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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코르시카 독립투쟁

작성자남성원|작성시간19.06.11|조회수258 목록 댓글 2





파리 교외의 그르넬평원에 자리잡고 있는 프랑스육군사관학교는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하루 세 끼 식사시간이 되면, 예복을 차려입은 시종들이 126명의 생도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정중하게 최고급 요리를 대접했다. 매년 20만 프랑의 기여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입학한 왕족 및 귀족 자제들은 나폴레옹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장학생으로 입학한 나폴레옹은 오히려 실력도 형편없는 그들을 만만하게 보았다.


나폴레옹은 생도들을 신사적으로 대우해주는 사관학교에서 최고 실력을 갖춘 동료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훌륭한 군인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자신의 처지를 매우 만족스럽게 여겼다. 나폴레옹은 1년 이내에 사관학교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포병학교에 입학해서 장교로 임관될 목표를 세웠다. 1785년 9월 28일, 나폴레옹은 계획했던 대로 입학한 지 10개월 만에 필수과목을 모두 이수하고 포병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예비소위로 임관되었다.





1785년 11월 1일, 나폴레옹은 동료들과 함께 라페르 포병연대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은 중령은 ‘무적의 포병연대’를 강조하며 유독 나폴레옹을 반겼다. 나폴레옹은 훈련을 비롯한 정규 일과는 물론 독서도 열심히 했다. 1786년 1월 1일, 나폴레옹은 정식 포병소위에 임관되었다. 나폴레옹은 최선을 다해 경계근무를 서고 포대진지를 구축하고 군사작전을 수행했다. 나폴레옹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대포 및 곡사포 사격술과 전술 공부에 몰두했다.


1789년 4월 1일, 연대에서 10여㎞ 떨어져 있는 산악지대 주민들이 학살사건을 일으켜 상부에서 출동명령이 내려왔다. 프랑스 전역에는 대혁명 전야의 불안한 기운이 팽배해 있었다. 나폴레옹도 왕정을 뒤엎고 공화정을 수립할 혁명의 필요성을 지지했다. 마침 대위와 중위들이 모두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소위는 임시 중대장에 임명되어 출동했다. 3개 중대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소요가 가라앉은 뒤였다. 나폴레옹은 한 저택을 접수하여 중대본부를 설치하고 백전노장처럼 신속하게 부대배치를 완료했다. 나폴레옹은 어릴 때부터 수많은 전쟁사를 읽어왔기 때문에 중대 지휘 정도의 작전 수행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나폴레옹은 6월이 되어서야 사태를 완전히 진압하고 부대로 복귀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역사를 읽을 때마다 패망한 조국에 대한 연민과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1789년 7월 19일, 하층 노동자들이 부대 인근에 있는 옥손시의 시장을 감금하고 건물 및 토지대장을 불살랐다.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약탈도 자행되고 있었다. 폭동이었다. 나폴레옹은 출동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7월 14일에 바스티유 감옥이 군중들에게 점령당했으며, 감독관은 목이 잘리고 간수들은 폭도들과 함께 바스티유의 벽에 포격을 가하여 감옥을 파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것이다. 나폴레옹은 진압 책임자로 임명되어 중대를 이끌고 옥손시의 폭동을 진압했다.


8월 4일, 프랑스왕국은 민중의 압력을 받아들여 귀족들의 특권을 모두 폐지했다. 이로써 수 세기에 걸쳐 서민들을 수탈하던 야만적인 봉건제도가 일시에 무너졌으며, 범죄적인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약하고 부패해 있던 귀족들은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8월 16일에는 라페르연대 사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연대장 관사로 몰려가 연대장을 협박하여 연대 운영자금을 강탈해 갔다. 반군은 그 돈으로 술을 잔뜩 사 마시고 만만한 장교들을 골라 모욕을 주고 구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는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이 사태가 못마땅했다. 혁명을 통해 서민들에게 자유를 준 것은 선(善)을 통한 일보 전진을 위한 것이었지 폭동과 방종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타락이자 폭거일 뿐이었다.





1789년 9월 25일, 나폴레옹은 휴가를 얻어 코르시카로 귀국했다. 코르시카人들은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예 독립 의지조차 없었다. 나폴레옹은 크게 낙담했다. 다음날부터 나폴레옹은 고향마을인 아작시오는 물론 인근 마을까지 돌아다니며 코르시카가 프랑스의 지배와 탄압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형 조제프도 다른 곳을 찾아가 연설한 뒤 저녁이면 집에 모여 앉아 그날의 성과를 토론하고 다음날 계획을 세웠다. 시간이 갈수록 지지자가 늘어나 나폴레옹의 연설에 큰 호응을 보였다. 일부 주민들은 폭동을 주장했지만 나폴레옹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총독에게는 대포와 3천 명의 군대가 있다. 잘못하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희생만 초래한다.


10월 31일, 나폴레옹은 애국주의자들을 소집하여 미리 준비한 선언문을 배포했다. 나폴레옹은 선언문을 통해 총독에게 코르시카 주민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프랑스 정부의 정책을 단호하게 반대한다며, 코르시카를 해방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아작시오 주민들은 나폴레옹의 주장에 열렬하게 환호하면서 참석자 전원이 선언문에 서명했다. 나폴레옹은 수도 바스티아로 찾아가 시민들과 주둔군에게 삼색기를 나눠주고 시내를 돌면서 주민들에게 무장하고 대기하도록 촉구했다. 이어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수백 명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조직했다.





11월 5일, 500여 명의 민병대가 성당으로 집결했다. 식민군은 성당을 포위한 채 먼저 발포를 시작했다. 식민군과 민병대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식민군 2명이 죽고 민병대 몇 명이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성당을 포위한 식민군이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다. 식민군이 차츰 밀리면서 패색이 짙어지자 바랭 총독은 민병대에 항복하고 대포를 비롯한 무기를 모두 내주었다. 나폴레옹은 식민군을 지휘하던 대령이 코르시카를 떠나는 조건으로 독립투쟁을 끝냈다. 몇 주 뒤 프랑스 혁명정부는 코르시카를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일개 주로 선포했다. 다른 지역 주민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게 된 코르시카人들은 열광했다. 나폴레옹의 나이 20년 5개월 때다. 나폴레옹은 마침내 프랑스 국민이 되어 새로운 조국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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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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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기원섭 | 작성시간 19.06.11 그 시대,
    왜 민병대가 생기고 반란군이 생겼을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대목일세.
    참 재미있게,
    또 감동적으로 읽고 있네.
    감사 감사
  • 작성자김종태 | 작성시간 19.06.11 우리들 꼬락서니가 섭이말따나 민병대 생기게 생깃어!~
    어제 청와대 에서 꼬랑지는 내렸드만,.....
    좌편은 무슨수를 써서도 정권 말랑히 안 내줄라할꾸로???
    나폴레옹 때나 지금이나 시정ㄹ만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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