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36년간의 대장정을 마치면서
미주한국불교 역사를 기록하고, 미국 주류사회 불교 현상을 소개하며
스님 초청행사와 한국불교문화 행사를 통해
미주한국불교계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던 36년의 여정
글 덕광 김형근(德光 金 詗 根) -본지 편집인
미주한국불교 초창기 모습
미국불교는 1844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최근 미국불교사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미국에 본격적인 불
교시작은 1950년대 비트세대를 거쳐 1960년대에 히피 세대들에 의해서였다. 오늘날의 MZ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선 수행에 매료 되면서 샌프란시스코 선원에서 부터 촉발된 선불교는 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불교인들은 1964년 서경보스님의 도미를 시작으로 1967년에 삼우스님, 1969년에 박성배 교수, 이장수 법사, 1970년 고성스님, 1971년 이한상 거사, 1972년 숭산스님과 정달스님, 1973년 법안스님, 1975년 기대원, 도안스님, 1976년 광옥스님이 카나다로 입국하는 등 미주한국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이 스님들이 본격적으로 도착하는 1970년대에 미국사회는 불교 바람이 태풍처럼 불던 시기였다. 하지만 미주한인사회는 미국 주류 사회의 영성 방향을 전혀 알지 못했고, 정반대로 기독교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인사회가 이렇게 흘러간 것은 막 미국 땅에 도착한 이민자들이 미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 종교기관이 필요했고, 여기에 교회와 목사 숫자가 사찰과 스님 숫자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숫자도 많았고 교회 목사들 중에는 미국 입국도 빨라서 영어도 잘하고 미국사회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주한국불교계는 삼우, 고성, 숭산, 정달, 법안, 대원, 도안, 광옥 스님과 이장수 법사 등에 의해 로스 엔젤레스, 뉴욕, 시카고, 하와이, 워싱턴 DC와 카나다 토론토 등 미주 주요도시에 한국 사찰들이 설립되어, 불교인 이민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1976년까지에는 미국과 카나다의 중요 도시에 한국사찰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 사찰들은 창건된 이후에 별 문제가 없으면 10년 정도 지나면 큰 규모의 자체 건물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와이 대원사, LA 관음사, 뉴욕 원각사, 시카고 불타사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사찰들의 포교 방향은 대체로 고국을 떠나 온 이민자들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미국생활의 적응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수행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삼우스님과 숭산스님이 포교하는 미국인들은 선 수행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불교 선 수행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동양에서 스님이 왔다고 하면 떼를 지어 몰려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양인들에게 포교 경험이 전혀 없는 삼우스님과 숭산스님의 미국인 포교는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진행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인지라 왜 이런 현상인지는 본인들도 잘 몰랐고 한인사회에서 그 누구도 이런 현상에 대한 진단을 못했다. 미국사회의 불교 열풍의 원인에 대해서 불을 붙인 스즈키 순륜 스님을 비롯해서 당시 활동했던 대부분 스님들은 그 현상속에서 활동을 했지만 기독교 국가 미국사회속에서 왜 이들이 사찰에 몰려오는지 역사적인 원인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스즈키 스님도 원래 미국인 포교를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일본인이 신도인 샌프란시스코 조동종 사찰의 주지로 왔다. 그러나 1970년에 미국에 들어온 영리한 쵸감 트룽파 린포체는 당시 이 현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불교계 인사중에서 미국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은 1969년 입국하여 버클리대학교에서 박사를 받은박성배 교수와 1973년 입국하여 1988년 뉴욕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법안스님 등이다. 나는20년 이상 오래 기간에 걸쳐 박성배 교수의 강의를 원각사를 비롯하여 뉴욕에서 많이 들었다. 그리고 원각사에서 법안스님을 모시고 회보 ‘원각’을 2년여 동안 만들었다. 그러나 이 분들에게서 미국주류사회 불교 현황에 대해서 들은 것이 별로 없다. 박 교수는 가끔 만불사 선화스님 이야기를 했다. 숭산스님은 자서전인 ‘천강에 비친 달’에서 ‘히피사상’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한 후에 “그때 젊은이들은 30세 이상 기성세대를 모두 믿지 않았다.히피사상은 인생의 타락을 불러 일으켜서 본질을 잃고 말았다.”고 평가절하 한 후에 “그래서 선이 차차 부각이 되기 시작했다. 선을 해야만 진리를 알고 그래서 선을 해야만 올바로 살 것이다”라고 선사로서 선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했다. 하지만 1950년대 비트시대로 부터 시작되고 1960년대 히피세대들에 의해 폭발한 미국역사 속에서의 선불교 유행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미주현대불교의 창간 배경
이민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이에 비례하여 한인 불교계의 사찰 수도 증가하고, 불교인 숫자도 늘어났다. 한국에서 미국에 오려는 스님들도 매우 많았다. 이에 따라 언론에 대한 시도도 있었지만 발행된 신문들이 언론으로서 역할이 미미했기 때문에 수명이 짧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당시 맨하탄 뉴욕 원각사에서 법안스님 일을 도우면서 원각사에서 살고 있었다. 불교에 매료되어 불교와 인연을 깊게 계속하고 싶어서 법안스님께 불교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의견을 내자, 스님께서는 크게 찬성하고 나섰고, 기금 모금을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법안스님은 1988년 중풍으로 쓰려졌기 때문에 기금 모금 행사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의 법장스님(현 필라화엄사 주지), 선우스님(현재 남양주 보광사 주지), 곽종진 거사(현재 남가주 거주, 초대 미주현대불교 발행인) 등의 도움을 받아서 뉴욕에서 격월간 잡지로 1989년 10월에 출발하였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일반화 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원고지에 보내 온 글을 식자기로 찍던 시절이다. 그래서 원고를 모아서 한국으로 우편으로 보내서 한국에서 제작하여 비행기로 잡지를 실어 와서 배포하기를 3번 하였다. 그 이후에 1990년 4월호부터 뉴욕에서 제작하였다.
미주현대불교 창간호가 나올 당시 미국 주류사회는 1960년대부터 불교가 태풍처럼 불던 시기였는데 이 바람은 대략 50년간 지속되었다. 최소한 100년은 지속되어야 하는데 50년 정도로 그치고 현재는 마인트플리스(mindfulness)가 성행하고 있는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미국불교가 왜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현상과 합류한 대중들의 숫자에 대한 사실은 본국불교계와 미주한인사회에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미주현대불교의 보도로 이제는 알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지 창간 당시 미주한국불교계에는 많은 이민자들이 오던 시기여서 미국에는 60개 정도의 한국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대략 100개 정도이다.
미주현대불교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미주한국불교언론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스님과 신자들이 필자로 참여하였다. 미주현대불교에 보도되는 타민족 사찰이 소개되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그 기사를 들고 보도된 사찰을 찾아갔다. 당시에 미주한국불교계는 타민족 불교계와 미국 주류사회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주한국불교 현황은 파악이 되었지만 미국 주류사회 불교의 현황과 타민족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서양 불교출판사의 대명사로 알려진 삼발라출판사 샘 버콜즈 당시 사장을 본지 1996년 10월호 인텨뷰 보도를 하면서 그 실마리가 풀렸다.
미국주류사회 불교 보도와 삼발라출판사 사장 샘 버콜즈
당시 삼발라출판사 사무실은 보스톤에 있었다(현재는 콜로라도 볼더). 삼발라 출판사는 불교를 비롯하여, 도교, 요가, 서예, 음식 등 아시아 여러 분야의 책을 발행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샘은 당시 미국불교계의 가장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는 마당발이었고, 가장 많은 최신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삼발라출판사에서 발행된 가장 널리 알려진 미국불교사 책인 ‘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A Narrative history of Buddhism of America.'를 소개받아서 1997년 1월호부터 내 배우자 김지영씨가 번역하여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개는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이 뿐만 아니라 샘은 자기의 스승이었던 초감 트룽파 린포체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포함하여 미국불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우리 부부에게 알려주었다. 트룽파 린포체는 저서가 많은데 그 중에서 버콜즈의 추천으로 삼발라출판사에서 출판된 ‘샴발라 성스런 전사의 길 SHAMBHALA THE SACRED PATH OF THE WARRIOR’를 임진숙씨의 번역으로 연재하였고 한국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이 책은 오랜 동안 미국인들에게 불교 입문서 같은 역할을 한 책이라고 버콜즈가 추천 이유를 말했다.
이렇게 샘 버콜즈로 부터 삼발라센터, 나루빠 대학를 비롯한 미국불교 중요기관과 미국불교계 이해에 중요한 책들을 소개 받았고, 미국불교의 중요행사를 알 수 있었다. 이때부터 미주현대불교는 미국불교와 타민족 불교에 대한 많은 소식을 보도할 수 있었다. 샘은 삼발라출판사의 운영에 대한 것과 베스트 셀러 책 등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우리들의 요청은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그는 미주현대불교 행사에도 여러 번 참석했고, 우리 부부의 초청으로 2002년에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미국 불교사 책 중에서 닉 필드(Rick Fields, 1942-1999)가 쓴 ‘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인데. 이 책에는 한국불교에 대한 소개는 매우 짧다. 이 책은 초판을 개정해서 개정판에 이어 3판까지 나왔다. 저자가 사망한 후에 샘은 우리 부부에게 ‘좀 더 일찍 당신들을 알았다면 한국불교계에 대한 소개를 많이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기회가 사라졌다”고 매우 아쉬워했다.
그는 1968년 서경보 스님에게 받은 계첩 원본을 나에게 주었는데 이 계첩은 범어사 계첩으로 서경보 스님이 약간 수정하여 준 것으로 한국 스님이 서양인에게 준 첫번째 계첩에 해당한다. 이 계첩에는 주미 조계종 선원장(駐美 曹溪宗 禪院長印)이라는 도장도 찍혀있고 1968년 3월 27일 이라는 날짜, 샘 버콜즈 영어 이름과 ‘혜월’이라는 불명과 ‘대한불교 조계종’ 일붕(壹鵬)이라는 서경보 스님의 법호가 선명하게 들어있다. 이것은 한국불교 조계종이 미국인에게 전해졌다는 매우 중요한 징표이다.
인터넷이 활성화 된 이후에는 다음에 설치된 인터넷 카페’미주현대불교‘를 통해 이 소식이 한국에 널리 정해졌다. 미주현대불교 취재 기자들이 직접 현장에 가서 보도한 것을 통해 미주현대불교 구독자들은 대략적인 미국 주류사회의 불교계 현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본국 불교계에도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유트브가 대세인 시대이지만 한때는 다음(daum)이나 네이버에 설치된 ‘카페’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미주현대불교도 2000년대 후반부터 다음에 ‘미주현대불교’이름으로 인터넷 카페를 올려 미주현대불교를 이 곳에 올렸다. 이 작업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어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가고 밥도 먹기 힘든 보스톤 거주 최혜현 보살이 맡아서 담당하였다. 최 보살은 손으로 타이핑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손에 볼펜을 묶어서 그 볼펜으로 타이핑을 하여 자료를 입력하였다. ‘미주현대불교’카페에는 미주불교에 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수행법(위빠사나, 화두, 염불.진언 기도), 초기교리와 초기 경전, 아함, 대승경전, 티베트 불교 등 불교에 관한 엄청난 내용이 올려 있다. 이 모두 최혜현 보살의 노력의 결과이다. 이 자료가 잘 활용되기를 바란다.
본국 스님 초청행사와 문화행사
미주현대불교를 통해 미주 내의 한국불교계의 사찰과 스님, 신행단체와 활동가들이 대부분 보도되었다. 이런 잡지 발행을 통한 활동뿐만 아니라 발행 3년이 되는 1992년부터 본국 불교계에서 도문스님, 청화스님, 법륜스님, 용타스님, 정우스님, 학담스님, 여연, 혜민(아산 인취사), 불승종 설송스님 그리고 2022년 문광스님까지 많은 스님들 초청행사를 뉴욕과 로스 엔젤레스를 중심으로 자주하면서 미국불교계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도문스님은 미국의 많은 스님들이 초청해도 오지 않았던 스님인데, 본지 초청으로 처음으로 1992년 미국에 입국하여, LA, 시카고, 플로리다. 뉴욕 순회법회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하기 위해 또 1997년에 뉴욕에도 오셨다. 그리고 이후에도 꾸준하게 재정 후원을 많이 해 주셨다. 법호와 법명도 스님에게 받았다.
미주현대불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추진한 ‘ 연꽃과 아시아 문화축제’를 비롯하여 사경과 고려불화 소개 등 한국불교문화 소개와 남북불교 교류행사도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활동 뿐 아니라 미주현대불교에서는 불교서적과 불교 용품 사업도 하고, 사찰에 없는 지역의 신도들에게 사찰 달력을 제공을 하고 있다. 연꽃축제는 워싱턴 DC에 있는 미연방수생식물원에서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식물원측과 공동으로 하였다. 본지 사무실은 뉴욕에 있고, 행사 장소는 차로 5시간 가야 하는 워싱턴에 있었다. 이 행사는 뉴욕.뉴저지 지역 불교인들과 워싱턴 지역 불교인들이 힘을 합해서 한 행사다. 이 행사는 단지 연꽃을 보는 행사가 아니었다. 연밭이 있는 공원을 무대 삼아 아시아 불교국가들을 참가시켜서 태국, 캄보디아, 미야만, 라오스, 스리랑카 등 각국 나라의 사람들이 나와 공연을 하고, 공원 곳곳에서는 연꽃 그림그리기, 연등, 연컵, 연모자 함께 만들기, 연차 시연, 부채에 한국화 그리기 등 여러가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우리가 개발한 행사였다. 이 행사는 지금도 이 범위에서 다른 단체에서 하고 있다. 이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행사 진행요원 100명이 필요했다. 공원측에서 60명이 동원되었고, 뉴욕지역에서 15명, 워싱턴 지역에서 25명을 동원되었다. 뉴욕에서 이 행사를 참석하기 위해서는 관광버스로 새벽 6시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뉴욕에서 참가하는 사람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해야 했다.처음에 연밭에 있는 공원에 우리가 연등을 들고 찾아가 시작한 이 연꽃축제는 아시아 불교국가들이 찾아가서 이들이 참가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이 공원이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시아, 흑인, 그리고 백인들이 함께 하는 다민족 축제로 발전하였다.
LA 관음사 도안스님
하와이 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한 성원스님의 관심과 함께 한 행사들
나는 스님이 아니고 신자로서 미주현대불교를 36년 동안 발행하면서 셀 수 없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신자가 운영하기 때문에 스님들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수 많은 스님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중에서 도문, 청화, 보선, 학담, 선우스님 등과는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 잡지때문에 인연을 맺고, 도움을 받은 분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이 많다. 감사를 전해야 할 사람들이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 두 스님을 언급하려고 한다.
삼발라출판사 샘 버콜즈 사장이 미국주류사회 불교계를 연결시켜주었다면, LA 관음사 도안스님과 L.A.웨스트 대학교와 하와이 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한 성원스님은 미주한국불교계에 잡지가 확산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미주한국불교사에서 그 공적이 많은 것으로 평가를 받는 도안스님은 오랜 기간 미주현대불교 이사장 역할을 해 주었다. 뉴욕을 방문할 때는 우리 사무실에도 자주 방문하면서 내 의견을 수용했다. 내가 로스 엔젤레스를 방문하면 항상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미주현대불교에서 추진한 ‘한국불교 미주전법 40주년 기념행사’와 ‘한미불교문화원 추진 사업’등 여러 가지 사업에 흔쾌히 동의하고 참여해 주셨다. 40주년 기념행사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뉴욕에서 열린 준비 모임에도 LA에서 참석하고, 뉴욕 행사가 끝난 다음에는 그 행사를 받아서 로스 엔젤레스에서도 그 행사를 하였다. 100주년이나 50주년 행사도 아닌 40주년 행사를 크게 한 것은 당시 한인사회 분위기와 관계가 있다. 2003년 한인들의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행사가 미주한인사회를 휩쓸고 있었다. 이 중심에 기독교계가 있었다. 개신교에서는 미국의 한인사회 발전에 교회가 중심있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계는 그들의 선전과 행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불교계도 뭔가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낀 나는 2003년 도안스님께 1964년이 서경보스님의 미국 입국이기 때문에 우리도 미주전법 40주년 기념행사를 하자고 설명드렸고, 도안스님은 크게 찬동하고 나섰다. 동부에서는 보수톤 문수사 도범스님이 대회장으로 도와주고, 미주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도안스님이 LA에서 여러 스님들과 신도들이 함께 참가해 주었기 때문에 뉴욕 행사는 캘리포니아, 하와이, 텍사스, 시카고 등 전미주의 불교계가 참석한 행사로 매우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북불교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스님을 2005년 미주현대불교 주최로 실시한 첫 번째 북한사찰순례에 단장으로 모시고 23명이 참가하였다. 매 2년마다 정기적으로 북한사찰순례를 하려고 했으나 2006년 도안 스님의 입적으로 두 번째 사찰순례는 무려 8년 후인 2013년에 하게 되었다. LA한국불교의 구심점이었던 도안스님의 입적으로 LA한국불교계는 침체기로 들어섰다.
사찰순례를 좀더 설명하면 북한에는 개신교 교회와 천주교성당이 많지 않지만, 사찰은 북한 전 지역에 60개 있기 때문에 오직 불교만이 할 수 있었다. 이 행사는, 북한 전역에 있는 사찰을 방문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타종교에서는 매우 부러워한 행사였다. 그래서 시간이 갈 수록 불교인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많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2016년까지 네 번을 하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2017년 북한을 여행 금지구역으로 행정령을 발표한 후에 중단되었다.
성원스님은 1995년 하와이 대원사 초청으로 하와이로 입국하였다. 이 후 하와이 대학교에서 석사를 하고 위스콘신주 주립대학교에서 2002년에 박사를 받았다. 그 후 일본 동경대학교에서 인도철학, 인도 남부의 드레풍사원에서 티베트 불교를 연구하였다. 또 대만 불광사도 방문하여 한달정도 체류하면서 대만불교를 견학하는 기회도 가졌다. 이런 수학과 경험을 바탕으로 LA의 West University, 그리고 하와이대학교와 동부 사우스 켈로라이나 주의 코스탈 켈로라이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렇게 여러 나라의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미국의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면서 미국불교와 세계불교의 현황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나는 성원스님과의 대화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성원스님도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관계로 넓은 미국 불교의 현장을 가보지 못하기 때문에 미주현대불교 기사와 나와 대화를 통해 미국불교 현장을 파악하였다. 본국 불교계에서 성원스님에게 미국불교에 대한 문의를 하면 “미국불교에 대한 정보는 미주현대불교에 문의를 해야 한다. 나는 현장을 방문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성원스님과 나는 대화를 통해 미주한국불교와 미국주류사회 불교를 파악하였는데 성원스님이 미주한국불교계에 대한 글을 쓸때는 필요한 자료를 내가 제공했다. 그리고 성원스님과 내가 의기투합하여 한 행사가 2013년에 뉴욕에서 열린 ‘미주한국불교의 미래를 모색하는 세미나’였다. 이 행사는 발표자들의 글을 모아서 자료집을 만들었다.
미주한국불교 60년 역사상 ‘미주한국불교 미래’에 대한 행사는 이 행사가 유일하다. 그럴듯한 제목으로 행사를 위한 행사도 많다. 그러나 이 행사는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시작된고 60년이 흐르지만 아직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미주한국불교계가 주목할만한 내용이 많이 발표된 매우 의미있는 행사였다. 성원스님은 하와이에서 참가했으며, 일본인으로 하바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버클리 대학교를 거쳐 USC 교수로 있는 미국불교학계에 이름 있는 던컨 월리엄 교수와 북가주에서 본지 편집위원인 송광섭 박사가 연사로 참여하여 발표하였다. 이 행사에서 성원스님은 ‘하와이 일본불교의 토착화 과정과 당면과제: 정토진종 본원사파 하와이 교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였다. 성원스님은 이 발표에서 정토진종의 2대 하와이 교구장으로 32년간 봉직한 이마무라 스님이 동양의 불교를 기독교 사회인 미국 땅에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자세히 발표하여, 정토진종이 어떻게 미국 토착화에 성공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성원스님은 미주한국불교계가 이 정토진종의 토착화 과정에서 참고할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미주한국불교 60년 역사상 ‘미주한국불교 미래’에 대한 행사는 이 행사가 유일하다. 그럴듯한 제목으로 행사를 위한 행사도 많다. 그러나 이 행사는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시작된고 60년이 흐르지만 아직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미주한국불교계가 주목할만한 내용이 많이 발표된 매우 의미있는 행사였다. 성원스님은 하와이에서 참가했으며, 일본인으로 하바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버클리 대학교를 거쳐 USC 교수로 있는 미국불교학계에 이름 있는 던컨 월리엄 교수와 북가주에서 본지 편집위원인 송광섭 박사가 연사로 참여하여 발표하였다. 이 행사에서 성원스님은 ‘하와이 일본불교의 토착화 과정과 당면과제: 정토진종 본원사파 하와이 교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였다. 성원스님은 이 발표에서 정토진종의 2대 하와이 교구장으로 32년간 봉직한 이마무라 스님이 동양의 불교를 기독교 사회인 미국 땅에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자세히 발표하여, 정토진종이 어떻게 미국 토착화에 성공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성원스님은 미주한국불교계가 이 정토진종의 토착화 과정에서 참고할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종간에 아쉬음 표하는 사람들
디지털 시대가 전개되어 소설 미디어의 발달로 종이로 인쇄되는 미주현대불교의 종간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여기저기에 있다. 뉴저지 최종일 박사, 윤여민 교수를 비롯하여 북가주 송광섭 박사, 라스 베가스 이 대덕화 포교사, LA 정정달 법사, 강안서 보살, 조오지아 주 영미 어머니, 뉴욕의 전명국. 전신자 보살님 부부, 조성내 박사, 재임 보살, 커네티컷 주 대연불보정사 대산스님, 콜로라도 주 이인화 보살 등 여러 분들이 횟수를 줄이더라도 계속 발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외에도 아마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잡지 지속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미국에서 종이 잡지 발행은 어렵다. 이미 세상 흐름은 종이 인쇄시대가 지나갔다. 다만 4-5년이라도 연장되기 위해서는 한국불교계에서 발행되는 잡지사와 연대하여 미국불교에 관한 일정한 부분을 할애 받아 소개하는 방법이 있지만,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발송비가 문제이다.
미주현대불교는 단지 잡지 발행만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미주전법 40주년 기념행사’, ‘한국불교 미래를 모색하는 세미나’ 등 전미주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참가하는 행사와 미국불교사에 관한 출판 기념행사, 한국불교문화 알리는 행사등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전미주불교계의 힘을 모아서 할 수 있었던 이런 행사를 할 수 없게 된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미주현대불교는 내가 대표적으로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필자, 후원자, 행사때 도와주는 자원봉사자 등 빙산처럼 보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잡지이기 때문에 취재기자 뿐만 아니라 칼럼을 쓰는 다양한 필자들도 필요했다. 박성배, 조성내, 스텔라 박, 이원익, 이치란, 법현스님, 송광섭 , 홍성미, 홍유경, 윤시내, 제니 김, 정희수 목사님, 임우재, 보리화, 박승한, 한창호, 장은하, 전현자, 테데스코 박사와 부인 임진숙, 김지영, 배경순, (고)강옥구, (고) 최숙희 보살등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오랜동안 미주현대불교에 좋은 글을 써 주었다. 특히 조성내 박사는 30년 동안 글을 투고해 주셨다. 이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36년 동안 잡지가 유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분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고민했던 불교의 가치를 알리는 문제와 사회 속에서 구현 문제
코비드 이후에 뉴저지 시튼 홀 대학교에서 은퇴한 윤여민 교수는 친불교적인 분이다. 그는 한국에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대에 미국에 와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AT&T에서 고위직으로 일하다가 시튼홀 대학교에서 30년 넘게 경제학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50년 가까이 미국인들 속에서 지냈고, 뉴욕 원각사 법안스님과도 가까웠던 윤 교수는 스님도 아니고, 불교학자도 아니지만 매우 놀라운 관찰력으로 내가 깜짝 깜짝 놀라는 발언들을 자주 한다. 그는 “우리가 유불선이라고 하지만 미국인들은 유교나 도교의 종교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오직 불교의 선원만을 미국인들이 만들었다.”라는 말을 윤 교수로 부터 처음 들었다. 그는 또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가진 백인들이 ‘불교’ 때문에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본인 체험과 관찰에 의한 미국 속에서의 ‘불교의 가치’에 관한 의견을 피력 했다.
윤 교수는 또한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 관심이 아주 많고, 이런 문제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많이 생각하는 분이다. 그는 특히 현대 사회의 과생산과 과소비를 크게 걱정하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의 저자로 인간 중심의 불교경제학을 주창한 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Fritz” Schumacher) 교수의 인간 중심의 불교경제학만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강조한다. 슈마허 교수는 뉴욕 콜롬비아대학교 경제학 교수와 미얀마 우느 수상의 경제자문관을 지냈으며 그의 저서는 1973년 출판된 이래 전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윤 교수님과의 대화가 아니더라도 불교잡지를 발행하면서 불교의 가치, 즉 불교가 사회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와 불교가 인간과 사회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고 대중에서 전해야 하는 것을 많이 고민하게 되었지만 36년간 잡지 발행하면서 이것을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수행과 해탈을 매우 중시하는 종교이다. 연기법이 불교의 핵심 사상이지만 현실에서는 이와 다르게 불교계가 세상과 역사속에서 올바른 사회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매우 약하다. 불교에 관심 많은 사람들로 부터 환경문제, 기후문제, 자원고갈, 빈부격차를 비롯하여 지구적인 문제에 대한 불교인들의 글이 잡지에 왜 보이지 않는냐 ? 불교인들은 이런 문제는 관심없고 본인의 해탈 수행만 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또한 태국, 라오스, 미얀마 등 테라바다 불교 지역에 사찰순례를 다니면서 우유와 빵을 들고 이 지역의 빈민 지역을 많이 파고드는 개신교 선교활동을 수 없이 보면서 답답함을 매번 느꼈다.
미래의 과제, 자료 보관과 활용
1989년부터 발행한 미주현대불교 기사는 당시 행사와 사찰 연혁과 개인 활동의 보도를 주로 하였지만, 1969년도부터 시작된 미주한국불교사의 지난 과정을 추적하여 지난 기록도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 과정에서 1960년대부터 미국 땅에서 일어난 많은 사진 자료와 서경보, 숭산, 법안, 대원스님등과 이 한상 거사 등에 관한 귀중한 사진을 비롯하여 엽서, 친필 편지와 서예 작품, 미주한국불교와 관련된 책과 하와이 대원사에서 발행했던 신문을 비롯한 출판물 등 미주한국불교사에 관한 유물을 많이 확보하였다. 그 양이 매우 많다. 또 내가 작성하고 있는 미주한국불교사 연혁도 매우 귀중한 기록이다.
이들과 미주현대불교 잡지를 한 곳에 잘 정리하여 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자료를 정리하여 소설 미디어에 올리고, 단행본으로 출판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절차가 끝난 다음에는 관련있는 장소로 보내거나 그대로 모아 놓고 자료실로 유지할 수도 있다. 미주현대불교 자료를 창고에 쌓아두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자료를 잘 보관하면서 정리하여 활용하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미국과 한국 어느 곳에도 아직까지 장소를 구하지 못했다. 나는 인연되는 장소를 찾아서 자료를 잘 보관하고 정리하면서 돈 안드는 방식으로 소설미디어를 통해 미국불교 현황을 알리고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이런 일과 더불어 나의 경험과 인맥을 통하여 한국의 ‘한국불교영어번역연구원’ 전옥배 원장님과 함께 한국불교에 관한 영어 번역 책을 미국에서 출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한국불교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하는 불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