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몽골불교탐방기 (10)
아시아불교평화회의
아시아 불교도들의 국제기구: 본부 몽골 울란바타르
글 |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강원불교대학장
WFB 세계불교대학 집행이사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매일종교신문 기고가
땅끝어룡도해수관세음보살도량
당제산 여의암 회주
다나TV 영어금강경 강의
세계불교 TV에서 ‘세계불교를 가다’ 소개
(www.haedongacademy.org)
몽골은 지금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특히 불교는 오랜 잠에서 깨어 난지가 30여년 쯤 되어 가고 있다. 몽골 전역에는 수 백 개의 사원과 수천 명의 라마들이 활동하고 있다. 몽골불교는 뜻하지 않게 공산주의의 희생타가 되었다. 근.현대 몽골과 몽골불교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소련혁명을 이해해야 이야기가 술술 쉽게 풀린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대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에 이어 10월에도 제2단계 혁명인 10월 혁명 즉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과격주의자, 혁명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혁명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의한 20세기 최초이면서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바로 볼셰비키 혁명이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이론가들의 대표주자격인 레닌이 주도한 혁명이 아닌, 민중들의 혁명이었다. 레닌 스스로도 말하기를 "혁명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고 한다.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을 붕괴시키고 공화국을 탄생시킨 2월 혁명에 이은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10월 혁명에서는 2월 혁명으로 출범한 입헌민주당(카데트) 주도의 임시정부가 쓰러지고 임시정부와 병존하고 있던 볼셰비키 중심의 소비에트(노동자, 농민, 군인위원회)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것에 이어 러시아 내전( 1917-1922 )이 일어나, 결국 1922년에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탄생한다. 이쯤해서 다시 몽골로 돌아가 보자.
몽골혁명가들은 자치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몽골 불교 최고 지도자인 복드 칸(1869년~1924년)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는 1911년 12월 29일에서 1919년 12월 29일까지 몽골 황제로 재위하였고 1919년 12월 29일에서 1921년 12월 29일까지 몽골 국가원수로 재임하였으며 1921년 12월 29일에서 1924년 5월 20일을 기하여 병사할 때까지 몽골 국가주석을 역임하였다. 지금도 울란바타르 시내에는 복드 칸이 머물렀던 왕궁박물관이 있고, 몽골을 찾는 관광객들은 필수 코스로 이곳을 들른다.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몽골불교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지리적으로는 동아시아에 속하지만, 종교적으로는 티베트의 금강승(밀교) 불교권에 속한다. 자연스럽게 티베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티베트 불교는 정신적 지도자의 서열이 달라이 라마, 판첸라마, 복드 칸 순으로 되어 있으며, 각 사원에는 법맥을 잇는 전세(轉世)에 의한 린뽀체와 뚤꾸가 있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전세(轉世)하여 현재 달라이 라마는 제 14대에 이르고 있으며, 판첸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10대 판첸라마가 1989년에 입적하고 11대는 두 명의 판첸라마가 존재한다.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판첸라마와 중국정부에서 지명한 판첸라마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평화운동에 공헌, 새 전기 맞아
아시아 불교평화회의는 그동안 다소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본부가 몽골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몽골은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자각에서 11차 아시아평화회의 총회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여 개최했다.
필자는 거의 30년 동안 몽골을 왕래하고 있다. 한국불교인으로서는 최초인물가운데 선두에 속한다. 이런 인연으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 것이다. 국제 불교 관계란 꾸준하게 활동해야 지속성이 있게 된다. 개인이나 소규모의 단체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결실을 맺게 된다. 창립은 몽골불교에서 스타트를 끊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1969년에 창립해서 1차 총회를 1970년에 갖고 세계에 선포했다.
아시아불교평화회의의 상징이었던 엠블렘은 가운데에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있었으나 이것은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해서 없애고 불법승 삼보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바꿨다.
당시 아시아불교평화회의 창립에 참여한 나라는 몽골 스리랑카 러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등 공산 사화주의 국가가 앞장섰다. 특히 스리랑카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북한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참가했다. 대한민국은 1970년이라면 자유진영이었고, 몽골과는 어떤 외교적 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몽골이 개방하면서부터 필자가 가입을 한 것이다.
몽골불교는 공산정권 아래서는 상당한 시련을 겪었다. 이 국제회의 참가기 시리즈 1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몽골불교역사에서 20세기는 그야말로 엄청난 시련기였다. 1920년대 공산국가가 되면서 몽골은 가시밭길로 들어서게 된다.
몽골불교의 국제성과 리더십
몽골불교는 티베트 전통을 따르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 대승불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한국불교가 동아시아불교 전통에 속하기 때문에 티베트-몽골 불교 전통인 금강승(바즈라야나) 밀교에는 친밀감이 덜하다. 그래서인지 티베트-몽골 불교를 낯설게 보지만, 인도 불교사를 관통할 때, 후기 대승불교는 매우 중요한 마디였다. 티베트 불교는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신봉되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중국령 티베트와 네팔과 몽골에서 대표 주류적인 종교이면서 불교종파이다. 티베트 불교가 대승불교에 속하지만 중국에 전해진 한전불교(漢傳佛敎)와는 다르다. 더욱이 선종불교와는 또 다른 전통이다. 티베트-몽골불교는 종교적 스승인 라마를 중시한다고 하여 라마교라고도 불린다. 티베트 불교는 전통이 전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티베트에는 고유의 민속종교인 본교(Bön)가 있었다. 우리 같으면 민속 종교이다. 티베트 왕은 불교에 기반한 통치를 위해 티베트의 국왕이 직접 인도에서 부터 후기 대승불교를 도입했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의 직계가 되었다. 티베트의 불교의 도입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의 경전을 올바르게 번역할 수 있도록 티베트 문자가 새로 만들어 졌는데, 이 때문에 티베트어 경전은 멸실된 산스크리트어 경전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 본토와 히말라야 권인 부탄, 라닥, 시킴, 중국령 티베트, 몽골을 비롯해서 러시아 시베리아 울란우데와 투바, 흑해연안의 칼미크 지역이 티베트 불교권이다. 최근에는 인도나 서구에도 티베트 불교는 확장되어 있다. 티베트 불교는 닝마파·사캬파·까귀파·까담파·겔룩파·조낭파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