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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10월호] 미국 불교의 역사적 배경 (3) - 아시안들의 이민 / 김형근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10.06|조회수33 목록 댓글 0

 

<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44)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
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
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미국 불교의 역사적 배경 (3)
아시안들의 이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60년대는 또한 이민자 불교에 극적인 영향을 준 시기이기도 하다.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자가 급증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가 될 때까지 대다수의 관측자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이민자들은 일찍이 1840년대에 중국 불교도와 일본 불교도가 서부해안에 도달했던 시절에 미국 불교가 형성되는 데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65년 이후에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아시아의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미국 불교에 광범위한 전통들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적인 영향을 줄 것은 확실하지만, 현재로서는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미국 불교에서 이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최초의 선 스승들인 소케이안과 센자키 뇨겐은 이민자들이었으며, 오늘날 개종자 공동체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을 가르쳤던 상당수의 테라와다 비구, 선사, 티베트 라마들도 마찬가지로 이민자들이었다. 미국의 대다수 불교 진영에서는 미국과 아시아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채널들이 있으며, 이러한 채널은 이민자, 난민, 망명자와 개종 불교도 공동체 내의 선생들과 수행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아시아 출신의 불교도 이민자들을 살펴보면 선생들도 있고 일반대중들도 있는데, 이들은 계속해서 미국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피와 사상을 더해준다. 이민자들이 미국 불교에 미친 영향을 넓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과거 이민자들이 미국의 타종교들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1955년 몽고인 티벳트 겔루파 게셰 완걀Geshe wangyal스님 / 미국 뉴져지 도착


이민이 언제나 극적인 결과를 수반하는 대규모의 현상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아주 소수의 신입자들이 소수 개인들의 종교생활에 작은 영향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식민 시대 말기에 가톨릭 공동체는 비교적 소수였으며, 주로 메릴랜드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 영국 가톨릭교도들은 개신교도들에 의해 부과된 법적, 종교적 제약들로 인하여 종교적으로 거의 주목받지 못했었다. 가톨릭교도들은 미사를 종종 집에서 행했으며, 장식 없고 소박한 신앙형식들을 발달시켰다. 그들은 영국 계몽주의 운동의 합리성과 자신들이 속한 영어 사용 공동체의 귀족적 특징을 반영한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1790년대에 접어들어 다수의 사제들이 프랑스 혁명의 혼동을 피해서 도달하자 이러한 현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미국에 오자 그들은 미국 가톨릭교도들에게 색다르면서도 보다 바로크적인 대륙적 의례를 가르쳐주었다. 미국 가톨릭교도들은 바로크식 교회를 짓거나 전반적으로 프랑스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종교생활을 미세하게 변화시켰다. 그 결과 미국 가톨릭에서는 19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앵글로-프랑스적 신앙 형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규모가 더 큰 가톨릭 이민자들이 그 이후 수십 년에 걸쳐서 아일랜드와 독일로부터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사라졌다.
이민은 미국 불교 공동체 전체에도 이렇게 소규모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 공동체에서는 중국인, 티베트인, 태국인, 일본인 및 다른 나라의 불교수행자들이 미국인의 수행방식뿐 아니라 서로간의 수행방식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러 해 전에 남캘리포니아의 산중에 자리 잡은 한 선 센터에서 있었던 일을 그 사례로 들어볼 수 있겠다. 그곳의 젊은 학생들은 체력단련실과 운동센터를 만드는 것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좌선 혹은 무술의 일종인 타이치(t’ai chi, 태극권)보다는 더 격렬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미국인 선생들에게 내놓았다. 심사숙고 끝에, 선생들은 스태어마스터와 노틸러스 같은 헬스기구가 명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단의 젊은 한국 승려들이 이 선 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들은 매일 한 시간씩 힘든 절 수행을 반복했다. 수행과정 중에 에너지를 발산해주고 신체에 자극을 주기위한 방법으로 인식된 절 수행법은 얼마 후 학생들에 의해 그 선 센터의 수행일과에 편입되었다. 불교 전통이 이런 식으로 상호 교류하는 현상은, 비록 확인하기가 어려워 관측자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기는 어렵지만,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머지않아 이런 식의 전통 간 혼합으로부터 독특하게 미국적인 수행 형태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

 

일본 정토진종 사진



대규모의 이민은 또한 미국의 종교 역사에 매우 극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민은 미국 유대교의 경우에서처럼 모든 공동체들의 종교적 구조를 변화시켰다. 19세기를 통틀어서 독일계 미국인 유대교도 사이에서 진보적 개혁 운동이 대두되었는데, 이 개혁파가 미국 유대인 공동체에서 다수를 점유하고 있었다. 개혁 운동은 독일에서 기원했지만 미국에서 특히 강력하게 개혁이 진행되었다. 지도자들은 유대교에 주류 개신교와 유사한 종교 스타일을 부여하려고 하면서 전통적인 유대교의 신앙과 수행을 많이 버렸다. 랍비들은 찬송가를 채택하고 설교도 시작했다. 일부는 예배시간을 금요일 밤에서 일요일 아침으로 옮기기도 했다. 많은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이 신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통적 사상을 덜 중요하게 다루었고,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버렸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런 식의 혁신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는데, 그 당시는 개혁보다 전통 종교적 성향이 더 강했던 엄청난 수의 유대인 이민자들이 러시아와 동유럽으로부터 밀물처럼 미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수십 년에 걸쳐서 이 두 공동체 간에는 첨예한 긴장이 흘렀다. 이것은 오늘날 개종 불교도와 이민 불교도를 분리시키는 그것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20세기 초 이러한 긴장감은 두 공동체들이 잘 어울리며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국의 유대교는 거대하게 확대된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종교적•정치적 차이를 수용한 여러 전통들로, 즉 개혁파, 오도독스파, 보수파, 재건파 전통들로 재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변화는 미국 불교의 정토진종 전통에서도 이미 일어났다. 이 전통에는 일본에서 계속 들어오는 이주민들이 전통 요소들을 가지고 와서 미국화한 정토진종 집단에 지속적으로 유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고, 또 이러한 대규모의 과정들이 어떻게 토착적인 다르마를 형성해가고 있는가를 현재로서는 구별해내기 어렵다. 그렇지만 아시아 이민자들이 줄지 않고 불교도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유입되는 현상은 제1세대의 이민자들과 그들의 미국화한 자녀들에게도 확실하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민은 또한 불교가 어느 날 어떻게 미국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줄 것인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면서 미국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1세 기여의 과정을 거치면서 광범위한 인종 및 민족적 단체들을 대표하는 유대교도와 가톨릭교도는 둘 다 미국 사회의 주변으로부터 그 주류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많은 법률적, 정치적, 문화적 발전상들이 미국 종교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실체들이다. 그러한 발전 중 대부분은 오늘날 대체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민이 어떻게 미국과 해외 공동체들 간에 살아있는 연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국 가톨릭교에 대해서 교황권이 행사하고 있는, 혹은 미국 유대교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행사하고 있는, 혹은 이 두 집단에 대해서 민족적 정체성이 행사하고 있는 복합적인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연계는 미국 불교에서 백인개종자 공동체뿐 아니라 이민자 공동체에서도 형성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매우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개종자들 사이에서 많은 상호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백인 개종자들은 단일한 전통에서, 즉 그것이 테라와다, 선, 니치렌, 금강승 혹은 무엇이든 단일한 전통에서 자신들의 일차적인 영감을 얻는다. 이러한 전통들은 이른바 ‘담론 공동체들’ 안에서 아시아와의 접촉 지점들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불교 전통들은
독특한 문헌과 철학적 유산, 다양한 다르마 수행법들, 서로 다른 아시아 언어의 용어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미국에 도입되었고, 또 차례로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특정 집단들의 역사, 제도적 표현, 아시아와의 지속적인 관계에 영향을 주어 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민자 (그리고 망명자) 불교도들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들” 안에서 이러한 아시아와의 연계를 형성하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미국 내에서 민족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구별되는 그룹들을 말하며, 이들은 가족관계, 종교기관, 정치적 신념, 지속적인 문화적 및 민족적 정체성을 포함해서 유대관계를 고국과 유지하고 있다. 가톨릭교도 및 유대교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대관계의 강점은 여러 세대를 거쳐 가면서 흥하기도 하도 기울기도 하겠지만, 이 집단들은 심지어 미국화가 완료되었을 때조차도 완전히 분리되는 경우가 드물다.
미국에는 미국불교사 책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불교 전통과 단체가 있다. 그렇지만 미국불교연구자들은 이 이야기가 독자들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극적이고 복합적인 중대사건을, 즉 아시아로부터 미국으로의 다르마 전승을 조금 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풍요로운 것이 되기를 바란다.

 

신도들의 공양모습                                                                 로스엔젤레스 태국 사원



*1965년 10월4일 오후 뉴욕 항 남쪽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는 리버티 아일랜드에서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개정 이민법 서명식이 거행됐다. 이 법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발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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