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몽골불교탐방기 (7)
한민족의 사촌이 사는 만주,
소수민족 몽골족은 불교를 신앙
너무나 멀어진 우리의 옛 고향, 조선족이라는 디아스포라 비애
현재 몽골은 외몽골과 내몽골로 나눠져 있다. 외몽골이 몽골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몽골도 무시할 수 없는 몽골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중국 치하에서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내몽골 자치구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 자존심은 아직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곳이 바로 내몽골이다. 내몽골에는 아직도 장전불교와 티베트 불교 그리고 순수한 몽골 불교 전통을 보존하여 지켜 가고 있다.
나는 몇 년 전 내몽골을 기행하면서 특히 불교에 관심을 갖고 조사를 한 바 있다. 단동이나 집안은 최근 많은 한국 분들이 다녀가고 있고, 유적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아서 내가 구태여 사족을 달지 않아도 될 듯해서 상세한 소개는 필요 없을 듯하다. 일반적으로 길림성 집안에서 통화를 거쳐서 백산-연길-백두산(장백산) 답사 또한 정해진 코스지만, 나는 방향을 내몽골로 틀었다. 백두산은 네 번 정도 가봤기에 집안-통화-요원을 거쳐서 내몽골 통료(通了)로 향했다. 대련-단동-환인을 거치면서 청나라와 만주족이라는 키워드가 뇌리를 점령했다.
청나라 태조 천명제(天命帝, 1559년 2월 21일~1626년 9월 30일) 누루하치
청나라는 긴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 대륙을 지배한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1616년 누르하치(재위:1616~26년)가 만주를 통일하고 여진족(만주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후금(後金)으로 정하며 시작되었다가 후계자 홍타이지(재위:1626~43년)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1636년) 주변 각국을 침공,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고,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재위:1643~61년)때 청의 팔기군은 산해관을 넘어서 명(明)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아서(1644년), 1912년까지 300년간 중국대륙을 지배했다.
청은 1911년 10월 10일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1911년 멸망하고, 혁명의 중심인물 쑨원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수립하였다. 중국의 다른 왕조와는 달리 300년간 불과 몇 명의 황제만을 배출했는데, 강희제(康熙帝 1654년 5월 4일~1722년 12월 20일)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1661년~1722년)로서 무려 60년을 황위에 있었고, 제6대 황제인 건륭제(乾隆帝 1711년 9월 25일~1799년 2월 7일)도 황위(재위 1735년~1796년)에 오르고 나서 60년간 중국대륙을 지배했다. 그렇다면 만주족은 어떤 민족인가?
만주족(滿洲族)은 만주(중국 동북부;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 연해주에서 발상한 퉁구스계 민족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여진족의 후신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뜻으로 후금(청나라)을 건국하였다고 하는데,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지역에 살았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2000년 경 조사로는 중국에 1,068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지금도 만주족 자치현이 몇 군데 존재하고 있다. 과거에는 만주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청나라 시대에 진행된 민족 문화의 한족화(漢族化)로 인해 현재는 만주어의 사용 인구는 오히려 감소하여 극소수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 중국어를 사용한다. 현재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시버족은 건륭제 시대에 원정군으로 참가하여 정착한 만주족의 후예이지만, 스스로 만주족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으로 간주한다.
만주족이 퉁구스계라면, 그리고 퉁구스어계통이면 한민족과는 어떤 관계가 되는지 흥미로운 일이다. 사촌정도 된다고 보는데, 아직도 논란이 많은 것을 보면 쉽게 단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얼굴을 보면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딘지 뿌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발해-금나라-청나라로 이어지는 단군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앞으로 더 리서치 해야 된다는 숙제를 안고 이 정도 선에서 만주족 이야기는 접기로 하겠다. 이번 기행에서는 만주, 몽골, 장전불교와 열하일기, 조선족에 이르는 자료 섭렵이 좀 필요했다.
만주, 몽골, 장전불교와 열하일기, 조선족에 이르는 자료들
이번 기행 루트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라는 우리 민족사의 큰 부분을 포함시켜야 하지만, 이 부분은 따로 기술해야할 분야라서 일단 이번 기행에서는 인지만 하고 자료섭렵과 구체적인 현장답사 또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 분야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현장답사 또한 구체성을 띠어야 하고 기술 또한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 언젠가는 다뤄보기로 하고, 다만 이 방면에도 관심을 갖고 지식을 쌓고 현장 답사도 하고 자료도 모은다는 자세이다. 본래의 나의 관심 분야가 불교이다 보니, 다른 분야는 좀 관심이 덜 갔으나 청나라 만주족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조선 고구려 발해라는 우리 민족사의 주제들이 뇌리를 점령함은 어쩔 수 없었다.
길림성 통화에서 내몽골로 향하면서 요원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중국에서는 동북삼성(3省)과 내몽골 동부 지역을 같은 지리권역으로 분류하는 것 같았다. 요원에서 내몽골 통료까지는 버스로 갔는데, 만만치 않는 여정이었다. 이 지역은 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권이었다는 역사적 현장이지만, 지금은 동북 삼성 가운데 요령성과 내몽골 지역에 속했다. 통료와 적봉을 다니면서 중간 중간에 조그마한 타운들인 치(旗)라는 내몽골 자치구 행정단위 도시들을 찾아 다녔다. 내몽골 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 북부에 위치한 자치구로서 몽골어로는 ‘외뷔르 몽골’이라고 표기하는데 ‘외뷔르’는 몽골어로 ‘남쪽, 안쪽, 앞쪽’을 뜻한다. 즉 ‘외뷔르 몽골’은 한국어로 직역하면 ‘내몽골’ 또는 ‘남몽골’이라는 뜻을 갖게 된다. 동북부 지역(후룬베이얼 시, 싱안 맹, 퉁랴오 시, 츠펑 시)은 동사맹이라고 하여 만주(둥베이=東北)의 일부로 취급한다.
내몽골 자치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자면 끝도 한도 없을 내용이지만,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사실 내몽골은 이미 한족들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한족이 내몽골 자치구 주민의 80%를 차지하고 몽골족은 17%를 차지한다고 하며, 마오쩌둥 시대에 목축 경제의 집단농장화에 따라 정착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초원대신, 거의가 도시나 타운에서 살고, 몽골어와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통료에 있는 내몽골 민족대학
몽골지역의 역사를 보면, 후한 시대(25-220)에는 흉노가 한에 굴복, 하투(河套=허타오는 중서부 내몽고의 지역으로 황하 중상류 유역의 평원, 고원 지구)지역에 정착했고, 서진 시대에는 하투의 흉노의 대추장 유연(劉淵)이 한(漢)왕조를 이 지역에 세우면서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된다. 수. 당 시대는 다시 하투 지역을 점령, 한족들을 정착시켜 나갔으나 당의 몰락과 함께 중단되었다. 내몽골의 동쪽에서 힘을 키워오던 거란은 이 틈을 타 요나라를 세우고 내몽골 일대를 장악하지만 후에 여진족에 멸망하고 서쪽으로 이동해 서요를 세운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워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했다. 1206년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고, 1227년에는 서하를, 1234년에는 금을 점령했다. 그의 후손들은 1279년에 중국을 정복하고 원을 세웠다. 원은 1368년 한족이 명을 세우면서 다시 몽골 고원으로 되돌아왔고, 명은 현재 자리에 만리장성을 세웠다. 만리장성은 내몽골의 남쪽 경계와 대체로 일치한다. 17세기 만주족이 몽골족을 복속하고 1644년 명을 정복한 후, 청을 세운다. 만주족의 청조는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 등으로 나누어 지역별로 다른 방법을 통해 통치했다.
약 2주간의 기행을 마치고 요령성 성도 심양으로 향했다. 심양은 중국에서도 빠지지 않는 대도시이다. 여행은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이번 기행은 철저하게 배낭에 의한 탐사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리서치 여행이어서 경비 또한 예산을 넉넉하게 세울 수 없었다. 빠듯한 일정과 경비로 비교적 넓은 공간을 소화하다보니 시간이 짧고 치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인들에게는 무조건 3성급 이상의 호텔에서 묵게 하고 있어서 숙박료 또한 간단치가 않았다. 게다가 동북삼성과 내몽골 호북성 등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탐사방문이 잦은 곳이다. 동북삼성의 경우, 집안 같은 데에서는 한국인들이 의당 고구려 옛 도성이나 광개토대왕 비석 등을 보려고 온다고 하지만, 적봉 등 내몽골의 홍산문화 고조선 고구려 유적 등지를 찾는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는 것 또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이런 유적 위주의 기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국인이기에 항상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러저런 고생을 하면서 여정을 마치고 심양에 오니 한결 마음이 놓이긴 했으나 숙소가 또한 문제였다. 그래서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탑가(西塔街)로 향했다. 한국에서부터 메모해 두었던 주소를 들고 민박집을 찾았는데 너무나 친절하게 맞이해 주어서 그동안 쌓인 피로를 일시에 날릴 수 있었다. 1인 1박에 100원(元)이면 비싸지도 않고 조식 까지 제공해 주었다. 방도 호텔 룸 못지않았고, 2인실을 혼자 쓰도록 하고 방안에 화장실 샤워시설까지 갖춰져서 불편함이 없었고, 와이파이(wifi)에 한국tv 시청까지 가능했다. 일단 여장을 풀고 조선족 식당에 가서 한국 음식을 먹고 숙소에 와서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약 2주간의 빠듯한 여정에 몸이 지쳤던 모양이다. 자고나니 아침이었다.
모처럼 아침 밥상을 받고 보니 식욕이 돋으면서, 집에 온 느낌이었다. 여행객은 나 한사람이고 다른 몇 분 들은 사업차 이곳 심양에 와 있는 분들이었다. 인간에게 음식은 너무나 중요한 삶의 요소요 조건이다. 또한 같은 언어를 쓰면서 살아가는 동족이라는 것도 삶의 일차적 군집 단위조건이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담소를 나눈다는 것은 동족이라는 강한 유대행위요 공동체 소속원의 정체성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같은 동족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족과 같은 디아스포라가 있다. 저 이스라엘 민족이나 팔레스타인 등에 비하면 중국에 사는 조선족의 디아스포라는 그래도 삶의 조건이 좀 더 나은 편이다. 같은 한국인 출신이지만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이라는 디아스포라는 정체성과 여건이 중국의 조선족 보다는 더 어려워 보였지만, 중국에서 만난 조선족들의 삶은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수차례 다니면서도 이번처럼 진지하게 조선족이라는 디아스포라는 개념을 심각하게 사유해 보지 않았었는데, 이번 기행에서는 리서치를 좀 할 필요를 느꼈다. 마침 서탑가에는 신화서점 분점이 있었는데, 조선족과 한국인을 위한 서점이어서 관련 서적들이 많아서, 자료를 구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신영숙 저>를 읽고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 내 56개 소수 민족의 하나로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법적인정을 받은 이름이 ‘조선족’이다. 그 전에는 조선인, 고려인, 한인(韓人). 한교(韓僑)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선족 중국 이주의 역사는 명말 청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이후에는 조선농민들이 동북지역으로 이주해 왔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되자, 농민들과 애국지사 의병투쟁참가들과 그 가족들이 대거 이주해 왔고,1931년 통계에 의하면 6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반도에서 ‘집단이민’ ‘개척이민’을 모집, 강제적으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시켰는데, 1945년 8월경까지에 이르면 216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 읽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종교현황에 관한 통계가 있어서 소개해 보면 1932년 연변일대는 기독교신도가 1만6천 2백 명 정도, 천주교는 1934년경 동북조선인들 가운데 신도가 1만 1100 명 정도, 불교의 경우 4월 8일 불탄절에는 일반인들도 절에 갈 정도였고, 1934년경 연변일대는 절14개에 신도 2400명 정도가 있었으나, 해방 후 조선족 사회에서 불교는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유교의 경우, 1934년 연변일대 유학신봉자는 1만 7천 명 정도였으며, 천도교 시천교 청림교 대종교 원종교 등 민족종교가 활동했고, 1932년 천도교도는 약 4천 명 가량 되었으며, 시천교 청림교 등이 존재했는데 청림교는 유불도가 포함된 종교로서 반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청림교는 1944년 룡정 서쪽 비암산 비밀집회 때 반일봉기 집회를 하다가 일본헌병의 습격을 받고 600명이 체포되었고, 상층골간들이 사형된 후, 자취를 감췄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에는 가슴이 아팠다. 대종교는 한때 상당한 세력을 형성 1만 5천 명 정도가 활동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서 조선족이라는 디아스포라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면서, 빵디 민박 주인 고상기 씨에 대해서 관심이 갔다. 일제 때 할아버지 대에 충남 부여 근방에서 길림성 장춘근방으로 이주해 왔었는데, 그때 고 상기 씨 아버지의 나이가 9세였다고 한다. 고 상기 씨는 장춘 지역에서 성장을 했고, 다행이 한국과의 수교로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10여 년 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부지런히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이곳에 아파트를 마련해서 빵디 민박집을 10여년 전부터 운영, 심양을 찾는 한국 분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숙식만큼 중요한 것 또한 없다고 본다. 그리고 편안함을 느끼면서 편리하고 아늑한 휴식 공간이어야 하고 주인의 친절함과 주변 사정에 대한 정보 제공도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빵디 민박은 이런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딸 둘인데, 자신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자식 농사는 잘 지어서 딸 하나는 교수 생활을 할 정도로 성공한 중산층 조선족으로서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나면 커피 타임을 하면서 이런저런 화제로 담소를 나눴던 시간이 추억으로 남았다. 심양을 찾을 기회가 있는 분들은 서탑가의 조선족(한국) 타운에 있는 빵디 민박에서 휴식을 취해 보는 기회를 가지시기를 권한다.
코리아 타운 에서 며칠 쉬면서 독서와 심양 시내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심양은 중국말로는 선양(沈陽)이라고 발음한다. 중국 랴오닝 성의 성도로서, 둥베이 3성에서 제일 큰 도시이며 경제, 문화, 교통, 군사의 중심지라고 한다. 국가역사문화명성(國家歷史文化名城)에 선정된 관광 도시로, 만주족은 묵던(Mukden)이라고 부르고, 유럽 사람들에게도 만주족은 묵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선양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심수지양(沈水之阳)에서 유래된다고 하는데 7200년에 이르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으며, 17세기 초반,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만주족의 누르하치는 선양을 점령하고 1625년 후금의 수도로 정했다고 한다. 1634년에는 성경(盛京)(만주어: 묵던)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청나라로 이름을 고친 후금은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국을 점령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변경하지만, 선양은 제2의 수도 대접을 받아 1657년에는 봉천부라고 명명되었고, 형식적이나마 중앙정부에 준거한 관제를 행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시내에는 그 때의 황궁·선양고궁이 남아 있다.
선양은 36개의 소수 민족이 거주하며 한족이 91.26%를 차지한다. 36개의 소수 민족은 만주족 (满族), 조선족{朝鲜族), 후이족 (回族), 시버족 (锡伯族), 몽골족 (蒙古族) 등이 거주하고 있다. 심양에서 며칠 쉬면서 시내관광을 하고 서탑 거리에 있는 신화서점에 가서 조선족에 관한 책도 사고, 다른 거리에 있는 서점에서는 이것저것 필요한 서적을 구입해서 독서도 하고 조선족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강원불교대학장
WFB 세계불교대학 집행이사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매일종교신문 기고가
땅끝어룡도해수관세음보살도량
당제산 여의암 회주
다나TV 영어금강경 강의
세계불교 TV에서 ‘세계불교를 가다’ 소개
( www.haedongacadem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