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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한국사찰

[미주현대불교 2023. 8월호] 웨스트 버지니아의 아란야사를 찾아가다/ 윤시내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3.12.11|조회수25 목록 댓글 0

 

 

 

 한국 밖의 한국사찰

웨스트 버지니아의
아란야사를 찾아가다

 

글 윤 시 내

 

 

 

아랸야사 전경

 

아란야사 주지는 해인스님으로 중학교 때 부모님 따라 1986 년에 이민 온 1.5세 스님이다. 전공은 화학. 미국에 온지 12년 후인 1998년 출가했다. 은사 스님은 버지니아 보림사 주지였던 경암 스님이고, 2000 년에 해인사에서 계를 받았다. 경암스님은 2014년 5월에 입적하였다. 그리고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에서 무량사에서 포교를 하던 향산 스님은 입적하면서 해인스님에게 무량사를 넘겨주었다. 그래서 해인스님은 메릴렌드 무량사에서 매주 일요일 세번 법회를 하고 마지막 일요일에는 아랸에서 법회를 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이곳에 경암스님과 향산스님의 부도가 모서져 있다. 이 부도들은 미국의 돌로 이곳에서 제작한 부도다.
이 곳은 미국인이 살다가 집이 불이나 버려진 곳인데, 2003년 1 월에 스님 부모님 도움으로 이 곳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는 한국 사찰이지만 아직 한국불교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랸야사는 경내 부지가 300에이커, 37만평으로 해외에 있는 한국 사찰중에서 가장 넓다. 이 경내에 관음전, 요사채 그리고 창고 등 세 개의 건물이 있다. 이 세 개의 건물중 관음전은 목수와 해인스님, 그리고 해인스님의 속가 동생이 함께 건립하였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요사채와 창고 그리고 다리인 해탈교는 해인스님 혼자서 짓고 놓았다. 건물 내부 장식과 전기도 혼
자 공사를 하여 검사를 받았다. 아랸야사는 산으로 둘러 쌓인 곳인데 경내에는 강물처럼 힘차게 일 년 내내 계곡에서 물이 흐른다. 이 물에 커다란 송어도 많이 살고, 산 속에 곰도 많이 살고 있다. - 편집자 주

 

아랸야사 경내에 있는 미국에서 제작한 경암, 향산스님 부도

 

십여년 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인기 가수, 죤 덴버 (John Denver) 가 불러서 크게 유행했던 노래가 있다. 곡명(曲名)은, “시골길아,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렴 (Take Me Home, Country Road).” 거의 천국이라 일컬을만한 웨스트 버지니아, 불루리지 산맥의 푸른 산이 있고 쉐난도우 강이 흐르는 곳, 시골길아, 내가 속한 그곳으로 날 데려가달라고 존 덴버는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애절하게 노래한다.
이 곡은 한때 무섭게 인기가 높아서 남녀노소 할 것없이 노래의 후렴을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해인스님이 주지로 있는 웨스트 버지니아의 아란야사 (阿蘭若寺)를 찾아가며 이 노래가 줄곳 머릿 속에서 되풀이 되어 돌아갔다.
아란야사는 워싱턴에서 서북쪽으로 약 100 마일, 차로 2시간 거리, 버지니아주와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경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버지니아 주경계선을 넘어 웨스트 버지니아로 들어오면서 길은 2차선으로 좁아지고 지나가는 차들도 줄어든다. 길가에 띄엄띄엄 있는 자그마한 집들, 오래된 주유소, 앞 뜰 테이블 위에 양산을 펼쳐놓고 손님이 쉬어가기를 기다리는 마켓, 벽돌로 지은 작은 우체국, 한적한 시골풍경을 좌우로 두고 구불구불한 길을 달린다. 미국 50주 중에서 46번째 (끝에서 다섯번 째)로 부유한 웨스트 버지니아는 석탄 광산업이 주된 경제활동이고, 대를 이어가며 광부로 일한 주민들 중에는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광부들에게 흔한 Black Lung Disease 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게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러나 웨스트 버지니아 주민들의 애향심은 미국에서 1위이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곳은 호화스럽고 번잡하고 아는 사람 없는 도시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천국이라 부를만한 곳, 산과 강이 어울려 어머니 품처럼 푸근한 산골 고향이다. 고향을 갖고있는 사람은 행복하다지 않는가.

 

 

해인스님

 

주(州{) 도로 55번에서 절 입구로 꺽여들어가는 길 이름이 Buddha. 주변의 경치에 취해 나른해진 나를 번쩍 정신들게 한다.
아란야사 주지 해인스님은 창고처럼 지은 건물 바깥 의자에 앉어있다가 남편과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현충일 공휴일로 아들 가족이 집에 들리는바람에 아란야사 탐방 시간을 오전에서 늦은 오후로 변경해야했고, 어두운 밤에 운전하지말고 절에서 하
루를 쉬어도 좋다는 승락을 받아 남편과 동행한터였다. 중키에 다부진 체격, 햇살에 약간 끄슬린 얼굴,
꾸밈없는 스님의 어조가 상대방을 편안케한다. 스님은 우선 우리가 머무를 방을 보여주련다고 요사체로 우리를 안내한다. 밖에서 보아도 크고 번듯하게 2층으로 지은 요사체는 1층에 사, 오십명이 공양할 수 있는 식당과 부억 시설이 있고 목욕탕, 침실, 창고 등이 넉넉히 자리잡고 있다. 2층은 침실이 5개 있는데 아직 마루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이 요사체 문은 24시간 열려있어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고 스님은 알려준다. 2인용 침대와 1인용 침대가 잘 정돈되어 있는 방을 우리에게 지정해 주고 난 스님은, 냉장고와 창고에 먹을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우리 저녁을 걱정하신다. 부억 시설이 이렇게 훌륭한줄 알았다면 아까 마켓에서 저녁 요기할 빵을 사지 않았을걸, 하는 생각이 스쳐깄다.

 

요사채

절 입구 언덕에 있는 두개의 부도 중 하나는 버지니아에 있던 보림사 주지이며 해인스님의 은사, 경암스님의 부도라 한다. 경암스님과의 인연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스님의 어머니가 보림사에 천불전 불사를 시주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천불전이 완성되어 회향하는 법회에 어머니를 따라 참석한 청년, 정승래( 鄭承來)는 그때까지는 비교적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부처님을 실제로 보고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지만, 책을 통해서 그가 배우고 알게된 모든 종교는 역사적 기록과 현실에 비춰 보았을 때 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포교의 깃발아래 무수한 전쟁이 있었고 죄없는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의 하나님, 은혜 등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고, 무속과 종교의 차이점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 천불전 회향법회에서, 비판만하지 말고 실제로 1주일만 용맹정진에 참가하여 확인해보라는 태범 사형(私兄)의 권고와 지도 아래 기도와 정근, 참선의 일주일을 보내고나니 “젼혀 생각지 못했던 세계, 즉 마음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되었고, “남자로 태어나 한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출가한 사람이 지켜야하는 열가지 계도 다 지킬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태범 사형을 통해 경암 스님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을 때 경암스님은, “절이 잘 되려고 너같은 사람이 왔다”고 기뻐했다.

 

 

요사채 내부

 

도심에서 떨어진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 속에 절을 짓고싶다는 소망은 경암스님이 보림사 주지로 있을때 부터였다. 여러곳을 섭렵한 끝에 이곳 웨스트 버지니아에 154 에이커를 사들였다. 그리고 3~4년에 결쳐서 해인스님 부모님이 시주한 15만불과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거의 300 에이커가 되는 땅을 4번에 나누어 사들였다. 동네에 사는 땅 주인이 마지막 남
은 땅, 69 에이커를 사지 않겠느냐는 문의를 받고서는 경암스님과 같이 보시탁발을 나갔었다. 신도들 집을 찾아가 불사 시주를 부탁하면 신도들은 누구나 반갑게 스님들은 맞이하였고, 형편이 닿는대로 천불, 이천불, 오천불 기꺼이 시주에 동참하였다. 그렇게 보시받은 돈으로 나머지 땅을 계약하고 다운페이를 할 수 있었다. 이 보시탁발을 통해 해인 스님은
“불사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관음전 내부
관음전

 

아란야사라는 좀 독특한 절이름은 아함경에 근거를 둔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께, 어디에 그들의 처소를 짓는 것이 마땅한가 물었을 때, “목동이 모는 소의 목에 매달린 종 소리가 간간히 들릴 정도의 거리”라는 대답을 들었고, 그러한 곳이 바로 “아란야”라 한다. 즉 마을의 번잡함을 피하여 한적하면서도 수행에 집중할 수 있으며 매일 탁발하러 나갈
수 있는 거리의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다. 아란야사의 법당은 관음전이라 불리우며 그 구조
가 특이하다. 법당 전체가 원형으로 되어있다. 법당 바깥의 짧은 층계를 올라 안으로 들어서면 벽 대신에 넓고 깨끗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둥그런 방 내부를 가득채우고, 한창 피어난 흰색, 자주색 꽃과 싱그러운 화초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편안한 의자가 방문객에게 와서 앉어 쉬라는 눈짓을 보낸다. 건축잡지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만치 정갈한 아름다움과 고요함이 조화로웁다. 이곳도 24시간 열려있으며 누구던지 와서 쉬고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해인스님과 신도들이 법당터를 둘러보고 있다.

 

원형으로 된 층계를 올라 3층으로 가면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법당이다. 윗 사진의 유리창 밖 으로 보이는 다리는 경내를 흐르는 시냇물을 건너 앞으로 지을 산속의 대웅전터로 이어진다. 이 다리는 이름하여 해탈교/불이교(不二橋), 지난 3월말에 완공되었으며 아래와 같은 동판이 붙어있다.
하룻밤을 편히 쉬고 아침 일찍, 공양하라는 소리에 부지런히 식당으로 나가보니 보살님 두 분이 벌써 아침 공양을 다 준비해놓으셨다. 한 분은 해인 스님의 어머니, 다른 노보살은 메릴랜드에서 두시간도 넘게 운전하여 오늘 아침 아란야사에 오셨다고 한다. 따끈한 밥에 잘익은 양배추 물김치와 두부전은 어느 절 밥이 그렇듯이 맛있고 입에 맞는다. 
공양 후 두 보살님을 따라 불이교를 건너 산으로 향한다. 경내에 있는 중장비 불도저, 굴삭기, 대형트럭 등으로 미루어 길을 넓히고 닦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듯 하다. 크고 작은 돌조각들이 깔린 넒은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눈앞이 확 트이도록 시원하고 반듯한 대지가 나온다. 대웅전 자리다. 지금까지 관음전, 요사체, 숙소 등을 짓고, 매달 들어가는 아란야사 경비를 줄이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우물을 파고, 몇 차례에 걸쳐 태양력 발전시설을 확충하는 동안 스님은 건축기사, 토목기사, 전기 기술자가 다 되었다.
대웅전 터를 보고 빙 둘러서 산을 내려오다가 중장비 운전기사(?)와 같이 우리가 방금 내려온 산으로 향하는 해인스님을 만났다. 이 큰 불사를 거의 혼자서(스님은 신도들의 도움과 보조를 많이 받는다고 하지만) 하고있는 스님의 굳은 불심이 보배로운 열매를 거두기를 축원한다.

 

윤명자 (필명 윤시내)
워싱턴 소재 세계은행에서 1998년 은퇴 한 후
메릴랜드주와 워싱턴 DC 법원에서 한글 통역사로 일하는
틈틈이 여행도하고
합창단 Arioso Chorale 의 멤버로
1년 3회 졍기연주회에 참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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