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주한국불교사 자료 >
미주한국불교 역사에 관한 책 4
1964년 서경보 스님에 의해 시작된 미주한국불교 역사 기록에 관한 책자로는 LA관음사, 뉴욕불광선원에서 사찰이름으로 년보와 주보를 묶어 단행본으로 출판하였고, 서경보스님, 숭산스님, 채인환스님, 강청화스님, 성해스님, 혜성스님, 이한상 거사에 관한 개인 활동을 정리한 자서전이나 활동을 정리한 책자 등이 있는데 미주현대불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은 총 12권이다. 이 책들 외에는 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외에 2004년에 미주현대불교 주관으로 뉴욕시 플러싱에서 열린 ‘미주전법 40주년 기념행사’ 행사 책자가 있다. 이 책자들은 당시 미주한국불교를 기록하는 언론 활동이 없는 시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역할을 하고, 그 기록을 통해 미주한국불교사를 기록할 수가 있기 때문에 기록한 사찰이나, 스님 당사자에게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 책들의 발행처와 발행 년도, 내용 등을 간략하게 5-6번에 걸쳐 소개하려고 한다.
글 / 김창송(본지 편집인)
나의 발심수행장 (1)
인환 스님은 계율을 잘 지키고, 선수행을 하면서 포교에 큰 공헌을 하였고 또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하면서 학자로 모범적으로 살았다. 이 책은 채인환 스님이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장 재직시기인 2011년 10월에 시작하여 2012년 9월까지 1년간 원장실에서 연구원 최 동순교수가 27차례의 인환스님의 구술을 녹취하여 정리한 글이다. 인환스님은 20대 초반인 1952년 출가하여 세수로 88세인 2018년 10월에 입적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거의 70년 가까이 계율을 지키며 선수행과 공부를 병행한 스님의 행적은 감동적이며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며 교육적이다. 1975년 일본에서 박사학위 받기 아주 어렵던 시기에 동경대학교에서 박사를 받은 후 동국대학교 교수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마다하고, 카나다로 와서 영어 공부와 대각사를 창건하고 포교를 병행했다. 그 후 동국대학교 학장인 지관 스님의 간곡한 권유로 1982년부터 동국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인환스님은 1977년부터 1982년 초 까지 만 5년을 해외포교에 매진하였고, 그 후에도 방학 때마다 미주에 자주 와서 설법을 하면서 해외포교에 힘을 보탰으므로 1970년대 말까지 미주에 들어온 미주한국불교 1세대 스님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필자는 1세대 스님으로 인환스님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상, 하 두 권으로 된 이 책의 목차의 상권은,
사진으로 보는 행장, 책 머리에, 1. 삶과 수행을 되돌아보며, 2. 내 고향 원산, 3. 행자 시절, 4. 강원 시절, 5. 운수납자 시절, 6 .불교사전 편찬, 7. 학업시절 8. 유학시절
하권은,
9. 박사논문 쓰기, 10. 해외 포교 11. 세계 일주 12. 교수 시절 13. 포교-회향 14. 석암 노사의 율신과 원행 15. 신문. 잡지 원고. 연보, 저서 및 논문 , 편찬 후기 순으로 되어 있다.
최동순 교수는 이 녹취 작업을 마치고 이 책 출판 외에 ‘호암당 채인환 회고록의 구술사적 가치’라는 논문을 통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호암당 채인환의 생애사 구술촬영에 대한 구술사적 의미와 가치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는 한국 선종(조계종)사의 독특한 인물이다. 평생 그는 선교율을 행했으며 참회행자로서 또한 전법사, 학자로 대종사를 품서 했다. 채인환은 1931년 원산에서 출생하였으며 2018년 10월 26일 서울 경국사에서 원적하였다. 그의 법랍 67년이며 세수 88이다. 법명은 인환(印幻) 이며 법호는 호암(顥菴)이다. 본명은 채택수(蔡澤洙)이다. 어려서 조부 채 병준(蔡秉俊)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했으며, 부친 채낙진(蔡洛鎭)과 김소희 (金小喜)의 5남 3녀 가운데 차남이다. 이전에 본 학술지에 게재할 것을 정하고 연구 중이었으나 그의 입적으로 헌정논문이 되었다. 승전(僧傳)의 새로운 트렌드라는 점에서 채인환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개인사를 구술(기록)했다. 전통적으로 제자나 문도에 의해 승전이 성립함과 달리 자신의 기억을 서사했다는 점에서 외적 행위에 대한 내면고백의 정서가 드러났다. 이 촬영으로 구술성(orality)을 높였으며 방증 사진과 영상물을 남겼다.
본 논문을 추가하여 채인환 아카이빙(archiving)을 시도하였고 자료적 보존성을 제고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스승의 생애사 구술 촬영을 희망했다. 동국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채인환의 제자였던 필자 (1985년 선학과 입학)는 2011년 국가과제였던 구술촬영기록을 3년 째 진 행 중에 있었다. 그 과제는 현대한국구술자료관에서 시행하며, 생존 명망가 중심의 구술사 아카이브이다. 채인환 구술의 촬영분량은 총 50시간 분량이며, ‘호암 인환 스님의 회 고록, 나의 발심수행장’ 책명으로 발간(2017.8.25, 문현)하였다.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어지는 격변기에 스님은 시공을 달리하며 겪은 경험과 그 의미들을 소상히 구술하였다. 이에 불교사 및 선종사(禪宗史)[조계종사]에서 차지하는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그의 생애를 분류하면 ①북한 생활 ②피난 ③선암사 출가 ④정화 참여 ⑤해인사, 통도사 수학, ⑥동국대학교 수학, ⑦일본 고마자와대학, 도쿄대학 수학, ⑧캐나다, 미국 포교, ⑨한국 교수생활, ⑩전법사 활동의 열 가지이다. 본 논문에서는 원산생활에서 부산 선암사 출가까지 내면 고백의 서사들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둘째, 구술자의 주관성(subjectivity)의 분석이다. 역사적 자료들이 주관성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결국 객관성에 수렴한다는 점이다. 구술 역시 역사자료로 포함된다는 전제에서 국가와 민족, 사회의 주체로서 민족사 중심의 역사 연구에서 가려질 수 있는 개인의 경험을 드러낸다. 이러한 점에서 구술은 자기체험의 본위적 특징을 충실히 반영한다. 채인환의 구술은 다른 글에서 읽기 어려운 서사들을 포함한다. 일제와 전쟁 그리고 선암사의 기억은 그가 격변기를 헤쳐 온 구술자의 주관성이며 이는 오히려 자료적 객관성에 다가간다. 그러나 주관성은 기억을 불안정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현재의 삶이 평온하다면 과거의 불행했던 과거를 이겨내는 것으로 기억되지만, 반대로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면 과거는 영광스러운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점에서 구술자의 기억 역시 유동적이며 선택적이며 수정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억의 불안정성 있을 수 있다는 점이며, 기억은 현실 정체성과의 교호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산물이 된다. 이에 따라 채인환의 구술 작업은 불교학술원장 지위의 안정된 상태에서 진행되었으므로 그의 기억은 난관을 극복한 에피소드로 짙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채인환의 선택적 기억을 엿볼 수 있다. 스님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기억이나 부산 피난생활에 대한 기억 역시 극히 일부만을 표출하였다. 이는 불편한 기억을 스스로 억압해 의식 저변으로 밀쳐두기도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망각으로 보인다.
격변기의 서사와 그 가치
채인환은 일제에 이어 해방공간과 전쟁 그리고 피난과 부산 선암사 출가이며 정화의 소용돌이에 이어 4.19와 5.16을 겪었다. 현대사의 격변기를 지나온 인물이며 신분이 전혀 달라진 경우이다. 생생한 기억을 통해 생성 한 구술자료이며 변곡의 경험들이 내재한다. 승려이자 대학교수로서 일반인의 사표(師表)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31년 01세 원산 출생
1949년 19세 원산상업학교 졸업
1952년 22세 8월 부산 선암사 출가
1955년 25세 해인사 불교전문 강원 입학
1963년 33세 서울 적조암 총무, 동국대 편입학
1970년 40세 고마자와 대학원 선학전공 수료
1975년 45세 도쿄대학 박사학위 취득
1977년 47세 ~1982 캐나다 토론토에 대각사 창건, 미국 포교
1982년 52세 ~1996 동국대학교 교수
2005년 일본 도쿄 대학원 외국인 객원교실.
2011년 81세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그가 성장했던 원산은 기억의 투쟁 장소로서 원산의 상황을 매우 명확하게 서사하고 자료화했다는 점에서 구술 자료적 가치가 높다. 한국 현대사의 일부분을 승려의 입장에서 연결한다는 점이 또한 고무적이다. 이 구술은 소역사들(micro-histories) 가운데 한 부분으로서 대중 기억으로 이어지며, 이야말로 공식적 기억을 대체할 수 있는 사료를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서 지역사료 수집은 물론 지방사 연구에 기여하게 된다. 그의 원산 생활은 20년이며 당시의 기억은 현대 한국사의 귀중한 사료이다.
셋째, 개인사는 불교사와 국가사로 직결된다는 점이다. 전쟁의 한 가운데서 목숨을 건진 체험록이다. 전시 선암사 소림선방의 치열했던 정진을 목격하고 기록하였다. 선덕(禪德)들과 함께한 선방문화를 고스란히 남기고 있다. 특히 이 회고록은 선종사(조계종사)의 소중한 기록적 가치를 지닌다.
호암당 채인환 회고록의 구술사적 가치—최동순 글
한국불교사에서 1950년대 자료가 별로 없다고 한다. 이 말은 기록이 없다는 뜻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53년에 휴전이 되었으니, 기록이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다. 그러므로 1952년 출가하여 계율을 잘 지키며, 수행을 하였으며 1964년부터 1975년까지 10년간 한국의 동국대학교와 일본의 고마자와 대학과 동경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공부를 한 스님의 구술은 1950년대 한국불교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에는 부산 선암사에서 행자생활과 머리를 깍고 출가하는 장면, 수행장면, 21일간 철야정진 장면, 해인사와 통도사 승가대학교 시절 등 1950년대 한국불교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장면이 스님의 증언을 통해 나온다. 그 중의 일부를 옮겨본다.
나는 1952년에 부산 선암사 소림선원에서 출가하여 초창기 10 하안거를 정진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더라도 대견하리만큼 참으로 초발신심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지독하리만치 불철주야로 진정 맹렬하게 참선 정진에 몰두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방 입승인 오대산 자비도인 지월스님이 몸소 행하는 자비행을 어깨 너머로 보면서 익혔다. 은사이신 원허스님의 아낌없는 보시행을 따라 행하게 되었고, 선의 안목이 높으신 설봉스님에게서 선문염송의 문리를 배웠다. 또한 수행자는 절대로 곡차를 마시는 버릇을 익히지 말아야 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신설법(以身說法) 뿐만 아니라 선원에서 정진하면서도 두 철 살림의 선방 원주 소임을 맡았다. 1년 넘게 일주일에 두 서너번은 주지인 석암 스님과 원주인 나와 둘이서 아침 공양을 마치고는 커다란 먹물 들인 광목 장걸망을 짊어지고는 선암사에서 서면의 부전시장까지 걸어 다녔다. 가는데 1시간 반, 무거운 장걸망을 지고 돌아오는데 2 시간이 더 걸리는 거리를 항상 둘이서 어깨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어 왕래하였다. 한참 호기심 많고 알고 싶은 것이 가득한 젊은이가 걸으면서 의문과 질문을 쏟아내면, 석암스님께서는 조금도 꺼리거나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소탈하고 명쾌하게 해답을 주시곤 하였다.
참선 정진에 꼭 필요한 적절한 노하우, 공안, 화두, 선리, 선기, 선문답 등에 관한 자신에 찬 견해, 선가의 전통과 역사 관행, 그리고 불법문중의 여러 가지 속사정에 관한 해박한 지식, 계율수지에 대한 엄정한 자세 등 실로 초발심자의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소양을 갖추는데 있어 두 번 다시 없는 너무나 귀중한 기간이었다. 이 같은 기회와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의 은혜에 대하여 두고 두고 감사하고 있다. ~~ 이 책 페이지 45와 46애서 옮김.
미국에서 활동한 스님 중에 1940년대와 50년대에 출가한 몇 분의 스님들이 있다. 미국과 인연 있는 스님들 중 몇 분의 출가년도를 정리해 보았다.
경보스님 1914년 제주도 출생 1932년 제주도 산방굴사(현 광명사)에서 혜월스님 은사로 출가.
청화스님1923년 전남 무안출생1947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 로스엔젤레스 미주금강선원 창건.
숭산스님 1927년 평양출생 1947년 마곡사에서 고봉스님 은사로 출가, 로스 엔젤레스 달마사, 뉴욕 조계사 등 창건.
도안스님 전남 장성 출생. 1952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암스님을 은사로 출가.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주지로 활동.
법안스님 남원 출생. 1956년 김천 직지사에서 관응스님 은사로 출가. 뉴욕 원각사 주지로 활동
송운스님 1958년 월정사에서 출가. 샌프란시스코 불광사 주지
이 스님들 외에도 메릴랜드 한국사 고성스님과 불타사 주지였던 오홍선 스님이 1950년대 출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환스님 개인 활동을 중심으로 엮어진 이 책은 현대한국불교사의 중요한 역할을 한 스님들과 미주에서 활동한 스님들이 많이 등장한다. 미주에서 활동한 스님들을 보면 숭산, 도안, 법안, 시카고 불타사에서 활동했던 지학, 홍선, 하와이 불은사 창건했던 자은, 삼보사 창건한 이한상, 시애틀 정각사 정업 스님 등이 많이 언급되었다. 그 외에도 카나다 밴쿠우버 서광사 창건한 태응스님, 로스 엔젤레스 고려사 현호스님, 뉴욕불광사 휘광 스님,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츠, 교육으로 성공하여 뉴욕에 법고사 본부가 있는 대만의 성엄스님등이 등장한다. 인환스님은 일본에서 숭산스님이 설립한 재일본홍법원에서 총무로 수 년 간을 숭산스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포교활동도 하였는데 아쉽게도 그곳에 있다가 1974년 뉴욕원각사 초대 주지를 했던 구윤각 스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필자는 1985년과 86년까지 맨하탄 16가 뉴욕 원각사에서 살았는데 당시에 원각사에 방문하였던 인환스님을 본 적이 있다. 원각사 뿐만 아니라 뉴욕 불광사에서 뵌적도 있고, 한국을 자주 방문하고 있는 필자가 스님을 개인적으로 찾아뵙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이 책이 발행된 직후에 시카고 거주 태고심 보살님으로부터 이 책을 받고 곧바로 스님께 연락하여 장시간 통화만 하였다.
인환 스님과 미주불교계와 인연
-카나다 대각사와 시카고 불타사와 미국 여러 사찰들
인환스님은 미주한국불교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77년 2월에 카나다 토론토에 도착하여 인연 있는 신도들도 별로 없는 곳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다니면서 오전에는 영어공부를 하고, 대각사라는 간판을 걸고 오후 2시부터 기도를 하기 시작하여 매일 3시간 이상 기도를 하였다. 신도하나 없는 절에서 자그마한 불상을 모시고 낮 밤을 가리지 않고 100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꾸준히 기도하고 조석으로 참선 정진하는 동안 귀익은 목탁소리에 이끌려 관심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들을 모아서 개원 1주년 되던 때부터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불교교리 공부를 하였다. 이렇게 포교를 차근 차근 성공적으로 하였다.
이 외에도 시카고 불타사와 많은 인연이 있다. 시카고 불타사는 이장수, 손영익, 최일당, 림대지, 박영규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만든 절이었고 손영익 법사가 주지를 하다가 조금 후에 손지학으로 출가를 하였다. 이 지학스님이 주지를 하다가 떠난 후에 잠깐 혜광스님이 주지를 하였는데 이 혜광스님도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 주지가 공석이 되자 최일당, 태고심 보살 부부 등 불타사 신도들이 대각사 인환스님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가 1978년 말이다. 토론토에서 시카고까지 차로 13시간 걸리는 곳이다. 차로 다닐 수 없으니 비행기 타고 시카고 가서 백일기도 입제해 주고, 며칠동안 같이 기도 점검하면서 지도하고. 신도들 가운데 신심 깊은 보살들 가려서 절에 상주하면서 기도하게 하고 했다. 그러면서 불타사를 맡을 스님을 생각하다가 일본의 교토에 있는 불교대학(佛敎大學)에서 대학원 마치고 일본에 있던 오홍선 스님에게 연락하여 1980년 5월에 불타사 주지로 오게 하였다.
이 외에도 숭산스님이 건립한 프로비덴스에도 자주 다니기도 하고, 인환 스님은 온타리오 선 센터에서 캐나다인들과 미국인들을 상대로 참선 지도를 하였다. 1982년 동국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해 달라는 간청으로 한국으로 간 후에는 방학에는 미국에 와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고려사, 샌프란시스코 불광사, 시애틀 정각사, 동부의 뉴욕 원각사, 불광사 등에서 설법을 하였다.
이 책은 격변기인 1952년 출가한 스님 소중한 체험기와 당시 한국불교계 풍경, 1970년대 불교학의 중심역할을 하던 일본 불교학계와 일본 불교에 관한 소중한 정보, 스님의 7년간의 카나다 대각사 포교활동과 잠시 대리 주지를 한 시카고 불타사 이야기와 미주한국사찰들에 관한 소중한 글이 있다. 또 석암 노사의 율신과 원행 등의 내용도 있지만 스님이 어린 시절 태어나 자랐던 원산과 석왕사, 그리고 은사 운허스님과 관련된 금강산 표훈사와 마하연 선방에 대한 아주 귀중한 내용도 들어 있다. 필자의 장모 역시 인환스님과 비슷한 시기인 1932년에 원산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개인적으로 금강산을 가면서 원산을 5차례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필자는 원산에 관심이 많다. 또 표훈사와 마하연 선방 터도 3번이나 방문하였고, 2016년에는 석왕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글에는 표훈사, 마하연 선방, 석왕사와 구월사 월정사, 패엽사 등의 북한불교에 관한 흥미진지한 내용이 많다.
이 책에는 위에 언급한 내용과 더불어 인환스님을 비롯하여, 운허스님, 석암스님 등의 사진과 대각사 사진과 1960년대의 찍은 도안스님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도 귀중한 자료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이 책에는 한국불교사 뿐만 아니라 미주한국불교사 측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지만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인환스님 본인이 카나다로 온 날짜이다. 이 책 상권의 56페이지에서는 1977년 가을에 왔다고 되어 있는데 하권 95페이지에는 2월에 온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본지 기록에는 2월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스님이 창건한 대각사 창건 날짜와도 관련이 있다. 이 외에도 미주한국불교 사찰 숫자를 250-300 개 정도로 되어 있다고 몇 차례 기술되어 있다. 미주한국사찰은 카나다 포함하여 110개 정도가 최고였다.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법회에 인환스님이 설법을 할 때 참가 숫자를 3, 4 백 명으로 추산하였는데 그 추산은 잘못이다. 필자는 전미주한국사찰 법회를 수 없이 참가하였다.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가 미주 최대사찰이었지만 초청법회라 하더라도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필자는 200여명으로 본다. 또 스님이 인도 여행을 하면서 성지순례를 하였는데 네팔 룸비니에 건립된 석가 대성사를 부다가야에 건립되었다고 큰 사진과 함께 잘못 소개되어 있다. 인환스님과 함께 구술을 녹취한 최 동순 박사는 논문에서 기억의 불완전성을 언급하였는데 이 작업이 십년 정도 앞당겨 졌다면 이런 불완전성이 별로 생기지 않았을 것인데 좀 아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