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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필. 고전

<영화에세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작성자월산거사|작성시간22.01.10|조회수342 목록 댓글 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최용현(수필가)

 

   할리우드 영화나 유럽, 홍콩 영화를 즐겨 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나라 영화를 좀 낮춰보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우리나라 영화를 보고나서 ‘어, 우리나라 영화도 볼만한데…!’ 하고 놀라는 시점이 생기게 된다. 필자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비디오를 보고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87년 ‘세계의 문학’에 발표된 이문열의 중편소설로, 그해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1992년 박종원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스토리도 탄탄하고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역배우들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다. 특히 반원들을 살벌하게 철권통치하는 반장 역의 홍경인이 명연기를 펼친다.

   이 영화는 청룡영화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하여 대종상 3관왕, 춘사영화제 5관왕, 백상예술대상 4관왕 등 각종 상을 휩쓸었고, 아역배우 홍경인과 고정일은 여러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몬트리올영화제와 하와이국제영화제,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등 국제영화제에서도 수상을 하면서 비디오 대여시장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올랐다.

   서울의 한 학원에서 영어강사를 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한병태(태민영 扮)는 어렸을 적에 다녔던 시골의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5학년 때 담임교사의 부음(訃音)을 듣는다. 반장이었던 엄석대도 올 거라고 한다. 다음 날, 병태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3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자유당 정권이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1959년 가을, 서울의 명문 초등학교에 다니던 한병태(고정일 扮)의 가족들은 시골 군청으로 전근 가는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하는데, 병태도 시골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병태가 배정된 5학년 2반에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반장 엄석대(홍경인 扮)가 있었다. 그는 담임인 최 선생(신구 扮)의 비호 아래 반원들에게 벌칙을 주거나 청소검사를 하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병태는 전학 온 첫날 점심 때 석대의 물 당번을 거절하면서 그에게 도전을 해보지만 반원들의 심한 야유를 받는다. 다시 병태는 한 친구가 가지고 온 라이터를 빼앗은 석대의 만행을 일러바치지만 최 선생은 그럴 리가 없다며 석대를 옹호한다. 오히려 병태가 고자질이나 하는 말썽꾸러기로 인식되어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게 된다.

   어느 날, 몇몇 반원들과 읍내 극장에 갔다는 이유로 6학년 선도부가 병태를 구타하려하자 석대가 나서서 막아준다. 또래보다 몇 살 많은 석대는 중학생과 담력 내기도 한다. 철교 위 철로에 나란히 누웠다가 기차가 달려오자 중학생은 겁을 먹고 도망치지만, 석대는 다리 아래에 매달려서 버티며 승리한다. 이때부터 병태는 석대에게 굴복하고 그의 충복(忠僕)이 된다. 그해 석대는 도지사 명의의 표창장을 받는다.

   1960년 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이승만 물러가라!’는 데모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6학년이 된 병태의 반에도 젊고 유능한 김 선생(최민식 扮)이 담임을 맡아 진실과 자유를 설파(說破)하고 있다. 김 선생은 엄석대가 반장 선거에서 받은 몰표와 늘 1등을 하는 성적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하여 과목별 우등생이 자신의 시험지에 석대의 이름을 써내는 것을 알게 된다.

   김 선생은 석대와 과목별 우등생을 불러내 체벌을 가하고, 반원들에게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석대의 비행을 털어놓게 한다. 반원들은 한 사람씩 석대의 비리를 폭로하며 ‘저 새끼 나쁜 놈이에요.’ 하고 욕을 하지만 병태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석대는 ‘잘 해봐. 이 개새끼들아!’ 하고 소리 지르면서 뛰쳐나간 뒤, 밤에 교실에 불을 지르고 사라진다.

   3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중년이 된 반원들은 5학년 때 담임이었던 최 선생의 상갓집에 모여든다. 이들은 ‘요즘 시대에는 엄석대 같은 인물이 나와서 꽉 잡아야 해.’라고 하는 등 세태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 시절에 대한 추억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때 만순은 석대의 오른팔이었던 체육부장에게 ‘너는 어렸을 때 엄석대 똘마니나 하더니, 겨우 택시기사나 하고 있냐?!’ 하고 말한다. 그러자 체육부장은 ‘너는 옛날 같았으면 그냥 내 한방에 죽었어!’ 하고 받아친다. 만순은 졸부가 되었고, 체육부장은 석대가 사라지자 바로 몰락해버린 것이다.

   병태가 석대의 충복이 되었을 때, 약간 모자라는 듯한 영팔이는 ‘너랑 안 놀아!’ 하면서 병태에게 준 선물인 탄피를 돌려달라고 했었다. 또 반원 모두가 엄석대를 성토할 때도, 영팔이는 ‘니네들도 나빠!’ 하면서 반원들에게 일침을 가했었다. 그런 영팔이는 정직하게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농부가 되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좀 있으니 6학년 때의 담임인 김 선생이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고 도착한다. 그는 최 선생을 아주 훌륭한 교사였다고 치켜세우더니, 조문객들 중에 좀 높은 사람이 보이면 연신 일어나 굽신 거린다. 이에 다들 ‘변해도 너무 변했어. 출세가 뭔지….’ 하면서 참 교사답던 김 선생의 변모에 대해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모두가 기다리던 엄석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그의 이름 석 자가 적힌 커다란 근조화환이 도착한다. 그 화환만으로는 엄석대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만순이 ‘내가 술 한 잔 살 테니 나가자.’라는 말에 줄줄이 따라나서는 것을 보면 이제 권력 대신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반장 엄석대의 몰락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권력의 허상을 지적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게 되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귀경길에 오른 병태는 생각에 잠긴다.

   ‘지금 이 사회도 여전히 그때의 5학년 2반과 크게 다를 바 없고, 엄석대는 어디선가 또 다른 반장이 되어 자신의 뜻대로 반을 주무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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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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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여정 작성시간 22.01.10 좋은 영화지요. 절은 날 방탕한 자의 종말을 보여주는 ~~
    겨울 나그네는 애석한 이야기 이더군요.
  • 답댓글 작성자월산거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1.10 네, 원작이 워낙 탄탄한 덕분에 영화적 완성도가 뛰어난 영화입니다.
    '겨울 나그네'는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가슴저리는 얘기지요.
  • 작성자뜬구름 작성시간 22.01.11 근자에 카페에 좀 많은관심을 가지면서 두분덕분에 옇화도 몇편 보았습니다.
    덕분에 14부 겨울나그네도 보았고, 넷프릭스의 오징어게임(8시간)도 보았습니다.
    TV에서 유튜브와넷플릭스도 보앗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문열이 밀초출신이고,이야기의 배경이 그시절의밀양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봐야겟습니다.
    예전에 어린시절 영화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월산거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1.22 코로나로 꽉 막힌 세상, 방콕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찾아서 보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 아닌가 싶어요.
    이문열 씨가 밀초를 좀 다닌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영화의 배경이 밀양이라는 증거는 없어요. 어쨌든 이 영화는 원작이 탄탄한 만큼 아주 잘 만들어진 국산영화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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