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2월호
佛恩(불은)의 香氣(향기)를 조국의 강토에
이 연설문은 조국통일기원불교도 합동법회에서 낭독한 서의현 남측대표단장의 연설전문이다.
친애하는 조선불교도연맹의 박태호 원장님 ! 그리고 북한불교를 대표하여 이곳까지 왕림하여 주신 여러분들! 오늘 우리는 남북한의 불교대표자로서 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분단의 아픈 상처가 조국의 산하를 갈라 놓은지 40여년이 흘러 갔습니다. 같은 핏줄, 비슷한 생김새였으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경원시 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척을 사이에 둔 채 오갈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는 통한의 아픈 세월을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계의 기류는 변해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무상(無常)의 설리는, 이재 더 이상 동과 서의 대립을 지속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제 셰계는 ‘힘의 論理(논리)’가 아니라 화해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체계를 수립해가고 있습니다. 최근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정치적 변혁, 그리고 동서독의 통일등은 우리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핏줄을 나눈 형제, 더구나 부처님의 크신 은혜안에서 공존하는 이 자리의 우리들에게 무슨 걸림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겸허하고 진지하게 남북한의 교류를 논의해야 합니다. 佛子(불자)로서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그 공감대를 확산시킴으로써 통일을 향안 민족적 여망에 부응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며칠전에는 평양에서 남북총리회담이 있었습니다. 비록 만족할만한 성과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어도 남북의 고위당국자들이 평양과 서울을 오갈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큰 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금년 봄에는 남북한 탁구 단일팀이 세계의 정상에 올라 우리 칠천만 민족에게 자부와 긍지를 안겨 주었습니다.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가슴에 우리 한반도 지도를 새기고 우승대에 서 있는 모습은 참으로 대견하였습니다. 정치와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이와 같은 ‘만남’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남북대화가 이렇게 늦어진 점에 대해서 우리는 부끄러운 감정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가장 원만하고 보람찬 결과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돌이켜보면 불교는 우리 민족과 그 운명을 함께하여 왔습니다. 4세기 후반 북녘 땅에서 스며들기 시작한 佛恩(불은)의 향기는 1천 6백여 성상을 거치면서 山河(산하)의 곳곳에 그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때로는 국난극복의 현장에서, 혹은 민족화합의 지렛대로서, 또 어떤 때에는 인류양심의 대변자로서 불교는 끗끗히 이어져 왔습니다. 실로 불교는 한국민족의 주체성 확립과 문화적 자존심을 대변해온 민족의 종교인 것입니다. 지금 남한에는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이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여전히 가장 많은 敎勢(교세)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 비록 불교를 내세우지 않아도 그들 내면의 情緖(정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 비록 불교를 내세우지 않아도 그들 내면의 정서는 불교적 체취를 지니고 있습니다. 日帝(일제)의 질곡을 거치면서 불교는 다소 위축되는 듯한 위기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불교 현대화의 기치를 내글고 활발한 포교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출가수행승들의 청정성 확립, 재자불자들의 지성화 경향등이 두드려졌으며, 명실공히 한국 최대의 종교로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출가 수행승들의 청정성 확립, 재가불자들의 지성화 경향 등이 두드려졌으며, 명실공히 한국 최대의 종교로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의 불교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북한의 절이나 스님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습니다. 또 대장경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 등 불교학의 연구에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우리마로 옮기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해마다 5백종이 넘는 불교관계 도서들을 간행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불교학 연구도 다양해서 불교교리연구, 불교사연구, 비종교 등의 다방면으로 중요한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남북의 불교교리를 원만히 추진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상호 교환방문을 통한 공동법회 주최라든지, 불교 유적지 발굴에 양측의 공동으로 참여하는 방안, 또는 공동의 관심사를 논의하는 세미나 개최 등 보다 구체적이고 실절적인 교류 논의가 있어야 할 줄 압니다.
불교의 이상이 무엇일까요 ? 저는 한 마디로 ‘화합과 자비의 실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라지고 헤어진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 불자들의 願力(원력)입니다. 화해를 위한 원리가 四攝(사섭)이며 四無量(사무량)이고 六知敬(육지경)입니다. 어느 한쪽을 무시하는 정복적 자세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 단위를 인식하고 공존의 지혜를 키워 나가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반면 그 화해의 실천은 ‘자비’로서 나타나집니다. 이웃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씨, 보시를 생활화하는 폭넓은 인간 방생이어야 말로 우리 불교의 지향점입니다. 극락은 결코 저 하늘 나라의 먼 세계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각오를 지닌 이들이 모여 사는 곳, 착하고 바른 삶이 존경받는 사회야말로 우리들의 이상향입니다. ‘유마경’에서 부처님이 가르치신대로 “心淨卽佛土淨(심정즉불토정)” 마음이 맑은 즉 우리의 대지가 맑아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결코 이데올로기나 국가 권력으이 상이성에 있지 않습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그 삼자(三者(삼자)의 비뚤어진 마음씨들이야 말로 우리가 조복(調伏) 받아야 할 중생계의 병입니다.
친애하는 남북한 불교지도자 여러분 !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서로 질시하고 반목하여 파멸의 길을 걷느냐, 아니면 서로 덥고 이해하여 화합의 새 질서를 펴쳐 나가느냐 하는 극단의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가 佛祖(불조)의 慧命(혜명)을 잇는다는 긍지로서 오늘의 후손들 앞에서 떳떳한 보살로서 기억되기 위해서라도 자그마한 불편과 견해 차이는 이해하는 계기로 승화시켜 나아갸 할 것입니다. 끝으로 이 모임을 주선하여 주신 미국의 한국불자 여러분들, 특해 대원스님, 도안스님, 법타스님 등의 노고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다음 번, 회의는 우리 조국의 한 모퉁이에서 열려질 것을 확신하면서 거듭 회의의 원만한 회향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남북한 불교지도자 여러분! 그리고 7천만 겨레의 앞날에 부처님의 크신 자비광명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두손 모아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종단협의회 회장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서의현 분향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