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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생사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과 생사윤회의 고통이 사라진 열반을 그 궁극적 목표로 한다. 생사윤회의 세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로 설해지고 있는 바, 해탈과 열반은 결국 이러한 육도를 초월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초기경전의 하나인 〈우다나〉에서 부처님은 열반에 대해 “비구들이여, 이러한 곳이 있다. 그곳에는 땅.물.불.바람의 4대가 없다. 그곳은 천상의 세계도 아니다…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니며,
해와 달도 없다…그것은 다름아닌 세상의 끝이다.”라고 설한다. 이러한 가르침 등에 근거하여 열반의 세계는 육도의 하나인 인간세계 저 너머의 초월적 경지로 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올덴베르크와 리스 데이비스 등이 열반을 무(無) 또는 단멸(斷滅)의 상태로 이해하고, 아놀드 토인비가 자기 멸각(self-extinction)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그러나 열반을 ‘나’도 없고 ‘세계’도 없는 초월적 허원적멸(虛遠寂滅)의 세계로 단정짓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열반은 참으로 보기 어렵다. 진리는 결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열반은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상락아정’으로 충만된 ‘절정의 삶’
‘생명의 불길 꺼진 상태’해석은 오해
중아함 〈공경경〉에는 열반이 허원적멸의 상태가 아님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언급이 있다. “만일 비구가 계신(戒身)을 갖추게 되면 정신(定身)을 갖추게 된다. 정신을 갖추면 혜신(慧身)을 갖추게 되고, 혜신을 갖추면 해탈신을 갖추게 된다. 해탈신을 갖추면 해탈지견신을 갖추게 되고, 해탈지견신을 갖추면 반드시 열반을 갖추게 될 것이다
.” 이 가르침은 분명 열반이 무나 단멸의 상태가 아니라 오분법신(五分法身)의 힘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임을 말해주고 있다. “열반은 궁극적인 소멸의 상태가 아니다. 거기서는 지각도 감정도 정지되지 않는다. 반대로 지각은 초감각적 차원으로 승화되며, 그것을 초지각이라고 부른다. 단멸되는 것은 강박적 충동들이다.”라는 한 태국 스님의 설명은 〈공경경〉의 연장선상에 있는 주장이라 여겨진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 nirvana(팔리어는 nibbana)의 음역으로서 ‘불어서 끄다(吹滅)’는 의미의 동사 nirva에서 파생된 말로 ‘불길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그리하여 열반은 흔히 ‘죽음’의 의미로 쓰이기까지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죽음을 그렇게 부른 데서 연유한 것이지만, 사상적으로는 몸과 정신이 모두 남김없이 없어진다〔灰身滅智〕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무여열반은 어디까지나 부차적.파생적인 개념이며, 열반의 원형은 현재열반(現在涅槃)이라고도 불리우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열반을 윤회생사의 현실세계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존재영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윤회(생사의 세계)는 열반과 아무런 구별이 없다. 열반 또한 윤회와 아무런 구별이 없다. 열반의 실제는 그대로 윤회의 실제이다. 둘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도 없다.”라는 용수(龍樹, Nagarjuna) 보살의 주장은 참으로 온당하다 하겠다. 훗날 법상종(法相宗)에서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머물 곳이 없는 열반)의 개념을 제시한 것은 무여열반의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무주처열반은 유여열반의 개념을 더욱 실천적이고 역동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부처님은 열반을 가리켜 절대안온, 최고의 안락, 안전, 섬, 피난처, 평화, 심지어는 불사(不死)라고까지 하였다. 비록 열반이 어원적으로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생명 또는 삶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불길은 탐욕과 증오와 무지, 즉 삼독심(三毒心)의 불길이며, 모든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다.
따라서 열반은 생명의 불길이 꺼진 상태가 아니라 바로 이 탐진치(貪瞋痴) 삼독의 불길,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인 것이다. 바람 잔 숲에 새들이 날고 물결 고요한 호수 위에 고기들이 뛰노는 것처럼, 탐진치 삼독심 및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짐으로써 우리의 순수한 본래적 생명은 비로소 자유롭게 약동하게 될 것이다. 열반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생명의 회복이다.
〈대승열반경〉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열반의 네 가지 공덕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열반은 생명의 불길이 꺼진 상태이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순수한 본래적 생명이 연기도 그을음도 없이 상큼한 향기를 뿜어내며 완전연소되는 상태인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거문고의 비유가 시사하듯, 열반은 삶이라는 악기의 침묵 또는 폐기처분이 아니라, 조율이 잘 된 악기에서 울려나는, 장단이 잘 맞는 아름다운 선율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열반은 ‘잿빛 삶’이나 ‘죽음’ ‘무(無)’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평화.자유.순수〔常樂我淨〕로 충만한 삶의 완전연소이며 욕망의 질적 전환이다. 불교가 인생의 지혜요 삶의 예술이라면, 열반은 지혜 또는 예술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 지혜와 예술이 빚어내는 언제나 푸르른 ‘상락아정의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열반은 ‘삶의 소멸’이 아닌 ‘삶의 질’에 대한 언명인 것이다.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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