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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한국사찰

[2021년 9,10월호] 탄허스님이 1982년 프로비덴스 홍법원 개원 10주년 행사에서 한 설법 / 편집부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10.06|조회수221 목록 댓글 0

< 미주한국불교사 자료 >

 

 

 


탄허스님이 1982년 프로비덴스 홍법원 개원 10주년 행사에서 한 설법

 

 

글 / 편집부

 

 

 

지금은 철거된 1980년대 홍법원 일주문

 

당시 일주문에 걸린 행사 현수막                                                             설법하는 탄허스님     

 

 

1982년 9월 숭산스님의  미주 포교 10주년 기념하는 대법회를 로스엔젤레스 L.A.T.T.C. 강당에서 가진 후, 장소를 옮겨 15-16일 이틀 동안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덴스 Cumberland 재미흥법원 본부에서는 탄허스님, 숭산스님과 본국 총무원장을 비롯하여 12개국 500여명 참석한 가운데 세계종교지도자들을 초청 대한불교조계종 재미홍법원 10주년 기념 세계평화고승대법회를 봉행하였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영상을 보니 뉴욕 원각사 법안스님, 필라 원각사 주지 혜안스님, 시카고 불타사 주지 홍선스님, 미주불교신문 발행하였던 표도철스님과 미국에 위파사나를 널리 알린 잭 콘필드도 참석한 모습이 보인다.  뉴욕 원각사 신도회장을 역임한 한경택씨가 사회를 보았다. 이 행사에 대한 영상 자료는 아르헨티나 동포가 비디오 촬영한 것인데, 이 동포가 2012년쯤에 교림출판사 서우담 사장님께 보내준 것이다. 이 자료를 탄허선사 연구로 박사를 받은 문광스님이 불교테레비젼방송 BTN에 주어 첫날 법문만 BTN에서 제작해서 방영하였다. https://youtu.be/VUtbDc0Fr9c 
탄허스님 입적 9개월전 법문영상 전격 공개!! 라는 제목을 검색하면 나온다. 
아래 글은 문광스님이 이 영상을 녹취하여 기록한 것으로 문광스님의 도움으로 소개한다. 

< 첫날 법문 >
우리가 우주 삼라만상을 돌이켜보면 이 차별은 어떻게 정리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지만 허공자리에 앉아서 볼 것 같으면 이 우주 삼라만상이 한 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육지에 앉아서 보면 백천중류의 흘러가는 이 물이 수가 없이 한정이 없지만 바다에 앉아서 보면 한 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 교리로 볼 것 같으면 그 학설이 한정이 없지만 원교(圓敎), 즉 화엄학(華嚴學)에 앉아서 볼 것 같으면 한 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덩어리 되고 마는 그 자리를 동양사상에 있어서 유불선(儒佛仙) 삼교의 표현이 불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우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 유교에서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이라” 정미롭고 한결같이 해서 중도를 잡는다, 도교에서는 “득일만사필(得一萬事畢)이라” 하나를 얻을 것 같으면 만사는 다 끝난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보면 수천만권의 학설이 벌어져 있지만 그 내용을 간추려 볼 것 같으면 심성(心性), 마음심(心)자 성품성(性)자 두 자리 가지고 이야기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명심견성(明心見性)” 마음을 밝혀서 성을 본다, 마음이라면 총체적 명사이고, 성(性)이라고 하면 마음의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존심양성(存心養性)”, 마음을 두어서 성을 기른다. 도교에서는 “수심연성(修心練性)” 마음을 닦아서 성을 단련한다. ‘심성(心性)’ 두 글자를 가지고서 이야기 한 것은 유불선이 같지만 단, 유교에서는 존양(存養), 둘 존자 기를 양자, 도교에서는 수련(修練) 닦을 수자 단련할 련자, 불교에서는 명견(明見), 밝을 명자 볼 견자, 그러면 존양과 수련과 명견이라는 그 술어에서 벌써 유불선의 심천(深淺)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인이 평을 하기를, “유식근(儒植根)하고” 유교는 총체적으로 비판하면은 나무뿌리를 심는 것이라면, “도배근(道培根)하고” 도교는 나무뿌리를 북돋는 것이다. 불교는 “석발근(釋拔根)이라” 나무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순서가 나무뿌리를 심은 뒤에 북돋는 것입니다. 만일 뿌리를 뽑아버린다 할 것 같으면 심는 것과 북돋는것이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만유의 핵심이 우주만유를 만들어 낸 그놈은 우주만유가 아닙니다. 만일 우주만유가 우주만유를 만들어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만유를 만들어낸 그 놈은 바로 우주만유가 아닌 우리의 마음입니다. 고금으로 아무리 찾아봤자 형단은 볼수 없습니다. 형단을 볼 수 없다면 공간과 시간이 몽땅 끊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과 시간, 이 우주를 만들어 낸 핵심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올시다. 우주만유의 핵심자리를 보지 못하고 밤낮 지엽으로 흘러 나가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고 시끄럽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볼 것 같으면 시간과 공간이 없는데 거기에 천당과 지옥을 찾겠습니까? 천당과 지옥이 없는데 거기에 고통이니 즐거운 것이니를 찾겠습니까? 바로 그 자리는 이 세계평화의 요령, 즉 핵심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래서 고인이 말하기를 “학도선수차학빈(學道先須且學貧)이니” 도를 배우려면 먼저 모름지기 가난한 것부터 배워야 한다. “학빈빈후도방친(學貧貧後道方親)이라” 가난한 것을 배워서 가난하게 된 뒤에 도가 바야흐로 친해진다. “일조체득성빈도(一朝體得成貧道)하니” 하루아침에 체득하여 가난한 도를 이루고 보니까 “도용환여빈저인(道用還如貧底人)이라” 도를 쓰는 것이 또한 가난한 때 그 시절과 같다.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 조사가 “거년빈(去年貧)은 미시빈(未是貧)이라” 거년의 가난한 것은 가난한 것이 아니요, “금년빈(今年貧)이 시시빈(始是貧)이요” 금년에 가난한 것이 비로소 가난한 것이라, “거년(去年)에는 무탁추지지(無卓錐之地)러니” 지난해에는 송곳세울 땅도 없었더니, “금년(今年)에는 추야무(錐也無)로다” 금년에는 송곳까지 마저 없어졌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했지만 송곳까지 없어졌으니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그렇지만은 송곳까지 없어졌다는 그 생각이 붙어있는 것도 아직 가난한 꼬리가 덜 빠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년 후에 다시 말을 하기를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아유일기(我有一機)하니 순목시이(瞬目示伊)라.”
나한테 한 소식이 있는데 눈을 꿈쩍해서 자네한테 보인다. 아무 말이 없이 눈을 꿈쩍해서 알겠느냐? “약인(若人)이 불회(不會)하면” 만일 그 사람이 그걸 모르겠다고 하면 “별환사미(別喚沙彌)하리라” 별달리 내가 사미야! 어린 동자 사미를 아무개야 하고 부르겠다. 거기에 무슨 말이 붙습니까?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가난하다는 것 까지도 붙지 못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그런데 오늘 숭산스님이 여기 와서 이렇게 포교수도하신지가 10주년이 됐는데 그렇게 가난한 것을 익히고 당신이 가난한 그 자리를 체험하고 가난한 그 소식을 여러분에게 가르쳐주시는 양반인데 웬걸 이렇게 떠벌려놓고 많습니까? 부자가 됐습니까? 7만평이나 땅을 가지고 있고 여러 대중 수 천명대중을 이렇게 모아 놓고 있으니 말이여 얼마나 부자가 됐습니까? 그러나 참말 하나도 없이 가난했기 때문에 이렇게 숭산선사는 부자가 된 것이올시다. 허공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없이 지극히 가난했기 때문에 우주 삼라만상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우리가 앞으로 세계평화의 목표를 두고서 몰고 나가는 근본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가난해야 됩니다. 우리가 가난해야 된다는 것, 자기 한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없는 그자리는 시간 공간 즉 우주도 끊어졌는데 거기에 무엇이 붙습니까? 거기에 무엇이 붙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불평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전쟁이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간략히 말씀을 끝내고 여러분이 개별적으로든지 혹 질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행사에 참가한 대중들


< 이틀째 법문 >
제일 큰 병통을 말 많은 것으로 봅니다. 어저께도 한 20분 동안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그런데 또 오늘 쓸데없는 소리를 좀 해 달라고 숭산스님이 그랬습니다. 사실 말이 있는 것 보다는 없는 것이 낫고 말이 있어가지고 없는 것 보다는 애초에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동안 횡야설 수야설 법문을 해 놓으셨는데 거기에서 가장 깊은 학설이 무어냐 하면은 사사무애도리(事事無碍道理)라는 것입니다. 즉 화엄학의 사사무애도리.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이라는 것이 하나 가운데 일체, 하나가 곧 일체라는 것이 비슷할 것 같지마는 극히 좀 다릅니다. 물론 사사무애도리(事事無碍道理)를 표현하는 방법으로서는 같습니다마는 내용이 좀 틀린 것은 무어냐 하면 ‘일중일체(一中一切)’라 하면 하나가 그 개체가 살아가지고 있으면서 전체를 싸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중일(多中一)’이라는 것은 전체 많은 것이 자기 개체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 그 하나를 싸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이 방안에 전등을 백개 천개를 켜 놓는다고 봅시다. 백개 천개를 켜 둔다면 그 광명이 하나하나가 전부 이 방안에 꽉 차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등의 광명이 백천 등의 광명에 장애가 안 되면서 서로 포함되어 있고 또 백천 등의 광명이 자기 개체를 살려 가지고 있으면서 그 한 등의 광명을 장애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소식입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요 일체 가운데 하나라는것입니다.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는 말은, 예를 들면 우리가 육지의 물 한방울을 바다에다 던진다고 봅시다. 육지의 물 한 방울을 바다에다 던진다면 육지의 물 한 방울 개체가 없어짐과 동시에 전체의 바다 맛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다의 전체 맛이 육지의 물 한 방울 맛이고 육지의 물 한 방울 맛이 전체의 바다 맛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아까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한 등잔이 천백 등잔의 광명을 장애하지 않고 서로서로 함용(含容)해 있다는 것은 개체가 살아 가지고서 낱낱이 개체의 광명이 우주에 꽉 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는 것은 개체가 죽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개체가 저 쪽에 가면 자기 개체가 없어지면서 저쪽 것과 자기 것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사사무애도리를 표현한 것이예요. 화엄학의...... 만일 선문(禪門)에 이것[화엄의 사사무애도리]을 비유할 것 같으면 임제3구 법문에서 제3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임제3구 법문의 제3구 법문이라는 것은 뭐냐. 고인이평을 하기를, “간취붕두(看取棚頭)에 농괴뢰(弄傀儡)하라”
벼개머리에 꼭두각시 희롱하는 것을 봐라. “추견(抽牽)이 전차이두인(全借裏頭人)이니라” 이끌어 빼내는 것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놀리는 것이지 꼭두각시 허수아비가 노는 것이 아니라 이겁니다. 요사이는 꼭두각시 놀음이 없어졌으니까 여러분이 잘 이해하지 못 할런지 모릅니다마는 즉 활동사진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활동사진이라는 것이 활동사진이 자동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사람이 기계를 놀리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아까 사사무애도리(事事無碍道理)가 그렇게 49년 설법의 대단한 법문이지만 임제 3구에 비할 것 같으면 제3구에 불과한 것이다. 제3구는 “자구(自救)도 불요(不了)라”고 하는 거예요. 제3구에서 만일 깨닫는다 할 것 같으면 제 몸뚱이 구원도 마치지 못한다. 제 몸뚱이 구원도 못하는 놈이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겠느냐 이것입니다.
“묘희기용무착문(妙喜豈容無着問)이리오”마는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의 물음을 용납하겠느냐. 그렇지마는 “구화(漚和)론 쟁부절류기(爭負截流機)아” 방편으로는 어찌 류가 끊어진 잘난 사람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이 무착보살에게 답변할 수도 없는 문답이 끊어진 소식이지만은 잘난 사람 특출한 근기를 만날 것 같으면 저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2구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임제의 제1구 소식은 고인이 평을 하기를 어떻게 평을 했느냐. “후일(煦日)이 발생포지금(發生鋪地錦)하니” 오늘같이 이렇게 빛난 햇빛이 땅에 편 비단을 발생하니 “무문인자금상서(無紋印子錦上舒)라” 문체가 없는 인자가 비단위에 피었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팔만대장경 교리를 아무리 횡야설 수야설 해봤자 거기에 붙지 못하는 소식이올시다. 그것을 임제의 제1구 법문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임제의 제1구 법문은 본래 물을 수도 없고 답할 수도 없는 본래 문답이 끊어졌다는 경계올시다. 그러므로 이 본래 문답이 끊어진 제1구 소식에서 깨닫는다 할 것 같으면 “감여불조위사(堪與佛祖爲師)라” 인간 천상의 선생은 물론이려니와 부처님과 조사의 선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인의 말과 같이 “영위계구(寧爲鷄口)언정 무위우후(無爲牛後)라” 차라리 닭의 주둥이가 될지언정, 닭의 주둥이는 조그마하지만 앞에 있는 것입니다. “무위우후(無爲牛後)라”
소의 궁둥이는 되지 말아라. 소의 궁둥이는 커다란 것이지마는 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아도 닭의 주둥이가 되지 소의 궁둥이 커다란 것이 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 이 대회에 모이신 여러분은 우리가 앞으로 세계평화를 목표하고서 이렇게 모이셨는데 그렇게 커다란 소의 궁둥이가 되지 말고 자그만 해도 닭의 주둥이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임제의 제3구, 제2구 소식은 저 태평양 한바다로 집어넣어 버리고 제1구 소식, 본래 문답이 끊어진 제1구 소식을 우리가 천득(薦得)해서 부처님의 은혜를 갚으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셔서 49년 동안 횡야설 수야설 해 놓은 것이 그것은 유치원 학생을 위해서 그런 것이지 사실 본래 임제의 제1구 소식을 우리한테 전해 주자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사상이올시다. 
5분이 초과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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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스님이 1982년 9월에 프로비덴스 설법한 위 내용에 대해서  문광 스님의 저서인 ‘탄허 선사의 사교 회통 사상’의 여러 곳에 나온다. 
아래의 글은 이 책의 140-141에 나오는 글이다. 

탄허는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언어로 화엄학의 ‘사사무애’를 꼽았는데 이 사사무애의 도리를 동양 사상의 회통의 원리로 활용하여 삼교를 종횡무진했다. 함용의(含容義)와 상즉의(相卽義)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사무애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사사무애보다 한 단계 더 위의 경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사무애 법계 도리가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임제 제3구 법문에 불과하다는 말은 바로 연기의 세계보다 성기의 세계가 더욱 깊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법성게’의 증분 4구처럼 생각이 끊어지고 언어가 끊어진 세계, 시공이 끊어진 세계인 임제 제1구의 세계를 증득하지 못하면 자기 제도도 하지 못한다는 언명은 성기를 중심으로 한 선사로서의 안목이 바로 드러나는 부분이라 하겠다. 성기와 연기를 회통한 탄허의 화엄 사상은 바로 선과 교를 회통한 그의 모든 사상체계와 동궤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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