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여행 인터넷 언론 ・ 1분 전
| 재현(再現)과 표현(表現)을 넘어선 자현(自現)의 영성 예술 자연(自然)의 영성이 현현하는 무위(無爲)의 예술적 풍경 보편자가 저절로 현현하는 자유(自由)의 미학 |
[미술여행=엄보완 기자]장은선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운니동19)가 이형곤 초대展: “무위(無爲)의 풍경”전시를 개최한다.
다음달(3월)4일(수)부터 13일(금)까지 열리는 이형곤 작가의 초대전시 “무위(無爲)의 풍경”에서는 오랜 시간 축적된 사유와 반복의 과정을 담은 이형곤 작가의 작품 30여 점이 옻칠 회화로 감상자들과 마주한다.
옻칠 회화가인 이형곤 작가 전시 안내
옻칠 회화가인 이형곤은 비구상작업을 한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서 채취된 옻을 반복적인 칠과 건조 과정을 거치며 깊은 밀도와 침묵의 시간을 쌓아 올리고, 느린 축적의 과정 속에서 존재와 세계를 관조한다. 이번 전시는 옻칠 특유의 물성과 수행적 재료를 통해 전통재료가 지닌 조형성과 정신성을 현대 회화의 언어로 확장했다.
사진: 1.무위의 풍경 Ⅱ-252 130.3x162.2cm 보드에 옻칠, 금분 (1)
이형곤의 작품은 대상의 객관적 재현과 주체의 주관적 표현을 넘어서는 ‘자현(自現)의 예술’을 통해 근원적 미학을 펼친다. 작가는 자연을 모방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자연의 영성이 저절로 현현하는 무위의 풍경을 구현 하고자 한다.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상과 색채, 그리고 절제된 구성은 주체와 대상, 작가와 작품, 감상자가 분리되지 않는 상태의 감각을 유도한다. 따라서 이형곤의 옻칠 회화는 도달하려는 유위의 형식을 내려놓고, 궁극적 깨달음이 강렬하게 빛나며 살아 움직이는 '무위의 풍경'으로 마주하게 한다.
이형곤의 작품은 대상의 객관적 재현과 주체의 주관적 표현을 넘어서는 ‘자현(自現)의 예술’을 통해 근원적 미학을 펼친다.(사진: 이형곤 박가 전시 자료 캡처)
이번 전시는 이형곤 작가가 장은선 갤러리에서 두번째 여는 전시다. 이형곤은 그동안 개인전 29회와 해외전 및 아트페어, 주요 단체전등 200여회를 참여하며 왕성히 활동 중이다.
대한민국 미술인상, 중국 웨이하이시 문화예술대상 및 일본 동경 BESETO국제예술대상등 다수 수상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과 경인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협 강화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영국 START Art Global Ltd 소속작가, 윤슬전업작가회, KCAA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2.무위의 풍경 Ⅱ-262 72.7x60.6cm 보드에 옻칠, 금분
자현(自現)의 예술, 자연(自然)의 영성, 자유(自由)의 미학..."무위의 풍경Ⅱ의 삼자(三自) 풍경(風景)"
1. 재현(再現)과 표현(表現)을 넘어선 자현(自現)의 영성 예술
-박종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예술은 오랫동안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삼아 그 형태나 색채를 모방하거나 재현해 왔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더 이상 대상을 객관적으로 모방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특히 미술 작업의 시각적 재현은 사진과 영화의 등장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은 원근법을 비롯한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형식주의적 표현을 시도했고, 작가가 주관적으로 대상의 형태를 변용하기도 하고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색채만으로 현실 세계나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창조적 표현을 과감하게 실천했다. 인상주의나 추상표현주의 등을 통해 본격화된 근대 미학의 전환은 대상의 객관적 재현(representation)으로부터 작가의 주관적 표현(expression)으로 변화로 나타났다.
외부 세계를 발견하고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전통적인 예술은 물론, 내면의 관념을 창출하여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근대적인 예술은 모두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을 전제한다. 따라서 자연의 객관적 재현에 충실했던 전통적인 예술이나 작가의 주관적 표현을 감행하는 근대적 예술은 주체의 시선(eye)에 포착되는 사실주의 계열의 예술적 형상화나 객체의 응시(gaze)가 부각되는 인상주의나 형식주의, 추상주의 계열의 예술적 실험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이러한 예술적 시도들에서 예술의 주체와 대상, 작가와 작품과 감상자는 서로 분리된다.
자연의 경관이나 사람의 외모를 묘사하든, 인간 내면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든 간에, 이러한 분리는 현상적 개별자에 대한 형상화를 구현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현상 세계의 개별적 존재자들은 실제로 개별적 차이를 전제로 상호 구별된 채 연계된다. 상호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 것이다. 다른 존재자들로부터 분리된 채 자족적인 존재자는 없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현상적 개별자들은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연기(緣起)적 존재의 네트워크 안에 일시적으로 생멸하는 유한한 존재 양상을 지닌다.
사진: 3.무위의 풍경 Ⅱ-277 130.3x97cm 보드에 옻칠, 금분
주역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측면에서 보면,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하며, 인간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실체는 현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적 개별자의 예술적 형상화가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주체와 대상의 분리, 창작과 작품과 감상의 분리는 예술을 통한 진정한 소통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현상적 개별자 미학의 한계다.
그렇다면 예술을 통한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은 재현과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합일, 창작과 감상의 합일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따라서 차이와 분리를 전제하는 현상적 개별자 미학을 넘어서는 근원적 보편자 미학을 지향해야 한다. 이형곤 작가의 <무위(無爲)의 풍경(風景)> 연작은 대상의 객관적 재현과 주체의 주관적 표현을 넘어서는 ‘자현(自現)의 예술’을 통해 근원적 보편자 미학을 펼친다. 그는 현상적 개별자가 아닌 근원적 보편자를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영성 예술(spiritual art)의 새로운 장을 보여주고 있다.
개별적 차이를 전제로 구분되고 연계되는 현상적 세계는 객관적 물질성과 주관적 정신성, 몸과 마음의 유한한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현상적 개별자를 주제로 삼는 기존의 예술은 그러한 유한한 움직임을 객관적 사물이 보여주는 대로, 혹은 주관적 생각에 따라 보고 싶은 대로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반면, 근원적 보편자를 주제로 삼는 영성 예술에서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현상적 개별자가 궁극적 보편자가 합일되고 현상적 개별자들 간에도 온전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신비’가 저절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영성의 자현(自現)’이라고 할 수 있다.
2. 자연(自然)의 영성이 현현하는 무위(無爲)의 예술적 풍경
영성 예술은 우주 만물이 본래 존재, 즉 자연(自然)이 보편적 영성으로 현현하는 궁극적 보편자의 예술적 형상화다. 이를 위해서는 보편적 근원과 개별적 현상의 합일인 이사무애(理事無碍)와 현상적 개별자 간의 온전한 소통인 사사무애(事事無碍)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물아일체(物我一體)로 표현되었던 대우주와 소우주, 우주와 인간, 주체와 대상의 예술적 합일이 이루어질 때 창작자, 작품, 감상자의 예술적 소통이 가능하고, 모든 현상적 개별자들은 구분은 되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는 연기의 인드라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비의 합일과 온전한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형곤 작가의 <시간의 기억>과 <공간의 상> 연작들이 현상적 차이를 전제하는 수많은 개별자적 존재자들[多]과 근원적인 궁극적 존재[一]가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중중무진(重重無盡)하는 존재의 법계(法界)를 격자(□) 형태의 현상적 개별자들[ego]와 원(○) 형태의 궁극적 존재[the Self]의 관계를 형상화했다면, <떨림과 울림> 연작들은 유한의 형상과 관념을 비우고 무한의 법열(法悅)로 깨어 있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의 의식을 드러내었으며, <무위의 풍경>과 <무위의 풍경2> 연작들에서는 현상세계의 개별적 존재자들이 지닌 유한한 형상을 초월하여 대상을 여의는 무상(無相)과 주체가 사라지는 무아(無我)가 있는 그대로 존재와 의식의 본래진면목을 향유하는 무위(無爲)의 풍경(風景)이 펼쳐진다. 대상과 주체의 분리 작용이 멈추면서 나와 남,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된 자타불이(自他不二)는 자연스레 현상적 개별자의 유한한 환상을 넘어서서 궁극적 보편자의 무한한 실재로 나타난다. 거기에서 영성예술의 신비의 합일과 온전한 소통이 구현된다.
사진: 4.무위의 풍경 Ⅱ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자연(自然)의 영성이 현현하는 무위(無爲)의 예술적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기억>, <공간의 상>, <울림과 떨림> 연작들에서 다(多)에서 일(一) 혹은 유(有)에서 무(無)로, 현상 세계의 개별적 존재자들로부터 보편적인 궁극적 존재로 거슬러 올라가는 깨달음의 삼매(三昧)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생명 에너지의 발산이 압도적인 반면, <무위의 풍경> 연작들에서는 근원적 하나[一]를 현상적 생명의 근원인 히란야가르바의 알이나 일(一)을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은 자연스러운 형상으로 드러내었는데, <무위의 풍경2>에서는 격자나 원은 물론 알이나 일마저도 더욱 간결하면서도 비정형화된 자유로운 형상으로 변주하고 있다.
<무위의 풍경2>에서는 궁극적 깨달음을 향해 용맹정진하며 애쓰는 의도적 움직임이 더 이상 없어져서 뚜렷했던 형상이 자연스러운 여러 가지 변주를 통해 나타나니,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풍경이다. 실제로 먼저 현상 세계의 개별적 존재자들을 구분하던 중중무진의 격자들을 구분하고 상호 연결하던 정형적 틀이 자유롭게 변용되고 있다.
이런 형상화 양식은 김환기의 전면점화에서 먼저 확인된다. 그러나 김환기의 전면점화가 주로 단색의 추상화 경향이 강하고 캔버스를 우주를 의미하는 점면으로 채운 것과는 달리, 이형곤은 다양한 형상과 색채의 동그라미와 네모를 각각 우주의 연기적 법계를 뜻하는 생명의 근원적 존재와 현상 세계의 개별적 존재자들로 나타내면서 양자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또한 그러한 법계의 자현을 수직과 수평을 교직하여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도 개성적이다. 기존 연작에서는 초월적 시선에서 내려다 볼 때 동그란 원을 품고 있는 네모난 격자들이 연이어서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생명의 인드라망 혹은 화엄법계의 매트릭스를 구성하고 있으며, 내재적 시선으로 살펴 볼 때 격자들이 세로로 길게 줄지어 선 모양이 드러나고 있다.
사진: 5무위의 풍경 Ⅱ
그런데 <무위의풍경2>에서는 수평적으로 펼쳐졌던 네모의 격자가 검은 색, 빨간 색, 황금 색으로 수렴 혹은 확산되는 중첩의 양상으로 형상화되기도 하고, 형태와 색채를 달리 하여 일(一)과 합쳐져서 수직적으로 일(一)자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궁극적 보편자의 동그라미와 현상적 개별자의 네모가 한 데 합쳐져서 비정형적 형상으로 가로나 세로의 방식 혹은 수평과 수직의 방식이 교차 대조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동그라미와 네모로 형상화되던 궁극적 보편자와 현상적 개별자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자유로운 형태와 다양한 색체가 중첩되거나 혼합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동그라미나 네모 대신 산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세모 형상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고, 현상적 개별자를 뜻하는 형상이 네모 대신 그릇 모양[‿]으로 변용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변용되는 동그라미, 네모, 세모, 비정형적 형상들은 언제나 알파의 빨간색이나 오메가의 검은색을 배경으로 하여 중앙에 자리잡은 황금색의 적적성성한 깨달음의 빛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현상적 개별자들의 다양한 형상과 색채는 실은 근원적 보편자의 자연스러운 발현인 자현일 뿐이다.
사진: 6무위의 풍경 Ⅱ
3. 보편자가 저절로 현현하는 자유(自由)의 미학
이러한 자현의 예술적 형상화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롬, 추상표현주의, 일본의 모노하와 한국의 단색화 등의 현대 추상미술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현대 미술의 흐름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시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대상과 분리된 색채와 형태가 다양한 서사와 은유와 상징 등이 제거된 채 순수한 추상적 형식을 통해 작가의 주관적 의도가 빚어내는 의미와 내용을 비운다는 점에서 주관적 의도를 비우는 무아와 객관적 대상을 넘어서는 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작가의 개성을 배제하고 사물의 물성(物性)에 대한 관심을 추동하며 특정한 모듈의 패턴을 반복하는 수행적 몸짓을 선보이면서 작가와 작품과 감상자, 예술적 작품과 일상적 사물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삼자의 상호작용을 부각시켰으나, 작가의 개성이 사라지고 작품이 지닌 의미를 거세하면서 해석이나 소통의 양상이 약화되거나 전면적으로 변화되었다.
이와 연관하여 미니멀리즘이 추구한 형태와 색채의 단순화라든가, 단색화가들이 보여준 반복적 몸짓의 수행성 등이 동양의 무위자연 사상과 상통한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이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을 전제한 채 그 경계를 지우려는 노력으로서 마음이 만들어내는 기호작용을 벗어나서 사물 자체를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무위자연에 가까운 듯하지만, 여기서 사물 자체는 보편적 근원자가 아니라 현상적 개별자일 뿐이며, 그것을 표상하는 수행적 몸짓 역시 내용을 거세한 형식의 예술적 창조라고 할 지라도 유상삼매(有相三昧)에 머물거나, 무상삼매(無相三昧)를 지향하지만 부정의 형식에 얽매여서 특정한 패턴의 반복에 불과한 수행적 몸짓의 한계에 갇혀서 진부화의 과정으로 전락할 여지가 있다.
사진: 7.무위의 풍경 Ⅱ
그러나 애쓰는 노력이 있는 한 그것은 무위가 아니라 유위다. 유위가 유지되는 한 존재의 본래성인 자연은 드러나지 않고 유한한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틀 안에 한정되고 고정되기 마련이다. 현대 예술은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고 상징이나 의미를 소통하는 내용 대신 매체의 순수한 특성이나 사물의 고유한 물성을 드러내는 형식에 주목하면서 작가의 개성을 거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을 전제한 채 그 경계를 넘으려고 한 의도적 노력으로서 개별자의 미학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이형곤 작가의 <무위의 풍경 2>는 현상적 개별자가 아니라 존재의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근원을 통찰하는 자연(自然)의 영성, 자현(自現)의 예술, 자유(自由)의 미학으로 구성되는 ‘삼자’(三自)의 보편적 영성 예술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말미암는다.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이 현상적 개별자가 궁극적 보편자임을 자각하는 문이다. 그 문을 열면 작품을 계기로 창작과 수용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 영성 예술이다. 구상을 넘어선 추상은 개별자에 대한 주체의 시선 혹은 객체의 응시에 따르는 재현이나 표현이 아니라, 개별자이자 보편자가 스스로 그리고 저절로 나타나는 현현하는 자현의 예술적 형상화가 역시 개별자이자 보편자인 감상자가 작품을 통해 작가와 공명하는 예술적 향유가 이루어진다.
사진: 8무위의 풍경 Ⅱ
예술적 수행과 실천이 완성되면 더 이상 깨달음의 완성을 향해 애쓰는 유위(有爲)적 수행의 몸짓도 멈추게 마련이듯이, 무위(無爲)의 예술은 자연의 영성이 모든 존재의 의식을 통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자연의 영성은 주관이나 객관의 유위(有爲)인 경관(景觀)이나 경치(景致)가 아니라 궁극적 깨달음이 강렬하게 빛나며 살아 움직이는 무위(無爲)의 풍경(風景)으로 나타난다. 영성 예술은 재현과 표현을 넘어서는 자현(自現)의 형상화를 통해 자연(自然)의 영성이 현현하는 무위자연의 미학이며, 궁극적 보편자가 바로 현상적 개별자인 본연삼매(本然三昧)의 세계인 것이다. -박종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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