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통일기원 불교도 합동법회를 보고
김형근(미주현대불교 편집인)
1989년부터 뉴욕에서 합동법회를 구상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40여년이 지난 오늘 날 세계는 동.서 간의 냉전을 거쳐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제도를 40여년간 사용해 본 결과 그동안 축적된 사회주의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고르비의 ‘신사고’로 표현되는 개혁이 진행되다가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하는 개혁이 진행되다가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하는 기이한 현상까지도 나타났다. 이러한 세계변화의 바람이 극동 아시아에도 불어닥쳐 일본과 소련과의 관계, 일본과 북부조국과의 관계, 남북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여파는 미주동포사회에도 불어닥쳐 ‘뉴욕의 남북영화제’, 버클리대학의 종교평화회의가 주관한 ‘남북한 교회학자 심포지엄’, 그리고 지난 5월 뉴욕에서 부터 시작된 ‘북미주 기독학자 회’'의 여파는 전미주를 강타했다. 이에 대한 영향은 태평양 저 멀리 조국의 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필자는 각계 각층의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미주불교계에서는 타분야에서와는 달리 통일을 논할 뚜렷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남과북의 불교도들의 만남을 통해 미주불교계의 통일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뉴욕의 청년불자들 그리고 현 샌프란시스코 보림사 주지로 있는 선우스님을 비롯한 몇 분의 스님과 만나 이것을 진행시키기로 결심을 했다.
1989년 12월 선우스님이 서울에 가 통일불교 운동 세력과 이 문제을 협의하고 돌아왔다. 그후 90년 4월 뉴욕에서 임원기 박사를 회장으로 박성배 교수를 법사로 모시고 활동하던 민족불교회 회원이었던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이 역사적인 행사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구상단계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이하 평불협*(뉴욕)’이 결성된 후였다. 1989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신법타 스님이 서부지역에서 불교인들이 통일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불교인 민족통일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법타스님과 동부지역 ‘평불협’ 회원들과의 만남은 북부조국 불교계의 문을 두드리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 평불협은 나중에 한국의 평불협의 시발이 된다.
조불련에서 평불협(뉴욕)으로 처음으로 답신 보냄
이렇게 해서 시작된 움직임이 ‘평불협’의 제안서가 조불련으로 부터 분단 46년만에 처음으로 긍정적인 서신을 받았으며 또 김형근 사무국장의 요청으로 뉴욕 롱아일랜드 지창보 교수가 미 국무성으로부터 비자 발급을 약속받았다. 평불협에서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이 우여곡절을 겪고 지난 10월 29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주최로 나성에서 남북해외동포 불교인들이 만나 ‘조국통일기원 불교도합동법회’로 그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모임이 준비, 진행 보도 등 전반적인 면에서 역사적인 행사에 걸맞지 않게 미흡했다는 평을 면하기가 어렵다. 이 모임이 성사되기 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0년 11월 15: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 약칭 평불협’에서 ‘조국의 평화. 통일기원 남북재미동포 불교인합동법회’ 제안서를 회장, 신법타, 사무국장 김형근 이름으로 ‘조선불교도 연맹 중앙위원회’에 제안.
초청대상:
남: 서의현, 송월주, 최지선
북:박태호, 심상련, 최형민
1990년 12월 12일 미국무성 한국과에서 북부조국 대표들의 입국비자를 주겠다는 서신을 이 행사를 돕고 있는 뉴욕 롱아일랜드 지창보 교수를 통해 평불협(뉴욕) 김형근 사무국장이 받음.
1991년 2월 15일: ‘조불련’으로 부터 1월 15일자 회신을 받음.
회신내용: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남북해외 동포 불교인들의 간담회’로 하며 ‘재일본조선 불교도협회’ 홍봉수 단장을 포함한 2명을 행사에 포함시킬 것.
이 답신을 한불협 회장 김도안 스님의 요청으로 ‘한불협’에 팩스로 보냄.
1991년 2. 23일 한불협 상임위원장 기대원스님이 ‘한민족 불교 교류를 위한 밤불교도 연석회의’를 조불련에 제안함.
1991년 3월: 이 문제로 평불협과 한불협 사이에 문제가 생김.
1991년 4월: 김도안, 신법타 두 스님이 평양을 방문하여 행사 주최 ‘한불협’, 주관’ 평불협’이 하기로 ‘조불련’측과 잠정 구두 약속.
이렇게 하여 남북분단으로 흩어진 우리 민족이 각 분야에서 통일을 위하고 반만년 역사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대열에 불교도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신도숫자, 민족적 정서, 불교와 전통문화의 관련성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 볼때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어느 종교보다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통일운동 부분에 관한 그간 불교계의 역할은 국내도 미주도 개신교나 천주교에 비해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남.북 해외불교인들 처음 만남.
이러한 점에 비추어보아 이번 로스엔젤레스에서의 남.북.해외동포 불교도들의 만남은 만남 자체가 모든 이들이 공감하듯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 큰 의의가 행사준비 미흡, 진행의 미숙, 급조된 ‘한불협’ 조직 역량의 한계, 처음 이 행사를 구상하고 추진하였던 ‘평불협’과의 약속 불이행으로 그 의의가 반감되는 느낌이 있으며 아쉬움이 크다.
이 행사의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의 통불협 의장 지선 스님의 회의 참가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통불협에서는 세 차례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런 저런 일들로 어려움을 겪는 이 행사가 무사히 치루어 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고, 10월 26일 나성에 도착한 필자는 신문광고에 난 ‘남북해외한민족 불교지도자 연석회의 ‘광고 내용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도안 스님과 신법타 스님은 5월에 로스 엔젤레스에서 나에게 분명하게 주최는 ‘한불협’ 주관은 ‘평불협’ 미주대표는 ‘한불협’에서 김도안, 기대원, ‘평불협’에서 신법타, 김형근을 미주대표로 한다고 약속을 했다. 회의 대표에는 1인일 경우에는 김도안스님이며, 그 외에는 참관인으로 참여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문광고에는 미주대표에 김도안, 기대원, 신법타, 양일로 되어 있었고, 무려 26명에 달하는 참관인단의 명단에도 나의 이름은 빠져 있었으며, 평불협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법타 스님은 물론 한불협의 부회장 자격이었다.
그러나 신문에까지 난 행사명칭과 미주대표단은 27일부터 그 설 자리를 잃었다. 서울에서 참가하는 남측대표단은 행사명칭을 ‘남북불교지도자 회의’로 한다고 서울에서 발표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으며 한불불교종단협의회에서 10월 25일자로 발행한 연석회의 자료에 의하면 이 회의 명칭 문제는 이미 10월 21일 부터 거론이 돼 10월 24일에 기대원스님으로 부터 회의 명칭을 ‘남북불교지도자 회의’로 북측 대표단과 합의하였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한불협 회장 김도안 스님은 이 사실을 알지도 못하였고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남측 대표단은 단기를 이미 ‘남북불교지도자회의’로 만들어 가지고 왔으며 남측 대표단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행사 비용의 많은 몫을 우리가 내는데 왜 미주에서 대표단을 미리 선임했었는가 하고 불만을 표시하기 까지 했다. 이 정도이고 보니 남북해외동포 불교인들의 모임은 그 막이 오르기도 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그 문제들은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대로 이번 행사에 반영됐다.
28일 북측대표단이 도착하였고, 29일 오전 9시에 기자 회견을 시작으로 행사 진행표가 정해져 있었지만 결국 이 회의 명칭 때문에 회의가 진행되지 못했다. 이 책임은 남북은 책임이 없고, 이 행사를 주최한다고 나선 한불협에 책임이 있다. 이 문제는 맨처음 평불협의 제안서에 대한 조불렵의 수정 제안이 ‘남북해와동포 불교인들의 간담회’이며, 이에 평불협이 이 안을 수용하였고 또 한불협 상임위원장 기대원 스님 제안도 ‘한민족 불교교류를 위한 범불교도 연석회의’였으므로 남측의 ‘남북불교자회’보다는 북측의 ‘북과 남 해외동포 불교인들의 범불교도 연석회의’가 보다 순리적이었다.
조국통일 기원 불교도 합동법회
결국 명칭 문제로 하루를 다 보낸 남북 양측은 오후 5시에야 ‘조국통일 기원 불교도 합동법회’로 합의를 보았다. 30일 간담회에서는 남측이 남북불교교류에 역점을 둬 주장을 했고, 북측은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단순한 남북교류가 의의가 없으며 평화통일을 방해하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핵무기 문제 등에 발언 비중을 두었다. 행사진행에서도 주최 측이 남과 북에 충분한 협의없이 진행시키니 사전에 준비가 안된 북측에서 당황하거나 항의하는 장면이 나타는 것은 소수의 사람으로 행사를 진행시켜는 데서 오는 결과였다.
이번 대회의 문제점과 대안, -재정조달 원칙과 인력문제 대두—
나성에서의 남북해외동포 불교인들의 만남은 어쨌든 1991년도 미주한국불교계에 걸쳐 가장 큰 행사였다. 이 비중있는 행사가 얖에 열거한 진행과 준비상 문제 외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많았다.
앞으로 미주불교계의 발전을 위해 이 문제점과 대안을 말해 보고자한다.
이 행사는 남.북,일본,미주가 참가한 국제행사였다. 아런 국제행사가 원만히 이루어지려면 기본적으로 사람과 돈이 있어야 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 모임을 위해 노력한 사람은 김도안, 신법타, 기대원, 현응스님과 필자였다. 그러나 이 행사가 도중에 김도안, 신법타, 기대원스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면서 세 분 스님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세 분이 합창을 했으나 하모니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핵심 추진 세력이 이렇게 부조화를 이루니 행사가 제대로 될리가 없다. 김도안 스님은 이 행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행사의 성립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회장으로서 많은 인내를하며 정말로 열심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평통자문위원인 도안스님이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말도 듣고, 인격적인 모욕을 후배스님들에게 까지 당하면서 이번 일을 성시시킨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일을 조직적으로 하지 못하고 회장이 스스로 중요한 일에서부터 사소한 일에 까지 직접 뛰어다니는 것은 이런 큰 행사와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다. 이것은 ‘한불협’이 스님들의 조직이며서 재가 불교인들의 참여를 제한했고 재가 불자들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정조달도 재원 모집의 대원칙이 세워지지 못했다. 어느 행사건 행사를 원만하게 주최측의 의지대로 차루려면 자체 경비조달의 능력이 있어야 하며 모금에 대해서 합리적인 방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번 행사는 남북문제에 관한 행사이므로 행사가 이루어지는 현지에서 70% 이상을 철저하게 조달하고 나머지는 외부에서 지원받는 방법이나 원칙이 있어야 했다. 현지에서 재정 조달이 안되니까 많은 부분을 (3천 5백만원)서울에 의지하게 되고 이렇게 되니 미국 스님들의 뜻대로 회의 방향을 끌고 갈 수가 없었다. 이 문제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와 관련된다. 참여범위를 넓게 잡아서 이들과 공개적인 모금의 방법으로 재정을 해결했어야 했다.
어떤 분야에서건 일을 하려면 인력과 재력이 있어야 하는데 나성에서 이번 행사의 경우 인력과 재력의 형편이 이 정도이니 이번 행사의 결과는 이밈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로스 엔젤레스에서 인력과 재력의 조달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것은 10월초 고려사, 평화사, 일승사, 반야사, 법왕사 등 6개 사찰이 ‘한불협’ 탈퇴 성명서를 내고 한불협을 탈퇴하여 이번 행사에 불참한 것도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다.
미주한국불교계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포교를 잘하여 신도수를 늘리는 문제이다. 특히 젊은 신도를 확보하는 일은 미주한국불교계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나성의 이번 행사에서 그대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을 키우는 문제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불사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많은 노력이 미주불교계에 필요하다.
세상이 급변하는 오늘 날 미주한국불교계 앞으로 조국을 위하여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하여 어떠한 임무가 주어질 줄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평소에 철저한 신앙훈련과 더불어 사회 활동에 불교사상을 접목시킬 수 있는 다양한 조직이 미주불교계에 형성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떠난 종교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