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민족 사찰 소개 >
2000년 첫번째 유엔 웨삭 법회
글 | 최숙희
5월은 불교국가의 연중행사 중 가장 큰 츳제의 달이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북 아시아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석가탄신일로 하여 전국의 모든 사찰이 법요식을 봉행하고 제등행렬을 하며, 스리랑카, 버마, 태국 등의 남방 아시아국에서는 5월 보름을 ‘웨삭(Vesak)'이라 하여 부처님의 탄신, 성도, 입멸을 기억하고 성지를 순례하며 축하행렬을 이룬다.
2000년 5월 15일 오후 세시 뉴욕시 유엔본부의 대르 햄마숄드 도서관(Dag Hammarskhold Library) 건물의 소강당에서 거행된 웨삭국제기념일(International Day of Observance) 행사는 지금까지 불교 안에서만 소극적으로 이루어졌거나 불교국가에서 자국적인 행사로서만 이루어졌던 석가 탄신일을 공식적인 국제기념일로 선포하여 세계화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각 불교국들이 자국의 문화적 배경에 바탕하여 각각 다른 날짜에 지켜 온 연중행사를 범 국가적인 행사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하겠다.
약 200명을 수용하는 소강당을 꽉 채운 이날 행사는 스리랑카 정부와 승가의 공동 주최로 행해졌으며, 스리랑카 대사를 위시하여, 쟈아코디 불교장관, 캄보디아, 인도, 태국, 아일랜드, 라오스, 스페인, 노르웨이 대사들이 참석하였고,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스리랑카, 버마, 태국, 라오스, 네팔, 방글라데쉬, 캄보디아의 스님들이 이 의식에 동참해 주셨다. 한국측에서는 뉴욕에 거주하는 현 사암연합회 회장 마하선원 서천스님, 불광선원 주지 휘광스님과 하림스님, 조계사 묘지스님, 워싱턴 세계사의 보화스님이 이 자리를 빛내주셨다.
2500년 불교의 역사가 드디어 전세계를 대표하는 유엔의 행사로 새 역사를 만들어 낸 이날의 의식은 등불점화로 시작되었다. 스리랑카 어린이들의 노래소리를 배경으로, 약 5피이트 길이의 황동 램프에 각국의 대사들이 한 분 한 분 차례대로 불을 붙였다. 이어서 스리랑카 피야티사(Piyatissa)스님께서 삼귀의와 독송으로 예불의식을 진행하고 이날의 법문을 하셨다. 이어서 스리랑카 대통령(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유엔사무총장 코피 아난, 그리고 스리랑카 외무장관의 축사가 스리랑카 유엔대사에 의해 대독되었다. 또한 태국 유엔 대사 라오하판(Laxanchantorn Laohaphan) 여사가 태국의 불교발전사 및 태국 국민에 끼치는 불교의 영향을 중심으로 축하연설을 하였고, 이어서 역사적인 이날이 있기까지의 간단한 역사 및 이 행사가 유엔 및 전 인류에게 주는 깊은 의미에 대한 자야코디(Lakshman Jayakody) 장관의 연설이 있었다. 자야코디 장관은 스리랑카 불교법 담당 장관이다. 많은 축사들에 이은 이날의 기조연설은 세계적으로 존경받고 있는 브르클린 태생 미국 스님 비쿠보디 박사(Dr. Bhikkhu Bodhi)에게 주어졌다. 비쿠 보디 스님은 거의 한 시간에 걸친 진지한 설법으로 이 날 행사를 있게 해 주었다.
피야티사 스님은 2000년 5월 15일이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웨삭을 종교휴일로 인정한 날임을 강조하시며 또한 이날을 만든 것은 스리랑카임을 함께 강조하셨다. 스리랑카에 기록 된 첫 웨삭은 기원 전 1세기 두두다무누(Dududamunu of Anuradhibura)왕 통치시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년 동안의 두두다무누 왕 통치 동안 24회의 웨삭 행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바라크라마바 후(Barakrama Bahu)왕, 바비자야바후(Vavijayabahu)왕, 바디아(Bhadiya)왕을 거치며 웨삭은 전국적인 웅장한 행사로 발전했다. 근대에 와서 웨삭이 다시 큰 행사로 살아난 것은 1880년 영국 통치하에서였다. 당시 스리랑카에 머물고 있던 미 육군대령 출신 헨리 스띠일 올콧(Henry Steel Olcott)은 영국 정부의 허락을 얻어 내어 웨삭을 국가 공휴일로 정하고,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루었다.
불교가 처음으로 미국에 상륙한 것은 테라비다(Theravada) 부파불교 스리랑카의 아나다리까 달마팔라(Anadarika Dharmapala)가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 (World Parliament of Religion) 에 참석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190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최초의 웨삭 집회가 열렸다. 그 후 약 백년이 지난 이번 2000년 5월 15일 유엔행사는 불교의 휴일이 비불교국가에 의해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또 하나의 전무후무한 큰 역사적 획을 그었다고 하겠다.
이번의 유엔 역사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뉴욕에 거주하시며 불사를 하고 계신 피아키나 스님의 큰 서원과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스리랑카 정부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웨삭을 유엔의 공휴일로 제정하고자 피아티사 스님을 위시한 불교지도자들이 모여 처음 제의문을 작성한 것은 1995년이었다. 이 제의문은 클리턴 대통령, 당시의 뉴욕 주지사에게 전달되었다. 1998년 11월 9일에서 14일에 걸쳐 콜롬보에서 열렸던 국제불교회의에 피아티사 스님은 이 건의를 다시 상정하였다. 이 회에서 상정된 17가지 건의안 중 제일 첫 번째가 웨삭을 유엔의 공휴일로 제정하는 것이었다.
자야코디 장관은 당시에 상정되었던 건의안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
“5월 보름 웨싹은 유엔의 공휴일로 선포될 것이다. 부처님의 탄신 성도, 입멸의 날인 웨삭은 5월 보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 인류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바른 길과 영감을 가져다준다. 이 위대한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를 존경하는 한 표시로 유엔이 5월 보름 웨삭을 공휴일로 제정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으로 성사를 위해 추진할 것이다. 이를 계기로 스리랑카 정부는 다른 우방국과 더불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1999년 12월 13일, 54회 유엔 총회에서 웨삭의 날 5월 15일이 유엔본부 및 유엔에 근무하는 관리들의 공휴일로 만장일치 승인, 공포되었다.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스리랑카 외무장관은 특히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대표와 유대를 갖고 일했으며, 불교국가 뿐 아니라 불자가 전혀 없는 국가의 대표들도 이 안건의 승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었다. 적극적으로 협조해 준 국가들을 스리랑카 외무장관은 아래와 같이 나열하고 감사를 보내고 있다. 방그라데쉬, 캄보디아, 칠레, 그리스, 그러나다, 아이슬랜드, 인디아, 인도네시아, 아일런드, 라오스, 몽골리아, 네팔, 니카라구아, 노르웨이, 파키스탄, 필리핀, 포르투칼, 한국, 러시아, 스페인, 수리남, 태국, 터키, 유크레인, 미국 ------
웨삭 공휴일 제정을 위해 유엔이 보여준 적극적인 우호는 이해, 믿음, 타인의 존중으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엔정신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자야 코디 장관은 부처님은 원한이나 분노, 두려움이 없는 침착하고 객관적인 사색을 원하고 계신다는 말로서 그의 인사말을 끝냈다.
특별연사로 초대 된 태국 대사 라오하판 여사는 한 인간의 일생은 시작과 끝이 없고 자비와 사랑이 동반한 좋은 업이 행복과 복지를 불어온다는 부처님의 법으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약 3세기 정도에 태국에 전해진 불교는 마음의 자유를 추구하는 태국인으이 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으며, 태국문화, 특히 건축과 조각, 그림, 문학의 핵심적인 힘이 되고 있다고 했다. 태국은 전 인구의 95%가 불제자이고 이들의 일상생활은 불교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태국에는 약 3만개의 절이 현조하고 있다. 스님들은 사회의 기둥으로서 청정한 계율을 지켜 만인의 높은 존경을 받는다. 또한 사회를 향한 큰 자비심과 불사를 지키는 고도의 지식을 겸하고 있다. 모든 백성이 불교에 자신을 귀의할 수 있도록 이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불교 행사 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젊은이들이들이 21세가 되면 출가하여 스님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관례로 내려오고 있다. 그 기간은 대개 며칠에서 3개월 정도로 본인의 의사에 달여 있다. 이러한 관례는 계급의 귀천과 무관하며, 그래서 현 태국왕도 왕자도 이 관례를 모두 거쳤다. 이는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법을 실현하는 것이며 유엔의 이념과 같이한다. 불교는 마음의 평화를 가르치고 자타가 둘이 아님을 가르친다. 이 또한 국가간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유엔의 이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웨삭 공휴일 선포는 국가간의 이해와 존경을 향하고 있는 유엔에 좋은 영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기조연설을 하게 된 비쿠 보디 스님은 브르클린 태생에 브루클린 대학을 졸업, 클래어몬트 대학에서 서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푸른 눈의 스님이시다.
그는 1972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스리랑카로 출가하시어 그 후 줄곧 승려생활을 하고 계시다. 비쿠 보디 스님은 현재 스리랑카 소개 불교출판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회장으로 계시며 많은 번역과 저서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전 세계 불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이 대표적인 대작으로는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1993), The middle Length Discourses of the Buddha
(1995)가 있다. 또한 인터넷의 BPS를 통해 끊임없이 부처님의 법을 보시하고 계신다. 비쿠보디 스님을 이날의 주조연설자로 채택한 이유는 미국학자로서 스리랑카 스님이 되어 동서양의 경계를 넘는 이 스님과 유엔에서의 웨삭 선포가 이 시기에 가장 적합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피야티사 스님은 설명하였다. 비쿠보디 스님의 설법 중 일부늘 이 글의 끝에 싣도록 하겠다.
이날 행사의 제 2부는 비데오 상영, 불자들의 합창, 독창 춤으로 이루어진 문화공연이었다. 이날의 공연을 무게있고, 화려하게 장식해 준 것은 한국불자들의 참여였다. 피아티사 스님이 이끌고 있는 어린이 일요학교 학생들이 합창에 이어 약 20명의 뉴욕불교연합합창단원들이 홍혜력화님의 반주와 지휘로 아름다운 찬불가를 강당에 채웠다. 합창단원들이 입은 아름다운 한복은 부처님의 법이 스리랑카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에서도 멀마나 그윽히 대승으로 꽃피어 오고 있는지를 한국 음률을 통하여 참석한 모든 이들에 마음속에 펼쳐 나갔다. 고깔을 쓰고, 장삼을 걸친 이명숙씨의 바라가 은은한 독경소리와 더불어 부처님을 기억하며 서원을 드리고 기도드리는 모습에는 천오백년의 한국불교 전통이 쌓여 있었다. 불교는 단순한 믿음의 종교가 아니고 믿음과 더불어 곳곳의 작은 지역에서 인간과 같이하고 그들의 문화와 같이 하고 있다.
새천년 오월, 뉴욕시 유엔에서 만나는 스리랑카의 황동 촛대, 비쿠 보디 스님, 그리고 한복과 바라춤이 함께 시공을 초월하여 앞에 펼쳐 질 때, 부처님은 여래(如來)이시고 응공(應供)이시고, 부처님의 법은 늘상 온우리에 가득함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비쿠 보디
( 중 략)
오늘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
마지막으로 새로운 세기 새 천년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의 이 시대와 관련되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 점은 불교가 철학, 심리학에서 의학, 환경학에 이르는 넓은 분야 전체에 조명을 비추고 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제공하면서, 이런 분야에서 불교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불교를 종교로 삼아야만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공행정에 반영될 수 있는 불법의 원칙을 이제 중점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과학, 기술분야에서 인류가 만든 엄청난 발전에도, 또한 그로인해 우리의 생활환경이 여러모로 극적인 발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제들을 인간 능력안에서 최대한 해결해 보려는 우리의 의도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우리는 여전히 지구촌의 문제들에 당면해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인종간의, 종교간의 대결, 여전히 확산되고 있는 원자력 무기들, 팽개쳐진 인권, 빈부간의 차이, 마약, 여자, 어린이 밀무역, 천연자원의 파괴, 환경의 파괴, 이러한 문제들에 여전히 당면해 있습니다. 불자의 측면에서 이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문제들이 뿌리하고 있는 근원적 특성입니다. 이같이 많은 문제들의 안을 들여다보면, 온갖 문제로서 부각되고 있는 바닥에는 이 문제들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조직을 부패시키고 있는 깊이 감추어진 정신적인 악성 종양이 그것입니다. 이 뿌리는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보다 넓은 인류 사회의 장기적인 이익을 알지 못하는 좁고 단기적인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착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종족에 대한 집착을 포함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회악들은 무엇이 그 배후에서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종종, 배후에서 인간을 조종하는 이 집착 때문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가져옴을 마다하고, 분열되고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하게 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가 이같은 혼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귀중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인간 고통의 심리적 물줄기에 대한 철두철미한 분석입니다. 다음은 그 해결의 방법으로 채택되어 정확하게 그어 나간 도덕적, 정신적 수행의 길입니다. 사회생활이나 개인생활이 만드는 인간 번뇌의 감추어진 요인은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라고 이름지어 진 세 가지 악(惡)이 개인의 고통의 요인이라고 불법은 가르칩니다. 그런데 좀 더 넓혀서 보면 이 세 가지 악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고통의 요인도 되고 있습니다. 욕심으로 인하여 세상은 세계시장으로 변하여 인간은 소비자로, 심지어 소비품으로까지 축소되었고, 우주의 생명을 생성하고 있는 천연자원들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은 채 약탈당하고 있습니다. 분노로 인하여 국가와 종족들은 반목과 적대심의 피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끝없는 폭력과 복수의 윤회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욕심과 분노로 인하여 발생된 행위들을 정당화시키고 잘못된 믿음과 정치적인 이상을 만들게 합니다.
현대에 널리 퍼져 있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부정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정책의 변화가 필요한 반면, 단순한 정책, 구조상의 변화만으로는 진정한 평화와 사회안정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불자의 입장에서 말하건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타인이 근본적으로 나와 다르지 않다는 새로운 인식, 세계의식(Universal consciousmess)을 갖는 것입니다. 쉬운 것은 아니지만, 고집스레 부르는 이기심의 소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큰 전체의 이익이 중요해지는 세계의식으로 승화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현재 빠져있는 자기중심적, 민족주의적 태도에서 성장하여 모든 인간의 행복을 우선하는 “세계중심적 윤리(World centric ethic)'를 포용해야 합니다.
이 같은 세계중심적 윤리는 삼악(三惡)의 뿌리를 치료하는 세가지 지표위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1)우리는 인류 전체에 입각한 자비, 보시, 협동으로 탐욕을 극복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친절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정책으로 미음과 복수를 대체해야 합니다.
(3)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함께 의지하고 함께 섞여 짜여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어느 한 곳의 무책임한 행위는 세계 전체에 진동할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인색해야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바탕한 이 세가지 지표는 지구촌 윤리의 핵심이 될 수 있고, 이 세계의 모든 종교가 채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윤리는 우리 개개인이 개인의 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노력해야 하는 마음의 태도로서 이루어집니다. 그 주된 것이 자애와 자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행복하고자 하는 만큼 우리의 이웃도 마찬가지로 행복을 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비심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슬픔과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와 타인이 함께 하고 있는 이 두 가지 마음을 이해하면 우리는 타인에게서 받고 싶은 것은 타인에게 줄 수가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생활 뿐 아니라 공동체 입지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타 공동체와 비슷하며, 내가 속한 공동체가 얻고자하는 복지를 그들도 얻고자 함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세계중심적 윤리가 이상적인 윤리관이나 소망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확고한 실천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요구합니다. 결국, 점점 번져가는 다민족 세계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참된 거시적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회를 붕괴시키고 생태계를 황폐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자리잡고 있는 이 나뭇가지를 자르는 것이 됩니다. 전체의 복지를 향해 개인의 이익추구에서 벗어남은 결국 우리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회간의 화목, 정당한 경제, 환경유지에 달려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 중에 선과 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힘은 마음이라 말씀하십니다. 인간과 국가간의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평화와 착한 마음으로부터 자랍니다. 이 평화는 물질문명의 진보, 경제 발전, 기술 발명으로만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평화와 우호를 향하여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변화로서만 가능합니다. 이는, 점점 작아지는 이 우주에서 인류가 평화롭게 함께 살기 위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이기는 것임을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이 시대가 부르고 있는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아직 불교를 신봉할 준비가 않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고통에 내재하고 있는 정신적 번뇌를 진단할 때, 붓다의 가르침은 개인적 집단적 문제의 숨은 근원을 보여줍니다. 불법은, 윤리적 정신적 실천수행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우리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한곳- 자신의 마음에서 찾도록 보여줍니다. 이제 새 천년에 들어서서, 붓다의 가르침은 종교의 차이를 뛰어 넘어,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세계를 보다 평화롭고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지침을 펼쳐주십니다.
2000년 6월호 통권 120호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