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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숙종의 역사 바로세우기

작성자남성원|작성시간20.01.13|조회수825 목록 댓글 2





조선 제19대 왕 숙종(1661~1720)은 자신의 서자인 제21대 왕 영조(재위 51년 7개월)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 재위(45년 10개월. 1674~1720)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교묘한 붕당정치로 수많은 신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고, 장희빈의 농단으로 왕실과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며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반면 즉위 초반부터 남다른 관용으로 훌륭한 치적도 많이 남겼다.


숙종 6년(1680) 12월 22일, 강화유수 이선이 김종서‧황보인‧사육신 등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사면해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수양대군이 보위를 찬탈하기 위해 역적으로 몰아 죽인 인물들이었으니 그때까지 공식적으로는 모두 역적의 신분이었다. 수양의 뒤를 이은 역대 임금 대까지 신하들이 감히 신원 얘기를 꺼낼 수 없었던 이유였다. 선대왕 때였으면 강화유수는 즉각 치도곤을 당했겠지만 숙종은 관대한 비답을 내렸다. 공식적으로 신원을 해줄 수는 없지만 사림에서 그들을 존모(尊慕)하는 일은 용납하겠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재위 17년(1691) 6월 4일, 숙종이 열무(閱武. 군사훈련 사열)를 위해 노량진을 지나다가 다 허물어진 사육신의 묘를 보게 되었다. 숙종은 11년 전 강화유수가 사육신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일을 떠올리며 그 자리에서 도승지를 불러 사육신을 즉시 복관(復官. 생전의 관직을 되살려줌)시키고 묘소를 정비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그러나 승지들이 거세게 반대하는 바람에 한발 물러났다. 6개월이 지난 12월 6일, 숙종은 예조판서를 불러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묘소를 정비하고 사당을 지어 제를 올리도록 명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종서와 황보인은 안평대군 편에 서서 수양대군을 적대했다는 이유로 복관시키지 않았다. 대신 후손들에게 과거의 길을 열어주었다. 김종서와 황보인은 숙종의 서자인 영조 때(영조 22년) 가서야 복관되었다.


이듬해 7월 21일, 만 20세에 이른 숙종은 경연(經筵) 자리에서 자진하여 노산군 얘기를 꺼냈다. 노산군은 수양대군이 보위를 찬탈하기 위해 왕(단종)을 강봉(降封)시킨 호칭이었으니, 신하들이 차마 꺼낼 수 없는 얘기를 숙종이 먼저 거론한 것이다. 단종 복위의 서막이었다.

“정비(正妃) 소생의 왕자는 모두 대군이라 칭하니 노산군도 응당 노산대군이 되어야 할 것 아니겠소? 이 문제를 공론화하도록 하시오.”

6일 후인 7월 27일, 영의정 김수항은 대신들과 합의를 거쳐 노산군에게 노산대군을 추증하고, 아울러 방원에게 살해당한 태조의 7남 방번과 8남 방석에게도 각각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을 추증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던 숙종은 즉각 이를 윤허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 9월 30일, 현감을 지낸 신규가 노산대군에게 왕호를 회복시켜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수양대군의 찬탈이 불법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얘기라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영의정에게 공론화시키도록 명했다. 기나긴 논란 끝에 10월 23일 숙종은 종친과 문무백관 491인을 대전으로 불러 모아놓고 노산대군 복위 문제를 공론에 붙였다. 종친들은 모두 수양대군의 후손이요 문무백관들은 수양의 찬탈에 앞장선 공신의 후손이거나 그에게 녹을 받던 신하의 후손이었으니 노산대군 편은 아무도 없는 셈이었다. 그러나 24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다들 수양대군의 부당한 찬탈을 잘 알고 있었다. 갑론을박이 오갔지만 극력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긴 논의를 묵묵히 듣고 있던 숙종은 종친들과 신료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견해를 밝혔다.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었으나 경들의 의견을 듣고싶었을 뿐이오.”

그리고 이튿날 어전회의에서 노산대군을 왕으로 추복(追復. 한번 빼앗았던 위호를 그 사람 사후에 회복시킴)하라고 명했다.

“세조께서 선위를 받으신 초기에는 노산대군을 존봉하여 상왕으로 삼았고, 이어 상왕이 창경궁에 임어하실 때 세 번이나 문안의 예를 행하셨다. 마지막에 내린 처사는 본의가 아니라 사육신으로 인해 빚어진 불행한 사태였다. 이제라도 노산대군을 추복하면 세조의 성덕도 더욱 밝아질 것이다. 지난날 신규의 상소를 받고 크게 깨우친 바 있었는데, 지금 추복하지 않는다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는가. 예조에서는 속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참으로 현명하고 명쾌한 논리였다.





정승과 대신들을 비롯한 모든 당상관들이 모여 논의한 끝에 숙종 24년(1698) 11월 16일 노산대군의 묘호는 단종으로, 능호는 장릉으로 정하여 숙종의 윤허를 받았다. 영월에 버려져 있던 노산군의 허물어진 묘도 위엄 있는 왕릉으로 단장하여 매년 기일에 제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숙종 30년(1704) 8월 5일에는 단종의 실록인 『노산군일기』도 『단종대왕실록』으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단종은 완전무결하게 복위되었다.


숙종이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 빈 강씨의 신원(伸寃) 문제를 떠올린 것은 죽음을 2년 앞둔 재위 44년(1718) 3월이었다. 반란을 일으켜 광해왕의 보위를 찬탈한 인조는 소현세자가 자신의 보위를 넘보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이기지 못해 세자를 독살※한 뒤, 소현세자 빈 강씨마저 폐위 후 살해했었다. 숙종이 강빈의 신원을 계획한 직접적인 계기는 이명한이 지은 강빈의 부친 강석기의 문집을 읽고서였다. 문집에는 강석기가 매우 훌륭한 재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는 종조부인 소현세자의 사당을 바라보며 어제시(御製詩) 한 수를 짓기도 했었다. 4월 4일, 숙종은 예조판서를 불러 강빈의 시호를 회복시키고 사당에 위패를 모시도록 명했다. 그리고 경건한 조문을 내려 억울하게 사사당한 종조모의 혼백을 달랬다.





※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은 순전히 용렬한 성품 탓이었다. 인조는 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7년 9개월 만에 풀려나 귀국한 뒤부터 끊임없이 세자를 시기하고 의심했다. 세자는 청나라 황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어 청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유창한 여진어로 대화를 나누며 인조의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이에 인조는 청나라 황실에서 자신을 쫓아내고 세자를 보위에 올릴까 두려워 자신보다 인품이 훌륭하고 모든 면에서 실력이 뛰어난 세자를 독살했던 것이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부인이 남긴 증언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소현세자가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세자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다.


소현세자 빈 강씨 또한 세자 못잖은 인재였다. 그녀는 청나라 황실로부터 유배지인 심양 교외에 대규모 경작지를 하사받아 만주인들이 경악할 만큼 엄청난 소출을 올렸다. 강빈은 농작물을 팔아 해마다 경작지를 늘려갔으며, 그때마다 조선에서 잡혀간 포로들을 사들여 농사일을 시켰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강빈은 모범적인 포로들에게 두둑한 포상금을 주어 귀국시켰다. 이를 전해들은 인조는 질투로 치를 떨다가, 결국 세자를 먼저 독살한 뒤 강빈도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살해했던 것이다.


이한우 지음 「조선사 진검승부」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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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용갑 | 작성시간 20.01.13 숙종 임금은 그런대로 정사를 잘 이끌고 재위기간도 긴임금이네
    서오릉에 일년에 한번은
    들러 릉 주위를 산책을
    한다네
  • 작성자기원섭 | 작성시간 20.01.13 신원(伸寃)
    그런 역사적 사례들이 있어,
    지금도 그러는 모양이구마는..
    죄형법정주의니
    일사부재리니
    공소시효니 하는 형법의 장치들이 왜 있는지를 도통 모르는 자들이,
    사법체계를 감정적으로 마구 뒤흔들고...
    이게,
    법치 나라냐?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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