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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핵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작성자남성원|작성시간18.11.26|조회수280 목록 댓글 2





리제 마이트너(1878~1968)는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고 어머니는 음악가였는데, 두 분 다 유대인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여성은 14세까지만 공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유일하게 허용된 직업은 여학교 교사였다. 리제는 프랑스어 교사 양성수업을 받았다. 리제가 19세가 되었을 때 여자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법령이 바뀌었다. 리제는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뒤 2년 간 독학으로 1901년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리제는 오스트리아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취직자리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녀는 낮에는 여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밤에는 방사선 실험실의 조수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리제는 두 편의 핵 관련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 덕에 독일 베를린대학의 막스 플랑크 교수가 리제를 지도학생으로 초청했다. 막스는 양자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저명한 물리학자였다. 독일로 간 리제는 물리학 실험실에 일자리를 구하여 생활비를 벌면서 막스로부터 배운 물리학 이론을 실험에 적용하곤 했다.





1907년에는 화학자 오토 한을 만나 함께 방사성 붕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리제는 오토와 궁합이 잘 맞았다. 그 사이 리제는 6년 동안 무보수로 객원연구원 생활을 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리제 팀은 22편의 논문을 학회에 제출하여 호평을 받았다. 대부분의 중요한 실험은 리제가 단독으로 진행했지만 논문의 제1저자는 항상 오토가 차지했다. 외국인이자 여자로서의 설움이었다. 1912년 리제는 막스 플랑크 교수의 조교로 채용되어 생활비에 숨통이 틔었다.


1913년에는 에밀 피셔가 리제를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의 정식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이로써 리제는 오토 한과 동일한 자격으로 공동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연구소에 설치되어 있는 방사성연구부를 함께 운영했다. 리제와 오토는 우라늄이 붕괴하는 여러 단계 가운데 방사성 원소 악티늄의 직전에 존재하는 원소를 찾는 데 집중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토는 군인으로, 리제는 간호사로 복무했다. 리제는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1천 번 이상 엑스선 촬영을 수행하고 전기장비를 수리하고 수술을 도왔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916년, 리제는 먼저 연구실로 돌아와 악티늄 연구를 계속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리제는 드디어 원소기호 91번 프로트악티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주기율표에서 토륨과 우라늄 사이에 비어 있던 자리를 채움으로써 주기율표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에 리제는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에 새로 생긴 물리학연구실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22년에는 베를린대학 교수로 채용되어 강의를 시작했다. 리제는 원자핵에서 나오는 베타선의 스펙트럼 연구에 집중했다. 리제는 해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모든 대학에서 유대인 교수를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교수직에서 해고된 리제는 사설연구기관인 빌헬름 연구소에 남아 핵물리학 연구를 계속했다.


이 무렵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우라늄에 중성자를 계속 충돌시키면 새로운 입자들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리제는 이 현상에 흥미를 느끼고 오토 한과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페르미, 프랑스의 졸리오 퀴리(마리 퀴리의 딸)와 경쟁하면서 새로운 원소를 추출하여 그 특징을 알아내는 데 주력했다. 세 경쟁자는 무거운 새 원소를 찾는 데만 신경을 썼지 우라늄의 원자핵이 둘로 쪼개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1938년 4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리제는 각중에 오스트리아 국민의 신분을 잃게 되었다. 유대인으로서 더욱 신변이 위험해진 것이다. 리제는 덴마크에서 온 두 명의 물리학자를 따라 천신만고 끝에 독일을 탈출했다. 리제는 ‘스톡홀름 물리학연구소’에 일자리를 구했지만, 연구소 책임자인 노벨상 수상자 만네 시그반이 그녀를 싫어하여 연구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다. 59세의 리제는 가로늦게 숨통이 조여 오는 듯한 고통 속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38년 12월, 독일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던 오토 한이 우라늄과 중성자가 충돌하여 생긴 입자들 중 하나가 56번 원소인 바륨처럼 보인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자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어서 리제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리제는 원자의 세계는 상굿도 불가사의한 영역이므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실험결과대로 믿는 게 옳다는 답장을 보냈다. 오토 한이 실험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자 비슷한 연구를 진행하던 물리학자들이 원자핵이 갈라지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바로 핵분열 반응이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핵분열 반응은 투입된 에너지보다 방출되는 에너지의 양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거의 동시에 막대한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무기의 등장을 예측했다. 미국 정부는 최초로 핵분열 현상을 예측한 리제를 맨해튼 프로젝트(미국의 비밀 핵폭탄 개발계획)에 초대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리제는 대량 살상무기 개발에 참여할 수 없어 이를 거절했다. 덴마크가 독일에 점령되자 리제는 간신히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리제는 나치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으며, 왜국에서는 핵폭발이 일어나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1945년 노벨상위원회는 핵분열 현상을 발견한 리제를 물리학상 후보로 선정했지만, 스톡홀름 물리학연구소장 만네 시그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그 공적은 고스란히 오토 한에게 돌아가 1946년 그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리제는 수상식장에 참석하여 동료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는데, 오토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업적에 리제의 연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여 그녀에게 일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1960년 리제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기 시작했다. 반평생을 물리학 연구에 매달려온 그녀로서 노벨상에 대한 미련은 남았지만, 실의에 빠지거나 누구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1966년 미국원자력위원회는 리제 마이트너에게 엘리코 페르미상을 수여했다. 리제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어느 정도 위안을 받은 리제는 2년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1982년 독일의 과학자들이 비스무스와 철을 융합하여 가장 무거운 109번 금속원소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리제 마이트너의 핵분열 물리학 연구에 대한 공적을 기려 새 원소의 이름을 마이트너륨이라고 붙였다. 비록 사후였지만 노벨상 수상보다 더 큰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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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용갑 | 작성시간 18.11.26 확실히 유대인은 머리가 좋은가 보네
    여자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학자가 되다니 존경 스럽네
  • 작성자기원섭 | 작성시간 18.11.27 나도 한때 과학자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울 엄마 죽는 바람에, 만사 도루묵이 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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