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36 ![]()
곽여(郭輿, 1058~1130)는 고려 예종의 스승으로, 왕의 지극한 총애와 신임을 받았던 도인이자,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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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한자 김시습의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 의하면 신라의 김춘추, 김유신, 최치원, 고려의 강감찬, 곽여 등의 인물들이 우리민족 고유의 도(道)를 계승하는 천웅도(天雄道, 화랑도의 근원) 전수자 가문인 영해 박씨 종사(宗嗣)에게서 공부(工夫)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곽여는 어려서부터 비리고 매운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놀기를 싫어하고, 항상 홀로 거하며 고요를 지켰다.
어릴 때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여(輿)’로 하라고 하여 이름을 삼았으며, 자(字)는 몽득(夢得)이었다. 72세까지 사는 동안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신선처럼 살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한때 홍주(洪州) 수령으로 나가 있을 때는, 냇가에 초당을 지어 ‘장계초당(長溪草堂)’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공무를 보다 여가가 나면 그곳에 나가 은일(隱逸)과 유유자적(悠悠自適)을 즐겼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지만, 풍류를 좋아하여 기생은 가까이 하였던 듯하다. 한번은 홍주사(洪州使)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가까이 지내던 기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같이 서울로 가자.”
“고향을 떠나서요?”
“허허, 가기 싫은 게로구나. 그럼 헤어지는 마당에 좋은 약이나 하나 주고 가마.”
“무슨 약인데요?”
“신선이 되는 약이다.”
곽여는 단약(丹藥) 한 알을 꺼내 기생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자 기생은 스르르 잠이 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신선이 되는 것이니, 눈을 감고 누워 보아라. 내가 이불을 덮어 주마.”
곽여는 이불로 두르르 기생을 말아서 말에 태우고 서울로 데려갔다고 한다.
홍주사(洪州使)를 마치고는 예부원외랑이 되었지만, 바로 벼슬을 버리고 금주(金州, 김해)의 신어산(神魚山 또는 仙魚山)에 은거하여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예종 임금의 부름을 받고 다시 세상에 나와야 했다. 곽여는 예종이 태자 시절 요좌(僚佐)였기 때문에, 예종은 곽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곽여를 궁궐에 초빙하여 스승으로 모신 것이었다.
처음에는 곽여가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종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람을 보내자, 할 수 없이 은거를 풀고 세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곽여가 예종 앞에 왔을 때 갑자기 동남쪽에 흰 구름 몇 조각이 나타나고 그 가운데에 학(鶴) 두 마리가 선회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예종은 늘 곽여를 곁에 두고 진인(眞人) 선생(先生)으로 부르며 정론(政論)과 문장(文章)을 논하였다.
곽여는 늘 오건(烏巾)에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있어, 사람들이 그를 금문우객(金門羽客, 궁중도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종은 스승 곽여의 자문에 힘입어 통일신라 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고자, 북진정책을 실현하였다. 예종 2년 1107년, 윤관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7만 대군으로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이에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통태진(通泰鎭), 숭녕진(崇寧鎭), 진양진(眞陽鎭), 공험진(公嶮鎭)에 동북(東北) 9성(城)을 설치하고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를 세웠다. 윤관(尹瓘, ?∼1111) 역시 신라 화랑 김유신(金庾信)을 숭배하였던 고려의 장군이었다.
이처럼 예종이 곽여를 늘 스승으로 곁에 두고 진인(眞人) 선생(先生)으로 부르며 존숭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 정벌 때 예종은 군사들의 사기를 독려하기 위하여 싸움터 가까운 서경(평양)을 향해 출발하였고, 곁에는 당연히 곽여가 있었다. 그때 마침 길에서 소를 타고 지나가는 노인과 마주치자, 선풍(仙風)이 감도는 노인의 풍모에 곽여는 즉석에서 시(詩)를 지어 예종에게 올렸다.
太平容貌恣騎牛 태평스런 얼굴로 아무렇게나 소를 타고
半濕殘霏過壟頭 안개비에 반쯤 젖어 밭둑길을 지나가네
知有水邊家近在 물가에 오니 집에 다 온 걸 알겠노라
從他落日傍溪流 소탄 노인을 따라 지는 해도 시내 곁을 흐른다
고려시대는 중국에서 수입된 도교가 한창 유행하던 때였으나, 예종은 곽여의 영향으로 국학을 진흥시켰다. 그리고 즉위 11년 4월에 다음과 같은 화랑도의 중흥을 장려하는 교시를 내렸다.
“4선(仙)의 유적을 마땅히 가영(加榮)하라. 4선(仙)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라. 근일에는 국선(國仙)의 도(道)를 구하는 자가 없도다. 대관(大官)의 자손으로 하여금 국선(國仙)의 도(道)를 행하게 하라.”
여기서 4선(仙)은 신라 당시 전국토의 인심을 풍미했던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네 화랑이었다.
예종은 곽여가 자연을 그리워할 것을 염려하여 서화문(西華門) 밖에 별장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결국 예종의 염려대로 곽여는 궁에서 물러나 은거하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예종은 다시 성 동쪽의 약두산(若頭山)에 거처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친히 ‘허정재(虛靜齋)’라는 편액까지 써서 하사하였다.
예종이 산책 때면 곽여에게 들러 함께 시(詩)를 주고 받으며 즐겼다. 어떤 때는 밤에 몰래 행차하여 술과 시를 나누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렇듯 곽여와 예종은 시(詩)로서 창화(唱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종창화집(睿宗唱和集)》이 나오게 되었다.
하루는 예종이 곽여의 거처인 동산재(同山齋)에 갔다가 만나지 못하자 벽에〈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라는 시를 써놓고 돌아왔다. 곽여도 나중에 돌아와, 잠시 티끌 같은 세상에 나갔다가 예종을 맞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시를 지어 화답했다.
何處難忘酒 어느 곳에서나 술 잊기 어려워
虛經寶輦廻 임금님 수레가 헛되이 돌아가셨구나.
朱門追少宴 부자집의 작은 잔치에 참석했다가
丹竈落寒灰 신선의 부엌에 찬 재를 떨어뜨렸도다.
鄕飮通宵罷 밤새껏 고을 유생들과 술 마시니
天門待曉開 새벽녘에 천문이 열렸도다.
杖還蓬島徑 지팡이 짚고 봉래 길을 돌아오면
屐惹洛城苔 나막신에 낙성의 이끼를 묻혀 왔더니
樹下靑童語 나무 아래 청의동자 알리는 말이
雲間玉帝來 구름 새에 옥황님이 오셨다 한다.
鼇宮多寂寞 한림원의 관원이 모두 쓸쓸해 하고
龍馭久徘徊 임금의 수레가 오랫동안 서성대다가
有意仍抽筆 뜻이 있어 붓 뽑아 시 한 수 써 놓고
無人獨上臺 사람 없어 누대에 혼자 오르셨다 하니
未能瞻日月 임금님 뵙지 못하고
却恨向塵埃 세상으로 향했던 일이 못내 한스럽도다.
搔首立階下 머리를 긁적이며 계단 아래 서서
含愁傍石隈 시름을 머금고 돌굽에 기대섰노라.
此時無一盞 이러한 때 술 한 잔도 없다면야
豈慰寸心哉 이 내 작은 마음 어찌 위로 하리오.
후에 중종 임금이 김안로와 소세양에게 곽여의 시를 보여주며, 같은 체로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는 것을 보면, 곽여의 시(詩)가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破閑集)》에서 곽여를 두고 이렇게 감탄하였다.
“어찌 다만 선풍도운(仙風道韻)이라고만 하랴! 문장(文章)에 이르러서도 경민하고 절륜하였기에, 왕의 마음을 통째로 움직이기에 족하였다.”
곽여의 문하생이었던 정지상(鄭知常, ?~1135)은 선생이 72세로 죽자, 인종의 명을 받아 제문(祭文)과 《동산재기(同山齋記)》를 써서 비(碑)를 세웠다.
정지상은 《동산재기(同山齋記)》에 선생이 불교, 도교, 의학, 음양 등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활쏘기(射), 말타기(御), 거문고(琴), 바둑(碁) 등 두루 문무를 겸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선생과의 인연이 오래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지상이 지닌 선도(仙道)의 풍모 또한 곽여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