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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나폴레옹」 제3권

작성자남성원|작성시간19.07.18|조회수133 목록 댓글 2


독일 점령





1804년 12월 4일, 파리에서는 사흘째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축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프랑스의 속국인 스페인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스웨덴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전쟁이 한 발 더 성큼 다가온 것이다. 12월 5일, 나폴레옹은 전군의 장군들과 장교들을 튈르리宮으로 불러 한 명씩 충성서약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그들의 이름과 무훈과 장단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탈리아와 이집트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로리스통 장군과 악수를 나누며 조언했다.

“장군. 세 가지 사항을 명심하게. 첫째, 병력의 단결, 둘째, 민첩한 작전, 셋째, 영광스럽게 목숨을 걸겠다는 단호한 결심일세. 이 세 가지 원칙만 명심하면 승리는 자네의 것일세.”


1805년 3월 17일, 이탈리아 의회는 나폴레옹을 이탈리아 왕으로 선포했다. 4월 5일,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왕위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밀라노로 향하면서도 계속 해군장관과 각 제독들에게 보낼 훈령을 구술하고 있었다. 프랑스 함대들이 영국 함대를 서인도제도로 유인한 뒤 전속력으로 유럽으로 돌아와 영국 공격에 합세한다면 전쟁을 쉽게 승리로 이끌 수 있을 터였다. 그 사이에 브레스트에서 출항한 함대가 몇 척 남지 않은 불영해협의 영국 함대를 격멸하고, 불로뉴에서 대기하고 있던 함대가 영국을 공격한다면 6월 15일 이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터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모든 해전을 지휘할 수만 있다면 단 이틀 만에 영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해전에 관한 한 그는 문외한이었다.





1805년 5월 26일, 나폴레옹은 밀라노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을 통해 이탈리아왕국의 왕위에 취임했다. 이어 조세핀의 아들이자 이집트 원정군 전우인 으젠 드 보아르네를 이탈리아의 부왕(副王)에 임명했다. 으젠은 나폴레옹을 잘 이해하고 따르는 23세의 믿음직스럽고 현명한 청년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왕의 권능으로 리구리아공화국과 제노바를 프랑스에 합병시킨 뒤, 루카공화국을 공국으로 바꾸어 이미 피옴비노를 통치하고 있는 유능한 누이 엘리자에게 넘겨주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점령했던 지역과 요새를 다니며 군사들을 사열한 뒤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했다. 나폴레옹은 1805년 6월 하순까지 제노바에 머물렀다.


1805년 6월 15일까지 영국을 점령하려던 나폴레옹의 계획은 시작부터 차질이 왔다. 나폴레옹의 의도와 달리 영국 함대는 서인도제도로 향하는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유인책을 미리 눈치 챈 것인지 전술적 판단인지 알 수 없었다. 제독들로부터도 시원한 보고가 없었다. 프랑스의 각 함대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넬슨 함대의 위치를 계속 파악하고 있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는 74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고 영국은 54척에 불과하다. 그런데 뭘 망설인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자신이 신속하게 모든 현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계속 보고하라는 서신을 각지의 제독들에게 발송했다.





대륙의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미 영국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오스트리아도 영국과 손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 망명을 조건으로 사면해준 모로 장군은 스페인에 머물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차르를 위해 러시아군의 선두에 설 것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다. 국내에서는 재계 인사들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승산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폴레옹은 겨우 돈이나 주무르고 있는 인간들이 뭘 안단 말이냐며 재계 인사들의 반대의견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지만, 전쟁은 결국 돈으로 치르는 게임이다. 전쟁에 지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도 재계 인사들이다. 나폴레옹은 대법관 캉바세레스를 불러 재계 인사들을 설득하라고 지시했지만, 캉바세레스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지시를 받고 물러갔다.


1805년 8월 10일 오전 5시,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불로뉴로 떠났다. 불로뉴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훈련을 계속 시켰다. 요새와 전함 사열도 계속했다.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함대만 도착하면 도버에서 13㎞ 떨어져 있는 영국의 딜에 곧장 상륙하리라. 거기서 런던까지는 2~3일 거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빌뇌브는 스페인의 카디스항에 숨어 신병을 핑계로 황제의 명령에 불응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저녁마다 모든 장교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열고 영국 원정과 관련된 의견을 들었다. 작전이 성공하여 영국만 끝장내버리면, 자신은 유럽 전체의 주인이 되어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킬 결심이었다.





8월 13일, 나폴레옹은 불로뉴의 막사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육군 원수들에게 내릴 명령서를 구술했다. 18만 6천 명의 병력을 7개 군단으로 나누어 독일로 진군하라는 명령이었다. 때가 되면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2만 5천 병력도 합류할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독일에서 전투를 해본 적은 없지만 자신은 포병장군 시절보다 모든 면에서 전투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장군 보나파르트보다 황제 나폴레옹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일 터였다. 나폴레옹은 불로뉴의 장병들에게도 독일부터 먼저 공격한다는 포고령을 선포했다.


1805년 9월 26일,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도시인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다. 이튿날 새벽, 나폴레옹은 백마 위에 올라 장군들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는 켈 다리로 달려갔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장병들은 선두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는 나폴레옹이 지나갈 때마다 소리 높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쳐댔다. 장군들을 만나 작전계획을 재확인한 나폴레옹은 말을 탄 채 몇 시간 동안 비를 쫄딱 맞으며 6만 장병이 다리를 다 건너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장병들은 나폴레옹을 향해 열렬하게 만세를 외치며 전장으로 향해 진군해갔다.





첫 전투는 다뉴브강의 오른쪽 기슭에 있는 베르팅겐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 1개 사단이 오스트리아군 3만 명에게 포위되어 항복하기 직전, 뮈라 원수가 이끄는 기병대가 달려들어 간신히 구출했다. 뮈라가 협조를 꺼려서 발생한 위험이었다. 원수들은 서로 전공을 세우기 위해 다른 부대와 협조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빗속을 뚫고 전장으로 달려가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그제야 전군에 활기가 돌면서 사방에서 승전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다뉴브강을 건넌 뒤 강을 따라 전진했다. 10월 14일에는 장병들의 선두에 서서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전진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이 심한 엘힝겐수도원을 점령하여 부상병들을 모아 치료하도록 조치한 뒤, 미헬스베르크 고지를 향해 말을 달렸다. 이윽고 프랑스군의 포병대가 나타나자 나폴레옹은 직접 적진을 조준한 뒤 포사격을 실시했다. 1805년 10월 20일, 드디어 오스트리아군이 항복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 3만 명이 차례로 무기를 내려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가운데는 20명의 장군들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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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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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기원섭 | 작성시간 19.07.18 전쟁...
    도대체 뭘 얻고 싶어서 그럴까...
    의좋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 작성자김용갑 | 작성시간 19.07.18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는 멋진 모습 에 그밑의 수하들의 목숨을 얼마나
    읽고 일반백성들 모두얼마나 피해를 잎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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