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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세계불교

[2021년 9,10월호] 서구세계에 불이법을 가르치고 있는 현자 무지 바바 (1) / 스텔라 박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10.05|조회수104 목록 댓글 1

< 특별 소개 >

 

 

 

창간 32주년 특별소개 1

 

서구세계에 불이법을 가르치고 있는 현자
무지 바바 (1)

 

 

글/ 스텔라 박

 

 

수많은 추종자를 둔 영적 그루가 된 무지

 


심연을 울리던 무지의 목소리

매일 매일의 명상을 시작하면서 대부분 침묵 가운데 앉아 있었지만 가끔씩은 영성 지도자들의 목소리 녹음을 들으며 수행할 때도 있었다. 처음 무지의 목소리를 만났던 것은 미주현대불교에도 소개했던 명상앱, 인사이트타이머를 통해서였다. 

“옴… 눈을 감으며 시작합시다… 시작이라 할 것도 없지만요….순수의식으로 존재해봅니다. 스크린은 불이 난 장면을 비추지만 불이 난 것이 아닙니다. 홍수가 난 장면을 보여줘도 홍수가 난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아무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스크린으로 존재해봅니다…. ”   

5년인가 6년 전이었던 것 같다. 난 그의 명상 가이드 오디오를 통해, 당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최대 깊이의 고요함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명상 가이드 오디오를 들으면서 몸이 완전히 이완되는 것을 느꼈고 몸과 함께 마음도 죽은 것처럼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매일 매일 약간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삶
의 비밀을 배우지 못한 것과 같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나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임을 깨달았다.
용감한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넬슨 만델라



그의 명상 가이드는 따로 스튜디오에서 한 녹음이 아니라 실제 여러 사람을 앞에 두고 한 것이었다. 음질은 다소 떨어질지 모르나 그 명상 가이드에는 스튜디오에서 만들어낸 음원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아우라가, 파워가 있었다. 

그렇게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고 나니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유튜브를 찾아봤더니 어마무시한 양의 동영상들이 이미 올라와 있었다. 인도와 포르투갈에서 진행했던 삿상에서 한 법문이 대부분이었지만 삿상이 끝난 후, 참가자들이 찬탄의 눈빛으로 그의 손을 잡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흡사 신에게라도 보이는 것 같은 찬미를 보내는 장면들도 볼 수 있었다. 

그후 밤이면 밤마다 그의 법문을 들었다. 존재(Presence), 셀프(Self), 의식(Consciousness), 신성, 불성… 무엇이라 부르더라도 그 에센스가 달라지는 건 아닐 게다. 그의 여러 법문을 나의 언어로 바꾸자면 “에고의 노력을 완전히 내려놓고 신성이 살아지도록 허용하라.”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써놓고 보니 너무 단순화시킨 깔대기 논리는 아닌가, 싶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들은 기독교, 그리고 힌두교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이런 경계 또한 우리들의 잣대가 아닐까. 공부를 더할수록 나는 대승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선불교와 힌두 성자들이 얘기하는 불이법 역시 같은 것을 제한된 언어로 표현하느라 용을 쓰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무지는 영국의 영성 서점인 ‘왓킨스(Watkin’s)’가 선정한 ‘2021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성 교사 리스트(Spiritual 100 list for 2021)’ 80위에 올라와 있다. 그가 영성의 길로 들어서게 된 여정에 있어서 왓킨스 서점은 매우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하는데 바로 그 서점에서 무지를 리스트에 올려놨다는 점은 ‘섭리’, 또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들먹이게 한다.  

 

                               법문을 하는 무지                                         무지의 고향인 자메이카 포트 안토니오의 풍경


사람들은 의미있는 삶을 위한 비밀을 발견한 그의 여정에 매혹된다. 인도의 그루인 스리 하릴랄 푼자(Sri Harilal Poonja)의 제자인 무지는 현재 포르투갈의 아슈람에 머물며 리트릿과 삿상을 열고 법문을 한다. 그의 철학은 간단하다. 우리가 본성에 연결된다면 보다 진실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삿상에는 늘 구름떼 같은 대중들이 몰려들어 흡사 집단 테라피 세션을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그는 각 개인들의 개별적 질문에 온전히 집중해준다. 질문하는 이를 정말 소중히 여긴다는 느낌과 함께 답변을 해주는 것이다. 그 답변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고민을 일순간에 해결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앉아 있으면 평화를 맛본다고들 한다. 



자메이카에서의 어린 시절

무지라는 이름은 그의 성(Last name)인 무영(Moo-Young) 중 무(Moo)에 인도에서 스승을 부르는 칭호인 지(Ji)를 합한 것이다. 그의 속명은 앤소니 폴 무영(Anthony Paul Moo-Young)이다. 1954년 1월 29일 자메이카 포트 안토니오(Port Antonio)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에노스 무영, 어머니는 유페미아 바틀렛(훗날 성이 해밀턴으로 바뀐다)이었다. 사진을 보니 아버지는 영락없는 아시안의 얼굴이다. 혹시 그의 유전자에 한국인의 피가 있는 건 아닐까, 잠깐 머리를 굴린다. 한국인인 게 그 뭣이라고.  

무지가 1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영국으로 이주했다. 초기 자메이카인의 윈드 러시(Wind Rush) 이민이었다. 훗날 그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큰 누나 체리(Cherry)는 생모인 유페미아와 함께 이때 영국으로 건너갔다. 

강보에 쌓인 앤소니는 아버지와 그의 이모 유니스에게 맡겨졌다. 고타마 싯다르타와의 차이점이라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국으로 떠났다는 건데, 엄마와 같은 사랑을 준 이모를 두었다는 점에서는 붓다와 어린 시절이 매우 유사하다. 

무지는 이모를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어머니로 여기며 성장했다. 이웃들은 유니스 이모를 ‘미스 나이씨(Miss Nicey 좋은 분이라는 뜻)’라 불렀고 아버지인 에노스를 파파 에노스(Papa Enos)라 칭하며 친근감과 사랑을 표현했다. 아버지인 에노스 역시 매우 헌신적이고 다정했으며 모두에게 친절하고 평온하며 따뜻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무지의 부모인 유페미아 바틀렛(좌)과 에노스 무영(우). 아버지엔 에노스는 완전한 아시안의 외모를 갖고 있다.


아버지인 에노스는 3남매 중 장남으로 누이 동생인 메이블(Mabel), 막내동생인 조지(George)와 나이 들어서도 함께 살았다. 그는 영국 왕립 공군 장교로 몇 년간 복무한 적이 있었고 집에서 1마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자메이카 리프 호텔의 회계사로 일했었다. 아들인 앤소니는 호텔 사무실로 아버지를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어린 시절 무지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각별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무지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1인용 트윈 사이즈 침대에서 아버지와 함께 잠들곤 했던 추억을 종종 언급한다. 아버지, 유니스 이모, 그리고 남매들과 함께 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사랑, 장난스러움, 그리고 깊은 안정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무영 가족은 식료품점이자 살롱 바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가게 뒷편에 거주하는 집이 있었다. 사업체 운영은 조지 삼촌(Uncle George)이 했다. 가족들은 무영 가(家)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큰 집에 각기 다른 구역이 있어 삼촌네 가족과 고모 가족들이 따로 또 같이 사는 구조였다. 이처럼 대가족이 함께 하는 삶은 아이가 자라는데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앤소니 즉 무지(맨 오른쪽)가 사촌(왼쪽에서 오른쪽) 조앤, 마이클, 로저, 조지아 무영과 함께


1962년, 무지의 아버지인 에노스는 조지 삼촌과 함께 자메이카의 수도인 킹스턴으로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갑작스럽게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도 가까웠던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죽음은 당시 8세였던 무지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지의 양육을 책임지게 된 조지 삼촌은 때론 강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무지를 양육했다. 이로 인해 무지의 삶은 급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변화는 훗날 무지를 영성지도자로 만드는데 기여하게 된다. 

조지 삼촌은 4자녀를 둔 근면한 가장이었다. 종교적 가치관이 강했던 그는 당시의 무지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넘치는 사랑이 아니라 엄격한 훈육이라고 생각했다. 삼촌이 보호자가 되면서 양육방법도 바뀌어진 셈인데 8세였던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 편안하거나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소년 무지는 힘든 집안일을 해야 했고, 방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놀지 못하고 식료품점에서 일해야 했다.    

언뜻 들으면 그의 어린 시절이 미성년 노동 등 아동 학대로 점철된 것 같지만, 우주는 그를 영성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고통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준 것이었다. 이 시기에 무지는 삼촌과 함께 성경을 친밀한 방법으로 처음 접하게 된다. 무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기 전, 성경 구절을 읽고 조지 삼촌, 사촌 조앤(Joan)과 함께 토론을 해야만 했다. 이른 아침 아직 해뜨기 전이라 그는 촛불을 켜고 모기장 아래에서 성경 구절을 읽었다. 무지가 성경 이야기,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옛 예언자들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깊은 사랑을 키운 것은 그 이른 아침의 독서 덕분이었다. 훗날 그는 어린 시절,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삼촌의 훈육이 실제로 그의 삶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지의 어린 시절 성경을 읽게 했던 조지 삼촌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조지 삼촌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그의 자녀들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이제 틴에이저가 된 무지는 유니스 이모,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자메이카에 머물며 다시금 따뜻한 모성애와 자유, 놀이가 가득한 세계를 즐길 수 있었다. 

 


생모가 살고 있는 영국으로 

1968년, 14세가 된 무지는 생모 유페미아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서신 교류는 아들과 어머니 양쪽에게 함께 하고 싶다는 동경의 마음을 일깨웠다. 실제, 유페미아는 아들 앤소니, 즉 어린 무지를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자메이카로 왔었다. 유페미아는 아들 앤소니를 데리고 영국으로 입국했지만 무지는 서류미비로 입국을 거절당했다. 그는 공항에서 하루를 억류당하고 다음 날 자메이카로 송환됐다. “강렬한 경험이었어요. 그 일을 경험하고 나니 삶의 모든 일들이 거저 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며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감사하게 되더군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지는 16세가 된 1970년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에 있던 가족들과 합류했다. 그의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된 것이다. 이 모든 움직임을 이뤄낸 것은 은총(Grace)이었다.  

어머니는 영국의 브릭스톤(Brixton)에서 살고 있었다. 무지는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긴 것을 ‘공동체의 큰 쿠션에 안겼다’고 기억한다. 특히 가까운 곳에 사는 큰 누나 체리(Cherry)는 더더욱 그랬다. 1살 때 헤어졌지만 무지는 큰 누나 체리에 대해 “자메이카를 떠난 적이 없는, 자메이카 원주민처럼 보였다. 나는 체리 누나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누나는 음악을 연주했었다." 고 기억한다. 

20대에 그는 워털루(Waterloo)에서 대학 과정을 마쳤다. 그후, 무지는 몇 가지 특이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런던에서 길거리 아티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체어링 크로스 로드(Charing Cross Road)에 있는 국립 초상화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 근처에서 차콜과 파스텔로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이었다. 당시 무지는 결혼하여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고 있었다. 안정적이지는 않았어도 그의 그림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당시 아내가 근무했던 셸(Shell)의 매니저들은 무지에게 떠나는 직원들의 캐리커처를 그려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으니까. 훗날 무지는 장소를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에 있는 유명한 샤프츠베리 애브뉴(Shaftesbury Avenue)로 옮겨 계속해서 초상화를 그렸다. 전 세계 관광객을 만나던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 매우 흥미롭고 모험적인 시기였다. 

 

길거리 아티스트로 여행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무지



누이가 총에 맞으면서 시작된 영적 탐구

31세가 된 1985년, 그의 거리 예술가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사건, 더 나아가 청년 앤소니가 훗날 전세계 수백만 추종자를 둔 영적지도자이자 그루이자 ‘브릭스톤의 붓다’인 ‘무지’로 ‘재탄생’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큰 누나인 체리(Cherry)가 경찰의 총에 맞고 장애자가 된 것이다. 이는 악명높은 브릭스톤 폭동(Brixton riots)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과 제자들조차 이 사건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꾼 사건임을 잘 알지 못한다. 

1985년 9월 28일(토), 이른 아침인 6시 30분에 무지의 전화가 울렸다. “누나가 경찰의 총에 맞았어요.”라는 전화였다. “무슨 말씀이시죠?” 영문을 모르는 무지는 전화 속 목소리에 이렇게 질문했다. 전화 속 목소리는 그에게 빨리 체리 누나의 집으로 가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지가 서둘러 체리 누나네 집으로 향할 때까지도 브릭스톤은 아직 고요했다. 

무지가 체리 누나 집에 도착했을 때, 문 밖에는 경찰관 두 명이 서 있었다. 경찰은 사소한 범죄 전력이 있는 체리의 아들을 찾고 있었다. 문을 부수고 체리의 집에 돌진했을 때 체리의 아들 마이클(Michael)은 집안에 없었다. 체리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다가 소동에 잠이 깼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더글러스 러브록(Douglas Lovelock) 경감은 그녀를 마이클로 착각해 총을 발사한 것이다. 당시 37세로 6명의 엄마였던 체리는 자신의 집안에서 경찰에게 총격을 당했다. 러브록 경감은 불법적이고 악의적인 중상해를 가한 혐의로 1987년에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체리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무지는 체리가 치료를 받고 있는 세인트 토마스의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의 의식은 살아 있었지만 육체는 심하게 다쳤다. 몇 시간 후 무지가 브릭스톤의 체리 누나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고 동네에서는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다. 도로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지가 경찰서로 갔을 때에는 이미 경찰들이 폭동 진압 장비를 갖춘 말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무지는 경찰관에서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브릭스톤 힐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군중들의 함성을 들었다. “체리 그로체(Cerry Groce)가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는 유언비어도 떠돌았다. 마치 화염병 하나가 던져져 불길이 치솟은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무지는 일단 그곳을 피했다. 
 
체리 누나가 경찰의 총을 맞은 날로부터 며칠간 브릭스톤의 아프리칸 카리비안 커뮤니티와 공권력 사이에는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심각한 인종 폭동을 야기했다. 당시 폭동으로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53명이 부상을 당했었다. 

이후 며칠 동안 브릭스톤이 화염에 휩싸인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무지는 ‘위로와 중재의 목소리’가 되고자 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아요. 폭력이 지나칩니다. 우리 모두 진정해야 해요. 우리가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닙니다.” 라고 무지는 목소리를 높였다. 무지의 평화적인 호소는 수많은 지지를 가져왔다. 

며칠 뒤, 그는 제레미 팍스만(Jeremy Paxman)과 TV 인터뷰를 했고 다우닝가 10번지(10 Downing Street, 영국 수상 관저)에 청원서를 전달했다. 

 

                                                                                          무지의 삿상은 집단 테라피를 방불케 한다


그때 당시의 TV 장면을 보면 무지는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체리 누나가 입은 상처에 대해 의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체리 누나는 이날 사고로 평생 장애자로 살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체리는 자신이 겪은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결코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았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도 인간인지라 가끔씩은 좌절했지만, 그녀는 부드러운 심장을 가졌고 항상 친절을 베풀었다. 

2014년 조사 결과 그녀의 죽음은 총격과 직결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체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체리 누나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주어졌기에 어떤 면에서는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된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했어요.” 라는 무지의 증언은 이 두 남매가 얼마나 현재 삶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그 선물을 받아들였는가를 대변해준다.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던 체리는 어느 날, 무지에게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 지역에 있는 자신의 집 벽에 벽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무지는 자라면서 두 사람이 알고 있는 자메이카 시골의 전형적인 풍경을 묘사한 아름다운 벽화를 여러 개 그렸다. 체리는 이 그림들을 너무 좋아해서 그에게 약간의 돈을 주었다. 그 돈으로 무지는 훗날 인도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신에게 하는 듯한 찬미를 보내는 추종자들


무지는 다른 자메이카 예술가들과 함께 브릭스톤 중심에 있는 성 매튜 교회(St Matthew’s Church)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생명의 나무’에 디자인을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체리는 부상으로 인한 합병증이 계속되어 결국 2011년, 63세에 신장 장애로 사망했다. 누이의 불구됨과 죽음은 그의 ‘거리 예술가로서의 한 시대’를 접게 만드는 원인, 그러니 결국에는 ‘은총’이었던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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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금바위 | 작성시간 21.12.23 심연을 울리는 무지의 목소리에서
    신학 공부와 크리스챤 세계에서 성장한
    박 기자님의 폭넓은 불교에 대한 이해성에서
    나온 설명에 감사 드립니다
    홍익학당 윤홍식 대표의 공부와 비슷한 MESSAGE를
    전한다는 인상을 받았읍니다

    무지 MASTER가 실제로 유마경을 강의 할 정도로
    불이법에 정통 하였는가?에는
    한국의 백봉 김기추거사님을 뵙고(1977년)
    일주일동안 잠안자는 공부를 통하여
    평생 잠 안잘수 있다는 경험과 설법으로
    한국의 유마거사님은 백봉김가추 거사님이라는
    신념이 세워졌음으로 불이법문에 관심이 많음을
    전합니다
    의심은 조금 가지만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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