담배를 피웠는지 연기가 자욱했다. 바로 집을 나와 삼선교 근처에 있는 선배 자취방으로 갔다. 밤늦게까지 골목에서 기다렸는데 방의 불이 켜지지 않았다. 통금 때문에 관악산 학교로 갔다. 기숙사 근처 숲속에서 새벽까지 뜬 눈으로 보냈다. 모기한테 많이 물렸다. 동작동에서 입주로 중학생을 가르쳤다. 생일이라고 친구들을 불러 짜장면 파티를 열었다. 열 몇 그릇을 시켜서 반 이상을 남겼다. 정의감에 불타던 시절이라 그것을 다 먹겠다고 덤볐다. 보기가 딱했던지 가정부가 거들어 주었다. 여중생의 바느질 숙제를 도와주기도 했다.

1970년대는 학생운동이 한창이었다. 1학년 봄 학기부터 운동권 선배들과 신월동·봉천동에서 야학을 했다. 그 중 상당수가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월동은 철거민들이 이주한 동네였다. 평당 7만 원에 3평 땅을 사라는 유혹이 있었다. 과외 소득으로 살 수 있었지만 나쁜 짓인 것 같아 거절했다. 야학에 다니는 학생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학생 어머니가 나를 고맙게 본 모양이었다. 젓가락으로 장아찌를 집었는데 구더기가 보였다. 슬쩍 치우고는 태연하게 먹었다. 야학 학생들은 정이 많고 나를 상당히 따랐다. 장래 희망도 자주 이야기했다. 야학을 그만 두고 몇 년 후에 자취방으로 놀러오기도 했다.

졸업이 다가왔는데 군 입대가 늦어졌다. 군 미필 상태로 몇 군데 입사 원서를 넣었으나 떨어졌다. 환경오염을 전공하려고 농화학과 대학원 시험을 보았으나 불합격했다. 경영학과 학사편입 공고를 보고 영어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사람을 다루는 인사관리가 적성에 맞았다. 과외로 학비·생활비를 벌어가며 2년을 더 공부했다.

 

2. 직장 생활

 

KDI 연구원

 

군 입대 전에 현대중공업에 4개월을 다녔다. 플랜트 영업부서라서 그랬는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낮에 영업 명목으로 돌아다니다 저녁에 사무실에 들어왔다. 신문보다가 윗사람 퇴근한 다음에 집으로 갔다. 방위 복무 중에 세상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서울경제 신문을 구독했다. 1980년 KDI 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해서 합격을 했다.

KDI에서 산업정책 파트에 배치되었다. 미국에 유학한 박사를 보조하는 업무였다. 열심히 일한 탓에 평가를 잘 받았고 주임연구원 승진도 빨랐다. 고교 선배 한 분이, ‘자네는 상대 가치가 아니라 절대 가치에 따라 산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은 이해가 된다.

 

KDI 일화 #1 : 연구원 입사 초기에 경주 IBRD 국제연수에 다녀왔다. 전력사업의 타당성 분석이 주제였다. 후보자로 선발된 고참 연구원이 영어 테스트에서 떨어져 나에게 기회가 왔다.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해야 했다. 떠듬떠듬 대답을 했는데 마지막 질문이 귀에 들어왔다. ‘왜 연수를 가려고 하느냐?’였다. ‘사랑을 위해서(For love)’라 대답했다. 결과는 합격. 경주 신라호텔에서 아시아 10여 개국에서 온 30여 명과 8주 합숙했다. 주말이면 경주 남산에 올라가 석불들을 구경했다. 뱅글라데시 사람들이 치킨을 먹으려고 경주 시내에 나갔다가 헛걸음을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닭’을 그려갔는데 나에게는 ‘새’로 보였다. 마지막에 팀을 나눠 과제를 수행했다. 전력을 모르고 영어도 서툰 내가 발표를 했다. 공급과잉으로 가동률이 낮아지리라 예측하고 ‘자살 행위(suicide)’라 했더니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연수진행자 테드는 제법 나이가 든 사람이었다. 마무리 파티장에서 ‘고맙습니다(appreciation)’ 외치더니 옷을 입은 채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KDI 일화 #2 : 상사가 미국 출장을 떠나서 돌아올 날이 임박했다. 연구원들이 함께 영화를 보러가기로 했다.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중국 무협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신문 광고란의 포스터에서 중국 유명 배우의 사진을 확인했다. 영화관에 들어갔더니 관객이 우리 일행 외에 두 사람 정도 더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우리 말이 나왔다. 한국 영화였던 것이다. 중국 유명 배우는 마지막에 악당 두목으로 잠깐 나와서 착한 주인공한테 죽임을 당했다. 연구원에 돌아와 여직원은 영화사에 전화를 걸어 한참 욕을 했다.

KDI 일화 #3 : 상사가 경제기획원 자문관으로 파견 나갔다. 가을날 오후 다른 연구원과 둘이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도봉산에 가기로 했다. 산에서 형사가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멀쩡한 청년 두 명이 평일 낮에 산에 왔으니 수상했던 모양이다. 산에서 내려와 파전에 막걸리를 조금 마셨다. 퇴근 시간에 맞추어 집에 갔다. 정상 퇴근인데 술 냄새를 풍기니 아내가 이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그룹 비서실

 

1986년 봄 삼성경제연구소가 창립 연구원을 채용했다. 면접을 보고 과장 초호봉에 임용되었다. 입사 후에 보니 KDI 일반 연구원이었던 동료가 주임이었던 나보다 호 호봉을 높게 받았다. 내가 면접에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 반면, 그 연구원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채용 담당자에게 이의를 제기했더니 ‘삼성은 나중에 조정이 된다’고 답변했다.(나중에 나는 임원이 되었고 그 연구원은 부장으로 퇴직했다)

용인에서 4주 신입사원 연수를 받았다. 의욕이 넘쳐 질문을 너무 많이 하다가 너무 나선다는 뒷말을 들었다. 연수 막바지에 하루 종일 행군을 했다. 비를 맞으며 용인 시내를 걸어가니까 행인들이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함께 걷던 박 부장이 ‘아줌마들, 집에 가서 남편에게 잘해주세요. 우리는 다 먹고살려고 이 짓 한다.’고 말했다. 첫 업무로 산업연구실에서 기계 업종을 맡았다. 다들 전자 등 유망업종을 맡으려 했고 기계는 기피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일화 #1 : 초창기 주간 산업동향 발간을 담당했다. 어느 금요일 오전, 실장 도장을 찍어야 했는데 외출이 길어졌다. 여직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실장 책상에서 도장을 꺼내 찍었다. 실장이 돌아오자 즉시 도장 건을 보고했다. 실장은 쌍욕을 퍼부었다. 마음이 상해 지하 커피점으로 내려갔다. 연구소를 그만 두고 싶었다. 대학 선배인 연구조정실장이 내려와 위로를 해주어 화를 풀었다.

삼성경제연구소 일화 #2 : 삼성경제연구소 초기에 일본 노무라증권에 4주 연수를 다녀왔다. 이병철 회장이 노무라 측에 연수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은 말년에 세 개 사업을 추진했다. 종합기술원(기술개발), 연수원(인력양성) 그리고 경제연구소(싱크탱크). 종합기술원 본관에 자신의 집무실을 만들려고 했다. 젊은 연구원들과 자주 만나기 위해서 했다. 종합기술원에 다녀 온 날 저녁에 타계했다) 일본어가 미숙했는데 감으로 알아듣고 질문도 했다. 삼성이 노무라에게 큰 손이어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일과 후와 주말에는 도쿄 시내와 주변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오디오 조립에 대한 추억이 있어 아키하바라에 자주 들렀다. 혼자서 도쿠가와 무덤이 있는 닛코에 갔을 때 일이다. 일본인들로 가득 찬 관광버스의 앞자리에 앉았었다. 뒤에서 한국말이 들려와 돌아보았더니 고교 선배가 타고 있었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아들 장난감을 많이 사들고 왔다. 세관 직원이 커다란 상자를 뜯어보고는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삼성경제연구소 일화 #3 : 1980년 말 삼성그룹 21세기 비전을 작성했다. 연구원들 몇 명을 데리고 일본 전문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저녁에 샤브샤브 식당에 갔다. 1인당 5천엔에 무한 리필. 너무 많이 먹었던지 주인에게 쫓겨 나왔다.

삼성경제연구소 일화 #4 :이병철 회장 지시로 일본에서 방송된 영상물을 사장단 교육용으로 편집했다. 일본 경제대국의 비밀이었다. 중앙일보 팀과 한 달여를 매달렸다. 테이프 10개 분량을 세 개로 재구성 압축했다. 원본 소리를 완전히 지운 다음 우리말로 더빙하고 음악을 삽입했다. 성우들은 녹음 전에 야한 이야기를 해서 목청을 틔었다. 마지막 점검을 하는데 붉은 화면이 지나가는 느낌이 왔다. 분당 24개 장면 중에서 편집 오류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비서실에서 일본 주재원으로 나가라고 설득했다. KAIST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어서 거절했다. 나 대신에 다른 연구원이 선발되었다. 1980년대 후반 삼성의 해외투자 조사차 동남아 국가들을 돌아다녔다. 태국에서는 삼성 로고가 찍힌 티셔츠가 지역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룹 21세기 비전을 작성했고 석유화학·항공·자동차 등 신규사업 검토도 했다. 재무팀에 가자말자 사장단회의 자료를 만들었다. 골방에서 한 달간 파워포인트로 작업을 했다. 감청색 바탕에 흰 글자체로 멋을 부렸다. 눈이 부시지 않게 하려고 글자에 연한 노랑을 가미했다. 밤새워 자료를 만들면 아침에 수정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처음에 대충하고 막판에 꼼꼼하게 하는 요령이 없었다.

경제연구소로 돌아와서 산업과 정책 업무를 맡았다. 중장기전략, 경영혁신, 국제화, 벤처, 디지털, 지역활성화, 농업, 위기관리, 국가아젠다 등 다양한 일을 했다. 전공은 기술경영 이었지만 논문과 책을 쓰지 못했다. 경제연구소에서 책을 출판해도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 연수원 강의를 자주 나갔던 편이다.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기수 당 200명씩 10회 넘게 강의하기도 했다. 누군가 우스개로 삼성의 3대 이빨로 인정해주었다. 해외주재원들에게 월요일 오후 강의를 했다. 그 전날 귀국한 사람들은 시차 때문에 졸았다. 오기가 생겨서 쉬는 시간 없이 4시간 연속으로 강의를 했다. 내용이 재미 있었던지 다들 잠에서 깨어났다. 적당히 자게 해야 했는데 못할 짓을 했다.

임원이 되고서 강의 듣는 기회가 늘어났다. 자리에 앉으면 졸음이 밀려왔다. 다음번 강의할 때부터 재미를 유익함보다 우선했다. 김진홍 목사의 강의는 특이했다.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김 목사는 들릴 듯 말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점차 강의장 소음이 잦아들고 다들 경청을 했다. 대전 가톨릭농민회에도 강의를 하러갔다. 강단에 올라가는데 뒤에서 ‘삼성 재벌이 강의한다’며 비아냥거렸다. 재벌에서 와서 죄송하다고 말했고 마지막에는 박수를 받았다. 농림부 국장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는 조금 심한 말을 했다. 눈들이 풀려 있어서 ‘동태눈 같다’고 지적했다. 안색이 변하는 것이 감지되었다. 농림부에 소문이 났고 당시 차관이 강의안을 가져오라고 했다. 강의안이 마음에 들어 복사를 해 간부들에게 보도록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일화 #5 : 삼성경제연구소의 간판 보고서 중 하나가 ‘CEO 인포메이션’이다. 편집 책임을 맡아 매주 한 편씩 10년간 500편을 발간했다. 연구원들과 함께 주제·목차를 잡고 내용을 작성했다. 최우석 소장의 아이디어와 감수가 큰 힘이 되었다. 일요일에 작업을 해야 월요일 보완, 화요일 감수·인쇄를 거쳐 수요일 사장단에게 배포할 수 있었다. 한 연구원은 보고서가 덜 끝난 상태에서 월요일 저녁 9시경 퇴근해버렸다. 내가 밤을 새워 미진한 부분을 보완했다. 월요일 퇴근 무렵 주제가 갑자기 바뀌기도 했다. 당연히 새 주제를 찾아 밤샘 작업을 했다. 부시-고어 미국 대통령 선거는 막판까지 박빙이었다. 두 개 시나리오로 보고서를 만들어놓고 자정까지 기다렸다. 부시 승리를 확인한 다음 조금 보완해서 내보냈다.

 

2006년 말 국가기관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경제연구소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있었다. 내가 맡았던 업무는 후배에게 넘어가 있었다. 교수 출신 소장은 논문 쓰듯이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비서실과 연구소장 사이에서 상당히 마음고생을 했다. 김용철 사건이 터지자 비서실·연구소가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일어난 사건은 어쩔 수 없고 투명경영을 통해 재발을 막자’고 발언을 했다. 비서실 임원이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라며 얼굴을 붉혔다. 나중에 들으니 나를 해고시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몇몇 경영진이 나서서 사태를 무마시켰다. 최근의 삼성 사태를 보면 당시 경색된 분위기가 이어졌던 것 같다.

 

부산발전연구원

 

2010년 7월 부산발전연구원 원장으로 임용되었다. 공개경쟁 절차 없이 시장과의 전화 한 통으로 결정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 내 역할이 줄어든 상태에서 운이 좋았다. 전임 이계식 소장은 감사원 감사를 받는 중에 자살을 했다. 판공비를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 소장은 서울에서 나와 여러 차례 미팅을 했다. 정세나 정책에 대해 자문을 해주었다.

연구원은 부산시 간섭이 심했고 분위기가 느슨했다. 37년 만에 다시 본 부산은 낙후 그 자체였다. 처음 시 간부회의에 참석해서 ‘부산 낙후에 공무원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강성 발언을 했다. 국제신문에서 발언을 그대로 실으려 해서 제목을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기업 출신에 개혁적으로 보였던지 지역사회가 상당한 기대를 했다. 하지만 한 달 정도 지내자 한계를 느꼈다. 연구원들부터 일을 많이 벌인다고 불평을 했다. 토목 중심의 시 행정도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내 스타일로 일하다가는 지쳐서 쓰러질 것이 뻔했다. 세상을 바꾸려하지 말고 나부터 바뀌자고 마음먹었다. 일을 줄이고 마음을 느긋하게 가졌더니 지낼 만해졌다.

안창마을(안철수의 고향)의 빈곤층을 보러 갔었다. 그랜저를 타고 갔는데 위화감이 느껴졌다. 차량을 아반테 하이브리드로 바꾸었다. 아반테 가격은 비쌌지만 정부 보조가 있었고 유지비가 낮았다. 시 간부나 기관장이 소형차로 바꾸는 것을 기대했는데 따르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친구였던 박재완 청와대 수석이 아반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완도의 60대 지인 3명이 원장 취임을 축하한다며 승용차를 몰고 부산까지 찾아왔다. 연구원 앞 식당에 갔더니 식당 주인이 일행 중 한 명의 친척이었다. 다음에 식당에 가면 대접이 각별했다.

 

부산발전연구원 일화 : 허남식 시장의 임기에 맞추어 1년을 더 근무했다. 한 연구원이 수영 요트장 재개발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했는데 말썽이 났다. 지역신문이 1면에 ‘업자에게 특혜를 준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의회까지 보고서에 오류가 있다면서 물고 늘어졌다. 보고서를 재검토해서 조건에 따라 사업성이 달라짐을 보여주었다. 의회가 내 주장을 수용해서 일단락되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통풍과 가려움증이 생겼다.

 

퇴임식은 특강과 음악회, 장애인 돕기로 진행했다. 아코디언 달인의 연주가 일품이었다. 통장님은 취임식 퇴임식 모두 먼 길을 와주셨다. 지인들은 샬레스위스에서 조촐한 퇴임 파티를 열어주었다. 플랭카드에는 ‘대자유인 축하’라 써져 있었다. 취임 직후 연구원의 센터 숫자를 10여 개에서 4개로 줄였었다. 일 안 하고 거들먹거리는 박사들이 대부분이어서였다. 다음 원장이 취임하자 센터 숫자가 10개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부산시의 시책도 토목 중심으로 계속 돌아갔다. 4년간 개혁을 떠들고 나름 솔선했는데 세상은 잘 바뀌지 않는가보다.

 

1980년 7월부터 2014년 7월까지 34년 1개월 직장 생활을 했다. 현대 근무를 합치면 34년 5개월이다. 하루 공백도 없이 직장이 이어졌다. 모두 7월에 이직한 것도 묘한 일이다. 시절이 좋았고 운도 따랐다. 노력은 조금이었다. 후회는 없다.

3. 학업 병행

 

서울대 경영대학원(야간)

 

KDI의 경우 박사는 장교, 학·석사는 사병으로 신분 차별이 엄격했다. 연구원들은 다수가 유학을 준비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서울대 경영대학원(야간)에 입학했다. 홍릉에서 퇴근해 깜깜할 때 관악산 캠퍼스를 걸어 올라갔다. 집에 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낮에 공부하는 처지가 부러웠다. ‘아들이 공부하겠다면 열심히 도와주겠다’고 다짐했다. 인사관리 논문을 써서 석사를 마쳤다.

 

경영대학원 일화 : 윤석철 교수는 서울대 몇 대 천재에 드시는 분이다. 학기 중에 생산관리 수강생들을 마석의 한 고등학교에 데리고 가셨다. 윤 교수에게 장학금을 준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였다. 윤 교수 아들이 함께 가서 야구 시합에 참가했다. 나중에 윤 교수에게 삼성 특강 요청을 드렸다. 사정이 있다면서 거절을 하셨다. 삼성전자 과장인 아들이 출근 버스에서 쓰러져 죽은 지 얼마 안 지났다는 것이었다. 대학원 때 본 바로 그 아들이었다.

 

KAIST 석박사

 

KDI 연구원이 KAIST 석사를 이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1년 풀타임, 1년은 직장·학업 병행이었다. 서울대 석사를 마친 상태에서 낮에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지원을 했다. 1학년 말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졸업이 가능했다. 대졸자들과 동일하게 입학시험을 치러 성적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했다. KAIST 학생은 군대가 면제되었으므로 우수한 학생들이 몇 년씩 공부해서 도전했다. 계량과목을 포함해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을 무난히 통과했다. 교수님들이 박사과정 조기 진학을 권했다. KDI 보직자는 ‘우리 기관은 공부시키는 곳이 아니다’라며 거부했다. 열심히 일하고 승진도 빨랐는데 그때 마음이 떠났다.

KAIST 석사과정 진학은 김인수 박사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김 박사는 야간대학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해 세계적 석학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KDI에서 근무하다가 KAIST로 적을 옮겼다. 첫 학기 몇 주마다 몇 권의 원서를 읽고 퀴즈를 보아야했다. KAIST가 대덕으로 이전하게 되자 김 박사는 고려대로 이직했다. 고대에서 김 박사 과목을 한 학기 수강했다.(며느리가 고대 경영학 박사로 인연이 이어진다) 기술경영이 전공인 이진주 교수로 지도교수를 바꾸었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사회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나를 많이 배려해주셨다.

석사 논문을 심사하는 자리에서 지도교수님이 박사 진학을 권하셨다. 연구소 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당연히 진학하라’고 이야기했다. 나를 위해 연수제도와 학비 지원 규정까지 새로 만들어주었다. 1990년 경제연구소에서 비서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 바빠졌다. 가장 바쁘다는 삼성 비서실에서 KAIST 박사 논문을 써야 했다. 휴직을 원했으나 담당 임원이 허락하지 않았다. 경제연구소로 돌아오고 7·4제(7시 출근과 4시 퇴근)가 시행되어 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4시까지 업무를 보고는 저녁 늦게까지 논문을 작성했다. 박사 논문을 쓴 마지막 1년이 가장 힘들었다. 원래 좋은 논문을 작성해서 유명 저널에 게재하고 싶었다. 직장과 논문을 병행하다 보니 최소 요건만 갖추어 박사를 끝냈다(석사 논문을 하위 영문저널에 게재).

이름대로 학위가 다섯 개

 

내 이름은 선비 언(彦) 다섯 오(五)이다. 항렬 언에 부르기 좋게 오를 붙였다고 한다. 경상도 사람이라 언과 은 발음이 혼동되어 언니 언이라 덧붙인다. 이름 탓인지 학위를 다섯 개 마쳤다. 서울대 해양학·경영학 학사 둘, 서울대 경영대학원과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석사 둘, 그리고 KAIST 동 대학원 박사 하나이다. 19세에 대학에 입학해서 40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입학식 다음 날 과외를 시작해 방위 제대할 때까지 계속했다. 대학원 공부는 직장을 다니면서 했다. 결혼 후에는 복잡한 가족 문제까지 신경을 써야했다. 주중에는 밤늦게까지 회사 일을 했고 주말에는 논문을 썼다. 박사 학위를 끝내고나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듬해 삼성에서 임원이 되어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책, 음악, 사진, 여행, 등산을 즐기고 사람을 많이 만났다. 운전을 배우고 골프도 시작했다. 나중에 아들이 돈 걱정하지 않고 박사를 마치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세계 톱 저널(Research policy)에 논문을 실어 나의 아쉬움을 풀어주었다.

 

4. 불교 인연

 

불교 입문

 

10대 중반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어차피 죽는데 왜 사는가 의문을 가졌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혼자 울기도 했다. 책을 많이 읽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루는 꿈이 아닌데 깊은 우물 속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바닥에 닿자 어둡고 조용했다. 주위에 부모님, 연탄가게 부부 등이 정지된 모습으로 보였다. 어디선가 ‘함께 살자’라는 말이 들렸다. 이후 지금까지 큰 고민이 없었고 무슨 일을 하든 편안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신월동 야학에서 가르쳤다. 교회가 야학 교실, 목사·전도사가 교사로 활동했다. 학생들은 목사·전도사의 설교를 지루해했다. 함께 뒷산으로 올라가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4년 여름 불교학생회 범어사 수련대회에 따라갔다. 예불 때마다 ‘서건동진 급아해동’구절에서 눈물이 났다. 불법이 이 땅의 나에게 도달한 인연을 느꼈다. 개울가에서 새벽까지 토론을 벌였다. 스님 법문 시간에 당돌하게 질문을 해댔다. ‘살생을 금하는데 풀은 왜 먹느냐? ’‘불상은 우상인데 왜 절하느냐?’ 스님 답변은 ‘고통의 정도가 다르다. 동물은 고통이 크고 식물은 덜하다.’ (부처님은 제자가 아프면 고기를 먹도록 허용했다) ‘싫으면 하지 말라. 자신의 마음에 절하는 것, 하심을 배운다.’ 쉽게 이해되었고 타당해 보였다.

 

불교학생회 활동

 

2학년 2학기에 불교학생회에서 조직부장을 맡았다. 창립기념일인 11월 1일 종로 대각사에서 유신 반대 시위를 벌였다. 나를 포함한 2학년 3명이 주동하는 것으로 각본을 짰다. 내 자취방에서 시국 선언문 인쇄를 했다. 옷속에 선언문 수백 장을 숨겨서 대각사에 갖고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일주일간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경범죄자들과 지냈다. 서민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데모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 출소 후 운동권과 거리를 두고 불교학생회에 열심히 참가했다.

3학년 여름 수련회는 해인사로 갔다. 성철 스님을 뵈려면 삼천 배를 해야 했다. 지친 몸으로 오전에 젊은 스님들과 축구 시합을 했다. 체력이 엄청난 스님들에게 13대 1로 졌다. 성철 스님 법문은 단순했다. ‘서울에 가면 착한 일 많이 해라’였다. 스님이 회장(김유철)에게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졸고 있던 회장은 눈 을 뜨더니 ‘생각해 보고요’라 답했다. 성철 스님은 우리를 인솔해 갔던 스님의 머리를 손으로 때리면서 ‘다들 나가라’고 성을 내셨다.

3학년 2학기 불교학생회 회장을 맡았다. 수련대회 장소를 알아보러 전국 사찰을 돌아다녔다. 데모를 했던 대학생들이라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월정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군 트럭을 얻어 탔다. 술에 취한 방위병들은 뒤따라오는 고속버스를 향해 오줌을 갈겨대었다. 김종서 지도교수님은 우리 부부의 주례를 서주셨다. 매년 음력 설 지나서 제자들이 교수님 댁에 세배를 드리러 갔다. 각자 반찬을 해 가지고 왔는데 겹치는 일이 없었다. 교수님 돌아가시기 몇 년 전까지 모임이 이어졌다.

 

퇴직 후 불교 공부

삼성경제연구소로 전 직장 선배가 찾아왔다. 그 분은 퇴직 후 동국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사찰지도자 과정 개설에 대해 자문을 받고 싶어 했다. 과정의 의미에 공감했고 아이디어를 몇 개 주었다. 첫 학기에 강의 요청을 받았다. 사찰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재 집필에도 참여했다.

교재의 사례 조사를 위해 잠실 불광사에 갔더니 마침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불교와 경영’ 주제를 제안했더니 발표를 부탁했다. 몇 달 후 ‘팔정도경영’을 발표한 자리에서 월간 『불광』편집진을 만났다. (범어사 수련대회 지도법사였던 광덕 스님이 『불광』을 창간하셨다. 불교학생회가 시위를 했던 대각사에서 1974년 11월 1일 창간호를 내셨다.) ‘불교와 경영’ 주제로 잡지 연재를 부탁했다. 매달 1개 주제씩(A4 3장 분량) 2015년부터 3년간 게재했다. 지방 사찰에서 잡지를 보고 강의를 부탁해 내려갔다. 불교 공부 모임에서 토론 자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평생 연구직에 종사했는데 세상은 내 뜻과는 딴 판으로 돌아갔다. 좀 더 치열하게 연구하고 바른 주장을 펼쳤어야 했다고 반성을 했다. 사춘기 때 가졌던 생각을 바꾸게 됐다. ‘함께 살자’에서 ‘가치 있게 살자’로. 육신·물질은 덧없지만 정신적 가치는 영원하다. 바르게 생각하고 의롭게 행동할 뿐. 결과는 시절 인연, 사는 날까지 겸허하게 정진해야 한다. 불교가 그것에 대한 길을 제시해준다.

5. 금산 사랑

 

금사모

 

1998년 12월 경제연구소 연구원과 함께 처음 금산을 방문했다. 옥천에서 국도로 금산에 진입했는데 겨울철이라 그랬는지 황량하고 어수선했다. 다음 해 금산군 중장기발전계획 용역을 맡게 되어 주말마다 금산을 돌아다녔다. 4월 중순 아내와 금산을 일주하고 옥천으로 빠져나왔다. 나와 아내 모두 다른 지역의 경치가 별로라고 생각했다. 경제연구소 조경전문가에게 아름다움의 조건을 물어보았더니 금산 경관과 들어맞았다. 그때부터 지인들을 많게는 50명 이상 초청해 금산에 내려갔다. 거의 6개월을 미쳐서 돌아다녔다.

1999년 6월 5일 달이 뜬 금강 다리 위에서 금사모(금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결성했다. 누구는 금미모(금산에 미친 놈들의 모임)라 불렀다. 모임 원칙은 회장·회비·회칙·회원·회관이 없는 5무(無)이다. 각자 재능으로 보이지 않게 금산을 도와주었다. 내가 제안한 ‘생명의 고향 미래의 땅 금산’ 슬로건이 지금도 곳곳에 붙어있다. ‘정치할 거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2000년 1월 1일은 밀레니엄 첫 날로 의미가 컸다. 금산군이 주최한 진악산 새벽 등반에 참가했다. 깜깜할 때 산을 오르는데 옆에서 상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내려가 인삼 가게 열어야 하는데’ 보석사에 내려오니 청년회의소 회원들이 가마솥에 믹스 커피를 끓여서 나눠주고 있었다. 플라스틱 바가지로 퍼서 종이컵에 담아주었다. 내가 1,500잔 째였다.

한겨레 이원재 기자가 처음 보도한 이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외부인들이 지역발전을 돕는 방식이 신선했던 탓이었다. 기적의 도서관, 다락원, 인삼유통센터, 4계절 축제 등이 성사되었다. 삼성영상사업단에 부탁해서 금강축제장에서 밤에 ‘쉬리’ 영화를 상영토록 했다. 당일 영사기가 고장 나서 30분간 고쳤지만 상영하지 못했다. 소란이 있을 법 했는데 사람들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 다시 모여서 영화를 보았다. 김행기 군수가 공금 유용으로 불명예 퇴진하면서 금사모 활동이 시들해졌다.

 

벤처농업대학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박사는 동경대학에서 농업경제 학위를 받았다. 내가 농업의 중요성을 고집해서 민 박사를 채용했다. 주말에 농업인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등 농업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나는 ‘농업도 벤처’임을 강조했다. 민 박사는 농업보호에서 벤처농업 육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지역별 농업인 간담회를 개최하다가 2000년 금산에 벤처농업대학을 개교했다.

월 1회 주말에 금강 가 폐교에서 벤처농업대학이 열렸다. 전국에서 농업인들이 트럭을 몰고 모여들었다. 경제연구소에서 퇴근하는 길에 통닭구이 트럭을 발견했다. 별로 많이 못 파는 눈치였다. 벤처농업대학에 와서 통닭을 구어 달라고 부탁했다. 강의하는 창밖으로 운동장에서 통닭 굽는 것이 보였다. 저녁 식사 때 통닭 파티가 벌어졌다. 서울로 가는 트럭 짐칸에는 농업인들이 준 농산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벤처농업대학은 폐교에서 시작해 농업기술센터를 거쳐 지금은 추부면에 독립 건물을 지었다. 그동안 스타 농업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청매실농원, 장생도라지, 현명농장 등은 이 시대 명인들이다. 벤처농업인 네트워크는 우리 농업의 발전에 일조를 했다. 졸업생들의 농산물은 CJ 계절밥상에 납품된다. 민 박사의 열정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정문술 회장, 김동태 장관 등 주위 분들의 도움도 많았다. 농업 리더 배출을 희망했지만 돈 버는 사업 중심으로 운영이 되는 아쉬움은 있다.

 

일연재 집

2000년 말 금산의 900평 밭을 평당 4만 원에 구입했다. 남이면 용동길 30-28. 몇 군데를 알아보았는데 용동 땅은 첫 눈에 마음에 들었다. 다음 주 아내가 동의해서 바로 계약을 했다. 두충과 자두가 심겨진 언덕 위 경사진 땅이었다. 동네와 적당히 떨어져 있고 주변 산세가 아름다웠다. 나중에 보니 ‘용봉구린’의 길지였다. 동네는 용동, 앞에 흐르는 개천은 봉황천, 조금 나가면 거북바위, 산 넘어 보석사에는 기린암이 있었다.

마을에 적은 돈이지만 매년 몇 차례 꾸준히 희사를 했다. 땅을 도로로 떼어주고 받은 보상금의 일부를 기부했다. 군 예산으로 진입로를 포장해 주었기에 또 얼마를 마을에 내놓았다. 뒷집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렸더니 좋게 소문이 났다. 텔레비전 출연한 유명 인사, 군수에게 자문하는 전문가로도 알려졌다.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열심히 인사를 했다.

2009년 봄 컨테이너로 간이 숙소를 만들었다. 금산에 가고 싶어 아내와 새벽 3시에 과천 집을 나선 적도 있었다. 꽃을 가꾸면서 지내보니 너무 좋았다. 황토방이나 한 채 지어볼까 하고 김용만 사장에게 상담을 했다. 그러나 일이 커져 본격적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충분히 대화를 나누어 설계를 확정했다. 바깥 면이 단순해야 하는데(4면) 금산 집은 16면이다. 바깥 12면, 중정 4면. 유리창이 많아 사방이 보이고 전체가 밝다. 전용 30평으로 제법 넓다.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만족스런 집이 지어졌다. 사방과 하늘로 열리고 겸손하게 자리 잡았다.

2010년 6월 5일 집들이 행사를 했다. 전국에서 3백 명이 모였다. 금산 박 군수가 유행가 부르고 농악대가 한판 놀아주었다. 비구니 스님이 막걸리를 마셨는가 하면 마지막에는 마당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차탁, 다기, 사진, 종 등 많은 선물을 받았다. 아모레 서회장과 금산 박 군수는 반송을 심어주었다. 군불 때는 황토방이 필요해 나중에 별채를 지었다.

6. 미래촌-품마을-CAN-BJR

 

미래촌

 

2005년 가을 세상이 어수선해 강좌를 열기 시작했다. 장소를 옮겨가면서 진행을 했다. 전용수 교수님이 강사료와 기부 활동에 도움을 주셨다. 정문술 회장님은 방배동에 사무실을 마련해주셨다. 공간을 강좌(머리), 차·명상(마음), 업무(몸)로 3등분했다. 이운섭 사장이 공사를 맡아 상당히 고급스럽게 인테리어를 했다. 정문술 회장의 재정지원, 나의 기획·운영, 동장님의 몸 봉사로 출발을 했다.

2006년 2월 1일 미래촌 문을 열었다. 결혼 25주년 되는 날이었다. 정 회장이 미래산업에서 미래촌 이름을 떠올리셨다. 한자는 아름다울 미(美)를 썼다. 이진주 교수님이 불편하신 몸으로 사모님과 함께 오셨다. 돌아가시기 1년 반 전이었다. 처음에는 1주일에 2회(월, 목), 나중에 1회(목) 강좌를 열었다. 강사는 한 번만 초청했고, 보통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위주였다. 박원순 시장, 법륜 스님 등 유명 인사들도 다녀갔다. 1천 회 가까이 강좌를 이어갔다. 모임을 마치면 강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밥값은 강사를 제외하고 5천 원씩 각출. 돈 걷는 사람이 식사 값이 남으면 가지고 모자라면 채워 넣는다. 공정하고 부드러운 방식이다. 식사비가 없는 사람은 조용히 집에 가면 된다.

정 회장님이 주식 처분한 돈을 내놓으면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청년진로 지원, 지역 미래촌 개설, 착한 상품 구입, 사회적 기업 소액투자, 책자 발간 등. 4년 여를 운영하다가 부산연구원 원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정 회장께 받은 돈이 소진되었고 내가 아모레 사외이사 급여 등을 투입했지만 지출이 감당이 안 되었다. 지출은 보이지 않는데 누진된 수입에 많은 세금까지 매겨졌다. 6년간 한판 신나게 놀다가 2011년 문을 닫았다.

 

품마을

 

동장님은 미래촌을 정리하고 김용만 사장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품앗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모임 이름을 품마을로 바꾸었다. 김 사장이 품마을 활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품마을 신문 발행, 지역 명품 발굴, 책자 발간, 문화행사, 다문화가정 지원 등의 일을 벌이고 있다. 이순신 공부 모임 등의 장소로 사당동 사무실을 유용하게 쓰고 있다. 모임을 이어가지만 금사모·미래촌 정도의 에너지는 나오지 않는다.

CAN

 

부산연구원 원장에 취임하고서 농업인의 날에 특강을 했다. 체육관에 천 수백 명이 모여 있어 분위기가 산만했다.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나가달라’고 했더니 3분의 2가 빠져나갔다. 나머지 농업인들은 강의에 집중했다. 며칠 후 농업인과 공무원 몇 명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농업인 모임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부산대 앞 살레스위스에서 준비 모임을 가졌고 매월 1회 서면 영광도서에서 강좌를 열었다. 모임 이름은 CAN(Creative Agriculture Network, 창조농업연구회)로 정했다. ‘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광양 홍쌍리 선생은 강의하러 와서 나를 보고 ‘제일 편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 정해봉 시인, 김수환 추기경 등을 만나보았는데 내가 대하기 편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칭찬이었다.

 

BJR

 

부산에서 청년 취·창업을 돕는 BJR(Busan Job Rink)을 운영했다. 외환위기 당시 대우가 부채상환을 거부하자 외국 신문이 ‘배 째라(BJR)’를 기사화했었다. 대학생들이 주도해 경성대학에서 ‘청년기업 엑스포’라는 행사를 열었다. 청년미술가들은 산복도로 그림들로 탁자용 달력을 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가 그것을 보고 선물용 달력 제작을 의뢰했다. 박 대통령을 따뜻하게 묘사한 달력은 3000부가 배포되었다. 장애인들이 도움을 요청했기에 더치커피, 수박화채 등을 팔아주었다. 일본 최고의 커피 전문가를 부산에 초청해 장애인들을 격려해주기도 했다.

 

 

 

7. 내가 좋아하는 것들

 

책 읽기

 

일찍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부자 친구 집에 있던 50권 전집을 두 달 만에 다 읽었다. 매일 1권씩 빌려와 읽고 반납하기를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 중앙일보 문고판 두 권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독일국민에게 고함’과 ‘간디 자서전’이었다. 이후 공부, 알바, 회사 일이 중첩되면서 책과 멀어졌다.

1990년 삼성 비서실에서 근무할 때였다. 퇴근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동의보감 읽어 보았냐?’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서점에서 상권을 구입해 그날 저녁 다 읽었다. 재미를 느껴 다음날 중·하권을 사서 밤늦게까지 다 읽었다. 이를 계기로 책에 다시 빠져들었다. 시간만 나면 서점에 들렀다. 매주 신간 코너를 훑어서 두 세 권 책을 샀다. 경영과 비소설 위주로 읽었는데 정치·인문·사회·과학·소설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저자·목차를 보고 좋은 책을 선택하는 노하우도 생겼다. 이런 패턴이 15년 정도 계속되었다. 좋은 신간을 발견하기 어려워지면서 서점 가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내게 좋았던 책은 구입해서 주위에 선물했다. 전공 책 외에는 다시 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같은 책은 수십 권 사서 돌렸다. 한번은 주간조선 기자가 찾아왔다. ‘책의 날’ 특집으로 독서가를 취재하고 있었다. 김대중, 이어령, 안철수 다음에 내가 실렸다. 앞 세 사람의 공통점은 ‘유명하고, 집에 서가 있으며, 독서가 업무에 도움 된다’였다. 나는 ‘유명하지 않고, 책 나눠주어 집에 책이 없고, 좋아서 책을 읽는다‘로 기사가 나갔다.

미래촌 모임을 하면서 책 내용을 요약해서 이메일로 배포했다. 내가 책을 고르면 이경수 작가가 요약을 했다. 요약이 쌓이면 묶어서 비매품 책자로 만들었다. 이 방식은 부산연구원에까지 이어졌다. 책에서 뽑은 좋은 문구들로 ’세상사는 지혜‘라는 책자로 만들었다. 100권 책의 내용에 맞추어 부산 미술가들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부산진 폐역사에서 전시한 ’책을 그리다‘ 작품들은 책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책에서 본 내용들을 강의나 보고서에 열심히 써먹었다. 언제부터인가는 좋은 글귀가 눈에 띄면 표시해 두었다가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영화 대사, 강의 듣다가 건진 이야기, 지인과의 대화에서 나온 경구, 지하철 낙서 그리고 언뜻 스치는 생각들이 더해졌다. 출처가 확실한 것도 있지만, 지혜의 원천이 누구이고 어디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누가 이야기했고 어느 책에 나왔는가는 중요치 않다. 진리는 오직 하나. 문자 이전의 세계. 그리고 세상 가득 원래 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말’도 안 되는 언어로 드러내고 ‘내 것’이라 욕심 부릴 따름. 禪家의 가르침, ‘털끝 차이가 천지만큼 벌어진다,’ ‘오직 모를 뿐’을 염두에 두고 겸손해야겠다.

수십 년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좋은 책 출판이 감소하고 있다. 번역서는 많은데 우리 고민을 담은 책이 별로 없다. 서점·도서관에 책이 그렇게 많아도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건성으로 읽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중독이 종이책을 멀리하게 만든다. 좋은 책을 쓰겠다는 프로의식도 예전만 못하다.

 

음악 감상

 

어릴 때 라디오에 나오는 옛날 가요를 즐겨 들었다. 주위에서 애 늙은이라 놀려댔다. 중학교 음악 선생님은 클래식을 자주 들려주셨다. 베토벤 운명교향곡이었던 것 같은데 웅장하다는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취미로 진공관 오디오 조립을 했지만 음악을 감상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TV에서 KBS 송년음악회를 홍보하는 영상을 보았다. 빠방 빠방 빠방... 뭔가가 마음을 울렸다. 시장 통에 있는 레코드 가게로 갔다. 나의 소리 묘사를 듣고 가게 주인이 건넨 것은 차이코프스키 신세계 교향곡. 복제판 LP의 가격은 150원. 연말 송년음악회 중계를 보고 베토벤 9번 합창의 4악장, 트라이앵글 치는 장면임을 알았다. LP들을 사서 듣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오디오 조립이 끝나면 이불을 덮어쓰고 듣기도 했다. 내가 조립한 오디오로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은 베토벤의 운명이었다. 사춘기와 입시, 가정 사정이 고뇌였던 탓일까. 2차대전 때 독일이 소련에게 레닌그라드에서 패하자 베를린 라디오방송국이 48시간 연속으로 내보냈다는 곡이다. 레코드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얼마 후 바늘이 트랙을 미끄러졌다.

결혼하고서 상당 기간 자작 오디오로 클래식을 감상했다. 우연히 FM에서 아그네스 발처의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 좋았다. 다음날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아그네스 발처의 CD를 샀다. 일어나면 듣고 퇴근해서 자기 전까지 계속 들었다. 한 달을 그렇게 빠져 있었으니 가족들이 이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이후 일주일에 두세 차례 CD 가게에 들렀다. FM에서 듣고 좋은 곡을 사거나 매장에서 직접 골랐다. 직장 생활로 여유가 생기면서 오디오 세트를 업그레드할 수 있었다. 오디오 매니아인 삼성경제연구소 김경원 박사의 코치를 많이 받았다. 내게 좋았던 CD들을 구입해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좋은 곡들을 모아서 CD로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금산 집에 상당히 좋은 오디오 세트를 설치했다. DVD 영상을 보는 스크린, LP를 듣는 턴테이블도 함께이다. 목조 주택으로 음향이 환상적이고 자연경관이 분위기를 받쳐준다. 음악은 클래식, 월드뮤직, 트로트를 다양하게 듣는데 첼로와 성악을 선호한다. 젊은 시절 품었던, 음악과 영상물을 감상하는 소원을 이루었다.

 

영화, DVD, 사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심청전’ 영화를 단체로 보러갔는데 부모님이 돈을 주지 않았다. 저녁에 친척 아주머니 등에 업혀서 극장에 무료입장했다. 어릴 때 본 영화들은 어설픈 장면들이 많았다. 비오는 날 저녁 악당(허장강)과 주인공(박노식)이 대결을 했다. 악당이 총을 쏘려는데 주인공이 먼저 카드를 날렸다. 악당이 쓰러지면서 방아쇠를 당겼는데 물총이었던지 화면에 물줄기가 보였다. 손오공이 요괴 뱃속에서 주문을 외어 여의봉을 길게 했다. 소나무 속에서 연기를 해서 주위 나무들이 다 보였다. 죽으면서 몇 번씩 깨어나 할 말을 다했다. 남녀 애인은 서로 이름을 부르며 슬로 모션으로 다가갔다. 엄마가 죽어가는 옆에서 아이는 순진하게 장남감 자동차를 갖고 논다. 김지미가 갓난아기를 부잣집 대문에 놓아두고 돌아섰다. 아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 악기를 불엇는데 그 소리는왜 그리 슬펐던지.

고등학교 때 주말이면 늦은 저녁에 KBS TV의 ‘세계의 명화’를 보았다. 명화를 원없이 보던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사춘기여서 그랬는지 ‘키다리 아저씨’가 인상에 남았다. 여름에 얼음에 커피·설탕을 부어가며 영화 한 편을 다 보았다. 저녁에 잠이 안 와서 혼이 났다.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매주 1편씩 빌려다 보았다. 폭력·섹스 아닌 것이 선택 기준이었다. 당시만 해도 좋은 영화들이 너무 많았다. 아들이 어릴 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함께 보고서 좋았다고 말했다. 영화관에 자주 못 갔지만 꾸준히 영화를 본 편이다. 지금은 금산에서 빔프로젝터로 음악·영화 DVD를 감상하고 있다. 음향이 좋아 영상 보는 재미가 대단하다.

대학 1학년 때 과외월급 3개월 치를 모아 니콘 카메라를 샀다. 취미로 계속 찍었는데 ‘경주 남산 억새’ 등 좋은 사진들이 간간히 나왔다. 우연히 강화도에서 멋진 사진을 찍게 되었다. 구름 낀 갯벌에 배가 놓여있는 모습. 박사를 끝낸 직후였던지 갑자기 사진에 흥미를 느꼈다. 주말마다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새벽 4시에 승용차로 출발해 산 정상에서 일출을 찍는 식이었다. 겨울 태백산 일출을 찍으려고 밤차를 타고가기도 했다. 필름 몇 통을 찍으면 국제빌딩 지하 현상소에 맡겼다. 필름을 보고 좋은 사진을 골라 확대 인화를 했다. 경제연구소 연구원들 책상 유리 밑에 내 사진이 놓여 있었다. 3년 정도가 지나자 사진 찍기가 시들해졌다. 사진을 배워야 했는데 좋아서 찍기만 하니 실력이 늘지 않았다.

 

8. 좋은 사람들

 

20년 이상 꾸준히 만나는 사람들이 10여 명이다. 사회에서 우연히 만나 소중한 인연들을 이어가고 있다. 넘치게 받은 은혜들은 내생에 두고두고 갚아야겠다.

 

김만산 교수 : 대전 벤처기업가를 통해 소개받았다. 청양대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청소년기에 삶의 덧없음을 고민한 것이 철학을 전공으로 삼은 이유였다. 정역(正易) 학맥을 이어받아 주역 원리로 한의학을 풀어낸다. 기존 사상의학과는 다른 주장을 하며 난치병을 고친 사례가 상당수 있다. 전국에 한의사 제자 수백 명을 두었다. 공부에 몰입하다가 신장 결석이 생겼다. 수술이 잘못되어 신장 투석을 하고 있다. 건강이 나빠지자 ‘가치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건강이 받쳐주지 않아서 안타까워한다. 본인이 약 처방을 해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김만수 동장 : 1994년 무렵 삼성경제연구소로 전화가 걸려왔었다. 서울시 공무원 교육 담당자가 세계화 특강 강사를 구하는 중이었다. ‘강사료가 적다.’고 하기에 ‘안 받아도 된다. 일과 후면 하겠다.’고 했다. 자칭 전문가들에게 연락했는데 다들 강사료가 적다면서 거절당한 뒤였다. 저녁 늦게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자작시가 인쇄된 엽서를 한 장 건네셨다. 특이한 공무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추가로 공무원 강의를 가게 되면서 가까워졌다. 나보다 12살 위 말띠였다. 양재 2동 동장으로 계실 때 금산에 함께 다녔다. 금사모 활동을 보고 얻은 아이디어를 행정에 적용하셨다. 동장님 권유로 양재천 마라톤 클럽에서 10㎞ 달리기를 했다. 금산 인삼축제 마라톤 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추석 직전 주말이어서 고속버스가 아주 늦게 금산에 도착했다. 행사장에 갔더니 다른 선수들은 30분 전에 출발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따라붙어 중간 순위로 골인을 했다. 금사모, 미래촌, 품마을 활동을 함께 했다. 동장님 아들 결혼식 주례도 섰다. 60세 넘어 나이를 한 살부터 다시 세는 영원한 아가 동장(童長)이시다.

 

김용만 사장 : 김 대표가 지인 소개로 미래촌에 와서 만났다. 거제도 외도를 시작으로 수백 채 건물을 시공했다. 1966년생으로 나(1954년), 동장님(1942년)이 말띠 삼총사이다. 금산 집 짓는 일을 맡겼다. 김 대표는 한 건축주 로 인해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금산 집 ‘일연재(逸然齋)’를 지으면서 의욕을 되찾아 ‘행복집짓기’를 시작했다. 금산 집이 1호, 지금은 20호를 넘어섰다. 현장관리의 어려움, 정부의 규제 때문에 집짓기보다 공간설계에 주력하고 있다. 산청 항노화단지를 설계하는 큰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품마을, 출판, 시문학회 등 공사로 다망하다.

 

박범인 국장 : 1998년 12월 박범인 금산군 기획관리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김행기 군수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거였다. 재경부에서 나를 지역전문가로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군수에게 ‘금산을 10년 정도 그린벨트로 묶어라. 자연을 보전하면 세계적 관광지가 된다’고 조언했다. 박 실장은 면사무소 말단으로 시작해 마지막으로 충남 농정국장을 역임했다. 박사까지 도전했으나 졸업은 못했다. 공직을 그만 둔 후 금산 군수 선거에 나와 300표 차이로 낙선했다. 다음 선거를 위해 부지런히 뛰고 있다.

 

박종평 작가 : 정문술 회장이 누구를 만나보라고 했다. 박종평 작가가 정 회장 자서전을 출판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거절 의사를 전하려고 만났는데 뜻이 통했다. 박 작가는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국회 보좌관을 그만두고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참이었다. 얼마 후 사업이 어려워져 자살을 시도했다. 전동차가 역에 진입하는데 철로로 걸어나갔다. 갑자기 이순신 장군이 생각이 났다고 한다. ‘이순신은 고난을 어떻게 이겨냈을까?’라고. 이순신 공부에 매달려 10년간 10여 권 책을 출판했다. 압권은 난중일기·장계·행록을 번역한 1,200페이지 책자(주석 3,900개)이다. 퇴직 후 슬럼프에 빠졌었다. 박종평을 통해 이순신을 만나고서 의욕·활력을 되찾았다. 박종평이 돈 안 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이순신을 닮았다. 한 이순신 전문가로터 표절을 이유로 5번 고소를 당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서경배 회장 : 1995년 4월 아모레퍼시픽에서 세계화를 테마로 임원 특강을 했다. 평일 휴가를 내서 양양 낙산비치에 갔다. 그룹 임원 1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본업에 충실하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Focus & Risk)’고 강조했다. 서경배 당시 사장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이후 계속 자문을 하고 지인들을 소개해주었다. 회사는 부도 위기를 넘기고 성장을 지속했다. 서 회장 덕분에 골프에 입문했고 와인과 친숙해졌다. 삼성자동차 판매에 애를 먹었는데 한 대 사주기도 했다. 2010년부터 7년간 아모레 사외이사를 맡았다. 업적이 뛰어나면서 사회책임을 다하는 ‘위대한 기업’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싶었다. 에어쿠션 히트와 신사옥 건설을 지켜보았다. 서 회장 도움을 받아 뜻있는 기부들을 했다. 실적이 예전보다 못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장수기업을 지향하고 있다.

 

수불 스님 : 1990년대 말 조계종 총무원의 포교 활성화 회의에 참석했다. 스님들이 세속적 주장을 하기에 수행 기반의 포교를 강조했다. 순간 떠오른 포교@수행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며칠 후 수불 스님이 팩스를 보냈다. ‘자신과 생각이 같으며 안국선원에서 차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꾸준히 만남을 이어왔다. 브라이언의 탱화 작품을 사주는 등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부산연구원 원장에 취임하자 ‘부산의 정신을 바꿔달라’고 조언해주었다. 안국선원은 참선 수행으로 포교에 성공한 대표 사례이다.

 

이 경우 전무 : 대전 벤처기업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진천에 있는 형 회사에서 안살림을 맡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호감을 주었다. 한동안 진천에서 미래촌 행사를 활발하게 진행했다. 미래촌을 열 때 차탁을 보내 주었는데 너무 커서 계단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사다리차를 불러 2층 창문으로 집어넣었다. 덕촌(德村) 호처럼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등산과 명상으로 소일하고 있다. 수십 년 같은 이발소에 다니는 진국이다. 나와 워낙 자주 만나서 그 부인이 ‘두 사람 사귀느냐?’고 물었을 정도이다.

 

이진주 교수 : KAIST 석박사 과정의 지도교수이시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나이 들어 유학을 다녀오셨다. 60대 초 뇌졸중이 와서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쓰러지기 이틀 전 내 사무실에 들르셨다. 정부에 제출하는 보고서 작성을 도와드렸다. 불편한 몸으로 정년을 무사히 마치셨다. 건강을 회복하면 함께 백두대간 종주를 하자고 하셨다. 홍릉 교수사택에서 홍천으로 이사하실 때 내 차로 모셔다 드렸다. 중간에 들렀던 막국수 식당이 기억에 남는다. 몸이 회복되지 않자 의욕이 꺾였고 결국 실의 속에 생을 마감하셨다. 유골은 홍천 댁의 소나무 밑에 묻히셨다. 10년 이상 스승의 날이면 제자들이 홍천에 갔다. 사모님이 청평선원으로 거처를 옮기셔서 묘소 참배가 중단되었다.

 

전용수 교수 :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분이다. 대학 재학 중 사업하던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서울-마산을 왕래하며 수습을 하셨다. 양재동 사무실에서 주 1회 토론 모임을 했다. 금사모의 좌장 역할을 했는데 기자들이 물으면 ‘회장이 아니다’고 답하셨다. 축제를 마치고 모텔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전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박사! 사람은 벗고 태어나 벗고 죽습니다. 마 벗읍시다.’ 모두 옷을 벗었고 술에 취한 채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다들 옷을 입고 있었다. 대전 남 사장만 벌거벗은 채 자고 있었다. 금괴 1㎏을 좋은 일에 쓰라고 내놓으셨다. 2천 만 원에 팔았는데 지금 시세는 1억 원이 넘는다. 금산 지인이 만든 된장을 사서 고아원에 전달하는 등 유용하게 썼다. 건강에 관심이 있어 관련 책자, 기능식품, 의료도구를 많이 갖고 계시다. 85세까지만 살겠다고 하시니 두고 볼 일이다.

 

정문술 회장 : 1990년대 후반 벤처 붐이 한창이었다. 안산 중소기업진흥공단에 벤처 강의를 하러 갔다. 정 회장이 앞 강의를 마치고 나오셨기에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월간조선에서 존경받는 기업가 50인을 선정했는데 1위 정주영, 2위 정문술이었다. 내가 정 회장 원고를 쓰게 되어 여의도 식당에서 2시간 인터뷰를 했다. 키워드는 기술, 자율, 윤리. 정 회장이 기사를 좋아하셨고 이후 꾸준히 만났다. 미래산업 사장직을 넘겨주고 KAIST에 기부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금산 벤처농업대학 초대 학장을 맡았고 미래촌 활동에 재정 지원을 해주셨다. 경비 사용내역을 정리해 갔더니 ‘자네는 자기 돈 들여 활동하니 보고하지 말라’고 하셨다. 미래산업 사외이사를 맡았는데 회사 경영이 어려워져 보수를 받지 못했다. 안철수 테마주로 주가가 급등했을 때 주식을 처분하셨다. 그 돈을 KAIST에 기부해서 뒷말이 없었다. 재산이 넘치면 화를 부른다고 생각하신다. 회사 부도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경험에서 얻은 지혜이다.

 

최기학 교장 : 2007년 12월 태안에서 큰 기름유출 사고가 났다. 폭풍에 떠밀린 삼성중공업 크레인선이 유조선을 들이받은 것이다. 사태 수습을 위해 태안에 내려가 관계자들을 만났다. 다음 해 여름 바다 축제를 열도록 도움을 주었다. 기름 사고로 타격받은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생태전문가인 최기학 교장과 가까워졌다. 하루는 최 교장이 울면서 전화를 걸어 왔다. 여중생 2명이 꾀병 부리려고 농약을 마셨다가 한 명이 죽었다고 했다. 지인들과 함께 청바지 기증 등을 통해 학생들을 위로해주었다. 최 교장 부부는 마음이 답답하면 금산 집에 놀러 온다. 화초를 심어주고 나무 전정을 해준다. 잔디밭에 방치되어 있던 전통 목선을 천리포 수목원에 기증하도록 했다. 수리한 목선은 수목원 연못에 떠있다. 돛에는 금산 집 이름인 ‘일연(逸然)’ 두 글자를 크게 썼다.

최우석 소장 :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전성기를 이끄신 분이다. 부산 상대를 나와 서울경제, 중앙일보를 거쳐 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셨다. 학사로 박사 수십 명을 거느렸다. 연필로 원고를 쓰시면 여비서가 컴퓨터에 입력했다. 컴퓨터 출력을 보고 오자를 수정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요구를 만족시킨 필력이었다. 외환위기 때는 고금리 문제점을 지적해 낮추도록 했다. CEO 인포메이션을 만들면서 생각하고 글 쓰는 법을 많이 배웠다. 금산을 비롯해 지방 여행을 여러 차례 모시고 갔다. 소장 퇴임 후 ‘삼국지 경영학’ 책을 쓰셨다. 아모레 서 회장과 자리를 마련해 수준 높은 조언을 듣도록 했다. 사모님이 의식불명 상태로 삼성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셨다. 김만산 교수의 한약 처방이 조금 도움이 되었다. 사모님 돌아가시고 낙담하셨는지 본인도 췌장암으로 그 뒤를 이으셨다.

한경혜 작가 : 문화일보에서 장애인 화가 기사를 보았다. 절 수행으로 뇌성마비를 극복하고 한국화 작가로 활동한다는 스토리였다.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이후 전시회 때마다 찾아갔다. 지인들에게 그림을 사주도록 부탁해서 여러 차례 성사시켰다. 7살 때 몸이 굳어 오자 성철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절하면 살 수 있다.’고 했다. 매일 천 배를 해서 몸이 많이 좋아졌다. 1만 배씩 백일 간 절하는 수행을 세 번 끝냈다. 절하다가 구경각도 체험했다. 홍익대 박사과정을 마쳤고 해외 전시회도 나갔다. 물속 사물을 테마로 연작들을 그리는 중이다. KBS 강연 100°C에 출연했고 ‘오체투지’ 책은 꾸준히 팔리고 있다.

주례 인연 : 동장님 아들에게 첫 주례를 섰다. 정문술 회장이 앞자리에 앉으면서 ‘잘하나 보자’고 말씀하셨다. 금산 다락원 김현준 팀장은 47세(부인은 40세)에 결혼을 했다. ‘늦게 짝을 만나 너무 좋으니 주례사는 짧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범인 국장 아들은 키가 2미터에 육박했다. 주례 자리에 상자를 놓고 올라섰다. 부산연구원의 황영순 박사, 최상관 씨 딸, 윤상희 씨 딸의 주례를 섰다. 부산 원장 때 박호정을 만났다. 대학에 입학했다가 집안이 어려워 자퇴를 했다. 28세에 부산대 식품영양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대통령 장학생으로 뽑히는 등 스펙을 쌓았으나 취업은 또 다른 문제였다. 34세에 약대 편입을 고려하기에 아모레 인턴 입사를 도와주었다. KTX 열차 간에서 울면서 거는 전화를 받았다. 정식 사원으로 채용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헬스클럽 트레이너가 소개한 IT전문가와 늦은 결혼을 했다. 김현성은 미래촌 대학생 모임에서 만났다. 8살 때부터 병을 주워 용돈을 벌었다.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면서 청소년운동도 주도했다. 모임에 참여한 대학생들 중에서 가장 가깝게 지낸다. 능률협회에서 지역사업을 맡아 뛰어난 실적을 내고 있다. 다들 잘 살고 있지만 자식이 있는 부부가 절반이 되지 않는다. 노력해도 못 가지는 경우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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