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친구야, 평안하시게ㅡ
ㅡ 남겨진 자의 인사 ㅡ
2026년 6월 18일 오후 2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았다.
고인의 둘째 따님이었다.
"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세요. 내 번호는 아버지께 있어."
그 한마디가 따뜻하게 전해졌던지, 그 둘째 따님은 아버지의 임종직후 곧바로 부음을 알려 주었다.
다음 날인 6월 19일, 점심 무렵 천천히 준비를 하고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으로 조문길을 나섰다.
강동구청역에 내려 전철에서 나오는데 고회장이 전화를 했다. "선유도 친구에게 들려 김박사와 저녁 여덟 시쯤 함께 자리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아직 세 시도 안 되었으니 김박사 업무가 끝날 때까지는 두세 시간이 비어 있다.
점심도 거른 터라 평소 같으면 저혈당 증세가 왔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날은 긴 시간 뭣을 좀 먹고 싶었지만 그런 기운조차 없었다.
김박사가 운전하는 벤츠를 타고 퇴근길이라 꼬리를 물고 꽉찬 올림픽 대로로 나섰다.
빈소에 들어서니 고인의 세 딸이 나와 맞아주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숙모님인가, 친척 어르신이려니 했다.
김 박사와 함께 빈소에 조문을 마치고 상주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오는데 그분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딸들에게 물었다.
"저분은 누구신가?"
"우리 어머니예요."
그때까지도 나는 어리둥절했다.
'누구의 어머니란 말인가?'
그분이 미망인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리는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내 머릿속에는 30여 년 전, 단정히 머리를 손질하고 곱고 단아한 젊은 시절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나는 친구 부인만 늙었다고 생각했지, 정작 나 자신도 그만큼 늙었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세월은 남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정례씨! 내가 김창현입니다."
"내 이름을 다 아세요?"
"그럼요. 혹시… 고추장 단지 이야기하면 기억나실까요?"
부인께서 치매를 앓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기에 오래전 기억 하나에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
잠시 후 그분이 말씀하셨다.
"아… 생각나요. 그랬군요."
반가움보다 당혹감이 먼저 밀려왔다.
"어째… 이렇게 많이 늙으셨네요."
그 말은 사실 그분에게 한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하늘로 떠난 이 친구가 출처를 알 수 없는 고추장 단지 하나를 집에 들고 들어간 적이 있었던가 보다.
친구는 긴장한 채 자세한 설명도 없이 말했다.
"집사람이 네게 전화할지도 몰라. 혹시 물으면 네가 준 거라고 해."
보름쯤 지나 정말로 친구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여상스레 대답했다.
"우리 여동생이 고추장을 참 맛있게 담급니다. 맛이 좋아 조금 나눠 줬습니다."
그 작은 일 하나가 세월을 건너 치매 속에서도 기억 한 조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친구는 하늘나라로 갔다.
부인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얼마나 늙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멍청한 영감이 되어 있다.
장례식장을 나서며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형수님, 저 김창현입니다. 다음에는 꼭 기억해 주세요."
아들, 딸, 사위들이 모두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웃음 뒤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오래 남았다.
여든의 나이에 하늘로 떠난 친구.
조금 이른 듯도 하지만, 어쩌면 누릴 것 다 누리고 떠난 명예스런 퇴역인지도 모른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문득 깨닫는다.
세월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남겨진 우리는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살아야 한다.
건강할 수 있을 때 건강하고, 만날 수 있을 때 만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한다.
나 역시 남은 날들을 이웃과 소통하며, 사람을 아끼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살고 싶다.
그것이 먼저 떠난 친구가 내게 남긴 마지막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남겨진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조용한 당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