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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종로의 두 그림자

작성자김창현|작성시간26.06.07|조회수39 목록 댓글 0

 
[단편]  종로의 두 그림자
 
1
종로의 낡은 호프집, 거품이 잦아든 맥주잔이 툭 부딪쳤다. 쉰 해 남짓한 세월이 부딪쳐 내는 둔탁한 파음 같았다.
 
“그 개자식…….”
 
은수가 이를 갈았다. 50대를 훌쩍 넘긴 얼굴엔 여태 풀리지 않은 옹이가 박혀 있었다. 영주는 그런 사촌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수가 아비에게 버림받고 극빈에 시달리며 큰집과 연락이 끊겼을 때, 
 
영주 역시 친엄마에게 버림받고 엄마는 행방을 감췄다. 
 
사촌이면서도 서로의 생사조차 모른 채 흘러간 반세기의 시차. 지난달 종로 한복판에서 기적처럼 마주치기 전까지, 두 사람에겐 가끔 닿는 전화가 전부였다.
 
 
2
은수의 유년은 살을 에는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은수가 두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새 여자와 딴살림을 차렸고, 어머니는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며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견뎠다.
 
결국 알거지로 길바닥에 내던져진 모자. 척추결핵으로 등이 굽은 어머니는 시장 바닥에 좌판을 폈다. 은수의 아비는 버젓이 살아있었으나 그들의 하늘에 햇볕은 없었다.
 
3
반면 영주는 아버지의 두터운 사랑 속에서 자랐다. 여섯 살 때 친엄마가 집을 나갔지만, 아버지는 재혼 후에도 상처받지 않도록 지독히 애썼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 손으로 데려온 짝과 결혼할 때도 아버지의 축복이 함께했다.
 
“언니, 난 아빠가 나를 온전히 사랑해 준 줄만 알았어. 그래서 늘 당당했어.”
 
영주가 말끝을 흐렸다. 은수의 처절한 과거 앞에 목이 메었다.
 
4
은수는 성실한 남편을 만나 마침내 평온한 가정을 일구었다. 한을 품고 공부시킨 딸은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안락함이 찾아왔을 때, 오직 딸 하나만 바라보며 평생 고생했던 어머니는 2년 전 끝내 하늘로 떠났다.
 
반대로 마냥 행복할 줄 알았던 영주의 삶은 스무 살 이후 발병한 조현병으로 균열이 갔다. 
 
판단력과 분별력을 잃어가는 줄도 모른 채, 영주는 동네 이웃들에게 돈을 쓰며 그들의 '호구'가 되었다. 
 
뒤늦게 정신과 치료를 받고 후회했으나 이미 삶은 망가진 뒤였다.
 
5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은 진작 식어있었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이혼여인 친엄마에게 버림받은 딸’이라는 영주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이 준 넉넉한 생활비로 살림을 엉망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영주가 그저 눈에 가시였다.
 
병은 영주를 고립시켰다. 남편은 토요일 저녁에만 들러 밤새 게임만 하다 사라지는 이방인이 되었지만, 판단력을 잃은 영주는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영주가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시들어가는 동안, 남편과 시어머니는 다른 여인과의 삶을 은밀히 합작하고 있었다.
 
남편은 이미 딸 하나를 둔 중국인 여자와 딴살림을 차린 지 10년이 지난 상태였다. 뒤를 밟은 영주의 친정엄마에 의해 모든 진실이 폭로되었다.
 
 
# 6
"세상이 참 공평하지가 않다, 그치?”
 
은수가 씁쓸하게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내 아버지는 개자식이었고, 네 아버지는 성자였는데…… 
 
결국 우리는 둘 다 아비들이 남긴 상처를 핥고 있네.”
 
영주는 대답 대신 언니의 거친 손을 꼭 쥐었다. 
 
자식을 버려 평생의 한을 남긴 아비와, 
 
자식을 지켰으나 자식의 마음속 병까지는 막아주지 못한 아비.
 
“언니, 그래도 우리 딸들 생각해서 열심히 살자. 지나간 일은 다 묻어두고.”
 
“그래. 지독한 세월도 살아냈는데 남은 날들이야 못 살겠냐. 열심히 살자, 우리.”
 
가게를 나선 두 사람 위로 종로의 달이 밝았다. 누구에게는 시리고 누구에게는 따스했을 달빛 아래로, 이제는 같은 속도로 걸어가는 두 여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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