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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면세계 외면세계 - 1부 아카샤

작성자지엄|작성시간16.09.29|조회수223 목록 댓글 1
                 - Awaken The World Film에서 제공한 'Inner Worlds Outer Worlds' 시리즈 -




                                        [내면세계 외면세계]
                   

                                                     [ 1부 - 아카샤 (Akasha) ]

게시일: 2015. 4. 8.

Original : https://www.youtube.com/watch?v=aXuTt...
Inner Worlds Outer Worlds - part 1
번역 : 한국향기명상협회 http://blog.naver.com/suzushiikaze



** 자막 전문 **


모래 한 줌 속에 있는 세상과 야생화 속에 있는 천국을 보려면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쥐어라.

- 윌리엄 브레이크-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빅뱅, 태초의 "옴"

빅뱅이론은 물리적 우주가 단일성이라고 불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열의 밀도 높은 한 점에서부터나선형으로 퍼져나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늘 끝보다 수십 억배나 작은 것이다.

그 이론에서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뭔가가 신비스러우면 신비스러울수록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중력은 팽창 속도를 늦추던가 아니면우주를 하나의 커다란 위기상태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허블우주망원경이 보내온 이미지는 우주의 팽창이 실제적으로 가속화되고 있고

빅뱅에서 자라 나오면서 점점 더 빨리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어찌 되었든 우주에는 물리학자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더 많은 질량이 있다.


그들이 놓치고 있는 질량을 계산하기 위해물리학자들은 이제 우주가 오직 4%의 원자 물질

또는 우리가 정상적으로 물질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주의 23%는 암흑 물질이고, 73%는 암흑 에너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전에는 빈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을 연결하면서 우주를 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경계와 같은 것이다.


고대의 베다 교사들은 나다 브라흐마, 즉 우주를 진동이라고 가르쳤다.

진동하는 장은 모든 진정한 영적인 경험과 과학적인 탐구의 뿌리에 있다.


그것은 성인들, 붓다, 요기들, 신비가들, 사제들, 샤만들과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관찰했던 에너지 장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아카샤, 태초의 옴, 인드라의 보석망, 천체의 음악, 그리고 그밖의

수천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뿌리이며 우리의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1부 아카샤]


3세기의 대승불교에서는 현대의 가장 앞선 물리학자들과 다르지 않은 우주론을 설파했다.

인드라의 보석 망은 우주의 구조가 서로 얽혀 있다고 설명한 훨씬 더 오래된 베다의 가르침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신들의 왕 인드라는 태양을 낳고 바람과 물을 움직인다. 모든 차원으로 뻗어나가는 거미줄을 상상해보라. 거미줄은 이슬방울로 되어 있고 각각의 방울은 다른 물방울을 비추고 있다.


각각의 방울에는 다른 물방울의 이미지가 담겨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거미줄 전체에 반사된 영상이 무한히 연속된다. 인드라의 망은 가장 작은 빛줄기조차도

전체의 완전한 패턴을 담고 있는 홀로그램적인 우주로 설명될 수 있다.


세르비아출신 미국인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는 20세기를 발명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테슬라는 지금은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된 교류전기와 다른 많은 것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대 베다의 전통에 

관심을 가지면서 테슬라는 과학을 동양적인 모델과 서양적인 모델 모두를 통해 이해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모든 위대한 과학자들처럼, 테슬라는 외면 세계의 신비를 깊이 들여다 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았다. 고대의 요기들처럼 테슬라는 모든 사물에 뻗어있는 에테르장을 설명하면서 아카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테슬라는 인도 고대의 가르침을 서양에 가져온 스와미 비베카난다와 함께 연구했다.


베다의 가르침에서 아카샤는 공간 그 자체이다. 다른 요소들이 채워져 있는 공간, 진동과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아카샤는 프라나의 양에 대응하는 음이다. 아카샤 또는 원초적인 실재를 개념화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현대적인 개념은 프랙탈이다. 컴퓨터의 발전이 자연 속의 패턴을 수학적으로 재생하고 시각화할 수 있게 

해준 것은 1980년에 이르러서였다.


프랙탈이라는 용어는 1980년에 수학자 만델브로트가 만들었다.

그는 어떤 단순한 수학적 방정식을 연구했는데, 그것은 반복될 때 한정된 틀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학적이거나

기하학적인 형태의 배열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한정되어 있지만 동시에 무한하다.프랙탈은 부분으로 쪼개질 수 있는

세련되지 않은 기하학적 형태이며 각각은 대략 전체 패턴의 사이즈가 줄어든 모양으로서 자기 유사성이라고 불린다.


만델브로트의 프랙탈은 신의 지문이라고 불려왔다. 당신은 지금 자연 그자체가 만들어낸 예술품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만델브로트의 형태를 특정한 방법으로 돌리면 그것은 힌두 신 또는 붓다처럼 보인다. 이 형태는 ‘붓다브로트’ 형태라고 불렸다.


고대의 예술품이나 건축물의 형태를 보면 인간들이 오랫동안 아름다움이나 신성함을 프랙탈 패턴에 연결시키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한히 복잡하지만 각각의 부분은 전체를 재생하는 씨앗을 품고 있다.

프랙탈은 수학자들의 우주관과 우주의 움직임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켰다.

각각의 새로운 확대의 차원에는 원래의 것과 차이가 있다.

우리가 프랙탈의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가로질러가는 동안 지속적으로 변화와 변형이 일어난다.

이 변형이 우주적인 나선이다. 시공간 모체가 새겨진 지성이다.


프랙탈은 본질적으로 소음과 배열로 가득 찬 카오스이다.

우리 마음이 어떤 패턴을 인식하거나 정의할 때, 우리는 그것이 마치 사물인 양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패턴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려고 하지만 그 패턴을 우리 마음속에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프랙탈의 다른 부분을 밀어내야 한다. 프랙탈을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움직임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중립적이고, 시간이 없고, 차원이 없다.

패턴을 인식하는 우리의 창의성과 능력은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 파동의 시간 없는 세상과 물질의 고체 세상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다.


주시는 생각의 본래 특질인 제한을 통한 창조의 행위이다.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라벨을 붙임으로써 사물이 고체라는 환상을 창조하고 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나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름과 라벨을 붙임으로써 당신은 모든 다른 것,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모든 것을 부정한다.

당신은 이름을 붙이고 핀을 꽂음으로써 분자를 하나의 사물 안에 가둬놓는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그것이 존재하도록 정의하고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성은 우리의 가장 높은 본질이다. 사물의 창조와 함께 시간이 나타난다. 그것이 곧 고체의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빈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과학자였다.

그것은 속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공간에 본래 갖추어진 것은 거의 양을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에너지이다.

유명한 물리학자 리차드 페인만은 한 때 이렇게 말했다.

“단 1제곱 미터의 공간 안에 세상의 모든 바다를 끓일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


명상을 오래한 사람들은 고요함 속에 가장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붓다는 그 원초적인 실재를 다른 용어로 표현한다. 그것은 칼라파스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분자와 같은 것, 또는 일 초에 수조번이나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는 파동과 같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실재는 빨리 움직이면서 연속성의 환상을 만들어내는홀로그래픽 필름 카메라에 있는 일련의 화면과 같은 것이다.


의식이 완전히 고요해질 때, 환상이 이해된다.

왜냐하면 환상을 조종하는 것이 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고대 전통에서는 수천 년 동안이나 모든 것이 진동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다 브라마 - 우주는 소리다.

나다라는 말은 소리 또는 진동을 의미하고 브라마는 신의 이름이다.

브라마는 동시에 우주이며 창조주이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분리될 수 없다.


고대 인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 중의 하나인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마를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창조주라고 말한다.

그가 눈을 뜨면 세상이 존재한다. 브라마가 눈을 감으면 세상은 사라진다.

고대의 요기나 신비가들은 의식의 뿌리 영역에 어떤 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곧 아카식 장 또는 아카식 레코드이다.

그곳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보와 경험이 항상 존재한다.이 장 또는 모체로부터 모든 존재가 일어난다.


아원자 입자에서 은하수, 별, 행성, 그리고 모든 생명이 일어난다.

당신은 그 어떤 것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한다.왜냐하면 그것은 진동의 층이 겹겹이 이루어져 있고 계속 변화하고

아카샤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태양 안에서, 공기와 비와 흙을 마시고 있다.

에너지의 세계는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이 사물의 안과 밖을 움직인다.

생각하는 마음이 고요해질 때, 당신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모든 측면을 함께 보게 된다.

나무와 하늘과 땅, 비와 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삶과 죽음, 자아와 타아는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산과 골짜기기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과 똑 같은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다른 토착 전통에서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의 진동하는 근원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통해 움직이는 하나의 의식, 하나의 장, 하나의 힘이 있다.

장은 당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고, 당신으로 일어나고 있다.

당신은 우주 안의 당신이다. 당신은 창조 그 자체를 바라보는 그 눈이다.


꿈에서 깨어날 때, 당신은 꿈속에서 있었던 모든 것이 당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그것을 창조하고 있었다. 소위 진정한 삶 또한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당신이다.

하나의 의식이 모든 사람의 눈으로, 구석구석 모든 것을, 각각의 분자 안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유럽 분자물리학 실험실 CERN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은 모든 것을 통해 확장하는 이 장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그들은 외부의 물리적 세계를 바라본다.

스위스 제네바의 CERN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들은 힉스 입자, 또는 신의 분자를 발견했다고 공표했다.

힉스 입자 실험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이 진공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CERN의 커다란 하드론 가속기는 원둘레가 17마일이나 되는 고리로 되어 있다.

그 안에서 분자의 두 빔이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거의 빛의 속도로 서로 충돌하면서 질주한다.

과학자들은 격렬한 충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관찰한다.

표준 모델은 분자들이 어떻게 질량을 얻는지 계산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진동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스스로 진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댄서가 있는 것 같다.


우주의 발레단에서 숨겨진 그림자 댄스와 같다. 다른 모든 댄서들은 항상 이 숨겨진 댄서 주위를 춤춰왔다.

우리는 그 춤의 안무를 지켜보았지만 지금까지 그 댄서를 볼 수 없었다.

소위 “신의 분자“ 우주의 근본 물질의 속성 우주의 팽창을 조종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질량과 에너지의

원인이 되는 모든 물질의 심장, 하지만 우주의 본성을 설명하기 보다,힉스 입자의 발견은 그 위대한 신비,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로운 우주를 드러내고 있다.

과학은 의식과 물질 사이의 시발점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시초의 장을 보고 있는 눈과 장이 우리를 보고 있는 그 눈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독일 작가 볼프강 폰 괴테는 말했다.

“파동은 세상을 일어나게 한 원초적인 현상이다.”

사이매틱스는 눈에 보이는 소리를 연구하는 것이다. 

사이매틱이라는 단어는 파동또는 진동을 의미하는 희랍어 사이마에서 왔다.

파동 현상을 진지하게 연구한 최초의 서양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 에른스트 크랄드니이다.

그는 18세기의 독일 음악가이면서 물리학자였다.


크랄드니는 철판에 모래를 뿌리고, 철판을 바이올린 현으로 진동을 주었을 때, 모래가 스스로 어떤 모양으로 

정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어진 진동에 따라서 서로 다른 기하학적인 형태가 나타났다.

크랄드니는 이런 모양을 모두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을 크랄드니 무늬라고 한다.

자연 세계에서도 이런 무늬가 많이 발견된다.거북이의 무늬나 표범의 점 무늬 같은 것 등이다.

크랄드니 무늬나 사이매틱 무늬를 연구하는 것은고급 기타, 바이올린 등의 악가 제작자들이 악기의 음질을 결정하는 

비밀스런 방법이다.


한스 제니는 크랄드니의 연구 성과를 더 발전시켜 1960년대에 다양한 액체와 전자 증폭기를 사용함으로써

소리 진동을 만들어내고 '사이매틱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접시 물에 단순한 사인 파동을 만들면 물 안에 무늬를 볼 수 있다.

파동의 진동수에 따라서 서로 다른 물결 모양이 일어날 것이다. 진동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형태는 더 복잡해진다.

이런 무늬들은 반복적이며 임의적이지 않다.


더 관찰하면 진동이 물질을 단순한 반복적인 파동에서 복잡한 형태로 정렬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물의 진동은 해바라기와 유사한 무늬를 보인다.

단지 소리의 진동수를 바꾸는 것만으로 우리는 다른 무늬를 얻는다.


물은 매우 신비스런 물질이다. 고도로 감수성이 예민하다. 물은 진동을 받아들이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도의 공명력과 예민함, 그리고 공명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물은 모든 종류의 음파에 즉시 반응한다.

진동하는 물과 땅이 식물과 동물에 있어서 질량의 대부분을 만들어 낸다.

어떻게 단순한 물의 진동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무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고체를 추가하고 진폭을 증가시키면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옥수수 녹말을 물에 넣으면 더 복잡한 현상을 얻게 된다.

어쩌면 삶 그 자체의 원리는 진동이 옥수수 녹말 방울을 움직이는 유기체로 보이게 하는 것처럼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생기를 불어 넣는 원리는 주요 종교에서는 그 당시의 시간을 반영하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설명된다.

콜롬버스 아메리카 이전에 최대의 왕국이었던 잉카의 언어에서 ‘인간의 몸’을 뜻하는 단어는 ‘알파 카마스카’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생기가 부여된 흙’을 의미한다.


유태 신비주의 카발라에서는 신의 신성한 이름에 대해 말한다.

말해질 수 없는 그 이름. 그것은 어디에나 있는 진동이기 때문에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단어이며 모든 물질이다. 모든 것은 신성한 단어이다.


4면체는 3차원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모양이다. 물리적인 실재를 갖으려면 최소한 네 개의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삼각형 구조는 자연이 스스로 안정을 취하는 유일한 형태이다.

구약 성서에서 야훼의 4자음문자는 어떤 신의 현현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곤 했다.

그것은 신이라는 단어, 또는 특정한 신의 이름, 로고스, 또는 원초적 단어를 말할 때 사용되었다.

고대문명은 우주의 뿌리 구조는 4면체였음을 알았다.


이 모양에서부터 자연은 평형상태, 시바를 향해 근본적인 추진력을 나타낸다.

그러는 동안 또한 변화, 샤크티를 향해 근본적인 추진력을 나타낸다.


성서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로고스’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BC 500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어떤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 

모든 반복, 형태, 모양의 근원이라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을 따랐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우주에 편재한 신성의 생기를 주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수피즘에서 로고스는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 안에 있다.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현현되지 않은 것이 현현하게 되는 그것이다.


힌두 전통에서 시바 나타라자는 ‘춤의 신’을 의미한다. 우주 전체가 시바의 북에 맞춰 춤을 춘다.

모든 것은 파동으로 혼이 불어 넣어졌고 파동이 스며들어 있다.

시바가 춤을 추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계속 진화하고 변화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무로 없어진다.

시바가 우리의 주시하는 의식을 나타내는 반면, 샤크티는 세상의 물질이며 요소이다.

시바가 명상 속에 있는 반면,샤크티는 그를 움직여 춤 속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음과 양처럼, 댄서와 춤은 하나이다. 


로고스는 또한 숨겨지지 않은 진리를 뜻한다. 로고스를 아는 자는 진리를 안다.

아카샤가 자신으로부터 근원을 감추면서 복잡한 구조로 소용돌이침에 따라 인간 세상에는 많은 층의 은폐가 존재한다.

신성한 숨바꼭질 놀이처럼 우리는 수천 년 동안 감추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 놀이를 완전히 잊게 되었다.

우리는 어찌하다 보니 찾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불교에서는 명상을 통해서 직접 로고스를, 자신 안에 있는 변화와 덧없음의 장을 인식하라고 가르친다.

당신 내면 세계를 관찰할 때, 마음이 더 집중됨에 따라서 더 미묘한 감각과 에너지를 관찰한다.

감각의 뿌리 차원에서 '아니카' 또는 덧없음을 직접 깨달음으로써 일시적인 외부의 형태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된다.


일단 모든 종교의 공통된 뿌리인 파동의 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내 종교’라고 말하고

또는 ‘이것이 나의 원초적인 옴이다,’ ‘내 퀀텀 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세계에서 진정한 위기는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위기는 의식의 위기, 곧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사물 안에 있는이 본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보살은 깨달은 불성을 가진 사람이다. 보살은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깨달을 수 있게 도움을 주기로 맹세한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를 깨우쳐야 한다.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감각을 가진 존재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깨어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로 맹세한다.

나의 불완전함은 끝이 없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기로 맹세한다. 법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법을 알기로 맹세한다. 깨달음의 길은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얻기로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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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지향 | 작성시간 16.09.30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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