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강백 작
등장인물:
남자
여자
하인
- 작가 노트 -
이 작품은 응접실, 또는 아담한 소극장 같은 곳, 그런 실내에서 공연하기 알맞도록 썼다. 음악으로 비교한다면 실내악같은 것이다. 무대를 따로 만들 필요도 있지않고 별다른 조명이나 효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다. 이 극중의 하인은 그 사람들을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잠시 모자라든가 구두, 넥타이 등을 빌려야 한다. 이 빌린 물건들을 단순히 소도구로 응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 작품을 검토하면 알겠으나 이 잠시 빌렸다가 되돌려 준다는 것엔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고 이 연극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하인, 그는 빌린 물건들로 한 남자를 치장한다. 구색이 맞지 않고 엉뚱한 다른 물건들로 남자를 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부자처럼 보이게 된다.
남자, 그는 의자를 뒤로 제껴 앉았는데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이야기 책을 읽기 시작한다.
하인은 그 남자의 곁에 부동자세로 선다. 그의 손엔 거의 쟁반만큼이나 커다란 회중시계가 들려져 있는데 실제로 하인은 가끔 그것을 쟁반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몹시 꼼꼼하게 시간을 재는 그의 모습은 꼭 그럴필요는 없겠으나 무뚝뚝하고 건장했으면 한다.
[남자] (이야기 책을 낭독한다)
옛날에, 옛날에, 한 사기꾼이 살고 있었읍니다. 그는 젊고 잘생겼으나 땡전 한 잎 없는 빈털터리였읍니다. 어느날 그는 외로워졌으므로 갑자기 결혼하고 싶어졌읍니다. 누구나 젊음의 한 시기엔 외로원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구나 결혼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 사기꾼에겐 엄청한 고민이 있었더랬읍니다. 그 고민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처녀가, 자기같은 빈털터리 남자와 결혼해 줄 리 있겠읍니까? 없읍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몹시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읍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구. 그런 기분은 좋지 않읍니다. 정신에도, 몸에도, 건강상 안 좋습니다. 빨리 심호흡을 해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젊은 사기꾼도 심호흡을 했읍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한탄하지 말자!
근심걱정도 말고!
곤란하면 운명에 맡겨 보리자!
지금의 한때 푸짐히 즐기되
지나간 옛날은 생각지 말자.
슬프게 보여도 무슨 일이나
그대의 행복이 되거늘
모든건 신의 뜻
신의 뜻을 따라 해보자!
그는 온종일 돌아다녔읍니다. 정원이 달린 집과 훌륭한 옷과 그리고 그 밖에 부자로 보일수 있는 여러가지 물건들을 빌리러 다닌 것입니다.
젊은이의 아름다움에 행운이 있어라!
신께서 정하신 바에 행운있어라!
마침내 그 젊은 사기꾼의 소망은 이루어졌읍니다. 정원이 딸린 최고급 저택을 빌릴수 있엇으며, 모자와 넥타이, 호사스런 의복, 그리고 이 건장한 하인까지 빌렸던 것읍니다. 단, 조건이 있었읍니다. 빌린 물건마다엔 사용할 수 있는 시간적 제약이 붙었읍니다. 이 저택은 사십오분 동안만 그가 주인이며 다음엔 되돌려줘야 합니다. 넥타이는 이십팔분, 모자는 십구분 오십초, 그밖에 다른 물건에도 제각기 정해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사기꾼은 매우 만족했읍니다. 그래서 즉시 여성잡지를 뒤져 사교란에 주소를 낸 여자에게 전보를 쳤읍니다. 여자로부터 즉각 답신이 왔읍니다. 맞선을 볼 의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이쪽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습니다.
(혼잣말처럼) 왜 아직 안온담?
(다시 책을 낭독한다) 오겠다 약속한 시간이 벌써 지났읍니다.
(하인, 시계를 본 채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친다)
딱 오분 지났읍니다. 그는 초조해 졌읍니다. 책을 읽어 마음을 달래 보려 했읍니다만.
(하인, 아무말 없이 책을 빼앗아 버린다. 감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계적인 동작이다. 이극의 마지막까지 하인의 동작은 그러하다. 남자가 항의하려 하자 하인은 무뚝뚝하게 자기의 회중시계를 내밀어 보일 뿐이다. 그리고는 남자가 미처 수긍하기도 전에 돌아서더니 빼앗은 물건을 가지고 나간다.
잠시후, 하인은 돌아와 남자 곁에 서서 부동자세를 취한다.)
여봐, 자네는 인정사정도 없긴가?
[하인] (묵묵부답)
[남자] 그래? 아참, 자넨 말을 않는다며? 자네 주인께서도 그러시더군.
"빌려는 드리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는 마십시요. 이 하인은 절대 대답하지 않습니다."
난 그걸 잊을 뻔했네. 그러나 저러나 웬일이야?
(하인의 회중시계를 들여다 본다)
이제 십분째 지나가구 있어. 황금같은 내 인생이 이 꼴루 그냥 허무하게 지나가다니 안타깝지 뭔가?
(남자,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모르겠다는듯 낭패한 표정으로 관객석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왔다갔다 한다. 남자, 한 여성관객에게 말은 건다. 언뜻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듯 미소를 짓고 있다)
하긴--- 그런지도 몰라요. 여자란 그렇다면서요? 이쁘게 보이려구, 일부러 약속시간보다 오분쯤은 늦는다죠?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굉장히 미인인가? 그러니까 두 곱이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니겠어요? 만약 온다는 그 여자가 당신처럼 어여쁘시다면야 이야긴 퍽 달라지죠. 십분아니라 난 이십분도 기다릴 수 있다, 이겁니다.
(남자, 다시 자기의자에 돌아와 앉는다. 초조해서 옷을 매만지고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한다. 결국 그는 모자를 벗어 탁상위에 놓고 벌떡 일어선다. 힐끔 하인의 시계를 본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그는 남자관객에게 다가간다)
이거 초조해서 원. 담배 한대 주시겠어요? 거져 달라는건 아닙니다. 다만 빌려달라는 거죠. 네, 고맙습니다. 아, 은하수군요.
(다른 남자관객에게)
청자를 가지구 계신가요? 그러시다면 한대 빌립시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납짝하게 눌러진 빈 담배갑을 꺼내 남자관객들로부터 받은 담배를 차곡차곡 집어 넣는다)
누구, "샘" 없으세요. "샘" ? 요즘 나온 담배론 "샘"이 괜찮더군요. 물론 한산도도 좋긴 좋죠. 어느분, 파고다 있으시면 그것도 한개피 빌립시다. 꼭 담배를 콜렛션하는것 같습니다만 초조할때 어러는게 내 버릇이라서요. (담배에 불을 붙인다)
라이터, 이거 최고품이죠. 쓸데없이 금으로 만들구 진주를 붙였읍니다. (하인에게) 이거,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
(하인, 오른손의 손가락 하나, 횐손의 손가락 네개를 펴 보인다)
알았네, 알았어. 십분 정도가 지났으니까, 앞으로 사분후엔.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내겁니다. 내 라이터다 이거지요. 금으로 만든 것, 진주가 박힌 최고품, 난 부자라는게 분명합니다. 이 호사스런 물건이 그 걸 증명하거든요. 그건 그렇고, 담배는 고맙습니다. 다아 이럴땐 상부상조 해야죠. 안그래요? 그런 의미로 한대만 더 빌려가도 좋겠지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었지?
[하인] (묵묵부답)
[남자] 여봐, 누가 문 두드리잖나?
[하인] (쳐다보려고도 않는다)
[남자] 어서 문 좀 열어드리게.
[하인] (침묵)
[남자] 할수 없군, 내가 여는 도리밖엔.
(남자, 문을 연다.
여자, 들어온다)
[남자] 하인은 저쪽입니다. 난 주인이구요
(여자 하인쪽으로 달려가 인사를 한다.)
주인은 이쪽이예요. 이 쪽
(여자 당황해서 남자쪽으로 되돌아온다.
미술품을 감상하듯이 남자는 여자를 주시하며 그 둘레를 두어바퀴 돈다.)
그러실 줄은 미리 짐작했었읍니다.
[여자] ---- 짐작하시다니요?
[남자] 네 아름다우시리라 그걸 말입니다. 다 아는 수가 있죠. 기다리는 시간을 많이 낭비할수록 오시는 님은 아름답다. 그렇지요 시간이란 그런 점에서 매우 정확한 측량 도구입니다. 물론 결과가 나쁠때는 아무 쓸모없는 도구입니다. 물론 결과가 나쁠때는 아무 쓸모없는 도구이긴 합니다만 저어 담배 피워도 괜찮겠지요?
(남자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내든다. 슬그머니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는 라이터를 공기 받듯 허공에 던졌다간 받고 한다)
라이터 최고품입니다. 금제 그리고 진주가 박힌
[하인] (허공에 올라간 라이터를 툭 채어간다)
[남자] 이리줘.
[하인] (자기의 시계를 가리킨다)
[남자] 그렇게 됐나? 벌써 사 분마저 지났어? 시간 하나 빨리 간다. (여자에게) 어디 두셨읍니까?
[여자] 네?
[남자] 내 라이터
[여자] 라이터?
[남자] 아, 아구 날개 말입니다.
[여자] 날개----
[남자] 네, 날개. 물론 집에 두고 나오셨겠지요. 요즈음의 천사들이란 겸손하셔서 그 우아한 날개를 살짝 집에 두고 나오는걸 유행으로 삼고 있다더군요. 당신도 역시 그러시겠지요!
(여자가 무어라고 하기전에 재빨리 말을 잇는다)
당신은 날개만 없다 뿐이지 천사시다, 이겁니다. 더욱 나아가서는 소유권 문제인데 나의 천사시다, 내 것이다 이런 겁니다.
[여자] 벌써 그런 결론이 나왔어요?
[남자] (단호하게) 네 방금 들으셨듯이
[여자] 너무 빨라요.
[남자] 왜요? 내 결론이 혹시 마음에 안드시기라도?
[여자] 아뇨. 하지만요, 우린 아직 인사도 않은걸요. 처음 뵙겠어요.
[남자] (더 재빠르게) 더 처음 뵙겠읍니다.
[여자] 안녕하세요?
[남자] 더 안녕하십니까?
[여자] 제 이름은,
[남자] 아, 우리 소갠 나중에 하십시다. 요즈음의 인간 관계는 결론이 시작이 되구 서로의 인물 소개는 맨 끝으로 돌리는 걸 새로운 관습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여자] 그런 관습도 새로 생겼군요.
[남자] 네--- 그건 별로 자랑거리 없는 남자가, 첫눈에 반할만한 여잘 만났을때 응용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그남자가 별 신통찮은 자길 소개할 경우 상대편 여자는 몹시 실망하게 됩니다. 그럼 두 사람의 관계는 뭐가 되겠읍니까? 그즉시 끝장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감스런 사태를 피하자는 겁니다 우리 둘 사이를 풍부하게 한다음 소개는 그때 가서 하십시다. 좋겠지요 그게?
[여자] (엉겹결에) 네, 좋아요
(두 남녀는 의자에 앉는다. 동시에 남자는 청혼을 한다)
[남자] 결혼하십시다.
[여자] 결혼? 누가 누구하구요?
[남자] 그야 내가 당신하구지요
[여자] 만난지 몇분 됐다구 그러시죠?
[남자] 시간을 따진다면야 나도 할말이 많죠.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린지 아십니까? 짐작이 안가시면 여기 계신 분들께 물어 보십쇼. 내 인생의 황금같은 시간을 그 삼분지 일이나 덧없이 보내고서야----
(하인, 느닷없이 덤벼들어서 남자의 구두를 벗겨간다. 여자는 몹시 당황한다. 남자는 만류하지만 하인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듯 시계를 가리킨다. 남자는 구두를 빼앗기고 하인은 벗겨낸 구두를 가져간다.) 내 하인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요.
[여자] 뭐죠?
[남자] 구두가 내 발에서 떠나갔읍니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여자] 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남자] 어찌 아시겠읍니까? 인생이 그런 거리라곤.
[여자] 인생이 그런 거라뇨?
[남자] 아, 아니요. 제발 알려고는 마십시요. 여자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그걸 알기 때문에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여자] (현기증이 나서) 뭐가 뭔지-----
[남자] 부디 모르십시요.
[여자] 물한잔 주시겠어요?
[남자] 그러십시다(하인에게) 자네 물 한잔만 주게)
[하인] (부동자세)
[남자] 그럼 물 한잔만 빌려주게
(하인, 물한잔을 가져온다)
그냥 달라고 할때엔 꼼짝도 않더니 빌려달라고 하니까 가져 오는군 (여자에게) 드십시요.
[여자] 고마워요.
[남자] 뭘요. 빌린 건데요.(여자 물을 마신다) 정신좀 드십니까
[여자] 여전해요.
[남자] (미소를 짓고) 익숙해지며는 좀 나을겁니다.
[여자] 저는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당신이 이렇게 부자리라곤 꿈도 못꿨죠. 전보에 알려 주신대로 찾아 왔더니 이건 너무 어마어마한 저택이잖겠어요? 문앞에서, 저는요, 한참이나 망서렸어요.
[남자] 어려워 마시고 그냥 들어오실걸.
[여자] 아뇨. 황홀해서 망서렸던 거예요.
[남자] (미소를 짓고) 아, 그랬어요?
[여자] 네. 당신의 전보를 받았을때요, 저의 어머닌 말씀하셨답니다. 얘야, 어서 가봐라, 가봐서 빈털터리 같거든 아예 되돌아오구 부자거든 꼭 붙들어야 한다.
[남자] 그래 당신은 뭐라 했읍니까.
[여자] 알았어요, 어머니. 오른손을 들구서 그렇게 대답했죠.
[남자] 내 원 참! 오른손을 들다, 그러니까 맹세를 하셨군요?
[여자] 그렇죠!
[남자] 그 잔에 물좀 남았읍니까?
[여자] 아뇨. 다 마셨는데요.
[남자] 유감입니다. 내 몫을 남기시지 않구서.
(하인, 느닷없이 남자에게 달려 들어서 넥타이를 풀어낸다. 남자는 빼앗기지 않으려 힘껏 저항하지만 하인의 억센 힘을 당해내지 못한다. 결국은 빼앗기고 하인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넥타이를 가지고 나간다. 여자는 두 남자의 격투에 놀란다.)
[여자] 왜들 그러시죠?
[남자] (씩씩거리나 웃고 있다) 이번엔 넥타이가 내 목에서 떠나갔읍니다.
[여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네에?
[남자] 뭐, 놀랄 게 못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난 것 뿐이니까요. 안심하십쇼. 만약 내 목이 떠나가고 넥타이만 남았다면---- (계면쩍은듯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관심을 돌리려고) 그건 그렇구요. 당신 어머니 퍽 재미난 분이시군요. 나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그 맹세를 시키셨다는 어머니 어떤 분인지 더 듣구 싶습니다. 어떠신가요? 어머니 성품이 너그러우시다든가. 왜 그렇게 쳐다만 보십니까?
[여자] 넥타이를----
[남자] 그것엔 관심 없읍니다.
[여자] 왜 빼앗기셨죠?
(옆에와 부동자세로 서있는 하인을 흘겨보며) 그것두 난폭하게.
[남자] 그렇지요. 난폭하게 주인을 덮치는 그런 하인에겐 난 전혀 관심없어요. 오히려 당신 어머니의 성품, 그게 너그러우신지----
[여자] 하지만요. 저는----(입을 다물어버린다.)
[남자] 알았어요. 문제는 빼앗긴 물건인가 본데 그야 되돌려 받기 어렵진 않습니다.(하인에게 큰소리로) 여봐, 가져 와!(묵묵부답인 하인. 까치발을 딛고 일어나서 그의 귀에 속삭인다) 여봐! 그 가져간 것 오분만 더 빌려주게
[하인] (대답이 없다)
[남자] 딱 오분만 더. 사정해도 안돼겠나, 응?
[하인] (반응이 없다)
[남자] 좋아, 좋다구.
[여자] 뭐래요, 하인이?
[남자] 네. 날더러 잘 해보라구 그럽니다.
(남자, 관객석을 투덕투덕 걸어다니다가 넥타이를 맨 남성 관객앞에 앉는다) 물론 그래요 (속상하다는듯 담배를 피워 물고,
상대방에게도 권하며) 저 인정 사정도 없는 하인이 날더러 잘 해보라구 그런 말한마디 하진 않았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나도 그래요, 기죽을 필요야 없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도대체 지가 뭐라고 겨우 심부름이나 하는 주제에. 속 좀 상합니다만, 그야 뭐 그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니까 말해보나마나겠구. 저어, 당신 넥타이 참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아름다운 색깔, 기막히게 멋진 무늬, 딱 오분만 빌립시다. 정확하게 오분만. 더 이상은 어기지 않겠읍니다. 빌려주시렵니까?
(남성관객으로부터 넥타이를 빌려 착용하며) 고맙습니다. 빌린 동안에는 소중히 다룰 겁니다. 사실 이 건 내것이 아니라 당신 것이구. 혹시 모르긴 하지요. 당신도 누구에게서 빌려온 건지는 아뭏든 잘 사용하고 돌려드리겠어요. 자아 그럼 당신은 시간을 재고, 난 이만.
(남자, 급한 걸을으로 여자에게 돌아간다)
어때요, 이젠?
[여자] 네, 당신은 멋진 분이셔요.
[남자] (웃으며) 뭘요.
[여자] 아니, 정말 그래요.
[남자] (넥타이를 빌려준 남성 관객을 향해) 이 영광을 당신에게 돌려 드립니다
(여자에게) 그건 그렇구요, 우리 하다만 이야기, 그것 좀 계속해 봅시다.
[여자] 어디까지 이야길 했었죠, 우리?
[남자]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아직은 거기까지 입니다.
[여자] (작게 한숨을 쉬고) 그럼 저 자신에 대한 건 아직 멀었군요.
[남자] 그렇죠. 나도 직접 당신 자신의 이야길 듣고 싶습니다만, 어머니 다음 딸, 이런 순서니까 계속 진행해 봅시다. 의무적으로 묻겠읍니다. 당신 어머니 성품은 어떻습니까? 난폭하십니까? 상냥하십니까?
[여자] 글쎄요.
[남자] 의무적으로 대답하십시요.
[여자] 난폭에다 상냥을 겸하신 분이예요.
[남자] (자기 이마에 손을 얹는다)
[여자] 왜 그러시죠?
[남자] 뭐, 별 건 아닙니다. 벽에 부딪혔다고나 할까요. 뭔가 어려워서요. 하긴 당신을 얻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지요. 첫눈에 반한 사람들도 결혼에 이르기까진 험난하나 과정을 겪는다고들 합디다만. 그런데 우리는 겨우 처음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직 이야기도 당신의 어머니에게서 머물구 있구.
[여자] 용기를 내셔야 해요.
[남자] 네, 어디 힘좀 내보겠읍니다.
[여자]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놀라시겠지만요.
[남자] 말해봐요, 뭐든지.
[여자] 저는 이세상에 태어났어요.
[남자] 놀랬읍니다, 갑자기.
[여자] 네. 태어난다는 건 어제나 갑자기죠. 그래서요 저는 태어날때 제 기분이 어떠했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아뭏든 그냥 그렇게 이세상에 나온거죠. 그리구 어렸을때 제 별명이 뭔지 아시겠어요? 덤이예요, 덤.
[남자] 덤?
[여자] 네. 왜 조금 더 주는것 있잖아요. 그거래요, 제가 아버진 사랑을 주구 그리고 또 덤으로 저를 어머니에게 주었죠. 그러니까 덤 아니겠어요? 덤, 이 말속엔 뭔가 그리운게 있어요. 덤,덤,덤 아버진 덤이 태어나자 달아나셨대요. 말하잠 뺑소닐 치신거죠. 나중에 알고보니 사기꾼 이었구 어머니에게 보여줬던 그 많은 재산은 모두 다 잠시 빌렸던 거래요.
[남자] 덤,덤,덤.
[여자] 하지만요, 저는 아버질 미워 안해요. 그분에겐 뭔가, 덤이라는 옛 이름처럼 그리운 데가 있어요. 덤, 혹시 그분도 그렇게 이세상에 태어나셨던 건 아닐지, 안 그래요?
[남자] 덤,덤,덤.
[여자] 어머니에겐 안됐지만요, 덤이라는 그점이 저에겐 좋아요. 웬지 홀가분하더군요. 이런 말을 하면 어머닌 화를 내시곤 한답니다. 하긴 그렇죠. 고생 많으셨어요. 홀로 덤을 낳아 키운다는건. 그만둘까요, 제 이야기?
[남자] 덤, 더해주세요.
[여자] 그래서 어머니는요, 단단히 벼르시는 거예요. 이 덤을 키워서는 결코 사기꾼에겐 주지 않겠다구요. 전 어머니 말을 이해해요.
[남자] 나두 알만합니다.
[여자] 고마워요.
[남자] 뭘요, 고맙기는요.
[여자] 사실 이런 덤 이야긴 처음인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답니다. 그냥 가슴 속에 덮어 두었었죠. 그러고 보면 당신은 참 친절하신 분이예요.
[남자] 덤.
[여자] 네?
[남자] 아, 아뇨. 그저 불러본 겁니다.
[여자] 그 목소린 그저 불러본 건 아닌데요?
[남자] 저어, 아닙니다.
(남자는 일어나 넥타이를 풀어 그것을 빌렸던 남성 관객에게 가서 되돌려 준다. 그의 눈은 물기에 젖어있다) 빌린 걸 돌려 드립니다. 시간은 정확하게 지켰읍니다. 그런데 웬지 모르게 슬퍼진건 무슨 까닭일까요? (관객석을 거닐며 그는 자기에게 들려주듯 중얼거린다) 덤,덤,덤, 난 당신을 사랑해. 덤,덤, 난 당신을 사랑해
[여자] 거기서 뭘하시죠?
[남자] (계속 혼잣말처럼) 덤, 난 당신을 사랑해.
(여자 남자에게 다가온다)
[여자] 뭘하구 계셔요?
[남자] 덤. 저어, 내 재산이 얼마쯤 될까, 그걸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여자] 하필 이럴때 그런건 생각하셔요?
[남자] 부자의 인색한 버릇입니다. 드런데 난 재산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생각지도 말자, 그렇게 마음 먹었읍니다. 이젠 됐습니까?
(여자, 남자의 어깨에 기댄다. 사이. 하인, 위압적으로 한걸음씩 남자에게 다가온다. 두려워지는 남자, 그꼴을 여자에겐 보이고 싶지 않다)
[남자] 눈을 감아요.
[여자] 감고 있는걸요, 이미.
[남자] 난 지금 행복합니다.
[여자] 저두 행복해요.
(하인, 남자에게 덤벼든다. 호주머니를 뒤져서 소지품들을 몽땅 떨어간다)
[남자] 이번엔 자질구레한 여러자기 것들이 떠나가고 있읍니다. 그런데 난 자꾸만 행복해집니다.
[여자] (눈을 감은채 미소를 짓고 있다)
[남자] 그렇습니다, 덤. 여러가지 것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것들이 떠나갔읍니다. 뭐 놀랄 건 못돼지요. 그저 시간이 지난 것 뿐이니까요. 어떤 나무는요, 수천개의 잎파리들을 몽땅 되돌려 주고도 아무 소리 없읍니다. 덤, 나는 고양이 한마리를 길러 봤었읍니다. 고양이는 차츰 늙어지고, 그래서 시간이 다 지나가자 그 생명을 돌려주고도 태연했읍니다. 덤,덤,덤. 난 뭔가 진실한 걸 안 것 같습니다. 덤,덤. 그래요. 가을이 되면 왜 나무잎은 모두 떨어지는 것인가. 난 이제 자랑거리 하나가 생겼읍니다. 그런 진실을 알았다는 것, 나에게는 어쩌면 그게 유일한 자랑이 될겁니다.
[여자] 너무 겸손하신 자랑이예요.
[남자] 뭘요. 그런데 덤, 당신에겐 뭐 자랑거리가 없으십니까?
[여자] 있구 말구요? 보시겠어요?
[남자] 봅시다, 어디.
(여자, 남자와 함께 탁상으로 돌아간다. 탁상 위에 놓여있던 핸드백을 열고 그속에서 얼굴만을 커다랗게 찍은 사진 석장을 꺼낸다. 하인, 시계를 보더니 탁상 위에 놓였던 남자의 모자를 냉큼 집어간다)
이번엔 모자가 탁상에서 떠나갔읍니다. 여간 다행이군요. 모자는 작습니다, 탁상은 크구요. 만약 탁상이 모자에게서 떠나갔더라면 얼마나 큰 손실이겠읍니까?
[여자] 이걸 좀 보세요.
[남자] 뭔데요, 그게?
[여자]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제 사진이예요. 저희집 가문의 여인들은 대대로 미인이라는걸 증명하는 거죠.
(남자, 사진들을 탁상 위에 벌여놓고 바라본다. 하인, 모자를 가져가다가 멈춰선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여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남자, 하인을 밀어낸다)
[남자] 뭘봐?(여자에게) 당신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자] 제일 젊으니까 그렇죠.
(남자 사진 중에서 여자 본인의 것을 들어 여자의 얼굴에 대고 한참 동안 바라본다)
[남자] 그러니까, 이게 지금의 당신이군요?
[여자] 네.
[남자] 몇 살인가요, 실례지만?
[여자] 스물 둘이예요.
[남자] 스물 두울. 꽃다운 처녀시군요.
(남자, 다음엔 여자 어머니의 사진을 얼굴에 대어준다)
시간이 좀 지났읍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여자] 조금 늙지 어떻게 돼요?
[남자] 이젠 이 얼굴이 당신입니다. 몇 살이십니까?
[여자] (조금 쉰 목소리로) 마흔 다섯이예요.
[남자] 마흔 다섯. 중년 부인이시군요.
(남자, 할머니의 사진을 여자의 얼굴에 대어준다)
시간이 더욱 지났읍니다. 이젠 이 얼굴이 당신입니다. 몇살이시죠?
[여자] (푹 쉰 목소리로) 일흔 살이 넘었어요.
[남자] 일흔살이 넘으셨다, 늙으셨군요.
(남자, 얼굴에 대었던 사진들을 탁상위에 내려 놓는다) 재미난 놀이를 해봤지요?
[여자] 네, 재미 있었어요.
[남자] 짐작 하셨겠지만, 이 놀이의 재미는 시간의 경과에 있읍니다.
[여자] (사진들을 가리키며) 그래두요, 이렇게 고웁잖아요?
늙어서도 어여뻐야 정말 미인예요.
[남자] 그렇지요. 잘 말씀했읍니다. 정말 재미라는 거는요 시간을 초월하는데 있읍니다. 시간, 흥, 지나가라지요. 우리는 그저 재미있음 그만입니다. 아, 덤! 당신은 어여쁘고, 거기에다 또 참된 재미가 뭔지 그걸 아십니다! 덤, 난 완전히 당신에게 매혹 되었읍니다. 아, 지금 나는 내 정신이 아닙니다!
[여자] 저두 그래요!
[남자] 난 너무 황홀합니다.
[여자] 그렇다니까요, 저두.
[남자] 바로 이겁니다. 태도 여하에 따라서 인생이란 이런 거예요. 그런데 덤, 만약 이 순간에(곁에서 시간을 재고 있는) 하인을 가리키며) 이 억센 하인이 내 옷을 벅겨간다면,
[여자] 왜 벗겨가요?
[남자] 만약입니다, 만약에.
[여자] 그래도 옷을 벗겨가선 안돼요.
[남자] 그러니까 만약입니다. 만약에 내 옷을 벗겨간다면 당신은 어찌 하시겠읍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참된 재미를 그 행복을, 그 황홀을 따악 깨셔야 하겠읍니까?
[여자] (어리둥절해지며) ---- 글쎄요.
[남자] 참된건 영원하다지요?
[여자] ---- 글쎄요.
[남자] 어디 그럼 시험해 봅시다.
(남자는 이미 저고리를 하인에게 빼앗기고 있다. 당황한 여자는 " ---- 글쎄요"만 연발하고 있다. 하인 벗겨낸 저고리를 들고 나간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직 바지가 남았읍니다.
[여자] 바지가----
[남자] 네. 비록 맨발에다 윗 저고리는 안입었읍니다만 당신을 사랑하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습입니다. 정식으로 청혼하겠읍니다. 결혼해 주시겠읍니까?
[여자] 왜 난폭한 하인을 그냥 두시죠? 당장 해고하세요.
[남자] 하인은 아무 잘못도 없읍니다.
[여자] 그냥 두시니까 자꾸 빼앗기잖아요.
[남자] 빼앗기는건 아닙니다 내가 되돌려 주는 겁니다.
[여자] 당신은 너무 착하셔요.
[남자] 글쎄요, 내가 착한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읍니다만, 내 태도 하나만은 분명히 좋다구 봅니다. 이렇게 하나둘씩 되돌려 주면서도 당신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읍니다. 아니, 줄기는 커녕 오히려 불어나고 있읍니다. 아, 나의 천사님, 아니 덤이여! 구두와 넥타이와 모자와 자질구레한 소지품과 그리고 옷에 대해서 내 사랑은 분산되어 있었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십니까? 오로지 당신 하나에로만 모아지고 있는 겁니다! 내 청혼을 받아주지 않으시겠읍니까?
(하인, 돌아와서 두 남녀에게 우뚝 선다)
[여자] 어마, 또 왔어요!
[남자] 염려 마십시요. 나도 이젠 그의 의무를 방해하지 않겠읍니다.
[여자] 그의 의무? 의무가 뭐죠?
[남자] 내가 빌린 물건들을 이 하인은 주인에게 자져다 주는 겁니다.
(하인, 남자에게 봉투를 하나 내민다. 남자는 봉투에서 쪽지를 꺼내 읽더니 아무 말없이 여자에게 건네준다)
[여자] "나가라!" 나가라가 뭐예요?
[남자] 네. 주인으로부터 온 경고문입니다. 시간이 다 지났으니 나가라는 거지요.
[여자] 나가라---- 그럼 당신 것이 아니었어요?
[남자] 내 것이라곤 없읍니다.
[여자] (충격을 받는다)
[남자] 모두 빌린 것들 뿐이었지요. 저기 두둥실 떠있는 달님도, 저 은빛의 구름도, 이 하늬바람도, 그리고 어쩌면 여기 있는 나마저도, 또 당신마저도(미소를 짓고)잠시 빌린 겁니다.
[여자] 잠시 빌렸다구요?
[남자] 네. 그렇습니다.
(하인, 엄청나게 큰 구두 한짝을 가져오더니 주저앉아 자기 발에 신는다. 그 구두 발로 차낼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남자] 결혼해 주십시요. 당신을 빌린 동안에 오직 사랑만을 하겠읍니다.
[여자] --- 아, 어쩌면 좋아?
(하인, 구두를 거의 다 신는다)
맹세는요, 맹세는어떻게 하죠? 어머니께 오른 손을 든----
[남자] 글쎄 그건----
(탁상위의 사진들을 쓸어모아 여자에게 주면서) 이것을 보여 드립시다. 시간이 가고 남장게 남는건 사랑이라면 여자에게 남는 건 무엇이겠읍니까? 그건 사진 석장입니다. 젊을때 한장, 그 다음에 한장, 늙구나서 한장. 당신 어머니도 이해할 겁니다.
[여자] 이해 못하실걸요, 어머닌.
(천천히 슬프고 낙담해서 사진들을 핸드백 속에 담는다)
오늘, 즐거웠어요. 정말이예요, 처음----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자, 작별인사를 하고 문전까지 걸어나간다)
[남자] 잠깐만요, 덤-
[여자] (멈칫 선다. 그러나 얼굴은 남자를 외면한다)
[남자] 가는 겁니까, 나를 두구?
[여자] (침묵)
[남자] 덤으로 내 말을 조금 더 들어봐요.
[여자] (악의적인 느낌이 없이) 당신은 사기꾼이예요.
[남자] 그래요, 난 사기꾼입니다. 이세상 것을 잠시 빌렸었죠. 그리구 시간이 되니까 하나 둘씩 되돌려 줘야 했읍니다. 이제 난 본색이 드러나구 이렇게 빈털터리입니다. 그러나 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누구 하나 자신있게 이건 내 것이다, 말할 수 있는가를.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없다니까요. 모두들 덤으로 빌렸지요. 눈동자, 코, 입술 하나 자기 것이 아니구 잠시 빌려 가진 거예요.
(누구든 관객석의 사람을 붙들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가리키며) 이게 당신 겁니까?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요? 잘 아꼈다가 그시간이 되면 꼭 돌려 주십시요. 덤, 이젠 알겠어요?
(여자 얼굴을 외면한채 걸어나간다. 하인, 서서히 그 무거운 구두발을 이끌고 남자에게 다가온다. 남자는 뒷걸음질을 친다. 그는 마직막으로 절규하듯이 여자에게 말한다)
덤, 난 가진 것 하나 없읍니다. 모두 빌렸던 겁니다. 그런데 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가진건 뭡니까? 무엇이 정말 당신 겁니까? (넥타이를 빌렸었던 남성 관객에게) 내 말을 들어보시요. 그럼 당신은 나를 이해할거요. 내가 당신에게 넥타이를 빌렸을때, 그때, 내가 당신 물건을 어떻게 다뤘었오? 마구 험하게 했었오? 어딜 망가 뜨렸오? 아니요, 그렇진 않았읍니다. 오히려 빌렸던 것이니까 소중하게 아꼈다간 되돌려 드렸지요. 덤, 당신은 내 말을 들었어요? 여기 증인이 있읍니다. 이 증인 앞에서 약속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덤, 당신을 빌리는 동안에 아끼고, 사랑하고, 그랬다가 언젠가 그 시간이 되면 공손하게 되돌려 줄테요. 덤! 내 인생에서 당신은 나의 소중한 덤입니다. 덤! 덤! 덤! 내 말이 들리지 않아요?
(남자, 하인의 구두발에 걷어채인다.
여자,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되돌아와서 남자를 부축해 일으키고 포옹한다)
[여자] 그만해요!
[남자] 이제야 날 사랑합니까?
[여자] 그래요! 당신 아니구 또 누굴 사랑하겠어요
[남자] 어서 결혼하러 갑시다, 구두 발에 채이기 전에!
[여자] 이래서요, 어머니도 말짱한 사기꾼과 결혼했었다던데
[남자] 자아, 빨리 갑시다!
[여자] 네, 어서 가요!
(막)
주) 이 극에 인용된 시는 (아라비안 나이트) 에서 옮긴 것임.
이강백 작
등장인물:
남자
여자
하인
- 작가 노트 -
이 작품은 응접실, 또는 아담한 소극장 같은 곳, 그런 실내에서 공연하기 알맞도록 썼다. 음악으로 비교한다면 실내악같은 것이다. 무대를 따로 만들 필요도 있지않고 별다른 조명이나 효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다. 이 극중의 하인은 그 사람들을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잠시 모자라든가 구두, 넥타이 등을 빌려야 한다. 이 빌린 물건들을 단순히 소도구로 응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 작품을 검토하면 알겠으나 이 잠시 빌렸다가 되돌려 준다는 것엔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고 이 연극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하인, 그는 빌린 물건들로 한 남자를 치장한다. 구색이 맞지 않고 엉뚱한 다른 물건들로 남자를 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부자처럼 보이게 된다.
남자, 그는 의자를 뒤로 제껴 앉았는데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이야기 책을 읽기 시작한다.
하인은 그 남자의 곁에 부동자세로 선다. 그의 손엔 거의 쟁반만큼이나 커다란 회중시계가 들려져 있는데 실제로 하인은 가끔 그것을 쟁반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몹시 꼼꼼하게 시간을 재는 그의 모습은 꼭 그럴필요는 없겠으나 무뚝뚝하고 건장했으면 한다.
[남자] (이야기 책을 낭독한다)
옛날에, 옛날에, 한 사기꾼이 살고 있었읍니다. 그는 젊고 잘생겼으나 땡전 한 잎 없는 빈털터리였읍니다. 어느날 그는 외로워졌으므로 갑자기 결혼하고 싶어졌읍니다. 누구나 젊음의 한 시기엔 외로원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구나 결혼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 사기꾼에겐 엄청한 고민이 있었더랬읍니다. 그 고민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처녀가, 자기같은 빈털터리 남자와 결혼해 줄 리 있겠읍니까? 없읍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몹시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읍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구. 그런 기분은 좋지 않읍니다. 정신에도, 몸에도, 건강상 안 좋습니다. 빨리 심호흡을 해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젊은 사기꾼도 심호흡을 했읍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한탄하지 말자!
근심걱정도 말고!
곤란하면 운명에 맡겨 보리자!
지금의 한때 푸짐히 즐기되
지나간 옛날은 생각지 말자.
슬프게 보여도 무슨 일이나
그대의 행복이 되거늘
모든건 신의 뜻
신의 뜻을 따라 해보자!
그는 온종일 돌아다녔읍니다. 정원이 달린 집과 훌륭한 옷과 그리고 그 밖에 부자로 보일수 있는 여러가지 물건들을 빌리러 다닌 것입니다.
젊은이의 아름다움에 행운이 있어라!
신께서 정하신 바에 행운있어라!
마침내 그 젊은 사기꾼의 소망은 이루어졌읍니다. 정원이 딸린 최고급 저택을 빌릴수 있엇으며, 모자와 넥타이, 호사스런 의복, 그리고 이 건장한 하인까지 빌렸던 것읍니다. 단, 조건이 있었읍니다. 빌린 물건마다엔 사용할 수 있는 시간적 제약이 붙었읍니다. 이 저택은 사십오분 동안만 그가 주인이며 다음엔 되돌려줘야 합니다. 넥타이는 이십팔분, 모자는 십구분 오십초, 그밖에 다른 물건에도 제각기 정해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사기꾼은 매우 만족했읍니다. 그래서 즉시 여성잡지를 뒤져 사교란에 주소를 낸 여자에게 전보를 쳤읍니다. 여자로부터 즉각 답신이 왔읍니다. 맞선을 볼 의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이쪽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습니다.
(혼잣말처럼) 왜 아직 안온담?
(다시 책을 낭독한다) 오겠다 약속한 시간이 벌써 지났읍니다.
(하인, 시계를 본 채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친다)
딱 오분 지났읍니다. 그는 초조해 졌읍니다. 책을 읽어 마음을 달래 보려 했읍니다만.
(하인, 아무말 없이 책을 빼앗아 버린다. 감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계적인 동작이다. 이극의 마지막까지 하인의 동작은 그러하다. 남자가 항의하려 하자 하인은 무뚝뚝하게 자기의 회중시계를 내밀어 보일 뿐이다. 그리고는 남자가 미처 수긍하기도 전에 돌아서더니 빼앗은 물건을 가지고 나간다.
잠시후, 하인은 돌아와 남자 곁에 서서 부동자세를 취한다.)
여봐, 자네는 인정사정도 없긴가?
[하인] (묵묵부답)
[남자] 그래? 아참, 자넨 말을 않는다며? 자네 주인께서도 그러시더군.
"빌려는 드리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는 마십시요. 이 하인은 절대 대답하지 않습니다."
난 그걸 잊을 뻔했네. 그러나 저러나 웬일이야?
(하인의 회중시계를 들여다 본다)
이제 십분째 지나가구 있어. 황금같은 내 인생이 이 꼴루 그냥 허무하게 지나가다니 안타깝지 뭔가?
(남자,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모르겠다는듯 낭패한 표정으로 관객석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왔다갔다 한다. 남자, 한 여성관객에게 말은 건다. 언뜻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듯 미소를 짓고 있다)
하긴--- 그런지도 몰라요. 여자란 그렇다면서요? 이쁘게 보이려구, 일부러 약속시간보다 오분쯤은 늦는다죠?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굉장히 미인인가? 그러니까 두 곱이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니겠어요? 만약 온다는 그 여자가 당신처럼 어여쁘시다면야 이야긴 퍽 달라지죠. 십분아니라 난 이십분도 기다릴 수 있다, 이겁니다.
(남자, 다시 자기의자에 돌아와 앉는다. 초조해서 옷을 매만지고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한다. 결국 그는 모자를 벗어 탁상위에 놓고 벌떡 일어선다. 힐끔 하인의 시계를 본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그는 남자관객에게 다가간다)
이거 초조해서 원. 담배 한대 주시겠어요? 거져 달라는건 아닙니다. 다만 빌려달라는 거죠. 네, 고맙습니다. 아, 은하수군요.
(다른 남자관객에게)
청자를 가지구 계신가요? 그러시다면 한대 빌립시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납짝하게 눌러진 빈 담배갑을 꺼내 남자관객들로부터 받은 담배를 차곡차곡 집어 넣는다)
누구, "샘" 없으세요. "샘" ? 요즘 나온 담배론 "샘"이 괜찮더군요. 물론 한산도도 좋긴 좋죠. 어느분, 파고다 있으시면 그것도 한개피 빌립시다. 꼭 담배를 콜렛션하는것 같습니다만 초조할때 어러는게 내 버릇이라서요. (담배에 불을 붙인다)
라이터, 이거 최고품이죠. 쓸데없이 금으로 만들구 진주를 붙였읍니다. (하인에게) 이거,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
(하인, 오른손의 손가락 하나, 횐손의 손가락 네개를 펴 보인다)
알았네, 알았어. 십분 정도가 지났으니까, 앞으로 사분후엔.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내겁니다. 내 라이터다 이거지요. 금으로 만든 것, 진주가 박힌 최고품, 난 부자라는게 분명합니다. 이 호사스런 물건이 그 걸 증명하거든요. 그건 그렇고, 담배는 고맙습니다. 다아 이럴땐 상부상조 해야죠. 안그래요? 그런 의미로 한대만 더 빌려가도 좋겠지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었지?
[하인] (묵묵부답)
[남자] 여봐, 누가 문 두드리잖나?
[하인] (쳐다보려고도 않는다)
[남자] 어서 문 좀 열어드리게.
[하인] (침묵)
[남자] 할수 없군, 내가 여는 도리밖엔.
(남자, 문을 연다.
여자, 들어온다)
[남자] 하인은 저쪽입니다. 난 주인이구요
(여자 하인쪽으로 달려가 인사를 한다.)
주인은 이쪽이예요. 이 쪽
(여자 당황해서 남자쪽으로 되돌아온다.
미술품을 감상하듯이 남자는 여자를 주시하며 그 둘레를 두어바퀴 돈다.)
그러실 줄은 미리 짐작했었읍니다.
[여자] ---- 짐작하시다니요?
[남자] 네 아름다우시리라 그걸 말입니다. 다 아는 수가 있죠. 기다리는 시간을 많이 낭비할수록 오시는 님은 아름답다. 그렇지요 시간이란 그런 점에서 매우 정확한 측량 도구입니다. 물론 결과가 나쁠때는 아무 쓸모없는 도구입니다. 물론 결과가 나쁠때는 아무 쓸모없는 도구이긴 합니다만 저어 담배 피워도 괜찮겠지요?
(남자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내든다. 슬그머니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는 라이터를 공기 받듯 허공에 던졌다간 받고 한다)
라이터 최고품입니다. 금제 그리고 진주가 박힌
[하인] (허공에 올라간 라이터를 툭 채어간다)
[남자] 이리줘.
[하인] (자기의 시계를 가리킨다)
[남자] 그렇게 됐나? 벌써 사 분마저 지났어? 시간 하나 빨리 간다. (여자에게) 어디 두셨읍니까?
[여자] 네?
[남자] 내 라이터
[여자] 라이터?
[남자] 아, 아구 날개 말입니다.
[여자] 날개----
[남자] 네, 날개. 물론 집에 두고 나오셨겠지요. 요즈음의 천사들이란 겸손하셔서 그 우아한 날개를 살짝 집에 두고 나오는걸 유행으로 삼고 있다더군요. 당신도 역시 그러시겠지요!
(여자가 무어라고 하기전에 재빨리 말을 잇는다)
당신은 날개만 없다 뿐이지 천사시다, 이겁니다. 더욱 나아가서는 소유권 문제인데 나의 천사시다, 내 것이다 이런 겁니다.
[여자] 벌써 그런 결론이 나왔어요?
[남자] (단호하게) 네 방금 들으셨듯이
[여자] 너무 빨라요.
[남자] 왜요? 내 결론이 혹시 마음에 안드시기라도?
[여자] 아뇨. 하지만요, 우린 아직 인사도 않은걸요. 처음 뵙겠어요.
[남자] (더 재빠르게) 더 처음 뵙겠읍니다.
[여자] 안녕하세요?
[남자] 더 안녕하십니까?
[여자] 제 이름은,
[남자] 아, 우리 소갠 나중에 하십시다. 요즈음의 인간 관계는 결론이 시작이 되구 서로의 인물 소개는 맨 끝으로 돌리는 걸 새로운 관습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여자] 그런 관습도 새로 생겼군요.
[남자] 네--- 그건 별로 자랑거리 없는 남자가, 첫눈에 반할만한 여잘 만났을때 응용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그남자가 별 신통찮은 자길 소개할 경우 상대편 여자는 몹시 실망하게 됩니다. 그럼 두 사람의 관계는 뭐가 되겠읍니까? 그즉시 끝장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감스런 사태를 피하자는 겁니다 우리 둘 사이를 풍부하게 한다음 소개는 그때 가서 하십시다. 좋겠지요 그게?
[여자] (엉겹결에) 네, 좋아요
(두 남녀는 의자에 앉는다. 동시에 남자는 청혼을 한다)
[남자] 결혼하십시다.
[여자] 결혼? 누가 누구하구요?
[남자] 그야 내가 당신하구지요
[여자] 만난지 몇분 됐다구 그러시죠?
[남자] 시간을 따진다면야 나도 할말이 많죠.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린지 아십니까? 짐작이 안가시면 여기 계신 분들께 물어 보십쇼. 내 인생의 황금같은 시간을 그 삼분지 일이나 덧없이 보내고서야----
(하인, 느닷없이 덤벼들어서 남자의 구두를 벗겨간다. 여자는 몹시 당황한다. 남자는 만류하지만 하인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듯 시계를 가리킨다. 남자는 구두를 빼앗기고 하인은 벗겨낸 구두를 가져간다.) 내 하인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요.
[여자] 뭐죠?
[남자] 구두가 내 발에서 떠나갔읍니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여자] 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남자] 어찌 아시겠읍니까? 인생이 그런 거리라곤.
[여자] 인생이 그런 거라뇨?
[남자] 아, 아니요. 제발 알려고는 마십시요. 여자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그걸 알기 때문에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여자] (현기증이 나서) 뭐가 뭔지-----
[남자] 부디 모르십시요.
[여자] 물한잔 주시겠어요?
[남자] 그러십시다(하인에게) 자네 물 한잔만 주게)
[하인] (부동자세)
[남자] 그럼 물 한잔만 빌려주게
(하인, 물한잔을 가져온다)
그냥 달라고 할때엔 꼼짝도 않더니 빌려달라고 하니까 가져 오는군 (여자에게) 드십시요.
[여자] 고마워요.
[남자] 뭘요. 빌린 건데요.(여자 물을 마신다) 정신좀 드십니까
[여자] 여전해요.
[남자] (미소를 짓고) 익숙해지며는 좀 나을겁니다.
[여자] 저는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당신이 이렇게 부자리라곤 꿈도 못꿨죠. 전보에 알려 주신대로 찾아 왔더니 이건 너무 어마어마한 저택이잖겠어요? 문앞에서, 저는요, 한참이나 망서렸어요.
[남자] 어려워 마시고 그냥 들어오실걸.
[여자] 아뇨. 황홀해서 망서렸던 거예요.
[남자] (미소를 짓고) 아, 그랬어요?
[여자] 네. 당신의 전보를 받았을때요, 저의 어머닌 말씀하셨답니다. 얘야, 어서 가봐라, 가봐서 빈털터리 같거든 아예 되돌아오구 부자거든 꼭 붙들어야 한다.
[남자] 그래 당신은 뭐라 했읍니까.
[여자] 알았어요, 어머니. 오른손을 들구서 그렇게 대답했죠.
[남자] 내 원 참! 오른손을 들다, 그러니까 맹세를 하셨군요?
[여자] 그렇죠!
[남자] 그 잔에 물좀 남았읍니까?
[여자] 아뇨. 다 마셨는데요.
[남자] 유감입니다. 내 몫을 남기시지 않구서.
(하인, 느닷없이 남자에게 달려 들어서 넥타이를 풀어낸다. 남자는 빼앗기지 않으려 힘껏 저항하지만 하인의 억센 힘을 당해내지 못한다. 결국은 빼앗기고 하인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넥타이를 가지고 나간다. 여자는 두 남자의 격투에 놀란다.)
[여자] 왜들 그러시죠?
[남자] (씩씩거리나 웃고 있다) 이번엔 넥타이가 내 목에서 떠나갔읍니다.
[여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네에?
[남자] 뭐, 놀랄 게 못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난 것 뿐이니까요. 안심하십쇼. 만약 내 목이 떠나가고 넥타이만 남았다면---- (계면쩍은듯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관심을 돌리려고) 그건 그렇구요. 당신 어머니 퍽 재미난 분이시군요. 나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그 맹세를 시키셨다는 어머니 어떤 분인지 더 듣구 싶습니다. 어떠신가요? 어머니 성품이 너그러우시다든가. 왜 그렇게 쳐다만 보십니까?
[여자] 넥타이를----
[남자] 그것엔 관심 없읍니다.
[여자] 왜 빼앗기셨죠?
(옆에와 부동자세로 서있는 하인을 흘겨보며) 그것두 난폭하게.
[남자] 그렇지요. 난폭하게 주인을 덮치는 그런 하인에겐 난 전혀 관심없어요. 오히려 당신 어머니의 성품, 그게 너그러우신지----
[여자] 하지만요. 저는----(입을 다물어버린다.)
[남자] 알았어요. 문제는 빼앗긴 물건인가 본데 그야 되돌려 받기 어렵진 않습니다.(하인에게 큰소리로) 여봐, 가져 와!(묵묵부답인 하인. 까치발을 딛고 일어나서 그의 귀에 속삭인다) 여봐! 그 가져간 것 오분만 더 빌려주게
[하인] (대답이 없다)
[남자] 딱 오분만 더. 사정해도 안돼겠나, 응?
[하인] (반응이 없다)
[남자] 좋아, 좋다구.
[여자] 뭐래요, 하인이?
[남자] 네. 날더러 잘 해보라구 그럽니다.
(남자, 관객석을 투덕투덕 걸어다니다가 넥타이를 맨 남성 관객앞에 앉는다) 물론 그래요 (속상하다는듯 담배를 피워 물고,
상대방에게도 권하며) 저 인정 사정도 없는 하인이 날더러 잘 해보라구 그런 말한마디 하진 않았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나도 그래요, 기죽을 필요야 없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도대체 지가 뭐라고 겨우 심부름이나 하는 주제에. 속 좀 상합니다만, 그야 뭐 그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니까 말해보나마나겠구. 저어, 당신 넥타이 참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아름다운 색깔, 기막히게 멋진 무늬, 딱 오분만 빌립시다. 정확하게 오분만. 더 이상은 어기지 않겠읍니다. 빌려주시렵니까?
(남성관객으로부터 넥타이를 빌려 착용하며) 고맙습니다. 빌린 동안에는 소중히 다룰 겁니다. 사실 이 건 내것이 아니라 당신 것이구. 혹시 모르긴 하지요. 당신도 누구에게서 빌려온 건지는 아뭏든 잘 사용하고 돌려드리겠어요. 자아 그럼 당신은 시간을 재고, 난 이만.
(남자, 급한 걸을으로 여자에게 돌아간다)
어때요, 이젠?
[여자] 네, 당신은 멋진 분이셔요.
[남자] (웃으며) 뭘요.
[여자] 아니, 정말 그래요.
[남자] (넥타이를 빌려준 남성 관객을 향해) 이 영광을 당신에게 돌려 드립니다
(여자에게) 그건 그렇구요, 우리 하다만 이야기, 그것 좀 계속해 봅시다.
[여자] 어디까지 이야길 했었죠, 우리?
[남자]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아직은 거기까지 입니다.
[여자] (작게 한숨을 쉬고) 그럼 저 자신에 대한 건 아직 멀었군요.
[남자] 그렇죠. 나도 직접 당신 자신의 이야길 듣고 싶습니다만, 어머니 다음 딸, 이런 순서니까 계속 진행해 봅시다. 의무적으로 묻겠읍니다. 당신 어머니 성품은 어떻습니까? 난폭하십니까? 상냥하십니까?
[여자] 글쎄요.
[남자] 의무적으로 대답하십시요.
[여자] 난폭에다 상냥을 겸하신 분이예요.
[남자] (자기 이마에 손을 얹는다)
[여자] 왜 그러시죠?
[남자] 뭐, 별 건 아닙니다. 벽에 부딪혔다고나 할까요. 뭔가 어려워서요. 하긴 당신을 얻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지요. 첫눈에 반한 사람들도 결혼에 이르기까진 험난하나 과정을 겪는다고들 합디다만. 그런데 우리는 겨우 처음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직 이야기도 당신의 어머니에게서 머물구 있구.
[여자] 용기를 내셔야 해요.
[남자] 네, 어디 힘좀 내보겠읍니다.
[여자]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놀라시겠지만요.
[남자] 말해봐요, 뭐든지.
[여자] 저는 이세상에 태어났어요.
[남자] 놀랬읍니다, 갑자기.
[여자] 네. 태어난다는 건 어제나 갑자기죠. 그래서요 저는 태어날때 제 기분이 어떠했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아뭏든 그냥 그렇게 이세상에 나온거죠. 그리구 어렸을때 제 별명이 뭔지 아시겠어요? 덤이예요, 덤.
[남자] 덤?
[여자] 네. 왜 조금 더 주는것 있잖아요. 그거래요, 제가 아버진 사랑을 주구 그리고 또 덤으로 저를 어머니에게 주었죠. 그러니까 덤 아니겠어요? 덤, 이 말속엔 뭔가 그리운게 있어요. 덤,덤,덤 아버진 덤이 태어나자 달아나셨대요. 말하잠 뺑소닐 치신거죠. 나중에 알고보니 사기꾼 이었구 어머니에게 보여줬던 그 많은 재산은 모두 다 잠시 빌렸던 거래요.
[남자] 덤,덤,덤.
[여자] 하지만요, 저는 아버질 미워 안해요. 그분에겐 뭔가, 덤이라는 옛 이름처럼 그리운 데가 있어요. 덤, 혹시 그분도 그렇게 이세상에 태어나셨던 건 아닐지, 안 그래요?
[남자] 덤,덤,덤.
[여자] 어머니에겐 안됐지만요, 덤이라는 그점이 저에겐 좋아요. 웬지 홀가분하더군요. 이런 말을 하면 어머닌 화를 내시곤 한답니다. 하긴 그렇죠. 고생 많으셨어요. 홀로 덤을 낳아 키운다는건. 그만둘까요, 제 이야기?
[남자] 덤, 더해주세요.
[여자] 그래서 어머니는요, 단단히 벼르시는 거예요. 이 덤을 키워서는 결코 사기꾼에겐 주지 않겠다구요. 전 어머니 말을 이해해요.
[남자] 나두 알만합니다.
[여자] 고마워요.
[남자] 뭘요, 고맙기는요.
[여자] 사실 이런 덤 이야긴 처음인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답니다. 그냥 가슴 속에 덮어 두었었죠. 그러고 보면 당신은 참 친절하신 분이예요.
[남자] 덤.
[여자] 네?
[남자] 아, 아뇨. 그저 불러본 겁니다.
[여자] 그 목소린 그저 불러본 건 아닌데요?
[남자] 저어, 아닙니다.
(남자는 일어나 넥타이를 풀어 그것을 빌렸던 남성 관객에게 가서 되돌려 준다. 그의 눈은 물기에 젖어있다) 빌린 걸 돌려 드립니다. 시간은 정확하게 지켰읍니다. 그런데 웬지 모르게 슬퍼진건 무슨 까닭일까요? (관객석을 거닐며 그는 자기에게 들려주듯 중얼거린다) 덤,덤,덤, 난 당신을 사랑해. 덤,덤, 난 당신을 사랑해
[여자] 거기서 뭘하시죠?
[남자] (계속 혼잣말처럼) 덤, 난 당신을 사랑해.
(여자 남자에게 다가온다)
[여자] 뭘하구 계셔요?
[남자] 덤. 저어, 내 재산이 얼마쯤 될까, 그걸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여자] 하필 이럴때 그런건 생각하셔요?
[남자] 부자의 인색한 버릇입니다. 드런데 난 재산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생각지도 말자, 그렇게 마음 먹었읍니다. 이젠 됐습니까?
(여자, 남자의 어깨에 기댄다. 사이. 하인, 위압적으로 한걸음씩 남자에게 다가온다. 두려워지는 남자, 그꼴을 여자에겐 보이고 싶지 않다)
[남자] 눈을 감아요.
[여자] 감고 있는걸요, 이미.
[남자] 난 지금 행복합니다.
[여자] 저두 행복해요.
(하인, 남자에게 덤벼든다. 호주머니를 뒤져서 소지품들을 몽땅 떨어간다)
[남자] 이번엔 자질구레한 여러자기 것들이 떠나가고 있읍니다. 그런데 난 자꾸만 행복해집니다.
[여자] (눈을 감은채 미소를 짓고 있다)
[남자] 그렇습니다, 덤. 여러가지 것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것들이 떠나갔읍니다. 뭐 놀랄 건 못돼지요. 그저 시간이 지난 것 뿐이니까요. 어떤 나무는요, 수천개의 잎파리들을 몽땅 되돌려 주고도 아무 소리 없읍니다. 덤, 나는 고양이 한마리를 길러 봤었읍니다. 고양이는 차츰 늙어지고, 그래서 시간이 다 지나가자 그 생명을 돌려주고도 태연했읍니다. 덤,덤,덤. 난 뭔가 진실한 걸 안 것 같습니다. 덤,덤. 그래요. 가을이 되면 왜 나무잎은 모두 떨어지는 것인가. 난 이제 자랑거리 하나가 생겼읍니다. 그런 진실을 알았다는 것, 나에게는 어쩌면 그게 유일한 자랑이 될겁니다.
[여자] 너무 겸손하신 자랑이예요.
[남자] 뭘요. 그런데 덤, 당신에겐 뭐 자랑거리가 없으십니까?
[여자] 있구 말구요? 보시겠어요?
[남자] 봅시다, 어디.
(여자, 남자와 함께 탁상으로 돌아간다. 탁상 위에 놓여있던 핸드백을 열고 그속에서 얼굴만을 커다랗게 찍은 사진 석장을 꺼낸다. 하인, 시계를 보더니 탁상 위에 놓였던 남자의 모자를 냉큼 집어간다)
이번엔 모자가 탁상에서 떠나갔읍니다. 여간 다행이군요. 모자는 작습니다, 탁상은 크구요. 만약 탁상이 모자에게서 떠나갔더라면 얼마나 큰 손실이겠읍니까?
[여자] 이걸 좀 보세요.
[남자] 뭔데요, 그게?
[여자]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제 사진이예요. 저희집 가문의 여인들은 대대로 미인이라는걸 증명하는 거죠.
(남자, 사진들을 탁상 위에 벌여놓고 바라본다. 하인, 모자를 가져가다가 멈춰선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여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남자, 하인을 밀어낸다)
[남자] 뭘봐?(여자에게) 당신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자] 제일 젊으니까 그렇죠.
(남자 사진 중에서 여자 본인의 것을 들어 여자의 얼굴에 대고 한참 동안 바라본다)
[남자] 그러니까, 이게 지금의 당신이군요?
[여자] 네.
[남자] 몇 살인가요, 실례지만?
[여자] 스물 둘이예요.
[남자] 스물 두울. 꽃다운 처녀시군요.
(남자, 다음엔 여자 어머니의 사진을 얼굴에 대어준다)
시간이 좀 지났읍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여자] 조금 늙지 어떻게 돼요?
[남자] 이젠 이 얼굴이 당신입니다. 몇 살이십니까?
[여자] (조금 쉰 목소리로) 마흔 다섯이예요.
[남자] 마흔 다섯. 중년 부인이시군요.
(남자, 할머니의 사진을 여자의 얼굴에 대어준다)
시간이 더욱 지났읍니다. 이젠 이 얼굴이 당신입니다. 몇살이시죠?
[여자] (푹 쉰 목소리로) 일흔 살이 넘었어요.
[남자] 일흔살이 넘으셨다, 늙으셨군요.
(남자, 얼굴에 대었던 사진들을 탁상위에 내려 놓는다) 재미난 놀이를 해봤지요?
[여자] 네, 재미 있었어요.
[남자] 짐작 하셨겠지만, 이 놀이의 재미는 시간의 경과에 있읍니다.
[여자] (사진들을 가리키며) 그래두요, 이렇게 고웁잖아요?
늙어서도 어여뻐야 정말 미인예요.
[남자] 그렇지요. 잘 말씀했읍니다. 정말 재미라는 거는요 시간을 초월하는데 있읍니다. 시간, 흥, 지나가라지요. 우리는 그저 재미있음 그만입니다. 아, 덤! 당신은 어여쁘고, 거기에다 또 참된 재미가 뭔지 그걸 아십니다! 덤, 난 완전히 당신에게 매혹 되었읍니다. 아, 지금 나는 내 정신이 아닙니다!
[여자] 저두 그래요!
[남자] 난 너무 황홀합니다.
[여자] 그렇다니까요, 저두.
[남자] 바로 이겁니다. 태도 여하에 따라서 인생이란 이런 거예요. 그런데 덤, 만약 이 순간에(곁에서 시간을 재고 있는) 하인을 가리키며) 이 억센 하인이 내 옷을 벅겨간다면,
[여자] 왜 벗겨가요?
[남자] 만약입니다, 만약에.
[여자] 그래도 옷을 벗겨가선 안돼요.
[남자] 그러니까 만약입니다. 만약에 내 옷을 벗겨간다면 당신은 어찌 하시겠읍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참된 재미를 그 행복을, 그 황홀을 따악 깨셔야 하겠읍니까?
[여자] (어리둥절해지며) ---- 글쎄요.
[남자] 참된건 영원하다지요?
[여자] ---- 글쎄요.
[남자] 어디 그럼 시험해 봅시다.
(남자는 이미 저고리를 하인에게 빼앗기고 있다. 당황한 여자는 " ---- 글쎄요"만 연발하고 있다. 하인 벗겨낸 저고리를 들고 나간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직 바지가 남았읍니다.
[여자] 바지가----
[남자] 네. 비록 맨발에다 윗 저고리는 안입었읍니다만 당신을 사랑하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습입니다. 정식으로 청혼하겠읍니다. 결혼해 주시겠읍니까?
[여자] 왜 난폭한 하인을 그냥 두시죠? 당장 해고하세요.
[남자] 하인은 아무 잘못도 없읍니다.
[여자] 그냥 두시니까 자꾸 빼앗기잖아요.
[남자] 빼앗기는건 아닙니다 내가 되돌려 주는 겁니다.
[여자] 당신은 너무 착하셔요.
[남자] 글쎄요, 내가 착한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읍니다만, 내 태도 하나만은 분명히 좋다구 봅니다. 이렇게 하나둘씩 되돌려 주면서도 당신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읍니다. 아니, 줄기는 커녕 오히려 불어나고 있읍니다. 아, 나의 천사님, 아니 덤이여! 구두와 넥타이와 모자와 자질구레한 소지품과 그리고 옷에 대해서 내 사랑은 분산되어 있었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십니까? 오로지 당신 하나에로만 모아지고 있는 겁니다! 내 청혼을 받아주지 않으시겠읍니까?
(하인, 돌아와서 두 남녀에게 우뚝 선다)
[여자] 어마, 또 왔어요!
[남자] 염려 마십시요. 나도 이젠 그의 의무를 방해하지 않겠읍니다.
[여자] 그의 의무? 의무가 뭐죠?
[남자] 내가 빌린 물건들을 이 하인은 주인에게 자져다 주는 겁니다.
(하인, 남자에게 봉투를 하나 내민다. 남자는 봉투에서 쪽지를 꺼내 읽더니 아무 말없이 여자에게 건네준다)
[여자] "나가라!" 나가라가 뭐예요?
[남자] 네. 주인으로부터 온 경고문입니다. 시간이 다 지났으니 나가라는 거지요.
[여자] 나가라---- 그럼 당신 것이 아니었어요?
[남자] 내 것이라곤 없읍니다.
[여자] (충격을 받는다)
[남자] 모두 빌린 것들 뿐이었지요. 저기 두둥실 떠있는 달님도, 저 은빛의 구름도, 이 하늬바람도, 그리고 어쩌면 여기 있는 나마저도, 또 당신마저도(미소를 짓고)잠시 빌린 겁니다.
[여자] 잠시 빌렸다구요?
[남자] 네. 그렇습니다.
(하인, 엄청나게 큰 구두 한짝을 가져오더니 주저앉아 자기 발에 신는다. 그 구두 발로 차낼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남자] 결혼해 주십시요. 당신을 빌린 동안에 오직 사랑만을 하겠읍니다.
[여자] --- 아, 어쩌면 좋아?
(하인, 구두를 거의 다 신는다)
맹세는요, 맹세는어떻게 하죠? 어머니께 오른 손을 든----
[남자] 글쎄 그건----
(탁상위의 사진들을 쓸어모아 여자에게 주면서) 이것을 보여 드립시다. 시간이 가고 남장게 남는건 사랑이라면 여자에게 남는 건 무엇이겠읍니까? 그건 사진 석장입니다. 젊을때 한장, 그 다음에 한장, 늙구나서 한장. 당신 어머니도 이해할 겁니다.
[여자] 이해 못하실걸요, 어머닌.
(천천히 슬프고 낙담해서 사진들을 핸드백 속에 담는다)
오늘, 즐거웠어요. 정말이예요, 처음----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자, 작별인사를 하고 문전까지 걸어나간다)
[남자] 잠깐만요, 덤-
[여자] (멈칫 선다. 그러나 얼굴은 남자를 외면한다)
[남자] 가는 겁니까, 나를 두구?
[여자] (침묵)
[남자] 덤으로 내 말을 조금 더 들어봐요.
[여자] (악의적인 느낌이 없이) 당신은 사기꾼이예요.
[남자] 그래요, 난 사기꾼입니다. 이세상 것을 잠시 빌렸었죠. 그리구 시간이 되니까 하나 둘씩 되돌려 줘야 했읍니다. 이제 난 본색이 드러나구 이렇게 빈털터리입니다. 그러나 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누구 하나 자신있게 이건 내 것이다, 말할 수 있는가를.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없다니까요. 모두들 덤으로 빌렸지요. 눈동자, 코, 입술 하나 자기 것이 아니구 잠시 빌려 가진 거예요.
(누구든 관객석의 사람을 붙들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가리키며) 이게 당신 겁니까?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요? 잘 아꼈다가 그시간이 되면 꼭 돌려 주십시요. 덤, 이젠 알겠어요?
(여자 얼굴을 외면한채 걸어나간다. 하인, 서서히 그 무거운 구두발을 이끌고 남자에게 다가온다. 남자는 뒷걸음질을 친다. 그는 마직막으로 절규하듯이 여자에게 말한다)
덤, 난 가진 것 하나 없읍니다. 모두 빌렸던 겁니다. 그런데 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가진건 뭡니까? 무엇이 정말 당신 겁니까? (넥타이를 빌렸었던 남성 관객에게) 내 말을 들어보시요. 그럼 당신은 나를 이해할거요. 내가 당신에게 넥타이를 빌렸을때, 그때, 내가 당신 물건을 어떻게 다뤘었오? 마구 험하게 했었오? 어딜 망가 뜨렸오? 아니요, 그렇진 않았읍니다. 오히려 빌렸던 것이니까 소중하게 아꼈다간 되돌려 드렸지요. 덤, 당신은 내 말을 들었어요? 여기 증인이 있읍니다. 이 증인 앞에서 약속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덤, 당신을 빌리는 동안에 아끼고, 사랑하고, 그랬다가 언젠가 그 시간이 되면 공손하게 되돌려 줄테요. 덤! 내 인생에서 당신은 나의 소중한 덤입니다. 덤! 덤! 덤! 내 말이 들리지 않아요?
(남자, 하인의 구두발에 걷어채인다.
여자,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되돌아와서 남자를 부축해 일으키고 포옹한다)
[여자] 그만해요!
[남자] 이제야 날 사랑합니까?
[여자] 그래요! 당신 아니구 또 누굴 사랑하겠어요
[남자] 어서 결혼하러 갑시다, 구두 발에 채이기 전에!
[여자] 이래서요, 어머니도 말짱한 사기꾼과 결혼했었다던데
[남자] 자아, 빨리 갑시다!
[여자] 네, 어서 가요!
(막)
주) 이 극에 인용된 시는 (아라비안 나이트) 에서 옮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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